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블로그 이미지
recently working on music industry and history of rock music, with past history of writing on political science, international relations, world politics, political economy and development macroeconomics ...
잔규네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6)
political economics (76)
rock vocalists (23)
other stories (47)

Recent Post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1. 2020.07.25
    공부가 제일 재밌었어요,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삶
  2. 2018.10.31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II : 종교 개혁




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of Decent Deeds and Good Words










오늘날 서방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기독교 전통 문화의

배경을 업고 현대의 국가를 경영하고 있고, 그런 종교적

바탕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칼뱅주의 교리의

그늘 밑에서 직간접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또한 서양 근대사의 정신을 일군 철학자와 과학자, 지성인이

칼뱅이 다져놓은 사회의 기반에서 성장했거나 칼뱅과 같은

시대의 사상 체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자신들의

업적을 거양한 사람들이기도 해요.



칼뱅이야말로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일지도

몰라요. 살아생전에 종교 개혁의 모범적인 이상형을 직접

구현해 보여주었고 죽은 이후 그의 교리에 따라 기독교

체계가 통째로 재편되기도 했으니까요.



장 칼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개인사는 의외로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아 아직도 연구와 논란이 진행 중이라고 해요.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포장하는 것을 칼뱅 자신이

스스로 그토록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하죠.



심지어는 그의 묘지 위치조차도 현재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남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엄격했던

사람의 인생이 보여줄 수 있는 일면일 거에요.



서슬퍼런 통치 사상가로서의 일면에 더해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행동 강령을 평생 동안 유지한 위인이기에 칼뱅의

인생을 짧게나마 들여다 볼 의의는 충분한 것 같아요.





Jean Calvin (1509~1564, France)






1509년 프랑스 왕국에서 교구의 행정관이던 아버지 밑에

Jehan Cauv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어요. 교구에서 일을

할 때 아버지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지만 교회와

마찰이 생긴 후엔 법률가로 진로를 바꾸게 했다죠.



파리 대학과 오를레앙 대학에서 주로 법률을 전공했는데

몽테귀 칼리지에선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해요. 우신예찬을 쓴 종교 개혁가이죠.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오를레앙이나 부르주에서 공부하던

1530년대 초반에 루터교의 영향을 받아 개종했다는

가설이 가장 널리 지지를 받는 편이에요.



파리 대학 학장 취임 건으로 개신교도 니콜라 콥을 도우면서

종교 개혁가란 낙인이 찍혔고 덕분에 프랑스 내에선 더 이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도망자 신분이 되어 버려요.



이후엔 거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스트라스부르와 바젤

등지를 떠돌며 신학을 연구하고 교리서를 저작하는데

시간을 쏟습니다.



1535년쯤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초판의 집필을 완료했고

이듬해 바젤에서 출간해요. 바로 기독교 강요, the Institutes

라고 불리는 개신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이랍니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Guillaume Farel (1489~1565, France)






출간 직후 그가 아주 잠시 잠깐 제네바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을 만나요. 제네바의 급진적

종교 개혁가 기욤 파렐이랍니다.



파렐은 스무 살 정도 연배가 앞서고 대단히 과격한 방식으로

제네바 전체의 개종을 주도한 사람이에요. 칼뱅과는 평생

죽기 전까지 인연을 맺게 되는 사이죠.



제네바 공화국의 개종을 처음부터 칼뱅이 주도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초기 작업은 파렐과 일부

제네바 시민이 자생적으로 주도한 것이 맞아요.



그 와중에 바젤에서 책을 출간하고 이미 이름이 알려진 칼뱅을

파렐이 만나게 되었는데, 거의 반협박 비슷하게 신의 이름으로

제네바에서의 소명을 외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죠.ㅎ



칼뱅이 이런 파렐을 인간적으로 좋아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파렐의 말을 듣고 신의 부름을 느꼈다며 스스로 기록하기도 했고

이후 죽기 몇 일 전까지도 파렐과 친분을 유지했으니 이래저래

큰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해요.



