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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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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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11.17
    근대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 유럽의 30년 전쟁
  2. 2018.10.25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I : 대항해 시대




Thirty Years’ War: How Battles Began and Ended




한국에서 의외로 잘 모르는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 분들이 많아

서양사나 국제 관계를 이해할 때 애먹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유럽의 역사가 30년 전쟁 전후로 나뉜다는 관점도 있고 실제로

현대 세계사에도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요. 동양 역사와 굳이

비교하면 아편 전쟁급…? 수당 시대를 무너뜨린 안사의 난,

한족 마지막 통일 국가를 무너뜨린 청조 건국에 견줄 수도..


동학 농민 전쟁이나 실학 운동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만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면 어렵잖습니까. 서양 유럽계 백인들에겐

이와 비슷한 정도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에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원래 직업이 군인인데

그가 젊은 시절 30년 전쟁에 참전해 야영하며 인생을 바꾼

꿈을 꾸고 철학자가 되었다죠.


천체 역학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말년에 30년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어 버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이런 피해에 시달렸을 거에요.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 내내 전쟁을 한 건 아니고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스웨덴 등 대략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어요.


1618년경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80년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었고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영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벌였다는 뜻이죠.


이는 곧 15~16세기 최강국이던 에스파냐의 위세가 점점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제국 곳곳에서 균열이

커지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그 신호탄이며 30년 전쟁이

결정타를 먹였다고 볼 수 있죠.


16세기 바다에서 먼저 하향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1571년

레판토 해전은 스페인이 이겨 오스만 세력을 저지하였으나

1588년 칼레 해전에선 영국-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었죠.

스페인 아르마다의 힘이 빠지고 있었어요.


16~17세기 유럽의 최강자는 지금의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요.


16세기 중반 카를 5세 황제 때가 합스부르크의 최대 판도였죠.

퇴위할 때 카를은 스페인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현 독일권

신성 로마 제국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줬는데요.


당시 종교 전쟁을 스스로 잘 봉합하지 못해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교를 공인하지만

이걸로 분열이 일단락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7세기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반동 정책을 펼쳐 다시 전쟁의 불씨를 피우고 맙니다.




결국 직접적 동기는 종교 전쟁인 거죠. 보헤미아 왕국

(지금 체코)이 먼저 개전하여 북독일이 호응하지만

남독일은 반발하는 상태가 되고요.


현재 루마니아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격해요. 여기엔 사보이 공국(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스위스에 걸치던 나라)도 조력하게 되요.


이 반란을 일시에 잠재우긴 하는데 합스부르크 안에서 여전히

문제가 곪고 있었죠. 스페인 황제 펠리페 3세가 페르디난트로부터

알자스 지방을 할양받기로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독립에다가

프랑스 북동부 본토의 위협과 직결되는 사안이거든요.


이에 프랑스를 통치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사보이, 베네치아를 결속하여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은밀하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요. (프랑스는 가톨릭임에도..)


여기에 페르디난트와 사소한 원한이 있던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개신교 동맹에 붙어 참전해요. 이로 인해 전장이 확대되고

군비가 확 늘어나 페르디난트에게 불리해지죠.


그런데 전투에서 덴마크가 밀리니 북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까지 독일 땅으로 침공하죠. 우수한 전술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의 테르시오를 박살냅니다.


*테르시오 = 화승총장창이 짝을 이루는 스페인식 육군 전술..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전성기 병법으로 16세기에 절정을 찍고

보시다시피 17세기에 총기와 대포의 발달로 무너져가고 있음..




스웨덴이 매우 강력하게 버텼으나 그 와중에 구스타프가 전사하자

개신교 세력이 크게 동요하고, 지금까지 뒤에서 돕던 리슐리외는

동맹 초기 프랑스의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기야…


1635년 프랑스까지 드러내놓고 선전포고하고…

바야흐로 부르봉합스부르크…! 두 라이벌

왕가 간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커져 버립니다.


부르봉은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를 이어받아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는 여기 보시다시피.. 점점

내리막길로 가는 중.. 두 가문의 골든 크로스 진행 중..


프랑스가 가세하여 동맹군이 조금씩 황제군을 밀어붙이고

네덜란드에서는 독립군이 스페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요.

이 와중에 페르디난트 2세는 승하.. 아들 3세가 즉위해요.


페르디난트 3세가 고압적인 자세로 화평을 타진하니 더더욱

열받은 동맹군이 황제군을 압박해요. 연전연패하는 합스부르크..

이때 리슐리외도 죽고 아직 어려 암것두 모르는 루이 14세 즉위.


종전 교섭 회의가 열리려던 즈음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스페인 군을 작살내 버리면서 동맹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아요.


막판에 황제군과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연합하자 동맹 주도권을

다투던 스웨덴과 프랑스가 연합군으로 응수, 전투가 끝나요.


1648년 11월 2일,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가톨릭 진영의 보루

프라하가 항복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간 광풍이 사그라듭니다.




복잡하죠? 최대한 요약해볼까요. 페르디난트 2세가 (할아버지처럼)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영지 반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보헤미아

전쟁 문제에 알자스 할양건이 겹쳐 프랑스를 자극해요.


