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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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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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파이이자 협상가, 평화를 불러오다
  10. 2018.06.09
    백년 전쟁, 잉글랜드 대 프랑스



History of Economic Policy,

South and North Koreas




남북한 경제의 짤막한 변천사를 짚고

미래를 그려 볼까요.




전후 한국의 경제 정책 특징



네 마리 용 나라들은 보통 공통적인 특성이 있어요.

적절하게 많은 인구, 그 인적 자원의 높은 지적 수준,

애매한 부존 자원, 중앙 집권적 정부, 선진국과의 네트워크..


즉 자원은 별볼일없고 사람이 재산인 나라들이죠.

대개 미국 및 서방의 원조를 바탕으로 기초를 다진 후

독재 성향의 중앙 정부가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했어요.


팔아먹을 자원이나 운용할 금융 자본이 많지 않으므로

노동 집약적 분야에 유치 산업을 지정하여 집중 육성해요.

저임금의 비교 우위를 앞세워 생산품의 단가를 낮추는 거죠.


초기엔 경공업으로 시작하여 이후 제철, 정유, 제련 등

기간 중공업을 공기업 기반으로 일으켜 생산 여건을 갖춘 후

가전, 기계, 자동차, 조선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행했죠.


멀리 갈 것 없어요. 박정희 정권 시기 섬유 공업에서 시작,

일본 배상금을 몽땅 베팅하여 포항 제철을 세우고 이병철과

정주영 등 재벌에 지원을 집중한 것… 다 이 방식입니다.


한국의 경제는 이런 수출 주도형 계획 경제에 힘입어

90년대 초반까지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덕분에 김영삼

정권 때 금융 시장을 개방하고 자유 무역 시대를 열죠.


(그러나 아직 체질이 허약한 경제 체제의 한계로 곧바로

IMF 크리를 맞습니다. 같은 시기 주요 아시아 국가들도..)


*유치 산업이란 계획 경제에서 성장의 기점으로 잡아

집중 육성하는 일종의 시드 머니 같은 산업을 일컬어요.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관료 겸 학자가 내놓은 개념입니다.




현대 북한의 경제 변천사 요약



김일성 집권기 북한의 50~70년대는 소련과 중공을 좇아

중공업 중심 계획 경제를 실현하고 수입 대체형으로

자급자족 체제를 구현하는 데 있었어요.


그러나 소련과 중공이 그러했듯이 북한의 계획 경제는

심각한 균열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경공업 소비재 부문이

절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노출하고 말았죠.


80년대부터는 김일성 주석의 고령화로 김정일 위원장이

실질적으로 섭정하는 체계로 넘어갔는데 합영법을 도입하여

외국 투자를 유치하려 했으나 큰 성과 없이 실패했어요.


외국 투자단이 매력을 느낄 만큼 자국의 경제 요소가

비교 우위를 갖고 있음을 입증했어야 했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경직된 관료 체제가 이를 따라주지 못했어요.


또한 김정일 위원장 집권 기간은 공식적인 운영 구조가

군사-경제 병진 체제였습니다. 선군 정치라고 하는 그것..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도입될 수가 없었어요.


별다른 대책 없이 몇 가지 치명적 정책 병크씩이나 경험하며

90년대 중반부터 널리 알려진 고난의 행군 시대를 겪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정책 기조는 베트남식 ‘도이머이’ 경제 개혁.

사회주의 독재 정치 기반을 굳건히 유지하며 자본주의 개방

경제로 체질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전략입니다.


2012년경 기존에 자생적으로 존재한 장마당을 인정하여

시장 경제 요소를 공식 편입하고 2013년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합니다. 박정희 정권의 그것과 같은 겁니다.


아직 완전하게 자유 무역 체제로 개방하기에는 북한의 체질이

허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입 대체 전략을 병행하는 것 같아요.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주요 제품을 자체 조달하고 있죠.




한반도 경제 협력 지구의 미래



북한이 완전한 개방 경제로 변화하기 위해선 자국 경제 요소의

대외 신용도를 국제적으로 인증받는 것이 필수입니다.

일단은 경제 제재부터 풀어야 하겠고요.


4.27 선언과 6.12 회담은 그런 경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선결 조건입니다.


북미 관계의 해소를 통해 제재를 풀고 외국 투자의 유치 기회를

증대해 나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한국의 정부와

기업이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서는 새로운 경제 도약의 기회를 창출한 셈이니

그동안 성장이 정체되어 풀리지 않던 경제 해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고요.


지금은 그런 시대를 막 열어 젖히고 있는 문턱에

모두가 첫 발을 내딛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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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elopment Strategies:

Export-Oriented EOI vs Import Substitution ISI




개발 경제학의 기본 원리 얘기를 해보죠.




경제 개발의 기본 개념



경기 변동이란 한 나라의 거시 경제가 기본적으로

업 앤 다운을 반복하여 순환하여 움직인다는 것…


경제 성장이란 한 나라 경기 변동의

장기 그래프가 상승 국면으로 올라가는 현상…


경제 개발이란 한 나라가 경제 성장이란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인위적인 국가 정책을 펴는 것…


(즉 경제 성장은 현상이고 이걸 만들어 보려는

행위 뭐시기 일체를 경제 개발이라 한다능..)


개발 경제학이란 경제 개발에 도달할 원리를

연구하는 거시 경제학의 각론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는 후진국이 개발 도상국에 이르는 과정에

많은 동인과 배경을 제공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개발 경제학이란 개념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1950~90년대 현대사를 공부하지 않았다는 뜻이고요.


