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블로그 이미지
recently working on music industry and history of rock music, with past history of writing on political science, international relations, world politics, political economy and development macroeconomics ...
잔규네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6)
political economics (76)
rock vocalists (23)
other stories (47)

Recent Post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1. 2020.07.25
    공부가 제일 재밌었어요,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삶
  2. 2018.11.22
    근대 국제 관계 질서의 출발점, 유럽의 30년 전쟁
  3. 2018.11.17
    근대 최초의 대규모 국제전, 유럽의 30년 전쟁
  4. 2018.10.31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II : 종교 개혁




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of Decent Deeds and Good Words










오늘날 서방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기독교 전통 문화의

배경을 업고 현대의 국가를 경영하고 있고, 그런 종교적

바탕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칼뱅주의 교리의

그늘 밑에서 직간접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또한 서양 근대사의 정신을 일군 철학자와 과학자, 지성인이

칼뱅이 다져놓은 사회의 기반에서 성장했거나 칼뱅과 같은

시대의 사상 체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자신들의

업적을 거양한 사람들이기도 해요.



칼뱅이야말로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일지도

몰라요. 살아생전에 종교 개혁의 모범적인 이상형을 직접

구현해 보여주었고 죽은 이후 그의 교리에 따라 기독교

체계가 통째로 재편되기도 했으니까요.



장 칼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개인사는 의외로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아 아직도 연구와 논란이 진행 중이라고 해요.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포장하는 것을 칼뱅 자신이

스스로 그토록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하죠.



심지어는 그의 묘지 위치조차도 현재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남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엄격했던

사람의 인생이 보여줄 수 있는 일면일 거에요.



서슬퍼런 통치 사상가로서의 일면에 더해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행동 강령을 평생 동안 유지한 위인이기에 칼뱅의

인생을 짧게나마 들여다 볼 의의는 충분한 것 같아요.





Jean Calvin (1509~1564, France)






1509년 프랑스 왕국에서 교구의 행정관이던 아버지 밑에

Jehan Cauv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어요. 교구에서 일을

할 때 아버지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지만 교회와

마찰이 생긴 후엔 법률가로 진로를 바꾸게 했다죠.



파리 대학과 오를레앙 대학에서 주로 법률을 전공했는데

몽테귀 칼리지에선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해요. 우신예찬을 쓴 종교 개혁가이죠.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오를레앙이나 부르주에서 공부하던

1530년대 초반에 루터교의 영향을 받아 개종했다는

가설이 가장 널리 지지를 받는 편이에요.



파리 대학 학장 취임 건으로 개신교도 니콜라 콥을 도우면서

종교 개혁가란 낙인이 찍혔고 덕분에 프랑스 내에선 더 이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도망자 신분이 되어 버려요.



이후엔 거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스트라스부르와 바젤

등지를 떠돌며 신학을 연구하고 교리서를 저작하는데

시간을 쏟습니다.



1535년쯤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초판의 집필을 완료했고

이듬해 바젤에서 출간해요. 바로 기독교 강요, the Institutes

라고 불리는 개신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이랍니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Guillaume Farel (1489~1565, France)






출간 직후 그가 아주 잠시 잠깐 제네바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을 만나요. 제네바의 급진적

종교 개혁가 기욤 파렐이랍니다.



파렐은 스무 살 정도 연배가 앞서고 대단히 과격한 방식으로

제네바 전체의 개종을 주도한 사람이에요. 칼뱅과는 평생

죽기 전까지 인연을 맺게 되는 사이죠.



제네바 공화국의 개종을 처음부터 칼뱅이 주도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초기 작업은 파렐과 일부

제네바 시민이 자생적으로 주도한 것이 맞아요.



그 와중에 바젤에서 책을 출간하고 이미 이름이 알려진 칼뱅을

파렐이 만나게 되었는데, 거의 반협박 비슷하게 신의 이름으로

제네바에서의 소명을 외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죠.ㅎ



칼뱅이 이런 파렐을 인간적으로 좋아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파렐의 말을 듣고 신의 부름을 느꼈다며 스스로 기록하기도 했고

이후 죽기 몇 일 전까지도 파렐과 친분을 유지했으니 이래저래

큰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해요.



