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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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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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추, 바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침략한 목적
  2. 2018.10.25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I : 대항해 시대




The Way Pepper Drove Europeans to

Go Crazy Over Maritime Expedition






Age of Exploration 또는 Age of Discovery..

15~17세기 유럽.. http://swco.ttu.edu/medieval/aexpedition.html



이 현상을 부르는 말은 대항해 시대, 지리상 발견, 신항로 개척..

등등의 표현이 쓰이는데 가장 중립적 표현은 ‘신항로’,

가장 서양 중심적 표현은 ‘지리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선 ‘대항해’로 낙점. 별다른 이유는 없고 지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가장 흔하게 통용되는 표현을 고르자는 것이

본 블로그의 표기 원칙이라면 원칙이걸랑요.



또 실제로 유럽인들이 대항해의 기술을 창안한 것이기도 하니까.

(물론 폴리네시아인, 중국인, 아랍인.. 등 근대 이전 무역의

역사와 인류학적 현상을 조사하면 상당한 논란이 있겠지만…)



유럽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란…? 놀랍지만 바로 향신료후추랍니다.

pepper.. 필요는 발견의 어머니인 거죠.



여러분들이 아시는 새까만 가루의 양념 맞습니다.

인도가 원산지라고 하죠. 후추가 왜 중요할까요?



오늘날의 후추는 단순히 향미를 더하는 양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만, 현대인의 시각을 거두고 냉장 기술이 없던 옛날을

가정해 보세요. 도대체 육류를 어떻게 저장할 수 있었을까요?



도축이 이루어진 후 보통 3~5일이 지나면 변색과 분해가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썩는다는 말이죠. 이 경우 도축 즉시 갓 신선한

분량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남는 잉여 분량이 있었을 겁니다.



가장 흔한 보관 방법은 건조겠죠. 약한 불에 살살 말려 물기를

빼는 열 건조도 있고 서늘한 곳에서 시간을 두고 자연 건조하는

방식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건조로 숙성시키더라도

뭐든 기본 양념을 뿌려줘야 누린내를 잡지 않겠어요?



음식을 저장하려는 인류에게 자연 상태의 두 가지 재료가

있었다 해요. 소금… 소금은 그렇다 치고 웬 꿀?

요즘 식으로 청이나 잼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거에요.

설탕과 비교해 꿀은 잘 밀봉하면 항균 효과도 있었다네요.



소금으로 저장 보관하는 음식은 스팸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스팸보다 두세 배 정도 더 짜게 염도를 높여

만드는 것이 상례였어요. 염장한 고기를 맨입엔 못 먹고

물에 풀어 스튜나 수프처럼 먹는 방식이 일반적일 만큼.








염장을 위해 쓸 소금은 다소 불편함이 있어도 내륙의 암염이나

해안가의 천일염으로 유럽 내에서 자체 생산은 가능했어요.



(후추보다야 낫지만 소금의 값이 싼 건 아니었어요. 각국

역사에 소금 중개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만 봐도.. 천일염 산지였던 베네치아가 대표적..)



그런데 후추는요? 생산 자체가 전혀 불가능해서 문제인

거죠. 대량 생산이 보편화한 오늘날에는 (기후가 유사한)

동남아와 아프리카에서 확대 재배하지만 중세 시절엔…



오늘날 소금과 후추를 쌍으로 묶어 전 세계 어딜 가도 흔한

양념의 대명사로 분류하지만 중세 유럽에선 특히 후추가

말도 못하는 사치재였던 거지요.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이야 비싸긴 해도 암염의 형태로

생산 후 수입되는 소금으로 음식을 염장하여 생활했어요.

누린내를 잡을 재료는 로즈마리나 타임 등 허브가 있었고..



영지의 부를 독점한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유일하게 후추를

쓸 수 있었죠. 식도락 용도보다는 베블렌 효과마냥 과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후추를 썼다는 해석도 있어요.



후추의 주산지인 인도와 유럽 사이… 멀고 먼 길이죠.

하지만 수요가 형성된 사치재가 있고 이를 구매할 소비자가

존재하니 시대를 막론하고 상거래와 무역은 이루어지는 거죠.



전통적으로 로마와 한나라를 잇던 무역 경로는 셋입니다.

초원길, 사막길(비단길), 바닷길(향료길).










초원길은 중앙 아시아 북쪽 스텝, steppe 지대를 관통하여

몽골, 신장 위구르,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는 경로에요.

선사 시대부터 개척되었다 하고 기원전 2세기경 흉노가

중개 수입을 독점하자 한 무제 때 새 길을 개척하죠.



사막길은 그렇게 열리게 된 경로에요. 타클라마칸 사막을 잘

피하고 파미르 고원을 관통해 중앙 아시아 건조 지형을 뚫고

가는 거죠. 여기로 로마 사자가 한나라에 당도했다고 해요.

딱 한 번이지만. 한의 비단이 로마에 최초로 전해진 경로죠.

(그래서 비단길 또는 오아시스길로도 불려요.)



바닷길은 1세기쯤 개척되었고 중국과 인도를 연안 항해로

지나 홍해를 통과해서 지중해로 진출하는 거죠. 인도를

직접 거쳐 향신료가 들어오므로 향료길이라고도 불려요.