정부 수립 이후 90년대 초중반까지 발전 이면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같은 정부 주도형 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답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우리도 채택한 적 있고

종전 직후 선진국이 아닌 나라들 이거 많이 했어요.


(90년대 말 경제 개방과 IMF를 기점으로

한국의 거시 경제는 체질이 바뀝니다.)




수출 주도형 그리고 수입 대체형



경제 개발 전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많이들 들어봤을 거에요.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전략, Export Oriented Industralization

수입 대체형 산업화 전략, Import Substitution I…

EOI vs ISI.


수출 주도형은 국제 비교 우위를 갖는 경제 자원을

몰빵하여 수출품 생산에 전력을 다하는 방법입니다.


수출해서 얻은 수익으로 부족한 경제재를 수입하는

방식이므로 근본적으로 수출입 개방 경제를 전제로 해요.


수입 대체형은 대체로 개방 경제를 염두에 두진 않아요.

수입해서 충원할 부족한 경제재라도 되도록 국내 생산하여

전체 물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발상이니까요.


수출형의 대표적인 사례는 70~80년대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린 나라들이 대표적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 그리고 대한민국.

경제 체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대개 일본도 포함합니다.


수입형의 대표적인 사례는 50~60년대 계획 경제를

펼친 공산권 국가들과 종속 이론의 피해자라고 불리는

남미 및 아프리카 등 제3세계 나라들입니다.


소련, 중공, 브라질, 아르헨티나, 가나가 대표적이고

ISI와 종속 이론을 결합한 개발 경제학 주류 이론은

주로 남미 출신 경제학자들이 연구를 주도했답니다.


남북한을 구분하여 생각해 보면

대략 남한이 수출 주도형, 북한이 수입 대체형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또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박정희 정권만 하더라도 두 가지 전략을 혼용했죠.

물론 수출 중심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었지만요.


남북한 경제의 서로 다른 상황은

다음 편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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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znets Hypothesis: Quantity or Quality?






쿠즈네츠 가설에 대해 알아볼까요.

성장분배의 관계를 논한 가장 오래 된 이론 중 하나..



‘무릇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이란 것이

처음엔 시장의 양적 규모가 커지는 방향으로 가다가

나중에 불평등을 개선하는 쪽으로 변화한다’는 가설…



즉, 어느 나라든 경제 발전의 초반 이슈는 성장이고

말기에 가서야 분배 이슈가 대두된다는 뜻이에요.



양적 성장과 질적 분배 사이의 논쟁..

효율성이 먼저냐 형평성이 우선인가 하는

아직 어떤 경제학도 풀지 못한 핵심 문제인 겁니다.



사이먼 쿠즈네츠가 주로 1950~60년대까지의 미국

거시 데이터를 손에 들고 이 가설을 다듬었다고 합니다.

관찰해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더라 하는 결론인 건데…



쿠즈네츠 본인이 현상을 놓고 그럴 듯한 설명을

붙여 보려고 무진 애를 쓰긴 한 모양이에요.



성장 초기에 투자는 곱절로 불어나는 반면

저임금 고용은 얼마든지 이루어지니 파이 크기는

커지게 마련이다.. 라고 설명을 붙였고요.



또 기업 활동이란 본래 시간이 흐를수록 아직 미지급한 인적

자원 관련 액수가 미지급한 물적 자본 액수보다 커지기 마련이니

결국 임금 분배 문제가 나중에 불거지는 속성을 갖는다고도…



빈곤층일수록 등록금 대출 받기가 어려워지니 교육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경제적 불평등이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주장도 있었어요.



그리고 유명한 ‘역U자형’ 곡선이 등장해요.

경제적 불평등도를 가리키는 지니 계수가 1인당 소득과

어떤 관계를 보이는가를 표현한 그래프이죠. 아래에..










시간이 흐르며 소득 평균이 상승해갈 때

분배 불평등은 점점 악화하다가 정점을 찍고

다시 개선되어 갈수밖에 없다는 그림이에요.



잠시 이 그래프를 뚫어지게 응시해 보세요.

복잡한 설명 제쳐두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시면…



문제점이 뭔지 아시겠죠? 이런 이론은 그냥 가설이에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실제 데이터를 측정해보니

‘때마침’ 우연하게도 이론에 들어맞더라 했던 거죠.



실제로 100년간 미국의 지니 계수를 측정해보니

1930~50년대에 저 역U자와 비슷한 그림이 나오긴 했어요.



거기 놀라면 안 되요. 그냥 우연이고 횡재에요.

그때 당시에‘만’ 우연히 맞아떨어진 현상임을 간과한 거에요.

그토록 저명한 경제학자가 저지른 오류인 거죠.



60년의 시간이 흘러 토마 피케티가 아래 그림을 제시하며

그 오류를 입증합니다. 21세기 자본론이 등장하죠.













위 그림에서 1928년경의 고점과 1944년경의 저점을 보세요.

이 하락 국면은 쿠즈네츠의 역U자와 귀신같이 일치하죠.



하지만 이를 어째요. 이후 지니 계수가 다시 상승해서 2008년

금융 위기 무렵엔 대공황 저리가라 할 정도로 치솟아버리죠.



그림에 보이시죠? 쿠즈네츠는 금융 위기 전에 노벨 상 챙기고

돌아가셨으니 이 점을 미처 예상할 수가 없었어요.



21세기 자본론에 ‘쿠즈네츠는 틀렸다’고 주장한 요점이

바로 이거에요. 그래서 효율성이 아닌 형평성의 경제학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 거죠.



