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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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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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5
    1640년대 영국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제3계급의 역할 2
  2. 2020.06.25
    영국식 입헌 의회 정치의 뿌리, 마그나 카르타




Back to 1640s of Britains..

What Happened and Whodunit






영국의 근대사가 현대에 와서 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중요할지 모를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현재 국적과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민주 정치라는 것…

democracy.. 짜잔… 알죠?

인류 역사상 이걸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근대의 영국이거덩요.



더 정확하게 시공간을 좁혀 보면 17세기 잉글랜드와

그 주변의 왕국들인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였어요.



유감이지만 17세기에 잉글랜드에서 벌어진 일을

단번에 설명할 순 없어요. 아무리 단순화시켜도 최소한

전반기와 후반기, 둘 정도 시대 구분을 해줘야 합니다.



17세기 전반기 사건을 흔히 청교도 혁명이라고 많이들

들어보셨을 테고, 17세기 후반기 사건을 명예 혁명으로

알고 계실 테죠. 왠만큼 교육받은 현대 한국인들은요.

일단은 그러한데 말이죠..



출신 성분상 스코틀랜드 칼뱅파 장로교 계층을 중심으로

청교도식 종교관을 가지고 상업 및 무역으로 세를 구축한

신사 계급의회파 반란 세력이 잉글랜드 국왕권에

대항하여 대략 1640년대부터 50, 60년대까지

벌인 일련의 전쟁과 정쟁 및 국가적 소요 사태…



자, 이렇게 복잡한 사건을 간명하고 단출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요. 본 블로거에게 그런 재주가 없는 거겠죠.










먼저 역사서에 어지럽게 난립하는 용어부터 정리해야 해요.

이 책 저 책에 여러 개념이 난립하는데 각각 가리키는

내용이 다 조금씩 다르거든요.



청교도 혁명, Puritan Revolution..은

본 블로거가 판단할 땐 국내에 가장 널리 정착한 개념이에요.

비교적 연식이 되는 사람들이 이 용어로 많이 알고 있죠.



1640년대 사태의 주동 세력이 가진 종교관이 칼뱅파 장로교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고 사태의 기저에 중세 종교 전쟁

깔려 있음을 명시하는 용어인데요.



이 표현이 다소 불명확할지 모르다는 비판이 죽 있었어요.

왜냐..? 사람들이 혁명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란 게, 보통

프랑스 1789년 혁명이나 1830년 혁명처럼, 노도처럼 들고

일어난 민중의 저항, 펄럭이는 깃발… 뭐 이런 거쟎아요.



근데 본 사태는 피치자 하층민보다는 중소 지주 계급인 신사,

젠트리나 요먼이란 제3계급이 중심이고 그 방식도 거리의 폭동이

아니라 엄연히 정규군을 편성하여 전쟁을 벌이는 식이었거든요.

그래서 다소간 본질을 호도할 소지가 있는 표현인 거에요.



영국 혁명이란 말도 프랑스나 미국과 묶어서 편의상 쓰긴 해요.

일관적 표현으로 분류하기 쉬우니까요. 하지만 사실 영국도

아니고 혁명도 아닌 거 아니냐는 비판이 있어 애매한 말이죠.













이런 이유로 오늘날 현대 영미권 역사서에서는 대체적으로

영국 내전, English Civil War..란 용어를 더 광범위하게

선호하는 편이에요. 빠르게 정착하고 있는 말인데요.

(아, 물론 영어 표현이 정착해가고 있다는 뜻)



사태의 전개가 그레이트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섬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전쟁의 형태로 벌어졌기에 그래도 가장 사실에

근접한 현대적 표현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번역어가 문제인데 엄밀히 말해서 이 당시 국체가

영국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아는 그 영국이란 나라는 각각

1707년과 1800년의 연합법으로 탄생한 거니까요.



17세기는 아직 각기 독립적인 세 왕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동군 연합.. 같은 군주 아래 느슨하게 결합한, 곧

연합 왕국으로서의 국체를 형성하고 있던 거죠.



그런 의미에서 번역어로는 잉글랜드 내전이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고 있어요. 치고 박고 싸운 주무대가

잉글랜드이기도 했고..










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할이 전혀 없었냐 하면

결코 그게 아니기 때문에, 좀 아는 사람들은 더 정확한 표현을

선호하죠. 이른바 삼왕국 전쟁 또는 삼왕국 내전, Wars of the

Three Kingdoms 또는 British Civil Wars..



그런데 이 용어도 삼국 시대나 삼국지처럼 받아들일 소지가

다분히 있어 현대 한국에서 널리 용인되는 건 아니에요.

당연한 소리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가

위촉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싸운 것이 아니거든요.



주교 전쟁, Bishops' Wars..란 개념도 있어요. 이건 이 모든

사태의 촉매 및 시발점 역할을 한 1639년과 1640년의 전쟁

일부를 가리켜요. 하지만 사실 이 전쟁 내용이 큰 줄기에서

그닥 중요하다고는 볼 수가 없기도 해요.



