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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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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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V : 근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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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국제관계 및 근현대 외교사의 주요 사건들




English Politics from Tudor to Stuart ..

Until Ended Up with the Petition of Right






권리를 청원하다, Petition of Right..

누군가의 권리에 관해 간언하는 주청을 드린다는 뉘앙스에요.



그 누군가란 자유민 또는 자연인을 가리킨다고 하겠고

왕께 주청 드렸다는 건데 그 왕은 찰스 1세였어요.



찰스 1세를 거론하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6~17세기 잉글랜드 왕조 역사를 짚지 않을 수 없어요.



플랜태저넷, 튜더, 스튜어트…

영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인데, 이거 뭔가요?



왕가 가문의 이름이라고들 아실 텐데 사람 이름의 성,

last name인 건 아시나요들. house of Tudor.. 이러면

Yi dynasty.. 이렇게 부르는 것과 유사한 거에요.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으로 플랜태저넷 사람들의 씨가

말라버려 할 수 없이 핏줄 긁어모아 개창한 왕가가

16세기의 튜더 왕조에요. 헨리 7세였죠.



언젠가 헨리 8세를 짚고 넘어간 적 있는데 이 사람이

16세기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중추적인 군주였어요.

헨리 튜더.. 전임 헨리 7세의 아들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헨리8세-바로알기



튜더 시대의 가장 유명한 왕이기도 했고요.

또 튜더 왕가 최고의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해요.



엘리자베스 튜더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장장 만 44년을 다스리며 그레이트 브리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진, 영국 역사가 사랑하는 군주입니다.



여왕의 치세를 과연 태평성대라 할 수 있었는가, 여왕은

정말 좋은 군주였던가에 대해 오늘날 여러 가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이 시기 누구보다 오래 다스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앞뒤

다른 군주에 비해 자기 정치를 할 시간과 기회가 충분했던 것,

그래서 긍정적으로 볼만한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점이죠.



잘못이라 할 순 없지만 (중세 관점에서) 여왕의 치명적인

흠이 있었는데 혼인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즉, 튜더

왕가의 대가 끊길 것이 미리 예견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스튜어트 왕조입니다.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승계하여

동군 연합의 새 왕조를 개창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거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같은 사람, 다른 이름의 군주인 거에요.



제임스 1세… 평가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려 오늘날

영국 사학자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군주일 거에요.



이 당시 영국 군주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어요.

바로 종교 전쟁이죠.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에 이르기까지, 교회

개혁으로 등장한 청교도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이들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골칫거리였어요.



청교도는 영국 땅의 칼뱅교 신자를 일컬어요. 가톨릭과

많은 교리를 공유하는 신교인 영국 국교회가 있었고..

평민 중 가장 많은 숫자는 여전히 가톨릭이었어요.

청교도는 스코틀랜드와 제3계급에 분포했죠.



*중세 유럽 종교 정치의 폐단을 논하자는 것일 뿐, 현대의

가톨릭교나 성공회를 비난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구요.










국교회를 헨리 8세가 만들었기 때문에 후임 군주가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냐에 따라 나라의 종교가 요동을 쳤어요.



헨리 8세 국교회, 에드워드 6세 국교회, 메리 1세 가톨릭,

엘리자베스 1세 다시 국교회.. 이런 식이었죠.



군주에 따라 종교가 바뀐다는 것, — 감이 오시나요.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종교 신자는 박해하고 탄압하고

더러 죽였다는, 그런 끔찍한 의미라고요. 지금 중세랍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는 서로 배다른 남매에요.

메리의 모친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아버지 이혼으로

쫓겨난 사람.. 메리가 극렬 가톨릭일 수밖에 없는 이유죠.

평생에 걸쳐 부친과 신교를 원망했겠죠. 그렇긴 하나…



메리 때 종교 탄압을 블러디 메리라고 따로 지칭하긴 해요.

그런데 그 정도 사형 집행은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때도

있었어요. 메리 여왕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평가라 할 만해요.