세 경로의 공통점이 보이죠. 결국 모든 길이

아랍 - 소아시아 - 발칸 반도 -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심 지역에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란 점이에요.



지중해에서 물자가 풀리지 않으면 유럽 경제가 마비되는,

약간 과장하자면 그렇고 그 물류가 분배되는 중심 지역이

보스포루스 해협발칸 반도인 거에요.



그런 점에서 1453년에 지금 그리스와 터키 위치인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에게 무너졌을 때 상거래에

얼마나 큰 여파가 전해졌겠어요.



후추 값의 폭등을 넘어서 금처럼 화폐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급상승했다고 해요. 후추 몇 알 받는 것이 금화 수십

냥보다 더 가치가 높은 보수였다고 하니까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가 넘어갔음은 동지중해 해상 무역로가

막혔음을 의미하고 그때까지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안에서만 놀던 무역의 판도가 바뀌어야 함을 뜻하죠.



이런 때 (지중해 무역에서 다소 변방으로 소외되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거에요.



포르투갈과 (이제 막 한 나라로 통일될 무렵인) 스페인은

지중해 문화의 변방으로 아프리카를 통한 바닷길 개척의

가능성을 전부터 눈여겨 보던 나라였어요.



이에 지중해 각지에서 한다 하는 항해가들이 두 나라로

꾸역꾸역 모여 새로운 항로 개척에 자금 및 인력 지원을

호소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구름떼 같이 몰렸다 하죠.



그 중 군계일학으로 새로운 땅을 발견한 자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랍니다.



콜럼버스가 실제 발견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서인도 제도

그의 측량치가 엄청난 오차 범위를 자랑했기에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해요.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인 줄 알았고…



그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학살 당했으나 세계사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기도… 이게 좋은 일인지는 영..



나비 효과이긴 하지만 후추로 시작한 (유럽인 입장의)

대탐험, 그 결과는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랍니다.



아래 동영상은 비슷한 이야기..

양념으로 인한 역사의 변화를 언급하네요.

당시 인도와 영국의 후추 가격차가 5백 배가 넘었다는군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

Age to Discover and Explore New Maritime Rout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 대항해 시대 Age of Discovery 



이 현상을 가리키는 번역어는 discoveryexploration인데

유럽인의 관점에서 처음 발견하고 탐험한다는 뉘앙스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탐험에 목을 매야 할 이유가 있었죠.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동방에 공적으로 등장하여 지중해를 통한

향신료 무역로가 완전히 막혀 버렸기 때문이에요.


1453년에 그렇게 길이 막힌 후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엔

해상 봉쇄를 풀어보려는 노력이 정말 미친 듯이 전개되었어요.


특히 포르투갈은 15세기 초부터 혜안을 가진 당시로선 특이한

인물, 항해 왕자 엔히크 대공이란 선구자를 통해 사하라 사막을

넘어 서아프리카까지 항로를 개척하는 등 앞서가기도 했어요.


그 무렵 스페인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내는 영지

수복 활동, 레콘키스타가 완료하여 카스티야이사벨 1세

아라곤페르난도 2세가 통혼으로 연합 왕국을 구축하였죠.

(우리가 아는 스페인이란 나라가 이때 처음 만들어져요.)


스페인 입장에선 국내 문제도 해결되었겠다 이제 포르투갈과

해상 개척을 놓고 미친 듯이 경쟁하여 승부를 볼 일만 남았죠.


당시 지중해 해상 강국이었던 베네치아제노바를 제치고 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항로 개척에 앞섰는지, 이유는 간단해요.

뒤로 막힌 바다인 지중해의 입구에 위치한 나라들이니까요.


양국 해상 개척의 목표는 단 하나, 후추 주산지인 인도까지 갈

최고의 대안 항로를 개발하는 것이에요. 바다에 익숙한 선원 등

새로운 일감을 찾아 모험하려는 이들이 양국의 문을 두드렸죠.


바르톨로뮤 디아스 같은 포르투갈인은 국왕 주앙 2세의 명으로

에티오피아를 찾아 나섰다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발견했죠.

대륙을 우회하여 동진할 가능성을 발견한 1488년이었어요.


제노바의 지도 제작업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오히려 서진으로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열심히 이사벨 여왕을 설득 중이었죠.

6년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카디스에서 출항한지 석 달 만에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라고 믿었던 바하마 제도에 당도할 수 있었어요.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유럽인에게 처음으로 자각이

되는 순간이었지만요. 우리 제발 ‘발견’이란 말은 쓰지 말아요.

원래 거기 살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뭐가 되냐고요.


이렇게 과열 양상이 되니 1494년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나서

양국에게 세상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주는 웃기지도 않는 약속도

맺어요. 동시대 세상 누구도 몰랐던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었죠.


그랬거나 말거나 포르투갈에서 출항한 바스코 다 가마는 디아스가

개척한 희망봉 항로를 완결하여 1498년에 인도에 도달하는데

성공하죠. (중국인과 아랍인은 이미 수백 년 전에 해낸 일인데.)


