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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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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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근세사 훑어보기 III : 종교 개혁




Back to 1640s of Britains..

What Happened and Whodunit






영국의 근대사가 현대에 와서 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중요할지 모를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현재 국적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민주 정치라는 것…

democracy.. 짜잔… 알죠?

인류 역사상 이걸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근대의 영국이거덩요.



더 정확하게 시공간을 좁혀 보면 17세기 잉글랜드와

그 주변의 왕국들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였어요.



유감이지만 17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일을

단번에 설명할 순 없어요. 아무리 단순화시켜도 최소한

전반기와 후반기, 둘 정도 시대 구분을 해줘야 합니다.



17세기 전반기 사건을 흔히 청교도 혁명이라고 많이들

들어보셨을 테고, 17세기 후반기 사건을 명예 혁명으로

알고 계실 테죠. 왠만큼 교육받은 현대 한국인들은요.

일단은 그러한데 말이죠..



출신 성분상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계층을 중심으로

청교도식 종교관을 가지고 상업 및 무역으로 세를 구축한

신사 계급의회파 반란 세력이 잉글랜드 국왕권에

대항하여 대략 1640년대부터 50, 60년대까지

벌인 일련의 전쟁과 정쟁 및 국가적 소요 사태…



자, 이렇게 복잡한 사건을 간명하고 단출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본 블로거에게 그런 재주가 없는 거겠죠.










먼저 역사서에 어지럽게 난립하는 용어부터 정리해야 해요.

이 책 저 책에 여러 개념이 난립하는데 각각 가리키는

내용이 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청교도 혁명, Puritan Revolution..은

본 블로거가 판단할 땐 국내에 가장 널리 정착한 개념이에요.

비교적 연식이 되는 사람들이 이 용어로 많이 알고 있죠.



1640년대 사태의 주동 세력이 가진 종교관이 칼뱅파 장로교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고 사태의 기저에 중세 종교 전쟁

깔려 있음을 명시하는 용어인데요.



이 표현이 다소 불명확할지 모르다는 비판이 죽 있었어요.

왜냐..? 사람들이 혁명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란 게, 보통

프랑스 1789년 혁명이나 1830년 혁명처럼, 노도처럼 들고

일어난 민중의 저항, 펄럭이는 깃발… 뭐 이런 거쟎아요.



근데 본 사태는 피치자 하층민보다는 중소 지주 계급인 신사,

젠트리나 요먼이란 제3계급이 중심이고 그 방식도 거리의 폭동이

아니라 엄연히 정규군을 편성하여 전쟁을 벌이는 식이었거든요.

그래서 다소간 본질을 호도할 소지가 있는 표현인 거에요.



영국 혁명이란 말도 프랑스나 미국과 묶어서 편의상 쓰긴 해요.

일관적 표현으로 분류하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사실 영국도

아니고 혁명도 아닌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 애매한 말이죠.













이런 이유로 오늘날 현대 영미권 역사서에서는 대체적으로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란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선호하는 편이에요. 빠르게 정착하고 있는 말인데요.

(아, 물론 영어 표현이 정착해가고 있다는 뜻)



사태의 전개가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쟁의 형태로 벌어졌기에 그래도 가장 사실에

근접한 현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번역어가 문제인데 엄밀히 말해서 이 당시 국체가

영국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아는 그 영국이란 나라는 각각

1707년과 1800년의 연합법으로 탄생한 거니까요.



17세기는 아직 각기 독립적인 세 왕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동군 연합.. 같은 군주 아래 느슨하게 결합한, 곧

연합 왕국으로서의 국체를 형성하고 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번역어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치고 박고 싸운 주무대가

잉글랜드이기도 했고..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할이 전혀 없었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기 때문에, 좀 아는 사람들은 더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죠. 이른바 삼왕국 전쟁 또는 삼왕국 내전, Wars of the

Three Kingdoms 또는 British Civil Wars..



그런데 이 용어도 삼국 시대나 삼국지처럼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히 있어 현대 한국에서 널리 용인되는 건 아니에요.

당연한 소리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위촉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거든요.



주교 전쟁, Bishops' Wars..란 개념도 있어요. 이건 이 모든

사태의 촉매 및 시발점 역할을 한 1639년과 1640년의 전쟁

일부를 가리켜요. 하지만 사실 이 전쟁 내용이 큰 줄기에서

그닥 중요하다고는 볼 수가 없기도 해요.



삼왕국 전쟁이란 개념으로 가면 주교 전쟁 등 전체를 포괄할

수 있지만 보통 많이 쓰이는 잉글랜드 내전의 개념에선 큰

줄거리만 보려는 경향이 생겨 잉글랜드 외 기타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건과 전쟁을 제외하고 논할 때도 종종 있어요.



왜 복잡한 개념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하는지 이제야 알겠죠?

한국 근대사에서 1880~90년대에 달 단위로 연달아 발생하는

복잡한 사건들을 한국인 입장에서도 차근차근 복기하기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현대 사가들의 일반적 경향을 좇아 English Civil War,

잉글랜드 내전으로 1640년대 역사의 표제어를 정리해 볼께요.










잉글랜드 내전의 본질과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사태의 능동적 주체가 누구인가부터 따져보면 어떨까요.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해갈 수 있어요.

청교도, 젠트리, 스코틀랜드



청교도란 제네바에서 태동한 칼뱅교가 영국으로 넘어와 얻은

별칭입니다. 영어 명칭으로 따지자면 또 구분이 되고요. 잉글랜드

내의 칼뱅파는 puritan, 스코틀랜드에선 covenanter로 불렀어요.



칼뱅파 장로교가 영국 땅으로 넘어와서는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내에 터전을 잡아 세력을 넓혔으나 잉글랜드 안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해 나갔습니다. 16~17세기였죠.



청교도가 영국 사회 전체에서 중심 세력이 된 데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합니다. 무엇보다도 상업과 무역 면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16~17세기 영국 경제력의 근간을 형성했어요.



칼뱅파 교리의 예정설에서 근면과 검소를 중시하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면 선천적 계급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급진적 논리가 청교도 경제 활동의 사회적 확장을

지원 사격한 겁니다. 루터교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죠.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 여기에 중앙 왕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중하급 지방 귀족이나 중소 지주층 역시 이런 생각에

동참할 여지가 충분했어요. 16세기 후반기부터 이런 사람들이

똘똘 뭉쳐 영국 정가의 기층을 장악해 들어간 거지요.



