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RK KNIGHT (2008) 오늘로 이 영화 본 지가 다섯 번째나 되었다. 다섯 번보다 더 본 영화도 많이 있지만, 최근에는 여러 번 즐긴 작품이 실로 모처럼만인 듯하다. 이 쯤 해서 정리해 둬야 하지 않을까 싶어, 안 쓰던 블로그도 들추게 된다. 영화가 개봉된 7월의 반응은 주로 미국 시장에서 나왔다. 미국 시장의 관객은 이 기이한 수퍼 히어로의 이야기를 유아기부터 우리 홍길동전처럼 몸에 익힌 사람들이니, 열광할 수밖에 없으려니 했고 그들의 리뷰가 그닥 한국인들에게 와닿지는 않았던 것 아닌가 조심스럽게 느꼈다. 8월 개봉 후에 본격적으로 한국인들의 리뷰가 쏟아졌는데, 유명한 블로그 논객들은 모두 한 번씩 건드린 것 같다. (심지어는 블로그 논객이 아닌 나마저도 안 쓰던 블로그를 들추게 만들었으니...) 이 작품이 '미친 영화'이고 근래 보기 드문 작품인 것은 맞지만, '대부'를 밀어낼 만큼 영화사에 영향력을 미칠 작품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안 쓰던 블로그를 들춘 것은 그런 영향력을 인정한다기보다는, 블로그에 떠도는 열광적 리뷰와 비교적 냉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언론평의 간극을 나 혼자서라도 좀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올림픽과 함께 8월에 열광적으로 등장한 한국인 논객들의 주요한 반응은, 참 재미있게도 이 블록버스터에 애써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는 한국 영화언론의 자세와 묘하게도 대별된다. 자국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감정을 이입해서까지 열광해야 할 의무가 없는 한국인 논객들은, 나름대로 최대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영화언론이 담지 못한 주관적 호불호의 포인트들까지 사뭇 진지하게 담아 내는 데에 성공했다. 모든 나라의 리뷰를 본 것은 아니지만, 한국인들만큼 열광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리뷰한 사람들이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 8월의 포털을 장식한 한국의 블로그 논객들은 99%의 논지를 '피해갈 수 없는' 찬사 쪽에 무게를 두어왔다. 몇몇 지각있는 논객이 나름대로 의미있는 비판점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 분들의 논지에는 정말 크게 공감한다. 본 포스팅에서 그 99%의 찬사와 1%의 타당한 비판을 헐뜯고 싶은 마음은 없고, 뭔가 너무 찬사일색인 블로그판에 다소나마 질려 버렸기 때문에 시작했다. 찬사를 받아야 한다면 왜 찬사를 받아야 하는지 누가 파고들어 보지 않은 것 같고, 정녕 이 영화가 고작 1%도 안 되는 비판을 받을 만큼 완벽한 작품인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좋은 영화인가'와 '왜 나쁜 영화인가'를 양분해서 혼자서만 정리하고자 한다. - 물론, 공개로 해놓았으니 다른 분들이 보시는 것은 자유이지만... - 아무래도 좋은 점이 무수히 많이 쏟아져 나올 것이 뻔해서, 좋은 점은 되도록 줄이려 애쓰고 나쁜 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애써 보았다. 내심 이렇게라도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왜 이 작품은 훌륭한 영화인가 1. 교과서에 정통하면서도 능수능란한 연출 놀란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 그가 무엇에 장기를 가진 연출자인지 모르는 사람도 없다. 내가 볼 때에 한 마디로, 그는 각종의 고전적인 문법을 비트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건 사람이다. 왜, '메멘토'에서는 '하이눈' 시절부터 정형화한 서부극식의 클래시컬한 시간 개념을 정면에서 반박해 버리지 않았는가. '배트맨 비긴즈'가 비교적 정통 문법에 충실했던 작품이라, 나는 이 작품이 엄청 뒤틀려 버린 채 나올 줄 예상했다. 하지만 의외로 시퀀스를 배치한 방법은 얌전했고 고전에 충실하였다. 플롯 전개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동일한 캐릭터가 이끄는 씬을 연속해서 배치하지 않고 일정한 간격을 두었는데, 대략 씬과 시퀀스를 세어보니 후반부 긴박한 전개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략 이 '적당한 거리 두기' 배치 원칙을 고수하였으며, 극도의 긴장감이 마지막까지 늦춰지지 않은 원동력이 바로 이것이었다. 놀란으로서의 특징은 비교적 얌전한 시퀀스 전개 가운데에, 몇 번 등장한 교차 편집 시퀀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 것 같다. 