반황제 동맹이 결성되고 황제에 원한이 있던 덴마크가 참전하며

전장이 독일로 번져요. 덴마크가 유틀란트까지 밀리니 스웨덴이

참전하고 리슐리외와 함께 구스타프는 동맹의 중심이 되요.

브라이텐펠트에서 합스부르크가 박살나죠.


구스타프가 전사하여 동맹이 흔들리자 프랑스가 참전하며

전황은 최대한도로 확장되죠. 처음부터 그랬지만 본격적인

부르봉 대 합스부르크 싸움이 되버렸고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격파하고 페르디난트와 리슐리외가

차례로 죽었으며 결국 로크루아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참담하게 무너집니다. 막판에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이

다시 한 번 승부에 쐐기를 박고요.


독일 — 덴마크 — 스웨덴 — 프랑스로 참전 양상이 확대했고요.

신교 동맹군의 구심점은 구스타프의 스웨덴과 리슐리외의 프랑스.




체코와 북독일에서 시작한 전쟁이 덴마크로 번지고 스웨덴과

프랑스의 참전에 따라 독일 전역이 전장에 휩싸인 겁니다.


결국 힘있는 나라들이 들어와 싸우는 통에 죽어나는 건 독일의

평민들이었어요. 동학전 명목으로 청과 일본이 싸워 구한말

조선 백성이 나가 죽은 사실과 묘한 기시감을 형성하죠.


독일인만 8백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1차 대전으로 1천만

가까이, 2차 대전으로 7천만이 넘게 죽었는데 이건 그나마

세계적 분포지만.. 이는 독일 인구 세 명 중 하나가 사라진

결과죠. 나머지 둘도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지옥이고…ㅜ


이렇게 민간인이 학살된 배경은 약탈 때문이에요. 군 편제의

상당수를 용병이 채우고 있었는데 제때 급료를 받지 못하니

전리품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고 하죠.


이로써 길고 넓었던 최초의 국제전이 끝납니다. 30년이나 되는

지난한 세월,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정권이 직접 참전하거나

간접 관여한 최초의 국가간, international 전쟁이었죠.


폭력의 경과는 이러했고요. 이 여파로 인해 유럽사의 체계를

바꿔버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다음 포스팅에선

이 결과와 영향을 상세하게 다루어 볼까요.


아래 동영상은 당시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것…

보병, 기병, 창병, 총병, 포병 등 기능별 군제가 정착하고 있죠.

머스킷선형진을 이루고 아직 장창이 쓰이고 있으며 중세식

기마 돌격용 창병기, 랜스가 사라졌음을 확인하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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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

Age to Discover and Explore New Maritime Rout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 대항해 시대 Age of Discovery 



이 현상을 가리키는 번역어는 discoveryexploration인데

유럽인의 관점에서 처음 발견하고 탐험한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탐험에 목을 매야 할 이유가 있었죠.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동방에 공적으로 등장하여 지중해를 통한

향신료 무역로가 완전히 막혀 버렸기 때문이에요.


1453년에 그렇게 길이 막힌 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엔

해상 봉쇄를 풀어보려는 노력이 정말 미친 듯이 전개되었어요.


특히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혜안을 가진 당시로선 특이한

인물, 항해 왕자 엔히크 대공이란 선구자를 통해 사하라 사막을

넘어 서아프리카까지 항로를 개척하는 등 앞서가기도 했어요.


그 무렵 스페인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영지

수복 활동, 레콘키스타가 완료하여 카스티야이사벨 1세

아라곤페르난도 2세가 통혼으로 연합 왕국을 구축하였죠.

(우리가 아는 스페인이란 나라가 이때 처음 만들어져요.)


스페인 입장에선 국내 문제도 해결되었겠다 이제 포르투갈과

해상 개척을 놓고 미친 듯이 경쟁하여 승부를 볼 일만 남았죠.


당시 지중해 해상 강국이었던 베네치아제노바를 제치고 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항로 개척에 앞섰는지, 이유는 간단해요.

뒤로 막힌 바다인 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나라들이니까요.


양국 해상 개척의 목표는 단 하나, 후추 주산지인 인도까지 갈

최고의 대안 항로를 개발하는 것이에요. 바다에 익숙한 선원 등

새로운 일감을 찾아 모험하려는 이들이 양국의 문을 두드렸죠.


바르톨로뮤 디아스 같은 포르투갈인은 국왕 주앙 2세의 명으로

에티오피아를 찾아 나섰다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발견했죠.

대륙을 우회하여 동진할 가능성을 발견한 1488년이었어요.


제노바의 지도 제작업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오히려 서진으로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열심히 이사벨 여왕을 설득 중이었죠.

6년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카디스에서 출항한지 석 달 만에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바하마 제도에 당도할 수 있었어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자각이

되는 순간이었지만요. 우리 제발 ‘발견’이란 말은 쓰지 말아요.

원래 거기 살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뭐가 되냐고요.


이렇게 과열 양상이 되니 1494년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나서

양국에게 세상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주는 웃기지도 않는 약속도

맺어요. 동시대 세상 누구도 몰랐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었죠.


