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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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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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현대사: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Press Club, A Starting Point Where Corruption

Erodes The Reliability of South Korean Press





...진짜 vs 가짜?!






지난 여름 이래 법무부 장관 임명을 둘러싼 미친 질풍을 겪으며 다들

몸소 체험하셨을 겁니다. 권언 유착에 길들여진 한국 언론의 저열한

수준과 싸구려 기득권적인 극보수 진영 논리를요. 질리죠?



전후 한국의 현대사에서 대개는 이러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요즘처럼 광고주에 영혼을 팔아가며 저렴하게 군 적이 최근에

잘 없었던 듯해요. 세월호 때는 정권이 박해하니까 그런가 보다

이해해줄 구석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대체 왜 그런답디까?



현재 한국 언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본 블로그는, 언론의 신뢰성이 추락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며

이렇게 신뢰를 잃은 주범이 바로 언론계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언론의 신뢰성이란 언론의 자유라는 관점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Freedom of the Press, 언론의 자유는 헌법적 가치인지라 법률

및 제도가 보장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이자 거기서 파생하는 각종

행정 제도적 구현 수단으로 완성되는 영역입니다.



영국의 명예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 미국 독립 선언, 독일 바이마르

헌법, 1948년 유엔의 세계 인권 선언 등 민주 정치의 발전사에 중요한

철학 기초를 쌓은 주요 길목마다 언론의 자유는 반드시 보장하는

기본권 조항으로 꼭 포함시켜 왔습니다. 현대 민주 정치에 있어서

필수 요소란 뜻이죠.



그에 반해 언론의 신뢰성은 주어지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언론계 스스로의 성과로 시장에서 평가받는 능동적인 결과물에

더 가깝습니다. 언론의 보도가 과연 믿을 만한가 하는 근본적

질문에 관한 것이고, 언론이 스스로 진실 추구라는 사명에

충실하다면 당연히 걱정할 필요 없는 질문일 겁니다.






세계적으로 언론 자유도를 평가할 때에는 비영리 기관 NGO인

국경없는 기자회, RSF = Reporters Sans Frontières, Reporters

Without Borders가 매년 발표하는 연구 보고서를 가장 정직한

판단 기준으로 삼습니다.



올해 19년 결과는 아래의 링크에 들어가면 보실 수 있고요. 암울한

이명박근혜 시대에 70~80위 수준까지 떨어졌으나 한국의 언론

자유 지수는 현재 아시아 최상위권 수준입니다.



**언론 자유 지수 2019년 연례 보고 (국경없는 기자회)

https://rsf.org/en/ranking/2019




올해는 한국이 41위에 선정되어 있고 이에 육박하는 국가는 42위

타이완 정도에 불과합니다. 일본이 67위, 중국이 177위입니다. 일본

및 홍콩이 최근 2~3년 간처럼 암울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시아 수위는 당분간 한국과 타이완이 다툴 겁니다. 놀랍게도 이는

(가짜 뉴스 봇들의 천국) 미국과도 비슷한 순위랍니다.



불과 2년 전 17년에만 해도 한국은 겨우 60위권을 맴돌고

있었으나 현 정부와 촛불 시민 사회의 건강한 자정 움직임으로

이 정도 수준을 회복한 모양입니다.







이에 반해 언론 신뢰성의 평가는 이런 식으로 측정되지는 않습니다.

보통 언론학 및 저널리즘을 연구하는 저명 대학교의 공공 연구소에서

학술적인 수준으로 여론 조사 통계 분석을 하는 것 같습니다.



저명한 옥스퍼드 대학교로이터 언론 연구소가 매년 발표하는

디지털 뉴스 리포트란 연차 보고서가 이 분야에서 객관적인 지표의

하나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올해 19년 보고서는 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142~143 페이지에요.)



**언론 신뢰성 2019년 연례 보고 (옥스퍼드 대학교)

https://reutersinstitute.politics.ox.ac.uk/risj-review/digital-news-report-2019-out-now




자유도에서 비교적 만족할 만한 수준이던 한국의 상황이 정작 언론사가

제공하는 보도 기사 정보의 신뢰성 면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수준임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올해 개별 조사한 38개 나라 중 꼴찌인 38위를

차지했고 신뢰성은 22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나마 계량화 연구가 가능하도록 객관적 데이터를 추출할 수 있는

자유도 상위권인 나라의 언론 환경을 조사한 셈이라고 볼 수 있으니

고만고만한 언론 선진국 가운데에서 신뢰성은 최하위 수준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언론 신뢰성은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2백여 개 모든 나라를 다

조사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매년 30~40개 정도 국가를 골라서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형편이 나은 나라로 볼 수 있겠죠.



자유도 역시 고만고만한 언론 선진국만을 상정해 보자면 아시아로선

높지만 유럽 등 최상위권 선진국에는 여러 모로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아닌가 의심해볼 만도 합니다.



종합하자면, 헌법 가치의 사회적 실현을 측정할 기준으로 언론 자유도

측면을 보면 한국의 환경이 유럽 선진국에는 못 미치는 대신 아시아에선

19년 기준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고, 언론사 성과물의 질적

우수성을 측정할 기준으로 언론 신뢰성을 보면 한국의 기자들이 왠만큼

사는 나라들의 기자들보다 꽤 많이 뒤떨어지는 수준의 기사를 현재 양산

중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한 마디로, 작금의 한국 언론 지형인즉슨... 정부와 시민의 노력으로

한껏 좋은 환경은 만들어 놓았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자와 언론인 본인들이 여전히 문제라는 것입니다.





...외신 번역도 일부러 오독하는 기레기들





자, 기레기 이슈가 이 지점에서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시민의 희생으로 (물론 아직 최상위 레벨은 아닐지언정) 기껏 언론

자유를 구현해 놓았더니 어느새 광고 수익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버린

기자와 PD, 언론인들은 신뢰성 바닥의 쓰레기 같은 기사를 생산하는

부실 공장으로 돌아온 거에요.



그 숱한 세월, 국민이 인고와 희생을 치른 대가가 고작 이런 것입니까.

장준하 선생을 위시하여 수많은 애국 지사들이 독재와 압제에 항거한

결과가 겨우 이런 것...? 이건 좀 아니잖아요.



이제 원인을 고찰해 봐야겠죠? 복잡다기한 여러 요소가 유기적으로

뒤섞여 작용한 것이므로 첫 술에 모든 원인을 다 따질 수 없겠지만요.

이번 포스팅에서 그 원인 중 결정적인 하나를 들춰내어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방점을 찍고 싶어요. 바로 출입처 기자실의 존재입니다.




...기자실이란 곳의 가장 일반적인 그림




많은 시민들이 관공서 체계에 조응하며 삶을 영위할 기회를 가질

수 없기에 권언 유착의 배양 공간이 되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시는데요. 한국 언론은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유래한 매우

흉악하고 썩은내 풀풀 나는 기득권 제도에 기대어 기자질을 하고

있어요. 작게나마 이 자리에서 밝혀 보려 합니다.



각급 관공서 출입처에 마련된 기자실이라는 곳이 있답니다. 이런

기자실은 관공서공공 기관 뿐만 아니라 각급 재벌 대기업

공기업 집단 역시 출입처로 취급하여 따로 설치해 놓기까지 합니다.

무슨무슨 협회, 연합, 연맹, 사단 등 관변 단체 성격을 갖는 각

공공성 단체 역시 마찬가지라고 보면 되요.



물론 물리적 공간과 제도적 장치가 항상 상근상존하는 체제인지

그때그때 사안별로 운영했다가 없앴다가 하는 체제인지는 기관에

따라 케바케로 따져야 할 수 있어 현실에서의 양상은 훨씬 복잡할

수 있습니다만.



공식적으로야 — 아래 링크 달린 기사에도 있지만 — 노무현 정부

때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고 말은, 합니다만... 이런 시스템에 의존해

길들여진 언론인의 관행이 실제 존재하는지 여부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기레기로 불리우는, 기존 관행에만 의존하는 게으르고

무능한 기자들의 취재 관행의 사례는 차고도 넘칩니다.



또, 소수의 중앙 기관 몇 군데 바뀌었다고 나라 전체가 바뀐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생활에 더 밀접한 기초 지방 자치 단체 수준에선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을, 다른 무엇보다 본 블로거

본인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판타지 소설 쓰는 것

아니고 아직도 실재하는 현상임이 맞다고 주장합니다. 법무부 장관

청문회 소동을 보며 많은 시민이 공감하시리라 확신하고요.





...원래 일본 꺼라서 서양에선 (경멸조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편





KBS 최경영 기자의 모 인터넷 방송 인터뷰를 찾아 보셔도 감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만. 기자실은 어떻게 생긴 곳일까요. 머리 속에

간단한 그림부터 그려 보시죠.



**딴지방송국 다스뵈이다 제46회

https://www.youtube.com/watch?v=2UI1oE_qMB8&t=4539s



**노무현재단 알릴레오 라이브뷰 김PB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cPgJUV8wvFg



**TBS FM 뉴스공장 19년 10월 14일 3부: 우상호 의원 출연분

https://www.youtube.com/watch?v=-cdsHx0sPoc&t=789s




각 언론사에 자기 책상이 마련되어 있듯이 출입처 기자실에는

기자들에게 책상을 마련해 줍니다. 지원의 수준은 상이하겠으나

일반적으로 전화와 인터넷 통신선, 전력 서비스 정도는 지원해

준다고 합디다. 핸드폰과 와이파이로 대체한 곳도 종종 있다곤

하더군요.



출입처에 따라 차이가 큰데 행정 지원 업무도 서비스로 내놓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뭔 말이냐면, 기자실 담당 직원을 배치해주고

각종 업무 지원을 제공한다는 뜻이에요. 일종의 비서직인 거죠.

