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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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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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8.25
    칼뱅 사상이 자리잡기까지… 오늘날 왜 칼뱅인가
  2. 2020.06.25
    영국식 입헌 의회 정치의 뿌리, 마그나 카르타




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against the World










보헤미아의 얀 후스, 신성 로마 제국의 마르틴 루터,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 등 개혁 교회 운동의 양상은

15~16세기에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루터의 활동이 현대에까지 가장 유명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보수적 교리와 부패 현상에 반대했을 뿐 정작 그 자신은

독일 농민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어요.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바라는 민중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고

로마 가톨릭과 신성 로마 황제의 간섭을 배격하고픈 독일권

선제후들의 입김에 더 부합하는 지도자가 루터인 거죠.

루터교는 태생적으로 꽤 보수적 성향이었던 거에요.



*선제후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거로 추대할 권한을

가진 제국의 대공들을 말합니다. 보통은 오늘날 독일

지역 영지를 관할하는 제후들 중 선도적인 입장의

유력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보면 될 듯해요.



교리 문제에만 그치고 정치 활동으로 발전하지 않는 종교 개혁은

현대적 공화정 역사와 아무런 연속성도 없고 시대사적 의의도

찾을 수 없는 공허한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종교 전쟁의 정점을 찍은 30년 전쟁이 기독교 문제에서 시작하여

종국에 국제 정치로 대단원을 마친 사례에서 증명이 되쟎아요.

교회 개혁의 본질은 정치 구조를 건드려야 하는 거였어요.










개혁 교회 운동을 자치 정치체로까지 확대 발전시킨 장 칼뱅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인물인 겁니다. 근현대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 한 사람만 꼽는다면 — 케플러나 뉴턴, 칸트,

나폴레옹, 마르크스 다 제치고 — 바로 칼뱅일지도 몰라요.



칼뱅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논한다면야 고작 포스팅 수백 개나

논문 수십 편으로도 모자랄 지경이겠습니다만.



아주 심하게 간소화하여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영향

한 가지 정도씩만 썰을 풀어본다면요...



칼뱅의 예정설은 인간의 구원을 사회적 신분이나 인간의 의지와

상관 없이 오직 신의 은총이 정할 뿐이라는 내용으로서 일찍이

5세기에 아우누스티누스가 기초하여 칼뱅이 정립했답니다.



칼뱅의 정치적 가치관에 있어 급진성은 이렇게 인간의 운명이

사회 정치 계급을 초월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요. 현대적 민주

시민에겐 낯설지 않겠지만 중세의 평민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죠. 칼뱅교가 급속도로 퍼진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고요.



칼뱅은 사치와 쾌락을 끊고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에 충실하면

이를 통해 얻은 부를 죄악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전하여

청교도적 자본주의 사상의 씨앗을 낳았다…고 19세기에

막스 베버가 정리한 바 있습니다.



즉 신의 섭리란 것이 인간의 하챦은 의지와 무관하니 사회 계급

같은 제도는 가볍게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점, 바로 이것이

칼뱅 사상의 핵심이에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존 사회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신학적 가능성을 열어준 점이야말로 다른 어떤 개혁 종파보다

칼뱅교가 이후 대세로 자리잡은 본질적 원인이겠지요.



당시 로마 가톨릭이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끼친 가장 큰 병폐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상의 문을 걸어잠가 암흑기가 지속된 것?

면죄부를 판매해 부정한 재산을 축적한 것?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과 정면으로 대립한 것?



평민의 일상적 삶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각성할 만큼

종교 체제와 정치 구도 양쪽 지배자의 결탁 극심한 나머지

그 폐해가 어느 순간 둑이 무너지듯이 폭발했다 보면 어떨까요.



다른 그 어떤 병폐보다도 일상의 안정이 무너진 점이 가장 큰

거에요. 흑사병이나 계속된 대규모 전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거나 못 살게 된 일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에겐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음에 틀림없어요.



