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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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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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20
    장궁병 대 기사, 활과 갑옷의 대결
  2. 2018.05.31
    롱다리 에드워드 :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English Longbowmen vs French Armored Knights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http://jangyune.tistory.com/entry/크레시-푸아티에-전투

http://jangyune.tistory.com/entry/롱다리-에드워드1세




장궁롱보우라고 합니다. 아주 큰 활이죠.

어느 나라나 있던 것인데 잉글랜드 장궁이 가장 유명해요.


활이 커져야 하는 이유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서죠.

활대가 커질수록 탄성력이 증가할 테니까요.


잉글랜드 장궁은 원래 웨일스 지방 산물입니다.

웨일스 왕국이 잉글랜드의 영토로 복속한 때가

13세기말 롱다리 에드워드 1세때였죠.


잉글랜드 군을 애먹인 이 무기에 에드워드가 주목합니다.

당시엔 파괴력이 너무 강해 교황이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죠.

전쟁에서 그런 게 있나요. 잉글랜드 군이 도입해 버립니다.


장궁에 대비되는 당시 보편적 활은 쇠뇌였어요.

석궁이라고 하죠. 영어로 크로스보우..


석궁이 자주 쓰인 이유는 간편성 때문입니다.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고도 능숙하게 발사할 수 있었어요.

장궁은 이에 반해 능숙해지기 위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죠.


그러나 석궁의 치명적 단점은 연사 속도였습니다.

장궁의 연사 간격을 3~5초, 석궁은 15~20초 정도로

보통 추산한다고 합니다. 너다섯 배의 차이가 있었죠.


또한 장궁은 사격 자세에 따라 원거리 공격도 가능했어요.

고지대에서 발사하면 파괴력이 훨씬 증가하기도 했죠.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가 이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국가적으로 롱보우를 적극 권장합니다.

일요일마다 궁술 대회를 열어 포상도 했다고 하네요.


왠만한 잉글랜드의 남성들이 장궁에 익숙해졌습니다.

웨일스의 평민들은 원래부터 능숙한 궁사들이었고요.

덕분에 이후 전쟁에 웨일스 장궁병 군단이 특별 편제되죠.


장궁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무엇일까요. 석궁?

아뇨. 장궁이 깨부셔야 할 적은 기사의 갑옷이었습니다.

중세의 전쟁은 중장 기사의 기마전이었거든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에게 밀리는 지점이 바로

중장 기병의 숫자였어요. 서너 배 또는 그 이상 차이났다고 하죠.


프랑스가 전쟁 초반에 자신만만하게 무식한 전략을 편 원인도

기사의 숫자에서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봤기 때문이고요.

잉글랜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장궁을 이용합니다.


중세 초기에는 사슬 갑옷이라고 체인 메일이 보편적이었는데

14세기에 와서 철판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어요. 플레이트 아머.

방호력은 철판 갑옷이 더 앞섭니다.


오늘날 장궁이 석궁보다 갑주에 대한 관통력이 우수해서

잉글랜드 군이 이겼다는 썰이 돌고 있는 듯도 한데

사실 관통력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가 있어요.


백년 전쟁 당시 양국 기사들은 철판 갑옷이 주종이었다는 썰도

돌고 있는데 사슬과 철판을 혼용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죠.


하지만 원거리라면 모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자세 잡아

장궁을 날리면 철판을 꿰뚫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래 유튜브 링크 1분 50초부터 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u0fu4k2cbB4







아 물론, 철판 갑옷이라면 인체에 맞춰 곡면 처리가 되어 있으니

왠만큼 비스듬한 각도에서는 방호가 가능했을 겁니다.


장궁병들이 주로 겨냥한 곳은 기사의 관절 접합 부분.

목과 어깨 사이나 사타구니 골반 부분의 취약점이라네요.

겨드랑이 사이 심장 가까운 곳도 많이 노렸다고 합니다.


또한 기병의 신체가 아니라 말을 겨냥한 전법도 빈번했어요.

말의 측면과 후면 방호가 약한 편이었다고 하죠.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좌익의 언덕에 위치한 장궁병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 기사들이 산줄기를 뛰어 올라갔는데

우익 언덕의 장궁병들이 측면에서 연사하여 떨궈냈다고 합니다.


갑주가 불리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둔중한 무게감 때문이죠.

보통 아머를 전면 장착하면 무게가 25킬로그램에 달했답니다.


이 무게로 진흙이 많은 곳으로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었고 이 틈새를 노려 장궁을

쏘거나 보병이 기습하니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넓게 산개하여 공격하면 되지 않겠는가 할 수 있으나

잉글랜드가 이미 좁은 경로를 선점하여 양익에서 활을

쏘아대고 있으므로 결국 좁은 중앙으로만 몰릴 수밖에요.


무거운 철갑을 짊어지고 무릎까지 오는 진창길을 걸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적 보병의 냉병기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 한 번 상상해 보면 이해가 될 거에요.


