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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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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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anuel Kant: the Highest-Esteemed

Intellectual Ever in Mankind History






어렵지만 이마누엘 칸트 이야기를 해봅시다.

얘기를 풀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렵겠지만요.



고매한 철학의 언어로만 풀지 말고 이 분이 대중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싶어졌어요.

문득. 여러 모로 매력이 있는 삶이었거든요.



칸트가 태어난 곳은 당시엔 쾨닉스베르크였고 프러시아 땅인데

독일이 여차저차한 사정으로 훗날 러시아로 넘긴 지역인지라

지금은 러시아 땅의 칼리닌그라드로 불려요.



칸트가 평생을 쾨닉스베르크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며

지냈는데 이 대학은 지금도 있습니다. 러시아 발틱연방대학이죠.

‘이마누엘 칸트’의 이름을 딴 별칭으로 운영 중이에요.

좋은 학교입니다.










1724년에 당시 전형적인 상업 도시에서 마구 수공업자인

부친 밑에서 태어나요. 놀랍게도 할아버지 대까진 프러시아

아닌 스코틀랜드 사람이었다 해요. 이민 3세대인 셈..



원래 독일어식으로 에마누엘이란 이름이었는데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 이마누엘로 스스로 개명했다고 해요.



그의 가정은 경건한 청교도 가풍으로 엄격하고 검소했다네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칸트의 이미지와 왠지 어울리죠.

가정 환경이 중요합니다.



16세에 쾨닉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했고 6년 후엔 석사 논문과

함께 졸업했는데 이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생계가 어려워졌대요.



그래서 지방 귀족의 가정 교사 노릇으로 생활하며 꾸준히

학문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평생 자기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대체로 옳지만 이 시기

만큼은 교사 일 때문에 인근 지역을 여행했다고 하네요.



그의 평생 삶은 가르치고 연구하고 토론하고.. 의 규칙성을

꾸준히 유지했습니다. 그의 일과를 보고 시계를 맞추었다는

이야기는 진짜로 전해지는 사실이래요.



그는 철학의 전 영역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 대철학자이지만

정치학, 신학, 물리학, 천문학, 수학, 지질학, 지리학, 교육학,

인류학, 역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괴물급 학자였어요.



1754년엔 천문학 연구 성과로 베를린 학회장상 1등상을

받았고 이듬해 4월에 논문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을

발표했는데 놀랍게도 우주 기원론을 밝힌 내용이에요.



우주와 태양계가 성운의 분자 덩어리로 생겨났다는 오늘날의

가설을 처음 제시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세요? 바로

칸트입니다. 바로 이 논문에서요.



55년 9월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대학 강사 자격을

얻었다 해요. 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 신학, 윤리학

등 강의 과목은 실로 방대했다고 전합니다.



이듬해 은사님이 돌아가시며 그 자리로 교수직을 노렸지만

좌절되었다 하고 몇 해 후 문학 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했다고 해요. 철학 교수직을 꼭 원했기 때문에요.



1764년에 미학 논문으로 베를린 학회장상 2등상을 받는데

1등상은 역시 당시 출중한 학자였던 모제스 멘델스존에게

돌아갔다고 해요. (이 사람도 꽤 유명한 유대교 철학자..)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왕립 도서관 사서로 몇 년 일한 적도

있지만, 1770년에는 드디어 바라던 철학 교수로 임용되요.



칸트가 박사를 딴 지 너무 오래 되어 이때 논문을 하나 더

심사 받아야 했는데 ‘감성계와 지성계의 형식과 원리들’이라고..

향후 전개되는 비판 철학의 골격을 엿볼 수 있는 저작이래요.



이후 칸트는 소위 일컫는 침잠 기간에 들어가요. 그때까지

왕성하게 발표하던 논문도 끊고 대외 활동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런 분이 설마 놀았겠어요.



학자들의 유추 연구에 따르면 이때 영국에서 데이빗 흄

출간한 '인간본성론'을 입수해서 읽고 큰 충격을 받아 사상

체계를 완전히 뜯어 고치는 작업을 하느라고 늦어졌다고 해요.



점포 인테리어 공사 하느라 개점 휴업을 오래 한 거죠.

그러나 그 사이 엄청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에 몰두하여

침묵을 완전히 만회할 눈부신 저작이 십여 년 후 탄생해요.



근대 철학의 흐름을 바꾸고 인간 역사 최고의 철학서로 부른다는

‘순수이성비판’이 1781년에 출간되어요. 두두둥.



희한하게도 초판 반응은 대단히 싸늘했다고 해요. (사람들이

이해를 못한 건가..) 하도 썰렁해서 칸트 자신이 친절하게

요약서를 2년 후 추가 출간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의 추종자인 카를 라인홀트가 1780년대 후반 철학계에

유행하던 치열한 범신론 논쟁에 순수이성비판을 거론하며

‘이 책 읽어보면 답이 다 나옴’ 하면서 사람들 반응이

180도 바뀌었다고 해요. 역주행한 거죠.



순수이성비판이 놀라운 저작인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한 인간의 인생을 놓고 볼 때 그 전까지 유지했던 생각을

완전히 다 뜯어 고치고 새로 만들어낸 생각을 담았다는

그 하나 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봐요.



칸트주의 철학 체계, 즉 독일 관념론비판 철학

‘순수이성비판’을 기점으로 1788년 ‘실천이상비판’,

1790년 ‘판단력비판’을 차례로 출간하며 완성되어가요.



철학의 각론 가운데 순수이성비판형이상학인식론,

실천이성비판윤리학, 판단력비판미학의 내용을

각각 담은 건데, 철학의 전 영역을 탐구했다는 것은

여기서 알 수 있답니다.



여기에 1786년의 과학 철학서, 1793년의 종교 철학서,

1795년의 정치 철학서까지 합하여 전 영역에 걸친

칸트 비판 철학이 완성되는 거에요. 맙소사.



논리학 책이 없는데 그건 1800년에 제자가 쓰는 책을

지도하며 하나 내요. 일종의 논리 교과서인데 난해한

칸트 책을 읽을 때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고틀로프 예쉐라는 사람의 ‘논리학’..