물론 쿠즈네츠 가설의 역사적 가치가 퇴색하진 않습니다.

케인지언들이 기세등등하던 시절 주류의 관점에서

형평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외친 학자는 많지 않았어요.



그의 가설은 이후 오랜 시간을 두고 수백년간 경제학자들이

다 같이 달려들어 풀어야 할 고차 방정식의 첫번째 해에

불과한 거에요. 이걸로 결론이라고 못박아버리면 곤란해요.



우리 사회의 분배와 형평성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했어요.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경제학자가 해결할 리 만무하겠죠.



또한 관점을 뒤바꿔서, 아직 주류에서 충분하게 연구하지 못한

미완성의 형평성 개념을 놓고 전체 경제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학자로서 버려야 할 오만이라고 볼 수 있고요.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 두기에 어쩌면 너무 중요한 문제일지도.

우리 다 같이 형평성에 대해 토론을 시작하면 어떨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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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방선거, 집권 여당 압승 (영국 이코노미스트)

https://www.economist.com/asia/2018/06/14/south-koreas-ruling-party-wins-a-landslide-victory-in-local-elections



6.13 지방 선거에서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네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지가 이를 발빠르게 보도했습니다.


인터넷판 말고 인쇄판에는 라이징 ‘문’이란

표제를 대문짝 만하게 실었다고 하네요.


6월 14일 기사의 전문 번역입니다.

저작권에 문제 있을 경우 삭제하겠습니다.






Rising Moon

라이징 ‘문’


South Korea’s ruling party wins a landslide victory in local elections

한국 집권 여당이 지방 선거에서 거둔 엄청난 승리


Detente with North Korea has made the president wildly popular

남북 데탕트로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


2018년 6월 14일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지방 선거 사전 투표제를 통해 미리 투표권을 행사하였다.선거일 당일인 6월 13일에 그는 산행을 떠났다. 반바지에 등산화, 반팔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얌전히 옆을 따른 애견 마루를 데리고 나온 채, 그는 북악산에 올랐다.



선거 당일 홀가분한 문 대통령의 분위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몇 시간 후 공표된 출구 조사 결과는 대통령이 속한 좌파 계열 더불어 민주당의 승리를 예측했으며 이는 대통령 임기 1년차 행정의 우등 성적표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은 탄핵 사태로 급하게 치른 2017년 5월 선거에서 이루어졌다.) 여당은 총 17개 광역 단체장 선거구에서 단 셋을 제외하고 압승을 거두었고 이는 전례에 없던 대승이다. 또한 공석 상태였던 12석의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11석을 낚아채는 성과를 거둠으로써 여소야대 정국의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투표율도 60퍼센트를 기록하며 1995년 첫 회 68퍼센트를 기록한 역대 지방 선거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다. 70퍼센트 중반을 맴돌던 대통령의 고공 지지율도 선거일 당일 여론 조사로는 80퍼센트를 찍었다고 한다.



선거 결과가 충격적인 이유는 문 대통령의 높은 인기가 이제 한국 정치에 뿌리깊은 문제점인 고질적 지역 구도를 타파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다는 점에 있다. 한국 동남권인 부산-울산-경남 권역은 사상 최초로 민주당 소속 광역 단체장을 선출하였다. 원내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지겹도록 끈질긴 국회 발목잡기가 다소간의 지지자를 확보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유한국당은 1년 내내 대통령 정책을 조준 사격하였고 특히 (어처구니없게도) 대통령 및 행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안마저도 궤도 이탈시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남북 관계 데탕트 정책마저 공산당의 위장 평화쇼 운운하며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6월 13일 선거의 열풍이 지나간 후 페이스북에 “모든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고 포스팅을 날리며 대표직 사임 의사를 내비췄다.



야당 입장에서야 선거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및 김정은 위원장 간의 북미 정상 회담 바로 다음 날에 벌어진 점을 특히 안타까워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두 정상을 만나게 하기까지 맡은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고 대통령 본인이 김 위원장을 두 차례나 만났기 때문이다. 이런 외교적 노력의 서막이 작용하여 한국인들이 한반도 대립 국면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안도의 감성을 스스로 일깨우는데 이른 것이다.



TV 방송 매체는 전력을 다하여 북미 회담의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이후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선거 개표를 방송하였다. 한 방송사는 개표 상황 묘사에 해리 포터 주제를 끌어와 후보자들을 망토와 지팡이를 든 마법사로 그려내었다. 다른 곳은 광선검을 든 제다이 기사 그래픽을 그린 후보자들 모습을 내보내기도 했다.



더불어 민주당 선거 승리의 강한 여파는 문재인 대통령 집권 행보에 강한 힘을 실어줄 것이다. 여당을 포함하여 진보 좌파 계열의 독립 정당을 합하면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여 앞으로 정부의 법 개정 움직임을 강화해줄 것이다. 한국의 시민들은 재벌 및 대기업에 철퇴를 가하는 문 대통령의 적폐 청산 및 공정 사회 정책에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건강 보험 및 국민 연금 운영 개혁과 노동 조건 향상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북 관계에 차질이 빚어지면 분위기는 또 싸늘하게 식을지도 모른다.






and




Are You Aware Who Henry VIII Really Was?




미디어는 다양한 모습으로 헨리 8세를 묘사해왔습니다.


