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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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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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7.25
    공부가 제일 재밌었어요,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삶
  2. 2018.10.20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 : 문예 부흥




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of Decent Deeds and Good Words










오늘날 서방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기독교 전통 문화의

배경을 업고 현대의 국가를 경영하고 있고, 그런 종교적

바탕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칼뱅주의 교리의

그늘 밑에서 직간접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또한 서양 근대사의 정신을 일군 철학자와 과학자, 지성인이

칼뱅이 다져놓은 사회의 기반에서 성장했거나 칼뱅과 같은

시대의 사상 체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자신들의

업적을 거양한 사람들이기도 해요.



칼뱅이야말로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일지도

몰라요. 살아생전에 종교 개혁의 모범적인 이상형을 직접

구현해 보여주었고 죽은 이후 그의 교리에 따라 기독교

체계가 통째로 재편되기도 했으니까요.



장 칼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개인사는 의외로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아 아직도 연구와 논란이 진행 중이라고 해요.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포장하는 것을 칼뱅 자신이

스스로 그토록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하죠.



심지어는 그의 묘지 위치조차도 현재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남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엄격했던

사람의 인생이 보여줄 수 있는 일면일 거에요.



서슬퍼런 통치 사상가로서의 일면에 더해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행동 강령을 평생 동안 유지한 위인이기에 칼뱅의

인생을 짧게나마 들여다 볼 의의는 충분한 것 같아요.





Jean Calvin (1509~1564, France)






1509년 프랑스 왕국에서 교구의 행정관이던 아버지 밑에

Jehan Cauv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어요. 교구에서 일을

할 때 아버지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지만 교회와

마찰이 생긴 후엔 법률가로 진로를 바꾸게 했다죠.



파리 대학과 오를레앙 대학에서 주로 법률을 전공했는데

몽테귀 칼리지에선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해요. 우신예찬을 쓴 종교 개혁가이죠.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오를레앙이나 부르주에서 공부하던

1530년대 초반에 루터교의 영향을 받아 개종했다는

가설이 가장 널리 지지를 받는 편이에요.



파리 대학 학장 취임 건으로 개신교도 니콜라 콥을 도우면서

종교 개혁가란 낙인이 찍혔고 덕분에 프랑스 내에선 더 이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도망자 신분이 되어 버려요.



이후엔 거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스트라스부르와 바젤

등지를 떠돌며 신학을 연구하고 교리서를 저작하는데

시간을 쏟습니다.



1535년쯤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초판의 집필을 완료했고

이듬해 바젤에서 출간해요. 바로 기독교 강요, the Institutes

라고 불리는 개신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이랍니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Guillaume Farel (1489~1565, France)






출간 직후 그가 아주 잠시 잠깐 제네바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을 만나요. 제네바의 급진적

종교 개혁가 기욤 파렐이랍니다.



파렐은 스무 살 정도 연배가 앞서고 대단히 과격한 방식으로

제네바 전체의 개종을 주도한 사람이에요. 칼뱅과는 평생

죽기 전까지 인연을 맺게 되는 사이죠.



제네바 공화국의 개종을 처음부터 칼뱅이 주도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초기 작업은 파렐과 일부

제네바 시민이 자생적으로 주도한 것이 맞아요.



그 와중에 바젤에서 책을 출간하고 이미 이름이 알려진 칼뱅을

파렐이 만나게 되었는데, 거의 반협박 비슷하게 신의 이름으로

제네바에서의 소명을 외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죠.ㅎ



칼뱅이 이런 파렐을 인간적으로 좋아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파렐의 말을 듣고 신의 부름을 느꼈다며 스스로 기록하기도 했고

이후 죽기 몇 일 전까지도 파렐과 친분을 유지했으니 이래저래

큰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해요.



기욤 파렐이 집단 행동을 과격하게 조직하는데 능한 수완가라면

장 칼뱅은 체계 수립과 장기 계획 입안에 능한 혁명적 사상가

할 수 있겠죠. 그만큼 두 사람의 성향은 다릅니다.



결국 제네바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을 선언하고 서너 달 후

칼뱅이 제네바로 넘어와 파렐을 돕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스위스와 제네바의 정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아직 현대적 독립국인 스위스 연방국이 등장하기 전인 것은

대략 감으로 아시겠죠.. (현대 스위스 건국은 19세기 중반)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영향 하에 있었지만

지형이 험하기도 하거니와 스위스 용병들이 제국 정책에

협조적이기도 해서 제네바, 취리히, 베른, 바젤 등 사실상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느슨하게 연합을 유지하고 있었죠.

(옛 스위스 연방, old confederacy.. 란 연합체)



제네바의 가톨릭 교구는 사보이 공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어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일부 지역 판도를 형성한

당시 남유럽의 봉건국이죠.



칼뱅 부임 직전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했다는 말은 바로 이

사보이 교구 소속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을 내쫓았다는 뜻..



제네바 시민의 봉기 3년 전에는 베른이 개종 전례를 남겼고

덕분에 제네바는 베른의 도움을 받지만 정치적 입김도

좌지우지되던 형국이었죠.



칼뱅이 부임했을 때 아직 과도기인지라 혼란한 지경이었어요.