팩스, 복사기, 커피 등 음료 제공.. 이런 건 옵션으로 딸려 오는 것

같습니다. 물론 거기가 어디냐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기초 지자체 수준에서 지방 유지 역할을 자처하는 지역 언론

기자들 중 상당수는 — 어디 수형될 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은

— 왠만해서 멤버가 교체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기자실의 ‘고인물’이

되어가는 거죠. 이들 자리는 거의 지정석으로 건드리지 않는다고도

하네요.



반면 삼성전자 등 주요 대기업을 출입처로 배당받는 기자들은

각 언론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출세 가도에 오르는 셈이죠. 이들은

경제통, 경제면 담당, 경제부장 등 그들 직역 내에서 다양한 위상을

선점하고 해당 분야의 여론을 주도할 ‘고인물’ 전문가로 성장할

기회를 얻는 겁니다.



대기업의 출입처가 경제 분야의 주류로 가는 지름길이라면 청와대,

국회, 법원, 검찰 등 기관의 담당 기자들은 정관계 분야에서 똑같은

기능을 자임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겠죠. 사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유명 정치인들 중 언론인 출신 인사 중에 이런 루트를 통해

정치로 들어선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를 기레기로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요.




          

...풀빵 찍어내듯 천편일률적 기사.. 광고주가 짖으라면 짖어주고..




전국에 산재하는 수백 군데 기자실의 사례를 여기서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만, 그냥 소설 쓰는 셈 치고 가상의 썰을

풀어 볼께요. 소설입니다.. 기레기들 흥분하지 마세요.



문제는 기사를 생산하여 유통하는 일반적인 프로세스입니다.

이렇게 일하는 환경이 갖추어진 구조 하에서 어떤 기사가 나올까요.



출입처 기자실을 관리하는 해당 기관이나 기업의 실무 담당자가

있습니다. 홍보팀장 또는 언론대응 담당 정도 직함이 있겠죠. 이

사람은 기자실 소속 모든 기자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직분입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보도 자료라는 것이 배포되요.

보도 자료란, 일종의 기사 표준안입니다. 실무 현장 개념에 가깝게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게으른 기자들에게 살짝 고쳐 베껴 쓰라고 휙

던져주는 시험 족보 내지 컨닝 페이퍼인 거에요. 그 기관의 입장을

십분 반영하여 입맛에 맞는 언어로 다듬은 완벽하게 기사문 형식을

갖춘 모범 답안 같은 거죠.




...류승완 감독, 박훈정 작가 '부당거래' 중




물론 취재라는 과정이 있죠. 문제는 어디서, 냐는 거겠죠. 보도 자료가

배포될 때마다 그날 저녁에 이루어지는 거나한 회식 자리,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2차의 술자리, 3차 접대업소, 그리고 성접대까지...?



이렇게 내밀한 사적 공간을 기관의 담당자와 기자실 기자가 공유하며

이른바 ‘끈끈하고 숨김없는’ 관계를 형성하죠. 그 자리에서 술잔을

돌리며 맨정신인지 아닌지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술안주처럼 입으로

질겅질겅 씹으며 진실이라고 포장한 ‘고급’ 정보를 교환하며 말 잔치가

벌어지는 곳... 출입처 기자들의 취재라는 과정은 보통 이런 식이죠.



일반 대중은 명작 영화를 통해서 이미 이런 면을 자주 접해왔습니다.

부당거래에서 검새 류승범과 기레기 오정세가 ‘열과 성을 다해 두 번

해드려’ 대사를 터뜨린 요정 내실 씬을 다시 한 번 보세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소설이고 상상으로 가정해 보는 것에 불과하니

모든 출입처 기사를 이런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지금까지 매체를 통해 접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의아해한 기사의 상당수는 이와 유사한 형식으로 생산한 거라고 보면

크게 진실과 다르지 않다고 확신해요.





...그들이 잊고 사는 '진짜' 기자의 모습





아래에 링크를 단 외신 기사에서 인용이 나옵니다만, 가만히 앉아

있는 기자에게 기사가 오는 구조인 거에요. 기자가 기사를 찾아서

뛰어다니는 구조가 아니라요. 본질은 이겁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구조로 기사를 생산하는 나라는 없어요.*

뉴스의 소스가 되는 어떤 기관이 뭔가를 공식 발표하고 브리핑하면

기자가 용감하게 질문을 던지며 이에 대한 답변으로 충족하지 못한

영역을 기자가 발로 뛰어다니며 미진한 소재에 관해 추가 보도하고...

— 이것이 정상적인 통상의 저널리즘 프로세스입니다.



*아, 미안합니다. 사실은 두 군데 정도 더 있어요.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아시아에. 일본과 중국. — 그래서 동아시아 3대국의

언론 현황을 짚는 포스팅을 지금 펼치고 있는 건데요.



세상의 저널리즘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굳이 미국이나 선진국에서 이렇게 하고 있다, 지지부진하게

토달지 않아도 통상적 시민이라면 그렇게 인식하고 있어요.

그렇죠?




...유리천장이 가장 두꺼운 곳이 언론계 아닐까?




더군다나 사족이긴 하지만, 이런 구조는 지극히 성차별적입니다.

극도로 마초적이고 남성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뛰어 경력을 일구고 싶은 여성 언론인들에게 좀처럼

기회를 부여할 수가 없다는 부수적인 문제점까지 있어요.



— 정보 교류 자체가 아가씨 나오는 룸살롱에서 술잔 돌리며

이루어지고 2차를 가네 마네 이 수작들을 벌이고 있는 바로 그

옆에서, 여기자가 정상적인 취재로 질문을 던진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오겠어요? ‘저거 또라이 아냐?’라고... 능히 상상이 되시죠?



— 지상파 방송 및 주요 언론사의 부장급 이상 간부진 중에 왜

그렇게 여성 언론인이 드문지 이제는 이해가 되시죠?





...노무현 정부를 회상하는 김종민 국회의원





과거부터 민주당계 정치권에서는 이런 현상을 개선하려 무던히

노력해 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부터 언론 개혁에 손을 대기 위해

뭔가 해보려 했지만 IMF 똥치우느라 일손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본격적인 조처는 노무현 대통령께서 시작했어요.



04년에 청와대부터 시작하여 기자실을 없애고 브리핑룸 시스템

도입했어요. 우리가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 하면 으례히 떠올리는

그림을 이때부터 만든 거죠. 2004년 당시 중립적인 입장의 뉴욕

타임스 일본계 민완 기자 오니쉬 노리미츠는 일본에서 물건너간

인습인데 한국이 일본보다 더 앞서 간다며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에 반발한 것은 한국의 기성 거대 언론사였어요.

허 참, 아이러니하죠. 기자의 본분이 권력 견제라고 하니 권력의

고리를 끊고 이제부터 본분에 충실하라고 터전을 만들어주니

되려 언론 탄압이라고 되지도 않는 논조로 정부를 비난했어요.



한국 언론의 심각한 양태는 이때부터 일찌감치 예견할 수 있었던

일인 거에요. 발로 뛰며 땀내 나는 탐사가 아니라, 룸살롱 접대와

떡값과 명절 선물에 익숙한 거대 언론사의 거미줄처럼 찐득하고

더러운 카르텔. 오늘날 검찰 쿠데타에 편승한 쓰레기 언론

연원인 썩은 동앗줄인 거에요.







해외에서는 당시에도 그랬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개선 노력을

오히려 대단히 높게 평가합니다. 아래에 그 뉴욕 타임스 기사의

예전 아카이브 링크를 다오니 직접 읽어보시길 권유합니다.

뉴욕 타임스와는 저작권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번역문을

달 수 없는 점을 양해하기 바랍니다. — 제목과 저자만 공개..




South Korea Dissolves Ties That Once Bound the Press to the Powerful

한국, 권언 유착의 고리를 끊어 버리다



By Norimitsu Onishi

오니쉬 노리미츠 특파원



https://www.nytimes.com/2004/06/13/world/south-korea-dissolves-ties-that-once-bound-the-press-to-the-powerful.html




...언론 자유도 공표 행사



...시민의 검색어 지령



...언론과 신경전 벌인 이재정 국회의원



...법무부 장관 사태 때 시민이 선택한 인기 검색어




**비슷한 논조의 모 지상파 언론 비평 교양 프로그램의 축약 편집본입니다.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The Way Pepper Drove Europeans to

Go Crazy Over Maritime Expedition






Age of Exploration 또는 Age of Discovery..

15~17세기 유럽.. http://swco.ttu.edu/medieval/aexpedition.html



이 현상을 부르는 말은 대항해 시대, 지리상 발견, 신항로 개척..

등등의 표현이 쓰이는데 가장 중립적 표현은 ‘신항로’,

가장 서양 중심적 표현은 ‘지리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선 ‘대항해’로 낙점. 별다른 이유는 없고 지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가장 흔하게 통용되는 표현을 고르자는 것이

본 블로그의 표기 원칙이라면 원칙이걸랑요.



또 실제로 유럽인들이 대항해의 기술을 창안한 것이기도 하니까.

(물론 폴리네시아인, 중국인, 아랍인.. 등 근대 이전 무역의

역사와 인류학적 현상을 조사하면 상당한 논란이 있겠지만…)



유럽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란…? 놀랍지만 바로 향신료후추랍니다.

pepper.. 필요는 발견의 어머니인 거죠.



여러분들이 아시는 새까만 가루의 양념 맞습니다.

인도가 원산지라고 하죠. 후추가 왜 중요할까요?