기욤 파렐이 집단 행동을 과격하게 조직하는데 능한 수완가라면

장 칼뱅은 체계 수립과 장기 계획 입안에 능한 혁명적 사상가

할 수 있겠죠. 그만큼 두 사람의 성향은 다릅니다.



결국 제네바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을 선언하고 서너 달 후

칼뱅이 제네바로 넘어와 파렐을 돕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스위스와 제네바의 정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아직 현대적 독립국인 스위스 연방국이 등장하기 전인 것은

대략 감으로 아시겠죠.. (현대 스위스 건국은 19세기 중반)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영향 하에 있었지만

지형이 험하기도 하거니와 스위스 용병들이 제국 정책에

협조적이기도 해서 제네바, 취리히, 베른, 바젤 등 사실상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느슨하게 연합을 유지하고 있었죠.

(옛 스위스 연방, old confederacy.. 란 연합체)



제네바의 가톨릭 교구는 사보이 공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어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일부 지역 판도를 형성한

당시 남유럽의 봉건국이죠.



칼뱅 부임 직전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했다는 말은 바로 이

사보이 교구 소속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을 내쫓았다는 뜻..



제네바 시민의 봉기 3년 전에는 베른이 개종 전례를 남겼고

덕분에 제네바는 베른의 도움을 받지만 정치적 입김도

좌지우지되던 형국이었죠.



칼뱅이 부임했을 때 아직 과도기인지라 혼란한 지경이었어요.

칼뱅이 내놓은 개혁안에 시민들의 반발도 있었고 결국 2년이

채 못 되어 파렐과 칼뱅 등은 추방 당합니다.










다른 제안을 받아들여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자유시로 가서

목회자 생활을 합니다. 오늘날 프랑스 땅인 이곳은 당시엔

신성 로마 제국 내 자치권이 보장되는 도시였어요.



대략 4~5백 명 정도의 프랑스 출신 신교도 집단을 이끌었고

이곳에서 칼뱅의 삶은 여러 가지로 발전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고요.



기독교 강요는 한 번에 완성되어 나온 저작이 아니에요. 여러

차례 개작과 증보를 거쳐 당시 세상에 나온 교리를 집대성한

책이고 스트라스부르에선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강하죠.

초판 6장 뿐이었다가 17장으로 대폭 늘어납니다.



1540년엔 결혼도 했어요. 귀족 자제 등 여러 군데서 혼처가

들어온 모양인데 인연은 가까이 있었다고 하네요. 병으로

세상을 뜬 친구의 미망인 이델레트 드 뷔르가 주인공이고

칼뱅은 초혼이지만 아내가 데려온 두 자식도 잘 키우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그의 행적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칼뱅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연구하는 시간을 가장

사랑한 공부벌레였답니다. 공부에 몰두해 여러 편의 저작을

남기고 결혼도 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행복했어요.



이델레트는 조용한 조력자였다고 스스로 기록했어요. 원만한

결혼 생활인 것 같지만 둘 사이 새로 태어난 자식이 일찍 죽고

아내도 얼마 안 있어 뒤를 따라갔죠. 칼뱅에게 잠깐 몇 년

머문 인생의 낙이었어요. 전처가 남긴 자식은 성실하게

키우지만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복을 타고나진 못했죠.





Idelette de Bure






그 사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은밀한 서신이 계속 답지했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칼뱅 신학 체계가 명답이었음을 깨달은

거죠. 행복하게 살던 중이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었어요.



칼뱅 개혁안대로 교회법을 입안하겠다는 공식 답변을 받고

나서야 그는 제네바의 청빙을 받아들여 이삿짐 쌉니다. 이미

파렐은 뇌샤텔에서 목사 생활 중이어서 이번엔 혼자서…



이후 여생을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서 마무리했어요. 인생 후반기

제네바에서의 삶 중 가장 중요한 일을 꼽자면 교회법과 교회법정,

세르베투스 그리고 제네바 학교 정도…



다른 사안은 매우 복잡한 상황과 행적인지라 다음 포스팅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여기선 말년의 칼뱅 업적 최고봉인 학교

설립 건을 설명할께요.



1555년 5월이 되어서야 칼뱅을 괴롭히던 제네바의 정적들이

사라지고 평화를 맞지만 이 즈음 건강에 무리가 와요. 당연하죠.