칼뱅이 내놓은 개혁안에 시민들의 반발도 있었고 결국 2년이

채 못 되어 파렐과 칼뱅 등은 추방 당합니다.










다른 제안을 받아들여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자유시로 가서

목회자 생활을 합니다. 오늘날 프랑스 땅인 이곳은 당시엔

신성 로마 제국 내 자치권이 보장되는 도시였어요.



대략 4~5백 명 정도의 프랑스 출신 신교도 집단을 이끌었고

이곳에서 칼뱅의 삶은 여러 가지로 발전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고요.



기독교 강요는 한 번에 완성되어 나온 저작이 아니에요. 여러

차례 개작과 증보를 거쳐 당시 세상에 나온 교리를 집대성한

책이고 스트라스부르에선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강하죠.

초판 6장 뿐이었다가 17장으로 대폭 늘어납니다.



1540년엔 결혼도 했어요. 귀족 자제 등 여러 군데서 혼처가

들어온 모양인데 인연은 가까이 있었다고 하네요. 병으로

세상을 뜬 친구의 미망인 이델레트 드 뷔르가 주인공이고

칼뱅은 초혼이지만 아내가 데려온 두 자식도 잘 키우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그의 행적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칼뱅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연구하는 시간을 가장

사랑한 공부벌레였답니다. 공부에 몰두해 여러 편의 저작을

남기고 결혼도 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행복했어요.



이델레트는 조용한 조력자였다고 스스로 기록했어요. 원만한

결혼 생활인 것 같지만 둘 사이 새로 태어난 자식이 일찍 죽고

아내도 얼마 안 있어 뒤를 따라갔죠. 칼뱅에게 잠깐 몇 년

머문 인생의 낙이었어요. 전처가 남긴 자식은 성실하게

키우지만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복을 타고나진 못했죠.





Idelette de Bure






그 사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은밀한 서신이 계속 답지했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칼뱅 신학 체계가 명답이었음을 깨달은

거죠. 행복하게 살던 중이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었어요.



칼뱅 개혁안대로 교회법을 입안하겠다는 공식 답변을 받고

나서야 그는 제네바의 청빙을 받아들여 이삿짐 쌉니다. 이미

파렐은 뇌샤텔에서 목사 생활 중이어서 이번엔 혼자서…



이후 여생을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서 마무리했어요. 인생 후반기

제네바에서의 삶 중 가장 중요한 일을 꼽자면 교회법과 교회법정,

세르베투스 그리고 제네바 학교 정도…



다른 사안은 매우 복잡한 상황과 행적인지라 다음 포스팅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여기선 말년의 칼뱅 업적 최고봉인 학교

설립 건을 설명할께요.



1555년 5월이 되어서야 칼뱅을 괴롭히던 제네바의 정적들이

사라지고 평화를 맞지만 이 즈음 건강에 무리가 와요. 당연하죠.

칸트 뺨칠 정도로 규칙적인 시간표로 설교와 연구에 힘을

쏟으면서도 하루 한 끼 먹고 버티는 삶을 지속했다고 하니…



제네바 최고의 세력가였지만 정작 아직 시민권이 없었는데

몇 년 후 시민권도 얻게 되고.. 사실 스트라스부르에서 옮겨

올 때부터 칼뱅에겐 오랜 숙원 사업이 있었죠.



학교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개신교가 대를 넘겨 사회에 자리

잡으려면 교육의 힘이 없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 거죠. 하지만

돈도 많이 드는 일이고 기금이 축적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죠.










1559년, 드디어 제네바 아카데미란 이름으로 초급 학교가

개교합니다. 초대 교장은 물론 칼뱅. 어린이들에게 개신교

의식과 함께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 문학 등을 가르쳤어요.



이후 중등 학교로 발전했고 그가 사망한 해엔 드디어 대학교가

문을 열었어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문 제네바 대학교

바로 이 학교에요.



신앙에 있어 엄격한 칼뱅이었지만 학문의 자세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개방적이었어요. 당시 유행하던 다방면의 학문을

차별없이 가르쳤다 하고 각국에서 모인 유학생 1천 5백 명이

신학과 법학 중 택일하여 전공하는 방식이었다 하죠.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한 그는 죽기 몇 달 전부터 지인에게

인사를 다니며 삶을 정리했다고 해요. 사망 8일 전에는

마지막으로 파렐도 만났죠. 1564년에 그는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어요. 거인의 평화로운 안식인 거죠.



현대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해 장 칼뱅의 삶은 조용했고

그닥 극적인 장면도 많지 않아요. 북독일 스타 마르틴

루터의 화려한 행적과 여러 모로 비교되죠.

(그 때문인지 영화화 예도 거의 없어요.)



단지 평범하게 책과 글쓰기에 몰두하며 신의 진리를 좇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사람. 정쟁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큰

잡음 하나 없이 점잖게 격조있는 인생을 산 어른인 거죠.



그가 남긴 사회 교육의 미덕을 좇아 오늘날 많은 개신교

종파들이 전 세계에 대학을 설립해 수많은 인재를

키웠어요. 하버드 대학교를 필두로 하여..