그랬거나 말거나 포르투갈에서 출항한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가

개척한 희망봉 항로를 완결하여 1498년에 인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죠. (중국인과 아랍인은 이미 수백 년 전에 해낸 일인데.)


콜럼버스 지원이 늦어진 이유가 지구 평면설을 믿었기 때문이란

낭설이 한때 유행했는데, 중세 지배 계급도 지구가 둥글다는

상식은 갖고 있었어요. 다만 새로운 땅의 존재를 몰랐던 거죠.


이쯤 되니 지구가 구체란 사실을 입증할 임팩트가 필요했어요.

소싯적에 인도와 동남아에서 일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스페인의

산루칼 항을 출발한 것이 1519년의 일.. 21년엔 결국 필리핀의

섬에 당도하게 되요. 실증이 된 거죠. 세계 일주 후 그는 전사했지만.


마젤란은 꿈과 낭만이 가득한 뱃사람 세대의 마지막 주자였어요.

그 이후는 국가 대 국가의 총력 경쟁 구도로 넘어갔고 탐험가의

개인 작업이 아니라 군대와 총독, 성직자가 활약하는 시대에요.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충분히 도전할 만한 이문이

보장되는 사업이기도 했어요. 마젤란은 배 5척으로 출발해 겨우

1척이 향신료 자루를 싣고 왔지만 투자 비용을 뽑고도 남았대요.


요새 들으면 뭔 소리냐 하겠지만 당시 통후추는 대단한 사치재에

가치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화폐로 쓰이기도 했을 정도라니까요.

용병이 보수 대신 후추 몇 알 받고 기뻐했다는 얘기가 전해져요.


레콘키스타의 완료와 이베리아 반도의 팽창으로 중상주의가 활짝

꽃피웠지만 이때 두 나라 왕실의 경제 관념은 상당히 저렴했어요.

식민지에서 긁어온 금괴의 양으로 국부를 측정했다 하네요. 이미

포르투갈은 1452년부터 넘치는 금으로 금화를 찍기 시작했다죠.


이렇게 시작한 중상주의 시대 통화 기능의 사치재는 후추나 정향

향신료에서 으로 옮겨가 아메리카에서 쏟아져 들어온 으로

정점을 찍었답니다. 중앙 정부가 조절 기능을 잃고 과격한 투기

자본이 형성되어 종국에는 두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말았습니다.


16세기 말로 넘어오면 왕권 강화의 기틀을 다진 영국, 그리고

스페인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상인 문화가 발달한 네덜란드가

기존 양대 강국에 도전장을 들이밀게 됩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 같은 영국인은 해적으로서 열심히 스페인의

무역선을 노략질하여 잘 갖다 바치다가 급기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명하여 해군 제독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네요. 결국

칼레 해전을 기점으로 영국은 신흥 강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17세기 쯤 되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력 자체가 곤두박질 치고

영국네덜란드가 대서양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경쟁해요. 영국은

이 영란 전쟁을 거치며 훗날 대영제국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더 이상 복속할 신천지가 없음을 깨달을 무렵에 이르러 대항해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에는 확보한 식민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의 무대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러나 신대륙이니 발견이니 탐험이니 하는 개념 속에 스스로

미개한 줄 모르고 날뛰던 유럽인의 심리가 있음을 알아야 해요.

이들 이전에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가진 항해술이

훨씬 뛰어났고 최소한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죠.




대항해의 묘사를 사기꾼 같은 콜럼버스를 중심으로 묘사하는데

대해 항상 불만은 있었는데요. 대중 문화에서 딱히 다른 사람을

소재로 써서 성공한 예가 없긴 하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1992년에 리들리 스코트제라류 드빠르디유

및 시고니 위버를 데리고 내놓은 1492 콜럼버스와 그 유명한

사운드트랙을 링크로 걸 수밖에요. 영화 자체는 볼 만해요.

지나친 미화는 거르시고요. 반젤리스의 음악도 괜찮죠.

이 작품 원제는 1492: Conquest of Paradise..



1992년은 바하마 제도 발견 5백주년인 해라 기념 영화가 하나 더

경쟁했어요. 이 작품은 Christopher Columbus: The Discovery

란 원제.. 007 영화를 주로 만든 존 글렌이 연출했는데 폭삭

망했어요. 주연 배우를 듣보잡으로 캐스팅하다 보니…

조연진은 정말 화려했는데..ㅜ



신항로 개척과 식민지 정복이 얼마나 맨땅에 헤딩하는

미친 짓이었는지 간접 체험을 원한다면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이 클라우스 킨스키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만들었다는

애증의 작품 아귀레, 신의 분노를 추천해요. 72년작이죠.

전도가 안 먹히니 대뜸 원주민을 살해하는 씬이 충격적이죠.



지리상 발견의 정치적 미화에 성공해 유럽 최고의 영화제서

황금 종려상을 받은 유럽인 롤랑 조페미션은 참 미묘한

영화에요. 제레미 아이언스로버트 드 니로 찾는 맛으로

보죠 뭐. 잘 찾아보면 리암 니슨도.. 엔니오 모리코네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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