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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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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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한국인들은 헨리 8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Back to 1640s of Britains..

What Happened and Whodunit






영국의 근대사가 현대에 와서 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중요할지 모를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현재 국적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민주 정치라는 것…

democracy.. 짜잔… 알죠?

인류 역사상 이걸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근대의 영국이거덩요.



더 정확하게 시공간을 좁혀 보면 17세기 잉글랜드와

그 주변의 왕국들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였어요.



유감이지만 17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일을

단번에 설명할 순 없어요. 아무리 단순화시켜도 최소한

전반기와 후반기, 둘 정도 시대 구분을 해줘야 합니다.



17세기 전반기 사건을 흔히 청교도 혁명이라고 많이들

들어보셨을 테고, 17세기 후반기 사건을 명예 혁명으로

알고 계실 테죠. 왠만큼 교육받은 현대 한국인들은요.

일단은 그러한데 말이죠..



출신 성분상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계층을 중심으로

청교도식 종교관을 가지고 상업 및 무역으로 세를 구축한

신사 계급의회파 반란 세력이 잉글랜드 국왕권에

대항하여 대략 1640년대부터 50, 60년대까지

벌인 일련의 전쟁과 정쟁 및 국가적 소요 사태…



자, 이렇게 복잡한 사건을 간명하고 단출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본 블로거에게 그런 재주가 없는 거겠죠.










먼저 역사서에 어지럽게 난립하는 용어부터 정리해야 해요.

이 책 저 책에 여러 개념이 난립하는데 각각 가리키는

내용이 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청교도 혁명, Puritan Revolution..은

본 블로거가 판단할 땐 국내에 가장 널리 정착한 개념이에요.

비교적 연식이 되는 사람들이 이 용어로 많이 알고 있죠.



1640년대 사태의 주동 세력이 가진 종교관이 칼뱅파 장로교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고 사태의 기저에 중세 종교 전쟁

깔려 있음을 명시하는 용어인데요.



이 표현이 다소 불명확할지 모르다는 비판이 죽 있었어요.

왜냐..? 사람들이 혁명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란 게, 보통

프랑스 1789년 혁명이나 1830년 혁명처럼, 노도처럼 들고

일어난 민중의 저항, 펄럭이는 깃발… 뭐 이런 거쟎아요.



근데 본 사태는 피치자 하층민보다는 중소 지주 계급인 신사,

젠트리나 요먼이란 제3계급이 중심이고 그 방식도 거리의 폭동이

아니라 엄연히 정규군을 편성하여 전쟁을 벌이는 식이었거든요.

그래서 다소간 본질을 호도할 소지가 있는 표현인 거에요.



영국 혁명이란 말도 프랑스나 미국과 묶어서 편의상 쓰긴 해요.

일관적 표현으로 분류하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사실 영국도

아니고 혁명도 아닌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 애매한 말이죠.













이런 이유로 오늘날 현대 영미권 역사서에서는 대체적으로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란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선호하는 편이에요. 빠르게 정착하고 있는 말인데요.

(아, 물론 영어 표현이 정착해가고 있다는 뜻)



사태의 전개가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쟁의 형태로 벌어졌기에 그래도 가장 사실에

근접한 현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번역어가 문제인데 엄밀히 말해서 이 당시 국체가

영국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아는 그 영국이란 나라는 각각

1707년과 1800년의 연합법으로 탄생한 거니까요.



17세기는 아직 각기 독립적인 세 왕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동군 연합.. 같은 군주 아래 느슨하게 결합한, 곧

연합 왕국으로서의 국체를 형성하고 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번역어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치고 박고 싸운 주무대가

잉글랜드이기도 했고..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할이 전혀 없었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기 때문에, 좀 아는 사람들은 더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죠. 이른바 삼왕국 전쟁 또는 삼왕국 내전, Wars of the

Three Kingdoms 또는 British Civil Wars..



그런데 이 용어도 삼국 시대나 삼국지처럼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히 있어 현대 한국에서 널리 용인되는 건 아니에요.

당연한 소리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위촉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거든요.



주교 전쟁, Bishops' Wars..란 개념도 있어요. 이건 이 모든

사태의 촉매 및 시발점 역할을 한 1639년과 1640년의 전쟁

일부를 가리켜요. 하지만 사실 이 전쟁 내용이 큰 줄기에서

그닥 중요하다고는 볼 수가 없기도 해요.



삼왕국 전쟁이란 개념으로 가면 주교 전쟁 등 전체를 포괄할

수 있지만 보통 많이 쓰이는 잉글랜드 내전의 개념에선 큰

줄거리만 보려는 경향이 생겨 잉글랜드 외 기타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건과 전쟁을 제외하고 논할 때도 종종 있어요.



왜 복잡한 개념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하는지 이제야 알겠죠?