60년대에 나왔던 리처드 버튼의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이 자매로 나온 영화도 생각나며

캐나다 드라마 시리즈도 기억나네요.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으로서야 이런 창작물을 깔 만한

구석이 없을 거에요. 각각이 모두 독창적 완성도를 구축했고요.


69년작 ‘천일의 앤'은 당시 수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었어요.

리처드 버튼의 연기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긴,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배우들이었으니까요.


대체적으로 미디어가 소비해온 헨리 8세는 그러했습니다.

여자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종교를 버린 난봉꾼, 색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ㅎ


이런 이미지는 조선 후기 숙종 같은 군주와 자주 오버랩되어

사극을 좋아하는 중장년의 보수적 시청자층에게 뭔가 묘하게

동질감의 판타지를 조장해온 느낌이에요. 저쪽도 비슷했구나.. 하는.


현대 한국의 사회가 미디어에서 장희빈을 소비하는 방식의

연장선상 어딘가에 비슷한 형상을 한 앤 불린이 있을 겁니다.


이 이미지는 진실에 가까운 정당한 것일까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어떤 인물인가요.






헨리 8세가 걸어온 행보, 그 목적



열 여덟의 나이에 즉위한 헨리 7세의 왕자는

튜더 왕조가 기록하는 두번째 군주였습니다.


튜더 왕조는 장미 전쟁 이후에 탄생한 16세기

잉글랜드의 왕가 가문이고요.


장미 전쟁이란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 사이에 발발한

15세기의 왕위 계승 내전이었습니다.

(두 왕가의 인장이 장미 문양이라서 저렇게 부른다능..)


튜더 왕조는 오늘날 영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왕국의

실질적 토대를 형성한 공이 있는 가문입니다.


우리로 치면 14세기 말에 조선조가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골격을 형성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튜더 왕조에서 이런 공의 8~9할은 대략

두 명의 군주에게 그 몫이 돌아갑니다.

헨리 8세와 그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아시죠?





헨리 8세는 해군을 양성했습니다.

이 해군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북해를 주름잡으며

해상 강국인 잉글랜드의 기반을 형성했어요.


헨리 8세는 교황 및 대륙의 군주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복잡한 외교전에 잉글랜드의 발언권을 높여갔어요.

(이 시기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류국 정도에 불과했어요.)


헨리 8세는 귀족을 탄압하고 젠트리 등 중간 계급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민심과 인기를 얻게 되죠.


즉위 전반기의 헨리 8세는 교황과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 정치의 화신 같았고 신교도를 박해하는데도 앞장섰어요.

교황에게 가톨릭의 보호자라는 찬사도 받았어요.


첫 아내인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보다 겨우 여섯 살 연상인 미인이었다고 해요.

아라곤은 지금의 스페인. 당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어요.


원래 캐서린은 요절한 형의 왕자비로 정해진 사람이었으나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정혼자를 떠나보냈다고 하죠.

헨리 8세는 이런 캐서린을 연모했고 그 기록도 남아 있죠.


문제는 나이가 들며 아내가 가임기를 지났음에도

캐서린이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죠.

헨리 본인도 나이가 들어가고.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들들 볶아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는 교리를 찾아보라고 했죠.

왕자 출산처(?)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본래 헨리 8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선진 문물에 밝은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독일과 스위스에 종교 개혁이 벌어지고 있음도 알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교도들을 철저하게 압살하고 있었어요.


교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그때까지 통제하던 종교 개혁 카드를 꺼내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존속하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출범합니다.


약간 선동적 조치로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그 재산을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매각하기도 합니다, 헐값에. 민심이 환호했죠.


하지만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사실상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어요.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그 한 가지의 차이 뿐이었습니다. 루터교 흉내만 살짝 내주고.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그냥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 현상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종교 개혁의 의미를 그만큼 적확하게 알았다는 뜻도 되죠.


그렇게 족쇄가 풀려 다섯 번 추가로 결혼하고 두 명의 왕비를

참수합니다. 그가 낳은 왕자 1명, 공주 2명이 뒤를 이어

튜더 왕조의 마지막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과 재혼과 왕자 출산에 집착했을까요.

왕좌의 정통성을 추구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그 자신

집권의 궁극적 목표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이 취약한 왕가의 내전으로 평생을 골머리 썩여야 했던

선왕 헨리 7세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기 때문이고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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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nglish Longbowmen vs French Armored Knights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http://jangyune.tistory.com/entry/크레시-푸아티에-전투

http://jangyune.tistory.com/entry/롱다리-에드워드1세




장궁롱보우라고 합니다. 아주 큰 활이죠.

어느 나라나 있던 것인데 잉글랜드 장궁이 가장 유명해요.


활이 커져야 하는 이유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서죠.

활대가 커질수록 탄성력이 증가할 테니까요.


잉글랜드 장궁은 원래 웨일스 지방 산물입니다.

웨일스 왕국이 잉글랜드의 영토로 복속한 때가

13세기말 롱다리 에드워드 1세때였죠.


잉글랜드 군을 애먹인 이 무기에 에드워드가 주목합니다.

당시엔 파괴력이 너무 강해 교황이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죠.

전쟁에서 그런 게 있나요. 잉글랜드 군이 도입해 버립니다.


장궁에 대비되는 당시 보편적 활은 쇠뇌였어요.

석궁이라고 하죠. 영어로 크로스보우..


석궁이 자주 쓰인 이유는 간편성 때문입니다.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고도 능숙하게 발사할 수 있었어요.

장궁은 이에 반해 능숙해지기 위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죠.


그러나 석궁의 치명적 단점은 연사 속도였습니다.

