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블로그 이미지
recently working on music industry and history of rock music, with past history of writing on political science, international relations, world politics, political economy and development macroeconomics ...
잔규네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6)
political economics (76)
rock vocalists (23)
other stories (47)

Recent Post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1. 2020.10.25
    1640년대 영국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제3계급의 역할 2
  2. 2020.06.25
    영국식 입헌 의회 정치의 뿌리, 마그나 카르타
  3. 2019.04.10
    브렉시트, 그게 도대체 뭔데
  4. 2018.10.25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I : 대항해 시대
  5. 2018.06.22
    현대의 한국인들은 헨리 8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6. 2018.06.20
    장궁병 대 기사, 활과 갑옷의 대결
  7. 2018.06.18
    크레시 전투 및 푸아티에 전투
  8. 2018.06.09
    백년 전쟁, 잉글랜드 대 프랑스
  9. 2018.05.31
    롱다리 에드워드 :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Back to 1640s of Britains..

What Happened and Whodunit






영국의 근대사가 현대에 와서 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중요할지 모를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현재 국적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민주 정치라는 것…

democracy.. 짜잔… 알죠?

인류 역사상 이걸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근대의 영국이거덩요.



더 정확하게 시공간을 좁혀 보면 17세기 잉글랜드와

그 주변의 왕국들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였어요.



유감이지만 17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일을

단번에 설명할 순 없어요. 아무리 단순화시켜도 최소한

전반기와 후반기, 둘 정도 시대 구분을 해줘야 합니다.



17세기 전반기 사건을 흔히 청교도 혁명이라고 많이들

들어보셨을 테고, 17세기 후반기 사건을 명예 혁명으로

알고 계실 테죠. 왠만큼 교육받은 현대 한국인들은요.

일단은 그러한데 말이죠..



출신 성분상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계층을 중심으로

청교도식 종교관을 가지고 상업 및 무역으로 세를 구축한

신사 계급의회파 반란 세력이 잉글랜드 국왕권에

대항하여 대략 1640년대부터 50, 60년대까지

벌인 일련의 전쟁과 정쟁 및 국가적 소요 사태…



자, 이렇게 복잡한 사건을 간명하고 단출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본 블로거에게 그런 재주가 없는 거겠죠.










먼저 역사서에 어지럽게 난립하는 용어부터 정리해야 해요.

이 책 저 책에 여러 개념이 난립하는데 각각 가리키는

내용이 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청교도 혁명, Puritan Revolution..은

본 블로거가 판단할 땐 국내에 가장 널리 정착한 개념이에요.

비교적 연식이 되는 사람들이 이 용어로 많이 알고 있죠.



1640년대 사태의 주동 세력이 가진 종교관이 칼뱅파 장로교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고 사태의 기저에 중세 종교 전쟁

깔려 있음을 명시하는 용어인데요.



이 표현이 다소 불명확할지 모르다는 비판이 죽 있었어요.

왜냐..? 사람들이 혁명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란 게, 보통

프랑스 1789년 혁명이나 1830년 혁명처럼, 노도처럼 들고

일어난 민중의 저항, 펄럭이는 깃발… 뭐 이런 거쟎아요.



근데 본 사태는 피치자 하층민보다는 중소 지주 계급인 신사,

젠트리나 요먼이란 제3계급이 중심이고 그 방식도 거리의 폭동이

아니라 엄연히 정규군을 편성하여 전쟁을 벌이는 식이었거든요.

그래서 다소간 본질을 호도할 소지가 있는 표현인 거에요.



영국 혁명이란 말도 프랑스나 미국과 묶어서 편의상 쓰긴 해요.

일관적 표현으로 분류하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사실 영국도

아니고 혁명도 아닌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 애매한 말이죠.













이런 이유로 오늘날 현대 영미권 역사서에서는 대체적으로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란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선호하는 편이에요. 빠르게 정착하고 있는 말인데요.

(아, 물론 영어 표현이 정착해가고 있다는 뜻)



사태의 전개가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쟁의 형태로 벌어졌기에 그래도 가장 사실에

근접한 현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번역어가 문제인데 엄밀히 말해서 이 당시 국체가

영국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아는 그 영국이란 나라는 각각

1707년과 1800년의 연합법으로 탄생한 거니까요.



17세기는 아직 각기 독립적인 세 왕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동군 연합.. 같은 군주 아래 느슨하게 결합한, 곧

연합 왕국으로서의 국체를 형성하고 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번역어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치고 박고 싸운 주무대가

잉글랜드이기도 했고..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할이 전혀 없었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기 때문에, 좀 아는 사람들은 더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죠. 이른바 삼왕국 전쟁 또는 삼왕국 내전, Wars of the

Three Kingdoms 또는 British Civil Wars..



그런데 이 용어도 삼국 시대나 삼국지처럼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히 있어 현대 한국에서 널리 용인되는 건 아니에요.

당연한 소리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위촉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거든요.



주교 전쟁, Bishops' Wars..란 개념도 있어요. 이건 이 모든

사태의 촉매 및 시발점 역할을 한 1639년과 1640년의 전쟁

일부를 가리켜요. 하지만 사실 이 전쟁 내용이 큰 줄기에서

그닥 중요하다고는 볼 수가 없기도 해요.



삼왕국 전쟁이란 개념으로 가면 주교 전쟁 등 전체를 포괄할

수 있지만 보통 많이 쓰이는 잉글랜드 내전의 개념에선 큰

줄거리만 보려는 경향이 생겨 잉글랜드 외 기타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건과 전쟁을 제외하고 논할 때도 종종 있어요.



왜 복잡한 개념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하는지 이제야 알겠죠?

한국 근대사에서 1880~90년대에 달 단위로 연달아 발생하는

복잡한 사건들을 한국인 입장에서도 차근차근 복기하기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현대 사가들의 일반적 경향을 좇아 English Civil War,

잉글랜드 내전으로 1640년대 역사의 표제어를 정리해 볼께요.










잉글랜드 내전의 본질과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사태의 능동적 주체가 누구인가부터 따져보면 어떨까요.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해갈 수 있어요.

청교도, 젠트리, 스코틀랜드



청교도란 제네바에서 태동한 칼뱅교가 영국으로 넘어와 얻은

별칭입니다. 영어 명칭으로 따지자면 또 구분이 되고요. 잉글랜드

내의 칼뱅파는 puritan, 스코틀랜드에선 covenanter로 불렀어요.



칼뱅파 장로교가 영국 땅으로 넘어와서는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내에 터전을 잡아 세력을 넓혔으나 잉글랜드 안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해 나갔습니다. 16~17세기였죠.



청교도가 영국 사회 전체에서 중심 세력이 된 데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합니다. 무엇보다도 상업과 무역 면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16~17세기 영국 경제력의 근간을 형성했어요.



칼뱅파 교리의 예정설에서 근면과 검소를 중시하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면 선천적 계급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급진적 논리가 청교도 경제 활동의 사회적 확장을

지원 사격한 겁니다. 루터교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죠.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 여기에 중앙 왕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중하급 지방 귀족이나 중소 지주층 역시 이런 생각에

동참할 여지가 충분했어요. 16세기 후반기부터 이런 사람들이

똘똘 뭉쳐 영국 정가의 기층을 장악해 들어간 거지요.



이른바 젠트리요먼이라고 부르는 제3계급, 또는 신사 계급

출현한 거에요. 이들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배경은

멀리 백년 전쟁장미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요.



백 년을 훨씬 넘긴 두 전쟁으로 대권에 도전할 만한 귀족 가문의

씨가 말라버리는 통에 중앙 정치를 담당할 인적 자원이 소멸해

버리니 이 빈 자리를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거에요.



그리고 헨리 7세헨리 8세튜더 왕조의 번영을 개창한

국왕들 역시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서 제3계급을

적당히 육성하고 달래가며 정치를 이끌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상층부 인재의 씨가 말라 중간 계층이 급부상하는

사회적 계기는 희한하게도 중세사에서 영국에서밖에 달리

관찰이 되지 않아요. 의회 정치의 씨앗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란 나라의 숙명이 시작된 셈인 거죠.



(그리고 다른 나라 역사와의 차별성이

시작된 지점도 정확하게 바로 여기…)










제3계급의 생각과 삶은 평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왕권이란 거대한 기득권에 맞설 수 있도록 훌륭한

계급 대립 구도가 시의적절하게 형성된 거에요.



당시 평민들도 다 청교도였겠지 지레짐작하는 분들도 많은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생활에 쫓겨 변화에 둔감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보수화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평민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가톨릭이나 어정쩡한 국교회 상태였죠.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는 교리와 의례, 직제 등에서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인위적으로 종교 개혁 추세를 이용한 거니까…)



즉 왕실 — 제3계급 — 평민의 삼분된 계급 구조는 어느 나라든

봉건적 신분제 국가라면 다 있는 현상인데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이 구조가 어떻게 근대화하는가의 핵심은 결국 중간 계급이 어느

쪽에 어떤 철학을 가지고 붙느냐로 역사의 향방이 달린 거거든요.