이른바 젠트리요먼이라고 부르는 제3계급, 또는 신사 계급

출현한 거에요. 이들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배경은

멀리 백년 전쟁장미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요.



백 년을 훨씬 넘긴 두 전쟁으로 대권에 도전할 만한 귀족 가문의

씨가 말라버리는 통에 중앙 정치를 담당할 인적 자원이 소멸해

버리니 이 빈 자리를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거에요.



그리고 헨리 7세헨리 8세튜더 왕조의 번영을 개창한

국왕들 역시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서 제3계급을

적당히 육성하고 달래가며 정치를 이끌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상층부 인재의 씨가 말라 중간 계층이 급부상하는

사회적 계기는 희한하게도 중세사에서 영국에서밖에 달리

관찰이 되지 않아요. 의회 정치의 씨앗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란 나라의 숙명이 시작된 셈인 거죠.



(그리고 다른 나라 역사와의 차별성이

시작된 지점도 정확하게 바로 여기…)










제3계급의 생각과 삶은 평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왕권이란 거대한 기득권에 맞설 수 있도록 훌륭한

계급 대립 구도가 시의적절하게 형성된 거에요.



당시 평민들도 다 청교도였겠지 지레짐작하는 분들도 많은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생활에 쫓겨 변화에 둔감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보수화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평민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가톨릭이나 어정쩡한 국교회 상태였죠.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는 교리와 의례, 직제 등에서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인위적으로 종교 개혁 추세를 이용한 거니까…)



즉 왕실 — 제3계급 — 평민의 삼분된 계급 구조는 어느 나라든

봉건적 신분제 국가라면 다 있는 현상인데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이 구조가 어떻게 근대화하는가의 핵심은 결국 중간 계급이 어느

쪽에 어떤 철학을 가지고 붙느냐로 역사의 향방이 달린 거거든요.










조선 후기에도 서얼과 실학자 같은 실용적 사상을 가진 중간

계급이 분명히 대두했어요. 그런데 조선이 실패한 원인은

상층부 기득권이 와해하지 않고 임란 후 신분제가 동요하며

되려 양반이 늘어나는 기형적 구조가 양산된 때문이지요.



성공한 민중 혁명을 이룬 프랑스와 러시아는 어떠했나요.

지식인과 군인이 피치자의 편에서 배경 철학을 제공하고

정치 구도 재편에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시대 정신과 비전을 지닌 중간 계급의 역할이 없으면

근대 시민 혁명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추론…

바로 이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거죠.



이런 전차로 조선 후기와 구한말에 아래로부터 혁명의 싹이

움트지 못한 역사를 맞은 거에요. 문제는 위로부터라도

개혁과 혁신이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ㅜ

구한말 기득권의 외교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죠.



제3계급의 역할은 이 정도로 중요하답니다. 흔히 상식 선에서

이 시기 영국 정치가의 대표자로 올리버 크롬웰을 상정하실 텐데

크롬웰이 이 표본 집단 특성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쟎아요.

신기하죠?



자, 다음엔 더욱 골치아픈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로

우리 함께 들어가 보아요.



돌아가신 분인데 어린이 영화 치티치티 뱅뱅으로 유명했던

켄 휴즈 감독이라고 있었어요. 이 분이 1970년에 크롬웰이란

작품을 선보이며 올리버 크롬웰 역에 ‘덤블도어’ 리처드 해리스

옹을 캐스팅했죠. 작품의 흥행은 신통치 않았지만 해리스의

사자후 연기는 정말 후덜덜하군요. 아래에서 맛만 보시지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English Politics from Tudor to Stuart ..

Until Ended Up with the Petition of Right






권리를 청원하다, Petition of Right..

누군가의 권리에 관해 간언하는 주청을 드린다는 뉘앙스에요.



그 누군가란 자유민 또는 자연인을 가리킨다고 하겠고

왕께 주청 드렸다는 건데 그 왕은 찰스 1세였어요.



찰스 1세를 거론하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6~17세기 잉글랜드 왕조 역사를 짚지 않을 수 없어요.



플랜태저넷, 튜더, 스튜어트…

영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인데, 이거 뭔가요?



왕가 가문의 이름이라고들 아실 텐데 사람 이름의 성,

last name인 건 아시나요들. house of Tudor.. 이러면

Yi dynasty.. 이렇게 부르는 것과 유사한 거에요.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으로 플랜태저넷 사람들의 씨가

말라버려 할 수 없이 핏줄 긁어모아 개창한 왕가가

16세기의 튜더 왕조에요. 헨리 7세였죠.



언젠가 헨리 8세를 짚고 넘어간 적 있는데 이 사람이

16세기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중추적인 군주였어요.

헨리 튜더.. 전임 헨리 7세의 아들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헨리8세-바로알기



튜더 시대의 가장 유명한 왕이기도 했고요.

또 튜더 왕가 최고의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해요.



엘리자베스 튜더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장장 만 44년을 다스리며 그레이트 브리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진, 영국 역사가 사랑하는 군주입니다.



여왕의 치세를 과연 태평성대라 할 수 있었는가, 여왕은

정말 좋은 군주였던가에 대해 오늘날 여러 가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이 시기 누구보다 오래 다스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앞뒤

다른 군주에 비해 자기 정치를 할 시간과 기회가 충분했던 것,

그래서 긍정적으로 볼만한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점이죠.



잘못이라 할 순 없지만 (중세 관점에서) 여왕의 치명적인

흠이 있었는데 혼인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즉, 튜더

왕가의 대가 끊길 것이 미리 예견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스튜어트 왕조입니다.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승계하여

동군 연합의 새 왕조를 개창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거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같은 사람, 다른 이름의 군주인 거에요.



제임스 1세… 평가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려 오늘날

영국 사학자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군주일 거에요.



이 당시 영국 군주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어요.

바로 종교 전쟁이죠.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에 이르기까지, 교회

개혁으로 등장한 청교도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이들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골칫거리였어요.



청교도는 영국 땅의 칼뱅교 신자를 일컬어요. 가톨릭과

많은 교리를 공유하는 신교인 영국 국교회가 있었고..

평민 중 가장 많은 숫자는 여전히 가톨릭이었어요.

청교도는 스코틀랜드와 제3계급에 분포했죠.



*중세 유럽 종교 정치의 폐단을 논하자는 것일 뿐, 현대의

가톨릭교나 성공회를 비난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구요.










