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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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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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18
    크레시 전투 및 푸아티에 전투
  2. 2018.06.09
    백년 전쟁, 잉글랜드 대 프랑스
  3. 2018.05.17
    고대 그리스의 복잡한 역사 한 판에 요약




Battles of Crecy and Poitiers, 14th Century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백년 전쟁이 시작하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압살합니다.


초창기 전투에서 뚜껑 열어보니

양국 군사력에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어요.


이를 여실히 입증한 두 사건이 바로

크레시 전투(1346년 8월 26일)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입니다.






잉글랜드 대 프랑스, 숫자의 차이



크레시는 프랑스 북서부 칼레 바로 밑에 있고요.

칼레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버 해협 근처랍니다.


잉글랜드의 지휘관은 에드워드 3세.

프랑스의 지휘관은 필리프 6세.


잉글랜드 군은 6천에서 2만 정도로 추정되고

프랑스 군은 2만에서 10만 근처까지 추정됩니다.


칼레 남쪽의 크레시 숲 인근 구릉 지대에

잉글랜드가 V자 형 진을 짜고 프랑스를 맞습니다.


양익의 끝 언덕 위엔 장궁병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하마 기사라고, 중무장한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진을 짜고 있었습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양상은 비슷하게 전개했는데요.

프랑스 중부 푸아티에 남쪽에 잉글랜드가 먼저 진을 쳤어요.


이때 잉글랜드 지휘관은 흑태자 에드워드.

크레시에서 열여섯 나이에 보병 분대장으로 출전했었죠.

푸아티에에선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됩니다.


프랑스 지휘관은 장 2세.

잉글랜드 군 약 7천, 프랑스 군 약 2만.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전황의 전개



크레시와 푸아티에 양쪽 전투 모두

잉글랜드를 프랑스가 추격하는 양상으로 시작했어요.


프랑스는 오랜 시간 추격하여 피로한 상태였지만

머릿수 차이를 믿고 그대로 진격하기로 했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승리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 잉글랜드 지휘관이 유리한 지대를 선점하여

지형의 이점을 끌어안고 적군을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시에서 에드워드 3세는 V자형 언덕를 뒤로 한 구릉을,

푸아티에의 흑태자는 언덕과 개천을 뒤로 배수진을 선점했죠.


두번째, 지휘 체계가 일사불란했던 잉글랜드에 비해

프랑스의 명령 통제 상황은 개판 오분 전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는 추격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 이유가

서로 먼저 싸우겠다고 나서대는 통에 그러했다고…ㅠ


잉글랜드 군은 숫자 차이 때문에 두려움이 컸으나

철저히 명령을 수행하는 훈련이 된 정신 상태였던 반면,

프랑스 군은 사기만 드높은 상태였다고 하네요.


세번째, 잉글랜드 전력을 효율적으로 만든 가장 큰 이점은

기병, 보병, 궁병 간 협력 전술이 잘 먹혀들어간 점이에요.


기병이 하마하여 중앙에 진을 치고 그 양익의 장궁병

적 기병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는데 궁병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보병이 나서서 이들을 보호하는 패턴이 아주 원활했어요.


(하마란 말에서 내렸다는 뜻입니다. 기병이 자진하여 전술적으로

보병이 되었다는 뜻. 잉글랜드는 이 전술을 자주 썼어요.)


푸아티에에선 배후 숲에 기병 분대를 숨겨두었다가

결정적 순간에 적 측면을 돌격하여 궤멸시키는 눈부신

기동성까지 보여주었어요. 흑태자의 전략이었죠.


장궁병에 맞서 프랑스엔 제노바 용병인 석궁병들이 있었고

초반에 방패 없이 싸우다가 나중에 방패 가지러 후퇴했는데..

기사들이 도망친다고 베어버리는ㅠ, 환상적 팀웍을 보여줬죠.


네번째, 무기 면에서 중무장 기사의 갑주잉글랜드 장궁

전혀 먹히지 않음을 완벽하게 입증했기 때문이었어요.


중세 전쟁사는 중장 기병의 시대였습니다.

전신을 무거운 갑주로 보호하고 말에 올라탄 기사인데요.

이들이 대형을 갖춰 속공 돌격하면 막을 수가 없었어요. 왠만해선.


