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다시 이를 해결하는
주체적인 프로타고니스트로서 원더우먼의 존재감이 부활하였다.
AA!에서 원더우먼 팬으로 하여금 가장 허탈감 느끼게 하는
대목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도대체 원더우먼이 뭘 했나'
하고 자조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을 조장한 것이다.
그러나 본작에서는 최소한 그런 자조의 순간은 없다.
나치와 친위대라는 두 안타고니스트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원더우먼이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둘째, 온전하게 작품의 흐름만 따라가도 전체 스토리의
매력을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을 만큼 밀도가 높은 플롯이다.
AA!에서는 - AT4W가 지적하기도 했지만 - 그 스토리 안에서
이야기가 제대로 설명이 되지 못하여 '지금까지 이야기는...'
하는 식으로 플롯을 설명하는 전문(Preface)이 배치되었다.
'글보다 더 친절한 것이 보통 그림일 텐데 그림의 스토리
보드가 얼마나 허접하면 이렇게 따로 설명을...?' ㅋ
구성 작가로서는 참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 이전 시리즈가 산으로 끌고 간 플롯을 역이용하여
오히려 현명하게 수습하는 성과를 도출하는 데 성공한다.
전 시리즈인 AA!는, Infinite Crisis와 2006년 Re-Launching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이어붙여 다크사이드의 지구 정복으로
발전시키는 플롯 발전과정이 사실 무리하게 변질된 결과...
...라고 본 블로거는 주장한다. 자색 광선과 히폴리타의 부활
같은 자극적인 소재를 이야기로 엮다 보니 미국 침공과 같은
설정도 튀어 나오게 된 것이건만, 사실 이 설정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다 보니 중구난방 스토리가 된 면이 없지 않다.
본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AA!가 그리도 허접하게 맺은 결론을
반박도 않고 슬기롭게 이어받아 이야기를 전개해낸 것이다.
넷째, 영화의 교차 편집 시퀀스를 보듯이 평행 배치된
두 개의 스토리 라인 설정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사실 본작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가 평행하여
중첩배열된 구조이다. 하나는 오늘날의 이야기로서
나치가 (AA!에서 다른 차원으로 쫓겨간) 테미스키라를
침공하는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약 3천년 전에
히폴리타의 친위대가 여왕을 배신하는 이야기이다.
각 챕터의 서두에 오늘날 본 줄거리를 논하기 전에
과거의 연관 줄거리를 함께 서술해 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결말에서 두 줄거리가 만나는 과정을 목도케
하는, 대단히 지적인 즐거움을 주는 구조인 셈이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보여준 교차편집과 비슷하다.
이렇게 시몬의 투입 이후 확연히 달라진 플롯으로 인해
원더우먼은 더욱 흥미진진한 코믹스가 되었는데...
한 가지, 본 블로거 개인적으로는...
원더우먼의 신화성에 중점을 두기 위해
중간에 각 민족의 고대 신을 순회하는 줄거리는
신화의 현대적 각색이라는 목적의식과 멀어져
자칫 이야기가 미궁에 빠질 수도 있었던
본작의 유일한 흠결이 아니었나 싶다.
AA!의 엄청난 설정에 비해 용두사미 격으로
사그라든 스토리의 위력에 실망한 코믹스 팬이라면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홀가분하게 시원한 액션 스토리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본작 The Circle이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사족이지만, 국내 정기발간될 경우
'The Circle'을 어떻게 반역할 수 있을지가 참 관심사이다.
스토리 안에서는 여러 가지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한데
불건전한 반역의 무리가 모인 '집단'의 뜻이 가장 강하고
나쁜 '인연의 고리'가 역사에서 반복된다는 뜻도 풍긴다.
가장 근접한 번역이라면 '악연과 반역' 정도일까...? ㅋ
'반역자들', '악연의 사슬'도 있다...ㅎ 어쨌든...
해외에서도 평이 좋은 작품이니
관심 있으신 분들에게는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