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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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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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Jacques Rousseau:

A Man of Revolution, Never Born with Fortune













프랑스 대혁명을 출산한 정신적 아버지 장 자크 루소에 관해

사회계약론 한 가지에만 포커스를 맞춰온 대부분 교과서로 인해

급진적 사상가로 박제한 고정 관념만 양산해온 모양인데요.



그의 인생을 한 번 찬찬히 훑어 보자고요.

의외로 이런 사람이었어..? 하실 걸요.



프랑스의 영웅인데, 태생은 스위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712년의 제네바 공화국이죠.

칼뱅파 종교와 정치의 온상 같은 곳이에요, 18세기 말까지는.



왠지 루소와 장 칼뱅의 인생은 정반대 거울을 보는 듯해요.

프랑스 태생의 칼뱅이 제네바에서 명성을 얻고 뼈를 묻었지만

제네바에서 태어난 루소는 프랑스에서 활동해 혁명 사상을

낳고 거기서 죽었거든요. 신기한 우연의 일치죠?



루소는 생전에도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제네바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했다네요.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는 팡테옹 국립

묘지에도 안장된,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건국 지도자입니다.




...Pantheon, Paris where Rousseau is buried





부잣집에서 고이 자란 금수저 인생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어요.

태어나자 마자 모친을 여의었고 열 살 때 부친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 나머지 방랑 생활을 떠나 자식을 돌볼 수 없었어요.



떨어지기 전까지 부친과의 사이는 그럭저럭 화목했다 해요.

어려서 아버지와 독서 경험을 통해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죠.

이후 삼촌 손에 컸지만 애정과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죠.



그냥 이리저리 떠돌며 보호를 의탁한 청소년기였어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해 눈치보며 삶을 구걸한 처지였죠.

법원 서기나 조각가 공방에서 견습생으로도 있었는데

하도 때리고 갈구는 통에 뛰쳐나온 적도 있었다고…



열 여섯 쯤인가 사보이 공국 토리노로 이주해서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신교도를 돌보던 13세 연상 와랑 부인 밑으로

들어가요. 제대로 학교를 다닌 적 없는 루소가 그나마

그럴 듯한 교육을 받은 유일한 때가 이 시기에요.





Françoise-Louise de Warens






부인 직업의 특성상 주변에 성직자나 지식인들이 넘쳐났고

그들로부터 어깨 너머로 지식 동냥 하듯이 음악, 수학, 철학

등의 학문을 배워 나가요. 30대 중반 무렵까지 한때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부인의 후원을 받아 생활했다 해요.

루소는 부인을 평생 사모하고 경애했다네요.



이런 청년기를 보낸 그의 애정관은 자유분방하지만 방탕한 기질도

있었어요. 서른 셋에 10세 연하의 하녀인 마리 테레즈 르바쇠르

동거를 시작하나 정작 혼인은 나이 들어서야 올렸다죠. 자식을 다섯

낳았는데 부양할 능력이 안 되면 불행해진다며 모두 고아 병원에

보내 버렸고요. (이 행적은 훗날 두고두고 욕을 먹어요.)



그는 수학에 재능있는 음악학자이기도 했어요. 자신만의 숫자

기보법을 개발해 파리의 왕립 과학 한림원에 출품하러 갔다가

드니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의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죠.



백과전서파디드로달랑베르, 케네,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참여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일파에요. 1751년에 초판

출간한 백과전서로 과학의 체계를 재정립하고 지식 교육의

대안을 제시하려던 일종의 지성인 사회 운동이죠.

루소는 음악이나 정치학 관련 항목을 써줬어요.



다재다능한 polymath 루소는 정치 철학 이외 분야의 성공작이

의외로 다양해요. 1752년 오페라 작곡가로서 마을의 점쟁이

루이 15세 앞에서 초연되는 성공을 거두었고, 1761년엔 18세기

낭만파 소설의 걸작 신엘로이즈를, 사회계약론 직후 소설 양식을

빌린 교육론 에밀을 출간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어요.



