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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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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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8.25
    칼뱅 사상이 자리잡기까지… 오늘날 왜 칼뱅인가
  2. 2020.03.25
    천동설과 지동설, 요하네스 케플러와 천문학자들
  3. 2018.11.22
    근대 국제 관계 질서의 출발점, 유럽의 30년 전쟁




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against the World










보헤미아의 얀 후스, 신성 로마 제국의 마르틴 루터,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 등 개혁 교회 운동의 양상은

15~16세기에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루터의 활동이 현대에까지 가장 유명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보수적 교리와 부패 현상에 반대했을 뿐 정작 그 자신은

독일 농민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어요.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바라는 민중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고

로마 가톨릭과 신성 로마 황제의 간섭을 배격하고픈 독일권

선제후들의 입김에 더 부합하는 지도자가 루터인 거죠.

루터교는 태생적으로 꽤 보수적 성향이었던 거에요.



*선제후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거로 추대할 권한을

가진 제국의 대공들을 말합니다. 보통은 오늘날 독일

지역 영지를 관할하는 제후들 중 선도적인 입장의

유력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보면 될 듯해요.



교리 문제에만 그치고 정치 활동으로 발전하지 않는 종교 개혁은

현대적 공화정 역사와 아무런 연속성도 없고 시대사적 의의도

찾을 수 없는 공허한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종교 전쟁의 정점을 찍은 30년 전쟁이 기독교 문제에서 시작하여

종국에 국제 정치로 대단원을 마친 사례에서 증명이 되쟎아요.

교회 개혁의 본질은 정치 구조를 건드려야 하는 거였어요.










개혁 교회 운동을 자치 정치체로까지 확대 발전시킨 장 칼뱅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인물인 겁니다. 근현대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 한 사람만 꼽는다면 — 케플러나 뉴턴, 칸트,

나폴레옹, 마르크스 다 제치고 — 바로 칼뱅일지도 몰라요.



칼뱅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논한다면야 고작 포스팅 수백 개나

논문 수십 편으로도 모자랄 지경이겠습니다만.



아주 심하게 간소화하여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영향

한 가지 정도씩만 썰을 풀어본다면요...



칼뱅의 예정설은 인간의 구원을 사회적 신분이나 인간의 의지와

상관 없이 오직 신의 은총이 정할 뿐이라는 내용으로서 일찍이

5세기에 아우누스티누스가 기초하여 칼뱅이 정립했답니다.



칼뱅의 정치적 가치관에 있어 급진성은 이렇게 인간의 운명이

사회 정치 계급을 초월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요. 현대적 민주

시민에겐 낯설지 않겠지만 중세의 평민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죠. 칼뱅교가 급속도로 퍼진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고요.



칼뱅은 사치와 쾌락을 끊고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에 충실하면

이를 통해 얻은 부를 죄악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전하여

청교도적 자본주의 사상의 씨앗을 낳았다…고 19세기에

막스 베버가 정리한 바 있습니다.



즉 신의 섭리란 것이 인간의 하챦은 의지와 무관하니 사회 계급

같은 제도는 가볍게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점, 바로 이것이

칼뱅 사상의 핵심이에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존 사회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신학적 가능성을 열어준 점이야말로 다른 어떤 개혁 종파보다

칼뱅교가 이후 대세로 자리잡은 본질적 원인이겠지요.



당시 로마 가톨릭이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끼친 가장 큰 병폐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상의 문을 걸어잠가 암흑기가 지속된 것?

면죄부를 판매해 부정한 재산을 축적한 것?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과 정면으로 대립한 것?



평민의 일상적 삶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각성할 만큼

종교 체제와 정치 구도 양쪽 지배자의 결탁 극심한 나머지

그 폐해가 어느 순간 둑이 무너지듯이 폭발했다 보면 어떨까요.



다른 그 어떤 병폐보다도 일상의 안정이 무너진 점이 가장 큰

거에요. 흑사병이나 계속된 대규모 전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거나 못 살게 된 일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에겐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음에 틀림없어요.



물론 역병이 교황 탓이냐 하여 직접 연관성을 따질 수는

없겠습니다만… 천재지변은 논외로 하고 사람이 벌이는

대부분 전쟁은 직간접적으로 교황권 및 가톨릭의

체제 병폐와 연관이 없다곤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불합리한 폭력적 역사의 중심에 십자군 전쟁이란 희대의

병크가 도사리고 있어요. 서울대 외교학과 김용구 교수님은

유럽 역사의 특성이 폭력성 및 전쟁에 있다고 하신 바 있죠.