기욤 파렐이 집단 행동을 과격하게 조직하는데 능한 수완가라면

장 칼뱅은 체계 수립과 장기 계획 입안에 능한 혁명적 사상가

할 수 있겠죠. 그만큼 두 사람의 성향은 다릅니다.



결국 제네바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을 선언하고 서너 달 후

칼뱅이 제네바로 넘어와 파렐을 돕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스위스와 제네바의 정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아직 현대적 독립국인 스위스 연방국이 등장하기 전인 것은

대략 감으로 아시겠죠.. (현대 스위스 건국은 19세기 중반)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영향 하에 있었지만

지형이 험하기도 하거니와 스위스 용병들이 제국 정책에

협조적이기도 해서 제네바, 취리히, 베른, 바젤 등 사실상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느슨하게 연합을 유지하고 있었죠.

(옛 스위스 연방, old confederacy.. 란 연합체)



제네바의 가톨릭 교구는 사보이 공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어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일부 지역 판도를 형성한

당시 남유럽의 봉건국이죠.



칼뱅 부임 직전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했다는 말은 바로 이

사보이 교구 소속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을 내쫓았다는 뜻..



제네바 시민의 봉기 3년 전에는 베른이 개종 전례를 남겼고

덕분에 제네바는 베른의 도움을 받지만 정치적 입김도

좌지우지되던 형국이었죠.



칼뱅이 부임했을 때 아직 과도기인지라 혼란한 지경이었어요.

칼뱅이 내놓은 개혁안에 시민들의 반발도 있었고 결국 2년이

채 못 되어 파렐과 칼뱅 등은 추방 당합니다.










다른 제안을 받아들여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자유시로 가서

목회자 생활을 합니다. 오늘날 프랑스 땅인 이곳은 당시엔

신성 로마 제국 내 자치권이 보장되는 도시였어요.



대략 4~5백 명 정도의 프랑스 출신 신교도 집단을 이끌었고

이곳에서 칼뱅의 삶은 여러 가지로 발전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고요.



기독교 강요는 한 번에 완성되어 나온 저작이 아니에요. 여러

차례 개작과 증보를 거쳐 당시 세상에 나온 교리를 집대성한

책이고 스트라스부르에선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강하죠.

초판 6장 뿐이었다가 17장으로 대폭 늘어납니다.



1540년엔 결혼도 했어요. 귀족 자제 등 여러 군데서 혼처가

들어온 모양인데 인연은 가까이 있었다고 하네요. 병으로

세상을 뜬 친구의 미망인 이델레트 드 뷔르가 주인공이고

칼뱅은 초혼이지만 아내가 데려온 두 자식도 잘 키우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그의 행적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칼뱅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연구하는 시간을 가장

사랑한 공부벌레였답니다. 공부에 몰두해 여러 편의 저작을

남기고 결혼도 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행복했어요.



이델레트는 조용한 조력자였다고 스스로 기록했어요. 원만한

결혼 생활인 것 같지만 둘 사이 새로 태어난 자식이 일찍 죽고

아내도 얼마 안 있어 뒤를 따라갔죠. 칼뱅에게 잠깐 몇 년

머문 인생의 낙이었어요. 전처가 남긴 자식은 성실하게

키우지만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복을 타고나진 못했죠.





Idelette de Bure






그 사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은밀한 서신이 계속 답지했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칼뱅 신학 체계가 명답이었음을 깨달은

거죠. 행복하게 살던 중이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었어요.



칼뱅 개혁안대로 교회법을 입안하겠다는 공식 답변을 받고

나서야 그는 제네바의 청빙을 받아들여 이삿짐 쌉니다. 이미

파렐은 뇌샤텔에서 목사 생활 중이어서 이번엔 혼자서…



이후 여생을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서 마무리했어요. 인생 후반기

제네바에서의 삶 중 가장 중요한 일을 꼽자면 교회법과 교회법정,

세르베투스 그리고 제네바 학교 정도…



다른 사안은 매우 복잡한 상황과 행적인지라 다음 포스팅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여기선 말년의 칼뱅 업적 최고봉인 학교

설립 건을 설명할께요.