1804년에 평소의 삶처럼 정확히 여든 살을 살고

‘그만하면 괜찮다’는 유언을 남기며, 역사상 최고의

지성인이 돌아가셨습니다.



쾨닉스베르크 시민 전체가 휴업하고 애도를 표하며

동향의 거인이 가는 길을 배웅했다고 해요.





Immanuel Kant (1724~1804, Prussia)






칸트의 철학이 난해하지만 순수이성비판부터 출발하면 되요.

지식을 받아들이는 방법론에 대한 인식론과 세계를 구성하는

원리를 논한 형이상학에서 큰 논제를 던지고 있어요.



그도 대륙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합리론에 기반한 이성 중심의

인식론에 경도되어 있었는데 흄의 책을 읽고 경험의 요소를

일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에요.



그를 가리켜 합리론과 경험론을 결합하여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한 대학자라고 칭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거죠.



인간의 이성이 한계가 있으므로 인식의 과정에는

선험적 형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요지에요.



그는 감각이 수용한 지식이성의 작용을 통해 인식되므로

감성지성의 연합에 의해서만 중심의 자아가 주체적으로

지식을 형성할 수 있다고 설파했어요.



이런 관점에서 감각이 수용할 수 없는 대상(, 불사, 자유)을

사유하려 한 기존 형이상학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며 이런

대상은 도덕적 실천의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고 했죠.



순수이성’이 도대체 뭔데? 하시는 분도 있을 텐데, 말하자면

작가의 캐릭터 설정 같은 거에요. 인간 이성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칸트 책 안에서만 가정하는 철학 주체인 거죠.



*슈퍼맨의 팬티는 절대 찢어지거나 불타지 않쟎아요..

트레키 세계에서 클링온 언어는 실재하는 거고.. 뭐 이런 거.



순수이성비판의 말미에는 칸트 비판 철학의 3대 질문이

등장하는데 칸트 세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요.

순수이성이 골몰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인즉슨...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What Can I Know?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at Should I Do?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What May I Hope?



첫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둘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셋째는 1793년에 나온 종교 철학서 ‘순수이성 한계

안에서의 종교’에서 각각 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3대 비판서와 달리 이 책도 상당한 문제작이에요.

얌전한 칸트에게 생애 최초로 검열과 제재를 받게 한

책이거든요. 당시가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지라 군주제

집권층에서는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었대요.



실천이성비판 1장에는 가장 유명한 칸트의 다음

경구가 정언 명령의 제1 수칙으로서 소개됩니다.



‘네 의지의 준칙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 Act in such a way that the maxim of

your will could always hold at the same time as

a principle of a universal legislation… 멋지죠?



1786년의 과학 철학서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는

19세기 독일어권 과학자들에게 성경처럼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하고요.



1795년에 나온 정치 철학서 ‘영구평화론’에 등장한, 시대를

수백 년 앞선 선견지명 앞에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요.



국제법과 평화 조약, 전쟁과 군비 감축, 국제 연맹 체계 구축,

국가간 상호 독립성과 내정 간섭 배제… 자그마치 이런 내용이.



20세기에 나온 국제 정치학 책이라 해도 믿겠는데요.

왠지 우드로 윌슨이 되게 좋아할 것 같은… 쿨럭.



능력의 한계로 본 블로거가 할 수 있는 요약 설명에 한계가 있으니

칸트나 다른 철학의 최신 상세 설명을 이후에도 접하고 싶다면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도 좋겠고...

https://plato.stanford.edu




테네시 대학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철학 백과사전

좋아요. 개인적으론 여기서 많은 도움을 얻었어요.

엄청 쉬운 영어로 어려운 뜻을 풀어주니 놀랍더라고요.

https://www.iep.utm.edu




이 포스팅을 읽는 (특히 청소년) 네티즌에게 강조하고픈

이마누엘 칸트의 일생 중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처음부터 천재가 아닌 대기만성형의 대학자란 점이죠.

날 때부터 천재라던 데이빗 흄과 참 비교되죠.

칸트가 흄의 책을 읽고 좌절하기도 했거니와..



대략 40대 중반까지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던 시간 강사는

정교수 자리에 올라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나, 정작

그때까지 자신이 해오던 방향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요.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십여 년을 침묵하며 방향을 수정한 후

인생의 후반기를 인류 최고의 지성으로서 칭송받으며 산 거죠.



범접하기 힘든 철학자 칸트보다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산처럼 묵묵한 성실성을 가진 인간 이마누엘에 주목한다면…

여러분도 철학의 길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요.



아래 개인 동영상은 쓸데없이 현학적이지 않아 퍼와요.

주로 의무론적 정언 명령을 설명하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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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irty Years’ War: International Relations Rise




30년 전쟁은 백여 년을 끌어온 종교 개혁을 일단락 짓고

유럽 각 나라의 세력 구도를 새롭게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 international.. 국가 간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봉토와 영지 중심의 중세 시대 정치를 종식하고 영토 개념의

근대 국가가 정치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nternational 단어 자체는 제레미 벤담이 18세기 말에

처음 만들었어요. ‘국제’라는 한자어 정착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번역가들이 도입했고 그 전에 중국에는 ‘만국’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쓰였죠.


구교-신교의 대립을 바탕으로 종교 전쟁에서 시작했지만

국제 정치의 역학 구도에 더 큰 영향을 주며 종료했다는

점이 큰 핵심일 것 같습니다.


30년 전쟁 이후에도 종교적 박해는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종교 개혁을 끝낸 건 아닙니다. 여러 종파 가운데 루터교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칼뱅교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공인하게 된 것 뿐이죠.


그렇지만 로마 가톨릭 교황령을 정점으로 떠받드는 수직적

햐향식 신정 정치 체제가 붕괴한 것, 이것만은 사실입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국가를 대체할 유사 국정 시스템도

아니고.. 나라의 역할은 이제부터 나라가 하겠죠.


