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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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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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뱅 사상이 자리잡기까지… 오늘날 왜 칼뱅인가
  2. 2018.10.31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II : 종교 개혁
  3. 2018.10.15
    유럽 국제관계 및 근현대 외교사의 주요 사건들




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against the World










보헤미아의 얀 후스, 신성 로마 제국의 마르틴 루터,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 등 개혁 교회 운동의 양상은

15~16세기에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루터의 활동이 현대에까지 가장 유명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보수적 교리와 부패 현상에 반대했을 뿐 정작 그 자신은

독일 농민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어요.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바라는 민중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고

로마 가톨릭과 신성 로마 황제의 간섭을 배격하고픈 독일권

선제후들의 입김에 더 부합하는 지도자가 루터인 거죠.

루터교는 태생적으로 꽤 보수적 성향이었던 거에요.



*선제후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거로 추대할 권한을

가진 제국의 대공들을 말합니다. 보통은 오늘날 독일

지역 영지를 관할하는 제후들 중 선도적인 입장의

유력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보면 될 듯해요.



교리 문제에만 그치고 정치 활동으로 발전하지 않는 종교 개혁은

현대적 공화정 역사와 아무런 연속성도 없고 시대사적 의의도

찾을 수 없는 공허한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종교 전쟁의 정점을 찍은 30년 전쟁이 기독교 문제에서 시작하여

종국에 국제 정치로 대단원을 마친 사례에서 증명이 되쟎아요.

교회 개혁의 본질은 정치 구조를 건드려야 하는 거였어요.










개혁 교회 운동을 자치 정치체로까지 확대 발전시킨 장 칼뱅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인물인 겁니다. 근현대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 한 사람만 꼽는다면 — 케플러나 뉴턴, 칸트,

나폴레옹, 마르크스 다 제치고 — 바로 칼뱅일지도 몰라요.



칼뱅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논한다면야 고작 포스팅 수백 개나

논문 수십 편으로도 모자랄 지경이겠습니다만.



아주 심하게 간소화하여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영향

한 가지 정도씩만 썰을 풀어본다면요...



칼뱅의 예정설은 인간의 구원을 사회적 신분이나 인간의 의지와

상관 없이 오직 신의 은총이 정할 뿐이라는 내용으로서 일찍이

5세기에 아우누스티누스가 기초하여 칼뱅이 정립했답니다.



칼뱅의 정치적 가치관에 있어 급진성은 이렇게 인간의 운명이

사회 정치 계급을 초월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요. 현대적 민주

시민에겐 낯설지 않겠지만 중세의 평민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죠. 칼뱅교가 급속도로 퍼진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고요.



칼뱅은 사치와 쾌락을 끊고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에 충실하면

이를 통해 얻은 부를 죄악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전하여

청교도적 자본주의 사상의 씨앗을 낳았다…고 19세기에

막스 베버가 정리한 바 있습니다.



즉 신의 섭리란 것이 인간의 하챦은 의지와 무관하니 사회 계급

같은 제도는 가볍게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점, 바로 이것이

칼뱅 사상의 핵심이에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존 사회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신학적 가능성을 열어준 점이야말로 다른 어떤 개혁 종파보다

칼뱅교가 이후 대세로 자리잡은 본질적 원인이겠지요.



당시 로마 가톨릭이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끼친 가장 큰 병폐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상의 문을 걸어잠가 암흑기가 지속된 것?

면죄부를 판매해 부정한 재산을 축적한 것?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과 정면으로 대립한 것?



평민의 일상적 삶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각성할 만큼

종교 체제와 정치 구도 양쪽 지배자의 결탁 극심한 나머지

그 폐해가 어느 순간 둑이 무너지듯이 폭발했다 보면 어떨까요.



다른 그 어떤 병폐보다도 일상의 안정이 무너진 점이 가장 큰

거에요. 흑사병이나 계속된 대규모 전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거나 못 살게 된 일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에겐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음에 틀림없어요.



물론 역병이 교황 탓이냐 하여 직접 연관성을 따질 수는

없겠습니다만… 천재지변은 논외로 하고 사람이 벌이는

대부분 전쟁은 직간접적으로 교황권 및 가톨릭의

체제 병폐와 연관이 없다곤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불합리한 폭력적 역사의 중심에 십자군 전쟁이란 희대의

병크가 도사리고 있어요. 서울대 외교학과 김용구 교수님은

유럽 역사의 특성이 폭력성 및 전쟁에 있다고 하신 바 있죠.