국교회를 헨리 8세가 만들었기 때문에 후임 군주가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냐에 따라 나라의 종교가 요동을 쳤어요.



헨리 8세 국교회, 에드워드 6세 국교회, 메리 1세 가톨릭,

엘리자베스 1세 다시 국교회.. 이런 식이었죠.



군주에 따라 종교가 바뀐다는 것, — 감이 오시나요.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종교 신자는 박해하고 탄압하고

더러 죽였다는, 그런 끔찍한 의미라고요. 지금 중세랍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는 서로 배다른 남매에요.

메리의 모친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아버지 이혼으로

쫓겨난 사람.. 메리가 극렬 가톨릭일 수밖에 없는 이유죠.

평생에 걸쳐 부친과 신교를 원망했겠죠. 그렇긴 하나…



메리 때 종교 탄압을 블러디 메리라고 따로 지칭하긴 해요.

그런데 그 정도 사형 집행은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때도

있었어요. 메리 여왕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평가라 할 만해요.










이런 험한 때 제임스 스튜어트가 왕위에 올랐어요. 스코틀랜드

출신이니 그 자신은 청교도의 정신을 백번 이해할 입장에

있었어요. 어려서도 청교도식 교육을 받았다고 하죠.



그러나 연합 왕국의 군주로서 정치적 입장은 개인의 입장과

같을 수가 없었어요. 튜더 가문이 개창한 국교회의 기득권을

해치는 건 국가의 기틀을 흔드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임스는 가톨릭과 청교도 둘 다 적당히 탄압하고

국교회의 근본을 세우는 쪽을 선택해요. 독재자라는 비판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나마 중도를 지킨 결정이 아니었나,

본 블로거는 솔직히 할 만큼 한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가장 유명하다는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한

문화적 통합의 업적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와 대립각을 세우며 살짝살짝

무시 스킬을 시전하는 튜더 군주들의 전통 아닌 전통이

제임스 때에도 이어졌다는 후대의 비판은 유효하겠죠.










제임스 보고 그나마 낫다 할 수 있는 것이, 후임자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였다고 볼 수

있거든요. 1625년 그의 아들로 즉위한 사람은

찰스 스튜어트, 찰스 1세 국왕이었어요.



찰스는… 종교 정치란 면에서 매우 갑갑한 왕이었어요.

국교회를 신봉했고 처가가 가톨릭인지라 가톨릭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국교회적 반동 조치를 도입하니 어땠겠어요?

스코틀랜드청교도젠트리, 당시 영국을 지탱하던

세 집단이 엄청나게 반발하는 결과를 낳게 되요.



탄압과 처형이 따랐겠죠? 거기에 한창 대륙에서 진행

중이던 30년 전쟁에 나라 살림 생각도 안 하고 마구

뛰어들어 용병 경제 창출에 이바지하신…ㅜ



왕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왕권 신수설이란 사조가 한몫을 해요.










일찍이 16세기 말 로마법 법률가인 장 보댕이 신학,

정치, 경제 등 분야에 걸쳐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요.



보댕의 주된 논제는 로마 가톨릭 교황이 프랑스 왕국의

군주 통치권에 행사하는 지나친 간섭에 반대하고 강한

통일 왕정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보댕

자신은 평생 가톨릭의 신앙을 유지했지만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절대 왕정 체제는 이런 보댕의 사상에

힘입은 바가 컸는데, 재미있는 건 보댕이 영국의 왕당파

의회파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에요.



로버트 필머는 보댕을 계수하여 왕권 신수설을 주장한

대표적 인사였어요. 그의 유작은 앞으로 17세기 후반에

벌어질 왕정 복고라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쳐기도…

(나중에 논할 기회 있을 겁니다.)



찰스 1세가 설치는 데는 이런 당대의 흐름이 받쳐준 면이

있었어요. royalist라고.. 왕당파란 정치 집단의 중심

사상이 왕권 신수설이었죠. divine right of kings..










막무가내로 종교 반동 및 전쟁이 휘몰아친 상황.. 막대한

전비와 배상금을 해결하기 위해선 세금이 필요했어요.

이에 과세를 획정하라고 의회를 소집한답니다.

평소 무시할 땐 언제고…



이때가 즉위 후 겨우 2~3년 지난 시점인데 나라 꼴을

이렇게 망쳐 놓으니, 안 되겠다 싶어 의회 정치의 빛나는

전통을 기억하는 귀족들이 반론에 시동을 걸어요.



언젠가 포스팅한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 경이

여기에 앞장선 대표적 의회파 정치인이에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멋대로 용병을 써 전쟁을 일으키고 용병의 전비를 평민 가구에

떠넘기는 망나니 왕을 통제해야 한다는데 의회파 귀족들이

뜻을 모았으며 코크 경이 이 생각을 문서로 기초하죠.



또한 국왕을 압박하는 극단적인 형식으로 가지 않고 군주에게

자유민의 권리 확보를 ‘소청’하는 형식으로 완화하여 찰스가

한결 받아들이기 편하도록 출구 전략을 세워주자는 혜안도

코크 경의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탄생한 국왕과 의회 간 협약서가 바로 우리가 아는

권리 청원, Petition of Right.. 라는 문서랍니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의 불문 헌법 법원 중 대헌장 다음

순서 정도에 꼽을 중대한 문건이면서, 미합중국 건국 및

미국 헌법 수정안 제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적이죠.



청원의 내용은 흔히 4대 원칙으로 알려져 있어요.

조항이 넷이란 뜻이죠.



첫째,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것..

둘째, 군병을 자유민 사유지에 주둔시킬 수 없다는 것..

셋째, 자유민을 명분 없이 투옥할 수 없다는 것..

넷째, 평화 시기에 함부로 계엄령을 공포할 수 없다는 것..

(주어는 모두 존귀하신 국왕 전하...)










과세할 수 없다는 건 이 사단이 모두 찰스가 절차 무시하고

세금을 획정하려 하다 보니 당연히 나온 조항이겠고요.



오늘날 현대 민주 정치에서도 세금을 정할 수 있는 조세권

입법부만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이지요. 행정부가

단독으로는 절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어요. 이 전통이

여기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거랍니다.



찰스 왕이 용병으로 구성된 군사를 무단으로 자유민들 집에

주둔시켜 버렸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 군사들

먹고 입히고 재우는 건 너희들이 부담하란 뜻인 거거든요.



