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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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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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3.25
    천동설과 지동설, 요하네스 케플러와 천문학자들
  2. 2018.11.17
    근대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 유럽의 30년 전쟁
  3. 2018.11.05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V : 과학 혁명




Johannes Kepler: The First Astronomer and

The Last Astrologer with Laws of Planetary Motion






천동설, geocentrism.. 지구 중심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원의 궤적으로 공전한다는 가설이고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제시하여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립하지만 현재는 폐기됐어요.



지동설, heliocentrism.. 태양 중심설은 지구를 포함한 천체의

운동이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지구도 공전하는 천체에

불과하다는 가설이고 오늘날 널리 실증된 정설이고 진리에요.



지동설이 진실이 된 데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부터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까지

현대인이 흔히 아는 학자들의 계보가 뒷받침이 되었어요.



의외로 프톨레마이오스 전에 지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타코스

Aristarchus of Samos.. 란 학자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얻은

계산치가 요즘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기준에도 오차가 너무 크단

판단이 다수였던지라 인정 못 받고 오랫동안 묻힐 수밖에 없었죠.










현대인 여러분, 천동설을 만만하게 보면 곤란해요. 중세 유럽

지식인들의 과학 상식에 관해 쓸데없는 현대적 미신이 넓게 퍼져

있죠. 그들 대부분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었다느니, 성경 말씀에

반한다는 이유로 교회가 지동설을 무조건 박해했다느니, 천동설은

과학과 상관없는 성직자들만이 맹신하였다느니 등등…



역사의 진실은 이와 달라요. 생활하느라 고단한 평민이면 몰라도

대부분의 교회 지식인들에게 지구가 구체임은 상식이었고,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앞뒤 재지 않고 무식하게 지동설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며, 지동설을 맹렬히 공격한 쪽은 가톨릭 성직자보다는

기존 천동설을 신봉한 당시 반대편 과학자 집단이었어요.



중세 사회에 행정, 교육, 연구, 복지 기능을 제공한 국정 관리

대행 시스템으로서의 가톨릭 교회는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치되

지동설의 가능성도 열어두는 등 의외로 개방적이었어요.

오늘날 현대인의 일반적 편견과는 몇 광년쯤 차이나죠.



중세 유럽의 성직자들에게도 종교는 종교인의 문제, 과학은

과학자의 문제로 엄격하게 구별되니 자신들이 과학의 문제를

함부로 재단할 자격이 안 된다는, 기본적인 개념은 있었답니다.



그들이 천동설을 보편적 정설로 교육한 이유는 간단명료해요.

중세인의 과학적 지식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그 당시 기술로

증명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진실이 천동설이었기 때문이죠.



이말인즉슨 당시 사회의 평균적 상식과 믿음을 대변해야 할 책임이

국정 체제를 대행한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 내부적으로는

천동설과 지동설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열어놓고 연구했음에도)

대중에 설파하는 내용은 보편적인 천동설일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이쯤 읽으시고.. 얘 개독이구나.. 창조 과학 믿나보다.. 하시는

분들 있을 텐데, 현대인이 잘못 믿고 있을지 모를 역사의 편견을

경계하자는 것 뿐이며 모든 주장은 과학사의 근거가 있다고요.

또한 본 블로거, 불교 믿습니다요.ㅎ










여기까지 이해하셨으면 하나의 중간 결론에 도달하셨을 텐데…

네, 그 당시 사람들은 종교에 기반한 맹목적 믿음으로 천동설을

추종한 것이 결코 아니에요. 그들 나름 최선의 결과로 얻은 측정

값에 의해 입증 가능한 가설이 바로 천동설이었으니까 믿은 거죠.



심지어 그 측정치는 프톨레마이오스 때부터 문헌에 등장해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지구의 외형 규격을 오차 범위로 근접시켜

이미 계산했던 것 아시죠.



중세에 자연 철학(지금의 과학) 연구는 주로 수도원에서 행했는데

그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당시로서 가장 발달한 측정 기술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수백 년간 실증한 겁니다. 이런 반복

실험과 관측의 결과로 천동설에 대한 믿음이 쌓인 거에요.