세상의 근본을 구성하는 평범한 농노들의 삶이 인간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위협받는 상황이 되니, 그들도 본능적으로

모순의 구심점이 구교 가톨릭 체제의 비효율과 무능에 있음

직감하게 되는 날이 온 거에요.



중세 말엽의 사람들 의식이 어느 순간 그런 변화에 직면한 거죠.

인문 부흥이니 종교 전쟁이니 하는 피상적 현상은 그렇게 안으로

끙끙 앓고 있던 유럽인의 무의식이 폭발해버린 역사적 외관에

불과한 겁니다.



농노들의 자의식 각성이 유전자나 면역 체계라면, 종교 전쟁은

피나고 고름 터지는 자각 증상인 셈… 칼뱅과 같은 개혁가들은

증상을 유도하는 외부 기제, 바이러스 같은 것…?

굳이 비유하자면 뭐 이런 식?



이미 드러난 체제의 모순점을 교리로 확진하여 확인 사살시켜

주는 진단의 같은 역할… 중세사에서 장 칼뱅 역할론

그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칼뱅이 설교한 교리가 정치 체제의 본질을 꿰뚫고 시대를

관통하여 현대에까지 명맥이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고요.

그가 이렇게 중차대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제도적

기제는 교회법교회법정이었습니다.



*교회법은 그렇다 치고 교회법정이란 번역어를 용감하게

선택한 데에 비판이 있을 줄 압니다. 컨시스토리가 용어

통일이 안 되어 있음도 알고 있고요. 신학 논쟁이 목적이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쉽고 빠른 이해를 돕는 것이 포스팅의

목적이니 그런 취지에서 널리 양해해 주시면 좋겠네요.



개혁 교회의 가치관이 어떻게 가톨릭 체제를 대체하여 새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공동체 신앙 시스템이

교회법입니다. 교회법정은 교회법을 민간에 해석 적용할

자치 기구를 뜻하고요.



칼뱅이 두번째로 제네바로 청빙되어 남은 평생을 머물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시의회의 약속대로 1541년 11월

칼뱅식 교회법이 가결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칼뱅식

엄격주의 통치의 공식적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에요.



예장 교회를 다니시는 분은 알겠지만 장로교의 직제는

목사, pastor — 교사, doctor — 장로, elder —

집사, deacon ..의 분업적 체계로 구성되요.



각각의 직분과 역할도 다르죠. 목사는 성직, 교사는 교육,

장로는 운영, 집사는 복지를 각각 맡는 식으로 효율성을

기하여 공동체에 봉사하는 구조에요.



바로 이 구조가 칼뱅의 1541년 교회법에서 비롯된 거에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장기간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근간 시스템을 창안한 셈이죠.










교회법정, consistory.. 라고 부르던 심판 기구도 창설해요.

아직까지 교회법이 공동체 생활의 가치관을 대표하던 중세

시절이므로 민간의 관습을 해석할 기관이 필요했어요.

(로마 가톨릭도 똑같은 역할을 했는데 그 경향이

너무 보수 반동화하여 민심을 잃은 거죠.)



사실 우리가 현재 이미지로 떠올리는 독단적 통치자 칼뱅의

행적은 이 교회법정을 통해 이루어진 판결의 결과였어요.

특히 그가 춤이나 카드 놀이 같은 유흥 및 쾌락 행위까지

금지하는 급진적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제네바 유력

가문 중 일부는 꽤 오랫동안 저항하며 그와 맞선 거죠.



칼뱅 본인이 한동안 외국인 목사 신분이어서 제네바 시민권이

없었거든요. 교회법정 위원으로서 신학적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거에요. 시민권은 죽기 몇 해 전

가서야 획득할 수 있게 되요.



단 오해하면 안 되는데 기존 정무 당국인 시의회가 담당하는

사법 집행의 기능은 엄연히 양립하는 구조였어요. 예를 들어

교회법정이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벌은 파문이었고 이에 따라

사형 등 형벌이 필요할 경우 집행을 의회가 맡는 구조인 거죠.



정교 일치의 신정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거에요. 비록 당대에도 매우 엄격하게 기준을 세워 일부

시민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개혁 초기에 칼뱅주의 노선이

빠른 시일 내 자리잡은 원동력 또한 이런 시스템에 있었죠.