국방 운영의 핵심은 사실 전쟁 기술이 아니라 군수와 보급인

것… 아시죠? 전쟁은 순간이지만 군사를 유지하는 건 평시에

엄청난 돈을 부담해야 하는 일 아니겠어요. 평시의 군대란

밥먹고 싸움 연습하는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이로 인해 자유민 중 선의의 피해자가 엄청 나온 관계로..

두번째 조항이 나오게 된 거고요.



이런 주둔 조치에 반발한 자유민들을 또 엄청나게 투옥하고

탄압했어요, 못난 찰스 왕께서. 재판도 없이, 영장도 없이.



세번째 조항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거고 habeas corpus..

라고, 근대 공법에 등장하는 인신 보호 영장의 법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죄형 법정주의 같은 현대적 형법 법리를

의회 정치의 역사에서 그 맥락을 찾아볼 수 있는 거에요.



마지막 조항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왕께서 심심하면 계엄을 선포하시니…

별 명분 없이 그냥 자기 말 안 듣는다고..ㅜ










다른 때 같았으면 상원이 열심히 나서 국왕 쉴드를 쳤을 텐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대헌장 파괴의 현장인지라, 영국 의회

역사상 보기 드물게 상하원이 대동 단결하여 가결시켰다죠.



대헌장… 예, 1215년 마그나 카르타 맞습니다. 13세기 이래

잉글랜드의 의회 정치란 이것이 지켜지는 둥 마는 둥 오락가락

들고 낢을 반복한 요지경이었다 보면 대략 맞을 거고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영국입헌의회정-마그나카르타



의회가 강할 땐 대헌장을 지키라며 군왕을 압박하고 반대일 땐

왕이 의회를 무시하거나 문을 닫아 버리거나 하는 상황이 약

4백 여년 역사의 각 단계마다 주기적으로 펼쳐진 거에요.



대헌장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재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조부터고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강력한 군주 집권기엔 의회와 적당한 거리에서

반목과 줄다리기 상황을 연출하곤 했어요.



이제 17세왕들께서 본격적으로 의회 정치의 판을 손수

깔아주시는 시대(!)로 넘어와선, 권리 청원을 필두로 하여

별별 익사이팅한 사건들이 요지경처럼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바야흐로 인간사 정치의 문화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하는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원대한 풍경화의 전주곡처럼 등장한 1628년 6월 7일

영국 역사의 한 페이지는 바로 권리 청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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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against the World










보헤미아의 얀 후스, 신성 로마 제국의 마르틴 루터,

취리히의 울리히 츠빙글리 등 개혁 교회 운동의 양상은

15~16세기에 매우 다양한 방면에서 전개되었습니다.



루터의 활동이 현대에까지 가장 유명하지만 가톨릭 교회의

보수적 교리와 부패 현상에 반대했을 뿐 정작 그 자신은

독일 농민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이었어요.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바라는 민중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고

로마 가톨릭과 신성 로마 황제의 간섭을 배격하고픈 독일권

선제후들의 입김에 더 부합하는 지도자가 루터인 거죠.

루터교는 태생적으로 꽤 보수적 성향이었던 거에요.



*선제후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선거로 추대할 권한을

가진 제국의 대공들을 말합니다. 보통은 오늘날 독일

지역 영지를 관할하는 제후들 중 선도적인 입장의

유력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이라 보면 될 듯해요.



교리 문제에만 그치고 정치 활동으로 발전하지 않는 종교 개혁은

현대적 공화정 역사와 아무런 연속성도 없고 시대사적 의의도

찾을 수 없는 공허한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하겠습니다.



종교 전쟁의 정점을 찍은 30년 전쟁이 기독교 문제에서 시작하여

종국에 국제 정치로 대단원을 마친 사례에서 증명이 되쟎아요.

교회 개혁의 본질은 정치 구조를 건드려야 하는 거였어요.










개혁 교회 운동을 자치 정치체로까지 확대 발전시킨 장 칼뱅

그래서 정말 중요한 인물인 겁니다. 근현대 인류 역사에 가장

중요한 인물 한 사람만 꼽는다면 — 케플러나 뉴턴, 칸트,

나폴레옹, 마르크스 다 제치고 — 바로 칼뱅일지도 몰라요.



칼뱅이 역사에 끼친 영향을 논한다면야 고작 포스팅 수백 개나

논문 수십 편으로도 모자랄 지경이겠습니다만.



아주 심하게 간소화하여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영향

한 가지 정도씩만 썰을 풀어본다면요...



칼뱅의 예정설은 인간의 구원을 사회적 신분이나 인간의 의지와

상관 없이 오직 신의 은총이 정할 뿐이라는 내용으로서 일찍이

5세기에 아우누스티누스가 기초하여 칼뱅이 정립했답니다.



칼뱅의 정치적 가치관에 있어 급진성은 이렇게 인간의 운명이

사회 정치 계급을 초월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해요. 현대적 민주

시민에겐 낯설지 않겠지만 중세의 평민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죠. 칼뱅교가 급속도로 퍼진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고요.



칼뱅은 사치와 쾌락을 끊고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에 충실하면

이를 통해 얻은 부를 죄악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전하여

청교도적 자본주의 사상의 씨앗을 낳았다…고 19세기에

막스 베버가 정리한 바 있습니다.



즉 신의 섭리란 것이 인간의 하챦은 의지와 무관하니 사회 계급

같은 제도는 가볍게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 점, 바로 이것이

칼뱅 사상의 핵심이에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기존 사회 계급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신학적 가능성을 열어준 점이야말로 다른 어떤 개혁 종파보다

칼뱅교가 이후 대세로 자리잡은 본질적 원인이겠지요.



당시 로마 가톨릭이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끼친 가장 큰 병폐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상의 문을 걸어잠가 암흑기가 지속된 것?

면죄부를 판매해 부정한 재산을 축적한 것?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과 정면으로 대립한 것?



평민의 일상적 삶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다고 각성할 만큼

종교 체제와 정치 구도 양쪽 지배자의 결탁 극심한 나머지

그 폐해가 어느 순간 둑이 무너지듯이 폭발했다 보면 어떨까요.



다른 그 어떤 병폐보다도 일상의 안정이 무너진 점이 가장 큰

거에요. 흑사병이나 계속된 대규모 전쟁으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고 병들거나 못 살게 된 일이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에겐 가장 커다란 고통이었음에 틀림없어요.



