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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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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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5
    1640년대 영국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제3계급의 역할 2
  2. 2018.11.17
    근대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 유럽의 30년 전쟁




Back to 1640s of Britains..

What Happened and Whodunit






영국의 근대사가 현대에 와서 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중요할지 모를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현재 국적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민주 정치라는 것…

democracy.. 짜잔… 알죠?

인류 역사상 이걸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근대의 영국이거덩요.



더 정확하게 시공간을 좁혀 보면 17세기 잉글랜드와

그 주변의 왕국들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였어요.



유감이지만 17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일을

단번에 설명할 순 없어요. 아무리 단순화시켜도 최소한

전반기와 후반기, 둘 정도 시대 구분을 해줘야 합니다.



17세기 전반기 사건을 흔히 청교도 혁명이라고 많이들

들어보셨을 테고, 17세기 후반기 사건을 명예 혁명으로

알고 계실 테죠. 왠만큼 교육받은 현대 한국인들은요.

일단은 그러한데 말이죠..



출신 성분상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계층을 중심으로

청교도식 종교관을 가지고 상업 및 무역으로 세를 구축한

신사 계급의회파 반란 세력이 잉글랜드 국왕권에

대항하여 대략 1640년대부터 50, 60년대까지

벌인 일련의 전쟁과 정쟁 및 국가적 소요 사태…



자, 이렇게 복잡한 사건을 간명하고 단출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본 블로거에게 그런 재주가 없는 거겠죠.










먼저 역사서에 어지럽게 난립하는 용어부터 정리해야 해요.

이 책 저 책에 여러 개념이 난립하는데 각각 가리키는

내용이 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청교도 혁명, Puritan Revolution..은

본 블로거가 판단할 땐 국내에 가장 널리 정착한 개념이에요.

비교적 연식이 되는 사람들이 이 용어로 많이 알고 있죠.



1640년대 사태의 주동 세력이 가진 종교관이 칼뱅파 장로교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고 사태의 기저에 중세 종교 전쟁

깔려 있음을 명시하는 용어인데요.



이 표현이 다소 불명확할지 모르다는 비판이 죽 있었어요.

왜냐..? 사람들이 혁명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란 게, 보통

프랑스 1789년 혁명이나 1830년 혁명처럼, 노도처럼 들고

일어난 민중의 저항, 펄럭이는 깃발… 뭐 이런 거쟎아요.



근데 본 사태는 피치자 하층민보다는 중소 지주 계급인 신사,

젠트리나 요먼이란 제3계급이 중심이고 그 방식도 거리의 폭동이

아니라 엄연히 정규군을 편성하여 전쟁을 벌이는 식이었거든요.

그래서 다소간 본질을 호도할 소지가 있는 표현인 거에요.



영국 혁명이란 말도 프랑스나 미국과 묶어서 편의상 쓰긴 해요.

일관적 표현으로 분류하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사실 영국도

아니고 혁명도 아닌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 애매한 말이죠.













이런 이유로 오늘날 현대 영미권 역사서에서는 대체적으로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란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선호하는 편이에요. 빠르게 정착하고 있는 말인데요.

(아, 물론 영어 표현이 정착해가고 있다는 뜻)



사태의 전개가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쟁의 형태로 벌어졌기에 그래도 가장 사실에

근접한 현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번역어가 문제인데 엄밀히 말해서 이 당시 국체가

영국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아는 그 영국이란 나라는 각각

1707년과 1800년의 연합법으로 탄생한 거니까요.



17세기는 아직 각기 독립적인 세 왕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동군 연합.. 같은 군주 아래 느슨하게 결합한, 곧

연합 왕국으로서의 국체를 형성하고 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번역어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치고 박고 싸운 주무대가

잉글랜드이기도 했고..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할이 전혀 없었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기 때문에, 좀 아는 사람들은 더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죠. 이른바 삼왕국 전쟁 또는 삼왕국 내전, Wars of the

Three Kingdoms 또는 British Civil Wars..



그런데 이 용어도 삼국 시대나 삼국지처럼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히 있어 현대 한국에서 널리 용인되는 건 아니에요.

당연한 소리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위촉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거든요.



주교 전쟁, Bishops' Wars..란 개념도 있어요. 이건 이 모든

사태의 촉매 및 시발점 역할을 한 1639년과 1640년의 전쟁

일부를 가리켜요. 하지만 사실 이 전쟁 내용이 큰 줄기에서

그닥 중요하다고는 볼 수가 없기도 해요.