한국 근대사에서 1880~90년대에 달 단위로 연달아 발생하는

복잡한 사건들을 한국인 입장에서도 차근차근 복기하기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현대 사가들의 일반적 경향을 좇아 English Civil War,

잉글랜드 내전으로 1640년대 역사의 표제어를 정리해 볼께요.










잉글랜드 내전의 본질과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사태의 능동적 주체가 누구인가부터 따져보면 어떨까요.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해갈 수 있어요.

청교도, 젠트리, 스코틀랜드



청교도란 제네바에서 태동한 칼뱅교가 영국으로 넘어와 얻은

별칭입니다. 영어 명칭으로 따지자면 또 구분이 되고요. 잉글랜드

내의 칼뱅파는 puritan, 스코틀랜드에선 covenanter로 불렀어요.



칼뱅파 장로교가 영국 땅으로 넘어와서는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내에 터전을 잡아 세력을 넓혔으나 잉글랜드 안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해 나갔습니다. 16~17세기였죠.



청교도가 영국 사회 전체에서 중심 세력이 된 데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합니다. 무엇보다도 상업과 무역 면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16~17세기 영국 경제력의 근간을 형성했어요.



칼뱅파 교리의 예정설에서 근면과 검소를 중시하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면 선천적 계급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급진적 논리가 청교도 경제 활동의 사회적 확장을

지원 사격한 겁니다. 루터교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죠.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 여기에 중앙 왕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중하급 지방 귀족이나 중소 지주층 역시 이런 생각에

동참할 여지가 충분했어요. 16세기 후반기부터 이런 사람들이

똘똘 뭉쳐 영국 정가의 기층을 장악해 들어간 거지요.



이른바 젠트리요먼이라고 부르는 제3계급, 또는 신사 계급

출현한 거에요. 이들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배경은

멀리 백년 전쟁장미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요.



백 년을 훨씬 넘긴 두 전쟁으로 대권에 도전할 만한 귀족 가문의

씨가 말라버리는 통에 중앙 정치를 담당할 인적 자원이 소멸해

버리니 이 빈 자리를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거에요.



그리고 헨리 7세헨리 8세튜더 왕조의 번영을 개창한

국왕들 역시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서 제3계급을

적당히 육성하고 달래가며 정치를 이끌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상층부 인재의 씨가 말라 중간 계층이 급부상하는

사회적 계기는 희한하게도 중세사에서 영국에서밖에 달리

관찰이 되지 않아요. 의회 정치의 씨앗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란 나라의 숙명이 시작된 셈인 거죠.



(그리고 다른 나라 역사와의 차별성이

시작된 지점도 정확하게 바로 여기…)










제3계급의 생각과 삶은 평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왕권이란 거대한 기득권에 맞설 수 있도록 훌륭한

계급 대립 구도가 시의적절하게 형성된 거에요.



당시 평민들도 다 청교도였겠지 지레짐작하는 분들도 많은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생활에 쫓겨 변화에 둔감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보수화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평민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가톨릭이나 어정쩡한 국교회 상태였죠.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는 교리와 의례, 직제 등에서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인위적으로 종교 개혁 추세를 이용한 거니까…)



즉 왕실 — 제3계급 — 평민의 삼분된 계급 구조는 어느 나라든

봉건적 신분제 국가라면 다 있는 현상인데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이 구조가 어떻게 근대화하는가의 핵심은 결국 중간 계급이 어느

쪽에 어떤 철학을 가지고 붙느냐로 역사의 향방이 달린 거거든요.










조선 후기에도 서얼과 실학자 같은 실용적 사상을 가진 중간

계급이 분명히 대두했어요. 그런데 조선이 실패한 원인은

상층부 기득권이 와해하지 않고 임란 후 신분제가 동요하며

되려 양반이 늘어나는 기형적 구조가 양산된 때문이지요.



성공한 민중 혁명을 이룬 프랑스와 러시아는 어떠했나요.

지식인과 군인이 피치자의 편에서 배경 철학을 제공하고

정치 구도 재편에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시대 정신과 비전을 지닌 중간 계급의 역할이 없으면

근대 시민 혁명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추론…

바로 이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거죠.



이런 전차로 조선 후기와 구한말에 아래로부터 혁명의 싹이

움트지 못한 역사를 맞은 거에요. 문제는 위로부터라도

개혁과 혁신이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ㅜ

구한말 기득권의 외교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죠.



제3계급의 역할은 이 정도로 중요하답니다. 흔히 상식 선에서

이 시기 영국 정치가의 대표자로 올리버 크롬웰을 상정하실 텐데

크롬웰이 이 표본 집단 특성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쟎아요.

신기하죠?



자, 다음엔 더욱 골치아픈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로

우리 함께 들어가 보아요.



