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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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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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na Carta Libertatum,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현대 영국 불문 헌법의 가장 오래 된 법원*으로서

대헌장의 의의는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편이에요.



*법원 = 사법부 기관 시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법을 해석 적용할 근거로서 참조할 성문 법전이나

관습법 등 일체의 범위.. 法院이 아니라 法源...



charter는 영미법 중 영국 권역에서 협약, 계약, 헌장,

공인, 승인, 인증, 등기, 등록(명부) 정도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말이고요.



미국에서 certify나 register로 받을 법한 표현에

이 말이 들어가는 영국권 실무 용어가 많아요.

현대어 용법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라틴어 원 용어를 풀어보면 자유 대헌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여기서의 자유란 신민 전체가 아니라

13세기 당시엔 주로 귀족으로 국한한 의미였고요.



자유민 전체 범위로 확대된 것은 16세기. 역사 발전의

흐름을 좇아 법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때 이 능동적인 법리 해석에 앞장선 인물이 언젠가

포스팅한 적 있는 에드워드 코크 대법원장이에요.

권리 청원을 주도하여 정치 발전에 기여한 분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 존 왕의 전제적 실정에 반기를

든 귀족들이 역사상 최초로 왕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도록

왕으로 하여금 조인시킨 문서를 가리켜요.



귀족 평의회, Council of 25 Barons란 개념이 왕권을 제한할

기구로 등장하는데 영국식 내각제 의회 민주 정치의 원형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겠고요. parliament의 전신이겠죠.



King John of England.. 영국사에서 지지리도 인기없는

군주의 대명사에요. 하필 선왕인 형 리처드 1세사자왕..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지라 더더욱 비교되어 까이는 거죠.



사자심왕 리처드가 대중의 상상과는 달리 불어를 구사하고

내정에 소홀한 군주이긴 했어요.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전쟁 능력이 과장없이 진짜배기인 건 백퍼 옳아요.



오늘날 민족 국가의 관점만을 전격 적용하여 사자심왕 리처드를

평가할 순 없지만 당대에도 그렇고 이후 역사에서도 영국인들의

보편적인 애정을 듬뿍 받은 군주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죠.



잊을 만하면 줄기차게 영화화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쟎아요.

하필이면 즉위 직전에 자기 형과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인지라

존 왕이 더욱 밉살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거고요.



실제 존 왕의 실정은 위태위태했어요. 이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가 바다 건너 프랑스 카페 왕가 주변에 영지를

갖고 있어 우리가 아는 세력권 지도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덧붙여, 플랜태저넷 왕족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지금과

많이 다른 중세 영어는 농노들의 말이었다 하고요.)










원래 사자심왕이 프랑스 땅 영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의 라이벌이던

카페 왕족 필리프 2세가 공격하여 지휘관으로선 비교도 안 되게

능력없는 동생 존 왕이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요.



이를 탈환하기 위해 존 왕이 무리하게 군비를 충원해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세금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귀족과 자유민, 농노들이 똘똘 뭉쳐 반발한 것…

이 점이 대헌장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문건상의 정치적 자유가 주로 귀족에게 국한한 건 사실이지만

귀족들이 반발하는 데에 시티 오브 런던 길드 소속 자유민들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노들이 적극적으로 합세했기에 헌장의

시대 정신이 시민의 총의를 담았다고 해석할 근거가 충분한 거고

무엇보다 막장 상황을 조장한 당사자가 존 왕 본인이었으니까요.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바다 건너서 십 년도 넘게 전쟁 노름에

빠졌지만 워낙 전략가로서 무능력한지라 허망하게 패배하고

돌아온 거에요. 거기다 귀족의 딸을 범하려던 적도 있다나요.

귀족들이 있는 대로 꼭지가 돌 수밖에요.



존 왕에게 그 어떤 억울한 상황 요인 하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쉴드 쳐줄 만한 꺼리도 없이 본인의 무능에다 통치자로서

기본 인성의 실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귀족들이 급기야 거병하고 교활한 존 왕이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아첨하여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지만

반란군이 런던 성곽을 포위하고 국왕파 내부 동조자를

포섭하는 등 상황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스티븐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로 양쪽이 템즈 강 남쪽에

모였고 왕권 제한을 약속하는 문서에 존 왕이 조인해버리는

듣도 보도 못하던 초유의 사태로 발전하죠.