세상의 근본을 구성하는 평범한 농노들의 삶이 인간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위협받는 상황이 되니, 그들도 본능적으로

모순의 구심점이 구교 가톨릭 체제의 비효율과 무능에 있음

직감하게 되는 날이 온 거에요.



중세 말엽의 사람들 의식이 어느 순간 그런 변화에 직면한 거죠.

인문 부흥이니 종교 전쟁이니 하는 피상적 현상은 그렇게 안으로

끙끙 앓고 있던 유럽인의 무의식이 폭발해버린 역사적 외관에

불과한 겁니다.



농노들의 자의식 각성이 유전자나 면역 체계라면, 종교 전쟁은

피나고 고름 터지는 자각 증상인 셈… 칼뱅과 같은 개혁가들은

증상을 유도하는 외부 기제, 바이러스 같은 것…?

굳이 비유하자면 뭐 이런 식?



이미 드러난 체제의 모순점을 교리로 확진하여 확인 사살시켜

주는 진단의 같은 역할… 중세사에서 장 칼뱅 역할론

그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칼뱅이 설교한 교리가 정치 체제의 본질을 꿰뚫고 시대를

관통하여 현대에까지 명맥이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고요.

그가 이렇게 중차대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제도적

기제는 교회법교회법정이었습니다.



*교회법은 그렇다 치고 교회법정이란 번역어를 용감하게

선택한 데에 비판이 있을 줄 압니다. 컨시스토리가 용어

통일이 안 되어 있음도 알고 있고요. 신학 논쟁이 목적이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쉽고 빠른 이해를 돕는 것이 포스팅의

목적이니 그런 취지에서 널리 양해해 주시면 좋겠네요.



개혁 교회의 가치관이 어떻게 가톨릭 체제를 대체하여 새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공동체 신앙 시스템이

교회법입니다. 교회법정은 교회법을 민간에 해석 적용할

자치 기구를 뜻하고요.



칼뱅이 두번째로 제네바로 청빙되어 남은 평생을 머물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시의회의 약속대로 1541년 11월

칼뱅식 교회법이 가결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칼뱅식

엄격주의 통치의 공식적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에요.



예장 교회를 다니시는 분은 알겠지만 장로교의 직제는

목사, pastor — 교사, doctor — 장로, elder —

집사, deacon ..의 분업적 체계로 구성되요.



각각의 직분과 역할도 다르죠. 목사는 성직, 교사는 교육,

장로는 운영, 집사는 복지를 각각 맡는 식으로 효율성을

기하여 공동체에 봉사하는 구조에요.



바로 이 구조가 칼뱅의 1541년 교회법에서 비롯된 거에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장기간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근간 시스템을 창안한 셈이죠.










교회법정, consistory.. 라고 부르던 심판 기구도 창설해요.

아직까지 교회법이 공동체 생활의 가치관을 대표하던 중세

시절이므로 민간의 관습을 해석할 기관이 필요했어요.

(로마 가톨릭도 똑같은 역할을 했는데 그 경향이

너무 보수 반동화하여 민심을 잃은 거죠.)



사실 우리가 현재 이미지로 떠올리는 독단적 통치자 칼뱅의

행적은 이 교회법정을 통해 이루어진 판결의 결과였어요.

특히 그가 춤이나 카드 놀이 같은 유흥 및 쾌락 행위까지

금지하는 급진적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제네바 유력

가문 중 일부는 꽤 오랫동안 저항하며 그와 맞선 거죠.



칼뱅 본인이 한동안 외국인 목사 신분이어서 제네바 시민권이

없었거든요. 교회법정 위원으로서 신학적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거에요. 시민권은 죽기 몇 해 전

가서야 획득할 수 있게 되요.



단 오해하면 안 되는데 기존 정무 당국인 시의회가 담당하는

사법 집행의 기능은 엄연히 양립하는 구조였어요. 예를 들어

교회법정이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벌은 파문이었고 이에 따라

사형 등 형벌이 필요할 경우 집행을 의회가 맡는 구조인 거죠.



