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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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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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31
    후추, 바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침략한 목적
  2. 2018.11.22
    근대 국제 관계 질서의 출발점, 유럽의 30년 전쟁




The Way Pepper Drove Europeans to

Go Crazy Over Maritime Expedition






Age of Exploration 또는 Age of Discovery..

15~17세기 유럽.. http://swco.ttu.edu/medieval/aexpedition.html



이 현상을 부르는 말은 대항해 시대, 지리상 발견, 신항로 개척..

등등의 표현이 쓰이는데 가장 중립적 표현은 ‘신항로’,

가장 서양 중심적 표현은 ‘지리상’인 것 같습니다.



여기선 ‘대항해’로 낙점. 별다른 이유는 없고 지난 수십 년의

경험으로 가장 흔하게 통용되는 표현을 고르자는 것이

본 블로그의 표기 원칙이라면 원칙이걸랑요.



또 실제로 유럽인들이 대항해의 기술을 창안한 것이기도 하니까.

(물론 폴리네시아인, 중국인, 아랍인.. 등 근대 이전 무역의

역사와 인류학적 현상을 조사하면 상당한 논란이 있겠지만…)



유럽인들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어요.

그 이유란…? 놀랍지만 바로 향신료후추랍니다.

pepper.. 필요는 발견의 어머니인 거죠.



여러분들이 아시는 새까만 가루의 양념 맞습니다.

인도가 원산지라고 하죠. 후추가 왜 중요할까요?



오늘날의 후추는 단순히 향미를 더하는 양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닙니다만, 현대인의 시각을 거두고 냉장 기술이 없던 옛날을

가정해 보세요. 도대체 육류를 어떻게 저장할 수 있었을까요?



도축이 이루어진 후 보통 3~5일이 지나면 변색과 분해가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썩는다는 말이죠. 이 경우 도축 즉시 갓 신선한

분량을 어느 정도 소화하고 남는 잉여 분량이 있었을 겁니다.



가장 흔한 보관 방법은 건조겠죠. 약한 불에 살살 말려 물기를

빼는 열 건조도 있고 서늘한 곳에서 시간을 두고 자연 건조하는

방식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무리 건조로 숙성시키더라도

뭐든 기본 양념을 뿌려줘야 누린내를 잡지 않겠어요?



음식을 저장하려는 인류에게 자연 상태의 두 가지 재료가

있었다 해요. 소금… 소금은 그렇다 치고 웬 꿀?

요즘 식으로 청이나 잼을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거에요.

설탕과 비교해 꿀은 잘 밀봉하면 항균 효과도 있었다네요.



소금으로 저장 보관하는 음식은 스팸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지만 현대의 스팸보다 두세 배 정도 더 짜게 염도를 높여

만드는 것이 상례였어요. 염장한 고기를 맨입엔 못 먹고

물에 풀어 스튜나 수프처럼 먹는 방식이 일반적일 만큼.








염장을 위해 쓸 소금은 다소 불편함이 있어도 내륙의 암염이나

해안가의 천일염으로 유럽 내에서 자체 생산은 가능했어요.



(후추보다야 낫지만 소금의 값이 싼 건 아니었어요. 각국

역사에 소금 중개상으로 부를 축적하는 세력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만 봐도.. 천일염 산지였던 베네치아가 대표적..)



그런데 후추는요? 생산 자체가 전혀 불가능해서 문제인

거죠. 대량 생산이 보편화한 오늘날에는 (기후가 유사한)

동남아와 아프리카에서 확대 재배하지만 중세 시절엔…



오늘날 소금과 후추를 쌍으로 묶어 전 세계 어딜 가도 흔한

양념의 대명사로 분류하지만 중세 유럽에선 특히 후추가

말도 못하는 사치재였던 거지요.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민들이야 비싸긴 해도 암염의 형태로

생산 후 수입되는 소금으로 음식을 염장하여 생활했어요.

누린내를 잡을 재료는 로즈마리나 타임 등 허브가 있었고..



영지의 부를 독점한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유일하게 후추를

쓸 수 있었죠. 식도락 용도보다는 베블렌 효과마냥 과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후추를 썼다는 해석도 있어요.



후추의 주산지인 인도와 유럽 사이… 멀고 먼 길이죠.

하지만 수요가 형성된 사치재가 있고 이를 구매할 소비자가

존재하니 시대를 막론하고 상거래와 무역은 이루어지는 거죠.



전통적으로 로마와 한나라를 잇던 무역 경로는 셋입니다.

초원길, 사막길(비단길), 바닷길(향료길).










초원길은 중앙 아시아 북쪽 스텝, steppe 지대를 관통하여

몽골, 신장 위구르,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하는 경로에요.

선사 시대부터 개척되었다 하고 기원전 2세기경 흉노가

중개 수입을 독점하자 한 무제 때 새 길을 개척하죠.



사막길은 그렇게 열리게 된 경로에요. 타클라마칸 사막을 잘

피하고 파미르 고원을 관통해 중앙 아시아 건조 지형을 뚫고

가는 거죠. 여기로 로마 사자가 한나라에 당도했다고 해요.