칸트 뺨칠 정도로 규칙적인 시간표로 설교와 연구에 힘을

쏟으면서도 하루 한 끼 먹고 버티는 삶을 지속했다고 하니…



제네바 최고의 세력가였지만 정작 아직 시민권이 없었는데

몇 년 후 시민권도 얻게 되고.. 사실 스트라스부르에서 옮겨

올 때부터 칼뱅에겐 오랜 숙원 사업이 있었죠.



학교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개신교가 대를 넘겨 사회에 자리

잡으려면 교육의 힘이 없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 거죠. 하지만

돈도 많이 드는 일이고 기금이 축적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죠.










1559년, 드디어 제네바 아카데미란 이름으로 초급 학교가

개교합니다. 초대 교장은 물론 칼뱅. 어린이들에게 개신교

의식과 함께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 문학 등을 가르쳤어요.



이후 중등 학교로 발전했고 그가 사망한 해엔 드디어 대학교가

문을 열었어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문 제네바 대학교

바로 이 학교에요.



신앙에 있어 엄격한 칼뱅이었지만 학문의 자세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개방적이었어요. 당시 유행하던 다방면의 학문을

차별없이 가르쳤다 하고 각국에서 모인 유학생 1천 5백 명이

신학과 법학 중 택일하여 전공하는 방식이었다 하죠.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한 그는 죽기 몇 달 전부터 지인에게

인사를 다니며 삶을 정리했다고 해요. 사망 8일 전에는

마지막으로 파렐도 만났죠. 1564년에 그는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어요. 거인의 평화로운 안식인 거죠.



현대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해 장 칼뱅의 삶은 조용했고

그닥 극적인 장면도 많지 않아요. 북독일 스타 마르틴

루터의 화려한 행적과 여러 모로 비교되죠.

(그 때문인지 영화화 예도 거의 없어요.)



단지 평범하게 책과 글쓰기에 몰두하며 신의 진리를 좇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사람. 정쟁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큰

잡음 하나 없이 점잖게 격조있는 인생을 산 어른인 거죠.



그가 남긴 사회 교육의 미덕을 좇아 오늘날 많은 개신교

종파들이 전 세계에 대학을 설립해 수많은 인재를

키웠어요. 하버드 대학교를 필두로 하여..



근대 신학의 공부벌레이자 유럽계 백인 기독교 문화의

어르신, 장 칼뱅의 사상 세계는 다음 포스팅에서

짚고 가기로 해요.



아래 간략한 동영상으로 그의 인생을 복습해봐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Thirty Years’ War: International Relations Rise




30년 전쟁은 백여 년을 끌어온 종교 개혁을 일단락 짓고

유럽 각 나라의 세력 구도를 새롭게 재편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국제, international.. 국가 간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봉토와 영지 중심의 중세 시대 정치를 종식하고 영토 개념의

근대 국가가 정치의 주체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international 단어 자체는 제레미 벤담이 18세기 말에

처음 만들었어요. ‘국제’라는 한자어 정착은 19세기 후반

일본의 번역가들이 도입했고 그 전에 중국에는 ‘만국’이란

용어가 더 빈번하게 쓰였죠.


구교-신교의 대립을 바탕으로 종교 전쟁에서 시작했지만

국제 정치의 역학 구도에 더 큰 영향을 주며 종료했다는

점이 큰 핵심일 것 같습니다.


30년 전쟁 이후에도 종교적 박해는 빈번하게 일어났으니

종교 개혁을 끝낸 건 아닙니다. 여러 종파 가운데 루터교를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칼뱅교를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공인하게 된 것 뿐이죠.


그렇지만 로마 가톨릭 교황령을 정점으로 떠받드는 수직적

햐향식 신정 정치 체제가 붕괴한 것, 이것만은 사실입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국가를 대체할 유사 국정 시스템도

아니고.. 나라의 역할은 이제부터 나라가 하겠죠.


사실 중세의 유럽은 어떤 나라가 정치의 주체가 아니고

가문이 중심이라 할 수 있죠. 어떤 개인은 그 가문이 소유한

봉토에 속해 신분상의 제약을 받는 처지에 불과했습니다.


