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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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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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8.05.17
    고대 그리스의 복잡한 역사 한 판에 요약




Are You Aware Who Henry VIII Really Was?




미디어는 다양한 모습으로 헨리 8세를 묘사해왔습니다.


60년대에 나왔던 리처드 버튼의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이 자매로 나온 영화도 생각나며

캐나다 드라마 시리즈도 기억나네요.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으로서야 이런 창작물을 깔 만한

구석이 없을 거에요. 각각이 모두 독창적 완성도를 구축했고요.


69년작 ‘천일의 앤'은 당시 수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었어요.

리처드 버튼의 연기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긴,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배우들이었으니까요.


대체적으로 미디어가 소비해온 헨리 8세는 그러했습니다.

여자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종교를 버린 난봉꾼, 색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ㅎ


이런 이미지는 조선 후기 숙종 같은 군주와 자주 오버랩되어

사극을 좋아하는 중장년의 보수적 시청자층에게 뭔가 묘하게

동질감의 판타지를 조장해온 느낌이에요. 저쪽도 비슷했구나.. 하는.


현대 한국의 사회가 미디어에서 장희빈을 소비하는 방식의

연장선상 어딘가에 비슷한 형상을 한 앤 불린이 있을 겁니다.


이 이미지는 진실에 가까운 정당한 것일까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어떤 인물인가요.






헨리 8세가 걸어온 행보, 그 목적



열 여덟의 나이에 즉위한 헨리 7세의 왕자는

튜더 왕조가 기록하는 두번째 군주였습니다.


튜더 왕조는 장미 전쟁 이후에 탄생한 16세기

잉글랜드의 왕가 가문이고요.


장미 전쟁이란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 사이에 발발한

15세기의 왕위 계승 내전이었습니다.

(두 왕가의 인장이 장미 문양이라서 저렇게 부른다능..)


튜더 왕조는 오늘날 영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왕국의

실질적 토대를 형성한 공이 있는 가문입니다.


우리로 치면 14세기 말에 조선조가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골격을 형성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튜더 왕조에서 이런 공의 8~9할은 대략

두 명의 군주에게 그 몫이 돌아갑니다.

헨리 8세와 그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아시죠?





헨리 8세는 해군을 양성했습니다.

이 해군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북해를 주름잡으며

해상 강국인 잉글랜드의 기반을 형성했어요.


헨리 8세는 교황 및 대륙의 군주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복잡한 외교전에 잉글랜드의 발언권을 높여갔어요.

(이 시기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류국 정도에 불과했어요.)


헨리 8세는 귀족을 탄압하고 젠트리 등 중간 계급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민심과 인기를 얻게 되죠.


즉위 전반기의 헨리 8세는 교황과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 정치의 화신 같았고 신교도를 박해하는데도 앞장섰어요.

교황에게 가톨릭의 보호자라는 찬사도 받았어요.


첫 아내인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보다 겨우 여섯 살 연상인 미인이었다고 해요.

아라곤은 지금의 스페인. 당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어요.


원래 캐서린은 요절한 형의 왕자비로 정해진 사람이었으나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정혼자를 떠나보냈다고 하죠.

헨리 8세는 이런 캐서린을 연모했고 그 기록도 남아 있죠.


문제는 나이가 들며 아내가 가임기를 지났음에도

캐서린이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죠.

헨리 본인도 나이가 들어가고.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들들 볶아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는 교리를 찾아보라고 했죠.

왕자 출산처(?)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본래 헨리 8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선진 문물에 밝은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독일과 스위스에 종교 개혁이 벌어지고 있음도 알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교도들을 철저하게 압살하고 있었어요.


교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그때까지 통제하던 종교 개혁 카드를 꺼내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존속하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출범합니다.


약간 선동적 조치로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그 재산을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매각하기도 합니다, 헐값에. 민심이 환호했죠.


하지만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사실상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어요.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그 한 가지의 차이 뿐이었습니다. 루터교 흉내만 살짝 내주고.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그냥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 현상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종교 개혁의 의미를 그만큼 적확하게 알았다는 뜻도 되죠.


그렇게 족쇄가 풀려 다섯 번 추가로 결혼하고 두 명의 왕비를

참수합니다. 그가 낳은 왕자 1명, 공주 2명이 뒤를 이어

튜더 왕조의 마지막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과 재혼과 왕자 출산에 집착했을까요.