교차 편집으로 오인될 만한 시퀀스도 꽤 있지만, 그가 '옛다, 먹어라' 하고 자신있게 던져준 교차 편집은 세 번 일어났다고 본다. 경찰청장과 판사와 지방검사의 동시 암살을 시도했던 시퀀스가 첫번째요, 취조 당하는 가운데 탈출을 시도하고 그 중 지방 검사보가 살해 당한 시퀀스가 두번째요, 두 척의 페리 보트와 고층 빌딩을 오가며 군중의 심리를 시험한 시퀀스가 세번째이다. 교차 편집의 미덕은 조나단 드미가 '양들의 침묵'에서 멋지게 구현해낸 바 있다. 드미의 교차가 상이한 두 개의 사건을 편집에 의해 접목시킨 것이라면, 놀란은 이보다 기술적으로 진보하여 서로 다른 세 가지, 심지어는 네 가지의 세부 플롯을 상호 조율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첫번째 시퀀스가 경찰청, 판사 사택, 파티장의 각각 세 곳을 오갔고, 세번째 시퀀스는 두 척의 페리 보트와 고층 빌딩의 세 곳을 오갔다. 두번째 시퀀스는 취조실 안과 바깥, 52번가와 시세로 거리 등 무려 네 곳을 황망하게 오가며 플롯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취조실 안과 바깥이 같은 곳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리뷰어들도 있을 것이다만...) 이 정도의 바쁜 플롯을 능숙하게 조율하면서도 관객이 스토리의 맥락을 잃지 않게끔 연출할 수 있는 감독이라... 지구상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2. 캐릭터의 경중과 그 효과를 절묘하게 감안한 대본 시나리오의 장점에 대해서는 너무 찬사가 많으니, 다른 평론가나 논객의 리뷰를 보아도 충분할 것 같다. 그 모든 평자들의 리뷰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내가 더 덧붙이고 싶은 것은 캐릭터 간의 관계 조율에 대한 점이다. 이 작품은 일곱 명의 캐릭터가 주도하는 스토리이다. - 크레딧 나온 순서대로, 갑부, 집사, 살인마, 경찰, 검사, 검사보, 그리고 사장이 그들이다. 신기하게도, 이 점은 위에 찾아놓은 포스터를 통해서도 친절하고도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52번가 500번지에서 벌어진 경찰청장과 갑부의 마지막 대화를 들어보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에 대해 잘못된 산수가 등장하여 블로그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착각이 아마도 일곱 메인캐릭터와 서브캐릭터, 그리고 나머지 단역들 사이의 숫자를 잘못 합산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다. (이런 거 세는 현장 스크립터의 역할이 참...) 일곱 메인캐릭터 간의 비중은 같을까? 셋은 플롯을 이끌 만큼 비중이 크고, 나머지 넷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비중높은 셋 중에 주인공이 포함되지 않았고, 범죄자, 검사, 경찰의 순서로 비중이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처음으로 배트맨이란 단어를 쓰지 않은 것에 대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배트맨은 홍콩 시퀀스의 약 10분을 제외하고는 두 시간 반의 전체 듀레이션 중 단 한 번도 플롯을 주도해 나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일은 그저 때리고 맞으며 운전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비긴즈'에 비해 베일의 연기 패턴이 얼마나 단순해졌는지...) 두 시간 반의 듀레이션 중 80~90%를 주도한 캐릭터는 물론 조커이며, 나머지 5~10%가 덴트의 몫이었고, 중간에 딱 한 번 정도 고든이 주도한 시퀀스가 나온다. 어느 논객은 전반부를 조커가 주도했고 공장단지 폭발사건 이후로 후반부 사건을 투페이스가 주도했다고 논평하였는데, 나는 이 생각에 반대한다. 순전히 비중으로만 보자면야 이 작품의 프로타고니스트는 온전히 조커인 셈이다. 오죽하면 처음 영화를 보고 나서, '다크 나이트'가 '어두운 밤'이라서 조커를 상징하는 줄 믿었던 적도 있다. (지금도 이렇게 믿는 관객이 있지는 않을까?) 사건 간의 인과 관계를 놓고 따져보면 어떨까? - 조커의 목적은 혼돈의 조장인데, 이를 위해서는 범죄자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범죄자들은 덴트의 '범죄와의 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지경이었는데, 그 전쟁의 발단은 고든과 웨인이 자외선 마크가 찍힌 지폐를 흘려보냈기 때문에 시작됐다. 그 지폐는 웨인이 특수제작하였는데, (작품으로 보여준 적은 없지만) 이는 고든이 '비긴즈' 마지막 씬에서 조커의 카드를 웨인에게 건네 주면서 조커의 처리를 부탁했고, 그 처리 방법의 하나로 웨인이 특수지폐 제작에 착수했다고 유추해 본다. (애석하게도 이 부분에서 원작의 설명이 어떻게 되는지 나는 모른다.) 