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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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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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네상스의 길을 열어준 중세 시대 세계 최고의 도서관
  2. 2018.11.05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V : 과학 혁명
  3. 2018.10.20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 : 문예 부흥




The House of Wisdom, the Greatest Library of Baghdad

During Islamic Golden Age in Medieval Times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 역사 최고의 전성기를 꼽을 수 있어요.

정치의 양상이야 각기 제각각이지만 한 국가가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 역사와 문화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지요.



현명한 통치자가 신분에 상관 없이 능력에 따라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들의 능력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 세종 및 영정조,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 루이 14세 등… 쉽게 감이 오시죠?



5~15세기 유럽이 암흑기를 맞고 있을 때 세계사의 전성기는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 꽃피고 있었을까요. 즉 중세 시대

정치 문화적 최강국을 어디로 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죠.



(일단 중국의 거대한 경제 규모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슬람 제국을 상정하고 싶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패러다임이

붕괴하고 동로마와 인도, 중국을 잇는 허브로서 교역과 치세의

정점을 찍었거든요. 배경에는 종교의 뒷받침이 있었고요.



이슬람 제국의 황금 시대는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는 유럽의

근대사와 간접적 연속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또한 중요해요.

르네상스의 개혁은 사실 이슬람으로부터 온 것이었거든요.



이 주장의 근거 중 하나를 여기에 제시할 수 있어요.

중세 당시 세계 최고의 학술원이자 도서관이 바로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있었거든요.



House of Wisdom, Bayt al-Hikma, بيت الحكمة …

지혜의 집 또는 지혜의 전당으로 불리던 바로 그곳이에요.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는 아바스 왕조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8세기 중반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하고 성립한

두번째 칼리파 왕조로서 아랍인 중심 정치에 치중했던 전대에

비해 출신 배경을 초월해 보편적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흔히

이슬람의 황금 시대라 하면 아바스 왕조 치세를 가리키죠.



칼리파란 기독교의 교황과 황제를 합한 위치입니다.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최고 통치자를 뜻하죠. 이슬람교 발흥 초기만

하더라도 제정 일치를 이루어내지만 아바스 조 후반에

가서 정치 실권의 힘이 빠지게 되죠.



아바스 조 2대 군주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로 천도한 후

7세기 초에 망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요. 엄청난 양의 중세 서적이 쏟아져 들어오자

사산 조의 전례를 본따 궁정 도서관을 설립해요.



도서관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지식의 보고가 대중에게 널리

퍼질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했어요. (인쇄술..은 훨씬

나중 시대 얘기고) 도서를 필사해서 보급할 수 있을 텐데

종이가 충분했을까요..



8세기 중반까지 서아시아의 기록 매체는 양피지였어요.

(유럽은 11~12세기까지도..) 종이보다 더 두껍고 잘

찢기고.. 당시 제지 기술은 전 세계에서 중국 등

동아시아 권역에서만 보유하고 있었거든요.



751년에 호재가 있었어요. 탈라스 전투… 역사상 최초로

이슬람 제국과 중국 정권이 전쟁을 벌였어요. 문명의 충돌!

당나라가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팽창하고 있었고

이슬람이 이에 적정한 제동을 건 거에요.



지금의 카자흐스탄 쪽에서 양국 지방 장군들끼리 맞붙었는데

이슬람이 이기고…는 별 의미없고, 중요한 건 이때 당군 포로

중에 제지 기술자가 섞여 드디어 이슬람으로 넘어온 거에요.



(이 과정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 이슬람으로 전승된 계기가

탈라스 전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반대 학설도 물론 있어요.)



사산 조가 망하면서 이슬람으로 넘어온 페르시아인 출신

유력 가문이 이슬람 최초의 제지소를 차렸다고 해요. 전문

필사가들이 고용되어 열심히 도서를 보급했고요.










아바스 조의 전성기는 5대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가 다스린

8세기 말 ~ 9세기 초인데 천일야화에도 등장하는 왕이에요.

이 사람의 아들로 7대 칼리프 알 마문이 즉위하는데 궁정

도서관의 위용은 이 시기에 정점을 찍게 됩니다.