정교 일치의 신정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거에요. 비록 당대에도 매우 엄격하게 기준을 세워 일부

시민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개혁 초기에 칼뱅주의 노선이

빠른 시일 내 자리잡은 원동력 또한 이런 시스템에 있었죠.



이런 교회법정이 자리잡기까지 칼뱅의 삶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엄격주의의 반대파들이 칼뱅 신학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다른 개종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칫

개혁가들은 언제라도 목숨이 달아날 수 있었어요.










미카엘 세르베투스 논란은 바로 그렇게 칼뱅의 입지가 위태로운

때 벌어진 일이에요. 삼위일체를 부정한 극단론자 세르베투스를

끌어들여 교회법정 자체가 진흙탕 싸움이 될 뻔 했죠.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의학자로서 업적도 남겼지만

신학자로서는 싸움닭처럼 논란을 몰고 다니는 요주의

인물이었어요. 삼위일체를 부정하여 유럽 전역을 들쑤셔

놓다가 제네바에 와서 결국 교회법정에 섰던 거죠.



칼뱅은 교회법정에서 세르베투스와 한바탕 설전을 벌였어요.

삼위일체 부정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선을 넘은 일이긴 하쟎아요.



답정너의 심판처럼 보이긴 하나 과연 형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같은 애매한 문제도 있어 쉽지 않은 사건이었어요.

판결을 주도해야 할 칼뱅의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도 않았고..



시의회는 인근 스위스 자치주들에도 법리 해석에 대한

의견을 회람했고 그들 역시 ‘우리 심판이라도 마찬가지일 것’

이라 견해를 모으니 화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해요.



요점은 이러한데 세르베투스 건은 현재의 신학자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떡밥인 것 또한 사실이에요.



논란의 본질인즉슨, ‘칼뱅이 시민권자 신분도 아닌데 뭐 얼마나

독단적이었겠냐’는 옹호론과 ‘칼뱅이 얼마나 독재자였는지 이

판결 하나 보면 알 수 있지 않냐’는 비판론으로 대립하는 거죠.



어떻게 보이시나요? 본 포스팅은 주인공이 칼뱅이니까

어느 정도는 비호하고 편애하는 쪽으로 서술했어요.



이에 반대하신다면 다른 저작들을 참조하기 바래요.

(그리고 거듭 밝히지만 기독교 신자 아니에요.)










세르베투스 논란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그의 정적인 유력

가문이 가톨릭과 내통한 혐의로 된통 걸리는 일이 생기니

그때부터 칼뱅의 정치 세계는 평화로워져요. 1555년이죠.



때마침 몇 달 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가 공인된

해이기도 해요. 이때 칼뱅교는 공인을 못 받았고.

(칼뱅교 공인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1648년)



칼뱅주의 신학이 자리잡기까지 과정은 이렇게 험난했어요.

그리고 이후엔 다른 어떤 개신교 종파에 비교해도 훨씬 더

급속도로 유럽 전체에 교세를 뻗어 나갔고요.



영국으로 건너간 칼뱅교는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정착해요. 영국 칼뱅교도를 청교도로 부르는 건 아시죠.

이후 세계사의 중심 세력으로 쑥쑥 성장하죠.



사실 오늘날 최강대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칼뱅교의 분파인

청교도들이고 미국의 현대 정치에서도 곳곳에서 청교도식

엄격주의 윤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에 장 칼뱅의

영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우리는 개신교도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장로교 계열인

전 세계 유일한 나라에요. 예장 계열이란 종파이죠.

가끔 사회적 문제도 일으키긴 하는데 모든

신자가 다 그렇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아래 남자분은 다소 장황하게 변을 늘어놓는 듯도 보이지만

칼뱅주의 신학의 핵심을 경쾌하게 설명하는지라 링크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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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Johannes Kepler: The First Astronomer and

The Last Astrologer with Laws of Planetary Motion






천동설, geocentrism.. 지구 중심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원의 궤적으로 공전한다는 가설이고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가

먼저 제시하여 프톨레마이오스가 정립하지만 현재는 폐기됐어요.



지동설, heliocentrism.. 태양 중심설은 지구를 포함한 천체의

운동이 태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므로 지구도 공전하는 천체에

불과하다는 가설이고 오늘날 널리 실증된 정설이고 진리에요.



지동설이 진실이 된 데에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부터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아이작 뉴턴까지

현대인이 흔히 아는 학자들의 계보가 뒷받침이 되었어요.