그들이 얻은 관측 값은 당시로서는 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정확했어요. 단지 문제는… 천체 현상이란 것이 중세의

계산 능력으로 감당 못할 만큼 거대한 수치나 세밀한 오차를

요한다는 사실 뿐..



즉, 그들은 그들대로 최선의 값을 얻었지만 그 값의 오차가

중세인의 상상보다 훨씬 어마어마했던 거죠. 현대적 컴퓨터라면

쉽게 잡아낼 수 있겠지만. 희한하게도 부정확한 값이 천동설의

가정에는 더 잘 부합하는 결과가 나왔다니 믿을 수밖에요.








그렇게 깊고 두껍게 굳은 믿음에 처음으로 균열을 가한 일대

사건이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1532년에 완성하여

죽기 직전 1543년에 출간한 저서 천구회전론의 출현이었어요.



코페르니쿠스가 20대 시절에 볼로냐, 로마, 파도바 등지에서

유학을 했거든요. 이때 전술한 아리스타코스의 문헌을 접해요.

하지만 그의 가설은 단순히 직관에 의존한 것일 뿐 실험이나

관측을 통한 것이 아닌지라 그닥 과학적이지는 못했죠.

(지식인 사회를 술렁이게 할 정도 역할은 했어요.)



이 무렵 덴마크에 티코 브라헤라는 점성술사 겸 천문학자가

활동했는데 점성술로 몇 가지 사건을 예측한 당시 스타였어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의 배려로 작은 섬에 대형 천문대를

갖추고 오랜 세월 엄청난 관측 데이터를 남겼는데요.



정작 이 데이터로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은 프라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점성술사로 살아가던 천체 역학 분야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였어요.










케플러는 지동설의 진정한 진일보를 가져온 사람이라 할 만해요.

브라헤의 천문대 조수로 잠시 일했던 그는 물려받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행성

천체의 궤도가 타원형을 그린다는 대원리, 케플러의 법칙

1609년 저서 신천문학을 통해 발표하는 업적을 거두죠.



과학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 보셨죠. 심지어 공식도 기억날 걸요.

케플러의 법칙은 세 가지인데 행성이 타원형 궤도로 공전한다는

것, 태양에 가까울 때와 멀 때 공전 속도가 다르다는 것, 공전

주기의 제곱이 궤도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에요.



제1법칙이 신천문학을 통해 공개가 되고 큰 파장을 몰고 와요.

(근데 놀랍게도 1법칙을 2법칙 후에 발견했다고도 하네요.)



제2법칙은 다른 표현이 있어요. 타원 장반경과 단반경 각각

구간에서 공전 속도는 서로 다르지만 동일 시간 내 이동한

궤적으로 생긴 부채꼴의 면적은 서로 같다는 법칙이에요.

아마 이 내용으로 외운 분이 더 많을 걸요. (아래 그림)









고등학교 때 제3법칙을 공식으로 달달 외우신 분들이 꽤

많을 거에요. 이건 1619년에 세계의 조화라는 책 말미에

별도로 발표되었죠. 복잡하니 공식은 아래에…









자연 철학의 사변, 말싸움에만 머물던 천문학의 연구 방법이

케플러를 만나 비로소 수리 물리학으로 발전한 거에요. 그를

천체 역학의 창시자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후대의 뉴턴 역학 공식은 사실 케플러의 법칙을 직접 계승하거나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고찰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죠.



꽤 유능한 점성술사였다고도 하니 역사가들이 그를 가리켜

‘마지막 점성술사이자 동시에 최초의 천문학자’라고 부른다죠.

17세기초 처음 등장한 망원경을 개량한 기술자이기도 해요.










망원경 개량과 천문 토론은 멀리 피렌체에 살던 한 수학자 겸

군사 기술자와 서신 교환의 방법으로 열심히 했는데, 그가

바로 동시대에 살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였어요.