이런 교회법정이 자리잡기까지 칼뱅의 삶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엄격주의의 반대파들이 칼뱅 신학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다른 개종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칫

개혁가들은 언제라도 목숨이 달아날 수 있었어요.










미카엘 세르베투스 논란은 바로 그렇게 칼뱅의 입지가 위태로운

때 벌어진 일이에요. 삼위일체를 부정한 극단론자 세르베투스를

끌어들여 교회법정 자체가 진흙탕 싸움이 될 뻔 했죠.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의학자로서 업적도 남겼지만

신학자로서는 싸움닭처럼 논란을 몰고 다니는 요주의

인물이었어요. 삼위일체를 부정하여 유럽 전역을 들쑤셔

놓다가 제네바에 와서 결국 교회법정에 섰던 거죠.



칼뱅은 교회법정에서 세르베투스와 한바탕 설전을 벌였어요.

삼위일체 부정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선을 넘은 일이긴 하쟎아요.



답정너의 심판처럼 보이긴 하나 과연 형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같은 애매한 문제도 있어 쉽지 않은 사건이었어요.

판결을 주도해야 할 칼뱅의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도 않았고..



시의회는 인근 스위스 자치주들에도 법리 해석에 대한

의견을 회람했고 그들 역시 ‘우리 심판이라도 마찬가지일 것’

이라 견해를 모으니 화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해요.



요점은 이러한데 세르베투스 건은 현재의 신학자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떡밥인 것 또한 사실이에요.



논란의 본질인즉슨, ‘칼뱅이 시민권자 신분도 아닌데 뭐 얼마나

독단적이었겠냐’는 옹호론과 ‘칼뱅이 얼마나 독재자였는지 이

판결 하나 보면 알 수 있지 않냐’는 비판론으로 대립하는 거죠.



어떻게 보이시나요? 본 포스팅은 주인공이 칼뱅이니까

어느 정도는 비호하고 편애하는 쪽으로 서술했어요.



이에 반대하신다면 다른 저작들을 참조하기 바래요.

(그리고 거듭 밝히지만 기독교 신자 아니에요.)










세르베투스 논란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그의 정적인 유력

가문이 가톨릭과 내통한 혐의로 된통 걸리는 일이 생기니

그때부터 칼뱅의 정치 세계는 평화로워져요. 1555년이죠.



때마침 몇 달 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가 공인된

해이기도 해요. 이때 칼뱅교는 공인을 못 받았고.

(칼뱅교 공인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1648년)



칼뱅주의 신학이 자리잡기까지 과정은 이렇게 험난했어요.

그리고 이후엔 다른 어떤 개신교 종파에 비교해도 훨씬 더

급속도로 유럽 전체에 교세를 뻗어 나갔고요.



영국으로 건너간 칼뱅교는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정착해요. 영국 칼뱅교도를 청교도로 부르는 건 아시죠.

이후 세계사의 중심 세력으로 쑥쑥 성장하죠.



사실 오늘날 최강대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칼뱅교의 분파인

청교도들이고 미국의 현대 정치에서도 곳곳에서 청교도식

엄격주의 윤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에 장 칼뱅의

영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우리는 개신교도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장로교 계열인

전 세계 유일한 나라에요. 예장 계열이란 종파이죠.

가끔 사회적 문제도 일으키긴 하는데 모든

신자가 다 그렇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아래 남자분은 다소 장황하게 변을 늘어놓는 듯도 보이지만

칼뱅주의 신학의 핵심을 경쾌하게 설명하는지라 링크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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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I

Reformation and Wars of Religion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I. 종교 개혁 Reformation 



종교 개혁은 중세 유럽인의 정신과 생활을 장악하던 가톨릭의

구체제가 신교라는 교파 분리로 도전받은 종교 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국정의 관리 행정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근대적 국제 질서를 다진 변혁으로 분석할 여지가 더 크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바..

첫째, 기독교 체제의 구속을 탈피하고 난 이후에야 유럽인들이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자유를 얻어 정치 제도를 일신하고 현재의

민주정 체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요.