장궁의 연사 간격을 3~5초, 석궁은 15~20초 정도로

보통 추산한다고 합니다. 너다섯 배의 차이가 있었죠.


또한 장궁은 사격 자세에 따라 원거리 공격도 가능했어요.

고지대에서 발사하면 파괴력이 훨씬 증가하기도 했죠.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가 이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국가적으로 롱보우를 적극 권장합니다.

일요일마다 궁술 대회를 열어 포상도 했다고 하네요.


왠만한 잉글랜드의 남성들이 장궁에 익숙해졌습니다.

웨일스의 평민들은 원래부터 능숙한 궁사들이었고요.

덕분에 이후 전쟁에 웨일스 장궁병 군단이 특별 편제되죠.


장궁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무엇일까요. 석궁?

아뇨. 장궁이 깨부셔야 할 적은 기사의 갑옷이었습니다.

중세의 전쟁은 중장 기사의 기마전이었거든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에게 밀리는 지점이 바로

중장 기병의 숫자였어요. 서너 배 또는 그 이상 차이났다고 하죠.


프랑스가 전쟁 초반에 자신만만하게 무식한 전략을 편 원인도

기사의 숫자에서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봤기 때문이고요.

잉글랜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장궁을 이용합니다.


중세 초기에는 사슬 갑옷이라고 체인 메일이 보편적이었는데

14세기에 와서 철판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어요. 플레이트 아머.

방호력은 철판 갑옷이 더 앞섭니다.


오늘날 장궁이 석궁보다 갑주에 대한 관통력이 우수해서

잉글랜드 군이 이겼다는 썰이 돌고 있는 듯도 한데

사실 관통력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가 있어요.


백년 전쟁 당시 양국 기사들은 철판 갑옷이 주종이었다는 썰도

돌고 있는데 사슬과 철판을 혼용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죠.


하지만 원거리라면 모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자세 잡아

장궁을 날리면 철판을 꿰뚫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래 유튜브 링크 1분 50초부터 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u0fu4k2cbB4







아 물론, 철판 갑옷이라면 인체에 맞춰 곡면 처리가 되어 있으니

왠만큼 비스듬한 각도에서는 방호가 가능했을 겁니다.


장궁병들이 주로 겨냥한 곳은 기사의 관절 접합 부분.

목과 어깨 사이나 사타구니 골반 부분의 취약점이라네요.

겨드랑이 사이 심장 가까운 곳도 많이 노렸다고 합니다.


또한 기병의 신체가 아니라 말을 겨냥한 전법도 빈번했어요.

말의 측면과 후면 방호가 약한 편이었다고 하죠.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좌익의 언덕에 위치한 장궁병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 기사들이 산줄기를 뛰어 올라갔는데

우익 언덕의 장궁병들이 측면에서 연사하여 떨궈냈다고 합니다.


갑주가 불리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둔중한 무게감 때문이죠.

보통 아머를 전면 장착하면 무게가 25킬로그램에 달했답니다.


이 무게로 진흙이 많은 곳으로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었고 이 틈새를 노려 장궁을

쏘거나 보병이 기습하니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넓게 산개하여 공격하면 되지 않겠는가 할 수 있으나

잉글랜드가 이미 좁은 경로를 선점하여 양익에서 활을

쏘아대고 있으므로 결국 좁은 중앙으로만 몰릴 수밖에요.


무거운 철갑을 짊어지고 무릎까지 오는 진창길을 걸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적 보병의 냉병기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 한 번 상상해 보면 이해가 될 거에요.


더군다나 잉글랜드 군의 진짜 강점은 장궁이 아니었어요.

병종 간에 기동과 협력, 즉 팀웍과 소통이 원활했다는 거죠.


궁병이 기병을 엄호 사격하고 위험에 처한 궁병을 향해

보병이 보호하러 달려오며 기병은 적의 측면을 공략하는…

예나 지금이나 상하 협동과 지엄한 군률은 필승의 비결입니다.


오래 전에 히트한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보면

잉글랜드 군의 강점을 석궁으로 그려놓고 이 편견이

오랫동안 정착해 버렸다고 하는데 바로 잡으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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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s of Crecy and Poitiers, 14th Century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백년 전쟁이 시작하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압살합니다.


초창기 전투에서 뚜껑 열어보니

양국 군사력에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어요.


이를 여실히 입증한 두 사건이 바로

크레시 전투(1346년 8월 26일)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입니다.






잉글랜드 대 프랑스, 숫자의 차이



크레시는 프랑스 북서부 칼레 바로 밑에 있고요.

칼레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버 해협 근처랍니다.


잉글랜드의 지휘관은 에드워드 3세.

프랑스의 지휘관은 필리프 6세.


잉글랜드 군은 6천에서 2만 정도로 추정되고

프랑스 군은 2만에서 10만 근처까지 추정됩니다.


칼레 남쪽의 크레시 숲 인근 구릉 지대에

잉글랜드가 V자 형 진을 짜고 프랑스를 맞습니다.


양익의 끝 언덕 위엔 장궁병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하마 기사라고, 중무장한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진을 짜고 있었습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양상은 비슷하게 전개했는데요.

프랑스 중부 푸아티에 남쪽에 잉글랜드가 먼저 진을 쳤어요.


이때 잉글랜드 지휘관은 흑태자 에드워드.

크레시에서 열여섯 나이에 보병 분대장으로 출전했었죠.

푸아티에에선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됩니다.


프랑스 지휘관은 장 2세.