조선 후기에도 서얼과 실학자 같은 실용적 사상을 가진 중간

계급이 분명히 대두했어요. 그런데 조선이 실패한 원인은

상층부 기득권이 와해하지 않고 임란 후 신분제가 동요하며

되려 양반이 늘어나는 기형적 구조가 양산된 때문이지요.



성공한 민중 혁명을 이룬 프랑스와 러시아는 어떠했나요.

지식인과 군인이 피치자의 편에서 배경 철학을 제공하고

정치 구도 재편에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시대 정신과 비전을 지닌 중간 계급의 역할이 없으면

근대 시민 혁명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추론…

바로 이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거죠.



이런 전차로 조선 후기와 구한말에 아래로부터 혁명의 싹이

움트지 못한 역사를 맞은 거에요. 문제는 위로부터라도

개혁과 혁신이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ㅜ

구한말 기득권의 외교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죠.



제3계급의 역할은 이 정도로 중요하답니다. 흔히 상식 선에서

이 시기 영국 정치가의 대표자로 올리버 크롬웰을 상정하실 텐데

크롬웰이 이 표본 집단 특성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쟎아요.

신기하죠?



자, 다음엔 더욱 골치아픈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로

우리 함께 들어가 보아요.



돌아가신 분인데 어린이 영화 치티치티 뱅뱅으로 유명했던

켄 휴즈 감독이라고 있었어요. 이 분이 1970년에 크롬웰이란

작품을 선보이며 올리버 크롬웰 역에 ‘덤블도어’ 리처드 해리스

옹을 캐스팅했죠. 작품의 흥행은 신통치 않았지만 해리스의

사자후 연기는 정말 후덜덜하군요. 아래에서 맛만 보시지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Magna Carta Libertatum,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현대 영국 불문 헌법의 가장 오래 된 법원*으로서

대헌장의 의의는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편이에요.



*법원 = 사법부 기관 시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법을 해석 적용할 근거로서 참조할 성문 법전이나

관습법 등 일체의 범위.. 法院이 아니라 法源...



charter는 영미법 중 영국 권역에서 협약, 계약, 헌장,

공인, 승인, 인증, 등기, 등록(명부) 정도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말이고요.



미국에서 certify나 register로 받을 법한 표현에

이 말이 들어가는 영국권 실무 용어가 많아요.

현대어 용법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라틴어 원 용어를 풀어보면 자유 대헌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여기서의 자유란 신민 전체가 아니라

13세기 당시엔 주로 귀족으로 국한한 의미였고요.



자유민 전체 범위로 확대된 것은 16세기. 역사 발전의

흐름을 좇아 법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때 이 능동적인 법리 해석에 앞장선 인물이 언젠가

포스팅한 적 있는 에드워드 코크 대법원장이에요.

권리 청원을 주도하여 정치 발전에 기여한 분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 존 왕의 전제적 실정에 반기를

든 귀족들이 역사상 최초로 왕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도록

왕으로 하여금 조인시킨 문서를 가리켜요.



귀족 평의회, Council of 25 Barons란 개념이 왕권을 제한할

기구로 등장하는데 영국식 내각제 의회 민주 정치의 원형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겠고요. parliament의 전신이겠죠.



King John of England.. 영국사에서 지지리도 인기없는

군주의 대명사에요. 하필 선왕인 형 리처드 1세사자왕..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지라 더더욱 비교되어 까이는 거죠.



사자심왕 리처드가 대중의 상상과는 달리 불어를 구사하고

내정에 소홀한 군주이긴 했어요.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전쟁 능력이 과장없이 진짜배기인 건 백퍼 옳아요.



오늘날 민족 국가의 관점만을 전격 적용하여 사자심왕 리처드를

평가할 순 없지만 당대에도 그렇고 이후 역사에서도 영국인들의

보편적인 애정을 듬뿍 받은 군주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죠.



잊을 만하면 줄기차게 영화화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쟎아요.

하필이면 즉위 직전에 자기 형과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인지라

존 왕이 더욱 밉살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거고요.



실제 존 왕의 실정은 위태위태했어요. 이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가 바다 건너 프랑스 카페 왕가 주변에 영지를

갖고 있어 우리가 아는 세력권 지도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덧붙여, 플랜태저넷 왕족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지금과

많이 다른 중세 영어는 농노들의 말이었다 하고요.)










원래 사자심왕이 프랑스 땅 영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의 라이벌이던

카페 왕족 필리프 2세가 공격하여 지휘관으로선 비교도 안 되게

능력없는 동생 존 왕이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요.



이를 탈환하기 위해 존 왕이 무리하게 군비를 충원해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세금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귀족과 자유민, 농노들이 똘똘 뭉쳐 반발한 것…

이 점이 대헌장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문건상의 정치적 자유가 주로 귀족에게 국한한 건 사실이지만

귀족들이 반발하는 데에 시티 오브 런던 길드 소속 자유민들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노들이 적극적으로 합세했기에 헌장의

시대 정신이 시민의 총의를 담았다고 해석할 근거가 충분한 거고

무엇보다 막장 상황을 조장한 당사자가 존 왕 본인이었으니까요.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바다 건너서 십 년도 넘게 전쟁 노름에

빠졌지만 워낙 전략가로서 무능력한지라 허망하게 패배하고

돌아온 거에요. 거기다 귀족의 딸을 범하려던 적도 있다나요.

귀족들이 있는 대로 꼭지가 돌 수밖에요.



존 왕에게 그 어떤 억울한 상황 요인 하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쉴드 쳐줄 만한 꺼리도 없이 본인의 무능에다 통치자로서

기본 인성의 실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귀족들이 급기야 거병하고 교활한 존 왕이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아첨하여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지만

반란군이 런던 성곽을 포위하고 국왕파 내부 동조자를

포섭하는 등 상황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스티븐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로 양쪽이 템즈 강 남쪽에

모였고 왕권 제한을 약속하는 문서에 존 왕이 조인해버리는

듣도 보도 못하던 초유의 사태로 발전하죠.



1215년 최초 조인시엔 서수로 조항 구분이 없었어요. 1759년

윌리엄 블랙스톤 대법관의 영국법 주해라는 이론서를 통해

총 63개조로 정리되었죠.



대부분의 조항은 이후 일반법으로 대체 입법이 이루어졌으니

역사적 의의 이외에 현대적 의미는 없는 편이긴 한데요.



제12조를 보면 ‘군역 대납금 등 모든 과세는 오직 (시민의) 총의에

의해서만 이를 부과할 수 있다’고 하여 1215년 상황을 직접 엿볼

수 있고요.



제39조가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하거나 그 법익을 강탈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현대에 와서도

재판 법원으로 유효한 세 가지 조항 중 하나입니다. 현대적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법조문이자 법리임을 알 수 있겠죠.









이 때부터 영국의 민주 정치가 시작되어 의회가 짜잔 열리고…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 한국에서 영국사를

잘 안 가르치기도 하니까 — 사실 이 문서는 조인 직후부터 그

효력을 의심하고 1215년 해프닝은 사실상 상징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진실에 더 부합한답니다.



당장 조인 직후 존 왕은 (치사하게도) 교황에게 쪼르르 달려가

헌장 무효화를 요청하고 교황이 이를 교서로 내려 내전이

벌어지거든요. 개싸움인 거죠.



이후 국왕들과 몇 차례에 걸쳐 개정도 하고 밀고 당기고 개싸움이

지속되는데 핵심은 이거에요. 왕은 안 지키려고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리고, 귀족들은 틈날 때마다 문서 들이밀고…



그럼 오늘날 민주 정치의 효시 어쩌구…는 뭔데? 하실 텐데..

정작 옛날 옛적 무슨무슨 종이 쪼가리에 서명했네 어쨌네..

그런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민주 정치란, 문서나 법전의 종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주권을 당연시하는 동시대 시민의 사회 의식시대

정신에서 나오는 힘, 바로 그것 아니겠어요?



대헌장이 역사적 명분과 권원으로서의 힘을 갖게 된 시기는

전술했듯이 16~18세기. 바야흐로 계몽 사상으로 무장한

자유 시민의 정치 의식이 성숙하여 그에 합당한 전례를

능동적으로 찾아 공부하던 그때인 거죠.



이때에야 비로소 대헌장에 헌법으로서의 권위가 생겨난 거에요.