이런 험한 때 제임스 스튜어트가 왕위에 올랐어요. 스코틀랜드

출신이니 그 자신은 청교도의 정신을 백번 이해할 입장에

있었어요. 어려서도 청교도식 교육을 받았다고 하죠.



그러나 연합 왕국의 군주로서 정치적 입장은 개인의 입장과

같을 수가 없었어요. 튜더 가문이 개창한 국교회의 기득권을

해치는 건 국가의 기틀을 흔드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임스는 가톨릭과 청교도 둘 다 적당히 탄압하고

국교회의 근본을 세우는 쪽을 선택해요. 독재자라는 비판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나마 중도를 지킨 결정이 아니었나,

본 블로거는 솔직히 할 만큼 한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가장 유명하다는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한

문화적 통합의 업적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와 대립각을 세우며 살짝살짝

무시 스킬을 시전하는 튜더 군주들의 전통 아닌 전통이

제임스 때에도 이어졌다는 후대의 비판은 유효하겠죠.










제임스 보고 그나마 낫다 할 수 있는 것이, 후임자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였다고 볼 수

있거든요. 1625년 그의 아들로 즉위한 사람은

찰스 스튜어트, 찰스 1세 국왕이었어요.



찰스는… 종교 정치란 면에서 매우 갑갑한 왕이었어요.

국교회를 신봉했고 처가가 가톨릭인지라 가톨릭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국교회적 반동 조치를 도입하니 어땠겠어요?

스코틀랜드청교도젠트리, 당시 영국을 지탱하던

세 집단이 엄청나게 반발하는 결과를 낳게 되요.



탄압과 처형이 따랐겠죠? 거기에 한창 대륙에서 진행

중이던 30년 전쟁에 나라 살림 생각도 안 하고 마구

뛰어들어 용병 경제 창출에 이바지하신…ㅜ



왕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왕권 신수설이란 사조가 한몫을 해요.










일찍이 16세기 말 로마법 법률가인 장 보댕이 신학,

정치, 경제 등 분야에 걸쳐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요.



보댕의 주된 논제는 로마 가톨릭 교황이 프랑스 왕국의

군주 통치권에 행사하는 지나친 간섭에 반대하고 강한

통일 왕정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보댕

자신은 평생 가톨릭의 신앙을 유지했지만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절대 왕정 체제는 이런 보댕의 사상에

힘입은 바가 컸는데, 재미있는 건 보댕이 영국의 왕당파

의회파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에요.



로버트 필머는 보댕을 계수하여 왕권 신수설을 주장한

대표적 인사였어요. 그의 유작은 앞으로 17세기 후반에

벌어질 왕정 복고라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쳐기도…

(나중에 논할 기회 있을 겁니다.)



찰스 1세가 설치는 데는 이런 당대의 흐름이 받쳐준 면이

있었어요. royalist라고.. 왕당파란 정치 집단의 중심

사상이 왕권 신수설이었죠. divine right of kings..










막무가내로 종교 반동 및 전쟁이 휘몰아친 상황.. 막대한

전비와 배상금을 해결하기 위해선 세금이 필요했어요.

이에 과세를 획정하라고 의회를 소집한답니다.

평소 무시할 땐 언제고…



이때가 즉위 후 겨우 2~3년 지난 시점인데 나라 꼴을

이렇게 망쳐 놓으니, 안 되겠다 싶어 의회 정치의 빛나는

전통을 기억하는 귀족들이 반론에 시동을 걸어요.



언젠가 포스팅한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 경이

여기에 앞장선 대표적 의회파 정치인이에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멋대로 용병을 써 전쟁을 일으키고 용병의 전비를 평민 가구에

떠넘기는 망나니 왕을 통제해야 한다는데 의회파 귀족들이

뜻을 모았으며 코크 경이 이 생각을 문서로 기초하죠.



또한 국왕을 압박하는 극단적인 형식으로 가지 않고 군주에게

자유민의 권리 확보를 ‘소청’하는 형식으로 완화하여 찰스가

한결 받아들이기 편하도록 출구 전략을 세워주자는 혜안도

코크 경의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탄생한 국왕과 의회 간 협약서가 바로 우리가 아는

권리 청원, Petition of Right.. 라는 문서랍니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의 불문 헌법 법원 중 대헌장 다음

순서 정도에 꼽을 중대한 문건이면서, 미합중국 건국 및

미국 헌법 수정안 제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적이죠.