갈릴레이는 사실 수학자로서 미적분 발전에 한 획을 그었

그 결과를 포병 기술 등 군사 분야에 활용했으며 몇몇 저명한

물리학 실험으로 훗날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다가 유능한 관측

천문학자로서 갈릴레이 위성을 발견한 업적이 매우 훌륭해요.



그러나 지동설의 발전 역사에서 천문 원리를 천체 물리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갈릴레이라는 오해를 가끔 받아요. 그 업적은

케플러의 공이죠. 우린 이미 교과서에서 제3법칙을 만났쟎아요.



갈릴레이를 지동설의 유명 인사로 만든 건 아마도 우르바노 8세

교황일 걸요. 갈릴레이는 1632년 천문대화를 출간하며 교황청

검열까지 통과한 상황이었지만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아 이단

심판을 위한 종교 재판정에 회부될 수밖에 없었어요.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와 친분도 있거니와 교황청은 원래

그에게 호의적이었는데 하필 30년 전쟁으로 종교 전쟁

정점을 찍던 때인지라 극우 가톨릭 인사들의 공격이

이어지니 재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어요.



세간에선 이 사건이 길이길이 알려지며 갈릴레이를 지동설의

순교자처럼 인식하지만… 사실 고문이나 물리적 박해를 받은

것도 아니고 다소 불편하긴 해도 말년에 잘 살다 가셨어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정말 한 말인지 절대 알 수 없고요.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며 아이작 뉴턴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연루된 지동설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단순히 지구가 움직인다는 차원을 벗어나 천체 전체의 역학

원리를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으로 승화하여 고전 물리학과

뉴턴 역학의 체계를 완성하게 되요.



중력의 법칙을 세우며 케플러가 경험적 사유를 통해 획득한

원리를 계승하고 상위 차원으로 발전시킨 작업인 것이죠.



이로써 인류는 수천 년을 이어온 천동설을 폐기하고 (단순히

지동설이 우세하니 마니 하는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물리학의

세계를 열어젖혀 자연의 힘을 활용할 바탕을 갖추게 됩니다.



중세인의 사고 체계를 뒤집었다고 오해받기도 하는 지동설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과 갈릴레이 종교 심판이 가장

유명한 미신이 형성되어 왔지만 진정 학술적 토대를 구축한

적자는 케플러였다는 사실, 이제부터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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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y Years’ War: How Battles Began and Ended




한국에서 의외로 잘 모르는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 분들이 많아

서양사나 국제 관계를 이해할 때 애먹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유럽의 역사가 30년 전쟁 전후로 나뉜다는 관점도 있고 실제로

현대 세계사에도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요. 동양 역사와 굳이

비교하면 아편 전쟁급…? 수당 시대를 무너뜨린 안사의 난,

한족 마지막 통일 국가를 무너뜨린 청조 건국에 견줄 수도..


동학 농민 전쟁이나 실학 운동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만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면 어렵잖습니까. 서양 유럽계 백인들에겐

이와 비슷한 정도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에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원래 직업이 군인인데

그가 젊은 시절 30년 전쟁에 참전해 야영하며 인생을 바꾼

꿈을 꾸고 철학자가 되었다죠.


천체 역학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말년에 30년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어 버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이런 피해에 시달렸을 거에요.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 내내 전쟁을 한 건 아니고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스웨덴 등 대략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어요.


1618년경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80년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었고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영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벌였다는 뜻이죠.


이는 곧 15~16세기 최강국이던 에스파냐의 위세가 점점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제국 곳곳에서 균열이

커지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그 신호탄이며 30년 전쟁이

결정타를 먹였다고 볼 수 있죠.


16세기 바다에서 먼저 하향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1571년

레판토 해전은 스페인이 이겨 오스만 세력을 저지하였으나

1588년 칼레 해전에선 영국-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었죠.

스페인 아르마다의 힘이 빠지고 있었어요.


16~17세기 유럽의 최강자는 지금의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요.


16세기 중반 카를 5세 황제 때가 합스부르크의 최대 판도였죠.

퇴위할 때 카를은 스페인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현 독일권

신성 로마 제국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줬는데요.