둘째, 현대인들의 상상과 달리 중세의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 기호

차원의 종교가 아니라 지역 교구 차원에서 신도를 관리하며 국가

행정 체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사 국정 시스템의 역할을

해냈는데 종교 개혁으로 이것이 통째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혁 운동의 실제 모습이란 것이 현대인들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회 일부 종교인들의 평화적 활동으로 점철되지 않았고,

제후와 영지의 거주민이 전력을 다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 정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시발점으로 1517년의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꼽는 일은

오랜 통설입니다만. 그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한 존 위클리프가 있었고 1415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잡혀 화형 당한 얀 후스 등이 있었죠.


독일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문에 붙인 행위는 일종의 대자보 같은

거고요. 오늘날로 치면 기자 불러 발표문 읽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정치 사회적 의사소통 행위로 보면 됩니다.


취리히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미 1516년부터 스위스 용병의

활동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1523년 시의회에서 67개 신조

주장하며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어 그의 가치가 늦게 발견된 거지요.


요절해 활동이 짧은 츠빙글리나 농민 전쟁에 반대한 루터와 달리

진정한 교회 개혁장 칼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신교 교리가

정교 일치의 신정 자치제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제네바에서 몸소

보여줬고 장로교 체계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교 운동에 대한 영국식 반응이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인데

성공회란 것이 사실상 교리에선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긴 해요.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였던 헨리 튜더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교회법상 적법한 이혼으로 후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죠.


(네, 현대 국가의 성문법이 해결할 생활의 영역을 교회법

민간의 관습법을 해석하여 푸는 사회가 바로 중세랍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 칼뱅식 청교도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후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

흐름에 큰 돌발 변수로 작용할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체제를 밀어 붙이다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슈말칼덴 전쟁

휩싸이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제후 및

봉토의 루터교 선택권을 인정하며 항복 선언을 합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위그노 전쟁의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었고 구교인 발루아 왕가의 족보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위그노 앙리 4세가 즉위하며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한 후에야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통일 강대국의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지대 국가들 중 상공업이 활발했던 네덜란드가 신교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스페인 호구 노릇에 신물이 나 합스부르크의 가톨릭

강요에 반발하였죠. 그들의 독립 의지는 16세기 후반 80년

전쟁으로 폭발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결실을 맺게 되죠.


그래요. 17세기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로 인해 위기를 맞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호시탐탐 합스부르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었죠. 1618년에 30년 전쟁이 터졌습니다. 80년 전쟁 중이었죠.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해요.)


30년 전쟁은 종교 개혁의 정점을 찍은 대사건이자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이었으며 유럽 최초의 국제 대전입니다. 유럽의 모든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어요. 심지어는 오스만 제국까지도.

또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죠. 자그마치 8백만 명..ㅜ


30년 전쟁의 한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이, 다른 편에는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균형을 이루었어요. (위그노들을 학살한 주제에

프랑스는 신교 진영이었죠. 국제적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요.)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라 워낙 함수 관계가

복합적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 종속적 구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는 거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제법이란 도구가

생겼거니와 이제 영지나 봉토에서 근대 국가 개념이 등장했고 각

국가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각자도생하여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둘째, 유럽의 세력 지형이 차츰 현대와 비슷하게 변화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은 정점에서 하향세로 가고 스페인도 저물어가며

새롭게 부르봉의 프랑스가 최강자 자리를 넘보게 되었어요.


영국은 내전으로 불안불안하여 전쟁에 직접 뛰어들진 못했고..

영국의 국력이 드러나는 때는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렵입니다. 17세기는 무역으로 돈벌고 청교도로 골치 아픈 중…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필두로 영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새로이

탄생합니다. 네, 이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꽤 벗어나게

되었어요. 스위스도 독립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맹활약한 스웨덴도 상당한 국익을 챙겼죠.


17세기 후반에 가서 해상 개척의 판도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영국(내전을 끝내고 명예 혁명을 완성)과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양강 구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양국

모두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박차를 가하죠.


요는, 점점 우리가 아는 현대 유럽의 국경선이나 국제 관계의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개전했지만

결과는 정치 구도와 국제 관계로 매듭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나 종교 전쟁이 절대로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며 거대한 정치 역학 관계에 광풍 같은 변혁을 몰고 온

시대 패러다임의 대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랍니다.