사건의 시종이 온전히 조커라는 캐릭터에게 의존해 있는 양상이다. 공장단지 폭발사건 이후 후반부가 투페이스가 주도한 플롯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덴트의 역할이 시종일관 끌려다니는 데에 치중하기 때문이다. 용감한 검사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범죄자들이 덴트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다. 덴트는 그저 배트맨과 조커 사이의 대결 구도 사이에서 상징적인 '백기사' 역할만 할 뿐이다. - 후원회 파티장에서 에크하트가 보여준 '내가 이 자리의 주인이 아닌데' 하는 곤혹스런 표정 연기를 보면, 이것이 보이지 않는가? 또, 덴트와의 첫 미팅 씬에서 고든은 '백기사'를 언급하면서 다소 비아냥거리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려 애쓰지 않았는가? 후반부에서 덴트가 진정한 범죄자로 이끌려지게 된 계기는, 종합병원 시퀀스에서 봤듯이 조커와의 심리적 대화부터였다. (이 장면이 꽤나 설득력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덴트는 선의 수호자로 활동한 것도, 악당으로 활동하게 된 것도 모두 다른 캐릭터에 의해 수동적으로 이끌려진 셈이다. 딱 한 번 덴트가 능동적으로 플롯을 이끈 적이 있다. - 관객의 예상을 깨고 기자 회견장에서 의외의 발표를 했을 때였다. 고든도 딱 한 번 플롯을 능동적으로 이끈 적이 있다. - 슬픔을 무릅쓰고 가족을 속이고 어느 시퀀스에서 다시 등장했을 때였다. 이 두 캐릭터의 유일한 능동적 반전이 공교롭게도 한 곳에서 모여 발광하였는데, 그 시퀀스가 바로 야간 도심에서의 차량 추격전이었다. 이것이 왜 능동적 반전이냐 하면, 이 두 가지 장치 모두에서 관객이 보기 좋게 속았고, 그 기분좋은 기만이 차량 추격전 시퀀스에서 효과적으로 극대화되어 폭발했기 때문이다. 놀란 입장에서는 사실, 이 작은 반전과 관객심리의 폭발 외에 덴트와 고든이라는 캐릭터에 더 이상 큰 무게감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을 것 같다. 두 캐릭터는 이것만으로도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해낸 셈이다. 어떤 역할이냐고? 반전이라는 훌륭한 기교를 - 샤말란식 남용이 아니라 - 딱 지적으로 기분좋을 정도로만 터뜨려주는 역할이다. 그나마 덴트와 고든만이 플롯에서 이 정도의 작은 역할을 가지고 있었을 뿐, 주인공을 포함한 나머지 캐릭터는 대사가 많은 것을 제외하고는 역할이 극히 미미하다. 심지어 주인공은 자신의 안타고니스트가 노리는 목적을 잘못 추리하는 심각한 오류까지 범하고 있기도 하다. 본래 조력자에 불과했던 알프레드와 폭스는 그렇다치고, '비긴즈'에 비해 웨인의 비중은 엄청나게 축소되지 않았는가. 많은 논객들이 레저의 엄청난 연기를 추모하고 칭송하며, 조커가 웨인을 넘어서게 된 배경에 레저의 극한적 연기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듯하지만, 나는 꼭 그렇게 보지만은 않는다. 놀란이 처음부터 의도한 관객과의 지적 게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 신뢰가 간다. 개인적으로 참 마음이 쓰이는 캐릭터는 도스이다. 본래 이 역할이 질렌할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 널리 알려졌거니와, 다섯 번이나 보았지만 아직도 보는 내내 질렌할의 안쓰러운 모습이 눈에 밟히는 것이 사실이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이리저리 움직여야 하는 그 안쓰러운 모습 말이다. 질렌할과 같은 배우를 참으로 아끼는 사람으로서 다섯 번이나 연거푸 주목하면서 보았지만, 요모조모 따져봐도 이 캐릭터는 홈즈를 위한 역할이 확실하다. '세크러테리'에서 보여준 마조키스트적 카리스마와 같이, 질렌할이 아닌 다른 배우는 도저히 표현 못할 다크서클 가득 짙은 변태적 연기를 보일 캐릭터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그냥 예쁘고 정의감에 사로잡힌 된장녀 캐릭터에 불과하고, 그래서 홈즈에 맞는 역할이었으며 질렌할이 맡았다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이다. 질렌할에 만족 못하는 관객이 있다면 그도 십분 이해해 마지 않지만, 다른 캐릭터보다 훨씬 불리하게 시작한 질렌할의 입장을 이해해 주십사 변을 늘어놓고 싶다. 그리고 제발, 질렌할이 못생겼다는 형이하학적 불평은 안 했으면 좋겠다. 메인캐릭터 일곱을 놓고, 1강 2중 4약의 구도를 취한 놀란의 시나리오 감각은 참 탁월한 것이라고 본다. 거대한 플롯에서 하나의 캐릭터가 강하다는 것은 반드시 강한 톤의 대사를 하고 강한 액션을 보여준다는 데에 있지 않다. 