합스부르크니 부르봉이니 하는 왕가가 정치 주체로 등장하는

추세가 30년 전쟁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화하게 되고 이 역할을

대체하여 정치 주체로서 주권을 행사하는 국가란 개념이

자리를 차지하는 형식으로 변혁을 맞는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 주권이나 국왕의 대권 같은 개념도 이때 무렵부터

나타나고 있었고 그 이전에는 이런 관념의 정의가 불필요했죠.

군주의 지위는 날 때부터 정해진 것이니 누가 토를 달겠어요.


주권의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현상은 곧 봉건적 통치권이

서서히 약화하고 근대 공화주의 사상이 형성될 바탕이 차츰

형성되고 있음을 반증하는 거랍니다.




오늘날 보수적인 국제법학에서 국제법의 주체로 주권을 가진

국가만을 상정하는 전통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고

그렇기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국제법의 효시로 삼는 것입니다.


이런 근대적 법리를 완성한 사람은 조약 체결 3년 전 사망할

때까지 네덜란드에서 법률가로 활동한 휴고 그로티우스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없어도 웨스트팔리아를

사상적으로 이끈 영도자라고 칭송하는 바로 그 인물이랍니다.


참고로 주권의 개념이 등장했지만 영토의 개념까지는 아니에요.

국제 조약에 영토 개념이 가미되기 시작한 계기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인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꼽습니다.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근대 국가란 것이 정치적으로나 법리적으로나

실체를 정립하게 되고 여기에다가 19세기 이탈리아 및 독일의

통일로 고개를 든 민족주의 바람까지 더하면, 그제서야 대략

현대에 흔히 느낄 수 있는 민족 국가의 개념에 가까와집니다.




이렇게 30년 전쟁을 계기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현대 유럽

국가의 원형이 이 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함을 확인할 수 있죠.

정권 간의 세력 구도가 엄청난 변화를 맞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신성 로마 제국이 사실상 해체되었다는 겁니다.

중세를 지배한 로마 + 기독교의 시스템이 붕괴한 거죠.

제국이 다스리던 독일 지역은 3백 개가 넘는 영방 국가로서

각자의 자치권을 인정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독일 땅이 전쟁으로 철저하게 유린당한 뒤죠.

인구 기반이 사라졌다는 것은 경제 활동과 총생산의 근간이

무너졌다는 거고요. 1871년 통일할 때까지 독일은 유럽

정치 무대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힘을 쓰지 못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린 스페인도 하락세에 들어갑니다.

카를 5세 시절부터 조짐이 보이긴 했죠. 지리상 발견에만

기대기에 신흥 강국이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빠르고요.


스페인 육군의 전통적 전술이 무너진 것도 하락세에

한 몫을 차지했어요. 무적함대의 유명세도 이미

16세기에 볼장 다 본 터였습니다.


두 나라를 통치한 합스부르크는 이제 유럽의 종이 호랑이로

전락합니다. 대신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빠르게 대체합니다.

(합스부르크 통치 지역은 지금의 오스트리아-헝가리.)


30년 전쟁 막판에 루이 14세도 즉위했거니와 이제 프랑스

절대 왕정의 호시절만 남아 있죠. 이때까지 영국과 러시아는

아직 국내외 사정으로 정신 못 차리던 때입니다.


프랑스 북동부 전략적 요충지(이면서 20세기엔 자원의 보고로

급부상할) 알자스-로렌 지방이 프랑스에 거의 넘어옵니다.

독일 경제도 완전히 붕괴했으니 이제부터 프랑스로선

최소한 뒷마당 걱정은 면하게 된 셈…




30년 전쟁으로 피어난 새 강호는 북구의 스웨덴입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은 스웨덴의 사자왕으로 불려요.

애초에 덴마크-노르웨이와 북해 패권을 놓고 대립했는데

이제 30년 전쟁에서 덴마크를 눌러 버렸어요.


덴마크-노르웨이는 16세기에 형성된 동군 연합국입니다.

30년 전쟁 초기엔 신교 동맹에 잘 붙었는데 나중에 황제

편으로 변절하여 스웨덴에 깨지는 불운이...


영국은 동맹까진 참여했는데 1642년에 영국 내전이 발발하며

주춤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은 약

60여 년이 흐른 후. 17세기말 명예 혁명을 완수하며 내홍을

딛고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아직 중앙 정치 무대에 뛰어들기 전이고

대개 유럽 국가들은 미개한 저개발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죠.