2003년에 나온 작은 독일 영화 루터조셉 파인즈 연기를 보며

5백 년 전 독일 제후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일계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지아코모 마이어베어는 숱한 성공작을 만들었는데 1836년

초연한 그랜드 오페라 위그노 교도가 있어요. 아래 프러덕션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 버젼인데 아예 홀로코스트 분위기로

갔네요. 종교 전쟁과 나치 탄압.. 비슷한 듯해요.



위그노 전쟁 중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대놓고 묘사한 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작 여왕 마고가 진정한 걸작일 겁니다. 아래

동영상에서 5분께부터 나오는 학살 현장 묘사는 프랑수아 뒤부아의

아래 그림과 많은 유사성이 관찰되기도 하죠. (미성년자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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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Major Incidents from European History over

International Relations Realm




국제 관계학의 역사에서 시대별 맥락을 짚을 때 반드시

검토하고 분석하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그 역사와 시기를 보면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백여 년

언저리의 간격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여 매우 흥미롭죠.


오늘은 이런 국제적 사건과 국가간 조약

역사를 요약하여 정리해 볼까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Fall of Constantinople 



1453년이 중세를 끝장 낸 연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해 서양 중세사 최고의 사건인즉슨..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한 일일테죠.

무려 2200년을 이어온 제국이 멸망한 사건이니까요.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통치의 절정을 찍고 6백 년 넘게

존속한데다 폐쇄적 기독교 문화 속에 골골하던 유럽을

아득히 초월했던 14~17세기 세계의 패권국이자

동시대 유럽 군주들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나비 효과로 지중해 동쪽 항로가

막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 일주 항로를 개척했으니

역사의 거대한 새옹지마이자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죠.

(동양의 신비… 후추를 어디서 수입하냐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항해 시대, 피렌체 등 도시 국가들의

르네상스 인문 혁명, 거기에 북독일의 종교 개혁이 바야흐로

적정 혼배합하여 유럽의 근대를 열어 젖히는 찰나였어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Peace of Augsburg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 개혁

일단락된 사건이자 루터교를 공인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신교를 인정한 계기의 바로 그 사건입니다.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맞서 전쟁하던

신교 영방국들이 페르디난트 1세와의 극적인 합의를 통해

루터교 종파를 공인한 군주간 합의 사건이라 볼 수 있어요.

(페르디난트는 카를의 동생이자 독일 대리 통치자..)


페르디난트는 당시 선제후와 농민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교세를 꺾기보다 상호 협력하여 자치를 인정하는

개혁 성향으로 독일권 제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사람..


화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개별 제후의 종교 통치권을

황제나 교황과 분리하여 최초로 인정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해당 영지의 종교를 제후가 택한 종파로 정한다는 내용이죠.


허나 루터교는 인정 받았는데 당시 더 진보적 성향이던 칼뱅

장로교 제후국들이 제외된 문제가 여전히 잔존한 상황이었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halia 



상호 경쟁하던 국가의 군주들이 독일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모여 30년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

바로 그 조약입니다. 오늘날 국제법의 효시라 하죠.

(요샌 웨스트팔리아로 부르기 시작하기도..)


1618년에 시작한 종교 전쟁 후반부 중요한 변곡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도 맞물린 17세기 최대의 사건이

바로 30년 전쟁입니다. 근대 최초의 국제전이라고 하죠.


루터와 칼뱅에서 시작한 투쟁이 130년 만에 여기까지 이른

겁니다만, 프로테스탄트 전쟁을 단순한 종교 문제로 보면

부족하고 교황과 황제 중심 거대한 국정 체계 패러다임이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용트림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신교 투쟁의 결과물이 결국 개별 제후가 다스리는 봉토의

자치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인 것에서 알 수 있죠. 이제 황제의

통치를 받는 제후의 시대가 아니라 독자적 군주가 된 겁니다.


주권, sovereignty의 개념이 본격화하고 이로 인해 절대

왕정 및 왕권 신수설이 대두되는 발판을 마련하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동인도 마련되기 시작하는 거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Peace of Utrecht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조약입니다.

생소한 전쟁일텐데 유럽 왕가 간 세력 균형전으로 이해해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지는 해’ 합스부르크

프랑스를 다스리는 ‘뜨는 해’ 부르봉 왕가가 주인공인데요.

(부르봉 킹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 확장욕 쩌는 분..)