군주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자국어인 아랍어로 보편적 지식을

최대한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어요. 번역가, 문필가, 필사가,

제지업자, 제책업자, 문구업자 등등의 직역이 필요한 일이죠.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화학, 물리학, 지구과학, 약학, 생물학,

지리학의 서적들이 저 다양한 사람들 앞에 펼쳐졌어요. 그리스,

로마, 소아시아, 이집트, 아프리카,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인도

등 당시 기준으로 온 세상에서 다 모인 지식의 총량인 거죠.



알 마문은 번역 작업한 종이 묶음의 무게를 달아 그만큼의 금화를

하사했다고 해요. 이 소문이 아라비아 전역에 퍼지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어요? 아랍인, 시리아인, 유대인, 페르시아인, 터키인,

쿠르드인, 인도인 가릴 것 없이 구름떼처럼 인재가 모여든 거죠.

(나중에 가면 일부 동로마인이나 유럽인들까지 가세했죠.)



치사하게 아랍인만 우대한 전대 우마이야 조와 달리 아바스 조는

민족이나 배경으로 차별하지 않고 철저하게 능력을 중시했어요.

번역 결과만 있으면 보상한다는 원칙이 지켜졌죠.



번역… 이란 작업을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단순히 말대 말을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에요. 언어에는 문화 배경이

녹아들게 마련이므로 상당수 작업에서는 어문의 학술 배경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해졌어요. 곧 전문 번역이 가능한 각

분야의 학자 집단이 모여들고 양성될 조건이 형성된 거죠.



학자들이 모여 뭘 하겠어요. 아무 때나 그곳에 가면 누구도

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토론, 실험, 저술, 연구를 할 수 있는

거에요. 학회가 형성되고 도서관은 학술원이 되었죠. 나중엔

천문 관측대도 만들어줘요. 전쟁으로 갈 곳 잃은 학자들을

받아 피난처도 제공했다고 해요. 대단하죠?



이곳을 체험한 많지 않은 유럽인 학자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도서관과 유사하게 수학, 천문학, 의학 등 분야별로 각기 다른

방마다 수많은 책을 분류해 보관했다고 해요. 당시 유럽엔

그런 거 없었죠. 유럽인 학자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나요.

듣도 보도 못한 고금의 명저가 거기만 가면 다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이슬람 제국 문화의 꽃, 지혜의 집이에요!

고대사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렉산드리아도서관

꼽힌다는 것 아시죠. 고대에 알렉산드리아가 첨단 지식의

전당이었다면 중세엔 바그다드에 이곳이 있었던 거죠.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이집트 해안에 면한 곳..)



하지만 참으로 슬프게도 바그다드 지혜의 집은 지금 남아

있지 않아요. 1258년 원나라 몽골 군과 벌인 바그다드

공방전 때 불타 없어져요.ㅠ 아, 왜 저절로 탄식이…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로마 침입으로 없어졌다는 설이..)



유형의 문화재는 사라졌지만 무형의 지식은 형태를 달리 하여

영원히 살아남아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서적이 정작

본고장 유럽에선 실전된지 오래였어요. 지혜의 집에는 남아

있었어요. 아랍어 번역본이 다시 라틴어로 재번역되어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니, 르네상스의 지적 원동력이 바로 이거에요.



지혜의 집에서 형성된 담대한 학풍은 역사에 이름을 떨친 많은

대학자를 길러내기도 했어요. 너무나 많지만 대표적 인물들은…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인도의 수학을 집대성한 9세기

대수학의 아버지 알 콰리즈미, 그리스와 아랍의 철학과 의학을

종합해 유럽 중세 의학의 기초를 세운 11세기의 이븐 시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서에 주해를 제공해 르네상스 사상에

다리를 놓은 12세기 이베리아의 철학자 이븐 루시드 등이죠.



이븐 루시드가 정립한 사상은 단테 알리기에리에게도 영향을

미쳤어요. 신곡에 그를 회상하며 극찬한 구절도 등장하죠.










르네상스의 역사를 피상적으로만 훑으며 유럽 중심 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단테나 다 빈치 정도 끄적거리는 것으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한 듯이 만족해 하는 실수를,

우리가 흔히 저지르고는 하쟎아요.