물론 역병이 교황 탓이냐 하여 직접 연관성을 따질 수는

없겠습니다만… 천재지변은 논외로 하고 사람이 벌이는

대부분 전쟁은 직간접적으로 교황권 및 가톨릭의

체제 병폐와 연관이 없다곤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 불합리한 폭력적 역사의 중심에 십자군 전쟁이란 희대의

병크가 도사리고 있어요. 서울대 외교학과 김용구 교수님은

유럽 역사의 특성이 폭력성 및 전쟁에 있다고 하신 바 있죠.



세상의 근본을 구성하는 평범한 농노들의 삶이 인간적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위협받는 상황이 되니, 그들도 본능적으로

모순의 구심점이 구교 가톨릭 체제의 비효율과 무능에 있음

직감하게 되는 날이 온 거에요.



중세 말엽의 사람들 의식이 어느 순간 그런 변화에 직면한 거죠.

인문 부흥이니 종교 전쟁이니 하는 피상적 현상은 그렇게 안으로

끙끙 앓고 있던 유럽인의 무의식이 폭발해버린 역사적 외관에

불과한 겁니다.



농노들의 자의식 각성이 유전자나 면역 체계라면, 종교 전쟁은

피나고 고름 터지는 자각 증상인 셈… 칼뱅과 같은 개혁가들은

증상을 유도하는 외부 기제, 바이러스 같은 것…?

굳이 비유하자면 뭐 이런 식?



이미 드러난 체제의 모순점을 교리로 확진하여 확인 사살시켜

주는 진단의 같은 역할… 중세사에서 장 칼뱅 역할론

그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칼뱅이 설교한 교리가 정치 체제의 본질을 꿰뚫고 시대를

관통하여 현대에까지 명맥이 이어진다는 점이 중요하고요.

그가 이렇게 중차대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든 제도적

기제는 교회법교회법정이었습니다.



*교회법은 그렇다 치고 교회법정이란 번역어를 용감하게

선택한 데에 비판이 있을 줄 압니다. 컨시스토리가 용어

통일이 안 되어 있음도 알고 있고요. 신학 논쟁이 목적이

아니라 비신도들에게 쉽고 빠른 이해를 돕는 것이 포스팅의

목적이니 그런 취지에서 널리 양해해 주시면 좋겠네요.



개혁 교회의 가치관이 어떻게 가톨릭 체제를 대체하여 새로운

사회를 구현할 수 있는지 입증하는 공동체 신앙 시스템이

교회법입니다. 교회법정은 교회법을 민간에 해석 적용할

자치 기구를 뜻하고요.



칼뱅이 두번째로 제네바로 청빙되어 남은 평생을 머물게

된 때로 거슬러 올라가요. 시의회의 약속대로 1541년 11월

칼뱅식 교회법이 가결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칼뱅식

엄격주의 통치의 공식적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에요.



예장 교회를 다니시는 분은 알겠지만 장로교의 직제는

목사, pastor — 교사, doctor — 장로, elder —

집사, deacon ..의 분업적 체계로 구성되요.



각각의 직분과 역할도 다르죠. 목사는 성직, 교사는 교육,

장로는 운영, 집사는 복지를 각각 맡는 식으로 효율성을

기하여 공동체에 봉사하는 구조에요.



바로 이 구조가 칼뱅의 1541년 교회법에서 비롯된 거에요.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장기간 자생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근간 시스템을 창안한 셈이죠.










교회법정, consistory.. 라고 부르던 심판 기구도 창설해요.

아직까지 교회법이 공동체 생활의 가치관을 대표하던 중세

시절이므로 민간의 관습을 해석할 기관이 필요했어요.

(로마 가톨릭도 똑같은 역할을 했는데 그 경향이

너무 보수 반동화하여 민심을 잃은 거죠.)



사실 우리가 현재 이미지로 떠올리는 독단적 통치자 칼뱅의

행적은 이 교회법정을 통해 이루어진 판결의 결과였어요.

특히 그가 춤이나 카드 놀이 같은 유흥 및 쾌락 행위까지

금지하는 급진적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에 제네바 유력

가문 중 일부는 꽤 오랫동안 저항하며 그와 맞선 거죠.



칼뱅 본인이 한동안 외국인 목사 신분이어서 제네바 시민권이

없었거든요. 교회법정 위원으로서 신학적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거에요. 시민권은 죽기 몇 해 전

가서야 획득할 수 있게 되요.



단 오해하면 안 되는데 기존 정무 당국인 시의회가 담당하는

사법 집행의 기능은 엄연히 양립하는 구조였어요. 예를 들어

교회법정이 내릴 수 있는 최고 형벌은 파문이었고 이에 따라

사형 등 형벌이 필요할 경우 집행을 의회가 맡는 구조인 거죠.



정교 일치의 신정 정치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거에요. 비록 당대에도 매우 엄격하게 기준을 세워 일부

시민의 반발을 사기도 했지만 개혁 초기에 칼뱅주의 노선이

빠른 시일 내 자리잡은 원동력 또한 이런 시스템에 있었죠.



이런 교회법정이 자리잡기까지 칼뱅의 삶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어요. 엄격주의의 반대파들이 칼뱅 신학을 계속해서

공격했고 (다른 개종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자칫

개혁가들은 언제라도 목숨이 달아날 수 있었어요.










미카엘 세르베투스 논란은 바로 그렇게 칼뱅의 입지가 위태로운

때 벌어진 일이에요. 삼위일체를 부정한 극단론자 세르베투스를

끌어들여 교회법정 자체가 진흙탕 싸움이 될 뻔 했죠.



세르베투스는 스페인의 의학자로서 업적도 남겼지만

신학자로서는 싸움닭처럼 논란을 몰고 다니는 요주의

인물이었어요. 삼위일체를 부정하여 유럽 전역을 들쑤셔

놓다가 제네바에 와서 결국 교회법정에 섰던 거죠.



칼뱅은 교회법정에서 세르베투스와 한바탕 설전을 벌였어요.

삼위일체 부정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 사회에서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선을 넘은 일이긴 하쟎아요.



답정너의 심판처럼 보이긴 하나 과연 형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같은 애매한 문제도 있어 쉽지 않은 사건이었어요.

판결을 주도해야 할 칼뱅의 입지가 그리 탄탄하지도 않았고..