1555년 5월이 되어서야 칼뱅을 괴롭히던 제네바의 정적들이

사라지고 평화를 맞지만 이 즈음 건강에 무리가 와요. 당연하죠.

칸트 뺨칠 정도로 규칙적인 시간표로 설교와 연구에 힘을

쏟으면서도 하루 한 끼 먹고 버티는 삶을 지속했다고 하니…



제네바 최고의 세력가였지만 정작 아직 시민권이 없었는데

몇 년 후 시민권도 얻게 되고.. 사실 스트라스부르에서 옮겨

올 때부터 칼뱅에겐 오랜 숙원 사업이 있었죠.



학교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개신교가 대를 넘겨 사회에 자리

잡으려면 교육의 힘이 없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 거죠. 하지만

돈도 많이 드는 일이고 기금이 축적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죠.










1559년, 드디어 제네바 아카데미란 이름으로 초급 학교가

개교합니다. 초대 교장은 물론 칼뱅. 어린이들에게 개신교

의식과 함께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 문학 등을 가르쳤어요.



이후 중등 학교로 발전했고 그가 사망한 해엔 드디어 대학교가

문을 열었어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문 제네바 대학교

바로 이 학교에요.



신앙에 있어 엄격한 칼뱅이었지만 학문의 자세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개방적이었어요. 당시 유행하던 다방면의 학문을

차별없이 가르쳤다 하고 각국에서 모인 유학생 1천 5백 명이

신학과 법학 중 택일하여 전공하는 방식이었다 하죠.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한 그는 죽기 몇 달 전부터 지인에게

인사를 다니며 삶을 정리했다고 해요. 사망 8일 전에는

마지막으로 파렐도 만났죠. 1564년에 그는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어요. 거인의 평화로운 안식인 거죠.



현대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해 장 칼뱅의 삶은 조용했고

그닥 극적인 장면도 많지 않아요. 북독일 스타 마르틴

루터의 화려한 행적과 여러 모로 비교되죠.

(그 때문인지 영화화 예도 거의 없어요.)



단지 평범하게 책과 글쓰기에 몰두하며 신의 진리를 좇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사람. 정쟁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큰

잡음 하나 없이 점잖게 격조있는 인생을 산 어른인 거죠.



그가 남긴 사회 교육의 미덕을 좇아 오늘날 많은 개신교

종파들이 전 세계에 대학을 설립해 수많은 인재를

키웠어요. 하버드 대학교를 필두로 하여..



근대 신학의 공부벌레이자 유럽계 백인 기독교 문화의

어르신, 장 칼뱅의 사상 세계는 다음 포스팅에서

짚고 가기로 해요.



아래 간략한 동영상으로 그의 인생을 복습해봐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I

Reformation and Wars of Religion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I. 종교 개혁 Reformation 



종교 개혁은 중세 유럽인의 정신과 생활을 장악하던 가톨릭의

구체제가 신교라는 교파 분리로 도전받은 종교 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국정의 관리 행정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근대적 국제 질서를 다진 변혁으로 분석할 여지가 더 크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바..

첫째, 기독교 체제의 구속을 탈피하고 난 이후에야 유럽인들이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자유를 얻어 정치 제도를 일신하고 현재의

민주정 체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요.


둘째, 현대인들의 상상과 달리 중세의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 기호

차원의 종교가 아니라 지역 교구 차원에서 신도를 관리하며 국가

행정 체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사 국정 시스템의 역할을

해냈는데 종교 개혁으로 이것이 통째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혁 운동의 실제 모습이란 것이 현대인들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회 일부 종교인들의 평화적 활동으로 점철되지 않았고,

제후와 영지의 거주민이 전력을 다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 정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시발점으로 1517년의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꼽는 일은

오랜 통설입니다만. 그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한 존 위클리프가 있었고 1415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잡혀 화형 당한 얀 후스 등이 있었죠.


독일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문에 붙인 행위는 일종의 대자보 같은

거고요. 오늘날로 치면 기자 불러 발표문 읽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정치 사회적 의사소통 행위로 보면 됩니다.


취리히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미 1516년부터 스위스 용병의

활동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1523년 시의회에서 67개 신조

주장하며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어 그의 가치가 늦게 발견된 거지요.