기사가 전장에서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 것은 중세 말기 들어

활과 총포 등 원거리 사격 무기가 기병의 진격을 제압하면서부터..


백년 전쟁은 활이 갑주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어요.

특히 웨일스에서 유래한 잉글랜드 장궁은 전쟁의 전기를 바꾼,

당시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게임 체인저였어요.


장궁의 활약상은 깊이가 있는 내용이니

다음 편에서 설명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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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dred Years’ War, England and France




백년 전쟁 이야기에요. 1337~1453년 사이 116년 동안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영국 아님.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봤죠? 오늘날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남아 있는 묘한 경쟁심은 이 시기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 때 죽어라고 싸워댔으니까요.


왜 싸웠남. 샤를 4세가 죽고 나서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합니다.

원래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에게 우선권이 있는데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와 대립하게 됩니다.


또한 이때까지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제후로서

프랑스 일부를 봉토로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 입장에서

이를 쫓아내고 영토 지배를 확장하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더 복잡하게 하자면 할 순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왕가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입니다. 여기에 가스코뉴나

플랑드르 같은 봉토의 실효 지배권 문제가 걸렸고요.


가스코뉴는 지금의 프랑스 남서부 지방.

포도와 와이너리가 넘쳐나는 곳이고 이 지역 세금 수입만

당시 잉글랜드 전체 세수와 맞먹었다고 하죠.


당시 국력은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서너 배 정도..?

객관적 전력은 프랑스가 앞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전쟁 전반기 전세에선 잉글랜드가 의외로 앞섭니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죠.


전쟁 후반기에 잔 다르크 같은 인물이 사기를 올리며

결국 프랑스가 승리합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봉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브리튼 섬에만 머물게 되는 시기가 시작하는 거죠.


(즉,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졌다고 가정해보면 오늘날

프랑스 영토 중간에 영국 땅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현상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란 말씀..)


백년 전쟁이 유럽사에서 중요한 의의가 몇 가지 있어요.

귀족의 기병전에서 시작하였으나 애초에 양국 국민에게 없던

민족 개념이란 것이 싹트는 계기가 되죠. (민족주의는 아님)


출발은 왕가의 헤게모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평민이나

농노들이야 심정적으로 딱히 감정이입할 필요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국민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뜻입니다.


(아 물론, 아직 민족 국가 개념이 나오려면 멀었어요.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삼백 년 쯤 지나야…)


또한 전쟁의 패배로 인한 나비 효과가 잉글랜드 왕가 간

알력 다툼으로 이어져 30년간 장미 전쟁이 터졌습니다.


장미 전쟁의 여파로 튜더 왕조가 개창하고

잉글랜드의 계급 및 권력 구조가 변동하는 등…

이후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까지 이어지죠.


군사적으로는 귀족, 영주, 기사, 향사 등 지배 계급이

전쟁을 주도하는 양상이 퇴화하고 평민과 농노 중심으로

급료를 받는 용병 및 상비군 개념이 새롭게 대두됩니다.


전술 측면에서 궁병의 중요성이 기술적으로 극대화하기도.

석궁과 장궁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무기로 떠오른 시대이죠.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까지..


군사 및 병기 이야기는 시작하면 길어지니

나중에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논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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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briefing History of Ancient Greece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참 복잡하네요.

쉽게 한 판에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7~8세기를 시발점으로 보통 잡습니다.

7~8세기까지는 사람이 안 살다가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다는 말? 아니죠.

남아 있는 기록이 이때까지 것밖에 안 남아 있다는 뜻이겠습죠.





트로이 전쟁 시기


신들의 전쟁에 신화의 영역으로만 남아 있다가

갑자기 유물과 유적이 갑툭튀하여 사람 당황시키는

트로이 전쟁 같은 사건도 있었지만요. (기원전 12세기)


트로이 전쟁은 신화였었었었었습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 영화에 나온 그 스토리요.)

하인리히 슐리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요.


트로이 유적 찾기를 평생의 사명으로 삼은 아주 특이한 인간이

바로 슐리만이었는데 이 사람이 결국 찾아낸 겁니다. 19세기 후반에.

그때부터 트로이는 역사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죠. 두둥. 학자들 충공깽.


이것만 알면 되요. 굳이 선을 긋은 이유가 엄연히 있어요.