플롯에 숨은 인과 관계의 끈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이하드3'에서 아이언스가 연기한 그루버를 보라.) 조커는 그래서 참으로 강력한 캐릭터이다. 레저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이 캐릭터의 강성을 처음부터 의도하여 획책한 것은 다름 아닌 놀란이었다고 생각한다. 놀란 형제가 진정한 퍼페티어인 셈이다. 3.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도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낸 대본 계속 대본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원편과 '리턴즈'를 통해 버튼이 원작팬들에게 가장 공격받은 부분이 원작 스토리의 훼손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버튼의 이 단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가 '포에버'에서 슈마허가 스스로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계기까지 제공하지 않았는가 여기기도 한다. '비긴즈'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버튼의 이 단 한 가지 실수를 발리기 위해 새로 시작한 시리즈물이다. 단 한 가지이지만 이 실수가 의미하는 중차대한 의의를 놀란은 적확하게 간파한 것이다. 그리고 버튼과 자신과의 작은 차이점에 불과했던 이 실수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열어 젖혔으며 그 결과로 메소드 창작물을 두 편이나 만들어 내기에 이른 것이다. (약간 치사한 듯한 느낌도 들기는 하지만...) 원작의 설정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데 성공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놀란은 거기에 메인캐릭터를 상징적인 축으로 삼아 주제의식의 대립적 구도까지도 완벽에 가깝도록 설정하는 데에 성공했다. 많은 논객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웨인으로 대변되는 절대 선, 조커의 절대 악, 투페이스가 대변하는 선악의 이중성이 바로 그 구도이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게 발견할 수 있는 점이, 웨인이 절대 선의 존재로 한 단계 수직 하락(?!)했다는 점이다. 전작들을 보라. 선악이 공존하는 모호성이라는 테마는 배트맨만이 전유하는 오랜 전통이었다. (시초는 버튼이었고 슈마허가 망쳐 놓았다.) 웨인이 시리즈에서 최초로 평면적인 절대 선의 캐릭터로 내려앉았는데, 웨인이라는 캐릭터가 4약 중 하나로 플롯에서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도 있는 것이다. 물론 조커를 '악'이라고 규정하는 단순무식한 철학에 반발이 클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조커는 악의 화신이 아니다. 극중 대사의 표현 그대로가 정확하다. 그는 '혼돈의 사도(Agent of Chaos)'이다. 혼돈과 악은 다르다. 그는 혼돈을 위해 절대 악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적 선악의 구도가 존재하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태고적 선사의 존재처럼도 보이며, '태초에 빛이 있으라' 시절 창조주의 반대편에 있는 캐릭터처럼도 보여, 이 작품이 기독교 또는 유사 아브라함계 종교의 세계관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 은근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조커가 혼돈이라고 하여 웨인을 질서라고 규정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혼돈의 반대 개념이 질서라고 무식하게 정의 내리는 것이 과연 지금 세계의 공리인지도 의문이다. 이 작품은 그저 때려 부수는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에 이 부분까지 명확하게 답변하고 있지는 않다. 어찌 되었든, 조커는 훌륭하게 화두를 던지고 있는 캐릭터이며, 캐릭터 이전에 플롯과 테마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고, 작가의식과 시대정신까지 깊은 심연에 들어가게끔 도와주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하나의 캐릭터가 이렇게 중첩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짜여진 시나리오는 단언하건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이 작품은 대본은 상당히 훌륭한 것이다. 