조금만 시각을 넓혀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여 애정을 갖고 역사를

바라보면 현대사의 흐름을 결정 지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어느

특정 지역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권 모든

사람들이 전 지구적으로 노력하고 영향을 주고 받은 끝에

이루어낸 결과임을 깨달을 수 있답니다.



지혜의 집에 보존된 고대 철학의 보고가 유럽으로 전달되어

중세 후반 스콜라 철학의 마지막 불을 활활 태웠듯이, 단테는

루시드의 철학서로 소양을 쌓고 코페르니쿠스가 바그다드에서

넘어온 천문서로 지동설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



현대인들이 흔히 접하고 있는 동서양 문화의 증폭 합성은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바그다드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일이랍니다.



아래는 지혜의 집에 대해서 더 알아볼 수 있는 동영상이에요.

아랍 역사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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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V

Super Troupers of Modern Scienc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V. 과학 혁명 Scientific Revolution 



16~18세기 유럽의 자연 과학이 혁명적이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사회 문물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민중의 사상과 생활에

영향을 끼친 광의적 현상을 과학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연 과학’이라고 분류하는 영역의 학술 기반과 초창기

혁신적 진보를 바로 이 시기에 다진 것입니다. 또한 서양 유럽의

백인계 국가가 현대의 사회 변화를 장악하고 주도하게 만든 가장

실천적인 원동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근세의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선 과학이 발흥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죠. 크게 세 가지를 꼽아보면요.


첫째, 르네상스 시기에 새롭게 발견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

학술 문헌을 연구하며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철학 기초와 태세를

일신하여 재정립할 수 있었어요. 흔히 일컫는 신플라톤주의에요.

즉, 인문주의 기반이 없었다면 과학 발전은 요원했다는 뜻이죠.


둘째, 학술적 동기와 지적 수준을 가진 기술자 직업군이 때마침

대거 양성되어 사회 문물 곳곳의 필요와 갈증을 채워주고 있었어요.

갈릴레이나 데카르트 같은 사람들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엔 이들을

대거 수용하여 학회한림원 형태로 양성하는 체계도 있었지요.

대항해포병전 같은 사회적 변동의 영향도 분명 있었겠고요.


셋째, 금속 활자 인쇄술이 급진보하여 서적 출판물 형태로 지식이

퍼져 나가는데 일조했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지식을 얻으려고

수도원 같은 데서 일일이 필사하는 방법으로만 가능했던 일이에요.

지식 보급이 기득권인 사회였다가 이제 평민에게도 열려가는 거죠.


급진적 과학으로 중세의 벽이 가장 먼저 허물어진 곳은 자연 과학 중

천문학였어요. 하늘에 깃든 신의 섭리를 제고해야 했으니까. 폴란드

신부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고대 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이론과

실측 자료가 일치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었어요.


지동설의 생각을 1530년대에 미리 집필해뒀으나 급진적 내용을

발표하기에 신분의 제약이 컸죠. 십여 년 후 죽기 직전에 출판됐고

유럽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선사합니다.


지동설을 천체 역학으로 발전시킨 인물은 케플러의 법칙으로 유명한

독일의 요하네스 케플러였어요. 지구를 포함한 행성이 공전한다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궤적이 타원형이란 케플러 제1법칙을 1609년

신천문학을 통해 발표합니다.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수석 수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당시

최신 발명품 망원경을 개량하여 목성의 위성을 발견합니다. 1632년

천문대화에서 케플러 이론을 바탕으로 지동설을 역설했는데 이로

인해 죽기 9년 전 종교 재판까지 받습니다. 종교 전쟁이 극에

달하던 때인지라 로마 교황청은 민감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새로운 시대를 몰고 올 철학자들도 과학 연구의 방향성을 논합니다.

몸소 과학 실험을 즐기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1620년에 신기관

통해, 군인 출신 수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1637년에 방법서설로 각각

자신들의 자연 철학 지론을 펴 후대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땐 지금의 과학을 자연 철학이라고 불렀답니다.)