어쩌면 근대 사상과 문화 다방면에서 재능을 꽃피운, 다 빈치

이후 천재적 르네상스맨의 마지막 인물일지도… 낭만파 문학과

계몽 사상이란 면에서 볼테르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가며

프랑스 시민의 잠재 의식을 일깨운 사람이란 평을 받는 거죠.

(혁명으로 목이 잘린 루이 16세의 평이라는 말도 전해져요.)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Geneva)






당대 사회의 명성은 비정치 분야에서 거두었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기억하는 루소의 진정한 가치는 정치 사상에 있어요.

첫 철학 논문 학문예술론을 1750년에 발표했는데

디종 학술원 공모에서 1등상을 받았다고 해요.



이 학문예술론을 확장 발전시켜 1755년에 인간불평등기원론

출간했는데 이 유명한 책을 통해 우리가 아는 진보적 공화주의

사상의 싹이 움트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 이성에 대한 고찰, 시민 사회 형성을

방해하는 불평등과 그 요인인 사적 재산권 등에서 심층적인 논의를

발전시킨 명작이에요. 원시 공산 사회의 묘사가 카를 마르크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이야기는 유명하죠.



루소의 인생작 두 권은 한 달 간격을 두고 1762년에 출간되요.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서 사회계약론, 그리고 5월에 나온 에밀.



(에밀은 사회적 인간 교육에 대한 진보 철학적 담론.. 역시

대성공하여 칸트의 규칙적 시간을 빼앗았다는 걸작이지만,

여기선 아주 대충 언급만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학문예술론에서 사상의 문제를,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국가 사회를

진단한 그가 모든 생각을 결집하여 내놓은 역작이 사회계약론이며

오늘날 민주 정치의 뿌리는 이 한 권의 책에서 갈라져 나온 거죠.










개인과 사회가 서로 양립하여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게 할 인간

본성으로서의 일반 의지가 작용한 사회 계약을 통해 비로소,

양도나 분할이 불가능한 절대적 속성의 국가 주권이 나오기에

오직 피치자인 인민만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우리 모두

잘 아는 근대 공화정 사상이 여기에서 완성되는 거에요.



아울러 토머스 홉스리바이어던존 로크통치론을 거치며

혼돈의 쌍곡선으로 피어 오르던 공화주의 정치 사상이, 이 한

사람의 깔끔한 논변으로 종합 정리되어 곧 깨어날 근현대

시민 사회 계급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것이기도 해요.

1651년 - 1689년 - 1762년의 연속성인 셈이죠.



루소가 가장 강조한 핵심 가치는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본질로서

자유평등, 그리고 인류 보편적 사회 연대 의식이었어요.

liberty, equality, fraternity* …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공화적 정치체의 구성을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했죠.



*일본에서 초기 번역이 잘못 자리잡는 바람에 박애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현대어 어감으로도 박애가

와닿지 않으시니만큼, 계급을 초월한 사회적 연대감 정도로

해석함이 제일 타당하다는 최근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해요.

- 자유, 평등, 연대..


이는 혁명을 이끈 자코뱅 당원들에게 투쟁 프로세스를

매뉴얼로 만들어준 것이나 진배 없었어요. 대혁명 시절

루소의 이 책 하나 손에 안 들고 다니는 사람 없었다죠.

이론적 기본서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사회계약론과 에밀, 둘 다 국가 체제의 근본적 혁신과 가톨릭

사회 비판 등 급진적 내용을 담고 있었고 하필 두 명저가

연달아 출판되는 바람에 루소는 유럽 전역에서 폭풍같은

논란의 주인공이 되요. 덕분에 8년간 유럽 각지를

떠돌아 살 수밖에 없었다나…



변변한 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당대 최고 인기의 예술가 반열에

오르지만 특유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 근대 공화정의 바탕을

완성한 장 자크 루소… 안타깝지만 혁명의 발화점을 몸소

목격하지 못하고 바스티유 사건 11년 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살다 갑니다.



자유로운 기질을 타고났다고 미화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적

기준으로도 결코 윤리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녔어요.