왕좌의 정통성을 추구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그 자신

집권의 궁극적 목표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이 취약한 왕가의 내전으로 평생을 골머리 썩여야 했던

선왕 헨리 7세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기 때문이고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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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Longbowmen vs French Armored Knights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http://jangyune.tistory.com/entry/크레시-푸아티에-전투

http://jangyune.tistory.com/entry/롱다리-에드워드1세




장궁롱보우라고 합니다. 아주 큰 활이죠.

어느 나라나 있던 것인데 잉글랜드 장궁이 가장 유명해요.


활이 커져야 하는 이유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서죠.

활대가 커질수록 탄성력이 증가할 테니까요.


잉글랜드 장궁은 원래 웨일스 지방 산물입니다.

웨일스 왕국이 잉글랜드의 영토로 복속한 때가

13세기말 롱다리 에드워드 1세때였죠.


잉글랜드 군을 애먹인 이 무기에 에드워드가 주목합니다.

당시엔 파괴력이 너무 강해 교황이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죠.

전쟁에서 그런 게 있나요. 잉글랜드 군이 도입해 버립니다.


장궁에 대비되는 당시 보편적 활은 쇠뇌였어요.

석궁이라고 하죠. 영어로 크로스보우..


석궁이 자주 쓰인 이유는 간편성 때문입니다.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고도 능숙하게 발사할 수 있었어요.

장궁은 이에 반해 능숙해지기 위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죠.


그러나 석궁의 치명적 단점은 연사 속도였습니다.

장궁의 연사 간격을 3~5초, 석궁은 15~20초 정도로

보통 추산한다고 합니다. 너다섯 배의 차이가 있었죠.


또한 장궁은 사격 자세에 따라 원거리 공격도 가능했어요.

고지대에서 발사하면 파괴력이 훨씬 증가하기도 했죠.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가 이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국가적으로 롱보우를 적극 권장합니다.

일요일마다 궁술 대회를 열어 포상도 했다고 하네요.


왠만한 잉글랜드의 남성들이 장궁에 익숙해졌습니다.

웨일스의 평민들은 원래부터 능숙한 궁사들이었고요.

덕분에 이후 전쟁에 웨일스 장궁병 군단이 특별 편제되죠.


장궁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무엇일까요. 석궁?

아뇨. 장궁이 깨부셔야 할 적은 기사의 갑옷이었습니다.

중세의 전쟁은 중장 기사의 기마전이었거든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에게 밀리는 지점이 바로

중장 기병의 숫자였어요. 서너 배 또는 그 이상 차이났다고 하죠.


프랑스가 전쟁 초반에 자신만만하게 무식한 전략을 편 원인도

기사의 숫자에서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봤기 때문이고요.

잉글랜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장궁을 이용합니다.


중세 초기에는 사슬 갑옷이라고 체인 메일이 보편적이었는데

14세기에 와서 철판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어요. 플레이트 아머.

방호력은 철판 갑옷이 더 앞섭니다.


오늘날 장궁이 석궁보다 갑주에 대한 관통력이 우수해서

잉글랜드 군이 이겼다는 썰이 돌고 있는 듯도 한데

사실 관통력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가 있어요.


백년 전쟁 당시 양국 기사들은 철판 갑옷이 주종이었다는 썰도

돌고 있는데 사슬과 철판을 혼용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죠.


하지만 원거리라면 모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자세 잡아

장궁을 날리면 철판을 꿰뚫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래 유튜브 링크 1분 50초부터 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u0fu4k2cbB4







아 물론, 철판 갑옷이라면 인체에 맞춰 곡면 처리가 되어 있으니

왠만큼 비스듬한 각도에서는 방호가 가능했을 겁니다.


장궁병들이 주로 겨냥한 곳은 기사의 관절 접합 부분.

목과 어깨 사이나 사타구니 골반 부분의 취약점이라네요.

겨드랑이 사이 심장 가까운 곳도 많이 노렸다고 합니다.


또한 기병의 신체가 아니라 말을 겨냥한 전법도 빈번했어요.

말의 측면과 후면 방호가 약한 편이었다고 하죠.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좌익의 언덕에 위치한 장궁병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 기사들이 산줄기를 뛰어 올라갔는데

우익 언덕의 장궁병들이 측면에서 연사하여 떨궈냈다고 합니다.


갑주가 불리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둔중한 무게감 때문이죠.

보통 아머를 전면 장착하면 무게가 25킬로그램에 달했답니다.