러시아 국력의 폭발은 18세기초 표트르 대제 때부터입니다.

30년 전쟁 때는 스웨덴에 밀려 기싸움 중이었어요.


러시아와 전쟁 중이고 스웨덴 기에 눌리던 동유럽의 나라 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있어요. 종교 전쟁의 광풍을

슬기롭게 피했고 거국적인 관용의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어낸

흔치 않은 나라죠. 30년 전쟁에선 오스만 제국을 견제했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나라들이 이때 독립하여 국체를 형성했어요.

대표적으로 포르투갈, 스위스, 그리고 네덜란드.


포르투갈은 과거에 국왕이 전사하는 바람에 혈통이 끊겨

스페인에 병합되었는데 30년 전쟁 말미에 다시 독립했어요.


스위스도 합스부르크에 예속은 했지만 실상은 그전부터

느슨한 국가 연합 형태로 독립국이나 다름 없었고 국민들

상당수가 용병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었는데 합스부르크가

30년 전쟁에 지면서 정식 독립국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종교 전쟁의 하이라이트이자 진정한 독립국은 네덜란드겠죠.

오랫동안 스페인 제국에 삥뜯기는 영지 신세로 이를 바득바득

갈며 지내다가 1568년부터 독립 전쟁을 벌이고 있었어요.


종교 개혁의 문파가 크게 루터와 칼뱅으로 나뉘지만 까놓고 말해

두 종파의 성향은 극과 극이에요. 루터교는 가톨릭 교리를 상당히

수용하고 정치적으로도 황제 중심의 보수 성향을 띱니다.


당시 진정한 급진 세력은 칼뱅교였어요. 청교도들 경건주의에서

보듯이 교리도 훨씬 원론적이고 황제권 같은데 질색하는 정치

성향이었죠. 거기다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는 경제 철학으로

네덜란드 상인 계급이 일찍부터 받아들여 장악하고 있었어요.


30년 전쟁의 네덜란드 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고

충분히 독립을 인정받을 만한 정치적 지분을 확보했어요.

그 결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합니다.


17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어 대서양 무역 항로를 두고

영국과 대일전을 벌여 양대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는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 공화국입니다. 근대 공화주의

정신을 대변하는 역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신성 로마 제국의 구체제에서 시작하여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끝을 맺으며 봉건주의를 종식하고 근대의 문턱을 형성한

사건, 바로 30년 전쟁이었습니다.


바야흐로 국제 정치국제 관계학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아래는 찾아본 중에 가장 짧으면서도 비교적 상세한

교육용 개인 동영상입니다.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Thirty Years’ War: How Battles Began and Ended




한국에서 의외로 잘 모르는 채로 학교를 졸업하는 분들이 많아

서양사나 국제 관계를 이해할 때 애먹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유럽의 역사가 30년 전쟁 전후로 나뉜다는 관점도 있고 실제로

현대 세계사에도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요. 동양 역사와 굳이

비교하면 아편 전쟁급…? 수당 시대를 무너뜨린 안사의 난,

한족 마지막 통일 국가를 무너뜨린 청조 건국에 견줄 수도..


동학 농민 전쟁이나 실학 운동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지만

외국인에게 이해시키려면 어렵잖습니까. 서양 유럽계 백인들에겐

이와 비슷한 정도로 패러다임 전환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에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의 원래 직업이 군인인데

그가 젊은 시절 30년 전쟁에 참전해 야영하며 인생을 바꾼

꿈을 꾸고 철학자가 되었다죠.


천체 역학의 창시자 요하네스 케플러는 말년에 30년 전쟁으로

삶의 터전이 폐허가 되어 버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수많은 사람이 이런 피해에 시달렸을 거에요.




1618년에서 1648년까지 30년 내내 전쟁을 한 건 아니고

보헤미아,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스웨덴 등 대략 네 개의

시기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어요.


1618년경은 이미 네덜란드에서 80년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이었고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랜 영지였던

네덜란드가 독립 전쟁을 벌였다는 뜻이죠.


이는 곧 15~16세기 최강국이던 에스파냐의 위세가 점점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제국 곳곳에서 균열이

커지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그 신호탄이며 30년 전쟁이

결정타를 먹였다고 볼 수 있죠.