오늘날의 후추는 단순히 향미를 더하는 양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만, 현대인의 시각을 거두고 냉장 기술이 없던 옛날을

가정해 보세요. 도대체 육류를 어떻게 저장할 수 있었을까요?



도축이 이루어진 후 보통 3~5일이 지나면 변색과 분해가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썩는다는 말이죠. 이 경우 도축 즉시 갓 신선한

분량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남는 잉여 분량이 있었을 겁니다.



가장 흔한 보관 방법은 건조겠죠. 약한 불에 살살 말려 물기를

빼는 열 건조도 있고 서늘한 곳에서 시간을 두고 자연 건조하는

방식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건조로 숙성시키더라도

뭐든 기본 양념을 뿌려줘야 누린내를 잡지 않겠어요?



음식을 저장하려는 인류에게 자연 상태의 두 가지 재료가

있었다 해요. 소금… 소금은 그렇다 치고 웬 꿀?

요즘 식으로 청이나 잼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거에요.

설탕과 비교해 꿀은 잘 밀봉하면 항균 효과도 있었다네요.



소금으로 저장 보관하는 음식은 스팸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스팸보다 두세 배 정도 더 짜게 염도를 높여

만드는 것이 상례였어요. 염장한 고기를 맨입엔 못 먹고

물에 풀어 스튜나 수프처럼 먹는 방식이 일반적일 만큼.








염장을 위해 쓸 소금은 다소 불편함이 있어도 내륙의 암염이나

해안가의 천일염으로 유럽 내에서 자체 생산은 가능했어요.



(후추보다야 낫지만 소금의 값이 싼 건 아니었어요. 각국

역사에 소금 중개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만 봐도.. 천일염 산지였던 베네치아가 대표적..)



그런데 후추는요? 생산 자체가 전혀 불가능해서 문제인

거죠. 대량 생산이 보편화한 오늘날에는 (기후가 유사한)

동남아와 아프리카에서 확대 재배하지만 중세 시절엔…



오늘날 소금과 후추를 쌍으로 묶어 전 세계 어딜 가도 흔한

양념의 대명사로 분류하지만 중세 유럽에선 특히 후추가

말도 못하는 사치재였던 거지요.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이야 비싸긴 해도 암염의 형태로

생산 후 수입되는 소금으로 음식을 염장하여 생활했어요.

누린내를 잡을 재료는 로즈마리나 타임 등 허브가 있었고..



영지의 부를 독점한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유일하게 후추를

쓸 수 있었죠. 식도락 용도보다는 베블렌 효과마냥 과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후추를 썼다는 해석도 있어요.



후추의 주산지인 인도와 유럽 사이… 멀고 먼 길이죠.

하지만 수요가 형성된 사치재가 있고 이를 구매할 소비자가

존재하니 시대를 막론하고 상거래와 무역은 이루어지는 거죠.



전통적으로 로마와 한나라를 잇던 무역 경로는 셋입니다.

초원길, 사막길(비단길), 바닷길(향료길).










초원길은 중앙 아시아 북쪽 스텝, steppe 지대를 관통하여

몽골, 신장 위구르,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는 경로에요.

선사 시대부터 개척되었다 하고 기원전 2세기경 흉노가

중개 수입을 독점하자 한 무제 때 새 길을 개척하죠.



사막길은 그렇게 열리게 된 경로에요. 타클라마칸 사막을 잘

피하고 파미르 고원을 관통해 중앙 아시아 건조 지형을 뚫고

가는 거죠. 여기로 로마 사자가 한나라에 당도했다고 해요.

딱 한 번이지만. 한의 비단이 로마에 최초로 전해진 경로죠.

(그래서 비단길 또는 오아시스길로도 불려요.)



바닷길은 1세기쯤 개척되었고 중국과 인도를 연안 항해로

지나 홍해를 통과해서 지중해로 진출하는 거죠. 인도를

직접 거쳐 향신료가 들어오므로 향료길이라고도 불려요.



세 경로의 공통점이 보이죠. 결국 모든 길이

아랍 - 소아시아 - 발칸 반도 -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심 지역에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란 점이에요.



지중해에서 물자가 풀리지 않으면 유럽 경제가 마비되는,

약간 과장하자면 그렇고 그 물류가 분배되는 중심 지역이

보스포루스 해협발칸 반도인 거에요.



그런 점에서 1453년에 지금 그리스와 터키 위치인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에게 무너졌을 때 상거래에

얼마나 큰 여파가 전해졌겠어요.



후추 값의 폭등을 넘어서 금처럼 화폐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급상승했다고 해요. 후추 몇 알 받는 것이 금화 수십

냥보다 더 가치가 높은 보수였다고 하니까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가 넘어갔음은 동지중해 해상 무역로가

막혔음을 의미하고 그때까지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안에서만 놀던 무역의 판도가 바뀌어야 함을 뜻하죠.



이런 때 (지중해 무역에서 다소 변방으로 소외되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거에요.



포르투갈과 (이제 막 한 나라로 통일될 무렵인) 스페인은

지중해 문화의 변방으로 아프리카를 통한 바닷길 개척의

가능성을 전부터 눈여겨 보던 나라였어요.



이에 지중해 각지에서 한다 하는 항해가들이 두 나라로

꾸역꾸역 모여 새로운 항로 개척에 자금 및 인력 지원을

호소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구름떼 같이 몰렸다 하죠.



그 중 군계일학으로 새로운 땅을 발견한 자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랍니다.



콜럼버스가 실제 발견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서인도 제도

그의 측량치가 엄청난 오차 범위를 자랑했기에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해요.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인 줄 알았고…



그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학살 당했으나 세계사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기도… 이게 좋은 일인지는 영..



나비 효과이긴 하지만 후추로 시작한 (유럽인 입장의)

대탐험, 그 결과는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랍니다.



아래 동영상은 비슷한 이야기..

양념으로 인한 역사의 변화를 언급하네요.

당시 인도와 영국의 후추 가격차가 5백 배가 넘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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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 Years’ War: International Relations Rise




30년 전쟁은 백여 년을 끌어온 종교 개혁을 일단락 짓고

유럽 각 나라의 세력 구도를 새롭게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 international.. 국가 간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봉토와 영지 중심의 중세 시대 정치를 종식하고 영토 개념의

근대 국가가 정치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nternational 단어 자체는 제레미 벤담이 18세기 말에

처음 만들었어요. ‘국제’라는 한자어 정착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번역가들이 도입했고 그 전에 중국에는 ‘만국’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쓰였죠.


구교-신교의 대립을 바탕으로 종교 전쟁에서 시작했지만

국제 정치의 역학 구도에 더 큰 영향을 주며 종료했다는

점이 큰 핵심일 것 같습니다.


30년 전쟁 이후에도 종교적 박해는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종교 개혁을 끝낸 건 아닙니다. 여러 종파 가운데 루터교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칼뱅교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공인하게 된 것 뿐이죠.


그렇지만 로마 가톨릭 교황령을 정점으로 떠받드는 수직적

햐향식 신정 정치 체제가 붕괴한 것, 이것만은 사실입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국가를 대체할 유사 국정 시스템도

아니고.. 나라의 역할은 이제부터 나라가 하겠죠.


사실 중세의 유럽은 어떤 나라가 정치의 주체가 아니고

가문이 중심이라 할 수 있죠. 어떤 개인은 그 가문이 소유한

봉토에 속해 신분상의 제약을 받는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합스부르크니 부르봉이니 하는 왕가가 정치 주체로 등장하는

추세가 30년 전쟁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되고 이 역할을

대체하여 정치 주체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란 개념이

자리를 차지하는 형식으로 변혁을 맞는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 주권이나 국왕의 대권 같은 개념도 이때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이런 관념의 정의가 불필요했죠.

군주의 지위는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니 누가 토를 달겠어요.


주권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곧 봉건적 통치권이

서서히 약화하고 근대 공화주의 사상이 형성될 바탕이 차츰

형성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거랍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국제법학에서 국제법의 주체로 주권을 가진

국가만을 상정하는 전통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국제법의 효시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근대적 법리를 완성한 사람은 조약 체결 3년 전 사망할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법률가로 활동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없어도 웨스트팔리아를

사상적으로 이끈 영도자라고 칭송하는 바로 그 인물이랍니다.


참고로 주권의 개념이 등장했지만 영토의 개념까지는 아니에요.

국제 조약에 영토 개념이 가미되기 시작한 계기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인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꼽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근대 국가란 것이 정치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실체를 정립하게 되고 여기에다가 19세기 이탈리아 및 독일의

통일로 고개를 든 민족주의 바람까지 더하면, 그제서야 대략

현대에 흔히 느낄 수 있는 민족 국가의 개념에 가까와집니다.




이렇게 30년 전쟁을 계기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현대 유럽

국가의 원형이 이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함을 확인할 수 있죠.

정권 간의 세력 구도가 엄청난 변화를 맞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겁니다.

중세를 지배한 로마 + 기독교의 시스템이 붕괴한 거죠.

제국이 다스리던 독일 지역은 3백 개가 넘는 영방 국가로서

각자의 자치권을 인정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 땅이 전쟁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한 뒤죠.

인구 기반이 사라졌다는 것은 경제 활동과 총생산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거고요. 1871년 통일할 때까지 독일은 유럽

정치 무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린 스페인도 하락세에 들어갑니다.

카를 5세 시절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죠. 지리상 발견에만

기대기에 신흥 강국이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빠르고요.


스페인 육군의 전통적 전술이 무너진 것도 하락세에

한 몫을 차지했어요. 무적함대의 유명세도 이미

16세기에 볼장 다 본 터였습니다.