시의회는 인근 스위스 자치주들에도 법리 해석에 대한

의견을 회람했고 그들 역시 ‘우리 심판이라도 마찬가지일 것’

이라 견해를 모으니 화형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해요.



요점은 이러한데 세르베투스 건은 현재의 신학자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떡밥인 것 또한 사실이에요.



논란의 본질인즉슨, ‘칼뱅이 시민권자 신분도 아닌데 뭐 얼마나

독단적이었겠냐’는 옹호론과 ‘칼뱅이 얼마나 독재자였는지 이

판결 하나 보면 알 수 있지 않냐’는 비판론으로 대립하는 거죠.



어떻게 보이시나요? 본 포스팅은 주인공이 칼뱅이니까

어느 정도는 비호하고 편애하는 쪽으로 서술했어요.



이에 반대하신다면 다른 저작들을 참조하기 바래요.

(그리고 거듭 밝히지만 기독교 신자 아니에요.)










세르베투스 논란을 슬기롭게 해결하고 그의 정적인 유력

가문이 가톨릭과 내통한 혐의로 된통 걸리는 일이 생기니

그때부터 칼뱅의 정치 세계는 평화로워져요. 1555년이죠.



때마침 몇 달 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루터교가 공인된

해이기도 해요. 이때 칼뱅교는 공인을 못 받았고.

(칼뱅교 공인은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1648년)



칼뱅주의 신학이 자리잡기까지 과정은 이렇게 험난했어요.

그리고 이후엔 다른 어떤 개신교 종파에 비교해도 훨씬 더

급속도로 유럽 전체에 교세를 뻗어 나갔고요.



영국으로 건너간 칼뱅교는 스코틀랜드를 중심으로

정착해요. 영국 칼뱅교도를 청교도로 부르는 건 아시죠.

이후 세계사의 중심 세력으로 쑥쑥 성장하죠.



사실 오늘날 최강대국을 건국한 사람들이 칼뱅교의 분파인

청교도들이고 미국의 현대 정치에서도 곳곳에서 청교도식

엄격주의 윤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에 장 칼뱅의

영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어요.



특히 우리는 개신교도 중 가장 많은 숫자가 장로교 계열인

전 세계 유일한 나라에요. 예장 계열이란 종파이죠.

가끔 사회적 문제도 일으키긴 하는데 모든

신자가 다 그렇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아래 남자분은 다소 장황하게 변을 늘어놓는 듯도 보이지만

칼뱅주의 신학의 핵심을 경쾌하게 설명하는지라 링크 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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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Calvin, the Church Reformer and

A Man of Decent Deeds and Good Words










오늘날 서방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기독교 전통 문화의

배경을 업고 현대의 국가를 경영하고 있고, 그런 종교적

바탕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칼뱅주의 교리의

그늘 밑에서 직간접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죠.



또한 서양 근대사의 정신을 일군 철학자와 과학자, 지성인이

칼뱅이 다져놓은 사회의 기반에서 성장했거나 칼뱅과 같은

시대의 사상 체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받으며 자신들의

업적을 거양한 사람들이기도 해요.



칼뱅이야말로 현대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일지도

몰라요. 살아생전에 종교 개혁의 모범적인 이상형을 직접

구현해 보여주었고 죽은 이후 그의 교리에 따라 기독교

체계가 통째로 재편되기도 했으니까요.



장 칼뱅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의 개인사는 의외로 정확한

기록이 많지 않아 아직도 연구와 논란이 진행 중이라고 해요.

자신을 지나치게 미화하고 포장하는 것을 칼뱅 자신이

스스로 그토록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하죠.



심지어는 그의 묘지 위치조차도 현재 잘 알려지지 않았어요.

남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도 엄격했던

사람의 인생이 보여줄 수 있는 일면일 거에요.



서슬퍼런 통치 사상가로서의 일면에 더해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행동 강령을 평생 동안 유지한 위인이기에 칼뱅의

인생을 짧게나마 들여다 볼 의의는 충분한 것 같아요.





Jean Calvin (1509~1564, France)






1509년 프랑스 왕국에서 교구의 행정관이던 아버지 밑에

Jehan Cauv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어요. 교구에서 일을

할 때 아버지는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지만 교회와

마찰이 생긴 후엔 법률가로 진로를 바꾸게 했다죠.



파리 대학과 오를레앙 대학에서 주로 법률을 전공했는데

몽테귀 칼리지에선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해요. 우신예찬을 쓴 종교 개혁가이죠.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오를레앙이나 부르주에서 공부하던

1530년대 초반에 루터교의 영향을 받아 개종했다는

가설이 가장 널리 지지를 받는 편이에요.



파리 대학 학장 취임 건으로 개신교도 니콜라 콥을 도우면서

종교 개혁가란 낙인이 찍혔고 덕분에 프랑스 내에선 더 이상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는 도망자 신분이 되어 버려요.



이후엔 거의 프랑스 생활을 정리하고 스트라스부르와 바젤

등지를 떠돌며 신학을 연구하고 교리서를 저작하는데

시간을 쏟습니다.



1535년쯤엔 그의 가장 중요한 저서 초판의 집필을 완료했고

이듬해 바젤에서 출간해요. 바로 기독교 강요, the Institutes

라고 불리는 개신교계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이랍니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Guillaume Farel (1489~1565, France)






출간 직후 그가 아주 잠시 잠깐 제네바에 들를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을 만나요. 제네바의 급진적

종교 개혁가 기욤 파렐이랍니다.



파렐은 스무 살 정도 연배가 앞서고 대단히 과격한 방식으로

제네바 전체의 개종을 주도한 사람이에요. 칼뱅과는 평생

죽기 전까지 인연을 맺게 되는 사이죠.



제네바 공화국의 개종을 처음부터 칼뱅이 주도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초기 작업은 파렐과 일부

제네바 시민이 자생적으로 주도한 것이 맞아요.



그 와중에 바젤에서 책을 출간하고 이미 이름이 알려진 칼뱅을

파렐이 만나게 되었는데, 거의 반협박 비슷하게 신의 이름으로

제네바에서의 소명을 외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죠.ㅎ



칼뱅이 이런 파렐을 인간적으로 좋아했을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파렐의 말을 듣고 신의 부름을 느꼈다며 스스로 기록하기도 했고

이후 죽기 몇 일 전까지도 파렐과 친분을 유지했으니 이래저래

큰 영향을 주고 받은 사이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듯해요.