근대 신학의 공부벌레이자 유럽계 백인 기독교 문화의

어르신, 장 칼뱅의 사상 세계는 다음 포스팅에서

짚고 가기로 해요.



아래 간략한 동영상으로 그의 인생을 복습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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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

Renaissance, the Rebirth of Humaniti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 문예 부흥 Renaissance 



르네상스, 재생(부흥), rebirth 이야기에요. 14~17세기 유럽인의

생각과 감정을 열어젖힌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예술 운동입니다.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인근

베네치아제노바로 옮겨갔고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제네바를 거쳐 네덜란드, 영국, 폴란드까지 퍼져 갔다고 합니다.


주로 문학과 회화, 조각, 건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유일신 교리의

성상화에 치중했던 중세 성향을 탈출하여 철학적 사고와 예술적

표현의 중심에 인간이란 존재를 대체한 광역 거시적 사조랍니다.


문예를 ‘부흥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

성향을 되살리고 고전으로 돌아간다는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에요.


장장 19세기까지 통일 군주 없이 공화국이나 공국으로 찢어 살아야

했던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로서는 그네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고대 시절 화려했던 문화의 향수거든요.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가 본래는 이태리어인 rinascimento

라고 불려야 정상이지만 19세기 중반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가

불어로 규정하며 대히트를 친 바람에 그렇게 고착해 버렸다죠.


피렌체나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발발한 이유는 말이죠.. 중세 후반에 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한

사람들이 이런 해양 국가의 중추 계급인 상인 집단이었거든요.


이 나라들은 해양 중개 무역으로 성장한 상인들이 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고 과두 공화정 형태의 정치 체제로 빽과 돈줄과 문화

예술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답니다.


이들이 중개한 무역 루트는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소아시아와

중동, 인도, 중국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동방이었는데 보통 이슬람

상단을 통해 향신료, 도자기, 차 등 사치재를 구해 이문을 챙겼어요.


이렇게 넘어오는 과정에서 물자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제국이 잘 보존해온 (정작 자신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대 문물이

역수입되어 사람들을 일깨우고 르네상스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문화적 변동이란 것이 이렇게 정치와 경제의 기반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지라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이 발호하며 동방 루트를

막아버리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쇠퇴하고 맙니다.


14세기 초를 시점으로 잡는 것이 통설인데 이는 이탈리아 문학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활동 기간이 대략

1308년 무렵부터 사망하는 1321년까지 이어지기 때문이죠.


단테가 정계에서 축출된 후 망명 생활을 하며 창작한 신곡

이태리어를 처음으로 문학의 언어로 끌어올린 명작입니다.

중세 유럽인의 내세적 종교관을 엿볼 수 있기도 하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어 국가 대소사를

라틴어 시문으로 남겼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시로 썼으며 고대

문헌을 발굴 연구하여 후대에 영향을 준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와 교류했던 지오반니 보카치오는 열흘이란 속뜻을 지닌

이야기식 서사시 데카메론을 통해 당대 유럽인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고 사회상을 우회적으로 비꼬기도 했죠. 서사

구조는 영국의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로 계승해요.


이탈리아 문학의 태동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요.

네덜란드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우신예찬을 썼고

스페인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창작하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16세기 초를 화려하게 수놓은 예술가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요.


이들은 교황령을 비롯하여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아 오늘날까지

인류적 자산으로 분류되는 초월적 걸작들을 창작해냈습니다.

한두 번 곁눈질 만으로도 거장의 자취가 느껴지실 겁니다.


다 빈치의 모나 리자라든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든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든가…



르네상스는 순수 문예작의 범위를 초월해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요. 이전 시대 거장의 스타일과 작풍이 한창 정치적 격변을

겪던 북부 공화국 인민의 의식 성장을 반영하기도 했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저작하고 폭풍처럼

일생을 살다 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며, 그가 남긴 충격적 사상은

이후 고전적 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정치학 연구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와 동시대에 영국에서는 헨리 8세 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토머스 모어유토피아를 통해 민중을 배격하는 위정자의

위선을 한껏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모어의 실제 삶도 참

극적이었죠. 헨리 8세에게 직언하다가 참수되었답니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집권한 17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뒤늦게 꽃을 피웠다고 봅니다.

현대 영문학의 효시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현대 대중 문화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주 자주 언급됩니다. 재작년에

개봉한 다빈치 코드 3부작 중 최졸작인 인페르노에서는 시종일관

산드로 보티첼리가 15세기 말에 그린 단테 신곡의 삽화가 삽입되요.



물론 레오나르도를 상업적으로 폭발시킨 건 댄 브라운론 하워드죠.

재미는 있는데.. 이 얘기 아직도 믿는 분들 계시려나요.



또한 데이빗 핀처가 모건 프리먼 및 브래드 피트와 작업하여 1995년에

내놓은 히트작 세븐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언급되는 인류의 일곱 가지

죄악이 직접적인 내러티브의 소재로 언급되죠. (미성년자는 주의)



세르반테스는 작품과 함께 영원히 사실 겁니다.

심지어는 뮤지컬로도 살아남을 거에요.

아랜 72년 토니상 공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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