청원의 내용은 흔히 4대 원칙으로 알려져 있어요.

조항이 넷이란 뜻이죠.



첫째,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것..

둘째, 군병을 자유민 사유지에 주둔시킬 수 없다는 것..

셋째, 자유민을 명분 없이 투옥할 수 없다는 것..

넷째, 평화 시기에 함부로 계엄령을 공포할 수 없다는 것..

(주어는 모두 존귀하신 국왕 전하...)










과세할 수 없다는 건 이 사단이 모두 찰스가 절차 무시하고

세금을 획정하려 하다 보니 당연히 나온 조항이겠고요.



오늘날 현대 민주 정치에서도 세금을 정할 수 있는 조세권

입법부만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이지요. 행정부가

단독으로는 절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어요. 이 전통이

여기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거랍니다.



찰스 왕이 용병으로 구성된 군사를 무단으로 자유민들 집에

주둔시켜 버렸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 군사들

먹고 입히고 재우는 건 너희들이 부담하란 뜻인 거거든요.



국방 운영의 핵심은 사실 전쟁 기술이 아니라 군수와 보급인

것… 아시죠? 전쟁은 순간이지만 군사를 유지하는 건 평시에

엄청난 돈을 부담해야 하는 일 아니겠어요. 평시의 군대란

밥먹고 싸움 연습하는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이로 인해 자유민 중 선의의 피해자가 엄청 나온 관계로..

두번째 조항이 나오게 된 거고요.



이런 주둔 조치에 반발한 자유민들을 또 엄청나게 투옥하고

탄압했어요, 못난 찰스 왕께서. 재판도 없이, 영장도 없이.



세번째 조항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거고 habeas corpus..

라고, 근대 공법에 등장하는 인신 보호 영장의 법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죄형 법정주의 같은 현대적 형법 법리를

의회 정치의 역사에서 그 맥락을 찾아볼 수 있는 거에요.



마지막 조항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왕께서 심심하면 계엄을 선포하시니…

별 명분 없이 그냥 자기 말 안 듣는다고..ㅜ










다른 때 같았으면 상원이 열심히 나서 국왕 쉴드를 쳤을 텐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대헌장 파괴의 현장인지라, 영국 의회

역사상 보기 드물게 상하원이 대동 단결하여 가결시켰다죠.



대헌장… 예, 1215년 마그나 카르타 맞습니다. 13세기 이래

잉글랜드의 의회 정치란 이것이 지켜지는 둥 마는 둥 오락가락

들고 낢을 반복한 요지경이었다 보면 대략 맞을 거고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영국입헌의회정-마그나카르타



의회가 강할 땐 대헌장을 지키라며 군왕을 압박하고 반대일 땐

왕이 의회를 무시하거나 문을 닫아 버리거나 하는 상황이 약

4백 여년 역사의 각 단계마다 주기적으로 펼쳐진 거에요.



대헌장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재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조부터고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강력한 군주 집권기엔 의회와 적당한 거리에서

반목과 줄다리기 상황을 연출하곤 했어요.



이제 17세왕들께서 본격적으로 의회 정치의 판을 손수

깔아주시는 시대(!)로 넘어와선, 권리 청원을 필두로 하여

별별 익사이팅한 사건들이 요지경처럼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바야흐로 인간사 정치의 문화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하는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원대한 풍경화의 전주곡처럼 등장한 1628년 6월 7일

영국 역사의 한 페이지는 바로 권리 청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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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V

Rise of Western Modern Philosopher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V. 근대 철학 Modern Philosophy 



모든 학문은 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가지를 치고 생장합니다.

철학은 정치경제 등 사회 현상 전반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요.

유럽 역사에서 근대 철학의 태동이란 현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현대 문화의 바탕을 형성하죠.