잉글랜드 군 약 7천, 프랑스 군 약 2만.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전황의 전개



크레시와 푸아티에 양쪽 전투 모두

잉글랜드를 프랑스가 추격하는 양상으로 시작했어요.


프랑스는 오랜 시간 추격하여 피로한 상태였지만

머릿수 차이를 믿고 그대로 진격하기로 했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승리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 잉글랜드 지휘관이 유리한 지대를 선점하여

지형의 이점을 끌어안고 적군을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시에서 에드워드 3세는 V자형 언덕를 뒤로 한 구릉을,

푸아티에의 흑태자는 언덕과 개천을 뒤로 배수진을 선점했죠.


두번째, 지휘 체계가 일사불란했던 잉글랜드에 비해

프랑스의 명령 통제 상황은 개판 오분 전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는 추격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 이유가

서로 먼저 싸우겠다고 나서대는 통에 그러했다고…ㅠ


잉글랜드 군은 숫자 차이 때문에 두려움이 컸으나

철저히 명령을 수행하는 훈련이 된 정신 상태였던 반면,

프랑스 군은 사기만 드높은 상태였다고 하네요.


세번째, 잉글랜드 전력을 효율적으로 만든 가장 큰 이점은

기병, 보병, 궁병 간 협력 전술이 잘 먹혀들어간 점이에요.


기병이 하마하여 중앙에 진을 치고 그 양익의 장궁병

적 기병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는데 궁병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보병이 나서서 이들을 보호하는 패턴이 아주 원활했어요.


(하마란 말에서 내렸다는 뜻입니다. 기병이 자진하여 전술적으로

보병이 되었다는 뜻. 잉글랜드는 이 전술을 자주 썼어요.)


푸아티에에선 배후 숲에 기병 분대를 숨겨두었다가

결정적 순간에 적 측면을 돌격하여 궤멸시키는 눈부신

기동성까지 보여주었어요. 흑태자의 전략이었죠.


장궁병에 맞서 프랑스엔 제노바 용병인 석궁병들이 있었고

초반에 방패 없이 싸우다가 나중에 방패 가지러 후퇴했는데..

기사들이 도망친다고 베어버리는ㅠ, 환상적 팀웍을 보여줬죠.


네번째, 무기 면에서 중무장 기사의 갑주잉글랜드 장궁

전혀 먹히지 않음을 완벽하게 입증했기 때문이었어요.


중세 전쟁사는 중장 기병의 시대였습니다.

전신을 무거운 갑주로 보호하고 말에 올라탄 기사인데요.

이들이 대형을 갖춰 속공 돌격하면 막을 수가 없었어요. 왠만해선.


기사가 전장에서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 것은 중세 말기 들어

활과 총포 등 원거리 사격 무기가 기병의 진격을 제압하면서부터..


백년 전쟁은 활이 갑주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어요.

특히 웨일스에서 유래한 잉글랜드 장궁은 전쟁의 전기를 바꾼,

당시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게임 체인저였어요.


장궁의 활약상은 깊이가 있는 내용이니

다음 편에서 설명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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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RK-US Summit 2018:

Look How Careful And Prudent Both Are




http://jangyune.tistory.com/entry/문정인특보-애틀랜틱-전문




역사적인 북미 회담이 있었고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무엇이었나요.

본 블로거에겐 두 가지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첫째, 의외로 너무 정중한 트럼프의 태도, 놀랐고요.

특히 이 점이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관측이 됐습니다.

둘째, 4.27 때보다 한층 더 긴장하는 김정은 위원장.


신중함과 정중함으로 완연하게 무장하고 나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인상적이었음을 강조해요.


만나자마자 멱살 잡으려고 별러 대던 1년 전의

그 사람들이 맞는가 싶었죠? 파이어 앤 퓨어리..ㅎ

역시 정치는 말 뿐이야 싶기도 하고.


햄버거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등장했다면 당장

전쟁이라도 났겠죠. 파트너를 조롱하는 뜻이니까.


오히려 동서양을 조합한 메뉴가 등장했어요.

이것도 역시 또 하나의 정중함이었어요.


특히 오후 기자 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2천 8백만이 넘는 서울 인구가 전쟁 위험에 처한다’

(선제 공격이 말이 되느냐..는 꾸지람 섞인 멘트)


이 분이 미국 대통령이 맞나, 한국 대통령 수준의

발언 아닌가.. 눈물 날 뻔 했네요. 농담이 아니라 이 정도

원숙한 인식이라면 충분히 노벨상 자격 있다 싶어요.


물론 가만히 있으면 그런 인식이 만들어지겠습니까.

문재인 대통령의 가이드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어요.

한국은 훌륭한 드라이버이고 일본은 패싱합니다.


미국 대통령께서 또한 한미 연합 훈련 중단과

주한 미군 철수를 논하셨어요.


한 달 전 문정인 특보 인터뷰에 득달같이 달려들던

그 쓰레기들 다 어디 갔나요. 문정인 교수는 만만하고

이제 미국 대통령까지 언급하는데 말씀들 해보시죠.


물론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통상적인 군사 훈련은 정기적으로 운용할 겁니다.

안 할 거면 한미 동맹은 뭐하러 유지하겠어요.


트럼프 말대로 돈이 많이 드는 이른바

전략 자산 투입은 앞으로 자제할 거에요.

정말로 돈이 많이 들고 그 부담은 우리도 지니까요.


주한 미군 철수는 대통령 혼자서 결정하는 일 아닙니다.