말년에 참회록을 써서 스스로 반성하기도 했거니와…



하지만 오늘날 민주 정치 체제의 비호 아래 열심히 인생의

좋은 날을 구가하는 현대인이라면 급진적이라고 맹비난받은

루소의 사상 덕을 입지 않았다고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터…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이 그래요. 살아가던 그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주 가끔은 진심으로 뭔가를

추구했던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거죠.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은덕에 힘입어 부지불식

간에 삶이 윤택해지고 평화로워지지만 대부분 그냥

모르고 지나간다는 사실…



고상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만이 역사의 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평범한 상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인생의 진리인 법이죠.



종교적 이유로 내세를 믿는 분이라면 죽어서 모든 것의 화해를

받아들일 때쯤 깨닫게 될 거라고 봐요. 아, 내가 몰랐었는데

이런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그 덕에 잘 산 거였구나 하고..



장 자크 루소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고 있는 숨은 현자로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래는 그의 인생을 축약한 짧은 동영상..

에밀 내용이 부족한 분은 그 아래 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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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V

Rise of Western Modern Philosopher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V. 근대 철학 Modern Philosophy 



모든 학문은 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가지를 치고 생장합니다.

철학은 정치경제 등 사회 현상 전반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요.

유럽 역사에서 근대 철학의 태동이란 현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현대 문화의 바탕을 형성하죠.


인문주의의 부활, 무역 항로의 개척, 프로테스탄트의 발호,

자연 철학의 과학화 등 지금까지 상술한 각 현상들이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점차 사회가 생동하고 변화하는데,

이를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철학자들이 맡은 거죠.


16~17세기를 살며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한 초기 철학자들이

선각자로서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 철학

극복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을 되살려 그네들이 살던

현재의 시간에 적합한 시대적 사상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죠.


초기 선구자들을 지역과 성향에 따라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를 아우르는 서유럽 대륙에선 합리주의,

rationalism으로, 영국에선 경험주의, empiricism으로 부르며

각자 독자적 체계를 조성했어요.


이성과 경험으로 나뉘는 흐름을 당시에 인지한 건 아니고 정작

후대에 이 일을 한 사람은 칸트입니다. 현대 철학의 하위 분과를

구분하면 인식론, 형이상학, 존재론, 윤리학, 논리학, 미학, 정치

철학 등인데 대륙과 영국의 논쟁은 인식론에서 출발하였죠.


합리주의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절대 진리를 찾아 인식의

근본으로 삼자는 생각입니다. 30년 전쟁 참전 중 신비한 꿈을 꾸고

학문의 길에 들어선 르네 데카르트가 선구자로서, 그는 철학, 수학,

광학, 천문학 등 방대한 연구를 한 대학자이자 철학의 아버지에요.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에서 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

반복하여 종국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의심할 수 없는 제1원리로 제시했어요. 이로부터 시작하는

연역적 추론을 통해 신과 사물의 존재를 증명하자는 거죠.


경험주의는 사물의 현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사유자가

직접 경험한 지점으로 잡자는 생각으로서, 평생 법관으로 산

프란시스 베이컨이 데카르트보다 수십 년 앞서 늘그막에

실험과 저작에 몰두하며 새로운 생각을 집대성했어요.


그가 죽기 여섯 해 전 1620년에 집필한 신기관은 그리스

이래 과학 연구론의 체계를 장악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

의문을 품고 귀납적 실증으로 진리에 접근할 것을 주문했고

(아는 것이 힘이다..란 명제) 우상론에서 - 종족, 동굴, 시장,

극장 - 인간의 보편적 편견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대륙의 합리론을 계승한 이는 네덜란드의 바뤼흐 스피노자와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였어요. 둘은 데카르트와 함께 3대 거장으로

꼽힙니다. 스피노자는 1674년 에티카를, 라이프니츠는 1710년

신정론을 출간하여 인간 이성의 탐구를 이어갑니다.


에티카는 스피노자 필생의 역작으로서 살려는 본능적 의지,

코나투스가 지배하는 감정을 통제하려면 오직 이성에 기댈 수

있을 뿐이라 썼죠.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철학과 신학이

서로 모순되지 않아 양자 모두 신의 섭리일 뿐이라고 설파해요.