사실 중세의 유럽은 어떤 나라가 정치의 주체가 아니고

가문이 중심이라 할 수 있죠. 어떤 개인은 그 가문이 소유한

봉토에 속해 신분상의 제약을 받는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합스부르크니 부르봉이니 하는 왕가가 정치 주체로 등장하는

추세가 30년 전쟁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되고 이 역할을

대체하여 정치 주체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란 개념이

자리를 차지하는 형식으로 변혁을 맞는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 주권이나 국왕의 대권 같은 개념도 이때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이런 관념의 정의가 불필요했죠.

군주의 지위는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니 누가 토를 달겠어요.


주권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곧 봉건적 통치권이

서서히 약화하고 근대 공화주의 사상이 형성될 바탕이 차츰

형성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거랍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국제법학에서 국제법의 주체로 주권을 가진

국가만을 상정하는 전통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국제법의 효시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근대적 법리를 완성한 사람은 조약 체결 3년 전 사망할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법률가로 활동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없어도 웨스트팔리아를

사상적으로 이끈 영도자라고 칭송하는 바로 그 인물이랍니다.


참고로 주권의 개념이 등장했지만 영토의 개념까지는 아니에요.

국제 조약에 영토 개념이 가미되기 시작한 계기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인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꼽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근대 국가란 것이 정치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실체를 정립하게 되고 여기에다가 19세기 이탈리아 및 독일의

통일로 고개를 든 민족주의 바람까지 더하면, 그제서야 대략

현대에 흔히 느낄 수 있는 민족 국가의 개념에 가까와집니다.




이렇게 30년 전쟁을 계기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현대 유럽

국가의 원형이 이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함을 확인할 수 있죠.

정권 간의 세력 구도가 엄청난 변화를 맞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겁니다.

중세를 지배한 로마 + 기독교의 시스템이 붕괴한 거죠.

제국이 다스리던 독일 지역은 3백 개가 넘는 영방 국가로서

각자의 자치권을 인정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 땅이 전쟁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한 뒤죠.

인구 기반이 사라졌다는 것은 경제 활동과 총생산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거고요. 1871년 통일할 때까지 독일은 유럽

정치 무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린 스페인도 하락세에 들어갑니다.

카를 5세 시절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죠. 지리상 발견에만

기대기에 신흥 강국이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빠르고요.


스페인 육군의 전통적 전술이 무너진 것도 하락세에

한 몫을 차지했어요. 무적함대의 유명세도 이미

16세기에 볼장 다 본 터였습니다.


두 나라를 통치한 합스부르크는 이제 유럽의 종이 호랑이로

전락합니다. 대신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빠르게 대체합니다.

(합스부르크 통치 지역은 지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30년 전쟁 막판에 루이 14세도 즉위했거니와 이제 프랑스

절대 왕정의 호시절만 남아 있죠. 이때까지 영국과 러시아는

아직 국내외 사정으로 정신 못 차리던 때입니다.


프랑스 북동부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20세기엔 자원의 보고로

급부상할)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랑스에 거의 넘어옵니다.

독일 경제도 완전히 붕괴했으니 이제부터 프랑스로선

최소한 뒷마당 걱정은 면하게 된 셈…




30년 전쟁으로 피어난 새 강호는 북구의 스웨덴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은 스웨덴의 사자왕으로 불려요.

애초에 덴마크-노르웨이와 북해 패권을 놓고 대립했는데

이제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를 눌러 버렸어요.


덴마크-노르웨이는 16세기에 형성된 동군 연합국입니다.

30년 전쟁 초기엔 신교 동맹에 잘 붙었는데 나중에 황제

편으로 변절하여 스웨덴에 깨지는 불운이...


영국은 동맹까진 참여했는데 1642년에 영국 내전이 발발하며

주춤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약

60여 년이 흐른 후. 17세기말 명예 혁명을 완수하며 내홍을

딛고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아직 중앙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 전이고

대개 유럽 국가들은 미개한 저개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죠.

러시아 국력의 폭발은 18세기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입니다.

30년 전쟁 때는 스웨덴에 밀려 기싸움 중이었어요.


러시아와 전쟁 중이고 스웨덴 기에 눌리던 동유럽의 나라 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있어요. 종교 전쟁의 광풍을

슬기롭게 피했고 거국적인 관용의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흔치 않은 나라죠. 30년 전쟁에선 오스만 제국을 견제했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나라들이 이때 독립하여 국체를 형성했어요.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


포르투갈은 과거에 국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혈통이 끊겨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30년 전쟁 말미에 다시 독립했어요.


스위스도 합스부르크에 예속은 했지만 실상은 그전부터

느슨한 국가 연합 형태로 독립국이나 다름 없었고 국민들

상당수가 용병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합스부르크가

30년 전쟁에 지면서 정식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종교 전쟁의 하이라이트이자 진정한 독립국은 네덜란드겠죠.

오랫동안 스페인 제국에 삥뜯기는 영지 신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내다가 1568년부터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종교 개혁의 문파가 크게 루터와 칼뱅으로 나뉘지만 까놓고 말해

두 종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에요. 루터교는 가톨릭 교리를 상당히

수용하고 정치적으로도 황제 중심의 보수 성향을 띱니다.


당시 진정한 급진 세력은 칼뱅교였어요. 청교도들 경건주의에서

보듯이 교리도 훨씬 원론적이고 황제권 같은데 질색하는 정치

성향이었죠. 거기다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는 경제 철학으로

네덜란드 상인 계급이 일찍부터 받아들여 장악하고 있었어요.


30년 전쟁의 네덜란드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충분히 독립을 인정받을 만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했어요.

그 결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합니다.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대서양 무역 항로를 두고

영국과 대일전을 벌여 양대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입니다. 근대 공화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체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끝을 맺으며 봉건주의를 종식하고 근대의 문턱을 형성한

사건, 바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국제 정치국제 관계학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래는 찾아본 중에 가장 짧으면서도 비교적 상세한

교육용 개인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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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 Years’ War: How Battles Began and Ended




한국에서 의외로 잘 모르는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 분들이 많아

서양사나 국제 관계를 이해할 때 애먹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유럽의 역사가 30년 전쟁 전후로 나뉜다는 관점도 있고 실제로

현대 세계사에도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요. 동양 역사와 굳이

비교하면 아편 전쟁급…? 수당 시대를 무너뜨린 안사의 난,

한족 마지막 통일 국가를 무너뜨린 청조 건국에 견줄 수도..