우리 입장에서도 결코 플러스될 일 없는 일이고요.


남북 경제 협력 지구 단계 정도까지 가는데 짧게 10년,

길면 20년 잡고.. 15~20년 정도 후에는 정치 공동체

통합의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할 거에요.


실질적인 융합 통일로 가기 위한 실제적 정치 작용은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난 30~40년이 흐른 후에야

눈에 띄는 움직임이 출현할 겁니다. 멀었다고요.


이 기간 동안 남북 교류는 경제와 문화가 중심일 거에요.

북한에 중진국 수준 정도까지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남한의 정체된 성장률과 고령화를 서서히 해결하고..


돈이 오가고 사람이 오가고 정보가 오가는 동안

남북의 문화적 이질감 격차가 줄어드는 특이점에 점점

가까워집니다. ‘이제 우리 안 합치냐?’ 얘기도 슬슬 나오고.


…… 자자, 이런 시간이 앞으로 다가온다고요.

그 기간 동안에 미국 정권과 의회와 미군은 가만 있냐고요.

여기에 반응하는 중국은 가만히 있냐고요. 러시아는요.


‘저쪽 평화 분위기인데 미군은 저기서 뭐 하는 거지?’

한반도를 바라보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미국인들 입에서

이런 말이 슬슬 나온다고요. 평범하고 상식적인.


평범하고 상식적인, 아주 진보적이거나 똑똑하지는 않지만

미국 어디 가도 널려 있는 서민 백인층.. 이들을 대변하는

현재의 정치인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정치 고단수는 아니지만 자국 우선주의 경향을 가진

트럼프는 지금 극히 상식적인 수준의 판단을 하는 겁니다.


‘자, 평화를 만들어 가고 있쟎아. 미군이 왜 필요해?

미군은 저 골치 아픈 중동에 더 보내야 하는 것 아니야?’ 하고.


저 앞에 포스팅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문정인 교수님 인터뷰 내용의 골자가 이거에요.

미국의 여론이 철수를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것.


이상한 제목으로 논지를 비틀어 왜곡할 일이 아니라고요.

멍청한 번역으로 무쓸모한 딴지 여론을 만들 일도 아니고요.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날 가능성이 높지 않아요.

주한 미군은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주한 미군은 한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되니까요.


어쩌면 주한 미군이 북한의 안정에 도움될지도 몰라요.

중국이 저렇게 예민하게 나오는 거 보면 모르겠어요.


트럼프 대통령의 견해는 말 그대로 사견일 뿐.

사견이 전부 정책이 된다면 미국이 왕조 국가입니까.


주사파도 아닌데 보수 기성 언론이 미군 철수

노래를 하는 거 보면 웃기지도 않죠. 안 그래요?


어쨌든 결론, 문재인 정부의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

우리는 좋은 운전자를 뽑았습니다. 오늘도 잘 뽑으시고.


사족. 데니스 로드맨께서 너무 안 돼 보이기도 하고

아참 웃으면 안 되는데 싶기도 하고 해서 링크 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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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미 대화의 진짜 주인공, 서훈 국정원장

https://www.wsj.com/articles/a-look-at-south-koreas-top-spy-and-negotiator-with-north-1520358409




미국 최대 일간지이자 경제지인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서훈 국정원장을 조명한 기사를 3월에 발표했었습니다.


왠만한 내용은 우리 인터넷을 뒤져도 능히 나오는 거지만

해외의 주목이 이채롭기도 하고 최소한의 내용만 잘 추렸네요.

원 저자의 동의를 얻어 번역을 공개합니다.


서훈 원장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많이 참조하세요.

역사적인 북미 회담 기념 포스팅..






A Look at South Korea’s

Top Spy and Negotiator With North

대한민국 최정예 첩보원이자 대북 협상가인 이 사람, 그를 주목하라


Suh Hoon has played a central role

in behind-the-scenes diplomatic outreach to Pyongyang

서훈 원장은 그간 평양과의 외교전에서

막후 실력자로서 활약해왔다



Jonathan Cheng and Andrew Jeong

jonathan.cheng@wsj.com / andrew.jeong@wsj.com


2018년 3월 6일



서울 — 지난 3월 한국의 대북 특사를 환영하는 김정은 위원장 주재 만찬에서 안경을 쓴 한 남측 관계자가 활짝 웃는 김 위원장에게 밀착하여 대화하고 있다. 이 장면을 담은 사진이 북한의 대표 기관지에 대문짝 만하게 실린 바 있다.


각종 대북 방첩 작전과 잠재적 위협에 관한 정보 분석에 잔뼈가 굵은 이 사람이 바로 한국의 최정예 첩보원이기도 한 서훈 원장이다. 수년 간 그는 김씨 왕조 평양과의 외교전에서 막후 실력자로서 활약해왔다.


올해 예순 셋의 정보 관료로서 그는 지난 2000년과 2007년의 두 차례 남북 정상 회담을 가능케 한 백채널 가동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두 번의 회담 관련해서는 현 김정은 위원장의 작고한 부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남을 가진 바도 있었다.


북한의 진정성 있는 의도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일고 있는 시점인 바, 평양과의 대화를 주도해온 서훈 원장은 곧 워싱턴에서 미 행정부 관계자를 만나 남북 회담에서 체험한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설명할 예정이다.