돌아가신 분인데 어린이 영화 치티치티 뱅뱅으로 유명했던

켄 휴즈 감독이라고 있었어요. 이 분이 1970년에 크롬웰이란

작품을 선보이며 올리버 크롬웰 역에 ‘덤블도어’ 리처드 해리스

옹을 캐스팅했죠. 작품의 흥행은 신통치 않았지만 해리스의

사자후 연기는 정말 후덜덜하군요. 아래에서 맛만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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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nglish Politics from Tudor to Stuart ..

Until Ended Up with the Petition of Right






권리를 청원하다, Petition of Right..

누군가의 권리에 관해 간언하는 주청을 드린다는 뉘앙스에요.



그 누군가란 자유민 또는 자연인을 가리킨다고 하겠고

왕께 주청 드렸다는 건데 그 왕은 찰스 1세였어요.



찰스 1세를 거론하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6~17세기 잉글랜드 왕조 역사를 짚지 않을 수 없어요.



플랜태저넷, 튜더, 스튜어트…

영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인데, 이거 뭔가요?



왕가 가문의 이름이라고들 아실 텐데 사람 이름의 성,

last name인 건 아시나요들. house of Tudor.. 이러면

Yi dynasty.. 이렇게 부르는 것과 유사한 거에요.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으로 플랜태저넷 사람들의 씨가

말라버려 할 수 없이 핏줄 긁어모아 개창한 왕가가

16세기의 튜더 왕조에요. 헨리 7세였죠.



언젠가 헨리 8세를 짚고 넘어간 적 있는데 이 사람이

16세기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중추적인 군주였어요.

헨리 튜더.. 전임 헨리 7세의 아들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헨리8세-바로알기



튜더 시대의 가장 유명한 왕이기도 했고요.

또 튜더 왕가 최고의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해요.



엘리자베스 튜더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장장 만 44년을 다스리며 그레이트 브리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진, 영국 역사가 사랑하는 군주입니다.



여왕의 치세를 과연 태평성대라 할 수 있었는가, 여왕은

정말 좋은 군주였던가에 대해 오늘날 여러 가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이 시기 누구보다 오래 다스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앞뒤

다른 군주에 비해 자기 정치를 할 시간과 기회가 충분했던 것,

그래서 긍정적으로 볼만한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점이죠.



잘못이라 할 순 없지만 (중세 관점에서) 여왕의 치명적인

흠이 있었는데 혼인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즉, 튜더

왕가의 대가 끊길 것이 미리 예견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스튜어트 왕조입니다.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승계하여

동군 연합의 새 왕조를 개창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거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같은 사람, 다른 이름의 군주인 거에요.



제임스 1세… 평가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려 오늘날

영국 사학자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군주일 거에요.



이 당시 영국 군주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어요.

바로 종교 전쟁이죠.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에 이르기까지, 교회

개혁으로 등장한 청교도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이들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골칫거리였어요.



청교도는 영국 땅의 칼뱅교 신자를 일컬어요. 가톨릭과

많은 교리를 공유하는 신교인 영국 국교회가 있었고..

평민 중 가장 많은 숫자는 여전히 가톨릭이었어요.

청교도는 스코틀랜드와 제3계급에 분포했죠.



*중세 유럽 종교 정치의 폐단을 논하자는 것일 뿐, 현대의

가톨릭교나 성공회를 비난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구요.










국교회를 헨리 8세가 만들었기 때문에 후임 군주가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냐에 따라 나라의 종교가 요동을 쳤어요.



헨리 8세 국교회, 에드워드 6세 국교회, 메리 1세 가톨릭,

엘리자베스 1세 다시 국교회.. 이런 식이었죠.



군주에 따라 종교가 바뀐다는 것, — 감이 오시나요.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종교 신자는 박해하고 탄압하고

더러 죽였다는, 그런 끔찍한 의미라고요. 지금 중세랍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는 서로 배다른 남매에요.

메리의 모친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아버지 이혼으로

쫓겨난 사람.. 메리가 극렬 가톨릭일 수밖에 없는 이유죠.

평생에 걸쳐 부친과 신교를 원망했겠죠. 그렇긴 하나…



메리 때 종교 탄압을 블러디 메리라고 따로 지칭하긴 해요.

그런데 그 정도 사형 집행은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때도

있었어요. 메리 여왕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평가라 할 만해요.










이런 험한 때 제임스 스튜어트가 왕위에 올랐어요. 스코틀랜드

출신이니 그 자신은 청교도의 정신을 백번 이해할 입장에

있었어요. 어려서도 청교도식 교육을 받았다고 하죠.



그러나 연합 왕국의 군주로서 정치적 입장은 개인의 입장과

같을 수가 없었어요. 튜더 가문이 개창한 국교회의 기득권을

해치는 건 국가의 기틀을 흔드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임스는 가톨릭과 청교도 둘 다 적당히 탄압하고

국교회의 근본을 세우는 쪽을 선택해요. 독재자라는 비판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나마 중도를 지킨 결정이 아니었나,

본 블로거는 솔직히 할 만큼 한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가장 유명하다는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한

문화적 통합의 업적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와 대립각을 세우며 살짝살짝

무시 스킬을 시전하는 튜더 군주들의 전통 아닌 전통이

제임스 때에도 이어졌다는 후대의 비판은 유효하겠죠.