딱 한 번이지만. 한의 비단이 로마에 최초로 전해진 경로죠.

(그래서 비단길 또는 오아시스길로도 불려요.)



바닷길은 1세기쯤 개척되었고 중국과 인도를 연안 항해로

지나 홍해를 통과해서 지중해로 진출하는 거죠. 인도를

직접 거쳐 향신료가 들어오므로 향료길이라고도 불려요.



세 경로의 공통점이 보이죠. 결국 모든 길이

아랍 - 소아시아 - 발칸 반도 - 지중해로 이어지는

중심 지역에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란 점이에요.



지중해에서 물자가 풀리지 않으면 유럽 경제가 마비되는,

약간 과장하자면 그렇고 그 물류가 분배되는 중심 지역이

보스포루스 해협발칸 반도인 거에요.



그런 점에서 1453년에 지금 그리스와 터키 위치인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에게 무너졌을 때 상거래에

얼마나 큰 여파가 전해졌겠어요.



후추 값의 폭등을 넘어서 금처럼 화폐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가치가 급상승했다고 해요. 후추 몇 알 받는 것이 금화 수십

냥보다 더 가치가 높은 보수였다고 하니까요.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가 넘어갔음은 동지중해 해상 무역로가

막혔음을 의미하고 그때까지 제노바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지중해 안에서만 놀던 무역의 판도가 바뀌어야 함을 뜻하죠.



이런 때 (지중해 무역에서 다소 변방으로 소외되었던)

이베리아 반도의 왕국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거에요.



포르투갈과 (이제 막 한 나라로 통일될 무렵인) 스페인은

지중해 문화의 변방으로 아프리카를 통한 바닷길 개척의

가능성을 전부터 눈여겨 보던 나라였어요.



이에 지중해 각지에서 한다 하는 항해가들이 두 나라로

꾸역꾸역 모여 새로운 항로 개척에 자금 및 인력 지원을

호소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구름떼 같이 몰렸다 하죠.



그 중 군계일학으로 새로운 땅을 발견한 자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랍니다.



콜럼버스가 실제 발견한 것은 인도가 아니라 서인도 제도

그의 측량치가 엄청난 오차 범위를 자랑했기에 이런 결과를

낳았다고 해요. 그는 죽을 때까지 인도인 줄 알았고…



그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은 학살 당했으나 세계사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기도… 이게 좋은 일인지는 영..



나비 효과이긴 하지만 후추로 시작한 (유럽인 입장의)

대탐험, 그 결과는 세계사의 거대한 변화랍니다.



아래 동영상은 비슷한 이야기..

양념으로 인한 역사의 변화를 언급하네요.

당시 인도와 영국의 후추 가격차가 5백 배가 넘었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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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irty Years’ War: International Relations Rise




30년 전쟁은 백여 년을 끌어온 종교 개혁을 일단락 짓고

유럽 각 나라의 세력 구도를 새롭게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 international.. 국가 간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봉토와 영지 중심의 중세 시대 정치를 종식하고 영토 개념의

근대 국가가 정치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nternational 단어 자체는 제레미 벤담이 18세기 말에

처음 만들었어요. ‘국제’라는 한자어 정착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번역가들이 도입했고 그 전에 중국에는 ‘만국’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쓰였죠.


구교-신교의 대립을 바탕으로 종교 전쟁에서 시작했지만

국제 정치의 역학 구도에 더 큰 영향을 주며 종료했다는

점이 큰 핵심일 것 같습니다.


30년 전쟁 이후에도 종교적 박해는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종교 개혁을 끝낸 건 아닙니다. 여러 종파 가운데 루터교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칼뱅교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공인하게 된 것 뿐이죠.


그렇지만 로마 가톨릭 교황령을 정점으로 떠받드는 수직적

햐향식 신정 정치 체제가 붕괴한 것, 이것만은 사실입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국가를 대체할 유사 국정 시스템도

아니고.. 나라의 역할은 이제부터 나라가 하겠죠.


사실 중세의 유럽은 어떤 나라가 정치의 주체가 아니고

가문이 중심이라 할 수 있죠. 어떤 개인은 그 가문이 소유한

봉토에 속해 신분상의 제약을 받는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합스부르크니 부르봉이니 하는 왕가가 정치 주체로 등장하는

추세가 30년 전쟁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되고 이 역할을

대체하여 정치 주체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란 개념이

자리를 차지하는 형식으로 변혁을 맞는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 주권이나 국왕의 대권 같은 개념도 이때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이런 관념의 정의가 불필요했죠.

군주의 지위는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니 누가 토를 달겠어요.


주권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곧 봉건적 통치권이

서서히 약화하고 근대 공화주의 사상이 형성될 바탕이 차츰

형성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거랍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국제법학에서 국제법의 주체로 주권을 가진

국가만을 상정하는 전통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국제법의 효시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근대적 법리를 완성한 사람은 조약 체결 3년 전 사망할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법률가로 활동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없어도 웨스트팔리아를

사상적으로 이끈 영도자라고 칭송하는 바로 그 인물이랍니다.