또한 그는 한미 동맹을 열렬히 지지한다며 지난 해 국회 청문회에선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한다 할지라도 주한 미군 철수 주장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오랫동안 대화 국면이 전개될 때마다 정보 관료들이 남북을 오가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은 한국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급파하며 얻은 결과였다.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단 몇 달 후에 출생한 서훈 원장은 온 일생을 남북간 체제 경쟁에 관한 직무 수행에 바쳤다. 1979년에 당시 중앙정보부에 입직한 후 28년간 차근차근 고위직으로 경력을 다져왔다.


1997년 7월에는 한국 관료 가운데 처음으로 북한 파견 근무라는 명을 받아 1994년 북미간 핵동결 협상의 일환이던 경수로 건설 사업단의 일원으로 북으로 갔다.


서훈 원장은 동해 연안의 신포시에서 2년이나 살았다. 그의 2008년 저서를 보면 당시 북측 당사자를 상대하기가 꽤 힘겨웠다고 전한다.


“주변 식당에 걸어갈 자유, 동네 해변가를 산책하는 일, 개인 신변잡기 같은 아주 사소한 일 하나하나가 북측과는 협상의 거리였다. 이런 사소한 협상도 쉽지 않았다.”


서훈 원장은 이후 남북 정상 회담을 기획하게 되면 더 광범위한 경험을 하였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현 위원장의 부친이자 북한 최고 지도자였던 김정일 위원장과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되었다.


“김정일 위원장이 서 원장을 신임했다.”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2005년에 서훈 원장과 방북한 정동영 의원은 말한다. 당시 회담의 목표가 북한을 다시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는데 서훈 원장과 김정일 위원장이 다섯 시간을 연이어 회의를 했다고 한다.


“서훈 원장이라면 김정은 위원장과 할 수 있는 한 많이 사소한 부분까지도 대화할 것 같다. 또한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에 대해 이야기하며 분위기를 풀 수도 있다.” 정동영 의원은 말한다.


2008년 서훈 원장은 북한의 핵 전력 체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냈으니 핵 개발의 목적이 북미 협상에서 체제 안전을 담보로 하기 위한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북한의 핵 전술 추구가 결코 항구적인 전략일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후 별도 단행본으로 발매한 박사 논문을 서훈 원장은 역설한다. “왜냐하면 외교 전략을 그런 식으로 펴봤자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성장에 제도적 한계로 작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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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undred Years’ War, England and France




백년 전쟁 이야기에요. 1337~1453년 사이 116년 동안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영국 아님.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봤죠? 오늘날 잉글랜드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남아 있는 묘한 경쟁심은 이 시기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 때 죽어라고 싸워댔으니까요.


왜 싸웠남. 샤를 4세가 죽고 나서 왕위 계승 문제가 대두합니다.

원래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에게 우선권이 있는데

발루아 왕가의 필리프 6세와 대립하게 됩니다.


또한 이때까지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제후로서

프랑스 일부를 봉토로 가지고 있었는데 프랑스 왕 입장에서

이를 쫓아내고 영토 지배를 확장하려는 의도도 있었고요.


더 복잡하게 하자면 할 순 있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왕가 사이의 헤게모니 쟁탈전입니다. 여기에 가스코뉴나

플랑드르 같은 봉토의 실효 지배권 문제가 걸렸고요.


가스코뉴는 지금의 프랑스 남서부 지방.

포도와 와이너리가 넘쳐나는 곳이고 이 지역 세금 수입만

당시 잉글랜드 전체 세수와 맞먹었다고 하죠.


당시 국력은 프랑스가 잉글랜드의 서너 배 정도..?

객관적 전력은 프랑스가 앞설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전쟁 전반기 전세에선 잉글랜드가 의외로 앞섭니다.

특히 아쟁쿠르 전투 등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리죠.


전쟁 후반기에 잔 다르크 같은 인물이 사기를 올리며

결국 프랑스가 승리합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 봉토 대부분을

상실하고 브리튼 섬에만 머물게 되는 시기가 시작하는 거죠.


(즉, 이 전쟁에서 프랑스가 졌다고 가정해보면 오늘날

프랑스 영토 중간에 영국 땅이 드문드문 섞여 있는

현상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을 것이란 말씀..)


백년 전쟁이 유럽사에서 중요한 의의가 몇 가지 있어요.

귀족의 기병전에서 시작하였으나 애초에 양국 국민에게 없던

민족 개념이란 것이 싹트는 계기가 되죠. (민족주의는 아님)


출발은 왕가의 헤게모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고 평민이나

농노들이야 심정적으로 딱히 감정이입할 필요가 없었는데

어느 순간에 국민 전쟁으로 발전했다는 뜻입니다.


(아 물론, 아직 민족 국가 개념이 나오려면 멀었어요.

30년 전쟁,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삼백 년 쯤 지나야…)


또한 전쟁의 패배로 인한 나비 효과가 잉글랜드 왕가 간

알력 다툼으로 이어져 30년간 장미 전쟁이 터졌습니다.


장미 전쟁의 여파로 튜더 왕조가 개창하고

잉글랜드의 계급 및 권력 구조가 변동하는 등…

이후 청교도 혁명과 명예 혁명까지 이어지죠.


군사적으로는 귀족, 영주, 기사, 향사 등 지배 계급이

전쟁을 주도하는 양상이 퇴화하고 평민과 농노 중심으로

급료를 받는 용병 및 상비군 개념이 새롭게 대두됩니다.


전술 측면에서 궁병의 중요성이 기술적으로 극대화하기도.

석궁과 장궁이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무기로 떠오른 시대이죠.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까지..


군사 및 병기 이야기는 시작하면 길어지니

나중에 주요 전투를 중심으로 논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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