이 무게로 진흙이 많은 곳으로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었고 이 틈새를 노려 장궁을

쏘거나 보병이 기습하니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넓게 산개하여 공격하면 되지 않겠는가 할 수 있으나

잉글랜드가 이미 좁은 경로를 선점하여 양익에서 활을

쏘아대고 있으므로 결국 좁은 중앙으로만 몰릴 수밖에요.


무거운 철갑을 짊어지고 무릎까지 오는 진창길을 걸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적 보병의 냉병기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 한 번 상상해 보면 이해가 될 거에요.


더군다나 잉글랜드 군의 진짜 강점은 장궁이 아니었어요.

병종 간에 기동과 협력, 즉 팀웍과 소통이 원활했다는 거죠.


궁병이 기병을 엄호 사격하고 위험에 처한 궁병을 향해

보병이 보호하러 달려오며 기병은 적의 측면을 공략하는…

예나 지금이나 상하 협동과 지엄한 군률은 필승의 비결입니다.


오래 전에 히트한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보면

잉글랜드 군의 강점을 석궁으로 그려놓고 이 편견이

오랫동안 정착해 버렸다고 하는데 바로 잡으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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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s of Crecy and Poitiers, 14th Century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백년 전쟁이 시작하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압살합니다.


초창기 전투에서 뚜껑 열어보니

양국 군사력에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어요.


이를 여실히 입증한 두 사건이 바로

크레시 전투(1346년 8월 26일)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입니다.






잉글랜드 대 프랑스, 숫자의 차이



크레시는 프랑스 북서부 칼레 바로 밑에 있고요.

칼레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버 해협 근처랍니다.


잉글랜드의 지휘관은 에드워드 3세.

프랑스의 지휘관은 필리프 6세.


잉글랜드 군은 6천에서 2만 정도로 추정되고

프랑스 군은 2만에서 10만 근처까지 추정됩니다.


칼레 남쪽의 크레시 숲 인근 구릉 지대에

잉글랜드가 V자 형 진을 짜고 프랑스를 맞습니다.


양익의 끝 언덕 위엔 장궁병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하마 기사라고, 중무장한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진을 짜고 있었습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양상은 비슷하게 전개했는데요.

프랑스 중부 푸아티에 남쪽에 잉글랜드가 먼저 진을 쳤어요.


이때 잉글랜드 지휘관은 흑태자 에드워드.

크레시에서 열여섯 나이에 보병 분대장으로 출전했었죠.

푸아티에에선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됩니다.


프랑스 지휘관은 장 2세.

잉글랜드 군 약 7천, 프랑스 군 약 2만.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전황의 전개



크레시와 푸아티에 양쪽 전투 모두

잉글랜드를 프랑스가 추격하는 양상으로 시작했어요.


프랑스는 오랜 시간 추격하여 피로한 상태였지만

머릿수 차이를 믿고 그대로 진격하기로 했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승리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 잉글랜드 지휘관이 유리한 지대를 선점하여

지형의 이점을 끌어안고 적군을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시에서 에드워드 3세는 V자형 언덕를 뒤로 한 구릉을,

푸아티에의 흑태자는 언덕과 개천을 뒤로 배수진을 선점했죠.


두번째, 지휘 체계가 일사불란했던 잉글랜드에 비해

프랑스의 명령 통제 상황은 개판 오분 전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는 추격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 이유가

서로 먼저 싸우겠다고 나서대는 통에 그러했다고…ㅠ


잉글랜드 군은 숫자 차이 때문에 두려움이 컸으나

철저히 명령을 수행하는 훈련이 된 정신 상태였던 반면,

프랑스 군은 사기만 드높은 상태였다고 하네요.


세번째, 잉글랜드 전력을 효율적으로 만든 가장 큰 이점은

기병, 보병, 궁병 간 협력 전술이 잘 먹혀들어간 점이에요.


기병이 하마하여 중앙에 진을 치고 그 양익의 장궁병

적 기병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는데 궁병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보병이 나서서 이들을 보호하는 패턴이 아주 원활했어요.


(하마란 말에서 내렸다는 뜻입니다. 기병이 자진하여 전술적으로

보병이 되었다는 뜻. 잉글랜드는 이 전술을 자주 썼어요.)


푸아티에에선 배후 숲에 기병 분대를 숨겨두었다가

결정적 순간에 적 측면을 돌격하여 궤멸시키는 눈부신

기동성까지 보여주었어요. 흑태자의 전략이었죠.


