Johannes Kepler: The First Astronomer and
The Last Astrologer with Laws of Planetary Motion
천동설, geocentrism.. 지구 중심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원의 궤적으로 공전한다는 가설이고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제시하여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립하지만 현재는 폐기됐어요.
지동설, heliocentrism.. 태양 중심설은 지구를 포함한 천체의
운동이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지구도 공전하는 천체에
불과하다는 가설이고 오늘날 널리 실증된 정설이고 진리에요.
지동설이 진실이 된 데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부터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까지
현대인이 흔히 아는 학자들의 계보가 뒷받침이 되었어요.
의외로 프톨레마이오스 전에 지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타코스
Aristarchus of Samos.. 란 학자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얻은
계산치가 요즘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기준에도 오차가 너무 크단
판단이 다수였던지라 인정 못 받고 오랫동안 묻힐 수밖에 없었죠.
현대인 여러분, 천동설을 만만하게 보면 곤란해요. 중세 유럽
지식인들의 과학 상식에 관해 쓸데없는 현대적 미신이 넓게 퍼져
있죠. 그들 대부분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었다느니, 성경 말씀에
반한다는 이유로 교회가 지동설을 무조건 박해했다느니, 천동설은
과학과 상관없는 성직자들만이 맹신하였다느니 등등…
역사의 진실은 이와 달라요. 생활하느라 고단한 평민이면 몰라도
대부분의 교회 지식인들에게 지구가 구체임은 상식이었고,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앞뒤 재지 않고 무식하게 지동설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며, 지동설을 맹렬히 공격한 쪽은 가톨릭 성직자보다는
기존 천동설을 신봉한 당시 반대편 과학자 집단이었어요.
중세 사회에 행정, 교육, 연구, 복지 기능을 제공한 국정 관리
대행 시스템으로서의 가톨릭 교회는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치되
지동설의 가능성도 열어두는 등 의외로 개방적이었어요.
오늘날 현대인의 일반적 편견과는 몇 광년쯤 차이나죠.
중세 유럽의 성직자들에게도 종교는 종교인의 문제, 과학은
과학자의 문제로 엄격하게 구별되니 자신들이 과학의 문제를
함부로 재단할 자격이 안 된다는, 기본적인 개념은 있었답니다.
그들이 천동설을 보편적 정설로 교육한 이유는 간단명료해요.
중세인의 과학적 지식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그 당시 기술로
증명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진실이 천동설이었기 때문이죠.
이말인즉슨 당시 사회의 평균적 상식과 믿음을 대변해야 할 책임이
국정 체제를 대행한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 내부적으로는
천동설과 지동설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열어놓고 연구했음에도)
대중에 설파하는 내용은 보편적인 천동설일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이쯤 읽으시고.. 얘 개독이구나.. 창조 과학 믿나보다.. 하시는
분들 있을 텐데, 현대인이 잘못 믿고 있을지 모를 역사의 편견을
경계하자는 것 뿐이며 모든 주장은 과학사의 근거가 있다고요.
또한 본 블로거, 불교 믿습니다요.ㅎ
여기까지 이해하셨으면 하나의 중간 결론에 도달하셨을 텐데…
네, 그 당시 사람들은 종교에 기반한 맹목적 믿음으로 천동설을
추종한 것이 결코 아니에요. 그들 나름 최선의 결과로 얻은 측정
값에 의해 입증 가능한 가설이 바로 천동설이었으니까 믿은 거죠.
심지어 그 측정치는 프톨레마이오스 때부터 문헌에 등장해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지구의 외형 규격을 오차 범위로 근접시켜
이미 계산했던 것 아시죠.
중세에 자연 철학(지금의 과학) 연구는 주로 수도원에서 행했는데
그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당시로서 가장 발달한 측정 기술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수백 년간 실증한 겁니다. 이런 반복
실험과 관측의 결과로 천동설에 대한 믿음이 쌓인 거에요.
그들이 얻은 관측 값은 당시로서는 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정확했어요. 단지 문제는… 천체 현상이란 것이 중세의
계산 능력으로 감당 못할 만큼 거대한 수치나 세밀한 오차를
요한다는 사실 뿐..
즉, 그들은 그들대로 최선의 값을 얻었지만 그 값의 오차가
중세인의 상상보다 훨씬 어마어마했던 거죠. 현대적 컴퓨터라면
쉽게 잡아낼 수 있겠지만. 희한하게도 부정확한 값이 천동설의
가정에는 더 잘 부합하는 결과가 나왔다니 믿을 수밖에요.
그렇게 깊고 두껍게 굳은 믿음에 처음으로 균열을 가한 일대
사건이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1532년에 완성하여
죽기 직전 1543년에 출간한 저서 천구회전론의 출현이었어요.
코페르니쿠스가 20대 시절에 볼로냐, 로마, 파도바 등지에서
유학을 했거든요. 이때 전술한 아리스타코스의 문헌을 접해요.
하지만 그의 가설은 단순히 직관에 의존한 것일 뿐 실험이나
관측을 통한 것이 아닌지라 그닥 과학적이지는 못했죠.