삼왕국 전쟁이란 개념으로 가면 주교 전쟁 등 전체를 포괄할

수 있지만 보통 많이 쓰이는 잉글랜드 내전의 개념에선 큰

줄거리만 보려는 경향이 생겨 잉글랜드 외 기타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건과 전쟁을 제외하고 논할 때도 종종 있어요.



왜 복잡한 개념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하는지 이제야 알겠죠?

한국 근대사에서 1880~90년대에 달 단위로 연달아 발생하는

복잡한 사건들을 한국인 입장에서도 차근차근 복기하기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현대 사가들의 일반적 경향을 좇아 English Civil War,

잉글랜드 내전으로 1640년대 역사의 표제어를 정리해 볼께요.










잉글랜드 내전의 본질과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사태의 능동적 주체가 누구인가부터 따져보면 어떨까요.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해갈 수 있어요.

청교도, 젠트리, 스코틀랜드



청교도란 제네바에서 태동한 칼뱅교가 영국으로 넘어와 얻은

별칭입니다. 영어 명칭으로 따지자면 또 구분이 되고요. 잉글랜드

내의 칼뱅파는 puritan, 스코틀랜드에선 covenanter로 불렀어요.



칼뱅파 장로교가 영국 땅으로 넘어와서는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내에 터전을 잡아 세력을 넓혔으나 잉글랜드 안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해 나갔습니다. 16~17세기였죠.



청교도가 영국 사회 전체에서 중심 세력이 된 데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합니다. 무엇보다도 상업과 무역 면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16~17세기 영국 경제력의 근간을 형성했어요.



칼뱅파 교리의 예정설에서 근면과 검소를 중시하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면 선천적 계급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급진적 논리가 청교도 경제 활동의 사회적 확장을

지원 사격한 겁니다. 루터교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죠.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 여기에 중앙 왕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중하급 지방 귀족이나 중소 지주층 역시 이런 생각에

동참할 여지가 충분했어요. 16세기 후반기부터 이런 사람들이

똘똘 뭉쳐 영국 정가의 기층을 장악해 들어간 거지요.



이른바 젠트리요먼이라고 부르는 제3계급, 또는 신사 계급

출현한 거에요. 이들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배경은

멀리 백년 전쟁장미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요.



백 년을 훨씬 넘긴 두 전쟁으로 대권에 도전할 만한 귀족 가문의

씨가 말라버리는 통에 중앙 정치를 담당할 인적 자원이 소멸해

버리니 이 빈 자리를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거에요.



그리고 헨리 7세헨리 8세튜더 왕조의 번영을 개창한

국왕들 역시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서 제3계급을

적당히 육성하고 달래가며 정치를 이끌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상층부 인재의 씨가 말라 중간 계층이 급부상하는

사회적 계기는 희한하게도 중세사에서 영국에서밖에 달리

관찰이 되지 않아요. 의회 정치의 씨앗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란 나라의 숙명이 시작된 셈인 거죠.



(그리고 다른 나라 역사와의 차별성이

시작된 지점도 정확하게 바로 여기…)










제3계급의 생각과 삶은 평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왕권이란 거대한 기득권에 맞설 수 있도록 훌륭한

계급 대립 구도가 시의적절하게 형성된 거에요.



당시 평민들도 다 청교도였겠지 지레짐작하는 분들도 많은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생활에 쫓겨 변화에 둔감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보수화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평민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가톨릭이나 어정쩡한 국교회 상태였죠.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는 교리와 의례, 직제 등에서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인위적으로 종교 개혁 추세를 이용한 거니까…)



즉 왕실 — 제3계급 — 평민의 삼분된 계급 구조는 어느 나라든

봉건적 신분제 국가라면 다 있는 현상인데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이 구조가 어떻게 근대화하는가의 핵심은 결국 중간 계급이 어느

쪽에 어떤 철학을 가지고 붙느냐로 역사의 향방이 달린 거거든요.










조선 후기에도 서얼과 실학자 같은 실용적 사상을 가진 중간

계급이 분명히 대두했어요. 그런데 조선이 실패한 원인은

상층부 기득권이 와해하지 않고 임란 후 신분제가 동요하며

되려 양반이 늘어나는 기형적 구조가 양산된 때문이지요.



성공한 민중 혁명을 이룬 프랑스와 러시아는 어떠했나요.