동학 농민 전쟁이나 실학 운동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만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면 어렵잖습니까. 서양 유럽계 백인들에겐

이와 비슷한 정도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에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원래 직업이 군인인데

그가 젊은 시절 30년 전쟁에 참전해 야영하며 인생을 바꾼

꿈을 꾸고 철학자가 되었다죠.


천체 역학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말년에 30년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어 버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이런 피해에 시달렸을 거에요.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 내내 전쟁을 한 건 아니고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스웨덴 등 대략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어요.


1618년경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80년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었고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영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벌였다는 뜻이죠.


이는 곧 15~16세기 최강국이던 에스파냐의 위세가 점점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제국 곳곳에서 균열이

커지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그 신호탄이며 30년 전쟁이

결정타를 먹였다고 볼 수 있죠.


16세기 바다에서 먼저 하향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1571년

레판토 해전은 스페인이 이겨 오스만 세력을 저지하였으나

1588년 칼레 해전에선 영국-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었죠.

스페인 아르마다의 힘이 빠지고 있었어요.


16~17세기 유럽의 최강자는 지금의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요.


16세기 중반 카를 5세 황제 때가 합스부르크의 최대 판도였죠.

퇴위할 때 카를은 스페인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현 독일권

신성 로마 제국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줬는데요.


당시 종교 전쟁을 스스로 잘 봉합하지 못해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교를 공인하지만

이걸로 분열이 일단락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7세기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반동 정책을 펼쳐 다시 전쟁의 불씨를 피우고 맙니다.




결국 직접적 동기는 종교 전쟁인 거죠. 보헤미아 왕국

(지금 체코)이 먼저 개전하여 북독일이 호응하지만

남독일은 반발하는 상태가 되고요.


현재 루마니아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격해요. 여기엔 사보이 공국(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스위스에 걸치던 나라)도 조력하게 되요.


이 반란을 일시에 잠재우긴 하는데 합스부르크 안에서 여전히

문제가 곪고 있었죠. 스페인 황제 펠리페 3세가 페르디난트로부터

알자스 지방을 할양받기로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독립에다가

프랑스 북동부 본토의 위협과 직결되는 사안이거든요.


이에 프랑스를 통치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사보이, 베네치아를 결속하여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은밀하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요. (프랑스는 가톨릭임에도..)


여기에 페르디난트와 사소한 원한이 있던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개신교 동맹에 붙어 참전해요. 이로 인해 전장이 확대되고

군비가 확 늘어나 페르디난트에게 불리해지죠.


그런데 전투에서 덴마크가 밀리니 북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까지 독일 땅으로 침공하죠. 우수한 전술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의 테르시오를 박살냅니다.


*테르시오 = 화승총장창이 짝을 이루는 스페인식 육군 전술..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전성기 병법으로 16세기에 절정을 찍고

보시다시피 17세기에 총기와 대포의 발달로 무너져가고 있음..




스웨덴이 매우 강력하게 버텼으나 그 와중에 구스타프가 전사하자

개신교 세력이 크게 동요하고, 지금까지 뒤에서 돕던 리슐리외는

동맹 초기 프랑스의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기야…


1635년 프랑스까지 드러내놓고 선전포고하고…

바야흐로 부르봉합스부르크…! 두 라이벌

왕가 간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커져 버립니다.


부르봉은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를 이어받아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는 여기 보시다시피.. 점점

내리막길로 가는 중.. 두 가문의 골든 크로스 진행 중..


프랑스가 가세하여 동맹군이 조금씩 황제군을 밀어붙이고

네덜란드에서는 독립군이 스페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요.

이 와중에 페르디난트 2세는 승하.. 아들 3세가 즉위해요.


페르디난트 3세가 고압적인 자세로 화평을 타진하니 더더욱

열받은 동맹군이 황제군을 압박해요. 연전연패하는 합스부르크..

이때 리슐리외도 죽고 아직 어려 암것두 모르는 루이 14세 즉위.


종전 교섭 회의가 열리려던 즈음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스페인 군을 작살내 버리면서 동맹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아요.


막판에 황제군과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연합하자 동맹 주도권을

다투던 스웨덴과 프랑스가 연합군으로 응수, 전투가 끝나요.


1648년 11월 2일,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가톨릭 진영의 보루

프라하가 항복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간 광풍이 사그라듭니다.




복잡하죠? 최대한 요약해볼까요. 페르디난트 2세가 (할아버지처럼)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영지 반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보헤미아

전쟁 문제에 알자스 할양건이 겹쳐 프랑스를 자극해요.


반황제 동맹이 결성되고 황제에 원한이 있던 덴마크가 참전하며

전장이 독일로 번져요. 덴마크가 유틀란트까지 밀리니 스웨덴이

참전하고 리슐리외와 함께 구스타프는 동맹의 중심이 되요.

브라이텐펠트에서 합스부르크가 박살나죠.


구스타프가 전사하여 동맹이 흔들리자 프랑스가 참전하며

전황은 최대한도로 확장되죠. 처음부터 그랬지만 본격적인

부르봉 대 합스부르크 싸움이 되버렸고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격파하고 페르디난트와 리슐리외가

차례로 죽었으며 결국 로크루아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참담하게 무너집니다. 막판에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이

다시 한 번 승부에 쐐기를 박고요.


독일 — 덴마크 — 스웨덴 — 프랑스로 참전 양상이 확대했고요.

신교 동맹군의 구심점은 구스타프의 스웨덴과 리슐리외의 프랑스.




체코와 북독일에서 시작한 전쟁이 덴마크로 번지고 스웨덴과

프랑스의 참전에 따라 독일 전역이 전장에 휩싸인 겁니다.