인문주의의 부활, 무역 항로의 개척, 프로테스탄트의 발호,

자연 철학의 과학화 등 지금까지 상술한 각 현상들이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점차 사회가 생동하고 변화하는데,

이를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철학자들이 맡은 거죠.


16~17세기를 살며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한 초기 철학자들이

선각자로서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 철학

극복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을 되살려 그네들이 살던

현재의 시간에 적합한 시대적 사상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죠.


초기 선구자들을 지역과 성향에 따라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를 아우르는 서유럽 대륙에선 합리주의,

rationalism으로, 영국에선 경험주의, empiricism으로 부르며

각자 독자적 체계를 조성했어요.


이성과 경험으로 나뉘는 흐름을 당시에 인지한 건 아니고 정작

후대에 이 일을 한 사람은 칸트입니다. 현대 철학의 하위 분과를

구분하면 인식론, 형이상학, 존재론, 윤리학, 논리학, 미학, 정치

철학 등인데 대륙과 영국의 논쟁은 인식론에서 출발하였죠.


합리주의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절대 진리를 찾아 인식의

근본으로 삼자는 생각입니다. 30년 전쟁 참전 중 신비한 꿈을 꾸고

학문의 길에 들어선 르네 데카르트가 선구자로서, 그는 철학, 수학,

광학, 천문학 등 방대한 연구를 한 대학자이자 철학의 아버지에요.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에서 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

반복하여 종국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의심할 수 없는 제1원리로 제시했어요. 이로부터 시작하는

연역적 추론을 통해 신과 사물의 존재를 증명하자는 거죠.


경험주의는 사물의 현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사유자가

직접 경험한 지점으로 잡자는 생각으로서, 평생 법관으로 산

프란시스 베이컨이 데카르트보다 수십 년 앞서 늘그막에

실험과 저작에 몰두하며 새로운 생각을 집대성했어요.


그가 죽기 여섯 해 전 1620년에 집필한 신기관은 그리스

이래 과학 연구론의 체계를 장악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

의문을 품고 귀납적 실증으로 진리에 접근할 것을 주문했고

(아는 것이 힘이다..란 명제) 우상론에서 - 종족, 동굴, 시장,

극장 - 인간의 보편적 편견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대륙의 합리론을 계승한 이는 네덜란드의 바뤼흐 스피노자와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였어요. 둘은 데카르트와 함께 3대 거장으로

꼽힙니다. 스피노자는 1674년 에티카를, 라이프니츠는 1710년

신정론을 출간하여 인간 이성의 탐구를 이어갑니다.


에티카는 스피노자 필생의 역작으로서 살려는 본능적 의지,

코나투스가 지배하는 감정을 통제하려면 오직 이성에 기댈 수

있을 뿐이라 썼죠.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철학과 신학이

서로 모순되지 않아 양자 모두 신의 섭리일 뿐이라고 설파해요.


영국의 경험론은 존 로크가 계승하고 데이빗 흄이 발전시켜

후대로 넘어갑니다. 1690년에 로크가 출간한 인간오성론

백지 상태의 인간이 경험으로 지식을 축적한다고 봤지요.

(빈 서판 같은 백지 상태, 라틴어로 타뷸라 라사라고..)


한편 계몽주의가 발전한 사회계약론이 주류를 형성하여 공화주의

정치 사상으로 또 하나의 줄거리를 이룹니다. 토머스 홉스가 단초를

풀기 시작하죠. 1651년 명저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자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계약을 맺고

국가를 세운다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존 로크는 왕당파가 왕권신수설을 부활하려는데 반발해 1688년

통치론에서 그해에 일어난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인간의 자연권,

피치자로서의 저항권, 선거제와 권력 분립의 원리, 노동 가치설

등의 주제로 미국과 프랑스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장 자크 루소는 1762년 출간한 동명의 저서로 아예 사회계약론

완성한 사람이죠. 양도할 수 없는 국가의 주권은 오직 인민에게서만

나오며 자유의지와 사회계약으로 공공선을 추구한다고. 익숙하죠?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정립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

기반을 완성하지만… 본인은 혁명 발발 11년 전에 사망…ㅜ


이렇게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발전한

세 줄거리가 합하여 근대 철학이 집대성되는 전기를 맞습니다.