1215년 최초 조인시엔 서수로 조항 구분이 없었어요. 1759년

윌리엄 블랙스톤 대법관의 영국법 주해라는 이론서를 통해

총 63개조로 정리되었죠.



대부분의 조항은 이후 일반법으로 대체 입법이 이루어졌으니

역사적 의의 이외에 현대적 의미는 없는 편이긴 한데요.



제12조를 보면 ‘군역 대납금 등 모든 과세는 오직 (시민의) 총의에

의해서만 이를 부과할 수 있다’고 하여 1215년 상황을 직접 엿볼

수 있고요.



제39조가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하거나 그 법익을 강탈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현대에 와서도

재판 법원으로 유효한 세 가지 조항 중 하나입니다. 현대적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법조문이자 법리임을 알 수 있겠죠.









이 때부터 영국의 민주 정치가 시작되어 의회가 짜잔 열리고…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 한국에서 영국사를

잘 안 가르치기도 하니까 — 사실 이 문서는 조인 직후부터 그

효력을 의심하고 1215년 해프닝은 사실상 상징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진실에 더 부합한답니다.



당장 조인 직후 존 왕은 (치사하게도) 교황에게 쪼르르 달려가

헌장 무효화를 요청하고 교황이 이를 교서로 내려 내전이

벌어지거든요. 개싸움인 거죠.



이후 국왕들과 몇 차례에 걸쳐 개정도 하고 밀고 당기고 개싸움이

지속되는데 핵심은 이거에요. 왕은 안 지키려고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리고, 귀족들은 틈날 때마다 문서 들이밀고…



그럼 오늘날 민주 정치의 효시 어쩌구…는 뭔데? 하실 텐데..

정작 옛날 옛적 무슨무슨 종이 쪼가리에 서명했네 어쨌네..

그런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민주 정치란, 문서나 법전의 종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주권을 당연시하는 동시대 시민의 사회 의식시대

정신에서 나오는 힘, 바로 그것 아니겠어요?



대헌장이 역사적 명분과 권원으로서의 힘을 갖게 된 시기는

전술했듯이 16~18세기. 바야흐로 계몽 사상으로 무장한

자유 시민의 정치 의식이 성숙하여 그에 합당한 전례를

능동적으로 찾아 공부하던 그때인 거죠.



이때에야 비로소 대헌장에 헌법으로서의 권위가 생겨난 거에요.

엘리자베스 1세제임스 1세의 자랑스런 치세를 몸소 겪고

네덜란드와 맞장뜨며 강한 나라로 가는 발판을 자기 손으로

일구어 가던 잉글랜드 삶의 현장의 지성인과 신민들…



그들이 성숙한 체제를 만들어 후손에 물려줘야 한다는 자의식에

스스로 눈을 뜬 거에요. 물론 겪어야 했던 세월은 힘들었어요.

허나 권리 청원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명예 혁명

권리 장전의 지난한 세월을 통째로 견뎌내고 더러는 고난에

희생되는 와중에 공동체가 지향할 가치를 찾아낸 거에요.



찾고 찾다 보니 자신들의 뿌리는… 아,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에

있었던 것이로구나. 몰랐었는데, 이젠 스스로 알게 된 거죠.



제헌절이 따로 없는 영국… 고작 달력 쪼가리에 기념일을 박는

것이 중요할까요. 박물관에 잠자던 대헌장의 거울에 비친 자신들

마음 속에 헌법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은 거에요.



에드워드 코크, 올리버 크롬웰, 존 로크, 윌리엄 블랙스톤

이런 이름들이 중요하다기보다 이들 뒤에서 세상을 움직인

평범한 영국의 시민들에게 더 큰 헌사를 돌려야겠죠.



이런 중차대한 시대 정신을 담고 있기에 수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대헌장을 법리적으로 계수했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연방 헌법UN 인권 선언



우리나라도 마그나 카르타란 말이 고유 명사 내지

관용적 수사로 발전한 것 보면 제도권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헌장의 현대적 이모저모를 다시 새기는 계기였길 빌고…

대영 도서관이 마련한 귀여운 동영상을 보며 즐겨봐요.