결국 힘있는 나라들이 들어와 싸우는 통에 죽어나는 건 독일의

평민들이었어요. 동학전 명목으로 청과 일본이 싸워 구한말

조선 백성이 나가 죽은 사실과 묘한 기시감을 형성하죠.


독일인만 8백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1차 대전으로 1천만

가까이, 2차 대전으로 7천만이 넘게 죽었는데 이건 그나마

세계적 분포지만.. 이는 독일 인구 세 명 중 하나가 사라진

결과죠. 나머지 둘도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지옥이고…ㅜ


이렇게 민간인이 학살된 배경은 약탈 때문이에요. 군 편제의

상당수를 용병이 채우고 있었는데 제때 급료를 받지 못하니

전리품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고 하죠.


이로써 길고 넓었던 최초의 국제전이 끝납니다. 30년이나 되는

지난한 세월,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정권이 직접 참전하거나

간접 관여한 최초의 국가간, international 전쟁이었죠.


폭력의 경과는 이러했고요. 이 여파로 인해 유럽사의 체계를

바꿔버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다음 포스팅에선

이 결과와 영향을 상세하게 다루어 볼까요.


아래 동영상은 당시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것…

보병, 기병, 창병, 총병, 포병 등 기능별 군제가 정착하고 있죠.

머스킷선형진을 이루고 아직 장창이 쓰이고 있으며 중세식

기마 돌격용 창병기, 랜스가 사라졌음을 확인하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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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I

Reformation and Wars of Religion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I. 종교 개혁 Reformation 



종교 개혁은 중세 유럽인의 정신과 생활을 장악하던 가톨릭의

구체제가 신교라는 교파 분리로 도전받은 종교 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국정의 관리 행정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근대적 국제 질서를 다진 변혁으로 분석할 여지가 더 크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바..

첫째, 기독교 체제의 구속을 탈피하고 난 이후에야 유럽인들이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자유를 얻어 정치 제도를 일신하고 현재의

민주정 체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요.


둘째, 현대인들의 상상과 달리 중세의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 기호

차원의 종교가 아니라 지역 교구 차원에서 신도를 관리하며 국가

행정 체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사 국정 시스템의 역할을

해냈는데 종교 개혁으로 이것이 통째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혁 운동의 실제 모습이란 것이 현대인들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회 일부 종교인들의 평화적 활동으로 점철되지 않았고,

제후와 영지의 거주민이 전력을 다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 정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시발점으로 1517년의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꼽는 일은

오랜 통설입니다만. 그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한 존 위클리프가 있었고 1415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잡혀 화형 당한 얀 후스 등이 있었죠.


독일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문에 붙인 행위는 일종의 대자보 같은

거고요. 오늘날로 치면 기자 불러 발표문 읽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정치 사회적 의사소통 행위로 보면 됩니다.


취리히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미 1516년부터 스위스 용병의

활동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1523년 시의회에서 67개 신조

주장하며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어 그의 가치가 늦게 발견된 거지요.


요절해 활동이 짧은 츠빙글리나 농민 전쟁에 반대한 루터와 달리

진정한 교회 개혁장 칼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신교 교리가

정교 일치의 신정 자치제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제네바에서 몸소

보여줬고 장로교 체계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교 운동에 대한 영국식 반응이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인데

성공회란 것이 사실상 교리에선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긴 해요.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였던 헨리 튜더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교회법상 적법한 이혼으로 후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죠.


(네, 현대 국가의 성문법이 해결할 생활의 영역을 교회법

민간의 관습법을 해석하여 푸는 사회가 바로 중세랍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 칼뱅식 청교도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후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

흐름에 큰 돌발 변수로 작용할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체제를 밀어 붙이다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슈말칼덴 전쟁

휩싸이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제후 및

봉토의 루터교 선택권을 인정하며 항복 선언을 합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위그노 전쟁의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었고 구교인 발루아 왕가의 족보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위그노 앙리 4세가 즉위하며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한 후에야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통일 강대국의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지대 국가들 중 상공업이 활발했던 네덜란드가 신교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스페인 호구 노릇에 신물이 나 합스부르크의 가톨릭

강요에 반발하였죠. 그들의 독립 의지는 16세기 후반 80년

전쟁으로 폭발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결실을 맺게 되죠.


그래요. 17세기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로 인해 위기를 맞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호시탐탐 합스부르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었죠. 1618년에 30년 전쟁이 터졌습니다. 80년 전쟁 중이었죠.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해요.)


30년 전쟁은 종교 개혁의 정점을 찍은 대사건이자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이었으며 유럽 최초의 국제 대전입니다. 유럽의 모든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어요. 심지어는 오스만 제국까지도.

또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죠. 자그마치 8백만 명..ㅜ


30년 전쟁의 한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이, 다른 편에는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균형을 이루었어요. (위그노들을 학살한 주제에

프랑스는 신교 진영이었죠. 국제적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요.)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라 워낙 함수 관계가

복합적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 종속적 구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는 거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제법이란 도구가

생겼거니와 이제 영지나 봉토에서 근대 국가 개념이 등장했고 각

국가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각자도생하여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둘째, 유럽의 세력 지형이 차츰 현대와 비슷하게 변화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은 정점에서 하향세로 가고 스페인도 저물어가며

새롭게 부르봉의 프랑스가 최강자 자리를 넘보게 되었어요.


영국은 내전으로 불안불안하여 전쟁에 직접 뛰어들진 못했고..

영국의 국력이 드러나는 때는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렵입니다. 17세기는 무역으로 돈벌고 청교도로 골치 아픈 중…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필두로 영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새로이

탄생합니다. 네, 이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꽤 벗어나게

되었어요. 스위스도 독립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맹활약한 스웨덴도 상당한 국익을 챙겼죠.


17세기 후반에 가서 해상 개척의 판도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영국(내전을 끝내고 명예 혁명을 완성)과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양강 구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양국

모두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박차를 가하죠.