네, 이마누엘 칸트.. 지구상 역대 최고의 지성이 등장해요. 짠.


칸트가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에요. 첫째, 합리든 경험이든 계몽이든

그때까지 발전한 유럽의 모든 철학을 종합하여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신학, 미학, 존재론, 정치학 등 전 영역을 집대성한 체계를

완성하고 수백 년 후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에요.


둘째, 이렇게 완성한 독일 관념론의 비판 철학이 제시한 모든 논제가

결국 선험적 이성이 주재하는 사상의 중심에 인간을 주체로 놓았고

이는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만에 유럽이 신의 그늘을 드디어 완전히

벗어나 인류가 최상위 존재로 올라섰음을 의미하는 거란 점이죠.


1781년 순수이성비판,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비판

차례로 출간하며 그는 인류의 철학을 종합합니다. 전 영역에 걸쳐서요.

이성을 중시하나 경험론을 끌어와 a priori, 선험적 관념론을 세웠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어떻게 그를 계승하여 발전시킬지가 관건이었죠.

게오르크 헤겔이 독일 관념론의 적통을 계승했습니다. 칸트 만큼이나

철학의 전 영역을 통찰하며 절대적 관념론변증법, 역사 철학

종합하여 수많은 헤겔주의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18세기 공화주의를 일단락짓고 맞은 혁명의 시대에 사상의 조류는

자유주의로 흘러갑니다. 제레미 벤담은 1789년 저서 도덕입법원리

통해 공리주의를 확립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했고

후대의 자유주의자에게 영감을 줬어요.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 자유론으로 19세기 자유주의 정치 사상을

종합한 대가입니다. 이미 벌어진 정치 현상의 사변을 세운 것이 밀의

역할이었다면 카를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론으로 미래에 등장할

사회주의 정치 체제의 철학 기반을 제공하는데 앞장섰죠. 18세기

말엔 에드먼드 버크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다진 적도 있었어요.




영화의 소재로는 철학자 자신보다 철학책 속 논쟁 주제가 더

알맞을 겁니다. 인식론이 와닿지 않는다면 매트릭스

숟가락 씬을 다시 한번 음미하는 것이 좋겠고요.



리들리 스코트해리슨 포드와 작업한 블레이드 러너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을 탐구했었죠. 같은

감독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존재를 파고 들었고요.



인과론의 비극적 참상은 2004년작 나비효과

처절하리만치 극적으로 묘사했었고요.



욕망에 빠진 인간의 윤리적 모순에 대해선 작고하신 앨런 파큘라

감독이 노년에 작업한 1990년작 의혹(무죄추정)을 추천해요.

해리슨 포드가 여기에도… 출연진 면모와 연기가 엄청나죠.

(원제는 Presumed Innocent.. 미성년자 특히 주의)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돌아가시기 전 블루-화이트-레드 시리즈에서 다루었는데요.

이 연작의 프로토타입 작품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1991년작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렌느 야콥이 여기서 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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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jor Incidents from European History over

International Relations Realm




국제 관계학의 역사에서 시대별 맥락을 짚을 때 반드시

검토하고 분석하는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 있어요.


그 역사와 시기를 보면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백여 년

언저리의 간격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하여 매우 흥미롭죠.


오늘은 이런 국제적 사건과 국가간 조약

역사를 요약하여 정리해 볼까요.




1453년, 콘스탄티노플 함락 Fall of Constantinople 



1453년이 중세를 끝장 낸 연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해 서양 중세사 최고의 사건인즉슨.. 비잔틴 제국, 즉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한 일일테죠.

무려 2200년을 이어온 제국이 멸망한 사건이니까요.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 통치의 절정을 찍고 6백 년 넘게

존속한데다 폐쇄적 기독교 문화 속에 골골하던 유럽을

아득히 초월했던 14~17세기 세계의 패권국이자

동시대 유럽 군주들 공공의 적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의 나비 효과로 지중해 동쪽 항로가

막혀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서양 일주 항로를 개척했으니

역사의 거대한 새옹지마이자 아이러니라 할 수 있겠죠.