지식인과 군인이 피치자의 편에서 배경 철학을 제공하고

정치 구도 재편에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시대 정신과 비전을 지닌 중간 계급의 역할이 없으면

근대 시민 혁명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추론…

바로 이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거죠.



이런 전차로 조선 후기와 구한말에 아래로부터 혁명의 싹이

움트지 못한 역사를 맞은 거에요. 문제는 위로부터라도

개혁과 혁신이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ㅜ

구한말 기득권의 외교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죠.



제3계급의 역할은 이 정도로 중요하답니다. 흔히 상식 선에서

이 시기 영국 정치가의 대표자로 올리버 크롬웰을 상정하실 텐데

크롬웰이 이 표본 집단 특성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쟎아요.

신기하죠?



자, 다음엔 더욱 골치아픈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로

우리 함께 들어가 보아요.



돌아가신 분인데 어린이 영화 치티치티 뱅뱅으로 유명했던

켄 휴즈 감독이라고 있었어요. 이 분이 1970년에 크롬웰이란

작품을 선보이며 올리버 크롬웰 역에 ‘덤블도어’ 리처드 해리스

옹을 캐스팅했죠. 작품의 흥행은 신통치 않았지만 해리스의

사자후 연기는 정말 후덜덜하군요. 아래에서 맛만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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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irty Years’ War: How Battles Began and Ended




한국에서 의외로 잘 모르는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 분들이 많아

서양사나 국제 관계를 이해할 때 애먹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유럽의 역사가 30년 전쟁 전후로 나뉜다는 관점도 있고 실제로

현대 세계사에도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요. 동양 역사와 굳이

비교하면 아편 전쟁급…? 수당 시대를 무너뜨린 안사의 난,

한족 마지막 통일 국가를 무너뜨린 청조 건국에 견줄 수도..


동학 농민 전쟁이나 실학 운동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만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면 어렵잖습니까. 서양 유럽계 백인들에겐

이와 비슷한 정도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에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원래 직업이 군인인데

그가 젊은 시절 30년 전쟁에 참전해 야영하며 인생을 바꾼

꿈을 꾸고 철학자가 되었다죠.


천체 역학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말년에 30년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어 버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이런 피해에 시달렸을 거에요.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 내내 전쟁을 한 건 아니고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스웨덴 등 대략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어요.


1618년경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80년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었고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영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벌였다는 뜻이죠.


이는 곧 15~16세기 최강국이던 에스파냐의 위세가 점점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제국 곳곳에서 균열이

커지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그 신호탄이며 30년 전쟁이

결정타를 먹였다고 볼 수 있죠.


16세기 바다에서 먼저 하향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1571년

레판토 해전은 스페인이 이겨 오스만 세력을 저지하였으나

1588년 칼레 해전에선 영국-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었죠.

스페인 아르마다의 힘이 빠지고 있었어요.


16~17세기 유럽의 최강자는 지금의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요.


16세기 중반 카를 5세 황제 때가 합스부르크의 최대 판도였죠.

퇴위할 때 카를은 스페인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현 독일권

신성 로마 제국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줬는데요.


당시 종교 전쟁을 스스로 잘 봉합하지 못해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교를 공인하지만

이걸로 분열이 일단락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7세기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반동 정책을 펼쳐 다시 전쟁의 불씨를 피우고 맙니다.




결국 직접적 동기는 종교 전쟁인 거죠. 보헤미아 왕국

(지금 체코)이 먼저 개전하여 북독일이 호응하지만

남독일은 반발하는 상태가 되고요.


현재 루마니아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격해요. 여기엔 사보이 공국(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스위스에 걸치던 나라)도 조력하게 되요.


이 반란을 일시에 잠재우긴 하는데 합스부르크 안에서 여전히

문제가 곪고 있었죠. 스페인 황제 펠리페 3세가 페르디난트로부터

알자스 지방을 할양받기로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독립에다가

프랑스 북동부 본토의 위협과 직결되는 사안이거든요.


이에 프랑스를 통치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사보이, 베네치아를 결속하여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은밀하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요. (프랑스는 가톨릭임에도..)


여기에 페르디난트와 사소한 원한이 있던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개신교 동맹에 붙어 참전해요. 이로 인해 전장이 확대되고

군비가 확 늘어나 페르디난트에게 불리해지죠.


그런데 전투에서 덴마크가 밀리니 북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까지 독일 땅으로 침공하죠. 우수한 전술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의 테르시오를 박살냅니다.