당시 종교 전쟁을 스스로 잘 봉합하지 못해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교를 공인하지만

이걸로 분열이 일단락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7세기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반동 정책을 펼쳐 다시 전쟁의 불씨를 피우고 맙니다.




결국 직접적 동기는 종교 전쟁인 거죠. 보헤미아 왕국

(지금 체코)이 먼저 개전하여 북독일이 호응하지만

남독일은 반발하는 상태가 되고요.


현재 루마니아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격해요. 여기엔 사보이 공국(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스위스에 걸치던 나라)도 조력하게 되요.


이 반란을 일시에 잠재우긴 하는데 합스부르크 안에서 여전히

문제가 곪고 있었죠. 스페인 황제 펠리페 3세가 페르디난트로부터

알자스 지방을 할양받기로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독립에다가

프랑스 북동부 본토의 위협과 직결되는 사안이거든요.


이에 프랑스를 통치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사보이, 베네치아를 결속하여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은밀하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요. (프랑스는 가톨릭임에도..)


여기에 페르디난트와 사소한 원한이 있던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개신교 동맹에 붙어 참전해요. 이로 인해 전장이 확대되고

군비가 확 늘어나 페르디난트에게 불리해지죠.


그런데 전투에서 덴마크가 밀리니 북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까지 독일 땅으로 침공하죠. 우수한 전술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의 테르시오를 박살냅니다.


*테르시오 = 화승총장창이 짝을 이루는 스페인식 육군 전술..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전성기 병법으로 16세기에 절정을 찍고

보시다시피 17세기에 총기와 대포의 발달로 무너져가고 있음..




스웨덴이 매우 강력하게 버텼으나 그 와중에 구스타프가 전사하자

개신교 세력이 크게 동요하고, 지금까지 뒤에서 돕던 리슐리외는

동맹 초기 프랑스의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기야…


1635년 프랑스까지 드러내놓고 선전포고하고…

바야흐로 부르봉합스부르크…! 두 라이벌

왕가 간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커져 버립니다.


부르봉은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를 이어받아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는 여기 보시다시피.. 점점

내리막길로 가는 중.. 두 가문의 골든 크로스 진행 중..


프랑스가 가세하여 동맹군이 조금씩 황제군을 밀어붙이고

네덜란드에서는 독립군이 스페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요.

이 와중에 페르디난트 2세는 승하.. 아들 3세가 즉위해요.


페르디난트 3세가 고압적인 자세로 화평을 타진하니 더더욱

열받은 동맹군이 황제군을 압박해요. 연전연패하는 합스부르크..

이때 리슐리외도 죽고 아직 어려 암것두 모르는 루이 14세 즉위.


종전 교섭 회의가 열리려던 즈음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스페인 군을 작살내 버리면서 동맹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아요.


막판에 황제군과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연합하자 동맹 주도권을

다투던 스웨덴과 프랑스가 연합군으로 응수, 전투가 끝나요.


1648년 11월 2일,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가톨릭 진영의 보루

프라하가 항복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간 광풍이 사그라듭니다.




복잡하죠? 최대한 요약해볼까요. 페르디난트 2세가 (할아버지처럼)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영지 반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보헤미아

전쟁 문제에 알자스 할양건이 겹쳐 프랑스를 자극해요.


반황제 동맹이 결성되고 황제에 원한이 있던 덴마크가 참전하며

전장이 독일로 번져요. 덴마크가 유틀란트까지 밀리니 스웨덴이

참전하고 리슐리외와 함께 구스타프는 동맹의 중심이 되요.

브라이텐펠트에서 합스부르크가 박살나죠.


구스타프가 전사하여 동맹이 흔들리자 프랑스가 참전하며

전황은 최대한도로 확장되죠. 처음부터 그랬지만 본격적인

부르봉 대 합스부르크 싸움이 되버렸고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격파하고 페르디난트와 리슐리외가

차례로 죽었으며 결국 로크루아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참담하게 무너집니다. 막판에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이

다시 한 번 승부에 쐐기를 박고요.


독일 — 덴마크 — 스웨덴 — 프랑스로 참전 양상이 확대했고요.