그리고 리처드 1세 얘기 나온 김에, 역대 영화화 사례 중

사자왕을 가장 포스 넘치게 묘사한 히트작을 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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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Jean-Jacques Rousseau:

A Man of Revolution, Never Born with Fortune













프랑스 대혁명을 출산한 정신적 아버지 장 자크 루소에 관해

사회계약론 한 가지에만 포커스를 맞춰온 대부분 교과서로 인해

급진적 사상가로 박제한 고정 관념만 양산해온 모양인데요.



그의 인생을 한 번 찬찬히 훑어 보자고요.

의외로 이런 사람이었어..? 하실 걸요.



프랑스의 영웅인데, 태생은 스위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712년의 제네바 공화국이죠.

칼뱅파 종교와 정치의 온상 같은 곳이에요, 18세기 말까지는.



왠지 루소와 장 칼뱅의 인생은 정반대 거울을 보는 듯해요.

프랑스 태생의 칼뱅이 제네바에서 명성을 얻고 뼈를 묻었지만

제네바에서 태어난 루소는 프랑스에서 활동해 혁명 사상을

낳고 거기서 죽었거든요. 신기한 우연의 일치죠?



루소는 생전에도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제네바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했다네요.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는 팡테옹 국립

묘지에도 안장된,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건국 지도자입니다.




...Pantheon, Paris where Rousseau is buried





부잣집에서 고이 자란 금수저 인생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어요.

태어나자 마자 모친을 여의었고 열 살 때 부친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 나머지 방랑 생활을 떠나 자식을 돌볼 수 없었어요.



떨어지기 전까지 부친과의 사이는 그럭저럭 화목했다 해요.

어려서 아버지와 독서 경험을 통해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죠.

이후 삼촌 손에 컸지만 애정과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죠.



그냥 이리저리 떠돌며 보호를 의탁한 청소년기였어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해 눈치보며 삶을 구걸한 처지였죠.

법원 서기나 조각가 공방에서 견습생으로도 있었는데

하도 때리고 갈구는 통에 뛰쳐나온 적도 있었다고…



열 여섯 쯤인가 사보이 공국 토리노로 이주해서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신교도를 돌보던 13세 연상 와랑 부인 밑으로

들어가요. 제대로 학교를 다닌 적 없는 루소가 그나마

그럴 듯한 교육을 받은 유일한 때가 이 시기에요.





Françoise-Louise de Warens






부인 직업의 특성상 주변에 성직자나 지식인들이 넘쳐났고

그들로부터 어깨 너머로 지식 동냥 하듯이 음악, 수학, 철학

등의 학문을 배워 나가요. 30대 중반 무렵까지 한때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부인의 후원을 받아 생활했다 해요.

루소는 부인을 평생 사모하고 경애했다네요.



이런 청년기를 보낸 그의 애정관은 자유분방하지만 방탕한 기질도

있었어요. 서른 셋에 10세 연하의 하녀인 마리 테레즈 르바쇠르

동거를 시작하나 정작 혼인은 나이 들어서야 올렸다죠. 자식을 다섯

낳았는데 부양할 능력이 안 되면 불행해진다며 모두 고아 병원에

보내 버렸고요. (이 행적은 훗날 두고두고 욕을 먹어요.)



그는 수학에 재능있는 음악학자이기도 했어요. 자신만의 숫자

기보법을 개발해 파리의 왕립 과학 한림원에 출품하러 갔다가

드니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의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죠.



백과전서파디드로달랑베르, 케네,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참여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일파에요. 1751년에 초판

출간한 백과전서로 과학의 체계를 재정립하고 지식 교육의

대안을 제시하려던 일종의 지성인 사회 운동이죠.

루소는 음악이나 정치학 관련 항목을 써줬어요.



다재다능한 polymath 루소는 정치 철학 이외 분야의 성공작이

의외로 다양해요. 1752년 오페라 작곡가로서 마을의 점쟁이

루이 15세 앞에서 초연되는 성공을 거두었고, 1761년엔 18세기

낭만파 소설의 걸작 신엘로이즈를, 사회계약론 직후 소설 양식을

빌린 교육론 에밀을 출간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어요.