의외로 프톨레마이오스 전에 지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타코스

Aristarchus of Samos.. 란 학자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가 얻은

계산치가 요즘엔 말할 것도 없고 당시 기준에도 오차가 너무 크단

판단이 다수였던지라 인정 못 받고 오랫동안 묻힐 수밖에 없었죠.










현대인 여러분, 천동설을 만만하게 보면 곤란해요. 중세 유럽

지식인들의 과학 상식에 관해 쓸데없는 현대적 미신이 넓게 퍼져

있죠. 그들 대부분 지구가 평면이라고 믿었다느니, 성경 말씀에

반한다는 이유로 교회가 지동설을 무조건 박해했다느니, 천동설은

과학과 상관없는 성직자들만이 맹신하였다느니 등등…



역사의 진실은 이와 달라요. 생활하느라 고단한 평민이면 몰라도

대부분의 교회 지식인들에게 지구가 구체임은 상식이었고, 성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앞뒤 재지 않고 무식하게 지동설을 몰아붙이지

않았으며, 지동설을 맹렬히 공격한 쪽은 가톨릭 성직자보다는

기존 천동설을 신봉한 당시 반대편 과학자 집단이었어요.



중세 사회에 행정, 교육, 연구, 복지 기능을 제공한 국정 관리

대행 시스템으로서의 가톨릭 교회는 천동설을 정설로 가르치되

지동설의 가능성도 열어두는 등 의외로 개방적이었어요.

오늘날 현대인의 일반적 편견과는 몇 광년쯤 차이나죠.



중세 유럽의 성직자들에게도 종교는 종교인의 문제, 과학은

과학자의 문제로 엄격하게 구별되니 자신들이 과학의 문제를

함부로 재단할 자격이 안 된다는, 기본적인 개념은 있었답니다.



그들이 천동설을 보편적 정설로 교육한 이유는 간단명료해요.

중세인의 과학적 지식이 허용하는 한도에서 그 당시 기술로

증명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진실이 천동설이었기 때문이죠.



이말인즉슨 당시 사회의 평균적 상식과 믿음을 대변해야 할 책임이

국정 체제를 대행한 교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 내부적으로는

천동설과 지동설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열어놓고 연구했음에도)

대중에 설파하는 내용은 보편적인 천동설일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이쯤 읽으시고.. 얘 개독이구나.. 창조 과학 믿나보다.. 하시는

분들 있을 텐데, 현대인이 잘못 믿고 있을지 모를 역사의 편견을

경계하자는 것 뿐이며 모든 주장은 과학사의 근거가 있다고요.

또한 본 블로거, 불교 믿습니다요.ㅎ










여기까지 이해하셨으면 하나의 중간 결론에 도달하셨을 텐데…

네, 그 당시 사람들은 종교에 기반한 맹목적 믿음으로 천동설을

추종한 것이 결코 아니에요. 그들 나름 최선의 결과로 얻은 측정

값에 의해 입증 가능한 가설이 바로 천동설이었으니까 믿은 거죠.



심지어 그 측정치는 프톨레마이오스 때부터 문헌에 등장해요.

고대 그리스 시대에 지구의 외형 규격을 오차 범위로 근접시켜

이미 계산했던 것 아시죠.



중세에 자연 철학(지금의 과학) 연구는 주로 수도원에서 행했는데

그들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당시로서 가장 발달한 측정 기술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을 수백 년간 실증한 겁니다. 이런 반복

실험과 관측의 결과로 천동설에 대한 믿음이 쌓인 거에요.



그들이 얻은 관측 값은 당시로서는 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정확했어요. 단지 문제는… 천체 현상이란 것이 중세의

계산 능력으로 감당 못할 만큼 거대한 수치나 세밀한 오차를

요한다는 사실 뿐..



즉, 그들은 그들대로 최선의 값을 얻었지만 그 값의 오차가

중세인의 상상보다 훨씬 어마어마했던 거죠. 현대적 컴퓨터라면

쉽게 잡아낼 수 있겠지만. 희한하게도 부정확한 값이 천동설의

가정에는 더 잘 부합하는 결과가 나왔다니 믿을 수밖에요.








그렇게 깊고 두껍게 굳은 믿음에 처음으로 균열을 가한 일대

사건이 바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1532년에 완성하여

죽기 직전 1543년에 출간한 저서 천구회전론의 출현이었어요.