더군다나 잉글랜드 군의 진짜 강점은 장궁이 아니었어요.

병종 간에 기동과 협력, 즉 팀웍과 소통이 원활했다는 거죠.


궁병이 기병을 엄호 사격하고 위험에 처한 궁병을 향해

보병이 보호하러 달려오며 기병은 적의 측면을 공략하는…

예나 지금이나 상하 협동과 지엄한 군률은 필승의 비결입니다.


오래 전에 히트한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보면

잉글랜드 군의 강점을 석궁으로 그려놓고 이 편견이

오랫동안 정착해 버렸다고 하는데 바로 잡으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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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dward Longshanks,

The Most Unsung King of Middle Age England






에드워드 1세는 영국인들 말고 외국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잉글랜드의 국왕인데요.


잉글랜드의 역사에서 의외로 중요한 사람이기에 소개해요.


이 왕의 재위 기간이 1272년에서 1307년인데

이렇게만 써놓으면 감이 잘 안 오죠.






중세 잉글랜드의 왕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

사자왕 리처드 1세이겠죠? Richard the Lionheart..

(요새는 사자심왕이란 표현도 퍼지고 있는 모양)


사자왕의 재위 기간은 고작 10년에 불과했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눈부신 전쟁 기술로 살라딘과 자웅을 겨뤄

평민들에게서 엄청난 호응을 얻게 되었죠.


사자왕의 뒤를 이은 국왕이 존 왕인데 유명합니다.

나쁜 의미로. 바보짓을 많이 했죠.


절대 왕정 개념이 등장하기 전이니까

이 시절의 국왕은 명목만 있고 실권이 없었어요.

그냥 더 이름있는 영주라고 불러도 할 말 없는..


그런데 전쟁을 벌이겠다고 뻘짓을 한 거에요.

영주들에게 군사를 모아라, 세금을 걷겠다 하는… 헐.


영주들이 고분고분할 리가 없겠죠? 그래서 대꾸했대요.

“그래, 하라는 대로 할테니 여기 서명 좀 하실라우?”


그렇게 해서 서명한 계약서가 민주주의 최초의 문서라는

대헌장, 마그나 카르타… 역사상 최초로 왕권을 견제한 사건이고

오늘날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의 불문 헌법 중 하나랍니다.


이 뻘짓 존 왕의 아들이 헨리 3세, 손자가 에드워드 1세입니다.

오늘날 영국인들은 Edward Longshanks라고 기억합니다.


롱다리 에드워드라는 뜻이에요.

키 188센티미터의 장신이었다 하죠.


에드워드의 정적은 시몽 드 몽포르라는 귀족이었어요.

몽포르가 귀족들을 규합하여 의회를 소집하고 내전을 벌였는데

에드워드와 아버지가 붙잡혀 수모를 당했다고 하죠.


이후 절치부심하여 몽포르를 죽이고 집권합니다.

집권 후에는 현명한 정책을 여러가지 펼쳤어요.


의회를 소집한 것은 몽포르였지만

에드워드는 현명하게도 의회 운영 방식을 그대로 계승하여

유연하고 원활하게 국정을 펼쳤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수많은 법령을 제정하고 정비하였다든가

양모나 양주 등 유치 산업을 장려하여 국부를 증대했다든가

스페인과 프랑스와의 외교전에서 활약하였다든가…


특히 모범적인 의회 운영으로 명성이 자자하죠.

영국 의회주의의 전통이 에드워드 1세 치세로부터

시작하였다고 보는 의견이 다수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국의 역사가들은 에드워드 1세를

흔히 잉글랜드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로 부르곤 합니다.


지금의 잉글랜드라는 나라의 국체를

실질적으로 개창한 군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을 거쳐

튜더 왕조에서 전성기를 맞게 되요.

(이 시기는 아직 플랜태저넷 왕조)


에드워드 1세의 미디어 출연이 많지는 않은데

가장 유명한 작품이 공교롭게도 ‘브레이브하트’네요.


1995년작 멜 깁슨 감독 및 주연.

‘공교롭게도’라고 한 이유는 다들 아시죠.

이 영화가 엉망진창 고증으로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ㅠ


작품의 고증에 대해서는 나중에 깊게 따지고요.

여기서 에드워드는 패트릭 맥고한이라는 명배우가 열연했는데

음흉하고 정쟁에 능한 변태 늙은이 비슷하게 묘사가 되긴 해요.


너무 믿지는 마시고 특히 소피 마르소가 분한

이사벨라 왕자비 파트는 완전 픽션이니.. 그냥 잊으세요.

기억에서 걷어내시기 바랍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 입장에서 에드워드 1세를

폭군으로 인식하는 것은 팩트 맞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입장에서 성군이고 명군인 것 역시 팩트입니다.


특히 의회 정치의 시작점이란 점이 중요합니다.

이 한 가지는 기억해 두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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