제임스 보고 그나마 낫다 할 수 있는 것이, 후임자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였다고 볼 수

있거든요. 1625년 그의 아들로 즉위한 사람은

찰스 스튜어트, 찰스 1세 국왕이었어요.



찰스는… 종교 정치란 면에서 매우 갑갑한 왕이었어요.

국교회를 신봉했고 처가가 가톨릭인지라 가톨릭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국교회적 반동 조치를 도입하니 어땠겠어요?

스코틀랜드청교도젠트리, 당시 영국을 지탱하던

세 집단이 엄청나게 반발하는 결과를 낳게 되요.



탄압과 처형이 따랐겠죠? 거기에 한창 대륙에서 진행

중이던 30년 전쟁에 나라 살림 생각도 안 하고 마구

뛰어들어 용병 경제 창출에 이바지하신…ㅜ



왕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왕권 신수설이란 사조가 한몫을 해요.










일찍이 16세기 말 로마법 법률가인 장 보댕이 신학,

정치, 경제 등 분야에 걸쳐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요.



보댕의 주된 논제는 로마 가톨릭 교황이 프랑스 왕국의

군주 통치권에 행사하는 지나친 간섭에 반대하고 강한

통일 왕정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보댕

자신은 평생 가톨릭의 신앙을 유지했지만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절대 왕정 체제는 이런 보댕의 사상에

힘입은 바가 컸는데, 재미있는 건 보댕이 영국의 왕당파

의회파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에요.



로버트 필머는 보댕을 계수하여 왕권 신수설을 주장한

대표적 인사였어요. 그의 유작은 앞으로 17세기 후반에

벌어질 왕정 복고라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쳐기도…

(나중에 논할 기회 있을 겁니다.)



찰스 1세가 설치는 데는 이런 당대의 흐름이 받쳐준 면이

있었어요. royalist라고.. 왕당파란 정치 집단의 중심

사상이 왕권 신수설이었죠. divine right of kings..










막무가내로 종교 반동 및 전쟁이 휘몰아친 상황.. 막대한

전비와 배상금을 해결하기 위해선 세금이 필요했어요.

이에 과세를 획정하라고 의회를 소집한답니다.

평소 무시할 땐 언제고…



이때가 즉위 후 겨우 2~3년 지난 시점인데 나라 꼴을

이렇게 망쳐 놓으니, 안 되겠다 싶어 의회 정치의 빛나는

전통을 기억하는 귀족들이 반론에 시동을 걸어요.



언젠가 포스팅한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 경이

여기에 앞장선 대표적 의회파 정치인이에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멋대로 용병을 써 전쟁을 일으키고 용병의 전비를 평민 가구에

떠넘기는 망나니 왕을 통제해야 한다는데 의회파 귀족들이

뜻을 모았으며 코크 경이 이 생각을 문서로 기초하죠.



또한 국왕을 압박하는 극단적인 형식으로 가지 않고 군주에게

자유민의 권리 확보를 ‘소청’하는 형식으로 완화하여 찰스가

한결 받아들이기 편하도록 출구 전략을 세워주자는 혜안도

코크 경의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탄생한 국왕과 의회 간 협약서가 바로 우리가 아는

권리 청원, Petition of Right.. 라는 문서랍니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의 불문 헌법 법원 중 대헌장 다음

순서 정도에 꼽을 중대한 문건이면서, 미합중국 건국 및

미국 헌법 수정안 제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적이죠.



청원의 내용은 흔히 4대 원칙으로 알려져 있어요.

조항이 넷이란 뜻이죠.



첫째,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것..

둘째, 군병을 자유민 사유지에 주둔시킬 수 없다는 것..

셋째, 자유민을 명분 없이 투옥할 수 없다는 것..

넷째, 평화 시기에 함부로 계엄령을 공포할 수 없다는 것..

(주어는 모두 존귀하신 국왕 전하...)










과세할 수 없다는 건 이 사단이 모두 찰스가 절차 무시하고

세금을 획정하려 하다 보니 당연히 나온 조항이겠고요.



오늘날 현대 민주 정치에서도 세금을 정할 수 있는 조세권

입법부만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이지요. 행정부가

단독으로는 절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어요. 이 전통이

여기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거랍니다.



찰스 왕이 용병으로 구성된 군사를 무단으로 자유민들 집에

주둔시켜 버렸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 군사들

먹고 입히고 재우는 건 너희들이 부담하란 뜻인 거거든요.