요는, 점점 우리가 아는 현대 유럽의 국경선이나 국제 관계의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개전했지만

결과는 정치 구도와 국제 관계로 매듭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나 종교 전쟁이 절대로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며 거대한 정치 역학 관계에 광풍 같은 변혁을 몰고 온

시대 패러다임의 대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랍니다.




2003년에 나온 작은 독일 영화 루터조셉 파인즈 연기를 보며

5백 년 전 독일 제후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일계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지아코모 마이어베어는 숱한 성공작을 만들었는데 1836년

초연한 그랜드 오페라 위그노 교도가 있어요. 아래 프러덕션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 버젼인데 아예 홀로코스트 분위기로

갔네요. 종교 전쟁과 나치 탄압.. 비슷한 듯해요.



위그노 전쟁 중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대놓고 묘사한 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작 여왕 마고가 진정한 걸작일 겁니다. 아래

동영상에서 5분께부터 나오는 학살 현장 묘사는 프랑수아 뒤부아의

아래 그림과 많은 유사성이 관찰되기도 하죠. (미성년자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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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r Incidents from European History over

International Relations Realm




국제 관계학의 역사에서 시대별 맥락을 짚을 때 반드시

검토하고 분석하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그 역사와 시기를 보면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백여 년

언저리의 간격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여 매우 흥미롭죠.


오늘은 이런 국제적 사건과 국가간 조약

역사를 요약하여 정리해 볼까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Fall of Constantinople 



1453년이 중세를 끝장 낸 연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해 서양 중세사 최고의 사건인즉슨..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한 일일테죠.

무려 2200년을 이어온 제국이 멸망한 사건이니까요.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통치의 절정을 찍고 6백 년 넘게

존속한데다 폐쇄적 기독교 문화 속에 골골하던 유럽을

아득히 초월했던 14~17세기 세계의 패권국이자

동시대 유럽 군주들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나비 효과로 지중해 동쪽 항로가

막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 일주 항로를 개척했으니

역사의 거대한 새옹지마이자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죠.

(동양의 신비… 후추를 어디서 수입하냐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항해 시대, 피렌체 등 도시 국가들의

르네상스 인문 혁명, 거기에 북독일의 종교 개혁이 바야흐로

적정 혼배합하여 유럽의 근대를 열어 젖히는 찰나였어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Peace of Augsburg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 개혁

일단락된 사건이자 루터교를 공인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신교를 인정한 계기의 바로 그 사건입니다.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맞서 전쟁하던

신교 영방국들이 페르디난트 1세와의 극적인 합의를 통해

루터교 종파를 공인한 군주간 합의 사건이라 볼 수 있어요.

(페르디난트는 카를의 동생이자 독일 대리 통치자..)


페르디난트는 당시 선제후와 농민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교세를 꺾기보다 상호 협력하여 자치를 인정하는

개혁 성향으로 독일권 제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사람..


화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개별 제후의 종교 통치권을

황제나 교황과 분리하여 최초로 인정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해당 영지의 종교를 제후가 택한 종파로 정한다는 내용이죠.


허나 루터교는 인정 받았는데 당시 더 진보적 성향이던 칼뱅

장로교 제후국들이 제외된 문제가 여전히 잔존한 상황이었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halia 



상호 경쟁하던 국가의 군주들이 독일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모여 30년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

바로 그 조약입니다. 오늘날 국제법의 효시라 하죠.

(요샌 웨스트팔리아로 부르기 시작하기도..)


1618년에 시작한 종교 전쟁 후반부 중요한 변곡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도 맞물린 17세기 최대의 사건이

바로 30년 전쟁입니다. 근대 최초의 국제전이라고 하죠.


루터와 칼뱅에서 시작한 투쟁이 130년 만에 여기까지 이른

겁니다만, 프로테스탄트 전쟁을 단순한 종교 문제로 보면

부족하고 교황과 황제 중심 거대한 국정 체계 패러다임이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용트림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신교 투쟁의 결과물이 결국 개별 제후가 다스리는 봉토의

자치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인 것에서 알 수 있죠. 이제 황제의

통치를 받는 제후의 시대가 아니라 독자적 군주가 된 겁니다.


주권, sovereignty의 개념이 본격화하고 이로 인해 절대

왕정 및 왕권 신수설이 대두되는 발판을 마련하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동인도 마련되기 시작하는 거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Peace of Utrecht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조약입니다.

생소한 전쟁일텐데 유럽 왕가 간 세력 균형전으로 이해해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지는 해’ 합스부르크

프랑스를 다스리는 ‘뜨는 해’ 부르봉 왕가가 주인공인데요.

(부르봉 킹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 확장욕 쩌는 분..)


스페인 왕위 계승전에 루이 14세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가

선순위로 떠오르는 상황을 오스트리아와 영국과 네덜란드가

막아서며 발발한 전쟁입니다. 부르봉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병합하면 견제 불가능한 거대 국가가 탄생하기 때문이죠.


의외로 (그때까지 약체로 분류되던) 영국의 견제가 제대로

먹혀 부르봉이 스페인을 계승하되 프랑스 왕위는 포기하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됩니다. — 루이 14세, 야욕 좌절…


유럽 영토에서 어느 한 나라가 잘 나가 바보짓을 벌이면

엇비슷한 국력의 나라들이 합심하여 다구리를 먹이는…

현재도 이어지는 불문률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주권에 영토 개념을 넣는 법리도 형성되었고요.




1815년,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를 패자로 공인하며

이후 전 유럽에 불어닥칠 자유주의 바람에 제동을 걸고

왕정 복귀를 천명한, 보수 반동의 대명사격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재한 걸로 유명하죠.


프랑스 대혁명 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유럽

각국에 전쟁을 벌였는데요. 역설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것은 혁명이 낳은 프랑스의 정신이었어요. 자유, 평등, 박애.


회의 대표자는 힘센 나라의 왕과 귀족이었죠.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자국에 혁명이 수입되면

꼼짝없이 목이 날아가는 분들.. 국경선과 전리품 배당을 놓고

혈안이 되어 똥고집을 부리며 진척이 더디던 중이었는데요.


보나파르트가 유배지를 탈출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라 협정서에 조인을 했다고 해요. 쌩 코메디..