어쩌면 근대 사상과 문화 다방면에서 재능을 꽃피운, 다 빈치

이후 천재적 르네상스맨의 마지막 인물일지도… 낭만파 문학과

계몽 사상이란 면에서 볼테르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가며

프랑스 시민의 잠재 의식을 일깨운 사람이란 평을 받는 거죠.

(혁명으로 목이 잘린 루이 16세의 평이라는 말도 전해져요.)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Geneva)






당대 사회의 명성은 비정치 분야에서 거두었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기억하는 루소의 진정한 가치는 정치 사상에 있어요.

첫 철학 논문 학문예술론을 1750년에 발표했는데

디종 학술원 공모에서 1등상을 받았다고 해요.



이 학문예술론을 확장 발전시켜 1755년에 인간불평등기원론

출간했는데 이 유명한 책을 통해 우리가 아는 진보적 공화주의

사상의 싹이 움트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 이성에 대한 고찰, 시민 사회 형성을

방해하는 불평등과 그 요인인 사적 재산권 등에서 심층적인 논의를

발전시킨 명작이에요. 원시 공산 사회의 묘사가 카를 마르크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이야기는 유명하죠.



루소의 인생작 두 권은 한 달 간격을 두고 1762년에 출간되요.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서 사회계약론, 그리고 5월에 나온 에밀.



(에밀은 사회적 인간 교육에 대한 진보 철학적 담론.. 역시

대성공하여 칸트의 규칙적 시간을 빼앗았다는 걸작이지만,

여기선 아주 대충 언급만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학문예술론에서 사상의 문제를,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국가 사회를

진단한 그가 모든 생각을 결집하여 내놓은 역작이 사회계약론이며

오늘날 민주 정치의 뿌리는 이 한 권의 책에서 갈라져 나온 거죠.










개인과 사회가 서로 양립하여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게 할 인간

본성으로서의 일반 의지가 작용한 사회 계약을 통해 비로소,

양도나 분할이 불가능한 절대적 속성의 국가 주권이 나오기에

오직 피치자인 인민만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우리 모두

잘 아는 근대 공화정 사상이 여기에서 완성되는 거에요.



아울러 토머스 홉스리바이어던존 로크통치론을 거치며

혼돈의 쌍곡선으로 피어 오르던 공화주의 정치 사상이, 이 한

사람의 깔끔한 논변으로 종합 정리되어 곧 깨어날 근현대

시민 사회 계급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것이기도 해요.

1651년 - 1689년 - 1762년의 연속성인 셈이죠.



루소가 가장 강조한 핵심 가치는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본질로서

자유평등, 그리고 인류 보편적 사회 연대 의식이었어요.

liberty, equality, fraternity* …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공화적 정치체의 구성을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했죠.



*일본에서 초기 번역이 잘못 자리잡는 바람에 박애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현대어 어감으로도 박애가

와닿지 않으시니만큼, 계급을 초월한 사회적 연대감 정도로

해석함이 제일 타당하다는 최근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해요.

- 자유, 평등, 연대..


이는 혁명을 이끈 자코뱅 당원들에게 투쟁 프로세스를

매뉴얼로 만들어준 것이나 진배 없었어요. 대혁명 시절

루소의 이 책 하나 손에 안 들고 다니는 사람 없었다죠.

이론적 기본서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사회계약론과 에밀, 둘 다 국가 체제의 근본적 혁신과 가톨릭

사회 비판 등 급진적 내용을 담고 있었고 하필 두 명저가

연달아 출판되는 바람에 루소는 유럽 전역에서 폭풍같은

논란의 주인공이 되요. 덕분에 8년간 유럽 각지를

떠돌아 살 수밖에 없었다나…



변변한 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당대 최고 인기의 예술가 반열에

오르지만 특유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 근대 공화정의 바탕을

완성한 장 자크 루소… 안타깝지만 혁명의 발화점을 몸소

목격하지 못하고 바스티유 사건 11년 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살다 갑니다.



자유로운 기질을 타고났다고 미화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적

기준으로도 결코 윤리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녔어요.