국방 운영의 핵심은 사실 전쟁 기술이 아니라 군수와 보급인

것… 아시죠? 전쟁은 순간이지만 군사를 유지하는 건 평시에

엄청난 돈을 부담해야 하는 일 아니겠어요. 평시의 군대란

밥먹고 싸움 연습하는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이로 인해 자유민 중 선의의 피해자가 엄청 나온 관계로..

두번째 조항이 나오게 된 거고요.



이런 주둔 조치에 반발한 자유민들을 또 엄청나게 투옥하고

탄압했어요, 못난 찰스 왕께서. 재판도 없이, 영장도 없이.



세번째 조항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거고 habeas corpus..

라고, 근대 공법에 등장하는 인신 보호 영장의 법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죄형 법정주의 같은 현대적 형법 법리를

의회 정치의 역사에서 그 맥락을 찾아볼 수 있는 거에요.



마지막 조항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왕께서 심심하면 계엄을 선포하시니…

별 명분 없이 그냥 자기 말 안 듣는다고..ㅜ










다른 때 같았으면 상원이 열심히 나서 국왕 쉴드를 쳤을 텐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대헌장 파괴의 현장인지라, 영국 의회

역사상 보기 드물게 상하원이 대동 단결하여 가결시켰다죠.



대헌장… 예, 1215년 마그나 카르타 맞습니다. 13세기 이래

잉글랜드의 의회 정치란 이것이 지켜지는 둥 마는 둥 오락가락

들고 낢을 반복한 요지경이었다 보면 대략 맞을 거고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영국입헌의회정-마그나카르타



의회가 강할 땐 대헌장을 지키라며 군왕을 압박하고 반대일 땐

왕이 의회를 무시하거나 문을 닫아 버리거나 하는 상황이 약

4백 여년 역사의 각 단계마다 주기적으로 펼쳐진 거에요.



대헌장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재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조부터고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강력한 군주 집권기엔 의회와 적당한 거리에서

반목과 줄다리기 상황을 연출하곤 했어요.



이제 17세왕들께서 본격적으로 의회 정치의 판을 손수

깔아주시는 시대(!)로 넘어와선, 권리 청원을 필두로 하여

별별 익사이팅한 사건들이 요지경처럼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바야흐로 인간사 정치의 문화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하는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원대한 풍경화의 전주곡처럼 등장한 1628년 6월 7일

영국 역사의 한 페이지는 바로 권리 청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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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II

Reformation and Wars of Religion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II. 종교 개혁 Reformation 



종교 개혁은 중세 유럽인의 정신과 생활을 장악하던 가톨릭의

구체제가 신교라는 교파 분리로 도전받은 종교 운동으로 볼 수

있지만 사실은 국정의 관리 행정 체제를 혁명적으로 변혁하고

근대적 국제 질서를 다진 변혁으로 분석할 여지가 더 크답니다.


종교 개혁에 정치적 의의를 부여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 바..

첫째, 기독교 체제의 구속을 탈피하고 난 이후에야 유럽인들이

비로소 철학과 사상의 자유를 얻어 정치 제도를 일신하고 현재의

민주정 체계를 구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겠고요.


둘째, 현대인들의 상상과 달리 중세의 기독교란 단순히 개인 기호

차원의 종교가 아니라 지역 교구 차원에서 신도를 관리하며 국가

행정 체계를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유사 국정 시스템의 역할을

해냈는데 종교 개혁으로 이것이 통째로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혁 운동의 실제 모습이란 것이 현대인들 관점에서 상상할

수 있는 사회 일부 종교인들의 평화적 활동으로 점철되지 않았고,

제후와 영지의 거주민이 전력을 다하여 전쟁을 치르는 등 흔히

볼 수 있는 폭력적 정치 투쟁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지요.


시발점으로 1517년의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을 꼽는 일은

오랜 통설입니다만. 그 전에도 선구자들이 있었어요. 1382년에

라틴어 성경을 최초로 영역한 존 위클리프가 있었고 1415년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잡혀 화형 당한 얀 후스 등이 있었죠.


독일의 루터가 반박문을 써 문에 붙인 행위는 일종의 대자보 같은

거고요. 오늘날로 치면 기자 불러 발표문 읽거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과 비슷한 정치 사회적 의사소통 행위로 보면 됩니다.


취리히울리히 츠빙글리는 이미 1516년부터 스위스 용병의

활동을 비판하며 주목받았고 1523년 시의회에서 67개 신조

주장하며 루터와 동시대의 개혁가로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어 그의 가치가 늦게 발견된 거지요.


요절해 활동이 짧은 츠빙글리나 농민 전쟁에 반대한 루터와 달리

진정한 교회 개혁장 칼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개신교 교리가

정교 일치의 신정 자치제에서 실현될 수 있음을 제네바에서 몸소

보여줬고 장로교 체계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루터교 운동에 대한 영국식 반응이 헨리 8세의 영국 국교회인데

성공회란 것이 사실상 교리에선 가톨릭과 크게 다르지 않긴 해요.