참고로 주권의 개념이 등장했지만 영토의 개념까지는 아니에요.

국제 조약에 영토 개념이 가미되기 시작한 계기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인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꼽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근대 국가란 것이 정치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실체를 정립하게 되고 여기에다가 19세기 이탈리아 및 독일의

통일로 고개를 든 민족주의 바람까지 더하면, 그제서야 대략

현대에 흔히 느낄 수 있는 민족 국가의 개념에 가까와집니다.




이렇게 30년 전쟁을 계기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현대 유럽

국가의 원형이 이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함을 확인할 수 있죠.

정권 간의 세력 구도가 엄청난 변화를 맞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겁니다.

중세를 지배한 로마 + 기독교의 시스템이 붕괴한 거죠.

제국이 다스리던 독일 지역은 3백 개가 넘는 영방 국가로서

각자의 자치권을 인정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 땅이 전쟁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한 뒤죠.

인구 기반이 사라졌다는 것은 경제 활동과 총생산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거고요. 1871년 통일할 때까지 독일은 유럽

정치 무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린 스페인도 하락세에 들어갑니다.

카를 5세 시절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죠. 지리상 발견에만

기대기에 신흥 강국이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빠르고요.


스페인 육군의 전통적 전술이 무너진 것도 하락세에

한 몫을 차지했어요. 무적함대의 유명세도 이미

16세기에 볼장 다 본 터였습니다.


두 나라를 통치한 합스부르크는 이제 유럽의 종이 호랑이로

전락합니다. 대신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빠르게 대체합니다.

(합스부르크 통치 지역은 지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30년 전쟁 막판에 루이 14세도 즉위했거니와 이제 프랑스

절대 왕정의 호시절만 남아 있죠. 이때까지 영국과 러시아는

아직 국내외 사정으로 정신 못 차리던 때입니다.


프랑스 북동부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20세기엔 자원의 보고로

급부상할)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랑스에 거의 넘어옵니다.

독일 경제도 완전히 붕괴했으니 이제부터 프랑스로선

최소한 뒷마당 걱정은 면하게 된 셈…




30년 전쟁으로 피어난 새 강호는 북구의 스웨덴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은 스웨덴의 사자왕으로 불려요.

애초에 덴마크-노르웨이와 북해 패권을 놓고 대립했는데

이제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를 눌러 버렸어요.


덴마크-노르웨이는 16세기에 형성된 동군 연합국입니다.

30년 전쟁 초기엔 신교 동맹에 잘 붙었는데 나중에 황제

편으로 변절하여 스웨덴에 깨지는 불운이...


영국은 동맹까진 참여했는데 1642년에 영국 내전이 발발하며

주춤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약

60여 년이 흐른 후. 17세기말 명예 혁명을 완수하며 내홍을

딛고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아직 중앙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 전이고

대개 유럽 국가들은 미개한 저개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죠.

러시아 국력의 폭발은 18세기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입니다.

30년 전쟁 때는 스웨덴에 밀려 기싸움 중이었어요.


러시아와 전쟁 중이고 스웨덴 기에 눌리던 동유럽의 나라 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있어요. 종교 전쟁의 광풍을

슬기롭게 피했고 거국적인 관용의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흔치 않은 나라죠. 30년 전쟁에선 오스만 제국을 견제했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나라들이 이때 독립하여 국체를 형성했어요.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


포르투갈은 과거에 국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혈통이 끊겨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30년 전쟁 말미에 다시 독립했어요.


스위스도 합스부르크에 예속은 했지만 실상은 그전부터

느슨한 국가 연합 형태로 독립국이나 다름 없었고 국민들

상당수가 용병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합스부르크가

30년 전쟁에 지면서 정식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종교 전쟁의 하이라이트이자 진정한 독립국은 네덜란드겠죠.

오랫동안 스페인 제국에 삥뜯기는 영지 신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내다가 1568년부터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종교 개혁의 문파가 크게 루터와 칼뱅으로 나뉘지만 까놓고 말해

두 종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에요. 루터교는 가톨릭 교리를 상당히

수용하고 정치적으로도 황제 중심의 보수 성향을 띱니다.


당시 진정한 급진 세력은 칼뱅교였어요. 청교도들 경건주의에서

보듯이 교리도 훨씬 원론적이고 황제권 같은데 질색하는 정치

성향이었죠. 거기다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는 경제 철학으로

네덜란드 상인 계급이 일찍부터 받아들여 장악하고 있었어요.


30년 전쟁의 네덜란드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충분히 독립을 인정받을 만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했어요.

그 결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합니다.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대서양 무역 항로를 두고

영국과 대일전을 벌여 양대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입니다. 근대 공화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체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끝을 맺으며 봉건주의를 종식하고 근대의 문턱을 형성한

사건, 바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국제 정치국제 관계학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래는 찾아본 중에 가장 짧으면서도 비교적 상세한

교육용 개인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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