두 나라를 통치한 합스부르크는 이제 유럽의 종이 호랑이로

전락합니다. 대신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빠르게 대체합니다.

(합스부르크 통치 지역은 지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30년 전쟁 막판에 루이 14세도 즉위했거니와 이제 프랑스

절대 왕정의 호시절만 남아 있죠. 이때까지 영국과 러시아는

아직 국내외 사정으로 정신 못 차리던 때입니다.


프랑스 북동부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20세기엔 자원의 보고로

급부상할)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랑스에 거의 넘어옵니다.

독일 경제도 완전히 붕괴했으니 이제부터 프랑스로선

최소한 뒷마당 걱정은 면하게 된 셈…




30년 전쟁으로 피어난 새 강호는 북구의 스웨덴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은 스웨덴의 사자왕으로 불려요.

애초에 덴마크-노르웨이와 북해 패권을 놓고 대립했는데

이제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를 눌러 버렸어요.


덴마크-노르웨이는 16세기에 형성된 동군 연합국입니다.

30년 전쟁 초기엔 신교 동맹에 잘 붙었는데 나중에 황제

편으로 변절하여 스웨덴에 깨지는 불운이...


영국은 동맹까진 참여했는데 1642년에 영국 내전이 발발하며

주춤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약

60여 년이 흐른 후. 17세기말 명예 혁명을 완수하며 내홍을

딛고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아직 중앙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 전이고

대개 유럽 국가들은 미개한 저개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죠.

러시아 국력의 폭발은 18세기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입니다.

30년 전쟁 때는 스웨덴에 밀려 기싸움 중이었어요.


러시아와 전쟁 중이고 스웨덴 기에 눌리던 동유럽의 나라 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있어요. 종교 전쟁의 광풍을

슬기롭게 피했고 거국적인 관용의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흔치 않은 나라죠. 30년 전쟁에선 오스만 제국을 견제했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나라들이 이때 독립하여 국체를 형성했어요.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


포르투갈은 과거에 국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혈통이 끊겨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30년 전쟁 말미에 다시 독립했어요.


스위스도 합스부르크에 예속은 했지만 실상은 그전부터

느슨한 국가 연합 형태로 독립국이나 다름 없었고 국민들

상당수가 용병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합스부르크가

30년 전쟁에 지면서 정식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종교 전쟁의 하이라이트이자 진정한 독립국은 네덜란드겠죠.

오랫동안 스페인 제국에 삥뜯기는 영지 신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내다가 1568년부터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종교 개혁의 문파가 크게 루터와 칼뱅으로 나뉘지만 까놓고 말해

두 종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에요. 루터교는 가톨릭 교리를 상당히

수용하고 정치적으로도 황제 중심의 보수 성향을 띱니다.


당시 진정한 급진 세력은 칼뱅교였어요. 청교도들 경건주의에서

보듯이 교리도 훨씬 원론적이고 황제권 같은데 질색하는 정치

성향이었죠. 거기다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는 경제 철학으로

네덜란드 상인 계급이 일찍부터 받아들여 장악하고 있었어요.


30년 전쟁의 네덜란드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충분히 독립을 인정받을 만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했어요.

그 결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합니다.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대서양 무역 항로를 두고

영국과 대일전을 벌여 양대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입니다. 근대 공화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체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끝을 맺으며 봉건주의를 종식하고 근대의 문턱을 형성한

사건, 바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국제 정치국제 관계학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래는 찾아본 중에 가장 짧으면서도 비교적 상세한

교육용 개인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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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 Years’ War: How Battles Began and Ended




한국에서 의외로 잘 모르는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 분들이 많아

서양사나 국제 관계를 이해할 때 애먹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유럽의 역사가 30년 전쟁 전후로 나뉜다는 관점도 있고 실제로

현대 세계사에도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요. 동양 역사와 굳이

비교하면 아편 전쟁급…? 수당 시대를 무너뜨린 안사의 난,

한족 마지막 통일 국가를 무너뜨린 청조 건국에 견줄 수도..


동학 농민 전쟁이나 실학 운동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만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면 어렵잖습니까. 서양 유럽계 백인들에겐

이와 비슷한 정도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에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원래 직업이 군인인데

그가 젊은 시절 30년 전쟁에 참전해 야영하며 인생을 바꾼

꿈을 꾸고 철학자가 되었다죠.


천체 역학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말년에 30년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어 버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이런 피해에 시달렸을 거에요.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 내내 전쟁을 한 건 아니고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스웨덴 등 대략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어요.


1618년경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80년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었고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영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벌였다는 뜻이죠.


이는 곧 15~16세기 최강국이던 에스파냐의 위세가 점점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제국 곳곳에서 균열이

커지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그 신호탄이며 30년 전쟁이

결정타를 먹였다고 볼 수 있죠.


16세기 바다에서 먼저 하향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1571년

레판토 해전은 스페인이 이겨 오스만 세력을 저지하였으나

1588년 칼레 해전에선 영국-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었죠.

스페인 아르마다의 힘이 빠지고 있었어요.


16~17세기 유럽의 최강자는 지금의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요.


16세기 중반 카를 5세 황제 때가 합스부르크의 최대 판도였죠.

퇴위할 때 카를은 스페인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현 독일권

신성 로마 제국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줬는데요.


당시 종교 전쟁을 스스로 잘 봉합하지 못해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교를 공인하지만

이걸로 분열이 일단락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7세기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반동 정책을 펼쳐 다시 전쟁의 불씨를 피우고 맙니다.




결국 직접적 동기는 종교 전쟁인 거죠. 보헤미아 왕국

(지금 체코)이 먼저 개전하여 북독일이 호응하지만

남독일은 반발하는 상태가 되고요.


현재 루마니아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격해요. 여기엔 사보이 공국(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스위스에 걸치던 나라)도 조력하게 되요.


이 반란을 일시에 잠재우긴 하는데 합스부르크 안에서 여전히

문제가 곪고 있었죠. 스페인 황제 펠리페 3세가 페르디난트로부터

알자스 지방을 할양받기로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독립에다가

프랑스 북동부 본토의 위협과 직결되는 사안이거든요.


이에 프랑스를 통치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사보이, 베네치아를 결속하여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은밀하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요. (프랑스는 가톨릭임에도..)


여기에 페르디난트와 사소한 원한이 있던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개신교 동맹에 붙어 참전해요. 이로 인해 전장이 확대되고

군비가 확 늘어나 페르디난트에게 불리해지죠.


그런데 전투에서 덴마크가 밀리니 북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까지 독일 땅으로 침공하죠. 우수한 전술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의 테르시오를 박살냅니다.


*테르시오 = 화승총장창이 짝을 이루는 스페인식 육군 전술..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전성기 병법으로 16세기에 절정을 찍고

보시다시피 17세기에 총기와 대포의 발달로 무너져가고 있음..




스웨덴이 매우 강력하게 버텼으나 그 와중에 구스타프가 전사하자

개신교 세력이 크게 동요하고, 지금까지 뒤에서 돕던 리슐리외는

동맹 초기 프랑스의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기야…


1635년 프랑스까지 드러내놓고 선전포고하고…

바야흐로 부르봉합스부르크…! 두 라이벌

왕가 간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커져 버립니다.


부르봉은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를 이어받아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는 여기 보시다시피.. 점점

내리막길로 가는 중.. 두 가문의 골든 크로스 진행 중..


프랑스가 가세하여 동맹군이 조금씩 황제군을 밀어붙이고

네덜란드에서는 독립군이 스페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요.

이 와중에 페르디난트 2세는 승하.. 아들 3세가 즉위해요.


페르디난트 3세가 고압적인 자세로 화평을 타진하니 더더욱

열받은 동맹군이 황제군을 압박해요. 연전연패하는 합스부르크..

이때 리슐리외도 죽고 아직 어려 암것두 모르는 루이 14세 즉위.


종전 교섭 회의가 열리려던 즈음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스페인 군을 작살내 버리면서 동맹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아요.


막판에 황제군과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연합하자 동맹 주도권을

다투던 스웨덴과 프랑스가 연합군으로 응수, 전투가 끝나요.


1648년 11월 2일,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가톨릭 진영의 보루

프라하가 항복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간 광풍이 사그라듭니다.




복잡하죠? 최대한 요약해볼까요. 페르디난트 2세가 (할아버지처럼)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영지 반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보헤미아

전쟁 문제에 알자스 할양건이 겹쳐 프랑스를 자극해요.


반황제 동맹이 결성되고 황제에 원한이 있던 덴마크가 참전하며

전장이 독일로 번져요. 덴마크가 유틀란트까지 밀리니 스웨덴이

참전하고 리슐리외와 함께 구스타프는 동맹의 중심이 되요.

브라이텐펠트에서 합스부르크가 박살나죠.


구스타프가 전사하여 동맹이 흔들리자 프랑스가 참전하며

전황은 최대한도로 확장되죠. 처음부터 그랬지만 본격적인

부르봉 대 합스부르크 싸움이 되버렸고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격파하고 페르디난트와 리슐리외가

차례로 죽었으며 결국 로크루아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참담하게 무너집니다. 막판에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이

다시 한 번 승부에 쐐기를 박고요.


독일 — 덴마크 — 스웨덴 — 프랑스로 참전 양상이 확대했고요.

신교 동맹군의 구심점은 구스타프의 스웨덴과 리슐리외의 프랑스.




체코와 북독일에서 시작한 전쟁이 덴마크로 번지고 스웨덴과

프랑스의 참전에 따라 독일 전역이 전장에 휩싸인 겁니다.


결국 힘있는 나라들이 들어와 싸우는 통에 죽어나는 건 독일의

평민들이었어요. 동학전 명목으로 청과 일본이 싸워 구한말

조선 백성이 나가 죽은 사실과 묘한 기시감을 형성하죠.