트로이 전쟁 때 그 민족이 오늘날 고대 그리스라고 분류하는 시대의

그 민족과 같은 사람들인가.. 근거가 아직 약하다는 거에요. (현재 다수설)


심지어 트로이 전쟁 때 납치된 미녀의 남편인 메넬라오스가 바로바로

스파르타 왕이었는데 흔히 알려진 스파르타와 다른 사람들이었을지도..

뭐 이런 얘기가 있을 정도니까요.


영화 ‘트로이’에 배나온 브라이언 콕스 할배와 ‘300’의 식스팩

제라드 버틀러가 같은 민족.. 누가 봐도 말이 안 되죠.ㅎ

(물론 농담.. 다수설은 사실이고요.)





드디어 역사 시대, 아테네와 스파르타


이런 판타지 영화 같은 껀들은 제쳐두고

기원전 7~8세기 이후만 시작점으로 놓고 보는 거죠.

앞에 전제했듯이 기록의 맨 앞 지점이 이 시기이거든요.

우리가 아는 고대 그리스는 이때부터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고대의 대부분 국가가 그러했듯이 이들도 도시형 영토가 기반이었습니다.

도시 국가, 곧 폴리스라고 불렀죠. 많이 들어 보셨을 듯.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같은 폴리스가 있었습니다.

이들 중 중심 국가는 아테네스파르타.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아테네는 해상 무역, 스파르타는 농업이 밥벌이 산업이었어요.

아테네에선 상인들이 중상급 계층으로 두텁게 사회를 형성했고

스파르타는 계급 사회로 귀족을 중심으로 피라미드형이었죠.


평민 중에서 무역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목소리가 커지니까

공화정 같은 당시로서 아주 희한한 체제가 발전하기도 했던

나라가 아테네였던 셈이죠. 하필 왜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나왔지란

본질적 질문의 대답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겠어요.


스파르타는 발해 같은 나라를 떠올리면 비슷해요.

소수의 그리스계 귀족이 대부분의 피치자를 노예로 부리며

농업을 관장하여 살림을 이끌고 정치를 장악했습니다.

지배층이 소수였죠. 노예는 이민족이 많았어요.

그래서 위계 질서가 중요한 군벌적 문화가 필요했어요.





민주정의 시작, 아테네와 클레이스테네스


여차저차한 차이점이 있기에 그들의 정치는 많이 달랐네요.

인류 최초의 공화정이 아테네에서 출범한 이유가 있었던 거고요.

이때 민주정은 오늘날과 많이 다릅니다. 추후 얘기할 기회 있을 겁니다.


정치보다 선행해야 할 문제가 경제 기반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정치가 발전하죠.

기원전 6세기 초에 이를 해결한 사람이 유명한 집정관 솔론이었죠.

그저 그런 농업국에서 무역국으로 변화한 것이 이 시기.


민주정이 자리잡은 아테네의 시기를 보통 기원전 6세기 말로 잡아요.

이때 기틀을 마련한 지도자가 바로 클레이스테네스.

얘기하자면 복잡하지만 나중에 또 포스팅하는 걸로.


클레이스테네스란.. (엄청 중요한데 한국선 의외로 듣보잡)

https://en.wikipedia.org/wiki/Cleisthenes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기원전 5세기가 되었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사건은

페르시아 전쟁 아니겠어요. 300의 시대가 왔어요.


300 영화 두 편 보시면 나오죠.

육상전은 스파르타, 해상전은 아테네가 활약했습니다.

스파르타에 레오니다스, 아테네에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죠.

각각 지도자였습니다. 제라드 버틀러와 설리반 스테이플턴.


페르시아 전쟁이란 페르시아가 그리스에 쳐들어 왔다는 뜻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아케메네스 왕조입니다. (이후 왕조가 교체)


키루스, 캄비세스,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 같은 황제가 나온 시기.

300 2편에 죽은 사람이 다리우스, 나는 관대하다는 분이 크세르크세스에요.

(실제로는 영화와 다릅니다. 헐리우드 믿지 마요 제발.)


그리스를 왜 쳐들어 왔을까요? 그야 강대국이니까요.

페르시아는, 즉 오늘날의 이란은 당시 중근동의 최강대국입니다.

오늘날 보면 상상이 안 되나요?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의 편견.


통상 루트를 통합하여 경제권을 확장할 필요가 있었죠.