기욤 파렐이 집단 행동을 과격하게 조직하는데 능한 수완가라면

장 칼뱅은 체계 수립과 장기 계획 입안에 능한 혁명적 사상가

할 수 있겠죠. 그만큼 두 사람의 성향은 다릅니다.



결국 제네바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을 선언하고 서너 달 후

칼뱅이 제네바로 넘어와 파렐을 돕는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때 스위스와 제네바의 정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어요.

아직 현대적 독립국인 스위스 연방국이 등장하기 전인 것은

대략 감으로 아시겠죠.. (현대 스위스 건국은 19세기 중반)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 영향 하에 있었지만

지형이 험하기도 하거니와 스위스 용병들이 제국 정책에

협조적이기도 해서 제네바, 취리히, 베른, 바젤 등 사실상

독립적인 자치주들이 느슨하게 연합을 유지하고 있었죠.

(옛 스위스 연방, old confederacy.. 란 연합체)



제네바의 가톨릭 교구는 사보이 공국의 통치를 받고 있었어요.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일부 지역 판도를 형성한

당시 남유럽의 봉건국이죠.



칼뱅 부임 직전 시민들이 스스로 개종했다는 말은 바로 이

사보이 교구 소속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을 내쫓았다는 뜻..



제네바 시민의 봉기 3년 전에는 베른이 개종 전례를 남겼고

덕분에 제네바는 베른의 도움을 받지만 정치적 입김도

좌지우지되던 형국이었죠.



칼뱅이 부임했을 때 아직 과도기인지라 혼란한 지경이었어요.

칼뱅이 내놓은 개혁안에 시민들의 반발도 있었고 결국 2년이

채 못 되어 파렐과 칼뱅 등은 추방 당합니다.










다른 제안을 받아들여 칼뱅은 스트라스부르 자유시로 가서

목회자 생활을 합니다. 오늘날 프랑스 땅인 이곳은 당시엔

신성 로마 제국 내 자치권이 보장되는 도시였어요.



대략 4~5백 명 정도의 프랑스 출신 신교도 집단을 이끌었고

이곳에서 칼뱅의 삶은 여러 가지로 발전이 있었습니다.

행복한 시절이기도 했고요.



기독교 강요는 한 번에 완성되어 나온 저작이 아니에요. 여러

차례 개작과 증보를 거쳐 당시 세상에 나온 교리를 집대성한

책이고 스트라스부르에선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강하죠.

초판 6장 뿐이었다가 17장으로 대폭 늘어납니다.



1540년엔 결혼도 했어요. 귀족 자제 등 여러 군데서 혼처가

들어온 모양인데 인연은 가까이 있었다고 하네요. 병으로

세상을 뜬 친구의 미망인 이델레트 드 뷔르가 주인공이고

칼뱅은 초혼이지만 아내가 데려온 두 자식도 잘 키우죠.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로서 그의 행적이 가장 유명하지만

사실 칼뱅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연구하는 시간을 가장

사랑한 공부벌레였답니다. 공부에 몰두해 여러 편의 저작을

남기고 결혼도 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그는 행복했어요.



이델레트는 조용한 조력자였다고 스스로 기록했어요. 원만한

결혼 생활인 것 같지만 둘 사이 새로 태어난 자식이 일찍 죽고

아내도 얼마 안 있어 뒤를 따라갔죠. 칼뱅에게 잠깐 몇 년

머문 인생의 낙이었어요. 전처가 남긴 자식은 성실하게

키우지만 아버지나 남편으로서 복을 타고나진 못했죠.





Idelette de Bure






그 사이 제네바 시의회에서 은밀한 서신이 계속 답지했습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칼뱅 신학 체계가 명답이었음을 깨달은

거죠. 행복하게 살던 중이니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사실 없었어요.



칼뱅 개혁안대로 교회법을 입안하겠다는 공식 답변을 받고

나서야 그는 제네바의 청빙을 받아들여 이삿짐 쌉니다. 이미

파렐은 뇌샤텔에서 목사 생활 중이어서 이번엔 혼자서…



이후 여생을 죽을 때까지 제네바에서 마무리했어요. 인생 후반기

제네바에서의 삶 중 가장 중요한 일을 꼽자면 교회법과 교회법정,

세르베투스 그리고 제네바 학교 정도…



다른 사안은 매우 복잡한 상황과 행적인지라 다음 포스팅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여기선 말년의 칼뱅 업적 최고봉인 학교

설립 건을 설명할께요.



1555년 5월이 되어서야 칼뱅을 괴롭히던 제네바의 정적들이

사라지고 평화를 맞지만 이 즈음 건강에 무리가 와요. 당연하죠.

칸트 뺨칠 정도로 규칙적인 시간표로 설교와 연구에 힘을

쏟으면서도 하루 한 끼 먹고 버티는 삶을 지속했다고 하니…



제네바 최고의 세력가였지만 정작 아직 시민권이 없었는데

몇 년 후 시민권도 얻게 되고.. 사실 스트라스부르에서 옮겨

올 때부터 칼뱅에겐 오랜 숙원 사업이 있었죠.



학교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개신교가 대를 넘겨 사회에 자리

잡으려면 교육의 힘이 없이 불가능하다는 걸 안 거죠. 하지만

돈도 많이 드는 일이고 기금이 축적되기에 오랜 시간이 걸렸죠.










1559년, 드디어 제네바 아카데미란 이름으로 초급 학교가

개교합니다. 초대 교장은 물론 칼뱅. 어린이들에게 개신교

의식과 함께 프랑스어, 라틴어, 그리스 문학 등을 가르쳤어요.



이후 중등 학교로 발전했고 그가 사망한 해엔 드디어 대학교가

문을 열었어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명문 제네바 대학교

바로 이 학교에요.



신앙에 있어 엄격한 칼뱅이었지만 학문의 자세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개방적이었어요. 당시 유행하던 다방면의 학문을

차별없이 가르쳤다 하고 각국에서 모인 유학생 1천 5백 명이

신학과 법학 중 택일하여 전공하는 방식이었다 하죠.



죽음이 다가옴을 직감한 그는 죽기 몇 달 전부터 지인에게

인사를 다니며 삶을 정리했다고 해요. 사망 8일 전에는

마지막으로 파렐도 만났죠. 1564년에 그는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어요. 거인의 평화로운 안식인 거죠.