단, 블록버스터 쳐놓고는 말이다. 4. 버튼의 그늘을 완벽하게 벗어나게 만든 도구는 피스터 이 작품 이후에 많은 논객들이 전작의 이미지를 구축해 놓은 버튼을 자꾸만 폄하하려 하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불쾌하다. 버튼이 없었다면 지금의 놀란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지? 흥행 실패한 '리턴즈'야말로 영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블록버스터라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버튼이나 레이미와 같이 80년대를 수놓은 연출자들에게 항상 경배를 바치고 싶다. 수퍼 히어로의 부활은 버튼이 주도한 것이고, 수퍼 히어로의 고뇌라는 모던한 소재는 레이미가 가장 먼저 구체화한 것이다. 놀란도 '비긴즈'를 만들기 이전부터 분명히 이런 고민을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도 '비긴즈'에서 버튼이 창조한 표현주의적 이미지 세계를 떨쳐내고자 무던히 고심했을 것이다. 그 고민, 너무너무 이해가 가고, 일약 두번째 연출에서야말로 창대한 버튼의 그늘을 확실하게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놀란이 생떼를 써가면서 피스터의 아이맥스 촬영을 고집한 원인이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버튼적 세계관은 메트로폴리스적 도시 이미지에서 극대화되는 것이고, 이 그늘에서 탈피하려면 대도시가 가진 리얼리티를 블록버스터급의 스케일에 담아서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고충에 안쓰러우면서도 멋진 해결책을 낸 데에 힘찬 박수를 쳐주고 싶다. 피스터(파이스터인가?)는 놀란과의 작업을 통해서만 두각을 나타낸 촬영감독이다. 드봉처럼 훌륭한 독립적 표현주체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씬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명확하게 잡아내는 그의 앵글이 맘에 든다. 촬영에 대해 거듭되고 있는 이런 논란이야말로, 버튼이 얼마나 훌륭한 크리에이터인지 반증하는 일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버튼빠라고 욕하라. 5. 음악 연출에도 능할 줄이야 짐머와 하워드라는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둘씩이나 참여하긴 했어도, 음악이 이렇게 훌륭할 줄은 미처 예상도 못했다. 그리고, 놀란이 음악에까지 영향이 미치는 연출자일 줄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섯 번 보았는데 솔직히 첫 번 감상에서 제일 눈에(귀에) 들어온 것이 음악이었다. 음악 연출에 두 가지가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뮤지컬 영화처럼 음악이 주인공인 방식이 있고, 플롯을 도와주기 위해 음악이 도구로 쓰이는 방식이 있다. 물론 이 작품은 후자의 경우이고 놀란이 전자의 경우까지 능력있는 연출자인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전자까지 유능하다면 정말 천재이고 질투날 일이다.) 어찌 저찌 되었든, 미니멀리즘 영향을 받은 듯 텐션 높은 배경음악의 빼어난 완성도는 요 근래 10년 내에 정말 구경 못해본 것 같다. 엔딩 크레딧의 테마는 박력이 넘치니 짐머의 솜씨, 페리 보트 시퀀스에서 스트링 피치를 한껏 높여 뽑은 작품은 하워드의 솜씨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억측해 볼 뿐이다. 세번째 교차 편집 시퀀스에서 나온 엄청난 텐션이 음악의 영향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을까? 왜 이 작품은 비판받을 영화인가 1. 극우주의자들이 멋지게 인용할 구실을 만들어준 셈 뉴욕 타임즈인가 어느 미국 보수언론에서 웨인의 캐릭터를 부시 대통령에 비유했다는 웃기지도 않는 외신이 전해졌었다. 네번째까지 봤을 때엔 보수 언론의 임기말 호들갑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놀란이 오해할 여지를 충분히 주었다고 생각한다. 국내 모 유명 블로그 논객께서 잘 지적하셨듯이, 'Know your limits, master.'가 이 오해를 촉발하는 대사이다. 공존의 미덕과 힘의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고 반대편을 멸절시키려 했던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전쟁, 그리고 극중에서 웨인의 행보가 놀랍게도 교차하는 것이다. 마치 모국의 모 대통령이 적국에 화학무기가 있다고 오판했듯이, 웨인은 조커의 목적이 돈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말이다. 