요절해 활동이 짧은 츠빙글리나 농민 전쟁에 반대한 루터와 달리

진정한 교회 개혁장 칼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신교 교리가

정교 일치의 신정 자치제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제네바에서 몸소

보여줬고 장로교 체계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교 운동에 대한 영국식 반응이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인데

성공회란 것이 사실상 교리에선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긴 해요.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였던 헨리 튜더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교회법상 적법한 이혼으로 후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죠.


(네, 현대 국가의 성문법이 해결할 생활의 영역을 교회법

민간의 관습법을 해석하여 푸는 사회가 바로 중세랍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 칼뱅식 청교도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후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

흐름에 큰 돌발 변수로 작용할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체제를 밀어 붙이다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슈말칼덴 전쟁

휩싸이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제후 및

봉토의 루터교 선택권을 인정하며 항복 선언을 합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위그노 전쟁의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었고 구교인 발루아 왕가의 족보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위그노 앙리 4세가 즉위하며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한 후에야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통일 강대국의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지대 국가들 중 상공업이 활발했던 네덜란드가 신교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스페인 호구 노릇에 신물이 나 합스부르크의 가톨릭

강요에 반발하였죠. 그들의 독립 의지는 16세기 후반 80년

전쟁으로 폭발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결실을 맺게 되죠.


그래요. 17세기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로 인해 위기를 맞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호시탐탐 합스부르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었죠. 1618년에 30년 전쟁이 터졌습니다. 80년 전쟁 중이었죠.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해요.)


30년 전쟁은 종교 개혁의 정점을 찍은 대사건이자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이었으며 유럽 최초의 국제 대전입니다. 유럽의 모든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어요. 심지어는 오스만 제국까지도.

또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죠. 자그마치 8백만 명..ㅜ


30년 전쟁의 한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이, 다른 편에는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균형을 이루었어요. (위그노들을 학살한 주제에

프랑스는 신교 진영이었죠. 국제적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요.)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라 워낙 함수 관계가

복합적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 종속적 구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는 거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제법이란 도구가

생겼거니와 이제 영지나 봉토에서 근대 국가 개념이 등장했고 각

국가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각자도생하여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둘째, 유럽의 세력 지형이 차츰 현대와 비슷하게 변화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은 정점에서 하향세로 가고 스페인도 저물어가며

새롭게 부르봉의 프랑스가 최강자 자리를 넘보게 되었어요.


영국은 내전으로 불안불안하여 전쟁에 직접 뛰어들진 못했고..

영국의 국력이 드러나는 때는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렵입니다. 17세기는 무역으로 돈벌고 청교도로 골치 아픈 중…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필두로 영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새로이

탄생합니다. 네, 이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꽤 벗어나게

되었어요. 스위스도 독립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맹활약한 스웨덴도 상당한 국익을 챙겼죠.


17세기 후반에 가서 해상 개척의 판도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영국(내전을 끝내고 명예 혁명을 완성)과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양강 구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양국

모두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박차를 가하죠.


요는, 점점 우리가 아는 현대 유럽의 국경선이나 국제 관계의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개전했지만

결과는 정치 구도와 국제 관계로 매듭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나 종교 전쟁이 절대로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며 거대한 정치 역학 관계에 광풍 같은 변혁을 몰고 온

시대 패러다임의 대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랍니다.




2003년에 나온 작은 독일 영화 루터조셉 파인즈 연기를 보며

5백 년 전 독일 제후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일계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지아코모 마이어베어는 숱한 성공작을 만들었는데 1836년

초연한 그랜드 오페라 위그노 교도가 있어요. 아래 프러덕션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 버젼인데 아예 홀로코스트 분위기로

갔네요. 종교 전쟁과 나치 탄압.. 비슷한 듯해요.



위그노 전쟁 중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대놓고 묘사한 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작 여왕 마고가 진정한 걸작일 겁니다. 아래

동영상에서 5분께부터 나오는 학살 현장 묘사는 프랑수아 뒤부아의

아래 그림과 많은 유사성이 관찰되기도 하죠. (미성년자 주의)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