코페르니쿠스가 20대 시절에 볼로냐, 로마, 파도바 등지에서

유학을 했거든요. 이때 전술한 아리스타코스의 문헌을 접해요.

하지만 그의 가설은 단순히 직관에 의존한 것일 뿐 실험이나

관측을 통한 것이 아닌지라 그닥 과학적이지는 못했죠.

(지식인 사회를 술렁이게 할 정도 역할은 했어요.)



이 무렵 덴마크에 티코 브라헤라는 점성술사 겸 천문학자가

활동했는데 점성술로 몇 가지 사건을 예측한 당시 스타였어요.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2세의 배려로 작은 섬에 대형 천문대를

갖추고 오랜 세월 엄청난 관측 데이터를 남겼는데요.



정작 이 데이터로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은 프라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점성술사로 살아가던 천체 역학 분야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였어요.










케플러는 지동설의 진정한 진일보를 가져온 사람이라 할 만해요.

브라헤의 천문대 조수로 잠시 일했던 그는 물려받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행성

천체의 궤도가 타원형을 그린다는 대원리, 케플러의 법칙

1609년 저서 신천문학을 통해 발표하는 업적을 거두죠.



과학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 보셨죠. 심지어 공식도 기억날 걸요.

케플러의 법칙은 세 가지인데 행성이 타원형 궤도로 공전한다는

것, 태양에 가까울 때와 멀 때 공전 속도가 다르다는 것, 공전

주기의 제곱이 궤도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에요.



제1법칙이 신천문학을 통해 공개가 되고 큰 파장을 몰고 와요.

(근데 놀랍게도 1법칙을 2법칙 후에 발견했다고도 하네요.)



제2법칙은 다른 표현이 있어요. 타원 장반경과 단반경 각각

구간에서 공전 속도는 서로 다르지만 동일 시간 내 이동한

궤적으로 생긴 부채꼴의 면적은 서로 같다는 법칙이에요.

아마 이 내용으로 외운 분이 더 많을 걸요. (아래 그림)









고등학교 때 제3법칙을 공식으로 달달 외우신 분들이 꽤

많을 거에요. 이건 1619년에 세계의 조화라는 책 말미에

별도로 발표되었죠. 복잡하니 공식은 아래에…









자연 철학의 사변, 말싸움에만 머물던 천문학의 연구 방법이

케플러를 만나 비로소 수리 물리학으로 발전한 거에요. 그를

천체 역학의 창시자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죠.



후대의 뉴턴 역학 공식은 사실 케플러의 법칙을 직접 계승하거나

더 높은 차원에서 다시 고찰한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죠.



꽤 유능한 점성술사였다고도 하니 역사가들이 그를 가리켜

‘마지막 점성술사이자 동시에 최초의 천문학자’라고 부른다죠.

17세기초 처음 등장한 망원경을 개량한 기술자이기도 해요.










망원경 개량과 천문 토론은 멀리 피렌체에 살던 한 수학자 겸

군사 기술자와 서신 교환의 방법으로 열심히 했는데, 그가

바로 동시대에 살던 갈릴레오 갈릴레이였어요.



갈릴레이는 사실 수학자로서 미적분 발전에 한 획을 그었

그 결과를 포병 기술 등 군사 분야에 활용했으며 몇몇 저명한

물리학 실험으로 훗날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다가 유능한 관측

천문학자로서 갈릴레이 위성을 발견한 업적이 매우 훌륭해요.



그러나 지동설의 발전 역사에서 천문 원리를 천체 물리학으로

발전시킨 사람이 갈릴레이라는 오해를 가끔 받아요. 그 업적은

케플러의 공이죠. 우린 이미 교과서에서 제3법칙을 만났쟎아요.



갈릴레이를 지동설의 유명 인사로 만든 건 아마도 우르바노 8세

교황일 걸요. 갈릴레이는 1632년 천문대화를 출간하며 교황청

검열까지 통과한 상황이었지만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아 이단

심판을 위한 종교 재판정에 회부될 수밖에 없었어요.



우르바노 8세가 갈릴레이와 친분도 있거니와 교황청은 원래

그에게 호의적이었는데 하필 30년 전쟁으로 종교 전쟁

정점을 찍던 때인지라 극우 가톨릭 인사들의 공격이

이어지니 재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긴 했어요.