보면 볼수록 몸서리쳐졌던 씬이, 마지막 시퀀스에 웨인의 대사와 겹쳐 보여준 도청 시스템 폭파 장면에서 폭스가 은은히 미소짓는 그림이었다. 그 미소의 의미는 도대체... 체제 수호의 대의를 위해서는 개인의 사생활 침해가 용인될 수 있다는 무언의 제스처인지...? 플롯 구조상 현명함을 상징하기도 하는 폭스에게 미소를 짓게 한 점은 아마도 두고 두고 비판받지 않을까 하고, 또한 이러니까 블록버스터일 수밖에 없다고 자위한다. 2. 드러난 주제의식의 심연, 그러나 엉성하지는 않은가 이 작품이 잘한 점에서 살펴 보았듯이, 캐릭터를 통해 주제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 캐릭터는 태초 이전에 존재했던 혼돈의 절대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까지도 상징할 수 있다는 논의까지는 이끌어 내었다. 그렇다면 이에 맞서 프로테제를 구축할 절대적 개념은 이끌어 내었는가? 웨인이 절대 선인지, 질서인지, 창조인지, 그 의의 자체가 모호해지고 평면화되어 버린 데에서 이런 한계가 도출된다.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면서 선악의 모호성으로 대변되던 캐릭터가 일시에 평면화하면서, 안타고니스트인 조커에 대적할 철학적 개념을 표징하는 데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조커가 주제를 상징하고 철학을 논하며 플롯마저 이끌어 나간다면, 이 작품은 배트맨의 이야기인가 조커의 이야기인가? 왜 제목은 '어둠의 기사'인가? 차라리 '혼돈의 사도'라고 하는 편이 더 일관적이지 않은가? 아마도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 시간 반도 넘는 듀레이션을 훨씬 넘겨야 했을 것이 자명했기에, 이 부분을 설명하는 상당수의 씬이 잘려 나가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한다. 버튼을 뛰어넘고자 고군분투한 놀란의 고충도 이해하고 말이다. 버튼이 시각화한 디스토피아의 장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되었든간에 형이상학적 테제를 던져 내놓는 조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고니스트만이 그 조치의 한 축을 담당하고 프로타고니스트가 철저하게 위축된 구조를 제시함으로써, 적어도 이 작품은 주제의 철학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반쪽짜리 블록버스터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3. 오직 매니아를 위한 형식미, 너무 길다 할 얘기가 많으면서 러닝 타임이 긴 것이 결코 악덕이 아님은 잘 알고 있으며, 두 시간 반이 결코 지루하지 않은 플롯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후딱 지나가는 흥미진진한 플롯은 아니라고 본다. 꼭 해야 할 이야기만 쏙 빼서 한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긴 이야기인 것은 사실이다. 매니아라면 모르겠지만, 심심풀이 블록버스터를 기대하는 관객에게는 두 번 보기 싫은 너무 긴 시간이다. 초반부 카피캣 시퀀스나 홍콩 시퀀스 같은 것을 대폭 축소해 버렸어도 좋지 않았을까 슬쩍 상상을 해보고, 조커에게 할애한 시간도 약간 축소하는 미덕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반면, 도스나 덴트, 투페이스의 시퀀스는 줄일 만한 구석이 없다. (오히려 좀 늘려줬으면 싶기도...) 많은 이야기를 정신없이 배치해 놓은 이면에, 놀란이 저지른 단 0.1%의 실수를 덮어 버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지, 얄팍한 의심도 해본다. 써놓기는 이렇게 써놓긴 했지만, 혹시 읽으시는 분들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한 점 99.9%에, 못한 점 0.1%인, 근 10년 사이에 보기 드문 작품임은 사실이라고 본다. 혹시 읽으신 분들이 있는지...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말씀 올린다...
'other stories > wonderwoman' 카테고리의 다른 글
Amazons Attack! 아마존 어택 (2) (0) | 2010.04.02 |
---|---|
Amazons Attack! 아마존 어택 (1) (0) | 2010.04.01 |
Amazons Attack! 등 원서 3권 구매 .. (0) | 2010.03.27 |
원더우먼 출판물의 역사 (10) : #600권 이후 지금은.. (0) | 2010.03.04 |
원더우먼 출판물의 역사 (9) : 2006년 re-런칭 [파이널 크라이시스, 블랙키스트 나잇] (0) | 2010.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