장궁병에 맞서 프랑스엔 제노바 용병인 석궁병들이 있었고

초반에 방패 없이 싸우다가 나중에 방패 가지러 후퇴했는데..

기사들이 도망친다고 베어버리는ㅠ, 환상적 팀웍을 보여줬죠.


네번째, 무기 면에서 중무장 기사의 갑주잉글랜드 장궁

전혀 먹히지 않음을 완벽하게 입증했기 때문이었어요.


중세 전쟁사는 중장 기병의 시대였습니다.

전신을 무거운 갑주로 보호하고 말에 올라탄 기사인데요.

이들이 대형을 갖춰 속공 돌격하면 막을 수가 없었어요. 왠만해선.


기사가 전장에서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 것은 중세 말기 들어

활과 총포 등 원거리 사격 무기가 기병의 진격을 제압하면서부터..


백년 전쟁은 활이 갑주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어요.

특히 웨일스에서 유래한 잉글랜드 장궁은 전쟁의 전기를 바꾼,

당시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게임 체인저였어요.


장궁의 활약상은 깊이가 있는 내용이니

다음 편에서 설명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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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dred Years’ War, England and France




백년 전쟁 이야기에요. 1337~1453년 사이 116년 동안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영국 아님.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봤죠? 오늘날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남아 있는 묘한 경쟁심은 이 시기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 때 죽어라고 싸워댔으니까요.


왜 싸웠남. 샤를 4세가 죽고 나서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합니다.

원래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에게 우선권이 있는데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와 대립하게 됩니다.


또한 이때까지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제후로서

프랑스 일부를 봉토로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 입장에서

이를 쫓아내고 영토 지배를 확장하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더 복잡하게 하자면 할 순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왕가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입니다. 여기에 가스코뉴나

플랑드르 같은 봉토의 실효 지배권 문제가 걸렸고요.


가스코뉴는 지금의 프랑스 남서부 지방.

포도와 와이너리가 넘쳐나는 곳이고 이 지역 세금 수입만

당시 잉글랜드 전체 세수와 맞먹었다고 하죠.


당시 국력은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서너 배 정도..?

객관적 전력은 프랑스가 앞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전쟁 전반기 전세에선 잉글랜드가 의외로 앞섭니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죠.


전쟁 후반기에 잔 다르크 같은 인물이 사기를 올리며

결국 프랑스가 승리합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봉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브리튼 섬에만 머물게 되는 시기가 시작하는 거죠.


(즉,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졌다고 가정해보면 오늘날

프랑스 영토 중간에 영국 땅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현상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란 말씀..)


백년 전쟁이 유럽사에서 중요한 의의가 몇 가지 있어요.

귀족의 기병전에서 시작하였으나 애초에 양국 국민에게 없던

민족 개념이란 것이 싹트는 계기가 되죠. (민족주의는 아님)


출발은 왕가의 헤게모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평민이나

농노들이야 심정적으로 딱히 감정이입할 필요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국민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뜻입니다.


(아 물론, 아직 민족 국가 개념이 나오려면 멀었어요.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삼백 년 쯤 지나야…)


또한 전쟁의 패배로 인한 나비 효과가 잉글랜드 왕가 간

알력 다툼으로 이어져 30년간 장미 전쟁이 터졌습니다.


장미 전쟁의 여파로 튜더 왕조가 개창하고

잉글랜드의 계급 및 권력 구조가 변동하는 등…

이후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까지 이어지죠.


군사적으로는 귀족, 영주, 기사, 향사 등 지배 계급이

전쟁을 주도하는 양상이 퇴화하고 평민과 농노 중심으로

급료를 받는 용병 및 상비군 개념이 새롭게 대두됩니다.


전술 측면에서 궁병의 중요성이 기술적으로 극대화하기도.

석궁과 장궁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무기로 떠오른 시대이죠.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까지..


군사 및 병기 이야기는 시작하면 길어지니

나중에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논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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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briefing History of Ancient Greece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참 복잡하네요.

쉽게 한 판에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7~8세기를 시발점으로 보통 잡습니다.

7~8세기까지는 사람이 안 살다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다는 말? 아니죠.

남아 있는 기록이 이때까지 것밖에 안 남아 있다는 뜻이겠습죠.





트로이 전쟁 시기


신들의 전쟁에 신화의 영역으로만 남아 있다가

갑자기 유물과 유적이 갑툭튀하여 사람 당황시키는

트로이 전쟁 같은 사건도 있었지만요. (기원전 12세기)


트로이 전쟁은 신화였었었었었습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 영화에 나온 그 스토리요.)