16세기 바다에서 먼저 하향세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1571년

레판토 해전은 스페인이 이겨 오스만 세력을 저지하였으나

1588년 칼레 해전에선 영국-네덜란드에게 한방 먹었죠.

스페인 아르마다의 힘이 빠지고 있었어요.


16~17세기 유럽의 최강자는 지금의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한 합스부르크 왕가에요.


16세기 중반 카를 5세 황제 때가 합스부르크의 최대 판도였죠.

퇴위할 때 카를은 스페인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현 독일권

신성 로마 제국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줬는데요.


당시 종교 전쟁을 스스로 잘 봉합하지 못해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루터교를 공인하지만

이걸로 분열이 일단락된 것은 결코 아니었어요.


17세기초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가톨릭으로

회귀하려는 반동 정책을 펼쳐 다시 전쟁의 불씨를 피우고 맙니다.




결국 직접적 동기는 종교 전쟁인 거죠. 보헤미아 왕국

(지금 체코)이 먼저 개전하여 북독일이 호응하지만

남독일은 반발하는 상태가 되고요.


현재 루마니아인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 헝가리로 진격해요. 여기엔 사보이 공국(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스위스에 걸치던 나라)도 조력하게 되요.


이 반란을 일시에 잠재우긴 하는데 합스부르크 안에서 여전히

문제가 곪고 있었죠. 스페인 황제 펠리페 3세가 페르디난트로부터

알자스 지방을 할양받기로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독립에다가

프랑스 북동부 본토의 위협과 직결되는 사안이거든요.


이에 프랑스를 통치하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사보이, 베네치아를 결속하여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은밀하게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해요. (프랑스는 가톨릭임에도..)


여기에 페르디난트와 사소한 원한이 있던 덴마크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개신교 동맹에 붙어 참전해요. 이로 인해 전장이 확대되고

군비가 확 늘어나 페르디난트에게 불리해지죠.


그런데 전투에서 덴마크가 밀리니 북해 패권을 놓고 다투던 스웨덴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국왕까지 독일 땅으로 침공하죠. 우수한 전술로

1631년 브라이텐펠트 전투에서 황제의 테르시오를 박살냅니다.


*테르시오 = 화승총장창이 짝을 이루는 스페인식 육군 전술..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전성기 병법으로 16세기에 절정을 찍고

보시다시피 17세기에 총기와 대포의 발달로 무너져가고 있음..




스웨덴이 매우 강력하게 버텼으나 그 와중에 구스타프가 전사하자

개신교 세력이 크게 동요하고, 지금까지 뒤에서 돕던 리슐리외는

동맹 초기 프랑스의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급기야…


1635년 프랑스까지 드러내놓고 선전포고하고…

바야흐로 부르봉합스부르크…! 두 라이벌

왕가 간의 명운을 건 전쟁으로 커져 버립니다.


부르봉은 낭트 칙령 이후 프랑스를 이어받아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고 합스부르크는 여기 보시다시피.. 점점

내리막길로 가는 중.. 두 가문의 골든 크로스 진행 중..


프랑스가 가세하여 동맹군이 조금씩 황제군을 밀어붙이고

네덜란드에서는 독립군이 스페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워요.

이 와중에 페르디난트 2세는 승하.. 아들 3세가 즉위해요.


페르디난트 3세가 고압적인 자세로 화평을 타진하니 더더욱

열받은 동맹군이 황제군을 압박해요. 연전연패하는 합스부르크..

이때 리슐리외도 죽고 아직 어려 암것두 모르는 루이 14세 즉위.


종전 교섭 회의가 열리려던 즈음 로크루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스페인 군을 작살내 버리면서 동맹군은 확실한 승기를 잡아요.


막판에 황제군과 바이에른 선제후국이 연합하자 동맹 주도권을

다투던 스웨덴과 프랑스가 연합군으로 응수, 전투가 끝나요.


1648년 11월 2일,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가톨릭 진영의 보루

프라하가 항복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며 전 유럽을

전쟁으로 몰고 간 광풍이 사그라듭니다.