(메테르니히의 댄스 파티도 찾아 보세요. 배꼽을 잡을 듯..)


이른바 유럽 협조 체제, Concert of Europe이란 국가간

공조가 명문화하여 등장한 거에요. 핵심은 위 위트레흐트 때

다구리.. 와 대동소이하고 이 시스템이 40여 년을 유지했죠.


그러나 한번 불씨를 당긴 자유주의의 대세는 거스를 수 없어요.

30년 7월 혁명(‘레미제라블’ 배경), 32년 영국 선거법 대개혁,

1848 연쇄 혁명과 공산당 선언… 이미 불길은 타오른 거죠.




1919년, 베르사유 조약 Treaty of Versailles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하고 독일의 패배를 선언하며

막대한 배상금 조건으로 두번째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독일 제국과 연합군 승전국들 사이의 조약입니다.


빈 회의로 패전국 프랑스가 실질적으로 잃은 것이 없던 데 비해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는 독일인들에게 참담한 치욕이었어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닥쳤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몰락했으며 히틀러 집권의 계기가 되었죠.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가 이 비극을 예견했다는 거 아시죠.

(이때 협상 대표단 중 일원이었다가 참다 못해 사퇴..)


특히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뻘짓은 어마어마했어요. 그의

하이라이트는 이렇다 할 강제력을 갖지 못한 국제 연맹 창설로

‘마치 무언가 해결된 듯한’ 국제 관계의 판타지를 조장한 점이죠.


장렬한 뻘짓의 대행진이 전간기 20년의 나날을 채워요.

바야흐로 한스 모겐소가 현실주의로 스타가 될 조건이 형성..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죠.


거기에 세상은 대공황의 광풍에 휩싸이고 있었고요.

이런 악조건에 어떻게 전쟁이 또 안 날 수 있겠어요.




1945년, 얄타 회담 Yalta Conference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루스벨트와 스탈린과 처칠이

모여 깡패처럼 전후 국제 질서를 결정지은 그 회담입니다.

우리나라는 여기 놀아난 직접 피해 당사자국… 아시죠?


베르사유 조약이 종전 직후 전쟁 문제를 처리하는 성격인데

반해 얄타 회담은 종전이 임박한 시점에 전후 문제를 미리

조율하는 강대국 슈퍼 파워들의 미래 회의 같은 거였죠.


이 사건의 가장 큰 상징성은 팍스 브리태니카의 레짐이 이미

저물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대항마로 소련이 등장하여

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린 실질적 계기라는 점이에요.

(실제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을 이끌어냄.)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한반도가 둘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폐해를 입어야 하는 원인을 만들었죠. 도대체 왜 때문에?!

패전국 일제가 아닌 우리가 분단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냉전이 시작하여 1989년 동유럽 혁명까지 존속해요.

하지만 이 땅의 냉전 파편은 아직도 진행 중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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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Do They Study Mostly Today?







정치학political science라고 하고요.

왜 사이언스가 붙냐면 현대 정치학 연구물이 숫자와

통계를 써대며 거의 계량화해 버렸기 때문이에요.



(미국의 정치학 연구 문화이죠. 미국은 정치도

주도하고 정치학도 주도하고 있답니다. 참 쉽죠?)



유럽은 아직도 politics라는 단어를 쓰기도 합니다.

특히 영국. 옥스브릿지나 LSE, UoL을 보면 알 수 있죠.



경제학을 미시와 거시, 계량으로…

법학을 민사, 형사, 공법, 소송으로 나눌 수 있듯이

정치학의 서브 장르, 하위 분과 학문을 나눠보면요.



학교의 전통에 따라 여러 관점이 혼재하여

살짝 머리 아프지만 본 블로거의 주관으로는..



정치 사상사, 정치 이론, 비교 정치, 공법, 행정,

정치 경제, 국제 정치의 일곱 분과가 맞다고 봅니다.

원래는요. 원래는, 오리지널리.



그러나 한국의 정외과 교육 풍토에서는 보통

공법행정정치경제는 과감하게 생략하는,

무겁도록 암묵적인 분위기가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각각 법학과, 행정학과, 경제학과에서

열심히들 가르치고 있으니 정치외교학과가 저거 다 가르치면

딴 과는 뭐 먹고 사냐는 논리가 굳어온 때문인 듯해요.



그런데 근대 학문의 발전 역사를 주욱 살펴보면 나오지만

철학의 정치 사상이 굵은 줄거리를 형성하고 거기에서

우리가 아는 사회과학이 모두 갈라져 나왔지요.



철학에서 자유주의와 민주 정치의 연구가 터져 나왔고

중간에 경제학이 나왔는데 원래는 정치 경제, political

economy라는 서브 장르의 외양으로 등장한 거죠.



정치학이 독립 학문으로 인식된 시점은 대략 19세기

후반이고, 20세기 전반기에 행정학이, 20세기 중반에

정책학이 갈라져 나왔어요.



사실 오늘날 주류로 인식되는 사회과학이 죄다

철학과 정치학의 본류에서 새어나온 지류들인 셈이죠.



우리 식의 교육 풍토가 주류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고요.

미국의 정치학 전공자들은 앞에서 분류한 일곱 가지를

그래도 조금씩은 훑는다고 해요. 아예 생까진 않고.



미국 학제에서 politics라고 하면 미국식 민주주의와 헌법론,

정부 이론(즉 행정학), IR, 국제경제, 국제법을 다 조금씩

커버하는 편이죠. 한국식 정외과 커리큘럼과 차이가 있음..



우리는 또 정치’외교’학이라고, 외교를 강조하쟎아요.

근데 이건 솔직히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현상이에요.



외교학이란 것이 사실 별다르게 존재하는지 의문이죠. 저 위

일곱 가지 중 국제 정치학, 즉 국제 관계학 밑에 또 세부적인

여러 각론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외교 이론일 뿐이에요.