영국의 경험론은 존 로크가 계승하고 데이빗 흄이 발전시켜

후대로 넘어갑니다. 1690년에 로크가 출간한 인간오성론

백지 상태의 인간이 경험으로 지식을 축적한다고 봤지요.

(빈 서판 같은 백지 상태, 라틴어로 타뷸라 라사라고..)


한편 계몽주의가 발전한 사회계약론이 주류를 형성하여 공화주의

정치 사상으로 또 하나의 줄거리를 이룹니다. 토머스 홉스가 단초를

풀기 시작하죠. 1651년 명저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자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계약을 맺고

국가를 세운다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존 로크는 왕당파가 왕권신수설을 부활하려는데 반발해 1688년

통치론에서 그해에 일어난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인간의 자연권,

피치자로서의 저항권, 선거제와 권력 분립의 원리, 노동 가치설

등의 주제로 미국과 프랑스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장 자크 루소는 1762년 출간한 동명의 저서로 아예 사회계약론

완성한 사람이죠. 양도할 수 없는 국가의 주권은 오직 인민에게서만

나오며 자유의지와 사회계약으로 공공선을 추구한다고. 익숙하죠?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정립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

기반을 완성하지만… 본인은 혁명 발발 11년 전에 사망…ㅜ


이렇게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발전한

세 줄거리가 합하여 근대 철학이 집대성되는 전기를 맞습니다.

네, 이마누엘 칸트.. 지구상 역대 최고의 지성이 등장해요. 짠.


칸트가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에요. 첫째, 합리든 경험이든 계몽이든

그때까지 발전한 유럽의 모든 철학을 종합하여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신학, 미학, 존재론, 정치학 등 전 영역을 집대성한 체계를

완성하고 수백 년 후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에요.


둘째, 이렇게 완성한 독일 관념론의 비판 철학이 제시한 모든 논제가

결국 선험적 이성이 주재하는 사상의 중심에 인간을 주체로 놓았고

이는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만에 유럽이 신의 그늘을 드디어 완전히

벗어나 인류가 최상위 존재로 올라섰음을 의미하는 거란 점이죠.


1781년 순수이성비판,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비판

차례로 출간하며 그는 인류의 철학을 종합합니다. 전 영역에 걸쳐서요.

이성을 중시하나 경험론을 끌어와 a priori, 선험적 관념론을 세웠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어떻게 그를 계승하여 발전시킬지가 관건이었죠.

게오르크 헤겔이 독일 관념론의 적통을 계승했습니다. 칸트 만큼이나

철학의 전 영역을 통찰하며 절대적 관념론변증법, 역사 철학

종합하여 수많은 헤겔주의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18세기 공화주의를 일단락짓고 맞은 혁명의 시대에 사상의 조류는

자유주의로 흘러갑니다. 제레미 벤담은 1789년 저서 도덕입법원리

통해 공리주의를 확립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했고

후대의 자유주의자에게 영감을 줬어요.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 자유론으로 19세기 자유주의 정치 사상을

종합한 대가입니다. 이미 벌어진 정치 현상의 사변을 세운 것이 밀의

역할이었다면 카를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론으로 미래에 등장할

사회주의 정치 체제의 철학 기반을 제공하는데 앞장섰죠. 18세기

말엔 에드먼드 버크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다진 적도 있었어요.




영화의 소재로는 철학자 자신보다 철학책 속 논쟁 주제가 더

알맞을 겁니다. 인식론이 와닿지 않는다면 매트릭스

숟가락 씬을 다시 한번 음미하는 것이 좋겠고요.



리들리 스코트해리슨 포드와 작업한 블레이드 러너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을 탐구했었죠. 같은

감독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존재를 파고 들었고요.



인과론의 비극적 참상은 2004년작 나비효과

처절하리만치 극적으로 묘사했었고요.



욕망에 빠진 인간의 윤리적 모순에 대해선 작고하신 앨런 파큘라

감독이 노년에 작업한 1990년작 의혹(무죄추정)을 추천해요.

해리슨 포드가 여기에도… 출연진 면모와 연기가 엄청나죠.