복잡하죠? 최대한 요약해볼까요. 페르디난트 2세가 (할아버지처럼)

현명하게 처신했다면 영지 반란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보헤미아

전쟁 문제에 알자스 할양건이 겹쳐 프랑스를 자극해요.


반황제 동맹이 결성되고 황제에 원한이 있던 덴마크가 참전하며

전장이 독일로 번져요. 덴마크가 유틀란트까지 밀리니 스웨덴이

참전하고 리슐리외와 함께 구스타프는 동맹의 중심이 되요.

브라이텐펠트에서 합스부르크가 박살나죠.


구스타프가 전사하여 동맹이 흔들리자 프랑스가 참전하며

전황은 최대한도로 확장되죠. 처음부터 그랬지만 본격적인

부르봉 대 합스부르크 싸움이 되버렸고요.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격파하고 페르디난트와 리슐리외가

차례로 죽었으며 결국 로크루아에서 스페인이 프랑스에게

참담하게 무너집니다. 막판에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이

다시 한 번 승부에 쐐기를 박고요.


독일 — 덴마크 — 스웨덴 — 프랑스로 참전 양상이 확대했고요.

신교 동맹군의 구심점은 구스타프의 스웨덴과 리슐리외의 프랑스.




체코와 북독일에서 시작한 전쟁이 덴마크로 번지고 스웨덴과

프랑스의 참전에 따라 독일 전역이 전장에 휩싸인 겁니다.


결국 힘있는 나라들이 들어와 싸우는 통에 죽어나는 건 독일의

평민들이었어요. 동학전 명목으로 청과 일본이 싸워 구한말

조선 백성이 나가 죽은 사실과 묘한 기시감을 형성하죠.


독일인만 8백만 명이 죽었다고 해요. 1차 대전으로 1천만

가까이, 2차 대전으로 7천만이 넘게 죽었는데 이건 그나마

세계적 분포지만.. 이는 독일 인구 세 명 중 하나가 사라진

결과죠. 나머지 둘도 죽지 못해 살아야 하는 지옥이고…ㅜ


이렇게 민간인이 학살된 배경은 약탈 때문이에요. 군 편제의

상당수를 용병이 채우고 있었는데 제때 급료를 받지 못하니

전리품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고 하죠.


이로써 길고 넓었던 최초의 국제전이 끝납니다. 30년이나 되는

지난한 세월, 유럽의 모든 국가와 정권이 직접 참전하거나

간접 관여한 최초의 국가간, international 전쟁이었죠.


폭력의 경과는 이러했고요. 이 여파로 인해 유럽사의 체계를

바꿔버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요. 다음 포스팅에선

이 결과와 영향을 상세하게 다루어 볼까요.


아래 동영상은 당시 전장 상황을 재연한 것…

보병, 기병, 창병, 총병, 포병 등 기능별 군제가 정착하고 있죠.

머스킷선형진을 이루고 아직 장창이 쓰이고 있으며 중세식

기마 돌격용 창병기, 랜스가 사라졌음을 확인하면 되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I

Reformation and Wars of Religion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I. 종교 개혁 Reformation 



종교 개혁은 중세 유럽인의 정신과 생활을 장악하던 가톨릭의

구체제가 신교라는 교파 분리로 도전받은 종교 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국정의 관리 행정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근대적 국제 질서를 다진 변혁으로 분석할 여지가 더 크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바..

첫째, 기독교 체제의 구속을 탈피하고 난 이후에야 유럽인들이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자유를 얻어 정치 제도를 일신하고 현재의

민주정 체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요.


둘째, 현대인들의 상상과 달리 중세의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 기호

차원의 종교가 아니라 지역 교구 차원에서 신도를 관리하며 국가

행정 체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사 국정 시스템의 역할을

해냈는데 종교 개혁으로 이것이 통째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혁 운동의 실제 모습이란 것이 현대인들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회 일부 종교인들의 평화적 활동으로 점철되지 않았고,

제후와 영지의 거주민이 전력을 다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 정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시발점으로 1517년의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꼽는 일은

오랜 통설입니다만. 그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한 존 위클리프가 있었고 1415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잡혀 화형 당한 얀 후스 등이 있었죠.


독일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문에 붙인 행위는 일종의 대자보 같은

거고요. 오늘날로 치면 기자 불러 발표문 읽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정치 사회적 의사소통 행위로 보면 됩니다.