영국의 명의 윌리엄 하비는 심장의 펌프질로 동맥, 정맥 및 순환계가

혈액을 공급 받는다는, 지금은 지극히 상식인 원리를 처음 내놓아

생리학 분야에서 시대를 앞서간 인물입니다. 1628년 일이고요.


아일랜드 출신 로버트 보일은 지금 화학의 기본 원리, 보일의 법칙

1662년에 발표했어요. 일정 온도와 일정 질량인 기체의 부피는

압력에 반비례한다는.. 이분은 리트머스 시험지도 발명했어요.


17세기 후반 보일과 같은 시대 영국에서 아이작 뉴턴에 이르러

과학 혁명의 정점이 찍혔다고 보면 됩니다. 과학사상 최고의 명저로

꼽히는 프린키피아,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1687년에 발표해

고전 물리학뉴턴 역학의 시대를 활짝 열어 젖혔어요.


운동하는 물체에 가한 힘이 질량 및 가속도에 비례한다는, 이른바

뉴턴의 운동 법칙은 지구 중력의 비밀을 밝혔고 나아가 모든 우주

천체에 공통적으로 만유인력이 존재함을 인류에 알려줬어요.


뉴턴의 공적은 수학에도 미칩니다. 일찍이 갈릴레이도 한 연구했던

미적분 기법을 개발하여 물리 역학 연구를 진일보 시켰어요. 같은

시기 독일에서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역시 미적분을 완성했고요.


이 시기는 영국과 프랑스가 국가적으로 과학자를 양성하고 독려한

때입니다. 유서깊은 영국 왕립 학회가 1660년에 찰스 2세의 재가로

설립되었고 프랑스 과학 한림원은 1667년에 루이 14세가 만듭니다.


양국의 아카데미를 오가며 가장 활발하게 연구한 사람은 네덜란드

출신의 과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였어요. 토성의 고리와 타이탄

위성을 관측하고, 진자 시계를 발명했으며, 하위헌스의 원리

알려진 빛의 파동설을 1690년 논문을 통해 정립하였죠.

(종전에는 독일식 ‘호이겐스’로 불린 인물)


앙시앵 레짐 프랑스의 공직자인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1785년

학자들 입회 하에 행한 실험에서 물의 조성이 수소와 산소임을

알아내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소라는 개념을 창안하여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우뚝 섭니다. (악덕 세금 징수원 전력

때문에 몇 년 후 혁명군에 의해 참수되는 비운도..)


19세기 인류를 미몽에서 일깨운 최고의 연구는 진화론일테죠.

찰스 다윈이 1859년에 출간한 ‘종의 기원’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어요.


세기말의 마지막 충격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1899년에 출간하면서… 정신 분석학의 과학성 논란은 그렇다

쳐도 인간 내면의 무의식 탐구는 모든 학문에 영향을 줬죠.


이렇게 장구한 역사와 노력 끝에 흘러간 과학 혁명의 최정점을

중세말 기준으로 꼽는다면 뉴턴 역학이 완성된 순간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191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으로

고전 역학을 파훼한 때를 현대사의 모멘텀으로 꼽을 테고요.




미국의 현대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음악사적 중요도도 크거니와

과학자를 소재로 완성도 높은 오페라를 발표하여 종종 화제이죠.

이미 갈릴레이, 케플러, 아인슈타인을 주제로 작품을 발표했답니다.


가장 최신 2009년작 케플러를 맛보시고..



2002년작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대략 이렇구나..



가장 유명하고 오래 된 1976년작 해변의 아인슈타인.. 느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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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

Renaissance, the Rebirth of Humaniti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 문예 부흥 Renaissance 



르네상스, 재생(부흥), rebirth 이야기에요. 14~17세기 유럽인의

생각과 감정을 열어젖힌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예술 운동입니다.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인근

베네치아제노바로 옮겨갔고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제네바를 거쳐 네덜란드, 영국, 폴란드까지 퍼져 갔다고 합니다.


주로 문학과 회화, 조각, 건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유일신 교리의

성상화에 치중했던 중세 성향을 탈출하여 철학적 사고와 예술적

표현의 중심에 인간이란 존재를 대체한 광역 거시적 사조랍니다.


문예를 ‘부흥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

성향을 되살리고 고전으로 돌아간다는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에요.