현대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해 장 칼뱅의 삶은 조용했고

그닥 극적인 장면도 많지 않아요. 북독일 스타 마르틴

루터의 화려한 행적과 여러 모로 비교되죠.

(그 때문인지 영화화 예도 거의 없어요.)



단지 평범하게 책과 글쓰기에 몰두하며 신의 진리를 좇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사람. 정쟁을 제외하고는 인생에 큰

잡음 하나 없이 점잖게 격조있는 인생을 산 어른인 거죠.



그가 남긴 사회 교육의 미덕을 좇아 오늘날 많은 개신교

종파들이 전 세계에 대학을 설립해 수많은 인재를

키웠어요. 하버드 대학교를 필두로 하여..



근대 신학의 공부벌레이자 유럽계 백인 기독교 문화의

어르신, 장 칼뱅의 사상 세계는 다음 포스팅에서

짚고 가기로 해요.



아래 간략한 동영상으로 그의 인생을 복습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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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I

Reformation and Wars of Religion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I. 종교 개혁 Reformation 



종교 개혁은 중세 유럽인의 정신과 생활을 장악하던 가톨릭의

구체제가 신교라는 교파 분리로 도전받은 종교 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국정의 관리 행정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근대적 국제 질서를 다진 변혁으로 분석할 여지가 더 크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바..

첫째, 기독교 체제의 구속을 탈피하고 난 이후에야 유럽인들이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자유를 얻어 정치 제도를 일신하고 현재의

민주정 체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요.


둘째, 현대인들의 상상과 달리 중세의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 기호

차원의 종교가 아니라 지역 교구 차원에서 신도를 관리하며 국가

행정 체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사 국정 시스템의 역할을

해냈는데 종교 개혁으로 이것이 통째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혁 운동의 실제 모습이란 것이 현대인들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회 일부 종교인들의 평화적 활동으로 점철되지 않았고,

제후와 영지의 거주민이 전력을 다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 정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시발점으로 1517년의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꼽는 일은

오랜 통설입니다만. 그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한 존 위클리프가 있었고 1415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잡혀 화형 당한 얀 후스 등이 있었죠.


독일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문에 붙인 행위는 일종의 대자보 같은

거고요. 오늘날로 치면 기자 불러 발표문 읽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정치 사회적 의사소통 행위로 보면 됩니다.


취리히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미 1516년부터 스위스 용병의

활동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1523년 시의회에서 67개 신조

주장하며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어 그의 가치가 늦게 발견된 거지요.


요절해 활동이 짧은 츠빙글리나 농민 전쟁에 반대한 루터와 달리

진정한 교회 개혁장 칼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신교 교리가

정교 일치의 신정 자치제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제네바에서 몸소

보여줬고 장로교 체계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교 운동에 대한 영국식 반응이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인데

성공회란 것이 사실상 교리에선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긴 해요.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였던 헨리 튜더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교회법상 적법한 이혼으로 후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죠.


(네, 현대 국가의 성문법이 해결할 생활의 영역을 교회법

민간의 관습법을 해석하여 푸는 사회가 바로 중세랍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 칼뱅식 청교도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후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

흐름에 큰 돌발 변수로 작용할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체제를 밀어 붙이다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슈말칼덴 전쟁

휩싸이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제후 및

봉토의 루터교 선택권을 인정하며 항복 선언을 합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위그노 전쟁의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었고 구교인 발루아 왕가의 족보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위그노 앙리 4세가 즉위하며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한 후에야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통일 강대국의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지대 국가들 중 상공업이 활발했던 네덜란드가 신교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스페인 호구 노릇에 신물이 나 합스부르크의 가톨릭

강요에 반발하였죠. 그들의 독립 의지는 16세기 후반 80년

전쟁으로 폭발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결실을 맺게 되죠.


그래요. 17세기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로 인해 위기를 맞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호시탐탐 합스부르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었죠. 1618년에 30년 전쟁이 터졌습니다. 80년 전쟁 중이었죠.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해요.)


30년 전쟁은 종교 개혁의 정점을 찍은 대사건이자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이었으며 유럽 최초의 국제 대전입니다. 유럽의 모든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어요. 심지어는 오스만 제국까지도.

또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죠. 자그마치 8백만 명..ㅜ


30년 전쟁의 한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이, 다른 편에는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균형을 이루었어요. (위그노들을 학살한 주제에

프랑스는 신교 진영이었죠. 국제적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요.)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라 워낙 함수 관계가

복합적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 종속적 구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는 거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제법이란 도구가

생겼거니와 이제 영지나 봉토에서 근대 국가 개념이 등장했고 각

국가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각자도생하여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둘째, 유럽의 세력 지형이 차츰 현대와 비슷하게 변화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은 정점에서 하향세로 가고 스페인도 저물어가며

새롭게 부르봉의 프랑스가 최강자 자리를 넘보게 되었어요.


영국은 내전으로 불안불안하여 전쟁에 직접 뛰어들진 못했고..

영국의 국력이 드러나는 때는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렵입니다. 17세기는 무역으로 돈벌고 청교도로 골치 아픈 중…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필두로 영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새로이

탄생합니다. 네, 이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꽤 벗어나게

되었어요. 스위스도 독립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맹활약한 스웨덴도 상당한 국익을 챙겼죠.


17세기 후반에 가서 해상 개척의 판도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영국(내전을 끝내고 명예 혁명을 완성)과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양강 구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양국

모두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박차를 가하죠.


요는, 점점 우리가 아는 현대 유럽의 국경선이나 국제 관계의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개전했지만

결과는 정치 구도와 국제 관계로 매듭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나 종교 전쟁이 절대로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며 거대한 정치 역학 관계에 광풍 같은 변혁을 몰고 온

시대 패러다임의 대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랍니다.




2003년에 나온 작은 독일 영화 루터조셉 파인즈 연기를 보며

5백 년 전 독일 제후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일계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지아코모 마이어베어는 숱한 성공작을 만들었는데 1836년

초연한 그랜드 오페라 위그노 교도가 있어요. 아래 프러덕션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 버젼인데 아예 홀로코스트 분위기로

갔네요. 종교 전쟁과 나치 탄압.. 비슷한 듯해요.



위그노 전쟁 중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대놓고 묘사한 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작 여왕 마고가 진정한 걸작일 겁니다. 아래

동영상에서 5분께부터 나오는 학살 현장 묘사는 프랑수아 뒤부아의

아래 그림과 많은 유사성이 관찰되기도 하죠. (미성년자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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