말년에 참회록을 써서 스스로 반성하기도 했거니와…



하지만 오늘날 민주 정치 체제의 비호 아래 열심히 인생의

좋은 날을 구가하는 현대인이라면 급진적이라고 맹비난받은

루소의 사상 덕을 입지 않았다고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터…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이 그래요. 살아가던 그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주 가끔은 진심으로 뭔가를

추구했던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거죠.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은덕에 힘입어 부지불식

간에 삶이 윤택해지고 평화로워지지만 대부분 그냥

모르고 지나간다는 사실…



고상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만이 역사의 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평범한 상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인생의 진리인 법이죠.



종교적 이유로 내세를 믿는 분이라면 죽어서 모든 것의 화해를

받아들일 때쯤 깨닫게 될 거라고 봐요. 아, 내가 몰랐었는데

이런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그 덕에 잘 산 거였구나 하고..



장 자크 루소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고 있는 숨은 현자로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래는 그의 인생을 축약한 짧은 동영상..

에밀 내용이 부족한 분은 그 아래 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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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V

Rise of Western Modern Philosopher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V. 근대 철학 Modern Philosophy 



모든 학문은 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가지를 치고 생장합니다.

철학은 정치경제 등 사회 현상 전반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요.

유럽 역사에서 근대 철학의 태동이란 현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현대 문화의 바탕을 형성하죠.


인문주의의 부활, 무역 항로의 개척, 프로테스탄트의 발호,

자연 철학의 과학화 등 지금까지 상술한 각 현상들이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점차 사회가 생동하고 변화하는데,

이를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철학자들이 맡은 거죠.


16~17세기를 살며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한 초기 철학자들이

선각자로서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 철학

극복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을 되살려 그네들이 살던

현재의 시간에 적합한 시대적 사상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죠.


초기 선구자들을 지역과 성향에 따라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를 아우르는 서유럽 대륙에선 합리주의,

rationalism으로, 영국에선 경험주의, empiricism으로 부르며

각자 독자적 체계를 조성했어요.


이성과 경험으로 나뉘는 흐름을 당시에 인지한 건 아니고 정작

후대에 이 일을 한 사람은 칸트입니다. 현대 철학의 하위 분과를

구분하면 인식론, 형이상학, 존재론, 윤리학, 논리학, 미학, 정치

철학 등인데 대륙과 영국의 논쟁은 인식론에서 출발하였죠.


합리주의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절대 진리를 찾아 인식의

근본으로 삼자는 생각입니다. 30년 전쟁 참전 중 신비한 꿈을 꾸고

학문의 길에 들어선 르네 데카르트가 선구자로서, 그는 철학, 수학,

광학, 천문학 등 방대한 연구를 한 대학자이자 철학의 아버지에요.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에서 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

반복하여 종국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의심할 수 없는 제1원리로 제시했어요. 이로부터 시작하는

연역적 추론을 통해 신과 사물의 존재를 증명하자는 거죠.


경험주의는 사물의 현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사유자가

직접 경험한 지점으로 잡자는 생각으로서, 평생 법관으로 산

프란시스 베이컨이 데카르트보다 수십 년 앞서 늘그막에

실험과 저작에 몰두하며 새로운 생각을 집대성했어요.


그가 죽기 여섯 해 전 1620년에 집필한 신기관은 그리스

이래 과학 연구론의 체계를 장악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

의문을 품고 귀납적 실증으로 진리에 접근할 것을 주문했고

(아는 것이 힘이다..란 명제) 우상론에서 - 종족, 동굴, 시장,

극장 - 인간의 보편적 편견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대륙의 합리론을 계승한 이는 네덜란드의 바뤼흐 스피노자와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였어요. 둘은 데카르트와 함께 3대 거장으로

꼽힙니다. 스피노자는 1674년 에티카를, 라이프니츠는 1710년

신정론을 출간하여 인간 이성의 탐구를 이어갑니다.


에티카는 스피노자 필생의 역작으로서 살려는 본능적 의지,

코나투스가 지배하는 감정을 통제하려면 오직 이성에 기댈 수

있을 뿐이라 썼죠.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철학과 신학이

서로 모순되지 않아 양자 모두 신의 섭리일 뿐이라고 설파해요.


영국의 경험론은 존 로크가 계승하고 데이빗 흄이 발전시켜

후대로 넘어갑니다. 1690년에 로크가 출간한 인간오성론

백지 상태의 인간이 경험으로 지식을 축적한다고 봤지요.