하인리히 슐리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트로이 유적 찾기를 평생의 사명으로 삼은 아주 특이한 인간이

바로 슐리만이었는데 이 사람이 결국 찾아낸 겁니다. 19세기 후반에.

그때부터 트로이는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죠. 두둥. 학자들 충공깽.


이것만 알면 되요. 굳이 선을 긋은 이유가 엄연히 있어요.

트로이 전쟁 때 그 민족이 오늘날 고대 그리스라고 분류하는 시대의

그 민족과 같은 사람들인가.. 근거가 아직 약하다는 거에요. (현재 다수설)


심지어 트로이 전쟁 때 납치된 미녀의 남편인 메넬라오스가 바로바로

스파르타 왕이었는데 흔히 알려진 스파르타와 다른 사람들이었을지도..

뭐 이런 얘기가 있을 정도니까요.


영화 ‘트로이’에 배나온 브라이언 콕스 할배와 ‘300’의 식스팩

제라드 버틀러가 같은 민족..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죠.ㅎ

(물론 농담.. 다수설은 사실이고요.)





드디어 역사 시대,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런 판타지 영화 같은 껀들은 제쳐두고

기원전 7~8세기 이후만 시작점으로 놓고 보는 거죠.

앞에 전제했듯이 기록의 맨 앞 지점이 이 시기이거든요.

우리가 아는 고대 그리스는 이때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의 대부분 국가가 그러했듯이 이들도 도시형 영토가 기반이었습니다.

도시 국가, 곧 폴리스라고 불렀죠. 많이 들어 보셨을 듯.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같은 폴리스가 있었습니다.

이들 중 중심 국가는 아테네스파르타.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아테네는 해상 무역, 스파르타는 농업이 밥벌이 산업이었어요.

아테네에선 상인들이 중상급 계층으로 두텁게 사회를 형성했고

스파르타는 계급 사회로 귀족을 중심으로 피라미드형이었죠.


평민 중에서 무역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목소리가 커지니까

공화정 같은 당시로서 아주 희한한 체제가 발전하기도 했던

나라가 아테네였던 셈이죠. 하필 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나왔지란

본질적 질문의 대답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겠어요.


스파르타는 발해 같은 나라를 떠올리면 비슷해요.

소수의 그리스계 귀족이 대부분의 피치자를 노예로 부리며

농업을 관장하여 살림을 이끌고 정치를 장악했습니다.

지배층이 소수였죠. 노예는 이민족이 많았어요.

그래서 위계 질서가 중요한 군벌적 문화가 필요했어요.





민주정의 시작, 아테네와 클레이스테네스


여차저차한 차이점이 있기에 그들의 정치는 많이 달랐네요.

인류 최초의 공화정이 아테네에서 출범한 이유가 있었던 거고요.

이때 민주정은 오늘날과 많이 다릅니다. 추후 얘기할 기회 있을 겁니다.


정치보다 선행해야 할 문제가 경제 기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정치가 발전하죠.

기원전 6세기 초에 이를 해결한 사람이 유명한 집정관 솔론이었죠.

그저 그런 농업국에서 무역국으로 변화한 것이 이 시기.


민주정이 자리잡은 아테네의 시기를 보통 기원전 6세기 말로 잡아요.

이때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가 바로 클레이스테네스.

얘기하자면 복잡하지만 나중에 또 포스팅하는 걸로.


클레이스테네스란.. (엄청 중요한데 한국선 의외로 듣보잡)

https://en.wikipedia.org/wiki/Cleisthenes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기원전 5세기가 되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사건은

페르시아 전쟁 아니겠어요. 300의 시대가 왔어요.


300 영화 두 편 보시면 나오죠.

육상전은 스파르타, 해상전은 아테네가 활약했습니다.

스파르타에 레오니다스, 아테네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죠.

각각 지도자였습니다. 제라드 버틀러와 설리반 스테이플턴.


페르시아 전쟁이란 페르시아가 그리스에 쳐들어 왔다는 뜻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입니다. (이후 왕조가 교체)


키루스, 캄비세스,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같은 황제가 나온 시기.

300 2편에 죽은 사람이 다리우스, 나는 관대하다는 분이 크세르크세스에요.

(실제로는 영화와 다릅니다. 헐리우드 믿지 마요 제발.)