(동양의 신비… 후추를 어디서 수입하냐고?!)


이베리아 반도의 대항해 시대, 피렌체 등 도시 국가들의

르네상스 인문 혁명, 거기에 북독일의 종교 개혁이 바야흐로

적정 혼배합하여 유럽의 근대를 열어 젖히는 찰나였어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Peace of Augsburg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으로 촉발된 종교 개혁

일단락된 사건이자 루터교를 공인하여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신교를 인정한 계기의 바로 그 사건입니다.


16세기 중반 합스부르크 황제 카를 5세에 맞서 전쟁하던

신교 영방국들이 페르디난트 1세와의 극적인 합의를 통해

루터교 종파를 공인한 군주간 합의 사건이라 볼 수 있어요.

(페르디난트는 카를의 동생이자 독일 대리 통치자..)


페르디난트는 당시 선제후와 농민을 중심으로 들불처럼

번져간 교세를 꺾기보다 상호 협력하여 자치를 인정하는

개혁 성향으로 독일권 제후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사람..


화의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개별 제후의 종교 통치권을

황제나 교황과 분리하여 최초로 인정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해당 영지의 종교를 제후가 택한 종파로 정한다는 내용이죠.


허나 루터교는 인정 받았는데 당시 더 진보적 성향이던 칼뱅

장로교 제후국들이 제외된 문제가 여전히 잔존한 상황이었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phalia 



상호 경쟁하던 국가의 군주들이 독일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 모여 30년 전쟁의 종식을 선언한

바로 그 조약입니다. 오늘날 국제법의 효시라 하죠.

(요샌 웨스트팔리아로 부르기 시작하기도..)


1618년에 시작한 종교 전쟁 후반부 중요한 변곡점이자

네덜란드 독립 전쟁과도 맞물린 17세기 최대의 사건이

바로 30년 전쟁입니다. 근대 최초의 국제전이라고 하죠.


루터와 칼뱅에서 시작한 투쟁이 130년 만에 여기까지 이른

겁니다만, 프로테스탄트 전쟁을 단순한 종교 문제로 보면

부족하고 교황과 황제 중심 거대한 국정 체계 패러다임이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용트림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신교 투쟁의 결과물이 결국 개별 제후가 다스리는 봉토의

자치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인 것에서 알 수 있죠. 이제 황제의

통치를 받는 제후의 시대가 아니라 독자적 군주가 된 겁니다.


주권, sovereignty의 개념이 본격화하고 이로 인해 절대

왕정 및 왕권 신수설이 대두되는 발판을 마련하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의 맹아가 싹트는 동인도 마련되기 시작하는 거죠.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 Peace of Utrecht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내고 체결한 조약입니다.

생소한 전쟁일텐데 유럽 왕가 간 세력 균형전으로 이해해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지는 해’ 합스부르크

프랑스를 다스리는 ‘뜨는 해’ 부르봉 왕가가 주인공인데요.

(부르봉 킹이 바로 ‘태양왕’ 루이 14세. 확장욕 쩌는 분..)


스페인 왕위 계승전에 루이 14세 손자인 앙주 공 필리프가

선순위로 떠오르는 상황을 오스트리아와 영국과 네덜란드가

막아서며 발발한 전쟁입니다. 부르봉이 스페인과 프랑스를

병합하면 견제 불가능한 거대 국가가 탄생하기 때문이죠.


의외로 (그때까지 약체로 분류되던) 영국의 견제가 제대로

먹혀 부르봉이 스페인을 계승하되 프랑스 왕위는 포기하는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됩니다. — 루이 14세, 야욕 좌절…


유럽 영토에서 어느 한 나라가 잘 나가 바보짓을 벌이면

엇비슷한 국력의 나라들이 합심하여 다구리를 먹이는…

현재도 이어지는 불문률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겁니다.

주권에 영토 개념을 넣는 법리도 형성되었고요.