독실한 가톨릭 수호자였던 헨리 튜더가 이렇게 돌변한 것은

교회법상 적법한 이혼으로 후계 왕자를 얻기 위해서였죠.


(네, 현대 국가의 성문법이 해결할 생활의 영역을 교회법

민간의 관습법을 해석하여 푸는 사회가 바로 중세랍니다.)


그 사이 스코틀랜드에 칼뱅식 청교도들이 뿌리내리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후 영국 내전청교도 혁명미국 독립 전쟁 등 역사

흐름에 큰 돌발 변수로 작용할 씨앗을 잉태하게 됩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는 가톨릭

체제를 밀어 붙이다 독일 제후들의 반발을 사 슈말칼덴 전쟁

휩싸이고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제후 및

봉토의 루터교 선택권을 인정하며 항복 선언을 합니다.


16세기 후반 프랑스는 신교도들과 위그노 전쟁의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었고 구교인 발루아 왕가의 족보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위그노 앙리 4세가 즉위하며 1598년 낭트 칙령을 공포한 후에야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통일 강대국의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저지대 국가들 중 상공업이 활발했던 네덜란드가 신교 운동에 일찍

눈을 떴어요. 스페인 호구 노릇에 신물이 나 합스부르크의 가톨릭

강요에 반발하였죠. 그들의 독립 의지는 16세기 후반 80년

전쟁으로 폭발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결실을 맺게 되죠.


그래요. 17세기가 되어 신성 로마 제국은 종교로 인해 위기를 맞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가 호시탐탐 합스부르크의 뒷마당을 노리고

있었죠. 1618년에 30년 전쟁이 터졌습니다. 80년 전쟁 중이었죠.

(80년 전쟁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라고도 해요.)


30년 전쟁은 종교 개혁의 정점을 찍은 대사건이자 가장 치열하고

잔혹한 전쟁이었으며 유럽 최초의 국제 대전입니다. 유럽의 모든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어요. 심지어는 오스만 제국까지도.

또한 사람이 가장 많이 죽었죠. 자그마치 8백만 명..ㅜ


30년 전쟁의 한쪽에는 합스부르크의 제국이, 다른 편에는 부르봉

왕가의 프랑스가 균형을 이루었어요. (위그노들을 학살한 주제에

프랑스는 신교 진영이었죠. 국제적 힘의 균형 때문에 그래요.)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지라 워낙 함수 관계가

복합적인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두 가지로 보면 되요.


첫째, 교황을 정점으로 종교 종속적 구도가 정치에 개입하는 시대가

이제는 저물었다는 거죠.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국제법이란 도구가

생겼거니와 이제 영지나 봉토에서 근대 국가 개념이 등장했고 각

국가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각자도생하여 살아남는 시대인 거죠.


둘째, 유럽의 세력 지형이 차츰 현대와 비슷하게 변화했어요.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은 정점에서 하향세로 가고 스페인도 저물어가며

새롭게 부르봉의 프랑스가 최강자 자리를 넘보게 되었어요.


영국은 내전으로 불안불안하여 전쟁에 직접 뛰어들진 못했고..

영국의 국력이 드러나는 때는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무렵입니다. 17세기는 무역으로 돈벌고 청교도로 골치 아픈 중…


그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필두로 영지에서 독립한 국가가 새로이

탄생합니다. 네, 이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꽤 벗어나게

되었어요. 스위스도 독립하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 국왕이

맹활약한 스웨덴도 상당한 국익을 챙겼죠.


17세기 후반에 가서 해상 개척의 판도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아닌 새롭게 등장한 영국(내전을 끝내고 명예 혁명을 완성)과

신생 공화국 네덜란드의 양강 구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양국

모두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여 박차를 가하죠.


요는, 점점 우리가 아는 현대 유럽의 국경선이나 국제 관계의 구도가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빌미로 개전했지만

결과는 정치 구도와 국제 관계로 매듭지어졌다는 점도 중요하고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프로테스탄트나 종교 전쟁이 절대로 종교 만의

문제가 아니며 거대한 정치 역학 관계에 광풍 같은 변혁을 몰고 온

시대 패러다임의 대이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랍니다.




2003년에 나온 작은 독일 영화 루터조셉 파인즈 연기를 보며

5백 년 전 독일 제후국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겠지만요.




19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독일계 유대인 오페라 작곡가

지아코모 마이어베어는 숱한 성공작을 만들었는데 1836년

초연한 그랜드 오페라 위그노 교도가 있어요. 아래 프러덕션은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단 버젼인데 아예 홀로코스트 분위기로

갔네요. 종교 전쟁과 나치 탄압.. 비슷한 듯해요.