엘리자베스 1세제임스 1세의 자랑스런 치세를 몸소 겪고

네덜란드와 맞장뜨며 강한 나라로 가는 발판을 자기 손으로

일구어 가던 잉글랜드 삶의 현장의 지성인과 신민들…



그들이 성숙한 체제를 만들어 후손에 물려줘야 한다는 자의식에

스스로 눈을 뜬 거에요. 물론 겪어야 했던 세월은 힘들었어요.

허나 권리 청원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명예 혁명

권리 장전의 지난한 세월을 통째로 견뎌내고 더러는 고난에

희생되는 와중에 공동체가 지향할 가치를 찾아낸 거에요.



찾고 찾다 보니 자신들의 뿌리는… 아,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에

있었던 것이로구나. 몰랐었는데, 이젠 스스로 알게 된 거죠.



제헌절이 따로 없는 영국… 고작 달력 쪼가리에 기념일을 박는

것이 중요할까요. 박물관에 잠자던 대헌장의 거울에 비친 자신들

마음 속에 헌법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은 거에요.



에드워드 코크, 올리버 크롬웰, 존 로크, 윌리엄 블랙스톤

이런 이름들이 중요하다기보다 이들 뒤에서 세상을 움직인

평범한 영국의 시민들에게 더 큰 헌사를 돌려야겠죠.



이런 중차대한 시대 정신을 담고 있기에 수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대헌장을 법리적으로 계수했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연방 헌법UN 인권 선언



우리나라도 마그나 카르타란 말이 고유 명사 내지

관용적 수사로 발전한 것 보면 제도권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헌장의 현대적 이모저모를 다시 새기는 계기였길 빌고…

대영 도서관이 마련한 귀여운 동영상을 보며 즐겨봐요.









그리고 리처드 1세 얘기 나온 김에, 역대 영화화 사례 중

사자왕을 가장 포스 넘치게 묘사한 히트작을 즐겨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Brexit : What the Hell’s That?






자, 21세기 국제관계학 역사에서 이만한 떡밥도 없어요.



스코틀랜드 및 카탈루냐 독립도 있고 팍스 G2 체제도 있고

북핵 관계를 둘러싼 북미의 기싸움도 있겠고,

강대국의 재미있는 떡밥은 여럿 있지만…



아니, 도대체 제국주의 2백주년을 향해 가고 있는 (1830년 기준)

작금의 인터넷과 AI의 시대에 도대체, 대영제국 씩이나 하는

그 나라가 저런 바보 같은 덫에 걸릴 거라고 그 누가 상상을..?






희생양




영국민은 EU에 왜 이질감을 느낄까요?

아니, 질문이 잘못 된 건지도. 영국인은 도대체가

왜 항상 유럽 대륙에 묘한 반감을 갖고 있냐고요?



일전에 백년 전쟁 얘기도 했거니와 영국이란 나라가

대륙인들의 기싸움에 휘말리지 않으려 용쓰는 기질이 있다는

점이야 굳이 영국 역사를 논문 쓸 듯이 달려들어 파대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인지하고 있잖아요.



브리튼 섬은 세계사의 중심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적어도 1776년 경 무렵까지는. 애덤스국부론을 출간한 해죠.

그리고 이 즈음에 증기 기관이란 것이 튀어나왔고 산업 혁명이란

것이 출범하야… 그 장구한 역사가 시작했어요.



산업 혁명과 산업 자본주의의 발흥. 하필 브리튼 땅에서 시작했죠.

그들의 총생산 능력이 그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을 압도하는

경험을 대략 1830년대부터 겪게 된 영국인들. 감당할 수 있었을까요?



앵글로 색슨계 백인종들의 편협하고 저급한 인류관이 이 지점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얻어 무소불위의 폭력적 양상으로 치닫게 되요.



결국 제국주의란 미성숙한 정치 의식이 폭발적 경제 생산력을 만나

잉태한 화학적 기형아라고나 할까. 나머지 세상을 집어삼켜 버렸죠.



정말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아시죠?

그 중 상당수는 우리나라와 같은 제3세계 민족 국가의 백성들이었어요.

1840년 아편전쟁, 1876년 조일수호조규 이후… 불행의 역사였어요.



이백 해 가까운 세월 동안 수억의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겠죠?

그 중엔 이 포스팅을 읽고 계신 분들의 선친과 조상들도 많을 거에요.



요즘엔, 그 원혼들이 빚어 쌓아온 원한의 두께가 얼마나 겹겹이 축적해

지금 이 세상을 떠돌고 있을까, 하는 다소 종교적인 생각을 자주 해요.

(물론 개인적인 존중입니다. 취향해 주시죠.)



실로 사필귀정이라고나 할까.. 종교적인 신비주의적 체험이

정말로 현실에서 현현한 것일까.. 21세기가 되어 제국주의의 원흉이

된 나라에서 국제 관계의 지형을 뒤흔드는 일대 사변이 발생하죠.



정말 뜬금없는 낭설 같은 관점이지만, 본 블로거가 바라보는

브렉시트는 이러해요. 세상의 모든 일이 결국 쌓은 업보대로 가는구나.

무섭지만 냉엄한 현실이다, 누군가에게 부지불식 중에 죄를 짓지

않았는지 우리 자신도 뒤돌아보면서 살아야 하겠다.. 하는.





영국의 이 지경




시작은 가짜 뉴스포퓰리즘이라고 하죠.

하지만 순전히 거기에만 원인을 두는 관점에 동의하긴 힘들어요.



결국 병신 인증 투표를 한 누군가 수천만의 영국인은 존재한 거고

(12년 대선의 한국인들 51.6 퍼센트를 떠올려보면 공감하시죠.)

저학력 고연령 핑계 댈 것 없이, 개방 구조의 현대 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대체가 아주 기본적인 사회적 이해도 없는

개돼지 그 자체의 집단 무식, 아니 집단 무의식이 있었던 거에요.



이민자를 배척하는 보수 정치인들의 몰아가기는 촉매제일 뿐

작금의 이 사태를 몰고 온 연료는 아닌 겁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왠지 그런가보다 싶잖아요. 아니 왜..

영국 여행해보신 분들, 니들 콜로니에서 왔니 운운하는 호호백발의

할배 할매들 가끔 마주치면서, 이건 뭐지 했던 경험들 있잖아요?

이 사람들 아직도 대영제국인 줄 안단 말인가, 경악했던…



돌이켜보면 제국주의의 악령에 휩싸여 희한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만의 집단 광기가 분명히 있었던 거에요. 그들의

조상이 오래 전 희생양으로 삼은 제3세계 백성들의 원혼이 곁에서

맴돌고 있었다고 상상해볼 수 있지 않나요. 강요는 안 해요.



저임금 이민 노동자 문제가 무의식의 기저에 깔린 근본 원인이라고

가정할 때 이 사안은 분명히 경제 문제라고 봐요. 저학력 저임금

영국 노동자 계층과 트럼프 시대 러스트 벨트의 상관 관계를

엮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다소 뜬금없지만 사실 문화 인류학적으로 이들 계층은 리버풀에서

비틀즈를 배출한 빌리 엘리어트류 문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긴 해요.)



이런 겉핥기 인식이 사회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외면하고

자기 인생의 비참함을 편의적으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

결국 문제인 거겠죠.



그리고 경제 문제가 본질이면서도 자신들이 소속한 경제 권역의

개방적 시장 구조가 어떤 거시 메커니즘으로 엮여 돌아가는지

이해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 또 다른 문제일 거고요.



EU를 탈퇴한다고 대영제국이 부활하는 것 아니잖아요. 산업 혁명과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 아니고. 눈앞에 알짱거리는 재수없는

이민 노동자들이 투표와 함께 버튼 누르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거고.



한국 사회에서 가끔씩 터져 나오는 이주 노동자 처우와 관련한

왜곡된 일베식 사고와도 깊은 관련성을 연구해볼 수 있을 거에요.

동남아 등 개발 도상국 출신 이주민들, 재중 동포들, 난민들,

새터민들까지 논의를 확장할 수 있을지 모르고요.



예, 우리도 항상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문제입니다.

극우 쓰레기 사이트에서 자신들의 문제를 소수 집단을 타겟으로 해

배설하듯이 토해내는 경향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 문제와

브렉시트는 기저에 깊은 관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거시 경제 구조의 성장 정체와 이에 복합적으로 연결된 개인의

삶의 질 개선의 사회적 문제를 우경화한 정치 의식에 위험하게

결합하면 영국이나 한국 아니라 세상 어디를 가도 이런 병신

인증 사태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요.



https://www.politico.eu/article/12-people-who-brought-about-brexit-leave-remain-referendum-campaign-euroskeptics-tension/





보수 정치 세력




영국민의 의식에 이런 위험 요소가 애초부터 있었고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가짜 뉴스를 양산한 기레기 언론과

제국주의 부심 망령에 쩔어 살던 극보수적 정치 세력이었어요.