(원제는 Presumed Innocent.. 미성년자 특히 주의)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돌아가시기 전 블루-화이트-레드 시리즈에서 다루었는데요.

이 연작의 프로토타입 작품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1991년작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렌느 야콥이 여기서 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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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r Incidents from European History over

International Relations Realm




국제 관계학의 역사에서 시대별 맥락을 짚을 때 반드시

검토하고 분석하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그 역사와 시기를 보면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백여 년

언저리의 간격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여 매우 흥미롭죠.


오늘은 이런 국제적 사건과 국가간 조약

역사를 요약하여 정리해 볼까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Fall of Constantinople 



1453년이 중세를 끝장 낸 연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해 서양 중세사 최고의 사건인즉슨..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한 일일테죠.

무려 2200년을 이어온 제국이 멸망한 사건이니까요.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통치의 절정을 찍고 6백 년 넘게

존속한데다 폐쇄적 기독교 문화 속에 골골하던 유럽을

아득히 초월했던 14~17세기 세계의 패권국이자

동시대 유럽 군주들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나비 효과로 지중해 동쪽 항로가

막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 일주 항로를 개척했으니

역사의 거대한 새옹지마이자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죠.

(동양의 신비… 후추를 어디서 수입하냐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항해 시대, 피렌체 등 도시 국가들의

르네상스 인문 혁명, 거기에 북독일의 종교 개혁이 바야흐로

적정 혼배합하여 유럽의 근대를 열어 젖히는 찰나였어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Peace of Augsburg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 개혁

일단락된 사건이자 루터교를 공인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신교를 인정한 계기의 바로 그 사건입니다.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맞서 전쟁하던

신교 영방국들이 페르디난트 1세와의 극적인 합의를 통해

루터교 종파를 공인한 군주간 합의 사건이라 볼 수 있어요.

(페르디난트는 카를의 동생이자 독일 대리 통치자..)


페르디난트는 당시 선제후와 농민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교세를 꺾기보다 상호 협력하여 자치를 인정하는

개혁 성향으로 독일권 제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사람..


화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개별 제후의 종교 통치권을

황제나 교황과 분리하여 최초로 인정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해당 영지의 종교를 제후가 택한 종파로 정한다는 내용이죠.


허나 루터교는 인정 받았는데 당시 더 진보적 성향이던 칼뱅

장로교 제후국들이 제외된 문제가 여전히 잔존한 상황이었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halia 



상호 경쟁하던 국가의 군주들이 독일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모여 30년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

바로 그 조약입니다. 오늘날 국제법의 효시라 하죠.

(요샌 웨스트팔리아로 부르기 시작하기도..)


1618년에 시작한 종교 전쟁 후반부 중요한 변곡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도 맞물린 17세기 최대의 사건이

바로 30년 전쟁입니다. 근대 최초의 국제전이라고 하죠.


루터와 칼뱅에서 시작한 투쟁이 130년 만에 여기까지 이른

겁니다만, 프로테스탄트 전쟁을 단순한 종교 문제로 보면

부족하고 교황과 황제 중심 거대한 국정 체계 패러다임이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용트림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신교 투쟁의 결과물이 결국 개별 제후가 다스리는 봉토의

자치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인 것에서 알 수 있죠. 이제 황제의

통치를 받는 제후의 시대가 아니라 독자적 군주가 된 겁니다.


주권, sovereignty의 개념이 본격화하고 이로 인해 절대

왕정 및 왕권 신수설이 대두되는 발판을 마련하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동인도 마련되기 시작하는 거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Peace of Utrecht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조약입니다.

생소한 전쟁일텐데 유럽 왕가 간 세력 균형전으로 이해해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지는 해’ 합스부르크

프랑스를 다스리는 ‘뜨는 해’ 부르봉 왕가가 주인공인데요.

(부르봉 킹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 확장욕 쩌는 분..)


스페인 왕위 계승전에 루이 14세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가

선순위로 떠오르는 상황을 오스트리아와 영국과 네덜란드가

막아서며 발발한 전쟁입니다. 부르봉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병합하면 견제 불가능한 거대 국가가 탄생하기 때문이죠.