*미국 4년제 대학교 학부 수준에서 제공하는 커리큘럼 훑


(Harvard MA)

https://gov.harvard.edu/gov-courses


(Northridge CSU CA)

https://catalog.csun.edu/academics/pols/programs/ba-political-science-i/politics-and-government/


(Grambling State LA)

http://www.gram.edu/academics/majors/arts-and-sciences/poli-sci/curriculum/political%20science.php


(Hampton VA)

http://libarts.hamptonu.edu/page/Curriculum-7


(Jackson State MS)

http://www.jsums.edu/polisci/undergraduate-courses-offered/




정치 사상사는 철학사에서 정치 파트를 빼온 식이에요.

보통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공맹, 카우틸랴에서부터

고대 정치 사상을 풀어나가죠.



그리고 민주 정치 역사에서 많이 들어본 마키아벨리,

홉스, 루소, 몽테스키외, 밀, 마르크스의 이야기가…



현대에 정치학이 독립한 이후의 사상가로는 모겐소,

아렌트, 달, 사이먼, 롤스, 애로우, 키신저, 헌팅턴, 나이

등등이 등장하여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가는 거죠.



(이 중 로버트 달은 민주 정치의 이론화에 공이 크고

본 블로그 좌상단 작은 이미지로 등장한 할아버지가

바로 이분이랍니다. 좋아해서요.)



정치 이론 파트는 추상적 개념을 파고드는 난해한 분야고

보수, 자유, 사회 등 이데올로기와 권력론, 국가론 같은

현대 정치 현상의 구성 요소를 철학적으로 푸는 겁니다.



여기까지 분야는 오늘날 정치학에서도 종사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고 극소수 철학적 천재들만이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요. 비주류란 말이죠.



현대 정치학의 주류 분야는 크게 비교 정치와 국제 관계,

이 둘로 나뉩니다. 대학원 이상의 정치학 전공자가 다들

뭐 연구해서 먹고 사냐 할 때 죄다 이 둘에 몰려 있지요.



비교 정치 파트에서 본격적인 민주 정치의 제도가 나와요.

대의제부터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등등..

삼권 분립에서 입법, 행정, 사법의 역할.. 정당과 이익

단체, NGO, 커뮤니케이션 같은 사회 집단까지..



하지만 오늘날 비교 정치 연구 소재 중 정수는 바로 선거죠.

선거를 통해 권력이 창출되기도 하고 통계 분석을 도입하여

논문 뽑아내기 좋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이 연구합니다.



요즘 핫한 선호 투표제, 비례 대표제, 연동형/권역별 등등

주제가 최근에 가장 빈번한 연구 사례들입니다. 정말

다양한 연구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공법 연구의 핵심이자 출발점은 헌법입니다. 연구 대상이나

소재를 보면 법대의 헌법학과 사실상 큰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본 블로거 개인 감상인지는 몰라도) 법학 전공자가

쓴 헌법학 연구물과 정치학 전공자의 공법 연구물은 많이

달라요.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 논조, 어법 등등에서…



원래 헌법학을 먼저 공부하고 정치학으로 빠졌는데

법대생 세계에서 관용적으로 쓰는 공통 어구를 잘 쓰지

않아 정치학 이론서를 읽는데 고생했던 적이 있어요.



법학 전공자의 어법이 다소 딱딱하고 정형화되어 있다면

정치학 전공자는 꽤 리버럴한 철학적 사유의 방식으로

정치와 헌법의 소재를 풀어간다고 할까…



설명하긴 어렵지만 정외과에서 공법 연구를 배제해온

수십년 한국 풍토만의 특유한 문화가 아닐까 합니다.



행정 이론은 행정학과에서 배우는 그대로입니다.

개론, 조직, 인사, 재무 등을 거쳐 정책학까지 연결되는

구조를 가지죠. 일부 각론은 경영학과 많이 겹칩니다.



인사 행정은 그대로 경영학의 인사 관리와 유사합니다.

공공의 경영이 행정이고 사기업 행정이 경영이니까요.



정책학이란 분야가 따로 떨어져 나왔으니 행정학에서

다소 이질적인 분야처럼 보이기도 해요. 어떤 정책의 성과를

과학적으로 측정하자고 달려드는 실증 중심 분야랍니다.



경제학이 원래 18세기 정치 경제학에서 출발했다고 했죠.

그래서 지금도 정치학과 경제학은 겹치는 영역이 꽤 크고

때로 오버랩되어 콜라보하는 연구를 많이 합니다.



경제학에서 산업 조직론게임 이론을 공부하던 분들은

모든 이론이 정치학 교과서 속에서 동어 반복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거에요.



국내에 개론서로 나온 책 중에 ‘세계 정치론’을 읽어 보시면

특히 경제학 이론이 정치학자의 변주를 거쳐 해석된 글을

경험하실 수 있어요. 로체스터 학파의 특징이라네요.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교수 원저의 세계 정치론)



선거나 투표, 정책 결정 과정에서 행위자 간의 머리 싸움을

어떻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실증할 수 있을 것인가…

주로 이런 연구라고 보시면 됩니다.



국제 정치학, 즉 국제 관계학, 곧 IR은 정치학의 하위

분과이기도 하면서 약간은 독립 학문처럼 분화하고

있기도 해요. 국제학이란 학제 분야로 발전한다고도 하죠.



국제 외교와 파워 게임, 교류 관계 형성 같은 것들이

주요 연구 소재입니다. 해외 토픽 시사 뉴스 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죠.



국제 관계학의 서브 장르로 공부해야 할 필수 각론을

역사, 사상, 한반도, 강대국, 외교, UN, EU, 안보, 국제법,

국제경제, 민족, 인권, 젠더, 환경, 종교/테러의 열 다섯

분야 정도라고 보면 대략 틀리지 않을 거에요.



앞에 얘기했듯이 오늘날 정치학 연구를 둘로 나눠

반은 비교 정치의 선거, 나머지 반은 IR의 지역학..

양적으로 대략 이렇게 보면 거의 맞습니다.



오늘날 정치학의 트렌드라고 보시면 되겠고요.

여기에 한국의 특성을 고려하여 통일 이론이나

한국형 IR이 독자적으로 연구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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