1815년, 빈 회의 Congress of Vienna 



나폴레옹 전쟁을 끝내고 프랑스를 패자로 공인하며

이후 전 유럽에 불어닥칠 자유주의 바람에 제동을 걸고

왕정 복귀를 천명한, 보수 반동의 대명사격 사건입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재한 걸로 유명하죠.


프랑스 대혁명 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황제로서(!) 유럽

각국에 전쟁을 벌였는데요. 역설적으로 유럽 전역에 퍼진

것은 혁명이 낳은 프랑스의 정신이었어요. 자유, 평등, 박애.


회의 대표자는 힘센 나라의 왕과 귀족이었죠.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그리고 프랑스. 자국에 혁명이 수입되면

꼼짝없이 목이 날아가는 분들.. 국경선과 전리품 배당을 놓고

혈안이 되어 똥고집을 부리며 진척이 더디던 중이었는데요.


보나파르트가 유배지를 탈출해 파리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다들 화들짝 놀라 협정서에 조인을 했다고 해요. 쌩 코메디..

(메테르니히의 댄스 파티도 찾아 보세요. 배꼽을 잡을 듯..)


이른바 유럽 협조 체제, Concert of Europe이란 국가간

공조가 명문화하여 등장한 거에요. 핵심은 위 위트레흐트 때

다구리.. 와 대동소이하고 이 시스템이 40여 년을 유지했죠.


그러나 한번 불씨를 당긴 자유주의의 대세는 거스를 수 없어요.

30년 7월 혁명(‘레미제라블’ 배경), 32년 영국 선거법 대개혁,

1848 연쇄 혁명과 공산당 선언… 이미 불길은 타오른 거죠.




1919년, 베르사유 조약 Treaty of Versailles 



제1차 세계 대전을 종식하고 독일의 패배를 선언하며

막대한 배상금 조건으로 두번째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독일 제국과 연합군 승전국들 사이의 조약입니다.


빈 회의로 패전국 프랑스가 실질적으로 잃은 것이 없던 데 비해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는 독일인들에게 참담한 치욕이었어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으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닥쳤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몰락했으며 히틀러 집권의 계기가 되었죠.

일찍이 경제학자 케인스가 이 비극을 예견했다는 거 아시죠.

(이때 협상 대표단 중 일원이었다가 참다 못해 사퇴..)


특히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뻘짓은 어마어마했어요. 그의

하이라이트는 이렇다 할 강제력을 갖지 못한 국제 연맹 창설로

‘마치 무언가 해결된 듯한’ 국제 관계의 판타지를 조장한 점이죠.


장렬한 뻘짓의 대행진이 전간기 20년의 나날을 채워요.

바야흐로 한스 모겐소가 현실주의로 스타가 될 조건이 형성..

안 될래야 안 될 수가 없는 시대로 흘러가고 있었죠.


거기에 세상은 대공황의 광풍에 휩싸이고 있었고요.

이런 악조건에 어떻게 전쟁이 또 안 날 수 있겠어요.




1945년, 얄타 회담 Yalta Conference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내고 루스벨트와 스탈린과 처칠이

모여 깡패처럼 전후 국제 질서를 결정지은 그 회담입니다.

우리나라는 여기 놀아난 직접 피해 당사자국… 아시죠?


베르사유 조약이 종전 직후 전쟁 문제를 처리하는 성격인데

반해 얄타 회담은 종전이 임박한 시점에 전후 문제를 미리

조율하는 강대국 슈퍼 파워들의 미래 회의 같은 거였죠.


이 사건의 가장 큰 상징성은 팍스 브리태니카의 레짐이 이미

저물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의 대항마로 소련이 등장하여

냉전 시대의 시작을 알린 실질적 계기라는 점이에요.

(실제 미국은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을 이끌어냄.)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한반도가 둘로 갈라져 지금까지도

폐해를 입어야 하는 원인을 만들었죠. 도대체 왜 때문에?!

패전국 일제가 아닌 우리가 분단되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냉전이 시작하여 1989년 동유럽 혁명까지 존속해요.

하지만 이 땅의 냉전 파편은 아직도 진행 중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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