세간에선 이 사건이 길이길이 알려지며 갈릴레이를 지동설의

순교자처럼 인식하지만… 사실 고문이나 물리적 박해를 받은

것도 아니고 다소 불편하긴 해도 말년에 잘 살다 가셨어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가 정말 한 말인지 절대 알 수 없고요.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며 아이작 뉴턴은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연루된 지동설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

단순히 지구가 움직인다는 차원을 벗어나 천체 전체의 역학

원리를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으로 승화하여 고전 물리학과

뉴턴 역학의 체계를 완성하게 되요.



중력의 법칙을 세우며 케플러가 경험적 사유를 통해 획득한

원리를 계승하고 상위 차원으로 발전시킨 작업인 것이죠.



이로써 인류는 수천 년을 이어온 천동설을 폐기하고 (단순히

지동설이 우세하니 마니 하는 소모적 논쟁이 아니라) 물리학의

세계를 열어젖혀 자연의 힘을 활용할 바탕을 갖추게 됩니다.



중세인의 사고 체계를 뒤집었다고 오해받기도 하는 지동설의

역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발상과 갈릴레이 종교 심판이 가장

유명한 미신이 형성되어 왔지만 진정 학술적 토대를 구축한

적자는 케플러였다는 사실, 이제부터 기억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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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Thirty Years’ War: International Relations Rise




30년 전쟁은 백여 년을 끌어온 종교 개혁을 일단락 짓고

유럽 각 나라의 세력 구도를 새롭게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 international.. 국가 간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봉토와 영지 중심의 중세 시대 정치를 종식하고 영토 개념의

근대 국가가 정치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nternational 단어 자체는 제레미 벤담이 18세기 말에

처음 만들었어요. ‘국제’라는 한자어 정착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번역가들이 도입했고 그 전에 중국에는 ‘만국’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쓰였죠.


구교-신교의 대립을 바탕으로 종교 전쟁에서 시작했지만

국제 정치의 역학 구도에 더 큰 영향을 주며 종료했다는

점이 큰 핵심일 것 같습니다.


30년 전쟁 이후에도 종교적 박해는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종교 개혁을 끝낸 건 아닙니다. 여러 종파 가운데 루터교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칼뱅교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공인하게 된 것 뿐이죠.


그렇지만 로마 가톨릭 교황령을 정점으로 떠받드는 수직적

햐향식 신정 정치 체제가 붕괴한 것, 이것만은 사실입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국가를 대체할 유사 국정 시스템도

아니고.. 나라의 역할은 이제부터 나라가 하겠죠.


사실 중세의 유럽은 어떤 나라가 정치의 주체가 아니고

가문이 중심이라 할 수 있죠. 어떤 개인은 그 가문이 소유한

봉토에 속해 신분상의 제약을 받는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합스부르크니 부르봉이니 하는 왕가가 정치 주체로 등장하는

추세가 30년 전쟁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되고 이 역할을

대체하여 정치 주체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란 개념이

자리를 차지하는 형식으로 변혁을 맞는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 주권이나 국왕의 대권 같은 개념도 이때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이런 관념의 정의가 불필요했죠.

군주의 지위는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니 누가 토를 달겠어요.


주권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곧 봉건적 통치권이

서서히 약화하고 근대 공화주의 사상이 형성될 바탕이 차츰

형성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거랍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국제법학에서 국제법의 주체로 주권을 가진

국가만을 상정하는 전통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국제법의 효시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근대적 법리를 완성한 사람은 조약 체결 3년 전 사망할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법률가로 활동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없어도 웨스트팔리아를

사상적으로 이끈 영도자라고 칭송하는 바로 그 인물이랍니다.


참고로 주권의 개념이 등장했지만 영토의 개념까지는 아니에요.

국제 조약에 영토 개념이 가미되기 시작한 계기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인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꼽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근대 국가란 것이 정치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실체를 정립하게 되고 여기에다가 19세기 이탈리아 및 독일의

통일로 고개를 든 민족주의 바람까지 더하면, 그제서야 대략

현대에 흔히 느낄 수 있는 민족 국가의 개념에 가까와집니다.




이렇게 30년 전쟁을 계기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현대 유럽

국가의 원형이 이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함을 확인할 수 있죠.