의외로 (그때까지 약체로 분류되던) 영국의 견제가 제대로

먹혀 부르봉이 스페인을 계승하되 프랑스 왕위는 포기하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됩니다. — 루이 14세, 야욕 좌절…


유럽 영토에서 어느 한 나라가 잘 나가 바보짓을 벌이면

엇비슷한 국력의 나라들이 합심하여 다구리를 먹이는…

현재도 이어지는 불문률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주권에 영토 개념을 넣는 법리도 형성되었고요.




1815년,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를 패자로 공인하며

이후 전 유럽에 불어닥칠 자유주의 바람에 제동을 걸고

왕정 복귀를 천명한, 보수 반동의 대명사격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재한 걸로 유명하죠.


프랑스 대혁명 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유럽

각국에 전쟁을 벌였는데요. 역설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것은 혁명이 낳은 프랑스의 정신이었어요. 자유, 평등, 박애.


회의 대표자는 힘센 나라의 왕과 귀족이었죠.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자국에 혁명이 수입되면

꼼짝없이 목이 날아가는 분들.. 국경선과 전리품 배당을 놓고

혈안이 되어 똥고집을 부리며 진척이 더디던 중이었는데요.


보나파르트가 유배지를 탈출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라 협정서에 조인을 했다고 해요. 쌩 코메디..

(메테르니히의 댄스 파티도 찾아 보세요. 배꼽을 잡을 듯..)


이른바 유럽 협조 체제, Concert of Europe이란 국가간

공조가 명문화하여 등장한 거에요. 핵심은 위 위트레흐트 때

다구리.. 와 대동소이하고 이 시스템이 40여 년을 유지했죠.


그러나 한번 불씨를 당긴 자유주의의 대세는 거스를 수 없어요.

30년 7월 혁명(‘레미제라블’ 배경), 32년 영국 선거법 대개혁,

1848 연쇄 혁명과 공산당 선언… 이미 불길은 타오른 거죠.




1919년, 베르사유 조약 Treaty of Versailles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하고 독일의 패배를 선언하며

막대한 배상금 조건으로 두번째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독일 제국과 연합군 승전국들 사이의 조약입니다.


빈 회의로 패전국 프랑스가 실질적으로 잃은 것이 없던 데 비해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는 독일인들에게 참담한 치욕이었어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닥쳤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몰락했으며 히틀러 집권의 계기가 되었죠.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가 이 비극을 예견했다는 거 아시죠.

(이때 협상 대표단 중 일원이었다가 참다 못해 사퇴..)


특히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뻘짓은 어마어마했어요. 그의

하이라이트는 이렇다 할 강제력을 갖지 못한 국제 연맹 창설로

‘마치 무언가 해결된 듯한’ 국제 관계의 판타지를 조장한 점이죠.


장렬한 뻘짓의 대행진이 전간기 20년의 나날을 채워요.

바야흐로 한스 모겐소가 현실주의로 스타가 될 조건이 형성..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죠.


거기에 세상은 대공황의 광풍에 휩싸이고 있었고요.

이런 악조건에 어떻게 전쟁이 또 안 날 수 있겠어요.




1945년, 얄타 회담 Yalta Conference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루스벨트와 스탈린과 처칠이

모여 깡패처럼 전후 국제 질서를 결정지은 그 회담입니다.

우리나라는 여기 놀아난 직접 피해 당사자국… 아시죠?


베르사유 조약이 종전 직후 전쟁 문제를 처리하는 성격인데

반해 얄타 회담은 종전이 임박한 시점에 전후 문제를 미리

조율하는 강대국 슈퍼 파워들의 미래 회의 같은 거였죠.


이 사건의 가장 큰 상징성은 팍스 브리태니카의 레짐이 이미

저물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대항마로 소련이 등장하여

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린 실질적 계기라는 점이에요.

(실제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을 이끌어냄.)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한반도가 둘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폐해를 입어야 하는 원인을 만들었죠. 도대체 왜 때문에?!

패전국 일제가 아닌 우리가 분단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냉전이 시작하여 1989년 동유럽 혁명까지 존속해요.

하지만 이 땅의 냉전 파편은 아직도 진행 중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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