흔히 황색 언론으로 불리는 영국의 기레기 언론사로

더 선데일리 메일을 꼽을 수 있어요. 폴 데이커 같은

언론인이 탈퇴 여론을 주도했다고 하죠.



영국 보수당 배경의 정치가들로서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 나이젤 패라지 영국 독립당 당수 등을

꼽을 수 있어요. 브렉시트 5적이니 하는 악의적 표현도 심심찮게

유럽의 인터넷 게시판을 달구고 있죠.



그 중 도미닉 커밍스라고 정치 컨설턴트로 먹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치밀하게 설계한 홍보 전략이 저소득 저학력 영국인

유권자를 자극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 아실 거에요.

요사이 흔히 들어보셨을 Vote Leave라는 단순명료한 구호가

이 사람 작품이에요. 복잡하지 않은 메세지가 먹히는 법이죠.



지금은 이 사람이 일종의 만악의 근원으로 여러 밈의 소재로

쓰이고 있기는 해요.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이 사람 역할로 주연한

영국의 TV영화도 얼마 전 지상파에서 방영된 바 있고요.



일종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해요. 개돼지처럼 무식한 민중을 천재

한 사람의 전략이 이끌어 파국에 이르렀다고 하는 프레임을 덮어

전체 그림을 흐릿하게 만드는 거에요. 진짜 주범은 컨설턴트 한

사람이 아니라 구시대 의식에 사로잡힌 영국민과 극우 정치가

몇몇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Brexit란




그래서 브렉시트가 뭐냐고요? 간단해요.

영국이 EU에서 회원국으로서 자격을 스스로 탈퇴한다는 거에요.



그것이 영국에 좋은 거냐고요? 그렇게 좋은 거면 전 세계가 호들갑 떨며

이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겠어요? 영국의 총생산 중 수출입의 과반 비율이

EU와 직간접 연결되어 돌아가고 있는데 나라 경제의 절반을 걷어내

버린다는 극단적 결정이 걔네 살림에 도움이 되겠냐고요.



누가 내게 경제학을 가르친 적이 없어요, 이 핑계를 누구나 댈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나라 살림이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영국민의 기본 상식이 그 정도 수준인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이쯤 되면 영국 교육 제도의 실효성에 대한 실측 연구

정도 나와야 하지 않남..



https://www.ons.gov.uk/economy/nationalaccounts/balanceofpayments/bulletins/uktrade/january2016





EU란




그럼 EU 입장에선 영국 나가는 게 좋아요? EU의 격앙된 반응을

보고 EU는 좋아하나보다 오해하시는 분들 있는데, 절대 아니에요.

작금의 EU에서 GDP 크기로 빅쓰리가 독영불이고 그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EU 전체의 크기가 쪼그라드는데 이걸 왜 좋아해요?



팍스 브리태니카의 시대가 끝난 것은 1차 대전 종전과 함께였고

이젠 영연방 연합체의 종이 호랑이 신세지만 그래도 아직 유럽에선

영국 정도의 크기가 먹어줘요. 충분히 대국으로 대접받을 만큼.



EU의 궁극적인 목표는 북미 = 즉 미국에 대항하는 독자적인

덩어리를 구축하는 거에요. 통합이란 방법을 통해서. 대체 왜?

똘똘 뭉쳐 전체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일종의 단체 교섭 협상력이

커지기 때문이죠. 정치든 경제든 군사든 몸집을 늘리는 데서

오는 이점이 분명히 있음은 직관적으로 이해하시죠?



아, 물론 미국 대신 러시아를 대입하여 이 말을 다시 써도 충분히

성립해요. 어차피 지금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이긴 하지만서두.

경제적으로는 미국에 대항하여, 군사적으로는 러시아에 대항하여,

EU의 정치적 동력이 발동하고 있다고 보면 대체로 맞겠죠.



참고적으로 어디서 EU에 관해 아는 척 하시려면

마스트리히트 조약 정도는 언급하세요. 92년이죠.

이때 지금의 유럽 연합이 탄생했어요. Maastricht Treaty.



국경을 없애고 여권 검사와 통관을 배제하기 시작한

솅겐 조약은 85년부터 일찌감치 시작했어요. 영국은 애초부터

여기 가입 안 했으니 해당 없지만. Schengen Agreement.



유로존이라는 단일 통화 지역의 출범은 EU 결성 후 99년부터

시작했죠. 유로라는 지폐가 99년부터 세상에서 쓰였다는 말.

아시다시피 영국,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등과 폴란드, 체코 등

동유럽권 많은 나라가 통화 통합까지는 참여하지 않고 있어요.



(EU의 실체를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정리하여 비판하는 분이

많겠습니다만, 상세한 논설은 추후 한가할 때 하는 걸로 하고

오늘은 이 정도로만… 사실 EU 하나만 논해도 수백 개 포스팅에

논문만 해도 수만 편이 나올 테죠. 양해해 주세요.)





북아일랜드?




백스톱이란 것이 있어요. 백스톱을 이해해야 브렉시트를

영국인처럼 이해하는 건데요. backstop. 사전에서 찾아 보셨나요.

우리말에 가장 가깝게 번역한다면 안전 그물 정도에요.

높이 올라가는 계단 중간에 추락 사고 방지한다고 설치한 거..



브리튼 — 유럽 관계에서 지그시 지도를 응시했을 때 이 안전망이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 직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바로

북아일랜드이죠.



북아일랜드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70~90년대 할리우드

첩보 액션 영화에서 영미 정보 당국과 IRA 간 암투 소재물이

많이 떠오른다면 정확하게 접근한 거에요.



아일랜드 섬에서 북쪽만 영국 땅이고 아일랜드와의 사이에

국경 검문이 존재하는 현상은 거북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였어요.

(물론 무려 헨리 8세 시절부터 깊은 역사의 배경이 있지만

여기서는 과감하게 생략하죠.)



그래서 대전 후 현대사에서 북아일랜드 사람들은 줄기차게

영국에 저항했어요. 그러다 80년 광주와 매우 흡사한 민중 저항

비극, 72년 블러디 선데이 사건이 북아일랜드에서 발생하죠.



간단히 말해 영국 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아일랜드계 사람들이

희생 당한 사건이에요. 폭력 테러의 단초를 제공한 병크였죠.

누르면 꿈틀하는 것, 당연하지 않겠어요.



본래 20세기 초반부터 존재한 단체 IRA의 폭력 활동이

정당성을 획득하고 90년대 말까지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98년 토니 블레어 재임 기간 중 역사적인 굿 프라이데이

협약으로 30년의 투쟁이 공식 종료합니다.



영국와 아일랜드계 간의 상호 폭력은 정말 지긋지긋한

사건의 연속이었어요. 영국의 현대사에서 다시 떠올리기

싫어할 과거의 오점인 거죠. 우리 광주나 세월호처럼.





Backstop Proposal




자, 이렇게 현대 영국 문제의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북아일랜드입니다. 지금은 북아일랜드와 남쪽의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에 국경이나 검문, 검역이 없이 자유 시장 체제에

의한 교역 구조를 갖고 있어요. 근데 영국이 나가 버리면?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필요 없던 국경선이 생겨 버려요.

울타리 몇 개 두르는 문제 아니겠죠? 경제 사회 구조 전체에

소용돌이 같은 파문이 연쇄적으로 꼬이고 꼬이는 거에요.

맙. 소. 사.



영국 현대사의 부자연스러운 맹장염 같았던 북아일랜드를

브렉시트 구조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 관련한 과도기적

연착륙 절차로 한창 논의 주제로 떠오른 대안이 바로

백스톱인 겁니다.



안전망인데요. 영국이 정치경제의 카오스에 빠지지 않게끔

한 다리 안전하게 거쳐서 가라고 하는 안전 그물인 거에요.

북아일랜드를 일종의 중간 지대처럼 활용하고자 하는.

EU가 제안한 건데 그나마도 영국인들이 상황을

더 배배 꼬게 만들고 있어요.



그런데 웃긴 건요. 중간 안전망처럼 쓰여야 할 북아일랜드가

되레 걸림돌처럼 변질되는 상황이 되는 거죠. 빼버릴 수도 없고

딱히 도움도 안 되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취급해야 하지 하는. 풋.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백스톱을 실현할 대안으로서 어떠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가정할 수 있는 상황을 한번 나열해 볼까요.




1번, 영국과 북아일랜드가 관세 동맹을 맺는 것. 소프트 보더.

2번, 북아일랜드와 EU가 독자적인 관세 동맹을 맺는 것.

3번, 영국과 북아일랜드가 관세 동맹을 맺는 것. 하드 보더.