신교 동맹군의 구심점은 구스타프의 스웨덴과 리슐리외의 프랑스.




체코와 북독일에서 시작한 전쟁이 덴마크로 번지고 스웨덴과

프랑스의 참전에 따라 독일 전역이 전장에 휩싸인 겁니다.


결국 힘있는 나라들이 들어와 싸우는 통에 죽어나는 건 독일의

평민들이었어요. 동학전 명목으로 청과 일본이 싸워 구한말

조선 백성이 나가 죽은 사실과 묘한 기시감을 형성하죠.


독일인만 8백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1차 대전으로 1천만

가까이, 2차 대전으로 7천만이 넘게 죽었는데 이건 그나마

세계적 분포지만.. 이는 독일 인구 세 명 중 하나가 사라진

결과죠. 나머지 둘도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지옥이고…ㅜ


이렇게 민간인이 학살된 배경은 약탈 때문이에요. 군 편제의

상당수를 용병이 채우고 있었는데 제때 급료를 받지 못하니

전리품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고 하죠.


이로써 길고 넓었던 최초의 국제전이 끝납니다. 30년이나 되는

지난한 세월,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정권이 직접 참전하거나

간접 관여한 최초의 국가간, international 전쟁이었죠.


폭력의 경과는 이러했고요. 이 여파로 인해 유럽사의 체계를

바꿔버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다음 포스팅에선

이 결과와 영향을 상세하게 다루어 볼까요.


아래 동영상은 당시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것…

보병, 기병, 창병, 총병, 포병 등 기능별 군제가 정착하고 있죠.

머스킷선형진을 이루고 아직 장창이 쓰이고 있으며 중세식

기마 돌격용 창병기, 랜스가 사라졌음을 확인하면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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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V

Super Troupers of Modern Scienc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V. 과학 혁명 Scientific Revolution 



16~18세기 유럽의 자연 과학이 혁명적이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사회 문물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민중의 사상과 생활에

영향을 끼친 광의적 현상을 과학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 과학’이라고 분류하는 영역의 학술 기반과 초창기

혁신적 진보를 바로 이 시기에 다진 것입니다. 또한 서양 유럽의

백인계 국가가 현대의 사회 변화를 장악하고 주도하게 만든 가장

실천적인 원동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근세의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선 과학이 발흥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죠. 크게 세 가지를 꼽아보면요.


첫째, 르네상스 시기에 새롭게 발견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학술 문헌을 연구하며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철학 기초와 태세를

일신하여 재정립할 수 있었어요. 흔히 일컫는 신플라톤주의에요.

즉, 인문주의 기반이 없었다면 과학 발전은 요원했다는 뜻이죠.


둘째, 학술적 동기와 지적 수준을 가진 기술자 직업군이 때마침

대거 양성되어 사회 문물 곳곳의 필요와 갈증을 채워주고 있었어요.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엔 이들을

대거 수용하여 학회한림원 형태로 양성하는 체계도 있었지요.

대항해포병전 같은 사회적 변동의 영향도 분명 있었겠고요.


셋째, 금속 활자 인쇄술이 급진보하여 서적 출판물 형태로 지식이

퍼져 나가는데 일조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지식을 얻으려고

수도원 같은 데서 일일이 필사하는 방법으로만 가능했던 일이에요.

지식 보급이 기득권인 사회였다가 이제 평민에게도 열려가는 거죠.


급진적 과학으로 중세의 벽이 가장 먼저 허물어진 곳은 자연 과학 중

천문학였어요. 하늘에 깃든 신의 섭리를 제고해야 했으니까. 폴란드

신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론과

실측 자료가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어요.


지동설의 생각을 1530년대에 미리 집필해뒀으나 급진적 내용을

발표하기에 신분의 제약이 컸죠. 십여 년 후 죽기 직전에 출판됐고

유럽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선사합니다.