스페인 왕위 계승전에 루이 14세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가

선순위로 떠오르는 상황을 오스트리아와 영국과 네덜란드가

막아서며 발발한 전쟁입니다. 부르봉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병합하면 견제 불가능한 거대 국가가 탄생하기 때문이죠.


의외로 (그때까지 약체로 분류되던) 영국의 견제가 제대로

먹혀 부르봉이 스페인을 계승하되 프랑스 왕위는 포기하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됩니다. — 루이 14세, 야욕 좌절…


유럽 영토에서 어느 한 나라가 잘 나가 바보짓을 벌이면

엇비슷한 국력의 나라들이 합심하여 다구리를 먹이는…

현재도 이어지는 불문률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주권에 영토 개념을 넣는 법리도 형성되었고요.




1815년,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를 패자로 공인하며

이후 전 유럽에 불어닥칠 자유주의 바람에 제동을 걸고

왕정 복귀를 천명한, 보수 반동의 대명사격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재한 걸로 유명하죠.


프랑스 대혁명 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유럽

각국에 전쟁을 벌였는데요. 역설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것은 혁명이 낳은 프랑스의 정신이었어요. 자유, 평등, 박애.


회의 대표자는 힘센 나라의 왕과 귀족이었죠.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자국에 혁명이 수입되면

꼼짝없이 목이 날아가는 분들.. 국경선과 전리품 배당을 놓고

혈안이 되어 똥고집을 부리며 진척이 더디던 중이었는데요.


보나파르트가 유배지를 탈출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라 협정서에 조인을 했다고 해요. 쌩 코메디..

(메테르니히의 댄스 파티도 찾아 보세요. 배꼽을 잡을 듯..)


이른바 유럽 협조 체제, Concert of Europe이란 국가간

공조가 명문화하여 등장한 거에요. 핵심은 위 위트레흐트 때

다구리.. 와 대동소이하고 이 시스템이 40여 년을 유지했죠.


그러나 한번 불씨를 당긴 자유주의의 대세는 거스를 수 없어요.

30년 7월 혁명(‘레미제라블’ 배경), 32년 영국 선거법 대개혁,

1848 연쇄 혁명과 공산당 선언… 이미 불길은 타오른 거죠.




1919년, 베르사유 조약 Treaty of Versailles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하고 독일의 패배를 선언하며

막대한 배상금 조건으로 두번째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독일 제국과 연합군 승전국들 사이의 조약입니다.


빈 회의로 패전국 프랑스가 실질적으로 잃은 것이 없던 데 비해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는 독일인들에게 참담한 치욕이었어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닥쳤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몰락했으며 히틀러 집권의 계기가 되었죠.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가 이 비극을 예견했다는 거 아시죠.

(이때 협상 대표단 중 일원이었다가 참다 못해 사퇴..)


특히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뻘짓은 어마어마했어요. 그의

하이라이트는 이렇다 할 강제력을 갖지 못한 국제 연맹 창설로

‘마치 무언가 해결된 듯한’ 국제 관계의 판타지를 조장한 점이죠.


장렬한 뻘짓의 대행진이 전간기 20년의 나날을 채워요.

바야흐로 한스 모겐소가 현실주의로 스타가 될 조건이 형성..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죠.


거기에 세상은 대공황의 광풍에 휩싸이고 있었고요.

이런 악조건에 어떻게 전쟁이 또 안 날 수 있겠어요.




1945년, 얄타 회담 Yalta Conference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루스벨트와 스탈린과 처칠이

모여 깡패처럼 전후 국제 질서를 결정지은 그 회담입니다.

우리나라는 여기 놀아난 직접 피해 당사자국… 아시죠?


베르사유 조약이 종전 직후 전쟁 문제를 처리하는 성격인데

반해 얄타 회담은 종전이 임박한 시점에 전후 문제를 미리

조율하는 강대국 슈퍼 파워들의 미래 회의 같은 거였죠.


이 사건의 가장 큰 상징성은 팍스 브리태니카의 레짐이 이미

저물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대항마로 소련이 등장하여

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린 실질적 계기라는 점이에요.

(실제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을 이끌어냄.)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한반도가 둘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폐해를 입어야 하는 원인을 만들었죠. 도대체 왜 때문에?!

패전국 일제가 아닌 우리가 분단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냉전이 시작하여 1989년 동유럽 혁명까지 존속해요.

하지만 이 땅의 냉전 파편은 아직도 진행 중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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