4번, 영국이 EU에서 탈퇴하되 다시 EU와 관세 동맹을 맺는 것.




영국이 추구하고 싶어하는 타협안이 1번이에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에 느슨한 국경이 새로 생기는 거죠. 영국이 원하는 이유는

교역의 이익을 기존 그대로 놔둘 수 있기 때문이고, 역으로 하면 EU가

이 안을 받아줄 이유가 전혀 없는 거에요. 자신들이 저질러 놓고 영국의

국익을 뭐하러 보존해 주겠어요. 실현 가능성도 낮아지고 있고요.



1번보다 영국의 국익을 깎아내는 안이 2번이에요. 해협을 사이에

두고 브리튼 섬과 북아일랜드 사이에 자연적인 국경이 새로 생기죠.

북아일랜드는 본국의 병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독립의

계기가 생기는 거에요. 영연방 연합을 부르짖는 보수적인 세력이

당연히 싫어하는 안이고 현실적으로도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가만히 놓아 두면 노딜 브렉시트가 되고 그럼 3번의 하드 보더 상황이

느닷없이 들이닥치게 되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에 강력한

국경이 새로 생깁니다. 본래 경제 공동체 상태인 하나의 섬이므로 이렇게

갑작스런 안엔 아일랜드 공화국이 반대합니다. 문제는 아무 타협 없이

브렉시트가 이루어질 경우 실제 이렇게 될 확률이 가장 높다는 거죠.



EU가 가장 원하는 안이 4번이에요. 그말인즉슨 영국의 국익을 가장

해치는 안이란 뜻. 기존의 경제 교역 관계는 그대로 두고 회원국으로서

정치적 발언권은 싹 제거하는 안이거든요. 탈퇴하면 더 이상 회원국이

아니니까요. 당연히 영국이 가장 피하고 싶은 안이겠죠. — 참고로 현재

노르웨이가 EU 관계에서 취하고 있는 스탠스와 유사한 안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1번 소프트 보더 < 3번 하드 보더 < 4번 관세 동맹

순으로 EU의 입장이 나아지고 영국의 국익이 점점 줄어드는 거에요. 2번

안은 중간에 이론으로만 가정해볼 수 있는 건데 실제로는 일어날 상황이

전혀 아니니 2번은 거의 제껴두어도 무방할 듯해요.



현재 영국이 관세 동맹 새로 체결하겠다고 움직이고 있지도 않고, 사실

관세 동맹이고 자시고 간에 자기들 내부 상황도 정리 못하고 허둥대고

있으니 현실적으로 양 극단의 4번과 1번은 이루어질 가능성이 낮은 것

아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해요. 실제로는 3번 언저리의 엄청나게

어정쩡한 형태로 유럽 경제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고 보고 있죠.



결국 현재 스코어로 볼 때 아일랜드 공화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노딜

브렉시트로 백스톱이 무산되고 이는 곧 기이한 형태의 하드 보더

생길 것이다…는 예상이 가능해요. 어디까지나 현재 스코어로.



아일랜드 공화국은 EU의 기존 회원국이므로 이들의 반대를 무마하고

손해를 보상할 방안이 필요할 텐데… 머리 아파요. 우리 문제도 아니고

유럽 사람들이 생각해 내겠죠 뭐.



https://www.msn.com/ko-kr/news/national/eu-노딜-브렉시트는-하드보더-첫-유권-해석/ar-BBSBWCS





Indicative Votes




16년 6월 23일의 국민 투표 이래 지난한 과정을 거쳐 아직도 노답

고구마의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바, 지난 19년 3월 27일에 영국

하원에서 ‘좋아, 그럼 갖고 있는 모든 대안 늘어놓고 표결 한 번

해보자’ 하는 의향 투표, indicative votes가 실시되었어요.

물론 이건 국민 투표 아니고 의회 본회의 표결.



아래의 여덟 가지 대안이 의안으로 나왔죠.

A. (존 배런) 노딜 브렉시트 가자

B. (닉 볼스) 커먼 마켓 2.0 - 노르웨이 모델로 가자

C. (조지 유스티스) 브렉시트 이후 EFTA 가자

D. (켄 클라크) EU 관세 동맹은 잔류하자

E. (노동당, 제레미 코빈) 4번 안 + EU 발언권 얻어낼 수 있다

F. (조애너 체리) 리스본 조약 50조 - 협상 시계 되돌리자

G. (마가렛 베켓) 국민 투표 한 번 더 하자

H. (마커스 피쉬) 기존 체제 유지 협상으로 가자



한껏 복잡한데, 그래서 결과는? 모조리 부결되었어요.

이제는 정말… 웃픈 것이 아니라 슬퍼지네요.



https://www.bbc.com/news/uk-politics-47726787

https://www.bbc.com/news/uk-politics-47671056

https://www.theguardian.com/politics/2019/apr/01/brexit-what-are-the-indicative-votes-mps-will-vote-on





propaganda + fake




이 모든 병신 짓의 시작은 어느 지점이었을까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국민 투표에 부친 순간, 그리고

vote leave란 심플한 캐치 프레이즈가 확장된 기간이라고 봐요.



캐머런 자신은 잔류파였어요. 대 영국의 총리라는 사람이

거시 경제 구조를 이해 못할 정도의 바보는 아니지 않겠어요.

다만 사람들이 그렇게 현혹될 줄 예상 못한 것이 패착 요인이겠죠.



혹자는 영국이 파운드 대신 유로 쓰는 나라였다면 이렇게

바보 같은 투표는 하지 않았을 게다, 예측도 해요. 하긴 평범한

일반인들이 매일 쓰는 돈 하나 보고 겨우 경제를 파악하는 것이

당연하겠다 싶으면서도…



저 위에 농담처럼 싸질러 썼지만 국가의 교육이 정말 제대로

가고 있었을까 고민해 보십사 제안한다니까요. 유럽인들께.



평범한 사람들의 무사안일한 현실 인식이 포퓰리즘 같은

정치 프로파간다와 화학 결합할 때, 영광스러웠던 한 나라의

체제를 얼마나 무너뜨릴 수 있는가.



브렉시트의 핵심은 한 마디로 이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제국주의 희생자들의 원혼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계신 거죠.



또한 백년 전 두 번에 걸친 영일 동맹경술국치

간접적 동인이었음을 언제나 잊지 맙시다.

가짜 뉴스 조심하세요~








한국인 입장에서 이해할 때 간결한 이해는 영국에서 공부하신

김흥종 연구원 설명이 가장 적당한 듯해서 링크 걸어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

Age to Discover and Explore New Maritime Rout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 대항해 시대 Age of Discovery 



이 현상을 가리키는 번역어는 discoveryexploration인데

유럽인의 관점에서 처음 발견하고 탐험한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탐험에 목을 매야 할 이유가 있었죠.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동방에 공적으로 등장하여 지중해를 통한

향신료 무역로가 완전히 막혀 버렸기 때문이에요.


1453년에 그렇게 길이 막힌 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엔

해상 봉쇄를 풀어보려는 노력이 정말 미친 듯이 전개되었어요.


특히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혜안을 가진 당시로선 특이한

인물, 항해 왕자 엔히크 대공이란 선구자를 통해 사하라 사막을

넘어 서아프리카까지 항로를 개척하는 등 앞서가기도 했어요.


그 무렵 스페인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영지

수복 활동, 레콘키스타가 완료하여 카스티야이사벨 1세

아라곤페르난도 2세가 통혼으로 연합 왕국을 구축하였죠.

(우리가 아는 스페인이란 나라가 이때 처음 만들어져요.)


스페인 입장에선 국내 문제도 해결되었겠다 이제 포르투갈과

해상 개척을 놓고 미친 듯이 경쟁하여 승부를 볼 일만 남았죠.


당시 지중해 해상 강국이었던 베네치아제노바를 제치고 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항로 개척에 앞섰는지, 이유는 간단해요.

뒤로 막힌 바다인 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나라들이니까요.


양국 해상 개척의 목표는 단 하나, 후추 주산지인 인도까지 갈

최고의 대안 항로를 개발하는 것이에요. 바다에 익숙한 선원 등

새로운 일감을 찾아 모험하려는 이들이 양국의 문을 두드렸죠.


바르톨로뮤 디아스 같은 포르투갈인은 국왕 주앙 2세의 명으로

에티오피아를 찾아 나섰다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발견했죠.

대륙을 우회하여 동진할 가능성을 발견한 1488년이었어요.


제노바의 지도 제작업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오히려 서진으로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열심히 이사벨 여왕을 설득 중이었죠.

6년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카디스에서 출항한지 석 달 만에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바하마 제도에 당도할 수 있었어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자각이

되는 순간이었지만요. 우리 제발 ‘발견’이란 말은 쓰지 말아요.