독일인만 8백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1차 대전으로 1천만

가까이, 2차 대전으로 7천만이 넘게 죽었는데 이건 그나마

세계적 분포지만.. 이는 독일 인구 세 명 중 하나가 사라진

결과죠. 나머지 둘도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지옥이고…ㅜ


이렇게 민간인이 학살된 배경은 약탈 때문이에요. 군 편제의

상당수를 용병이 채우고 있었는데 제때 급료를 받지 못하니

전리품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고 하죠.


이로써 길고 넓었던 최초의 국제전이 끝납니다. 30년이나 되는

지난한 세월,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정권이 직접 참전하거나

간접 관여한 최초의 국가간, international 전쟁이었죠.


폭력의 경과는 이러했고요. 이 여파로 인해 유럽사의 체계를

바꿔버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다음 포스팅에선

이 결과와 영향을 상세하게 다루어 볼까요.


아래 동영상은 당시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것…

보병, 기병, 창병, 총병, 포병 등 기능별 군제가 정착하고 있죠.

머스킷선형진을 이루고 아직 장창이 쓰이고 있으며 중세식

기마 돌격용 창병기, 랜스가 사라졌음을 확인하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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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V

Super Troupers of Modern Scienc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V. 과학 혁명 Scientific Revolution 



16~18세기 유럽의 자연 과학이 혁명적이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사회 문물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민중의 사상과 생활에

영향을 끼친 광의적 현상을 과학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 과학’이라고 분류하는 영역의 학술 기반과 초창기

혁신적 진보를 바로 이 시기에 다진 것입니다. 또한 서양 유럽의

백인계 국가가 현대의 사회 변화를 장악하고 주도하게 만든 가장

실천적인 원동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근세의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선 과학이 발흥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죠. 크게 세 가지를 꼽아보면요.


첫째, 르네상스 시기에 새롭게 발견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학술 문헌을 연구하며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철학 기초와 태세를

일신하여 재정립할 수 있었어요. 흔히 일컫는 신플라톤주의에요.

즉, 인문주의 기반이 없었다면 과학 발전은 요원했다는 뜻이죠.


둘째, 학술적 동기와 지적 수준을 가진 기술자 직업군이 때마침

대거 양성되어 사회 문물 곳곳의 필요와 갈증을 채워주고 있었어요.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엔 이들을

대거 수용하여 학회한림원 형태로 양성하는 체계도 있었지요.

대항해포병전 같은 사회적 변동의 영향도 분명 있었겠고요.


셋째, 금속 활자 인쇄술이 급진보하여 서적 출판물 형태로 지식이

퍼져 나가는데 일조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지식을 얻으려고

수도원 같은 데서 일일이 필사하는 방법으로만 가능했던 일이에요.

지식 보급이 기득권인 사회였다가 이제 평민에게도 열려가는 거죠.


급진적 과학으로 중세의 벽이 가장 먼저 허물어진 곳은 자연 과학 중

천문학였어요. 하늘에 깃든 신의 섭리를 제고해야 했으니까. 폴란드

신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론과

실측 자료가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어요.


지동설의 생각을 1530년대에 미리 집필해뒀으나 급진적 내용을

발표하기에 신분의 제약이 컸죠. 십여 년 후 죽기 직전에 출판됐고

유럽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선사합니다.


지동설을 천체 역학으로 발전시킨 인물은 케플러의 법칙으로 유명한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였어요.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공전한다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궤적이 타원형이란 케플러 제1법칙을 1609년

신천문학을 통해 발표합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당시

최신 발명품 망원경을 개량하여 목성의 위성을 발견합니다. 1632년

천문대화에서 케플러 이론을 바탕으로 지동설을 역설했는데 이로

인해 죽기 9년 전 종교 재판까지 받습니다. 종교 전쟁이 극에

달하던 때인지라 로마 교황청은 민감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새로운 시대를 몰고 올 철학자들도 과학 연구의 방향성을 논합니다.

몸소 과학 실험을 즐기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1620년에 신기관

통해, 군인 출신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1637년에 방법서설로 각각

자신들의 자연 철학 지론을 펴 후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땐 지금의 과학을 자연 철학이라고 불렀답니다.)


영국의 명의 윌리엄 하비는 심장의 펌프질로 동맥, 정맥 및 순환계가

혈액을 공급 받는다는, 지금은 지극히 상식인 원리를 처음 내놓아

생리학 분야에서 시대를 앞서간 인물입니다. 1628년 일이고요.


아일랜드 출신 로버트 보일은 지금 화학의 기본 원리, 보일의 법칙

1662년에 발표했어요. 일정 온도와 일정 질량인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이분은 리트머스 시험지도 발명했어요.


17세기 후반 보일과 같은 시대 영국에서 아이작 뉴턴에 이르러

과학 혁명의 정점이 찍혔다고 보면 됩니다. 과학사상 최고의 명저로

꼽히는 프린키피아,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1687년에 발표해

고전 물리학뉴턴 역학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어요.


운동하는 물체에 가한 힘이 질량 및 가속도에 비례한다는, 이른바

뉴턴의 운동 법칙은 지구 중력의 비밀을 밝혔고 나아가 모든 우주

천체에 공통적으로 만유인력이 존재함을 인류에 알려줬어요.


뉴턴의 공적은 수학에도 미칩니다. 일찍이 갈릴레이도 한 연구했던

미적분 기법을 개발하여 물리 역학 연구를 진일보 시켰어요. 같은

시기 독일에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역시 미적분을 완성했고요.


이 시기는 영국과 프랑스가 국가적으로 과학자를 양성하고 독려한

때입니다. 유서깊은 영국 왕립 학회가 1660년에 찰스 2세의 재가로

설립되었고 프랑스 과학 한림원은 1667년에 루이 14세가 만듭니다.


양국의 아카데미를 오가며 가장 활발하게 연구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과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였어요. 토성의 고리와 타이탄

위성을 관측하고, 진자 시계를 발명했으며, 하위헌스의 원리

알려진 빛의 파동설을 1690년 논문을 통해 정립하였죠.

(종전에는 독일식 ‘호이겐스’로 불린 인물)


앙시앵 레짐 프랑스의 공직자인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85년

학자들 입회 하에 행한 실험에서 물의 조성이 수소와 산소임을

알아내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소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우뚝 섭니다. (악덕 세금 징수원 전력

때문에 몇 년 후 혁명군에 의해 참수되는 비운도..)


19세기 인류를 미몽에서 일깨운 최고의 연구는 진화론일테죠.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출간한 ‘종의 기원’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어요.


세기말의 마지막 충격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1899년에 출간하면서… 정신 분석학의 과학성 논란은 그렇다

쳐도 인간 내면의 무의식 탐구는 모든 학문에 영향을 줬죠.


이렇게 장구한 역사와 노력 끝에 흘러간 과학 혁명의 최정점을

중세말 기준으로 꼽는다면 뉴턴 역학이 완성된 순간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191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고전 역학을 파훼한 때를 현대사의 모멘텀으로 꼽을 테고요.




미국의 현대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음악사적 중요도도 크거니와

과학자를 소재로 완성도 높은 오페라를 발표하여 종종 화제이죠.

이미 갈릴레이, 케플러, 아인슈타인을 주제로 작품을 발표했답니다.


가장 최신 2009년작 케플러를 맛보시고..



2002년작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대략 이렇구나..



가장 유명하고 오래 된 1976년작 해변의 아인슈타인.. 느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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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I

Reformation and Wars of Religion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I. 종교 개혁 Reformation 



종교 개혁은 중세 유럽인의 정신과 생활을 장악하던 가톨릭의

구체제가 신교라는 교파 분리로 도전받은 종교 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국정의 관리 행정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근대적 국제 질서를 다진 변혁으로 분석할 여지가 더 크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바..

첫째, 기독교 체제의 구속을 탈피하고 난 이후에야 유럽인들이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자유를 얻어 정치 제도를 일신하고 현재의

민주정 체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요.


둘째, 현대인들의 상상과 달리 중세의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 기호

차원의 종교가 아니라 지역 교구 차원에서 신도를 관리하며 국가

행정 체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사 국정 시스템의 역할을

해냈는데 종교 개혁으로 이것이 통째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혁 운동의 실제 모습이란 것이 현대인들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회 일부 종교인들의 평화적 활동으로 점철되지 않았고,

제후와 영지의 거주민이 전력을 다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 정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시발점으로 1517년의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꼽는 일은

오랜 통설입니다만. 그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한 존 위클리프가 있었고 1415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잡혀 화형 당한 얀 후스 등이 있었죠.


독일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문에 붙인 행위는 일종의 대자보 같은

거고요. 오늘날로 치면 기자 불러 발표문 읽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정치 사회적 의사소통 행위로 보면 됩니다.


취리히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미 1516년부터 스위스 용병의

활동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1523년 시의회에서 67개 신조

주장하며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어 그의 가치가 늦게 발견된 거지요.


요절해 활동이 짧은 츠빙글리나 농민 전쟁에 반대한 루터와 달리

진정한 교회 개혁장 칼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신교 교리가

정교 일치의 신정 자치제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제네바에서 몸소

보여줬고 장로교 체계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교 운동에 대한 영국식 반응이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인데

성공회란 것이 사실상 교리에선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긴 해요.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였던 헨리 튜더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교회법상 적법한 이혼으로 후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죠.