위그노 전쟁 중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을 대놓고 묘사한 94년

파트리스 셰로 감독작 여왕 마고가 진정한 걸작일 겁니다. 아래

동영상에서 5분께부터 나오는 학살 현장 묘사는 프랑수아 뒤부아의

아래 그림과 많은 유사성이 관찰되기도 하죠. (미성년자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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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

Renaissance, the Rebirth of Humaniti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 문예 부흥 Renaissance 



르네상스, 재생(부흥), rebirth 이야기에요. 14~17세기 유럽인의

생각과 감정을 열어젖힌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예술 운동입니다.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인근

베네치아제노바로 옮겨갔고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제네바를 거쳐 네덜란드, 영국, 폴란드까지 퍼져 갔다고 합니다.


주로 문학과 회화, 조각, 건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유일신 교리의

성상화에 치중했던 중세 성향을 탈출하여 철학적 사고와 예술적

표현의 중심에 인간이란 존재를 대체한 광역 거시적 사조랍니다.


문예를 ‘부흥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

성향을 되살리고 고전으로 돌아간다는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에요.


장장 19세기까지 통일 군주 없이 공화국이나 공국으로 찢어 살아야

했던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로서는 그네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고대 시절 화려했던 문화의 향수거든요.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가 본래는 이태리어인 rinascimento

라고 불려야 정상이지만 19세기 중반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가

불어로 규정하며 대히트를 친 바람에 그렇게 고착해 버렸다죠.


피렌체나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발발한 이유는 말이죠.. 중세 후반에 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한

사람들이 이런 해양 국가의 중추 계급인 상인 집단이었거든요.


이 나라들은 해양 중개 무역으로 성장한 상인들이 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고 과두 공화정 형태의 정치 체제로 빽과 돈줄과 문화

예술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답니다.


이들이 중개한 무역 루트는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소아시아와

중동, 인도, 중국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동방이었는데 보통 이슬람

상단을 통해 향신료, 도자기, 차 등 사치재를 구해 이문을 챙겼어요.


이렇게 넘어오는 과정에서 물자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제국이 잘 보존해온 (정작 자신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대 문물이

역수입되어 사람들을 일깨우고 르네상스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문화적 변동이란 것이 이렇게 정치와 경제의 기반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지라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이 발호하며 동방 루트를

막아버리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쇠퇴하고 맙니다.


14세기 초를 시점으로 잡는 것이 통설인데 이는 이탈리아 문학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활동 기간이 대략

1308년 무렵부터 사망하는 1321년까지 이어지기 때문이죠.


단테가 정계에서 축출된 후 망명 생활을 하며 창작한 신곡

이태리어를 처음으로 문학의 언어로 끌어올린 명작입니다.

중세 유럽인의 내세적 종교관을 엿볼 수 있기도 하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어 국가 대소사를

라틴어 시문으로 남겼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시로 썼으며 고대

문헌을 발굴 연구하여 후대에 영향을 준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와 교류했던 지오반니 보카치오는 열흘이란 속뜻을 지닌

이야기식 서사시 데카메론을 통해 당대 유럽인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고 사회상을 우회적으로 비꼬기도 했죠. 서사

구조는 영국의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로 계승해요.


이탈리아 문학의 태동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요.

네덜란드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우신예찬을 썼고

스페인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창작하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16세기 초를 화려하게 수놓은 예술가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요.


이들은 교황령을 비롯하여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아 오늘날까지

인류적 자산으로 분류되는 초월적 걸작들을 창작해냈습니다.

한두 번 곁눈질 만으로도 거장의 자취가 느껴지실 겁니다.


다 빈치의 모나 리자라든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든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든가…



르네상스는 순수 문예작의 범위를 초월해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요. 이전 시대 거장의 스타일과 작풍이 한창 정치적 격변을

겪던 북부 공화국 인민의 의식 성장을 반영하기도 했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저작하고 폭풍처럼

일생을 살다 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며, 그가 남긴 충격적 사상은

이후 고전적 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정치학 연구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와 동시대에 영국에서는 헨리 8세 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토머스 모어유토피아를 통해 민중을 배격하는 위정자의

위선을 한껏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모어의 실제 삶도 참

극적이었죠. 헨리 8세에게 직언하다가 참수되었답니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집권한 17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뒤늦게 꽃을 피웠다고 봅니다.

현대 영문학의 효시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현대 대중 문화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주 자주 언급됩니다. 재작년에

개봉한 다빈치 코드 3부작 중 최졸작인 인페르노에서는 시종일관

산드로 보티첼리가 15세기 말에 그린 단테 신곡의 삽화가 삽입되요.



물론 레오나르도를 상업적으로 폭발시킨 건 댄 브라운론 하워드죠.

재미는 있는데.. 이 얘기 아직도 믿는 분들 계시려나요.