원래 거기 살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뭐가 되냐고요.


이렇게 과열 양상이 되니 1494년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나서

양국에게 세상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주는 웃기지도 않는 약속도

맺어요. 동시대 세상 누구도 몰랐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었죠.


그랬거나 말거나 포르투갈에서 출항한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가

개척한 희망봉 항로를 완결하여 1498년에 인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죠. (중국인과 아랍인은 이미 수백 년 전에 해낸 일인데.)


콜럼버스 지원이 늦어진 이유가 지구 평면설을 믿었기 때문이란

낭설이 한때 유행했는데, 중세 지배 계급도 지구가 둥글다는

상식은 갖고 있었어요. 다만 새로운 땅의 존재를 몰랐던 거죠.


이쯤 되니 지구가 구체란 사실을 입증할 임팩트가 필요했어요.

소싯적에 인도와 동남아에서 일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스페인의

산루칼 항을 출발한 것이 1519년의 일.. 21년엔 결국 필리핀의

섬에 당도하게 되요. 실증이 된 거죠. 세계 일주 후 그는 전사했지만.


마젤란은 꿈과 낭만이 가득한 뱃사람 세대의 마지막 주자였어요.

그 이후는 국가 대 국가의 총력 경쟁 구도로 넘어갔고 탐험가의

개인 작업이 아니라 군대와 총독, 성직자가 활약하는 시대에요.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충분히 도전할 만한 이문이

보장되는 사업이기도 했어요. 마젤란은 배 5척으로 출발해 겨우

1척이 향신료 자루를 싣고 왔지만 투자 비용을 뽑고도 남았대요.


요새 들으면 뭔 소리냐 하겠지만 당시 통후추는 대단한 사치재에

가치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화폐로 쓰이기도 했을 정도라니까요.

용병이 보수 대신 후추 몇 알 받고 기뻐했다는 얘기가 전해져요.


레콘키스타의 완료와 이베리아 반도의 팽창으로 중상주의가 활짝

꽃피웠지만 이때 두 나라 왕실의 경제 관념은 상당히 저렴했어요.

식민지에서 긁어온 금괴의 양으로 국부를 측정했다 하네요. 이미

포르투갈은 1452년부터 넘치는 금으로 금화를 찍기 시작했다죠.


이렇게 시작한 중상주의 시대 통화 기능의 사치재는 후추나 정향

향신료에서 으로 옮겨가 아메리카에서 쏟아져 들어온 으로

정점을 찍었답니다. 중앙 정부가 조절 기능을 잃고 과격한 투기

자본이 형성되어 종국에는 두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말았습니다.


16세기 말로 넘어오면 왕권 강화의 기틀을 다진 영국, 그리고

스페인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상인 문화가 발달한 네덜란드가

기존 양대 강국에 도전장을 들이밀게 됩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 같은 영국인은 해적으로서 열심히 스페인의

무역선을 노략질하여 잘 갖다 바치다가 급기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명하여 해군 제독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네요. 결국

칼레 해전을 기점으로 영국은 신흥 강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17세기 쯤 되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력 자체가 곤두박질 치고

영국네덜란드가 대서양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경쟁해요. 영국은

이 영란 전쟁을 거치며 훗날 대영제국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더 이상 복속할 신천지가 없음을 깨달을 무렵에 이르러 대항해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에는 확보한 식민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의 무대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러나 신대륙이니 발견이니 탐험이니 하는 개념 속에 스스로

미개한 줄 모르고 날뛰던 유럽인의 심리가 있음을 알아야 해요.

이들 이전에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가진 항해술이

훨씬 뛰어났고 최소한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죠.




대항해의 묘사를 사기꾼 같은 콜럼버스를 중심으로 묘사하는데

대해 항상 불만은 있었는데요. 대중 문화에서 딱히 다른 사람을

소재로 써서 성공한 예가 없긴 하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1992년에 리들리 스코트제라류 드빠르디유

및 시고니 위버를 데리고 내놓은 1492 콜럼버스와 그 유명한

사운드트랙을 링크로 걸 수밖에요. 영화 자체는 볼 만해요.

지나친 미화는 거르시고요. 반젤리스의 음악도 괜찮죠.

이 작품 원제는 1492: Conquest of Paradise..



1992년은 바하마 제도 발견 5백주년인 해라 기념 영화가 하나 더

경쟁했어요. 이 작품은 Christopher Columbus: The Discovery

란 원제.. 007 영화를 주로 만든 존 글렌이 연출했는데 폭삭

망했어요. 주연 배우를 듣보잡으로 캐스팅하다 보니…

조연진은 정말 화려했는데..ㅜ



신항로 개척과 식민지 정복이 얼마나 맨땅에 헤딩하는

미친 짓이었는지 간접 체험을 원한다면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이 클라우스 킨스키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만들었다는

애증의 작품 아귀레, 신의 분노를 추천해요. 72년작이죠.

전도가 안 먹히니 대뜸 원주민을 살해하는 씬이 충격적이죠.



지리상 발견의 정치적 미화에 성공해 유럽 최고의 영화제서

황금 종려상을 받은 유럽인 롤랑 조페미션은 참 미묘한

영화에요. 제레미 아이언스로버트 드 니로 찾는 맛으로

보죠 뭐. 잘 찾아보면 리암 니슨도.. 엔니오 모리코네 듣기..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Are You Aware Who Henry VIII Really Was?




미디어는 다양한 모습으로 헨리 8세를 묘사해왔습니다.


60년대에 나왔던 리처드 버튼의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이 자매로 나온 영화도 생각나며

캐나다 드라마 시리즈도 기억나네요.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으로서야 이런 창작물을 깔 만한

구석이 없을 거에요. 각각이 모두 독창적 완성도를 구축했고요.


69년작 ‘천일의 앤'은 당시 수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었어요.

리처드 버튼의 연기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긴,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배우들이었으니까요.


대체적으로 미디어가 소비해온 헨리 8세는 그러했습니다.

여자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종교를 버린 난봉꾼, 색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ㅎ


이런 이미지는 조선 후기 숙종 같은 군주와 자주 오버랩되어

사극을 좋아하는 중장년의 보수적 시청자층에게 뭔가 묘하게

동질감의 판타지를 조장해온 느낌이에요. 저쪽도 비슷했구나.. 하는.


현대 한국의 사회가 미디어에서 장희빈을 소비하는 방식의

연장선상 어딘가에 비슷한 형상을 한 앤 불린이 있을 겁니다.


이 이미지는 진실에 가까운 정당한 것일까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어떤 인물인가요.






헨리 8세가 걸어온 행보, 그 목적



열 여덟의 나이에 즉위한 헨리 7세의 왕자는

튜더 왕조가 기록하는 두번째 군주였습니다.


튜더 왕조는 장미 전쟁 이후에 탄생한 16세기

잉글랜드의 왕가 가문이고요.


장미 전쟁이란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 사이에 발발한

15세기의 왕위 계승 내전이었습니다.

(두 왕가의 인장이 장미 문양이라서 저렇게 부른다능..)


튜더 왕조는 오늘날 영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왕국의

실질적 토대를 형성한 공이 있는 가문입니다.


우리로 치면 14세기 말에 조선조가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골격을 형성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튜더 왕조에서 이런 공의 8~9할은 대략

두 명의 군주에게 그 몫이 돌아갑니다.

헨리 8세와 그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아시죠?





헨리 8세는 해군을 양성했습니다.

이 해군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북해를 주름잡으며

해상 강국인 잉글랜드의 기반을 형성했어요.


헨리 8세는 교황 및 대륙의 군주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복잡한 외교전에 잉글랜드의 발언권을 높여갔어요.

(이 시기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류국 정도에 불과했어요.)


헨리 8세는 귀족을 탄압하고 젠트리 등 중간 계급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민심과 인기를 얻게 되죠.


즉위 전반기의 헨리 8세는 교황과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 정치의 화신 같았고 신교도를 박해하는데도 앞장섰어요.

교황에게 가톨릭의 보호자라는 찬사도 받았어요.


첫 아내인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보다 겨우 여섯 살 연상인 미인이었다고 해요.

아라곤은 지금의 스페인. 당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어요.


원래 캐서린은 요절한 형의 왕자비로 정해진 사람이었으나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정혼자를 떠나보냈다고 하죠.

헨리 8세는 이런 캐서린을 연모했고 그 기록도 남아 있죠.


문제는 나이가 들며 아내가 가임기를 지났음에도

캐서린이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죠.

헨리 본인도 나이가 들어가고.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들들 볶아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는 교리를 찾아보라고 했죠.