취리히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미 1516년부터 스위스 용병의

활동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1523년 시의회에서 67개 신조

주장하며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어 그의 가치가 늦게 발견된 거지요.


요절해 활동이 짧은 츠빙글리나 농민 전쟁에 반대한 루터와 달리

진정한 교회 개혁장 칼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신교 교리가

정교 일치의 신정 자치제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제네바에서 몸소

보여줬고 장로교 체계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교 운동에 대한 영국식 반응이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인데

성공회란 것이 사실상 교리에선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긴 해요.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였던 헨리 튜더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교회법상 적법한 이혼으로 후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죠.


(네, 현대 국가의 성문법이 해결할 생활의 영역을 교회법

민간의 관습법을 해석하여 푸는 사회가 바로 중세랍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 칼뱅식 청교도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후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

흐름에 큰 돌발 변수로 작용할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체제를 밀어 붙이다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슈말칼덴 전쟁

휩싸이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제후 및

봉토의 루터교 선택권을 인정하며 항복 선언을 합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위그노 전쟁의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었고 구교인 발루아 왕가의 족보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위그노 앙리 4세가 즉위하며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한 후에야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통일 강대국의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지대 국가들 중 상공업이 활발했던 네덜란드가 신교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스페인 호구 노릇에 신물이 나 합스부르크의 가톨릭

강요에 반발하였죠. 그들의 독립 의지는 16세기 후반 80년

전쟁으로 폭발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결실을 맺게 되죠.


그래요. 17세기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로 인해 위기를 맞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호시탐탐 합스부르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었죠. 1618년에 30년 전쟁이 터졌습니다. 80년 전쟁 중이었죠.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해요.)


30년 전쟁은 종교 개혁의 정점을 찍은 대사건이자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이었으며 유럽 최초의 국제 대전입니다. 유럽의 모든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어요. 심지어는 오스만 제국까지도.

또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죠. 자그마치 8백만 명..ㅜ


30년 전쟁의 한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이, 다른 편에는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균형을 이루었어요. (위그노들을 학살한 주제에

프랑스는 신교 진영이었죠. 국제적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요.)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라 워낙 함수 관계가

복합적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 종속적 구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는 거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제법이란 도구가

생겼거니와 이제 영지나 봉토에서 근대 국가 개념이 등장했고 각

국가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각자도생하여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둘째, 유럽의 세력 지형이 차츰 현대와 비슷하게 변화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은 정점에서 하향세로 가고 스페인도 저물어가며

새롭게 부르봉의 프랑스가 최강자 자리를 넘보게 되었어요.


영국은 내전으로 불안불안하여 전쟁에 직접 뛰어들진 못했고..

영국의 국력이 드러나는 때는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렵입니다. 17세기는 무역으로 돈벌고 청교도로 골치 아픈 중…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필두로 영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새로이

탄생합니다. 네, 이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꽤 벗어나게

되었어요. 스위스도 독립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맹활약한 스웨덴도 상당한 국익을 챙겼죠.


17세기 후반에 가서 해상 개척의 판도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영국(내전을 끝내고 명예 혁명을 완성)과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양강 구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양국

모두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박차를 가하죠.


요는, 점점 우리가 아는 현대 유럽의 국경선이나 국제 관계의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개전했지만

결과는 정치 구도와 국제 관계로 매듭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나 종교 전쟁이 절대로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며 거대한 정치 역학 관계에 광풍 같은 변혁을 몰고 온

시대 패러다임의 대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랍니다.




2003년에 나온 작은 독일 영화 루터조셉 파인즈 연기를 보며

5백 년 전 독일 제후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일계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지아코모 마이어베어는 숱한 성공작을 만들었는데 1836년

초연한 그랜드 오페라 위그노 교도가 있어요. 아래 프러덕션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 버젼인데 아예 홀로코스트 분위기로

갔네요. 종교 전쟁과 나치 탄압.. 비슷한 듯해요.



위그노 전쟁 중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대놓고 묘사한 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작 여왕 마고가 진정한 걸작일 겁니다. 아래

동영상에서 5분께부터 나오는 학살 현장 묘사는 프랑수아 뒤부아의

아래 그림과 많은 유사성이 관찰되기도 하죠. (미성년자 주의)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