물론 역병이 교황 탓이냐 하여 직접 연관성을 따질 수는

없겠습니다만… 천재지변은 논외로 하고 사람이 벌이는

대부분 전쟁은 직간접적으로 교황권 및 가톨릭의

체제 병폐와 연관이 없다곤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불합리한 폭력적 역사의 중심에 십자군 전쟁이란 희대의

병크가 도사리고 있어요. 서울대 외교학과 김용구 교수님은

유럽 역사의 특성이 폭력성 및 전쟁에 있다고 하신 바 있죠.



세상의 근본을 구성하는 평범한 농노들의 삶이 인간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위협받는 상황이 되니, 그들도 본능적으로

모순의 구심점이 구교 가톨릭 체제의 비효율과 무능에 있음

직감하게 되는 날이 온 거에요.



중세 말엽의 사람들 의식이 어느 순간 그런 변화에 직면한 거죠.

인문 부흥이니 종교 전쟁이니 하는 피상적 현상은 그렇게 안으로

끙끙 앓고 있던 유럽인의 무의식이 폭발해버린 역사적 외관에

불과한 겁니다.



농노들의 자의식 각성이 유전자나 면역 체계라면, 종교 전쟁은

피나고 고름 터지는 자각 증상인 셈… 칼뱅과 같은 개혁가들은

증상을 유도하는 외부 기제, 바이러스 같은 것…?

굳이 비유하자면 뭐 이런 식?



이미 드러난 체제의 모순점을 교리로 확진하여 확인 사살시켜

주는 진단의 같은 역할… 중세사에서 장 칼뱅 역할론

그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칼뱅이 설교한 교리가 정치 체제의 본질을 꿰뚫고 시대를

관통하여 현대에까지 명맥이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고요.

그가 이렇게 중차대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제도적

기제는 교회법교회법정이었습니다.



*교회법은 그렇다 치고 교회법정이란 번역어를 용감하게

선택한 데에 비판이 있을 줄 압니다. 컨시스토리가 용어

통일이 안 되어 있음도 알고 있고요. 신학 논쟁이 목적이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쉽고 빠른 이해를 돕는 것이 포스팅의

목적이니 그런 취지에서 널리 양해해 주시면 좋겠네요.



개혁 교회의 가치관이 어떻게 가톨릭 체제를 대체하여 새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공동체 신앙 시스템이

교회법입니다. 교회법정은 교회법을 민간에 해석 적용할

자치 기구를 뜻하고요.



칼뱅이 두번째로 제네바로 청빙되어 남은 평생을 머물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시의회의 약속대로 1541년 11월

칼뱅식 교회법이 가결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칼뱅식

엄격주의 통치의 공식적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에요.



예장 교회를 다니시는 분은 알겠지만 장로교의 직제는

목사, pastor — 교사, doctor — 장로, elder —

집사, deacon ..의 분업적 체계로 구성되요.



각각의 직분과 역할도 다르죠. 목사는 성직, 교사는 교육,

장로는 운영, 집사는 복지를 각각 맡는 식으로 효율성을

기하여 공동체에 봉사하는 구조에요.



바로 이 구조가 칼뱅의 1541년 교회법에서 비롯된 거에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장기간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근간 시스템을 창안한 셈이죠.










교회법정, consistory.. 라고 부르던 심판 기구도 창설해요.

아직까지 교회법이 공동체 생활의 가치관을 대표하던 중세

시절이므로 민간의 관습을 해석할 기관이 필요했어요.

(로마 가톨릭도 똑같은 역할을 했는데 그 경향이

너무 보수 반동화하여 민심을 잃은 거죠.)



사실 우리가 현재 이미지로 떠올리는 독단적 통치자 칼뱅의

행적은 이 교회법정을 통해 이루어진 판결의 결과였어요.

특히 그가 춤이나 카드 놀이 같은 유흥 및 쾌락 행위까지

금지하는 급진적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제네바 유력

가문 중 일부는 꽤 오랫동안 저항하며 그와 맞선 거죠.



칼뱅 본인이 한동안 외국인 목사 신분이어서 제네바 시민권이

없었거든요. 교회법정 위원으로서 신학적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거에요. 시민권은 죽기 몇 해 전

가서야 획득할 수 있게 되요.



단 오해하면 안 되는데 기존 정무 당국인 시의회가 담당하는

사법 집행의 기능은 엄연히 양립하는 구조였어요. 예를 들어

교회법정이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벌은 파문이었고 이에 따라

사형 등 형벌이 필요할 경우 집행을 의회가 맡는 구조인 거죠.