(네, 현대 국가의 성문법이 해결할 생활의 영역을 교회법

민간의 관습법을 해석하여 푸는 사회가 바로 중세랍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 칼뱅식 청교도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후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

흐름에 큰 돌발 변수로 작용할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체제를 밀어 붙이다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슈말칼덴 전쟁

휩싸이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제후 및

봉토의 루터교 선택권을 인정하며 항복 선언을 합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위그노 전쟁의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었고 구교인 발루아 왕가의 족보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위그노 앙리 4세가 즉위하며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한 후에야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통일 강대국의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지대 국가들 중 상공업이 활발했던 네덜란드가 신교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스페인 호구 노릇에 신물이 나 합스부르크의 가톨릭

강요에 반발하였죠. 그들의 독립 의지는 16세기 후반 80년

전쟁으로 폭발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결실을 맺게 되죠.


그래요. 17세기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로 인해 위기를 맞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호시탐탐 합스부르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었죠. 1618년에 30년 전쟁이 터졌습니다. 80년 전쟁 중이었죠.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해요.)


30년 전쟁은 종교 개혁의 정점을 찍은 대사건이자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이었으며 유럽 최초의 국제 대전입니다. 유럽의 모든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어요. 심지어는 오스만 제국까지도.

또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죠. 자그마치 8백만 명..ㅜ


30년 전쟁의 한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이, 다른 편에는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균형을 이루었어요. (위그노들을 학살한 주제에

프랑스는 신교 진영이었죠. 국제적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요.)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라 워낙 함수 관계가

복합적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 종속적 구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는 거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제법이란 도구가

생겼거니와 이제 영지나 봉토에서 근대 국가 개념이 등장했고 각

국가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각자도생하여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둘째, 유럽의 세력 지형이 차츰 현대와 비슷하게 변화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은 정점에서 하향세로 가고 스페인도 저물어가며

새롭게 부르봉의 프랑스가 최강자 자리를 넘보게 되었어요.


영국은 내전으로 불안불안하여 전쟁에 직접 뛰어들진 못했고..

영국의 국력이 드러나는 때는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렵입니다. 17세기는 무역으로 돈벌고 청교도로 골치 아픈 중…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필두로 영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새로이

탄생합니다. 네, 이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꽤 벗어나게

되었어요. 스위스도 독립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맹활약한 스웨덴도 상당한 국익을 챙겼죠.


17세기 후반에 가서 해상 개척의 판도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영국(내전을 끝내고 명예 혁명을 완성)과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양강 구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양국

모두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박차를 가하죠.


요는, 점점 우리가 아는 현대 유럽의 국경선이나 국제 관계의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개전했지만

결과는 정치 구도와 국제 관계로 매듭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나 종교 전쟁이 절대로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며 거대한 정치 역학 관계에 광풍 같은 변혁을 몰고 온

시대 패러다임의 대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랍니다.




2003년에 나온 작은 독일 영화 루터조셉 파인즈 연기를 보며

5백 년 전 독일 제후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일계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지아코모 마이어베어는 숱한 성공작을 만들었는데 1836년

초연한 그랜드 오페라 위그노 교도가 있어요. 아래 프러덕션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 버젼인데 아예 홀로코스트 분위기로

갔네요. 종교 전쟁과 나치 탄압.. 비슷한 듯해요.



위그노 전쟁 중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대놓고 묘사한 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작 여왕 마고가 진정한 걸작일 겁니다. 아래

동영상에서 5분께부터 나오는 학살 현장 묘사는 프랑수아 뒤부아의

아래 그림과 많은 유사성이 관찰되기도 하죠. (미성년자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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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

Age to Discover and Explore New Maritime Rout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 대항해 시대 Age of Discovery 



이 현상을 가리키는 번역어는 discoveryexploration인데

유럽인의 관점에서 처음 발견하고 탐험한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탐험에 목을 매야 할 이유가 있었죠.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동방에 공적으로 등장하여 지중해를 통한

향신료 무역로가 완전히 막혀 버렸기 때문이에요.


1453년에 그렇게 길이 막힌 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엔

해상 봉쇄를 풀어보려는 노력이 정말 미친 듯이 전개되었어요.


특히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혜안을 가진 당시로선 특이한

인물, 항해 왕자 엔히크 대공이란 선구자를 통해 사하라 사막을

넘어 서아프리카까지 항로를 개척하는 등 앞서가기도 했어요.


그 무렵 스페인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영지

수복 활동, 레콘키스타가 완료하여 카스티야이사벨 1세

아라곤페르난도 2세가 통혼으로 연합 왕국을 구축하였죠.

(우리가 아는 스페인이란 나라가 이때 처음 만들어져요.)


스페인 입장에선 국내 문제도 해결되었겠다 이제 포르투갈과

해상 개척을 놓고 미친 듯이 경쟁하여 승부를 볼 일만 남았죠.


당시 지중해 해상 강국이었던 베네치아제노바를 제치고 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항로 개척에 앞섰는지, 이유는 간단해요.

뒤로 막힌 바다인 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나라들이니까요.


양국 해상 개척의 목표는 단 하나, 후추 주산지인 인도까지 갈

최고의 대안 항로를 개발하는 것이에요. 바다에 익숙한 선원 등

새로운 일감을 찾아 모험하려는 이들이 양국의 문을 두드렸죠.


바르톨로뮤 디아스 같은 포르투갈인은 국왕 주앙 2세의 명으로

에티오피아를 찾아 나섰다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발견했죠.

대륙을 우회하여 동진할 가능성을 발견한 1488년이었어요.


제노바의 지도 제작업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오히려 서진으로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열심히 이사벨 여왕을 설득 중이었죠.

6년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카디스에서 출항한지 석 달 만에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바하마 제도에 당도할 수 있었어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자각이

되는 순간이었지만요. 우리 제발 ‘발견’이란 말은 쓰지 말아요.

원래 거기 살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뭐가 되냐고요.


이렇게 과열 양상이 되니 1494년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나서

양국에게 세상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주는 웃기지도 않는 약속도

맺어요. 동시대 세상 누구도 몰랐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었죠.


그랬거나 말거나 포르투갈에서 출항한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가

개척한 희망봉 항로를 완결하여 1498년에 인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죠. (중국인과 아랍인은 이미 수백 년 전에 해낸 일인데.)


콜럼버스 지원이 늦어진 이유가 지구 평면설을 믿었기 때문이란

낭설이 한때 유행했는데, 중세 지배 계급도 지구가 둥글다는

상식은 갖고 있었어요. 다만 새로운 땅의 존재를 몰랐던 거죠.


이쯤 되니 지구가 구체란 사실을 입증할 임팩트가 필요했어요.

소싯적에 인도와 동남아에서 일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스페인의

산루칼 항을 출발한 것이 1519년의 일.. 21년엔 결국 필리핀의

섬에 당도하게 되요. 실증이 된 거죠. 세계 일주 후 그는 전사했지만.


마젤란은 꿈과 낭만이 가득한 뱃사람 세대의 마지막 주자였어요.

그 이후는 국가 대 국가의 총력 경쟁 구도로 넘어갔고 탐험가의

개인 작업이 아니라 군대와 총독, 성직자가 활약하는 시대에요.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충분히 도전할 만한 이문이

보장되는 사업이기도 했어요. 마젤란은 배 5척으로 출발해 겨우

1척이 향신료 자루를 싣고 왔지만 투자 비용을 뽑고도 남았대요.


요새 들으면 뭔 소리냐 하겠지만 당시 통후추는 대단한 사치재에

가치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화폐로 쓰이기도 했을 정도라니까요.

용병이 보수 대신 후추 몇 알 받고 기뻐했다는 얘기가 전해져요.


레콘키스타의 완료와 이베리아 반도의 팽창으로 중상주의가 활짝

꽃피웠지만 이때 두 나라 왕실의 경제 관념은 상당히 저렴했어요.

식민지에서 긁어온 금괴의 양으로 국부를 측정했다 하네요. 이미

포르투갈은 1452년부터 넘치는 금으로 금화를 찍기 시작했다죠.


이렇게 시작한 중상주의 시대 통화 기능의 사치재는 후추나 정향

향신료에서 으로 옮겨가 아메리카에서 쏟아져 들어온 으로

정점을 찍었답니다. 중앙 정부가 조절 기능을 잃고 과격한 투기

자본이 형성되어 종국에는 두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말았습니다.


16세기 말로 넘어오면 왕권 강화의 기틀을 다진 영국, 그리고

스페인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상인 문화가 발달한 네덜란드가

기존 양대 강국에 도전장을 들이밀게 됩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 같은 영국인은 해적으로서 열심히 스페인의

무역선을 노략질하여 잘 갖다 바치다가 급기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명하여 해군 제독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네요. 결국

칼레 해전을 기점으로 영국은 신흥 강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17세기 쯤 되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력 자체가 곤두박질 치고

영국네덜란드가 대서양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경쟁해요. 영국은

이 영란 전쟁을 거치며 훗날 대영제국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더 이상 복속할 신천지가 없음을 깨달을 무렵에 이르러 대항해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에는 확보한 식민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의 무대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러나 신대륙이니 발견이니 탐험이니 하는 개념 속에 스스로

미개한 줄 모르고 날뛰던 유럽인의 심리가 있음을 알아야 해요.

이들 이전에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가진 항해술이

훨씬 뛰어났고 최소한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죠.




대항해의 묘사를 사기꾼 같은 콜럼버스를 중심으로 묘사하는데

대해 항상 불만은 있었는데요. 대중 문화에서 딱히 다른 사람을

소재로 써서 성공한 예가 없긴 하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1992년에 리들리 스코트제라류 드빠르디유

및 시고니 위버를 데리고 내놓은 1492 콜럼버스와 그 유명한

사운드트랙을 링크로 걸 수밖에요. 영화 자체는 볼 만해요.

지나친 미화는 거르시고요. 반젤리스의 음악도 괜찮죠.

