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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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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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bostonglobe.com/arts/music/2017/09/14/recalling-isang-yun-his-centenary/G2oZZHumeCdH0BSyA5mUZM/story.html




정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 사람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네요.

한국의 작곡가였던 윤이상입니다. 20여 년 전 돌아가셨죠.

해외에선 Isang Yun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합니다.


1917년 9월 17일에 경상도에서 태어났고

1995년 11월 3일에 베를린에서 돌아가셨어요.


1967년에는 악명 높은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

연루되어 중앙 정보부 요원들이 독일에서 강제 압송했고

고문과 허위 자백에 못 이겨 간첩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닉슨 데탕트 직전 냉전이 극에 달하던 박정희 정권 무렵인지라

당시 재판은 거의 반인권적 군사 법정에 가까왔다능…ㅜ)


유럽에서 유명했던 분인지라 음악계에서 완전 들고 일어났죠.

프란시스 트라비스라는 음악가를 중심으로 유럽을 순회하며

엄청난 음악가들이 공식 항의 연명부에 서명했어요.


얼마나 쟁쟁한 음악가들이냐고요? 이름 대볼까요?

-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 작곡가 루이지 달라피콜라

-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

- 작곡가 겸 오보에 연주자 하인츠 홀리거

- 작곡가 마우리치오 카겔

- 지휘자 오토 클렘퍼러

- 작곡가 죄르지 리게티

- 작곡가 페르 뇌고르

- 작곡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 작곡가 베른트 침머만

… 등등 포함 2백 명 정도였다네요. 상상이 가시죠?


당시 북한보다 경제력도 약간 뒤쳐지던 후진국인지라

박정희 정권이 앗뜨거라 싶어 69년에 국적 박탈 조건으로

석방했다고 해요. 이후엔 서독 국적으로 겨우 살아가요.


그리고 고국 땅을 한 번도 못 밟았죠. 노태우 정권

한 번 기회가 있었는데 정권이 ‘들어와서 정치 발언 하지

말라’는 생떼 조건을 들이미니 안 간다고 거절했다죠.


그래서 작년은 이 사람이 태어난 100주년이었어요.

보스턴에서도 소소한 기념 행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보스턴 글로브에서 업적을 조명하는 기사를 냈네요.


작년 9월 기사입니다. 한 번은 짚고 가시란 뜻에서…

저작권 문제시 자진 삭제합니다.






A border-crossing Korean-born composer

경계선 위의 한국 출신 작곡가


매튜 게리에리 특파원


2017년 9월 15일


지난해 2017년 9월 17일 일요일은 윤이상(1917-95)의 탄생 100주년 기념일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 작곡가는 종전 후 무조 음악에 기초한 포스트 모더니즘을 동양적 철학과 음악적 어법을 통해 재조명하면서 1950년대와 60년대에 명성을 얻은 바 있다. 그는 1967년 아내와 함께 박정희 정권의 정보 요원들에 납치 당해 유럽에서 한국으로 (2백 명 가까이 되는 다른 해외 거주자와 함께) 송환된 후 조작 냄새가 물씬 풍기던 간첩 혐의로 재판에 서야 했다. 그의 투옥 사태에 전 세계 음악가들(및 정치 활동가들)이 거세게 들고 일어나 조직적 국제 시위로 맞섰고 결국 2년 후 석방이란 결과를 얻었다. 작곡가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런 가혹한 경험이 그로 하여금 남북 분단의 상황을 “한층 더 구조적인 음악 미학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 속에선 변용과 화해의 주제를 지속적으로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윤이상의 첫 작품은 동네 무성 영화 극장의 배경 음악이었다. 이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식 음악 수업을 받기 위해 오사카와 도쿄로 건너갔다. 당시에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지라 항일 단체에 들어가 투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억류와 투옥을 경험하고 난 후 윤이상은 쫓기듯이 서울로 넘어왔다.


한국 전쟁 후에는 독일로 건너가 아방가르드 풍의 미묘한 불협화음 작풍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 기회를 얻었다. 색채감과 장식 기교를 분명한 박자에 실어 개별 주요음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한국 및 아시아 음악의 전통적 어법에 영감을 받았던 바, 그의 작품을 구성하는데 있어 한껏 늘여 연주하는 음의 연속성이나 난해한 기악적 기교, 화려한 피치의 풍부한 표현력 등의 요소를 주변 음향 환경에 녹이는 식의 작법을 채택한 것이다.


동베를린 간첩단 조작 사건을 기점으로 남한에서는 윤이상의 작품 연주가 금지되었으나,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손수 그를 직접 초청하여 그의 이름을 딴 음악 연구소를 세울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반면 한국에서의 과거사 복원 작업은 더디기만 해서 정권의 민주화가 진행된 후였음에도 한국 방문을 위해선 어떤 정치적 진술도 해선 안 된다는 모욕적 요구를 받고 결국 귀향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이상은 휴전선 양쪽에서 동시에 인정받은 희귀한 존재였다. 그는 스스로 쌓은 명성을 1980년대와 90년대의 한반도 통일 기원 기념 음악회를 조직하는데 슬기롭게 이용했고 남북한 양쪽에서 음악가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사실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는 미국 내 분위기가 다소 잠잠하기는 하다. (보스턴 한인 문예협회가 주최한 지난 9월 30일 리버스 스쿨 음악회가 지역의 유일한 행사였을 정도이다.) 음악회에서 그의 작품을 접하게 될 때 일반적인 반응은 사뭇 엇갈린다. 작품이 들려주는 압도적인 표현주의적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윤이상의 음악에서는 서양 음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윤이상 개인이 가진 도교적 성향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어, 어떤 기승전결을 창조하기보다 절제와 변화의 엔진을 통해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더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결점이나 대단원을 의도적으로 제거하는 작법을 통해 어떤 청중은 극심한 절망감을 찾아내기도 한다. (1980년대 이후 발표된 윤이상의 다섯 교향곡이 바로 이런 해석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듯하다.)


윤이상은 소재가 명료한 표제적 음악도 썼으나 — 한국 현대사 속 민주화 항쟁의 처절한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가 대표곡 — 생전에 때로 자신은 정치와 무관하다고 항변한 바도 있다. 윤이상에게 휴전선이나 이데올로기는 어떤 지도 원리가 아니라 방해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보편적 인류애만이 그의 지속적 관심사였으며 한민족의 통합 — 어쩌면 전 지구인의 통합까지도 — 이 그의 창작 목표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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