왕자 출산처(?)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본래 헨리 8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선진 문물에 밝은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독일과 스위스에 종교 개혁이 벌어지고 있음도 알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교도들을 철저하게 압살하고 있었어요.


교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그때까지 통제하던 종교 개혁 카드를 꺼내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존속하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출범합니다.


약간 선동적 조치로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그 재산을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매각하기도 합니다, 헐값에. 민심이 환호했죠.


하지만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사실상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어요.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그 한 가지의 차이 뿐이었습니다. 루터교 흉내만 살짝 내주고.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그냥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 현상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종교 개혁의 의미를 그만큼 적확하게 알았다는 뜻도 되죠.


그렇게 족쇄가 풀려 다섯 번 추가로 결혼하고 두 명의 왕비를

참수합니다. 그가 낳은 왕자 1명, 공주 2명이 뒤를 이어

튜더 왕조의 마지막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과 재혼과 왕자 출산에 집착했을까요.

왕좌의 정통성을 추구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그 자신

집권의 궁극적 목표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이 취약한 왕가의 내전으로 평생을 골머리 썩여야 했던

선왕 헨리 7세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기 때문이고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English Longbowmen vs French Armored Knights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http://jangyune.tistory.com/entry/크레시-푸아티에-전투

http://jangyune.tistory.com/entry/롱다리-에드워드1세




장궁롱보우라고 합니다. 아주 큰 활이죠.

어느 나라나 있던 것인데 잉글랜드 장궁이 가장 유명해요.


활이 커져야 하는 이유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서죠.

활대가 커질수록 탄성력이 증가할 테니까요.


잉글랜드 장궁은 원래 웨일스 지방 산물입니다.

웨일스 왕국이 잉글랜드의 영토로 복속한 때가

13세기말 롱다리 에드워드 1세때였죠.


잉글랜드 군을 애먹인 이 무기에 에드워드가 주목합니다.

당시엔 파괴력이 너무 강해 교황이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죠.

전쟁에서 그런 게 있나요. 잉글랜드 군이 도입해 버립니다.


장궁에 대비되는 당시 보편적 활은 쇠뇌였어요.

석궁이라고 하죠. 영어로 크로스보우..


석궁이 자주 쓰인 이유는 간편성 때문입니다.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고도 능숙하게 발사할 수 있었어요.

장궁은 이에 반해 능숙해지기 위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죠.


그러나 석궁의 치명적 단점은 연사 속도였습니다.

장궁의 연사 간격을 3~5초, 석궁은 15~20초 정도로

보통 추산한다고 합니다. 너다섯 배의 차이가 있었죠.


또한 장궁은 사격 자세에 따라 원거리 공격도 가능했어요.

고지대에서 발사하면 파괴력이 훨씬 증가하기도 했죠.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가 이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국가적으로 롱보우를 적극 권장합니다.

일요일마다 궁술 대회를 열어 포상도 했다고 하네요.


왠만한 잉글랜드의 남성들이 장궁에 익숙해졌습니다.

웨일스의 평민들은 원래부터 능숙한 궁사들이었고요.

덕분에 이후 전쟁에 웨일스 장궁병 군단이 특별 편제되죠.


장궁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무엇일까요. 석궁?

아뇨. 장궁이 깨부셔야 할 적은 기사의 갑옷이었습니다.

중세의 전쟁은 중장 기사의 기마전이었거든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에게 밀리는 지점이 바로

중장 기병의 숫자였어요. 서너 배 또는 그 이상 차이났다고 하죠.


프랑스가 전쟁 초반에 자신만만하게 무식한 전략을 편 원인도

기사의 숫자에서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봤기 때문이고요.

잉글랜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장궁을 이용합니다.


중세 초기에는 사슬 갑옷이라고 체인 메일이 보편적이었는데

14세기에 와서 철판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어요. 플레이트 아머.

방호력은 철판 갑옷이 더 앞섭니다.


오늘날 장궁이 석궁보다 갑주에 대한 관통력이 우수해서

잉글랜드 군이 이겼다는 썰이 돌고 있는 듯도 한데

사실 관통력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가 있어요.


백년 전쟁 당시 양국 기사들은 철판 갑옷이 주종이었다는 썰도

돌고 있는데 사슬과 철판을 혼용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죠.


하지만 원거리라면 모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자세 잡아

장궁을 날리면 철판을 꿰뚫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래 유튜브 링크 1분 50초부터 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u0fu4k2cbB4







아 물론, 철판 갑옷이라면 인체에 맞춰 곡면 처리가 되어 있으니

왠만큼 비스듬한 각도에서는 방호가 가능했을 겁니다.


장궁병들이 주로 겨냥한 곳은 기사의 관절 접합 부분.

목과 어깨 사이나 사타구니 골반 부분의 취약점이라네요.

겨드랑이 사이 심장 가까운 곳도 많이 노렸다고 합니다.


또한 기병의 신체가 아니라 말을 겨냥한 전법도 빈번했어요.

말의 측면과 후면 방호가 약한 편이었다고 하죠.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좌익의 언덕에 위치한 장궁병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 기사들이 산줄기를 뛰어 올라갔는데

우익 언덕의 장궁병들이 측면에서 연사하여 떨궈냈다고 합니다.


갑주가 불리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둔중한 무게감 때문이죠.

보통 아머를 전면 장착하면 무게가 25킬로그램에 달했답니다.


이 무게로 진흙이 많은 곳으로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었고 이 틈새를 노려 장궁을

쏘거나 보병이 기습하니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넓게 산개하여 공격하면 되지 않겠는가 할 수 있으나

잉글랜드가 이미 좁은 경로를 선점하여 양익에서 활을

쏘아대고 있으므로 결국 좁은 중앙으로만 몰릴 수밖에요.


무거운 철갑을 짊어지고 무릎까지 오는 진창길을 걸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적 보병의 냉병기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 한 번 상상해 보면 이해가 될 거에요.


더군다나 잉글랜드 군의 진짜 강점은 장궁이 아니었어요.

병종 간에 기동과 협력, 즉 팀웍과 소통이 원활했다는 거죠.


궁병이 기병을 엄호 사격하고 위험에 처한 궁병을 향해

보병이 보호하러 달려오며 기병은 적의 측면을 공략하는…

예나 지금이나 상하 협동과 지엄한 군률은 필승의 비결입니다.


오래 전에 히트한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보면

잉글랜드 군의 강점을 석궁으로 그려놓고 이 편견이

오랫동안 정착해 버렸다고 하는데 바로 잡으시기 바래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Battles of Crecy and Poitiers, 14th Century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백년 전쟁이 시작하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압살합니다.


초창기 전투에서 뚜껑 열어보니

양국 군사력에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어요.


이를 여실히 입증한 두 사건이 바로

크레시 전투(1346년 8월 26일)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입니다.






잉글랜드 대 프랑스, 숫자의 차이



크레시는 프랑스 북서부 칼레 바로 밑에 있고요.

칼레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버 해협 근처랍니다.


잉글랜드의 지휘관은 에드워드 3세.

프랑스의 지휘관은 필리프 6세.


잉글랜드 군은 6천에서 2만 정도로 추정되고

프랑스 군은 2만에서 10만 근처까지 추정됩니다.


칼레 남쪽의 크레시 숲 인근 구릉 지대에

잉글랜드가 V자 형 진을 짜고 프랑스를 맞습니다.


양익의 끝 언덕 위엔 장궁병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하마 기사라고, 중무장한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진을 짜고 있었습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양상은 비슷하게 전개했는데요.

프랑스 중부 푸아티에 남쪽에 잉글랜드가 먼저 진을 쳤어요.


이때 잉글랜드 지휘관은 흑태자 에드워드.

크레시에서 열여섯 나이에 보병 분대장으로 출전했었죠.

푸아티에에선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됩니다.


프랑스 지휘관은 장 2세.

잉글랜드 군 약 7천, 프랑스 군 약 2만.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전황의 전개



크레시와 푸아티에 양쪽 전투 모두

잉글랜드를 프랑스가 추격하는 양상으로 시작했어요.


프랑스는 오랜 시간 추격하여 피로한 상태였지만

머릿수 차이를 믿고 그대로 진격하기로 했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승리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 잉글랜드 지휘관이 유리한 지대를 선점하여

지형의 이점을 끌어안고 적군을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시에서 에드워드 3세는 V자형 언덕를 뒤로 한 구릉을,

푸아티에의 흑태자는 언덕과 개천을 뒤로 배수진을 선점했죠.


두번째, 지휘 체계가 일사불란했던 잉글랜드에 비해

프랑스의 명령 통제 상황은 개판 오분 전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는 추격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 이유가

서로 먼저 싸우겠다고 나서대는 통에 그러했다고…ㅠ


잉글랜드 군은 숫자 차이 때문에 두려움이 컸으나

철저히 명령을 수행하는 훈련이 된 정신 상태였던 반면,

프랑스 군은 사기만 드높은 상태였다고 하네요.