에게 해 인근 올망졸망 중소국들이 못내 걸린 겁니다.

그래서 병합하여 세금도 받고 겸사겸사 이유로 침공한 거에요. 단순하죠.


굳이 건드릴 필요 없었어요. 그리스 국가들까지 통합 안 해도

페르시아 같은 큰 나라가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었죠.

실제로도 전쟁에서 졌다 하여 페르시아 망한 거 아니랍니다.


한 번 건드려본 중소 국가들의 단합이 의외로 단단했던 거죠.

테르모필레 협곡에서는 이겼고 (제라드 버틀러가 죽고)

아테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으로 깨집니다. 의외였죠. 엄청.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리스가 양분


페르시아 전투의 의외의 결과가 가져다준 나비 효과는?

그리스 국가들의 간땡이가 부어 오르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자기들끼리 잘 살아갑니다. 까짓 교역 안 하면 되죠 뭐.)


어느 나라나 간이 부으면 지들끼리 싸우게 되죠. 내분.

내분 구도의 중심에는 그리스의 양대 강국이 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둥. 짜잔.


앞에서부터 차이점을 가져 발전해온 두 나라가 드디어 반목합니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중심으로.

두 나라 옆에 다른 폴리스들이 더덕더덕 붙어 세력을 형성하죠.


뭔가 연상되는 비슷한 역사의 페이지가 있지 않나요?

딱 냉전 시기와 비슷하죠. 미소를 중심으로 세계가 반으로 갈렸잖아요.


펠로폰네소스 전쟁기 그리스의 역사를 써내려간 사가가 있었어요.

그 이름 투키디데스. 오늘날 현실주의 정치 사관의 원조라는 분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사가인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썼는데

페르시아 전쟁을 소재로 했습니다. 약 1세기 전의 일이죠.)

https://en.wikipedia.org/wiki/Herodotus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ies_(Herodotus)


투키디데스는 델로스와 펠로폰네소스,

두 진영이 서로에 대한 공포와 경쟁심, 이해 관계가 얽혀

엄청나게 폭주하여 결국 전쟁에 이르게 되었다고 분석했죠.


이런 양상을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부릅니다.

Thucydides’ trap. 그래험 앨리슨이라고 40년생인 하버드

정치학자가 계세요. 이 분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작년이었나..

https://en.wikipedia.org/wiki/Thucydides

https://en.wikipedia.org/wiki/Graham_T._Allison


냉전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지 않았지만

그리스는 전쟁에 이르렀고 스파르타가 이겼습니다.


잘들 싸우더니만.

그리고 우둔한 군중이 소크라테스를 죽였습니다. 플라톤 지못미.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헬레니즘


내분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그 끝이 찝찝했습니다.

스파르타가 완장을 차긴 했는데 우왕좌왕하다

테베에게 완장을 또 빼앗겼죠.


같은 시기에 마케도니아에서 무시무시한 세력이

스멀스멀 태세를 정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왕국을 그리스의 동족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선

상당히 설왕설래하는 모양인데요. 현재는 앞의 스파르타처럼

지배층이 그리스계인 것으로 정리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케도니아를 반열에 올린 것은 필리포스 2세였고

그리고 이어 그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그리스 통합, 페르시아 폐퇴, 이집트 무혈입성…

아프가니스탄 진격, 파키스탄까지 진출. 대단하죠?

(그러나 실상은 페르시아 전성기보다 못하다는 의견도..)


알렉산드로스의 가장 큰 업적은 헬레니즘 전파입니다.

즉 고대 그리스 국가 체제가 각국에 이식이 되었단 말이죠.


그가 후계자 없이 죽어버려 휘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눠갖고

각각의 방계 왕조를 발전시켜 2백년 가까이 발전합니다.

이것이 곧 헬레니즘 제국이죠.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바로 이들 중 하나입니다.

지배층을 장악하고 원주민의 통치 체제를 인정했다 하죠.





고대 그리스 역사란


고대 그리스를 몇 줄로 정리해 볼까요.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 알렉산더 대왕..

이 순서를 꿰고 있으면 됩니다.


중심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대 폴리스가 있었다는 거죠.

양자의 차이를 이해하면 접근이 빠를 겁니다.


그리고 아테네가 발전시킨 원시적 공화정.

최초의 희한한 정체였다, 이런 정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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