정교 일치의 신정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거에요. 비록 당대에도 매우 엄격하게 기준을 세워 일부

시민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개혁 초기에 칼뱅주의 노선이

빠른 시일 내 자리잡은 원동력 또한 이런 시스템에 있었죠.



이런 교회법정이 자리잡기까지 칼뱅의 삶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엄격주의의 반대파들이 칼뱅 신학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다른 개종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칫

개혁가들은 언제라도 목숨이 달아날 수 있었어요.










미카엘 세르베투스 논란은 바로 그렇게 칼뱅의 입지가 위태로운

때 벌어진 일이에요. 삼위일체를 부정한 극단론자 세르베투스를

끌어들여 교회법정 자체가 진흙탕 싸움이 될 뻔 했죠.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의학자로서 업적도 남겼지만

신학자로서는 싸움닭처럼 논란을 몰고 다니는 요주의

인물이었어요. 삼위일체를 부정하여 유럽 전역을 들쑤셔

놓다가 제네바에 와서 결국 교회법정에 섰던 거죠.



칼뱅은 교회법정에서 세르베투스와 한바탕 설전을 벌였어요.

삼위일체 부정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선을 넘은 일이긴 하쟎아요.



답정너의 심판처럼 보이긴 하나 과연 형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같은 애매한 문제도 있어 쉽지 않은 사건이었어요.

판결을 주도해야 할 칼뱅의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도 않았고..



시의회는 인근 스위스 자치주들에도 법리 해석에 대한

의견을 회람했고 그들 역시 ‘우리 심판이라도 마찬가지일 것’

이라 견해를 모으니 화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해요.



요점은 이러한데 세르베투스 건은 현재의 신학자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떡밥인 것 또한 사실이에요.



논란의 본질인즉슨, ‘칼뱅이 시민권자 신분도 아닌데 뭐 얼마나

독단적이었겠냐’는 옹호론과 ‘칼뱅이 얼마나 독재자였는지 이

판결 하나 보면 알 수 있지 않냐’는 비판론으로 대립하는 거죠.



어떻게 보이시나요? 본 포스팅은 주인공이 칼뱅이니까

어느 정도는 비호하고 편애하는 쪽으로 서술했어요.



이에 반대하신다면 다른 저작들을 참조하기 바래요.

(그리고 거듭 밝히지만 기독교 신자 아니에요.)










세르베투스 논란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그의 정적인 유력

가문이 가톨릭과 내통한 혐의로 된통 걸리는 일이 생기니

그때부터 칼뱅의 정치 세계는 평화로워져요. 1555년이죠.



때마침 몇 달 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가 공인된

해이기도 해요. 이때 칼뱅교는 공인을 못 받았고.

(칼뱅교 공인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1648년)



칼뱅주의 신학이 자리잡기까지 과정은 이렇게 험난했어요.

그리고 이후엔 다른 어떤 개신교 종파에 비교해도 훨씬 더

급속도로 유럽 전체에 교세를 뻗어 나갔고요.



영국으로 건너간 칼뱅교는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정착해요. 영국 칼뱅교도를 청교도로 부르는 건 아시죠.

이후 세계사의 중심 세력으로 쑥쑥 성장하죠.



사실 오늘날 최강대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칼뱅교의 분파인

청교도들이고 미국의 현대 정치에서도 곳곳에서 청교도식

엄격주의 윤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에 장 칼뱅의

영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우리는 개신교도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장로교 계열인

전 세계 유일한 나라에요. 예장 계열이란 종파이죠.

가끔 사회적 문제도 일으키긴 하는데 모든

신자가 다 그렇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아래 남자분은 다소 장황하게 변을 늘어놓는 듯도 보이지만

칼뱅주의 신학의 핵심을 경쾌하게 설명하는지라 링크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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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Magna Carta Libertatum,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현대 영국 불문 헌법의 가장 오래 된 법원*으로서

대헌장의 의의는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편이에요.