장장 19세기까지 통일 군주 없이 공화국이나 공국으로 찢어 살아야

했던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로서는 그네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고대 시절 화려했던 문화의 향수거든요.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가 본래는 이태리어인 rinascimento

라고 불려야 정상이지만 19세기 중반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가

불어로 규정하며 대히트를 친 바람에 그렇게 고착해 버렸다죠.


피렌체나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발발한 이유는 말이죠.. 중세 후반에 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한

사람들이 이런 해양 국가의 중추 계급인 상인 집단이었거든요.


이 나라들은 해양 중개 무역으로 성장한 상인들이 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고 과두 공화정 형태의 정치 체제로 빽과 돈줄과 문화

예술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답니다.


이들이 중개한 무역 루트는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소아시아와

중동, 인도, 중국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동방이었는데 보통 이슬람

상단을 통해 향신료, 도자기, 차 등 사치재를 구해 이문을 챙겼어요.


이렇게 넘어오는 과정에서 물자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제국이 잘 보존해온 (정작 자신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대 문물이

역수입되어 사람들을 일깨우고 르네상스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문화적 변동이란 것이 이렇게 정치와 경제의 기반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지라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이 발호하며 동방 루트를

막아버리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쇠퇴하고 맙니다.


14세기 초를 시점으로 잡는 것이 통설인데 이는 이탈리아 문학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활동 기간이 대략

1308년 무렵부터 사망하는 1321년까지 이어지기 때문이죠.


단테가 정계에서 축출된 후 망명 생활을 하며 창작한 신곡

이태리어를 처음으로 문학의 언어로 끌어올린 명작입니다.

중세 유럽인의 내세적 종교관을 엿볼 수 있기도 하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어 국가 대소사를

라틴어 시문으로 남겼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시로 썼으며 고대

문헌을 발굴 연구하여 후대에 영향을 준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와 교류했던 지오반니 보카치오는 열흘이란 속뜻을 지닌

이야기식 서사시 데카메론을 통해 당대 유럽인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고 사회상을 우회적으로 비꼬기도 했죠. 서사

구조는 영국의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로 계승해요.


이탈리아 문학의 태동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요.

네덜란드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우신예찬을 썼고

스페인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창작하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16세기 초를 화려하게 수놓은 예술가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요.


이들은 교황령을 비롯하여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아 오늘날까지

인류적 자산으로 분류되는 초월적 걸작들을 창작해냈습니다.

한두 번 곁눈질 만으로도 거장의 자취가 느껴지실 겁니다.


다 빈치의 모나 리자라든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든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든가…



르네상스는 순수 문예작의 범위를 초월해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요. 이전 시대 거장의 스타일과 작풍이 한창 정치적 격변을

겪던 북부 공화국 인민의 의식 성장을 반영하기도 했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저작하고 폭풍처럼

일생을 살다 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며, 그가 남긴 충격적 사상은

이후 고전적 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정치학 연구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와 동시대에 영국에서는 헨리 8세 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토머스 모어유토피아를 통해 민중을 배격하는 위정자의

위선을 한껏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모어의 실제 삶도 참

극적이었죠. 헨리 8세에게 직언하다가 참수되었답니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집권한 17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뒤늦게 꽃을 피웠다고 봅니다.

현대 영문학의 효시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현대 대중 문화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주 자주 언급됩니다. 재작년에

개봉한 다빈치 코드 3부작 중 최졸작인 인페르노에서는 시종일관

산드로 보티첼리가 15세기 말에 그린 단테 신곡의 삽화가 삽입되요.



물론 레오나르도를 상업적으로 폭발시킨 건 댄 브라운론 하워드죠.

재미는 있는데.. 이 얘기 아직도 믿는 분들 계시려나요.



또한 데이빗 핀처가 모건 프리먼 및 브래드 피트와 작업하여 1995년에

내놓은 히트작 세븐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언급되는 인류의 일곱 가지

죄악이 직접적인 내러티브의 소재로 언급되죠. (미성년자는 주의)



세르반테스는 작품과 함께 영원히 사실 겁니다.

심지어는 뮤지컬로도 살아남을 거에요.

아랜 72년 토니상 공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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