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ay Pepper Drove Europeans to
Go Crazy Over Maritime Expedition
Age of Exploration 또는 Age of Discovery..
15~17세기 유럽.. http://swco.ttu.edu/medieval/aexpedition.html
이 현상을 부르는 말은 대항해 시대, 지리상 발견, 신항로 개척..
등등의 표현이 쓰이는데 가장 중립적 표현은 ‘신항로’,
가장 서양 중심적 표현은 ‘지리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선 ‘대항해’로 낙점. 별다른 이유는 없고 지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가장 흔하게 통용되는 표현을 고르자는 것이
본 블로그의 표기 원칙이라면 원칙이걸랑요.
또 실제로 유럽인들이 대항해의 기술을 창안한 것이기도 하니까.
(물론 폴리네시아인, 중국인, 아랍인.. 등 근대 이전 무역의
역사와 인류학적 현상을 조사하면 상당한 논란이 있겠지만…)
유럽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란…? 놀랍지만 바로 향신료인 후추랍니다.
pepper.. 필요는 발견의 어머니인 거죠.
여러분들이 아시는 새까만 가루의 양념 맞습니다.
인도가 원산지라고 하죠. 후추가 왜 중요할까요?
오늘날의 후추는 단순히 향미를 더하는 양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만, 현대인의 시각을 거두고 냉장 기술이 없던 옛날을
가정해 보세요. 도대체 육류를 어떻게 저장할 수 있었을까요?
도축이 이루어진 후 보통 3~5일이 지나면 변색과 분해가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썩는다는 말이죠. 이 경우 도축 즉시 갓 신선한
분량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남는 잉여 분량이 있었을 겁니다.
가장 흔한 보관 방법은 건조겠죠. 약한 불에 살살 말려 물기를
빼는 열 건조도 있고 서늘한 곳에서 시간을 두고 자연 건조하는
방식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건조로 숙성시키더라도
뭐든 기본 양념을 뿌려줘야 누린내를 잡지 않겠어요?
음식을 저장하려는 인류에게 자연 상태의 두 가지 재료가
있었다 해요. 소금과 꿀… 소금은 그렇다 치고 웬 꿀?
요즘 식으로 청이나 잼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거에요.
설탕과 비교해 꿀은 잘 밀봉하면 항균 효과도 있었다네요.
소금으로 저장 보관하는 음식은 스팸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스팸보다 두세 배 정도 더 짜게 염도를 높여
만드는 것이 상례였어요. 염장한 고기를 맨입엔 못 먹고
물에 풀어 스튜나 수프처럼 먹는 방식이 일반적일 만큼.
염장을 위해 쓸 소금은 다소 불편함이 있어도 내륙의 암염이나
해안가의 천일염으로 유럽 내에서 자체 생산은 가능했어요.
(후추보다야 낫지만 소금의 값이 싼 건 아니었어요. 각국
역사에 소금 중개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만 봐도.. 천일염 산지였던 베네치아가 대표적..)
그런데 후추는요? 생산 자체가 전혀 불가능해서 문제인
거죠. 대량 생산이 보편화한 오늘날에는 (기후가 유사한)
동남아와 아프리카에서 확대 재배하지만 중세 시절엔…
오늘날 소금과 후추를 쌍으로 묶어 전 세계 어딜 가도 흔한
양념의 대명사로 분류하지만 중세 유럽에선 특히 후추가
말도 못하는 사치재였던 거지요.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이야 비싸긴 해도 암염의 형태로
생산 후 수입되는 소금으로 음식을 염장하여 생활했어요.
누린내를 잡을 재료는 로즈마리나 타임 등 허브가 있었고..
영지의 부를 독점한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유일하게 후추를
쓸 수 있었죠. 식도락 용도보다는 베블렌 효과마냥 과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후추를 썼다는 해석도 있어요.
후추의 주산지인 인도와 유럽 사이… 멀고 먼 길이죠.
하지만 수요가 형성된 사치재가 있고 이를 구매할 소비자가
존재하니 시대를 막론하고 상거래와 무역은 이루어지는 거죠.
전통적으로 로마와 한나라를 잇던 무역 경로는 셋입니다.
초원길, 사막길(비단길), 바닷길(향료길).
초원길은 중앙 아시아 북쪽 스텝, steppe 지대를 관통하여
몽골, 신장 위구르,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는 경로에요.
선사 시대부터 개척되었다 하고 기원전 2세기경 흉노가
중개 수입을 독점하자 한 무제 때 새 길을 개척하죠.
사막길은 그렇게 열리게 된 경로에요. 타클라마칸 사막을 잘
피하고 파미르 고원을 관통해 중앙 아시아 건조 지형을 뚫고
가는 거죠. 여기로 로마 사자가 한나라에 당도했다고 해요.
딱 한 번이지만. 한의 비단이 로마에 최초로 전해진 경로죠.
(그래서 비단길 또는 오아시스길로도 불려요.)
바닷길은 1세기쯤 개척되었고 중국과 인도를 연안 항해로
지나 홍해를 통과해서 지중해로 진출하는 거죠. 인도를
직접 거쳐 향신료가 들어오므로 향료길이라고도 불려요.
세 경로의 공통점이 보이죠. 결국 모든 길이
아랍 - 소아시아 - 발칸 반도 -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심 지역에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란 점이에요.
지중해에서 물자가 풀리지 않으면 유럽 경제가 마비되는,
약간 과장하자면 그렇고 그 물류가 분배되는 중심 지역이
보스포루스 해협과 발칸 반도인 거에요.
그런 점에서 1453년에 지금 그리스와 터키 위치인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에게 무너졌을 때 상거래에
얼마나 큰 여파가 전해졌겠어요.
후추 값의 폭등을 넘어서 금처럼 화폐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급상승했다고 해요. 후추 몇 알 받는 것이 금화 수십
냥보다 더 가치가 높은 보수였다고 하니까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가 넘어갔음은 동지중해 해상 무역로가
막혔음을 의미하고 그때까지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안에서만 놀던 무역의 판도가 바뀌어야 함을 뜻하죠.
이런 때 (지중해 무역에서 다소 변방으로 소외되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거에요.
포르투갈과 (이제 막 한 나라로 통일될 무렵인) 스페인은
지중해 문화의 변방으로 아프리카를 통한 바닷길 개척의
가능성을 전부터 눈여겨 보던 나라였어요.
이에 지중해 각지에서 한다 하는 항해가들이 두 나라로
꾸역꾸역 모여 새로운 항로 개척에 자금 및 인력 지원을
호소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구름떼 같이 몰렸다 하죠.
그 중 군계일학으로 새로운 땅을 발견한 자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랍니다.
콜럼버스가 실제 발견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서인도 제도고
그의 측량치가 엄청난 오차 범위를 자랑했기에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해요.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인 줄 알았고…
그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학살 당했으나 세계사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기도… 이게 좋은 일인지는 영..
나비 효과이긴 하지만 후추로 시작한 (유럽인 입장의)
대탐험, 그 결과는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랍니다.
아래 동영상은 비슷한 이야기..
양념으로 인한 역사의 변화를 언급하네요.
당시 인도와 영국의 후추 가격차가 5백 배가 넘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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