세번째, 잉글랜드 전력을 효율적으로 만든 가장 큰 이점은

기병, 보병, 궁병 간 협력 전술이 잘 먹혀들어간 점이에요.


기병이 하마하여 중앙에 진을 치고 그 양익의 장궁병

적 기병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는데 궁병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보병이 나서서 이들을 보호하는 패턴이 아주 원활했어요.


(하마란 말에서 내렸다는 뜻입니다. 기병이 자진하여 전술적으로

보병이 되었다는 뜻. 잉글랜드는 이 전술을 자주 썼어요.)


푸아티에에선 배후 숲에 기병 분대를 숨겨두었다가

결정적 순간에 적 측면을 돌격하여 궤멸시키는 눈부신

기동성까지 보여주었어요. 흑태자의 전략이었죠.


장궁병에 맞서 프랑스엔 제노바 용병인 석궁병들이 있었고

초반에 방패 없이 싸우다가 나중에 방패 가지러 후퇴했는데..

기사들이 도망친다고 베어버리는ㅠ, 환상적 팀웍을 보여줬죠.


네번째, 무기 면에서 중무장 기사의 갑주잉글랜드 장궁

전혀 먹히지 않음을 완벽하게 입증했기 때문이었어요.


중세 전쟁사는 중장 기병의 시대였습니다.

전신을 무거운 갑주로 보호하고 말에 올라탄 기사인데요.

이들이 대형을 갖춰 속공 돌격하면 막을 수가 없었어요. 왠만해선.


기사가 전장에서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 것은 중세 말기 들어

활과 총포 등 원거리 사격 무기가 기병의 진격을 제압하면서부터..


백년 전쟁은 활이 갑주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어요.

특히 웨일스에서 유래한 잉글랜드 장궁은 전쟁의 전기를 바꾼,

당시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게임 체인저였어요.


장궁의 활약상은 깊이가 있는 내용이니

다음 편에서 설명해보죠.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The Hundred Years’ War, England and France




백년 전쟁 이야기에요. 1337~1453년 사이 116년 동안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영국 아님.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봤죠? 오늘날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남아 있는 묘한 경쟁심은 이 시기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 때 죽어라고 싸워댔으니까요.


왜 싸웠남. 샤를 4세가 죽고 나서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합니다.

원래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에게 우선권이 있는데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와 대립하게 됩니다.


또한 이때까지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제후로서

프랑스 일부를 봉토로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 입장에서

이를 쫓아내고 영토 지배를 확장하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더 복잡하게 하자면 할 순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왕가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입니다. 여기에 가스코뉴나

플랑드르 같은 봉토의 실효 지배권 문제가 걸렸고요.


가스코뉴는 지금의 프랑스 남서부 지방.

포도와 와이너리가 넘쳐나는 곳이고 이 지역 세금 수입만

당시 잉글랜드 전체 세수와 맞먹었다고 하죠.


당시 국력은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서너 배 정도..?

객관적 전력은 프랑스가 앞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전쟁 전반기 전세에선 잉글랜드가 의외로 앞섭니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죠.


전쟁 후반기에 잔 다르크 같은 인물이 사기를 올리며

결국 프랑스가 승리합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봉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브리튼 섬에만 머물게 되는 시기가 시작하는 거죠.


(즉,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졌다고 가정해보면 오늘날

프랑스 영토 중간에 영국 땅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현상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란 말씀..)


백년 전쟁이 유럽사에서 중요한 의의가 몇 가지 있어요.

귀족의 기병전에서 시작하였으나 애초에 양국 국민에게 없던

민족 개념이란 것이 싹트는 계기가 되죠. (민족주의는 아님)


출발은 왕가의 헤게모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평민이나

농노들이야 심정적으로 딱히 감정이입할 필요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국민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뜻입니다.


(아 물론, 아직 민족 국가 개념이 나오려면 멀었어요.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삼백 년 쯤 지나야…)


또한 전쟁의 패배로 인한 나비 효과가 잉글랜드 왕가 간

알력 다툼으로 이어져 30년간 장미 전쟁이 터졌습니다.


장미 전쟁의 여파로 튜더 왕조가 개창하고

잉글랜드의 계급 및 권력 구조가 변동하는 등…

이후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까지 이어지죠.


군사적으로는 귀족, 영주, 기사, 향사 등 지배 계급이

전쟁을 주도하는 양상이 퇴화하고 평민과 농노 중심으로

급료를 받는 용병 및 상비군 개념이 새롭게 대두됩니다.


전술 측면에서 궁병의 중요성이 기술적으로 극대화하기도.

석궁과 장궁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무기로 떠오른 시대이죠.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까지..


군사 및 병기 이야기는 시작하면 길어지니

나중에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논해보죠.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Edward Longshanks,

The Most Unsung King of Middle Age England






에드워드 1세는 영국인들 말고 외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잉글랜드의 국왕인데요.


잉글랜드의 역사에서 의외로 중요한 사람이기에 소개해요.


이 왕의 재위 기간이 1272년에서 1307년인데

이렇게만 써놓으면 감이 잘 안 오죠.






중세 잉글랜드의 왕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사자왕 리처드 1세이겠죠? Richard the Lionheart..

(요새는 사자심왕이란 표현도 퍼지고 있는 모양)


사자왕의 재위 기간은 고작 10년에 불과했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눈부신 전쟁 기술로 살라딘과 자웅을 겨뤄

평민들에게서 엄청난 호응을 얻게 되었죠.


사자왕의 뒤를 이은 국왕이 존 왕인데 유명합니다.

나쁜 의미로. 바보짓을 많이 했죠.


절대 왕정 개념이 등장하기 전이니까

이 시절의 국왕은 명목만 있고 실권이 없었어요.

그냥 더 이름있는 영주라고 불러도 할 말 없는..


그런데 전쟁을 벌이겠다고 뻘짓을 한 거에요.

영주들에게 군사를 모아라, 세금을 걷겠다 하는… 헐.


영주들이 고분고분할 리가 없겠죠? 그래서 대꾸했대요.

“그래, 하라는 대로 할테니 여기 서명 좀 하실라우?”


그렇게 해서 서명한 계약서가 민주주의 최초의 문서라는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역사상 최초로 왕권을 견제한 사건이고

오늘날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의 불문 헌법 중 하나랍니다.


이 뻘짓 존 왕의 아들이 헨리 3세, 손자가 에드워드 1세입니다.

오늘날 영국인들은 Edward Longshanks라고 기억합니다.


롱다리 에드워드라는 뜻이에요.

키 188센티미터의 장신이었다 하죠.


에드워드의 정적은 시몽 드 몽포르라는 귀족이었어요.

몽포르가 귀족들을 규합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내전을 벌였는데

에드워드와 아버지가 붙잡혀 수모를 당했다고 하죠.


이후 절치부심하여 몽포르를 죽이고 집권합니다.

집권 후에는 현명한 정책을 여러가지 펼쳤어요.


의회를 소집한 것은 몽포르였지만

에드워드는 현명하게도 의회 운영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유연하고 원활하게 국정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수많은 법령을 제정하고 정비하였다든가

양모나 양주 등 유치 산업을 장려하여 국부를 증대했다든가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외교전에서 활약하였다든가…


특히 모범적인 의회 운영으로 명성이 자자하죠.

영국 의회주의의 전통이 에드워드 1세 치세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보는 의견이 다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국의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1세를

흔히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로 부르곤 합니다.


지금의 잉글랜드라는 나라의 국체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을 거쳐

튜더 왕조에서 전성기를 맞게 되요.

(이 시기는 아직 플랜태저넷 왕조)


에드워드 1세의 미디어 출연이 많지는 않은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공교롭게도 ‘브레이브하트’네요.


1995년작 멜 깁슨 감독 및 주연.

‘공교롭게도’라고 한 이유는 다들 아시죠.

이 영화가 엉망진창 고증으로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ㅠ


작품의 고증에 대해서는 나중에 깊게 따지고요.

여기서 에드워드는 패트릭 맥고한이라는 명배우가 열연했는데

음흉하고 정쟁에 능한 변태 늙은이 비슷하게 묘사가 되긴 해요.


너무 믿지는 마시고 특히 소피 마르소가 분한

이사벨라 왕자비 파트는 완전 픽션이니.. 그냥 잊으세요.

기억에서 걷어내시기 바랍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 입장에서 에드워드 1세를

폭군으로 인식하는 것은 팩트 맞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입장에서 성군이고 명군인 것 역시 팩트입니다.


특히 의회 정치의 시작점이란 점이 중요합니다.

이 한 가지는 기억해 두시기 바래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