지동설을 천체 역학으로 발전시킨 인물은 케플러의 법칙으로 유명한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였어요.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공전한다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궤적이 타원형이란 케플러 제1법칙을 1609년

신천문학을 통해 발표합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당시

최신 발명품 망원경을 개량하여 목성의 위성을 발견합니다. 1632년

천문대화에서 케플러 이론을 바탕으로 지동설을 역설했는데 이로

인해 죽기 9년 전 종교 재판까지 받습니다. 종교 전쟁이 극에

달하던 때인지라 로마 교황청은 민감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새로운 시대를 몰고 올 철학자들도 과학 연구의 방향성을 논합니다.

몸소 과학 실험을 즐기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1620년에 신기관

통해, 군인 출신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1637년에 방법서설로 각각

자신들의 자연 철학 지론을 펴 후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땐 지금의 과학을 자연 철학이라고 불렀답니다.)


영국의 명의 윌리엄 하비는 심장의 펌프질로 동맥, 정맥 및 순환계가

혈액을 공급 받는다는, 지금은 지극히 상식인 원리를 처음 내놓아

생리학 분야에서 시대를 앞서간 인물입니다. 1628년 일이고요.


아일랜드 출신 로버트 보일은 지금 화학의 기본 원리, 보일의 법칙

1662년에 발표했어요. 일정 온도와 일정 질량인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이분은 리트머스 시험지도 발명했어요.


17세기 후반 보일과 같은 시대 영국에서 아이작 뉴턴에 이르러

과학 혁명의 정점이 찍혔다고 보면 됩니다. 과학사상 최고의 명저로

꼽히는 프린키피아,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1687년에 발표해

고전 물리학뉴턴 역학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어요.


운동하는 물체에 가한 힘이 질량 및 가속도에 비례한다는, 이른바

뉴턴의 운동 법칙은 지구 중력의 비밀을 밝혔고 나아가 모든 우주

천체에 공통적으로 만유인력이 존재함을 인류에 알려줬어요.


뉴턴의 공적은 수학에도 미칩니다. 일찍이 갈릴레이도 한 연구했던

미적분 기법을 개발하여 물리 역학 연구를 진일보 시켰어요. 같은

시기 독일에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역시 미적분을 완성했고요.


이 시기는 영국과 프랑스가 국가적으로 과학자를 양성하고 독려한

때입니다. 유서깊은 영국 왕립 학회가 1660년에 찰스 2세의 재가로

설립되었고 프랑스 과학 한림원은 1667년에 루이 14세가 만듭니다.


양국의 아카데미를 오가며 가장 활발하게 연구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과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였어요. 토성의 고리와 타이탄

위성을 관측하고, 진자 시계를 발명했으며, 하위헌스의 원리

알려진 빛의 파동설을 1690년 논문을 통해 정립하였죠.

(종전에는 독일식 ‘호이겐스’로 불린 인물)


앙시앵 레짐 프랑스의 공직자인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85년

학자들 입회 하에 행한 실험에서 물의 조성이 수소와 산소임을

알아내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소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우뚝 섭니다. (악덕 세금 징수원 전력

때문에 몇 년 후 혁명군에 의해 참수되는 비운도..)


19세기 인류를 미몽에서 일깨운 최고의 연구는 진화론일테죠.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출간한 ‘종의 기원’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어요.


세기말의 마지막 충격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1899년에 출간하면서… 정신 분석학의 과학성 논란은 그렇다

쳐도 인간 내면의 무의식 탐구는 모든 학문에 영향을 줬죠.


이렇게 장구한 역사와 노력 끝에 흘러간 과학 혁명의 최정점을

중세말 기준으로 꼽는다면 뉴턴 역학이 완성된 순간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191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고전 역학을 파훼한 때를 현대사의 모멘텀으로 꼽을 테고요.




미국의 현대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음악사적 중요도도 크거니와

과학자를 소재로 완성도 높은 오페라를 발표하여 종종 화제이죠.

이미 갈릴레이, 케플러, 아인슈타인을 주제로 작품을 발표했답니다.


가장 최신 2009년작 케플러를 맛보시고..



2002년작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대략 이렇구나..



가장 유명하고 오래 된 1976년작 해변의 아인슈타인.. 느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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