이 작품 원제는 1492: Conquest of Paradise..



1992년은 바하마 제도 발견 5백주년인 해라 기념 영화가 하나 더

경쟁했어요. 이 작품은 Christopher Columbus: The Discovery

란 원제.. 007 영화를 주로 만든 존 글렌이 연출했는데 폭삭

망했어요. 주연 배우를 듣보잡으로 캐스팅하다 보니…

조연진은 정말 화려했는데..ㅜ



신항로 개척과 식민지 정복이 얼마나 맨땅에 헤딩하는

미친 짓이었는지 간접 체험을 원한다면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이 클라우스 킨스키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만들었다는

애증의 작품 아귀레, 신의 분노를 추천해요. 72년작이죠.

전도가 안 먹히니 대뜸 원주민을 살해하는 씬이 충격적이죠.



지리상 발견의 정치적 미화에 성공해 유럽 최고의 영화제서

황금 종려상을 받은 유럽인 롤랑 조페미션은 참 미묘한

영화에요. 제레미 아이언스로버트 드 니로 찾는 맛으로

보죠 뭐. 잘 찾아보면 리암 니슨도.. 엔니오 모리코네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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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

Renaissance, the Rebirth of Humaniti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 문예 부흥 Renaissance 



르네상스, 재생(부흥), rebirth 이야기에요. 14~17세기 유럽인의

생각과 감정을 열어젖힌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예술 운동입니다.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인근

베네치아제노바로 옮겨갔고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제네바를 거쳐 네덜란드, 영국, 폴란드까지 퍼져 갔다고 합니다.


주로 문학과 회화, 조각, 건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유일신 교리의

성상화에 치중했던 중세 성향을 탈출하여 철학적 사고와 예술적

표현의 중심에 인간이란 존재를 대체한 광역 거시적 사조랍니다.


문예를 ‘부흥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

성향을 되살리고 고전으로 돌아간다는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에요.


장장 19세기까지 통일 군주 없이 공화국이나 공국으로 찢어 살아야

했던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로서는 그네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고대 시절 화려했던 문화의 향수거든요.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가 본래는 이태리어인 rinascimento

라고 불려야 정상이지만 19세기 중반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가

불어로 규정하며 대히트를 친 바람에 그렇게 고착해 버렸다죠.


피렌체나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발발한 이유는 말이죠.. 중세 후반에 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한

사람들이 이런 해양 국가의 중추 계급인 상인 집단이었거든요.


이 나라들은 해양 중개 무역으로 성장한 상인들이 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고 과두 공화정 형태의 정치 체제로 빽과 돈줄과 문화

예술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답니다.


이들이 중개한 무역 루트는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소아시아와

중동, 인도, 중국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동방이었는데 보통 이슬람

상단을 통해 향신료, 도자기, 차 등 사치재를 구해 이문을 챙겼어요.


이렇게 넘어오는 과정에서 물자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제국이 잘 보존해온 (정작 자신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대 문물이

역수입되어 사람들을 일깨우고 르네상스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문화적 변동이란 것이 이렇게 정치와 경제의 기반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지라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이 발호하며 동방 루트를

막아버리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쇠퇴하고 맙니다.


14세기 초를 시점으로 잡는 것이 통설인데 이는 이탈리아 문학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활동 기간이 대략

1308년 무렵부터 사망하는 1321년까지 이어지기 때문이죠.


단테가 정계에서 축출된 후 망명 생활을 하며 창작한 신곡

이태리어를 처음으로 문학의 언어로 끌어올린 명작입니다.

중세 유럽인의 내세적 종교관을 엿볼 수 있기도 하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어 국가 대소사를

라틴어 시문으로 남겼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시로 썼으며 고대

문헌을 발굴 연구하여 후대에 영향을 준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와 교류했던 지오반니 보카치오는 열흘이란 속뜻을 지닌

이야기식 서사시 데카메론을 통해 당대 유럽인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고 사회상을 우회적으로 비꼬기도 했죠. 서사

구조는 영국의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로 계승해요.


이탈리아 문학의 태동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요.

네덜란드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우신예찬을 썼고

스페인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창작하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16세기 초를 화려하게 수놓은 예술가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요.


이들은 교황령을 비롯하여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아 오늘날까지

인류적 자산으로 분류되는 초월적 걸작들을 창작해냈습니다.

한두 번 곁눈질 만으로도 거장의 자취가 느껴지실 겁니다.


다 빈치의 모나 리자라든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든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든가…



르네상스는 순수 문예작의 범위를 초월해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요. 이전 시대 거장의 스타일과 작풍이 한창 정치적 격변을

겪던 북부 공화국 인민의 의식 성장을 반영하기도 했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저작하고 폭풍처럼

일생을 살다 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며, 그가 남긴 충격적 사상은

이후 고전적 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정치학 연구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와 동시대에 영국에서는 헨리 8세 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토머스 모어유토피아를 통해 민중을 배격하는 위정자의

위선을 한껏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모어의 실제 삶도 참

극적이었죠. 헨리 8세에게 직언하다가 참수되었답니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집권한 17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뒤늦게 꽃을 피웠다고 봅니다.

현대 영문학의 효시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현대 대중 문화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주 자주 언급됩니다. 재작년에

개봉한 다빈치 코드 3부작 중 최졸작인 인페르노에서는 시종일관

산드로 보티첼리가 15세기 말에 그린 단테 신곡의 삽화가 삽입되요.



물론 레오나르도를 상업적으로 폭발시킨 건 댄 브라운론 하워드죠.

재미는 있는데.. 이 얘기 아직도 믿는 분들 계시려나요.



또한 데이빗 핀처가 모건 프리먼 및 브래드 피트와 작업하여 1995년에

내놓은 히트작 세븐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언급되는 인류의 일곱 가지

죄악이 직접적인 내러티브의 소재로 언급되죠. (미성년자는 주의)



세르반테스는 작품과 함께 영원히 사실 겁니다.

심지어는 뮤지컬로도 살아남을 거에요.

아랜 72년 토니상 공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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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r Incidents from European History over

International Relations Realm




국제 관계학의 역사에서 시대별 맥락을 짚을 때 반드시

검토하고 분석하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그 역사와 시기를 보면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백여 년

언저리의 간격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여 매우 흥미롭죠.


오늘은 이런 국제적 사건과 국가간 조약

역사를 요약하여 정리해 볼까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Fall of Constantinople 



1453년이 중세를 끝장 낸 연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해 서양 중세사 최고의 사건인즉슨..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한 일일테죠.

무려 2200년을 이어온 제국이 멸망한 사건이니까요.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통치의 절정을 찍고 6백 년 넘게

존속한데다 폐쇄적 기독교 문화 속에 골골하던 유럽을

아득히 초월했던 14~17세기 세계의 패권국이자

동시대 유럽 군주들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나비 효과로 지중해 동쪽 항로가

막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 일주 항로를 개척했으니

역사의 거대한 새옹지마이자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죠.

(동양의 신비… 후추를 어디서 수입하냐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항해 시대, 피렌체 등 도시 국가들의

르네상스 인문 혁명, 거기에 북독일의 종교 개혁이 바야흐로

적정 혼배합하여 유럽의 근대를 열어 젖히는 찰나였어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Peace of Augsburg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 개혁

일단락된 사건이자 루터교를 공인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신교를 인정한 계기의 바로 그 사건입니다.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맞서 전쟁하던

신교 영방국들이 페르디난트 1세와의 극적인 합의를 통해

루터교 종파를 공인한 군주간 합의 사건이라 볼 수 있어요.

(페르디난트는 카를의 동생이자 독일 대리 통치자..)


페르디난트는 당시 선제후와 농민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교세를 꺾기보다 상호 협력하여 자치를 인정하는

개혁 성향으로 독일권 제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사람..


화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개별 제후의 종교 통치권을

황제나 교황과 분리하여 최초로 인정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해당 영지의 종교를 제후가 택한 종파로 정한다는 내용이죠.


허나 루터교는 인정 받았는데 당시 더 진보적 성향이던 칼뱅

장로교 제후국들이 제외된 문제가 여전히 잔존한 상황이었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halia 



상호 경쟁하던 국가의 군주들이 독일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모여 30년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

바로 그 조약입니다. 오늘날 국제법의 효시라 하죠.

(요샌 웨스트팔리아로 부르기 시작하기도..)


1618년에 시작한 종교 전쟁 후반부 중요한 변곡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도 맞물린 17세기 최대의 사건이

바로 30년 전쟁입니다. 근대 최초의 국제전이라고 하죠.


루터와 칼뱅에서 시작한 투쟁이 130년 만에 여기까지 이른

겁니다만, 프로테스탄트 전쟁을 단순한 종교 문제로 보면

부족하고 교황과 황제 중심 거대한 국정 체계 패러다임이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용트림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신교 투쟁의 결과물이 결국 개별 제후가 다스리는 봉토의

자치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인 것에서 알 수 있죠. 이제 황제의

통치를 받는 제후의 시대가 아니라 독자적 군주가 된 겁니다.


주권, sovereignty의 개념이 본격화하고 이로 인해 절대

왕정 및 왕권 신수설이 대두되는 발판을 마련하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동인도 마련되기 시작하는 거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Peace of Utrecht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조약입니다.

생소한 전쟁일텐데 유럽 왕가 간 세력 균형전으로 이해해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지는 해’ 합스부르크

프랑스를 다스리는 ‘뜨는 해’ 부르봉 왕가가 주인공인데요.

(부르봉 킹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 확장욕 쩌는 분..)