(지식인 사회를 술렁이게 할 정도 역할은 했어요.)
이 무렵 덴마크에 티코 브라헤라는 점성술사 겸 천문학자가
활동했는데 점성술로 몇 가지 사건을 예측한 당시 스타였어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의 배려로 작은 섬에 대형 천문대를
갖추고 오랜 세월 엄청난 관측 데이터를 남겼는데요.
정작 이 데이터로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은 프라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점성술사로 살아가던 천체 역학 분야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였어요.
케플러는 지동설의 진정한 진일보를 가져온 사람이라 할 만해요.
브라헤의 천문대 조수로 잠시 일했던 그는 물려받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행성
천체의 궤도가 타원형을 그린다는 대원리, 케플러의 법칙을
1609년 저서 신천문학을 통해 발표하는 업적을 거두죠.
과학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 보셨죠. 심지어 공식도 기억날 걸요.
케플러의 법칙은 세 가지인데 행성이 타원형 궤도로 공전한다는
것, 태양에 가까울 때와 멀 때 공전 속도가 다르다는 것, 공전
주기의 제곱이 궤도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에요.
제1법칙이 신천문학을 통해 공개가 되고 큰 파장을 몰고 와요.
(근데 놀랍게도 1법칙을 2법칙 후에 발견했다고도 하네요.)
제2법칙은 다른 표현이 있어요. 타원 장반경과 단반경 각각
구간에서 공전 속도는 서로 다르지만 동일 시간 내 이동한
궤적으로 생긴 부채꼴의 면적은 서로 같다는 법칙이에요.
아마 이 내용으로 외운 분이 더 많을 걸요. (아래 그림)
고등학교 때 제3법칙을 공식으로 달달 외우신 분들이 꽤
많을 거에요. 이건 1619년에 세계의 조화라는 책 말미에
별도로 발표되었죠. 복잡하니 공식은 아래에…
자연 철학의 사변, 말싸움에만 머물던 천문학의 연구 방법이
케플러를 만나 비로소 수리 물리학으로 발전한 거에요. 그를
천체 역학의 창시자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후대의 뉴턴 역학 공식은 사실 케플러의 법칙을 직접 계승하거나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고찰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죠.
꽤 유능한 점성술사였다고도 하니 역사가들이 그를 가리켜
‘마지막 점성술사이자 동시에 최초의 천문학자’라고 부른다죠.
17세기초 처음 등장한 망원경을 개량한 기술자이기도 해요.
망원경 개량과 천문 토론은 멀리 피렌체에 살던 한 수학자 겸
군사 기술자와 서신 교환의 방법으로 열심히 했는데, 그가
바로 동시대에 살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였어요.
갈릴레이는 사실 수학자로서 미적분 발전에 한 획을 그었고
그 결과를 포병 기술 등 군사 분야에 활용했으며 몇몇 저명한
물리학 실험으로 훗날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다가 유능한 관측
천문학자로서 갈릴레이 위성을 발견한 업적이 매우 훌륭해요.
그러나 지동설의 발전 역사에서 천문 원리를 천체 물리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갈릴레이라는 오해를 가끔 받아요. 그 업적은
케플러의 공이죠. 우린 이미 교과서에서 제3법칙을 만났쟎아요.
갈릴레이를 지동설의 유명 인사로 만든 건 아마도 우르바노 8세
교황일 걸요. 갈릴레이는 1632년 천문대화를 출간하며 교황청
검열까지 통과한 상황이었지만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아 이단
심판을 위한 종교 재판정에 회부될 수밖에 없었어요.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와 친분도 있거니와 교황청은 원래
그에게 호의적이었는데 하필 30년 전쟁으로 종교 전쟁이
정점을 찍던 때인지라 극우 가톨릭 인사들의 공격이
이어지니 재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어요.
세간에선 이 사건이 길이길이 알려지며 갈릴레이를 지동설의
순교자처럼 인식하지만… 사실 고문이나 물리적 박해를 받은
것도 아니고 다소 불편하긴 해도 말년에 잘 살다 가셨어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정말 한 말인지 절대 알 수 없고요.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며 아이작 뉴턴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연루된 지동설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단순히 지구가 움직인다는 차원을 벗어나 천체 전체의 역학
원리를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으로 승화하여 고전 물리학과
뉴턴 역학의 체계를 완성하게 되요.
중력의 법칙을 세우며 케플러가 경험적 사유를 통해 획득한
원리를 계승하고 상위 차원으로 발전시킨 작업인 것이죠.
이로써 인류는 수천 년을 이어온 천동설을 폐기하고 (단순히
지동설이 우세하니 마니 하는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물리학의
세계를 열어젖혀 자연의 힘을 활용할 바탕을 갖추게 됩니다.
중세인의 사고 체계를 뒤집었다고 오해받기도 하는 지동설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과 갈릴레이 종교 심판이 가장
유명한 미신이 형성되어 왔지만 진정 학술적 토대를 구축한
적자는 케플러였다는 사실, 이제부터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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