정권 간의 세력 구도가 엄청난 변화를 맞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겁니다.

중세를 지배한 로마 + 기독교의 시스템이 붕괴한 거죠.

제국이 다스리던 독일 지역은 3백 개가 넘는 영방 국가로서

각자의 자치권을 인정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 땅이 전쟁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한 뒤죠.

인구 기반이 사라졌다는 것은 경제 활동과 총생산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거고요. 1871년 통일할 때까지 독일은 유럽

정치 무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린 스페인도 하락세에 들어갑니다.

카를 5세 시절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죠. 지리상 발견에만

기대기에 신흥 강국이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빠르고요.


스페인 육군의 전통적 전술이 무너진 것도 하락세에

한 몫을 차지했어요. 무적함대의 유명세도 이미

16세기에 볼장 다 본 터였습니다.


두 나라를 통치한 합스부르크는 이제 유럽의 종이 호랑이로

전락합니다. 대신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빠르게 대체합니다.

(합스부르크 통치 지역은 지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30년 전쟁 막판에 루이 14세도 즉위했거니와 이제 프랑스

절대 왕정의 호시절만 남아 있죠. 이때까지 영국과 러시아는

아직 국내외 사정으로 정신 못 차리던 때입니다.


프랑스 북동부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20세기엔 자원의 보고로

급부상할)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랑스에 거의 넘어옵니다.

독일 경제도 완전히 붕괴했으니 이제부터 프랑스로선

최소한 뒷마당 걱정은 면하게 된 셈…




30년 전쟁으로 피어난 새 강호는 북구의 스웨덴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은 스웨덴의 사자왕으로 불려요.

애초에 덴마크-노르웨이와 북해 패권을 놓고 대립했는데

이제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를 눌러 버렸어요.


덴마크-노르웨이는 16세기에 형성된 동군 연합국입니다.

30년 전쟁 초기엔 신교 동맹에 잘 붙었는데 나중에 황제

편으로 변절하여 스웨덴에 깨지는 불운이...


영국은 동맹까진 참여했는데 1642년에 영국 내전이 발발하며

주춤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약

60여 년이 흐른 후. 17세기말 명예 혁명을 완수하며 내홍을

딛고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아직 중앙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 전이고

대개 유럽 국가들은 미개한 저개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죠.

러시아 국력의 폭발은 18세기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입니다.

30년 전쟁 때는 스웨덴에 밀려 기싸움 중이었어요.


러시아와 전쟁 중이고 스웨덴 기에 눌리던 동유럽의 나라 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있어요. 종교 전쟁의 광풍을

슬기롭게 피했고 거국적인 관용의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흔치 않은 나라죠. 30년 전쟁에선 오스만 제국을 견제했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나라들이 이때 독립하여 국체를 형성했어요.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


포르투갈은 과거에 국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혈통이 끊겨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30년 전쟁 말미에 다시 독립했어요.


스위스도 합스부르크에 예속은 했지만 실상은 그전부터

느슨한 국가 연합 형태로 독립국이나 다름 없었고 국민들

상당수가 용병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합스부르크가

30년 전쟁에 지면서 정식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종교 전쟁의 하이라이트이자 진정한 독립국은 네덜란드겠죠.

오랫동안 스페인 제국에 삥뜯기는 영지 신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내다가 1568년부터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종교 개혁의 문파가 크게 루터와 칼뱅으로 나뉘지만 까놓고 말해

두 종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에요. 루터교는 가톨릭 교리를 상당히

수용하고 정치적으로도 황제 중심의 보수 성향을 띱니다.


당시 진정한 급진 세력은 칼뱅교였어요. 청교도들 경건주의에서

보듯이 교리도 훨씬 원론적이고 황제권 같은데 질색하는 정치

성향이었죠. 거기다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는 경제 철학으로

네덜란드 상인 계급이 일찍부터 받아들여 장악하고 있었어요.


30년 전쟁의 네덜란드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충분히 독립을 인정받을 만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했어요.

그 결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합니다.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대서양 무역 항로를 두고

영국과 대일전을 벌여 양대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입니다. 근대 공화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체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끝을 맺으며 봉건주의를 종식하고 근대의 문턱을 형성한

사건, 바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국제 정치국제 관계학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래는 찾아본 중에 가장 짧으면서도 비교적 상세한

교육용 개인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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