*법원 = 사법부 기관 시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법을 해석 적용할 근거로서 참조할 성문 법전이나

관습법 등 일체의 범위.. 法院이 아니라 法源...



charter는 영미법 중 영국 권역에서 협약, 계약, 헌장,

공인, 승인, 인증, 등기, 등록(명부) 정도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말이고요.



미국에서 certify나 register로 받을 법한 표현에

이 말이 들어가는 영국권 실무 용어가 많아요.

현대어 용법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라틴어 원 용어를 풀어보면 자유 대헌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여기서의 자유란 신민 전체가 아니라

13세기 당시엔 주로 귀족으로 국한한 의미였고요.



자유민 전체 범위로 확대된 것은 16세기. 역사 발전의

흐름을 좇아 법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때 이 능동적인 법리 해석에 앞장선 인물이 언젠가

포스팅한 적 있는 에드워드 코크 대법원장이에요.

권리 청원을 주도하여 정치 발전에 기여한 분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 존 왕의 전제적 실정에 반기를

든 귀족들이 역사상 최초로 왕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도록

왕으로 하여금 조인시킨 문서를 가리켜요.



귀족 평의회, Council of 25 Barons란 개념이 왕권을 제한할

기구로 등장하는데 영국식 내각제 의회 민주 정치의 원형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겠고요. parliament의 전신이겠죠.



King John of England.. 영국사에서 지지리도 인기없는

군주의 대명사에요. 하필 선왕인 형 리처드 1세사자왕..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지라 더더욱 비교되어 까이는 거죠.



사자심왕 리처드가 대중의 상상과는 달리 불어를 구사하고

내정에 소홀한 군주이긴 했어요.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전쟁 능력이 과장없이 진짜배기인 건 백퍼 옳아요.



오늘날 민족 국가의 관점만을 전격 적용하여 사자심왕 리처드를

평가할 순 없지만 당대에도 그렇고 이후 역사에서도 영국인들의

보편적인 애정을 듬뿍 받은 군주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죠.



잊을 만하면 줄기차게 영화화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쟎아요.

하필이면 즉위 직전에 자기 형과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인지라

존 왕이 더욱 밉살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거고요.



실제 존 왕의 실정은 위태위태했어요. 이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가 바다 건너 프랑스 카페 왕가 주변에 영지를

갖고 있어 우리가 아는 세력권 지도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덧붙여, 플랜태저넷 왕족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지금과

많이 다른 중세 영어는 농노들의 말이었다 하고요.)










원래 사자심왕이 프랑스 땅 영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의 라이벌이던

카페 왕족 필리프 2세가 공격하여 지휘관으로선 비교도 안 되게

능력없는 동생 존 왕이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요.



이를 탈환하기 위해 존 왕이 무리하게 군비를 충원해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세금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귀족과 자유민, 농노들이 똘똘 뭉쳐 반발한 것…

이 점이 대헌장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문건상의 정치적 자유가 주로 귀족에게 국한한 건 사실이지만

귀족들이 반발하는 데에 시티 오브 런던 길드 소속 자유민들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노들이 적극적으로 합세했기에 헌장의

시대 정신이 시민의 총의를 담았다고 해석할 근거가 충분한 거고

무엇보다 막장 상황을 조장한 당사자가 존 왕 본인이었으니까요.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바다 건너서 십 년도 넘게 전쟁 노름에

빠졌지만 워낙 전략가로서 무능력한지라 허망하게 패배하고

돌아온 거에요. 거기다 귀족의 딸을 범하려던 적도 있다나요.

귀족들이 있는 대로 꼭지가 돌 수밖에요.



존 왕에게 그 어떤 억울한 상황 요인 하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쉴드 쳐줄 만한 꺼리도 없이 본인의 무능에다 통치자로서

기본 인성의 실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귀족들이 급기야 거병하고 교활한 존 왕이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아첨하여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지만

반란군이 런던 성곽을 포위하고 국왕파 내부 동조자를

포섭하는 등 상황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스티븐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로 양쪽이 템즈 강 남쪽에

모였고 왕권 제한을 약속하는 문서에 존 왕이 조인해버리는

듣도 보도 못하던 초유의 사태로 발전하죠.



1215년 최초 조인시엔 서수로 조항 구분이 없었어요. 1759년

윌리엄 블랙스톤 대법관의 영국법 주해라는 이론서를 통해

총 63개조로 정리되었죠.