콜럼버스 지원이 늦어진 이유가 지구 평면설을 믿었기 때문이란

낭설이 한때 유행했는데, 중세 지배 계급도 지구가 둥글다는

상식은 갖고 있었어요. 다만 새로운 땅의 존재를 몰랐던 거죠.


이쯤 되니 지구가 구체란 사실을 입증할 임팩트가 필요했어요.

소싯적에 인도와 동남아에서 일한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스페인의

산루칼 항을 출발한 것이 1519년의 일.. 21년엔 결국 필리핀의

섬에 당도하게 되요. 실증이 된 거죠. 세계 일주 후 그는 전사했지만.


마젤란은 꿈과 낭만이 가득한 뱃사람 세대의 마지막 주자였어요.

그 이후는 국가 대 국가의 총력 경쟁 구도로 넘어갔고 탐험가의

개인 작업이 아니라 군대와 총독, 성직자가 활약하는 시대에요.


이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충분히 도전할 만한 이문이

보장되는 사업이기도 했어요. 마젤란은 배 5척으로 출발해 겨우

1척이 향신료 자루를 싣고 왔지만 투자 비용을 뽑고도 남았대요.


요새 들으면 뭔 소리냐 하겠지만 당시 통후추는 대단한 사치재에

가치를 저장하고 교환하는 화폐로 쓰이기도 했을 정도라니까요.

용병이 보수 대신 후추 몇 알 받고 기뻐했다는 얘기가 전해져요.


레콘키스타의 완료와 이베리아 반도의 팽창으로 중상주의가 활짝

꽃피웠지만 이때 두 나라 왕실의 경제 관념은 상당히 저렴했어요.

식민지에서 긁어온 금괴의 양으로 국부를 측정했다 하네요. 이미

포르투갈은 1452년부터 넘치는 금으로 금화를 찍기 시작했다죠.


이렇게 시작한 중상주의 시대 통화 기능의 사치재는 후추나 정향

향신료에서 으로 옮겨가 아메리카에서 쏟아져 들어온 으로

정점을 찍었답니다. 중앙 정부가 조절 기능을 잃고 과격한 투기

자본이 형성되어 종국에는 두 나라의 경제를 좀먹고 말았습니다.


16세기 말로 넘어오면 왕권 강화의 기틀을 다진 영국, 그리고

스페인의 식민지로 출발하여 상인 문화가 발달한 네덜란드가

기존 양대 강국에 도전장을 들이밀게 됩니다.


프란시스 드레이크 같은 영국인은 해적으로서 열심히 스페인의

무역선을 노략질하여 잘 갖다 바치다가 급기야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명하여 해군 제독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네요. 결국

칼레 해전을 기점으로 영국은 신흥 강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17세기 쯤 되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력 자체가 곤두박질 치고

영국네덜란드가 대서양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경쟁해요. 영국은

이 영란 전쟁을 거치며 훗날 대영제국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더 이상 복속할 신천지가 없음을 깨달을 무렵에 이르러 대항해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에는 확보한 식민지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의 무대가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러나 신대륙이니 발견이니 탐험이니 하는 개념 속에 스스로

미개한 줄 모르고 날뛰던 유럽인의 심리가 있음을 알아야 해요.

이들 이전에 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가진 항해술이

훨씬 뛰어났고 최소한 다른 나라에 피해를 주지도 않았죠.




대항해의 묘사를 사기꾼 같은 콜럼버스를 중심으로 묘사하는데

대해 항상 불만은 있었는데요. 대중 문화에서 딱히 다른 사람을

소재로 써서 성공한 예가 없긴 하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1992년에 리들리 스코트제라류 드빠르디유

및 시고니 위버를 데리고 내놓은 1492 콜럼버스와 그 유명한

사운드트랙을 링크로 걸 수밖에요. 영화 자체는 볼 만해요.

지나친 미화는 거르시고요. 반젤리스의 음악도 괜찮죠.

이 작품 원제는 1492: Conquest of Paradise..



1992년은 바하마 제도 발견 5백주년인 해라 기념 영화가 하나 더

경쟁했어요. 이 작품은 Christopher Columbus: The Discovery

란 원제.. 007 영화를 주로 만든 존 글렌이 연출했는데 폭삭

망했어요. 주연 배우를 듣보잡으로 캐스팅하다 보니…

조연진은 정말 화려했는데..ㅜ



신항로 개척과 식민지 정복이 얼마나 맨땅에 헤딩하는

미친 짓이었는지 간접 체험을 원한다면 베르너 헤어초크

감독이 클라우스 킨스키를 권총으로 위협하며 만들었다는

애증의 작품 아귀레, 신의 분노를 추천해요. 72년작이죠.

전도가 안 먹히니 대뜸 원주민을 살해하는 씬이 충격적이죠.



지리상 발견의 정치적 미화에 성공해 유럽 최고의 영화제서

황금 종려상을 받은 유럽인 롤랑 조페미션은 참 미묘한

영화에요. 제레미 아이언스로버트 드 니로 찾는 맛으로

보죠 뭐. 잘 찾아보면 리암 니슨도.. 엔니오 모리코네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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