그리스를 왜 쳐들어 왔을까요? 그야 강대국이니까요.

페르시아는, 즉 오늘날의 이란은 당시 중근동의 최강대국입니다.

오늘날 보면 상상이 안 되나요?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의 편견.


통상 루트를 통합하여 경제권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죠.

에게 해 인근 올망졸망 중소국들이 못내 걸린 겁니다.

그래서 병합하여 세금도 받고 겸사겸사 이유로 침공한 거에요. 단순하죠.


굳이 건드릴 필요 없었어요. 그리스 국가들까지 통합 안 해도

페르시아 같은 큰 나라가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었죠.

실제로도 전쟁에서 졌다 하여 페르시아 망한 거 아니랍니다.


한 번 건드려본 중소 국가들의 단합이 의외로 단단했던 거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는 이겼고 (제라드 버틀러가 죽고)

아테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으로 깨집니다. 의외였죠. 엄청.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가 양분


페르시아 전투의 의외의 결과가 가져다준 나비 효과는?

그리스 국가들의 간땡이가 부어 오르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자기들끼리 잘 살아갑니다. 까짓 교역 안 하면 되죠 뭐.)


어느 나라나 간이 부으면 지들끼리 싸우게 되죠. 내분.

내분 구도의 중심에는 그리스의 양대 강국이 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둥. 짜잔.


앞에서부터 차이점을 가져 발전해온 두 나라가 드디어 반목합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중심으로.

두 나라 옆에 다른 폴리스들이 더덕더덕 붙어 세력을 형성하죠.


뭔가 연상되는 비슷한 역사의 페이지가 있지 않나요?

딱 냉전 시기와 비슷하죠. 미소를 중심으로 세계가 반으로 갈렸잖아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 그리스의 역사를 써내려간 사가가 있었어요.

그 이름 투키디데스. 오늘날 현실주의 정치 사관의 원조라는 분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사가인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썼는데

페르시아 전쟁을 소재로 했습니다. 약 1세기 전의 일이죠.)

https://en.wikipedia.org/wiki/Herodotus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ies_(Herodotus)


투키디데스는 델로스와 펠로폰네소스,

두 진영이 서로에 대한 공포와 경쟁심, 이해 관계가 얽혀

엄청나게 폭주하여 결국 전쟁에 이르게 되었다고 분석했죠.


이런 양상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부릅니다.

Thucydides’ trap. 그래험 앨리슨이라고 40년생인 하버드

정치학자가 계세요. 이 분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작년이었나..

https://en.wikipedia.org/wiki/Thucydides

https://en.wikipedia.org/wiki/Graham_T._Allison


냉전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지 않았지만

그리스는 전쟁에 이르렀고 스파르타가 이겼습니다.


잘들 싸우더니만.

그리고 우둔한 군중이 소크라테스를 죽였습니다. 플라톤 지못미.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내분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그 끝이 찝찝했습니다.

스파르타가 완장을 차긴 했는데 우왕좌왕하다

테베에게 완장을 또 빼앗겼죠.


같은 시기에 마케도니아에서 무시무시한 세력이

스멀스멀 태세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왕국을 그리스의 동족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선

상당히 설왕설래하는 모양인데요. 현재는 앞의 스파르타처럼

지배층이 그리스계인 것으로 정리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케도니아를 반열에 올린 것은 필리포스 2세였고

그리고 이어 그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그리스 통합, 페르시아 폐퇴, 이집트 무혈입성…

아프가니스탄 진격, 파키스탄까지 진출. 대단하죠?

(그러나 실상은 페르시아 전성기보다 못하다는 의견도..)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큰 업적은 헬레니즘 전파입니다.

즉 고대 그리스 국가 체제가 각국에 이식이 되었단 말이죠.


그가 후계자 없이 죽어버려 휘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눠갖고

각각의 방계 왕조를 발전시켜 2백년 가까이 발전합니다.

이것이 곧 헬레니즘 제국이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바로 이들 중 하나입니다.

지배층을 장악하고 원주민의 통치 체제를 인정했다 하죠.





고대 그리스 역사란


고대 그리스를 몇 줄로 정리해 볼까요.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더 대왕..

이 순서를 꿰고 있으면 됩니다.


중심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대 폴리스가 있었다는 거죠.

양자의 차이를 이해하면 접근이 빠를 겁니다.


그리고 아테네가 발전시킨 원시적 공화정.

최초의 희한한 정체였다, 이런 정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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