또한 데이빗 핀처가 모건 프리먼 및 브래드 피트와 작업하여 1995년에

내놓은 히트작 세븐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언급되는 인류의 일곱 가지

죄악이 직접적인 내러티브의 소재로 언급되죠. (미성년자는 주의)



세르반테스는 작품과 함께 영원히 사실 겁니다.

심지어는 뮤지컬로도 살아남을 거에요.

아랜 72년 토니상 공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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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Aware Who Henry VIII Really Was?




미디어는 다양한 모습으로 헨리 8세를 묘사해왔습니다.


60년대에 나왔던 리처드 버튼의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이 자매로 나온 영화도 생각나며

캐나다 드라마 시리즈도 기억나네요.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으로서야 이런 창작물을 깔 만한

구석이 없을 거에요. 각각이 모두 독창적 완성도를 구축했고요.


69년작 ‘천일의 앤'은 당시 수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었어요.

리처드 버튼의 연기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긴,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배우들이었으니까요.


대체적으로 미디어가 소비해온 헨리 8세는 그러했습니다.

여자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종교를 버린 난봉꾼, 색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ㅎ


이런 이미지는 조선 후기 숙종 같은 군주와 자주 오버랩되어

사극을 좋아하는 중장년의 보수적 시청자층에게 뭔가 묘하게

동질감의 판타지를 조장해온 느낌이에요. 저쪽도 비슷했구나.. 하는.


현대 한국의 사회가 미디어에서 장희빈을 소비하는 방식의

연장선상 어딘가에 비슷한 형상을 한 앤 불린이 있을 겁니다.


이 이미지는 진실에 가까운 정당한 것일까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어떤 인물인가요.






헨리 8세가 걸어온 행보, 그 목적



열 여덟의 나이에 즉위한 헨리 7세의 왕자는

튜더 왕조가 기록하는 두번째 군주였습니다.


튜더 왕조는 장미 전쟁 이후에 탄생한 16세기

잉글랜드의 왕가 가문이고요.


장미 전쟁이란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 사이에 발발한

15세기의 왕위 계승 내전이었습니다.

(두 왕가의 인장이 장미 문양이라서 저렇게 부른다능..)


튜더 왕조는 오늘날 영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왕국의

실질적 토대를 형성한 공이 있는 가문입니다.


우리로 치면 14세기 말에 조선조가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골격을 형성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튜더 왕조에서 이런 공의 8~9할은 대략

두 명의 군주에게 그 몫이 돌아갑니다.

헨리 8세와 그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아시죠?





헨리 8세는 해군을 양성했습니다.

이 해군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북해를 주름잡으며

해상 강국인 잉글랜드의 기반을 형성했어요.


헨리 8세는 교황 및 대륙의 군주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복잡한 외교전에 잉글랜드의 발언권을 높여갔어요.

(이 시기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류국 정도에 불과했어요.)


헨리 8세는 귀족을 탄압하고 젠트리 등 중간 계급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민심과 인기를 얻게 되죠.


즉위 전반기의 헨리 8세는 교황과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 정치의 화신 같았고 신교도를 박해하는데도 앞장섰어요.

교황에게 가톨릭의 보호자라는 찬사도 받았어요.


첫 아내인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보다 겨우 여섯 살 연상인 미인이었다고 해요.

아라곤은 지금의 스페인. 당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어요.


원래 캐서린은 요절한 형의 왕자비로 정해진 사람이었으나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정혼자를 떠나보냈다고 하죠.

헨리 8세는 이런 캐서린을 연모했고 그 기록도 남아 있죠.


문제는 나이가 들며 아내가 가임기를 지났음에도

캐서린이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죠.

헨리 본인도 나이가 들어가고.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들들 볶아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는 교리를 찾아보라고 했죠.

왕자 출산처(?)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본래 헨리 8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선진 문물에 밝은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독일과 스위스에 종교 개혁이 벌어지고 있음도 알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교도들을 철저하게 압살하고 있었어요.


교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그때까지 통제하던 종교 개혁 카드를 꺼내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존속하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출범합니다.


약간 선동적 조치로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그 재산을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매각하기도 합니다, 헐값에. 민심이 환호했죠.


하지만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사실상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어요.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그 한 가지의 차이 뿐이었습니다. 루터교 흉내만 살짝 내주고.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그냥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 현상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종교 개혁의 의미를 그만큼 적확하게 알았다는 뜻도 되죠.


그렇게 족쇄가 풀려 다섯 번 추가로 결혼하고 두 명의 왕비를

참수합니다. 그가 낳은 왕자 1명, 공주 2명이 뒤를 이어

튜더 왕조의 마지막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과 재혼과 왕자 출산에 집착했을까요.

왕좌의 정통성을 추구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그 자신

집권의 궁극적 목표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이 취약한 왕가의 내전으로 평생을 골머리 썩여야 했던

선왕 헨리 7세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기 때문이고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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