스페인 왕위 계승전에 루이 14세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가

선순위로 떠오르는 상황을 오스트리아와 영국과 네덜란드가

막아서며 발발한 전쟁입니다. 부르봉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병합하면 견제 불가능한 거대 국가가 탄생하기 때문이죠.


의외로 (그때까지 약체로 분류되던) 영국의 견제가 제대로

먹혀 부르봉이 스페인을 계승하되 프랑스 왕위는 포기하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됩니다. — 루이 14세, 야욕 좌절…


유럽 영토에서 어느 한 나라가 잘 나가 바보짓을 벌이면

엇비슷한 국력의 나라들이 합심하여 다구리를 먹이는…

현재도 이어지는 불문률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주권에 영토 개념을 넣는 법리도 형성되었고요.




1815년,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를 패자로 공인하며

이후 전 유럽에 불어닥칠 자유주의 바람에 제동을 걸고

왕정 복귀를 천명한, 보수 반동의 대명사격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재한 걸로 유명하죠.


프랑스 대혁명 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유럽

각국에 전쟁을 벌였는데요. 역설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것은 혁명이 낳은 프랑스의 정신이었어요. 자유, 평등, 박애.


회의 대표자는 힘센 나라의 왕과 귀족이었죠.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자국에 혁명이 수입되면

꼼짝없이 목이 날아가는 분들.. 국경선과 전리품 배당을 놓고

혈안이 되어 똥고집을 부리며 진척이 더디던 중이었는데요.


보나파르트가 유배지를 탈출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라 협정서에 조인을 했다고 해요. 쌩 코메디..

(메테르니히의 댄스 파티도 찾아 보세요. 배꼽을 잡을 듯..)


이른바 유럽 협조 체제, Concert of Europe이란 국가간

공조가 명문화하여 등장한 거에요. 핵심은 위 위트레흐트 때

다구리.. 와 대동소이하고 이 시스템이 40여 년을 유지했죠.


그러나 한번 불씨를 당긴 자유주의의 대세는 거스를 수 없어요.

30년 7월 혁명(‘레미제라블’ 배경), 32년 영국 선거법 대개혁,

1848 연쇄 혁명과 공산당 선언… 이미 불길은 타오른 거죠.




1919년, 베르사유 조약 Treaty of Versailles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하고 독일의 패배를 선언하며

막대한 배상금 조건으로 두번째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독일 제국과 연합군 승전국들 사이의 조약입니다.


빈 회의로 패전국 프랑스가 실질적으로 잃은 것이 없던 데 비해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는 독일인들에게 참담한 치욕이었어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닥쳤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몰락했으며 히틀러 집권의 계기가 되었죠.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가 이 비극을 예견했다는 거 아시죠.

(이때 협상 대표단 중 일원이었다가 참다 못해 사퇴..)


특히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뻘짓은 어마어마했어요. 그의

하이라이트는 이렇다 할 강제력을 갖지 못한 국제 연맹 창설로

‘마치 무언가 해결된 듯한’ 국제 관계의 판타지를 조장한 점이죠.


장렬한 뻘짓의 대행진이 전간기 20년의 나날을 채워요.

바야흐로 한스 모겐소가 현실주의로 스타가 될 조건이 형성..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죠.


거기에 세상은 대공황의 광풍에 휩싸이고 있었고요.

이런 악조건에 어떻게 전쟁이 또 안 날 수 있겠어요.




1945년, 얄타 회담 Yalta Conference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루스벨트와 스탈린과 처칠이

모여 깡패처럼 전후 국제 질서를 결정지은 그 회담입니다.

우리나라는 여기 놀아난 직접 피해 당사자국… 아시죠?


베르사유 조약이 종전 직후 전쟁 문제를 처리하는 성격인데

반해 얄타 회담은 종전이 임박한 시점에 전후 문제를 미리

조율하는 강대국 슈퍼 파워들의 미래 회의 같은 거였죠.


이 사건의 가장 큰 상징성은 팍스 브리태니카의 레짐이 이미

저물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대항마로 소련이 등장하여

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린 실질적 계기라는 점이에요.

(실제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을 이끌어냄.)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한반도가 둘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폐해를 입어야 하는 원인을 만들었죠. 도대체 왜 때문에?!

패전국 일제가 아닌 우리가 분단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냉전이 시작하여 1989년 동유럽 혁명까지 존속해요.

하지만 이 땅의 냉전 파편은 아직도 진행 중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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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War China:

Great Leap Forward & Cultural Revolution




오늘날 중국은 미국에 이은 제2의 강대국이죠.

또 중국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항상 강대국이었습니다.


한번쯤은 들어봤을 ‘조공’이라는 봉건적 외교 원리가

중국의 이런 지역적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요.


중화 국력의 대외 신인도에 의문이 생긴 기간은

수천 년 역사에서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아편 전쟁부터 덩 샤오핑 집권 전까지 시기이겠죠.


현대 중국의 정통성은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계승하는데요. 오늘날과 같은 경제력의 기반은 1978년

집권한 덩 샤오핑으로부터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49~78년까지 중공은 국정의 역대급 저점을 찍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50~60년대를 지배한 정책 실패는 처참했죠.


두 가지 사례가 있었습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이 그것인데요.

마오이즘의 속빈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어요.




대약진 운동, 마오의 경제 공산화 실책



마오 쩌둥이 실시한 대표적 병크 정책들입니다.

굳이 한줄 요약하자면 대약진 운동은 공산주의 경제 정책,

문화 대혁명은 대중 공산주의 운동인데요. 둘다 대실패했죠.


대약진 운동은 소련처럼 산업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아니라

농경제 중심의 체제 구도를 들고 나온 초기 중공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농촌 중심의 변혁을 일으키려는 시도였죠.


일종의 집산화 체제 구축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농이나 자영농의

존재를 부정하고 지역 촌락 단위로 생산 공동체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이 안에서 농업 및 공업 생산을 주도하게 한 거에요.


마을 단위로 생산 수단을 철저하게 공유하여 다 함께 경작하고

밥을 지어먹는 것도 다 함께 한다는 발상이에요. 흔히 시체말로

원시적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을 현대에 재현한 거에요.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하죠? 하지만 이게 가능하겠어요?

‘철저하게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고 했는데 그 실상이…ㅠ


개인 단위로는 숟가락 하나도 가질 수가 없는 구조였어요.

커다란 농경기에서 사소한 잡기까지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발상이니 인간 행위의 미세한 프로세스를 모두 통제한 거죠.


이런 상황에서 사회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떻게 나오겠어요.

자기 것을 가질 수가 없는 상황이니 생산량 따위 개나 줘버려..

이런 형국이 되어 버린 거에요.


생산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는 거죠. 그 목표량을

달성해야 그 공동체의 인구를 먹여 살릴 텐데 각자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쁜 거에요.


이기적인 사람들이군, 하고 비판하지 마세요. 원래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거에요. 현대의 이성적인 한국인이라 한들 이런

상황이라면 같은 행동 패턴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없이 이념에 휩쓸려

정책을 개발한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통계로는 아사자 4천만 명 정도라고..ㅠ

58년에서 62년까지 밀어붙인 결과였죠.




문화 대혁명, 마오이즘식 보수 반동 쿠데타



문화 대혁명은 사실 대약진 운동의 결과입니다.

마오에 대한 지지도가 급감하니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종의 마오 신격화 운동을 벌인 것이 문혁입니다.


반동 쿠데타를 민중 운동화한 것이라고 보면 되요.

홍위병이라고 하는 청년(또는 청소년) 집단이 등장합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젊은 사람들이 마오의 사주를 받아

몰려다니며 우파 인사들을 때려잡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때려잡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생긴 일입니다.

피해자를 조롱하는 두건을 씌우고 때려죽였다고 해요. 헐.


직접 때려잡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미국에선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사람을 ‘사회적으로’ 때려잡았죠.


인명을 살상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또 모르겠는데

오늘날 중국사에 더 치명적인 병크가 또 있었죠.

반달리즘이라고.


홍위병들이 유무형 문화재를 파괴한 거에요.

공자의 사당을 부숴 버리거나 전통 예술 장인들을

때려잡거나 하는… 더 끔찍하죠.


패왕별희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 많을 거에요.

후반부에 세 명의 주인공이 홍위병에 둘러싸여 서로

자아비판을 하는 장면이 바로 이 상황인 거에요.


덕분에 오늘날 중국은 자국 문화재가 자국에 있지 않고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타이완에 더 많은, 웃기지도 않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네요.




대체 왜 이런 일이



한국의 보수 기성 언론은 이런 역사를 보통 공산주의

체제의 폐해 운운하며 단편적으로만 전하는 것 같아요.

의외로 그다지 정확하게 분석은 하지 않는데요.


물론 공산주의의 한계로 볼 수도 있어요.

공산당 정권이 빚어낸 역사 자체가 커다른 모순 덩어리죠.


공산주의 국가에게만 특징적인 현상이었다기보다

마오이즘 독재가 극에 달한 시기의 정책 실패에 가깝겠죠.

독재 정치의 일반적 현상 중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을 거에요.


독재 체제가 경제를 그르치고 대중 프로파간다를 통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을 둘러봐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니까요.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의 프로파간다도 비슷했어요.

이승만은 소위 말하는 ‘국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고

애썼죠. 국부주체나.. 뭐가 다르죠.


박정희 정권은 프로파간다를 발전시켜 법제화해 버렸어요.

그래서 유신 체제가 탄생했죠. 김일성이 북에서 주체 사상을

푸쉬한 바로 그 순간에 말이에요.


대약진, 문혁, 국부, 유신, 주체, 매카시즘…

어쩌면 전후 봉건적 근대성이 아직 종식되지 않은 세계의

마지막 보수 반동적 사건들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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