*테르시오 = 화승총장창이 짝을 이루는 스페인식 육군 전술..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전성기 병법으로 16세기에 절정을 찍고

보시다시피 17세기에 총기와 대포의 발달로 무너져가고 있음..




스웨덴이 매우 강력하게 버텼으나 그 와중에 구스타프가 전사하자

개신교 세력이 크게 동요하고, 지금까지 뒤에서 돕던 리슐리외는

동맹 초기 프랑스의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기야…


1635년 프랑스까지 드러내놓고 선전포고하고…

바야흐로 부르봉합스부르크…! 두 라이벌

왕가 간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커져 버립니다.


부르봉은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를 이어받아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는 여기 보시다시피.. 점점

내리막길로 가는 중.. 두 가문의 골든 크로스 진행 중..


프랑스가 가세하여 동맹군이 조금씩 황제군을 밀어붙이고

네덜란드에서는 독립군이 스페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요.

이 와중에 페르디난트 2세는 승하.. 아들 3세가 즉위해요.


페르디난트 3세가 고압적인 자세로 화평을 타진하니 더더욱

열받은 동맹군이 황제군을 압박해요. 연전연패하는 합스부르크..

이때 리슐리외도 죽고 아직 어려 암것두 모르는 루이 14세 즉위.


종전 교섭 회의가 열리려던 즈음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스페인 군을 작살내 버리면서 동맹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아요.


막판에 황제군과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연합하자 동맹 주도권을

다투던 스웨덴과 프랑스가 연합군으로 응수, 전투가 끝나요.


1648년 11월 2일,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가톨릭 진영의 보루

프라하가 항복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간 광풍이 사그라듭니다.




복잡하죠? 최대한 요약해볼까요. 페르디난트 2세가 (할아버지처럼)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영지 반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보헤미아

전쟁 문제에 알자스 할양건이 겹쳐 프랑스를 자극해요.


반황제 동맹이 결성되고 황제에 원한이 있던 덴마크가 참전하며

전장이 독일로 번져요. 덴마크가 유틀란트까지 밀리니 스웨덴이

참전하고 리슐리외와 함께 구스타프는 동맹의 중심이 되요.

브라이텐펠트에서 합스부르크가 박살나죠.


구스타프가 전사하여 동맹이 흔들리자 프랑스가 참전하며

전황은 최대한도로 확장되죠. 처음부터 그랬지만 본격적인

부르봉 대 합스부르크 싸움이 되버렸고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격파하고 페르디난트와 리슐리외가

차례로 죽었으며 결국 로크루아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참담하게 무너집니다. 막판에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이

다시 한 번 승부에 쐐기를 박고요.


독일 — 덴마크 — 스웨덴 — 프랑스로 참전 양상이 확대했고요.

신교 동맹군의 구심점은 구스타프의 스웨덴과 리슐리외의 프랑스.




체코와 북독일에서 시작한 전쟁이 덴마크로 번지고 스웨덴과

프랑스의 참전에 따라 독일 전역이 전장에 휩싸인 겁니다.


결국 힘있는 나라들이 들어와 싸우는 통에 죽어나는 건 독일의

평민들이었어요. 동학전 명목으로 청과 일본이 싸워 구한말

조선 백성이 나가 죽은 사실과 묘한 기시감을 형성하죠.


독일인만 8백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1차 대전으로 1천만

가까이, 2차 대전으로 7천만이 넘게 죽었는데 이건 그나마

세계적 분포지만.. 이는 독일 인구 세 명 중 하나가 사라진

결과죠. 나머지 둘도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지옥이고…ㅜ


이렇게 민간인이 학살된 배경은 약탈 때문이에요. 군 편제의

상당수를 용병이 채우고 있었는데 제때 급료를 받지 못하니

전리품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고 하죠.


이로써 길고 넓었던 최초의 국제전이 끝납니다. 30년이나 되는

지난한 세월,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정권이 직접 참전하거나

간접 관여한 최초의 국가간, international 전쟁이었죠.


폭력의 경과는 이러했고요. 이 여파로 인해 유럽사의 체계를

바꿔버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다음 포스팅에선

이 결과와 영향을 상세하게 다루어 볼까요.


아래 동영상은 당시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것…

보병, 기병, 창병, 총병, 포병 등 기능별 군제가 정착하고 있죠.

머스킷선형진을 이루고 아직 장창이 쓰이고 있으며 중세식

기마 돌격용 창병기, 랜스가 사라졌음을 확인하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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