(빈 서판 같은 백지 상태, 라틴어로 타뷸라 라사라고..)


한편 계몽주의가 발전한 사회계약론이 주류를 형성하여 공화주의

정치 사상으로 또 하나의 줄거리를 이룹니다. 토머스 홉스가 단초를

풀기 시작하죠. 1651년 명저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자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계약을 맺고

국가를 세운다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존 로크는 왕당파가 왕권신수설을 부활하려는데 반발해 1688년

통치론에서 그해에 일어난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인간의 자연권,

피치자로서의 저항권, 선거제와 권력 분립의 원리, 노동 가치설

등의 주제로 미국과 프랑스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장 자크 루소는 1762년 출간한 동명의 저서로 아예 사회계약론

완성한 사람이죠. 양도할 수 없는 국가의 주권은 오직 인민에게서만

나오며 자유의지와 사회계약으로 공공선을 추구한다고. 익숙하죠?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정립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

기반을 완성하지만… 본인은 혁명 발발 11년 전에 사망…ㅜ


이렇게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발전한

세 줄거리가 합하여 근대 철학이 집대성되는 전기를 맞습니다.

네, 이마누엘 칸트.. 지구상 역대 최고의 지성이 등장해요. 짠.


칸트가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에요. 첫째, 합리든 경험이든 계몽이든

그때까지 발전한 유럽의 모든 철학을 종합하여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신학, 미학, 존재론, 정치학 등 전 영역을 집대성한 체계를

완성하고 수백 년 후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에요.


둘째, 이렇게 완성한 독일 관념론의 비판 철학이 제시한 모든 논제가

결국 선험적 이성이 주재하는 사상의 중심에 인간을 주체로 놓았고

이는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만에 유럽이 신의 그늘을 드디어 완전히

벗어나 인류가 최상위 존재로 올라섰음을 의미하는 거란 점이죠.


1781년 순수이성비판,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비판

차례로 출간하며 그는 인류의 철학을 종합합니다. 전 영역에 걸쳐서요.

이성을 중시하나 경험론을 끌어와 a priori, 선험적 관념론을 세웠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어떻게 그를 계승하여 발전시킬지가 관건이었죠.

게오르크 헤겔이 독일 관념론의 적통을 계승했습니다. 칸트 만큼이나

철학의 전 영역을 통찰하며 절대적 관념론변증법, 역사 철학

종합하여 수많은 헤겔주의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18세기 공화주의를 일단락짓고 맞은 혁명의 시대에 사상의 조류는

자유주의로 흘러갑니다. 제레미 벤담은 1789년 저서 도덕입법원리

통해 공리주의를 확립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했고

후대의 자유주의자에게 영감을 줬어요.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 자유론으로 19세기 자유주의 정치 사상을

종합한 대가입니다. 이미 벌어진 정치 현상의 사변을 세운 것이 밀의

역할이었다면 카를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론으로 미래에 등장할

사회주의 정치 체제의 철학 기반을 제공하는데 앞장섰죠. 18세기

말엔 에드먼드 버크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다진 적도 있었어요.




영화의 소재로는 철학자 자신보다 철학책 속 논쟁 주제가 더

알맞을 겁니다. 인식론이 와닿지 않는다면 매트릭스

숟가락 씬을 다시 한번 음미하는 것이 좋겠고요.



리들리 스코트해리슨 포드와 작업한 블레이드 러너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을 탐구했었죠. 같은

감독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존재를 파고 들었고요.



인과론의 비극적 참상은 2004년작 나비효과

처절하리만치 극적으로 묘사했었고요.



욕망에 빠진 인간의 윤리적 모순에 대해선 작고하신 앨런 파큘라

감독이 노년에 작업한 1990년작 의혹(무죄추정)을 추천해요.

해리슨 포드가 여기에도… 출연진 면모와 연기가 엄청나죠.

(원제는 Presumed Innocent.. 미성년자 특히 주의)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돌아가시기 전 블루-화이트-레드 시리즈에서 다루었는데요.

이 연작의 프로토타입 작품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1991년작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렌느 야콥이 여기서 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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