대부분의 조항은 이후 일반법으로 대체 입법이 이루어졌으니

역사적 의의 이외에 현대적 의미는 없는 편이긴 한데요.



제12조를 보면 ‘군역 대납금 등 모든 과세는 오직 (시민의) 총의에

의해서만 이를 부과할 수 있다’고 하여 1215년 상황을 직접 엿볼

수 있고요.



제39조가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하거나 그 법익을 강탈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현대에 와서도

재판 법원으로 유효한 세 가지 조항 중 하나입니다. 현대적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법조문이자 법리임을 알 수 있겠죠.









이 때부터 영국의 민주 정치가 시작되어 의회가 짜잔 열리고…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 한국에서 영국사를

잘 안 가르치기도 하니까 — 사실 이 문서는 조인 직후부터 그

효력을 의심하고 1215년 해프닝은 사실상 상징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진실에 더 부합한답니다.



당장 조인 직후 존 왕은 (치사하게도) 교황에게 쪼르르 달려가

헌장 무효화를 요청하고 교황이 이를 교서로 내려 내전이

벌어지거든요. 개싸움인 거죠.



이후 국왕들과 몇 차례에 걸쳐 개정도 하고 밀고 당기고 개싸움이

지속되는데 핵심은 이거에요. 왕은 안 지키려고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리고, 귀족들은 틈날 때마다 문서 들이밀고…



그럼 오늘날 민주 정치의 효시 어쩌구…는 뭔데? 하실 텐데..

정작 옛날 옛적 무슨무슨 종이 쪼가리에 서명했네 어쨌네..

그런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민주 정치란, 문서나 법전의 종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주권을 당연시하는 동시대 시민의 사회 의식시대

정신에서 나오는 힘, 바로 그것 아니겠어요?



대헌장이 역사적 명분과 권원으로서의 힘을 갖게 된 시기는

전술했듯이 16~18세기. 바야흐로 계몽 사상으로 무장한

자유 시민의 정치 의식이 성숙하여 그에 합당한 전례를

능동적으로 찾아 공부하던 그때인 거죠.



이때에야 비로소 대헌장에 헌법으로서의 권위가 생겨난 거에요.

엘리자베스 1세제임스 1세의 자랑스런 치세를 몸소 겪고

네덜란드와 맞장뜨며 강한 나라로 가는 발판을 자기 손으로

일구어 가던 잉글랜드 삶의 현장의 지성인과 신민들…



그들이 성숙한 체제를 만들어 후손에 물려줘야 한다는 자의식에

스스로 눈을 뜬 거에요. 물론 겪어야 했던 세월은 힘들었어요.

허나 권리 청원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명예 혁명

권리 장전의 지난한 세월을 통째로 견뎌내고 더러는 고난에

희생되는 와중에 공동체가 지향할 가치를 찾아낸 거에요.



찾고 찾다 보니 자신들의 뿌리는… 아,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에

있었던 것이로구나. 몰랐었는데, 이젠 스스로 알게 된 거죠.



제헌절이 따로 없는 영국… 고작 달력 쪼가리에 기념일을 박는

것이 중요할까요. 박물관에 잠자던 대헌장의 거울에 비친 자신들

마음 속에 헌법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은 거에요.



에드워드 코크, 올리버 크롬웰, 존 로크, 윌리엄 블랙스톤

이런 이름들이 중요하다기보다 이들 뒤에서 세상을 움직인

평범한 영국의 시민들에게 더 큰 헌사를 돌려야겠죠.



이런 중차대한 시대 정신을 담고 있기에 수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대헌장을 법리적으로 계수했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연방 헌법UN 인권 선언



우리나라도 마그나 카르타란 말이 고유 명사 내지

관용적 수사로 발전한 것 보면 제도권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헌장의 현대적 이모저모를 다시 새기는 계기였길 빌고…

대영 도서관이 마련한 귀여운 동영상을 보며 즐겨봐요.









그리고 리처드 1세 얘기 나온 김에, 역대 영화화 사례 중

사자왕을 가장 포스 넘치게 묘사한 히트작을 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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