삼왕국 전쟁이란 개념으로 가면 주교 전쟁 등 전체를 포괄할

수 있지만 보통 많이 쓰이는 잉글랜드 내전의 개념에선 큰

줄거리만 보려는 경향이 생겨 잉글랜드 외 기타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사건과 전쟁을 제외하고 논할 때도 종종 있어요.



왜 복잡한 개념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하는지 이제야 알겠죠?

한국 근대사에서 1880~90년대에 달 단위로 연달아 발생하는

복잡한 사건들을 한국인 입장에서도 차근차근 복기하기

어려운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현대 사가들의 일반적 경향을 좇아 English Civil War,

잉글랜드 내전으로 1640년대 역사의 표제어를 정리해 볼께요.










잉글랜드 내전의 본질과 내용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사태의 능동적 주체가 누구인가부터 따져보면 어떨까요.



세 가지 키워드로 접근해갈 수 있어요.

청교도, 젠트리, 스코틀랜드



청교도란 제네바에서 태동한 칼뱅교가 영국으로 넘어와 얻은

별칭입니다. 영어 명칭으로 따지자면 또 구분이 되고요. 잉글랜드

내의 칼뱅파는 puritan, 스코틀랜드에선 covenanter로 불렀어요.



칼뱅파 장로교가 영국 땅으로 넘어와서는 주로 스코틀랜드

왕국 내에 터전을 잡아 세력을 넓혔으나 잉글랜드 안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해 나갔습니다. 16~17세기였죠.



청교도가 영국 사회 전체에서 중심 세력이 된 데엔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합니다. 무엇보다도 상업과 무역 면에서 시장을

장악하고 16~17세기 영국 경제력의 근간을 형성했어요.



칼뱅파 교리의 예정설에서 근면과 검소를 중시하고 현실에

충실한 삶을 살면 선천적 계급과 상관없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급진적 논리가 청교도 경제 활동의 사회적 확장을

지원 사격한 겁니다. 루터교보다 정치적으로 진보적이었죠.










상업 활동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 집단, 여기에 중앙 왕실과 다소

거리가 있는 중하급 지방 귀족이나 중소 지주층 역시 이런 생각에

동참할 여지가 충분했어요. 16세기 후반기부터 이런 사람들이

똘똘 뭉쳐 영국 정가의 기층을 장악해 들어간 거지요.



이른바 젠트리요먼이라고 부르는 제3계급, 또는 신사 계급

출현한 거에요. 이들이 갑자기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배경은

멀리 백년 전쟁장미 전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어요.



백 년을 훨씬 넘긴 두 전쟁으로 대권에 도전할 만한 귀족 가문의

씨가 말라버리는 통에 중앙 정치를 담당할 인적 자원이 소멸해

버리니 이 빈 자리를 중간 계층의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던 거에요.



그리고 헨리 7세헨리 8세튜더 왕조의 번영을 개창한

국왕들 역시 이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서 제3계급을

적당히 육성하고 달래가며 정치를 이끌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상층부 인재의 씨가 말라 중간 계층이 급부상하는

사회적 계기는 희한하게도 중세사에서 영국에서밖에 달리

관찰이 되지 않아요. 의회 정치의 씨앗을 잉태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이란 나라의 숙명이 시작된 셈인 거죠.



(그리고 다른 나라 역사와의 차별성이

시작된 지점도 정확하게 바로 여기…)










제3계급의 생각과 삶은 평민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왕권이란 거대한 기득권에 맞설 수 있도록 훌륭한

계급 대립 구도가 시의적절하게 형성된 거에요.



당시 평민들도 다 청교도였겠지 지레짐작하는 분들도 많은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어요. 생활에 쫓겨 변화에 둔감한 관계로

어쩔 수 없이 보수화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평민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가톨릭이나 어정쩡한 국교회 상태였죠.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는 교리와 의례, 직제 등에서 크게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어차피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인위적으로 종교 개혁 추세를 이용한 거니까…)



즉 왕실 — 제3계급 — 평민의 삼분된 계급 구조는 어느 나라든

봉건적 신분제 국가라면 다 있는 현상인데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이 구조가 어떻게 근대화하는가의 핵심은 결국 중간 계급이 어느

쪽에 어떤 철학을 가지고 붙느냐로 역사의 향방이 달린 거거든요.










조선 후기에도 서얼과 실학자 같은 실용적 사상을 가진 중간

계급이 분명히 대두했어요. 그런데 조선이 실패한 원인은

상층부 기득권이 와해하지 않고 임란 후 신분제가 동요하며

되려 양반이 늘어나는 기형적 구조가 양산된 때문이지요.



성공한 민중 혁명을 이룬 프랑스와 러시아는 어떠했나요.

지식인과 군인이 피치자의 편에서 배경 철학을 제공하고

정치 구도 재편에 아이디어를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시대 정신과 비전을 지닌 중간 계급의 역할이 없으면

근대 시민 혁명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추론…

바로 이 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거죠.



이런 전차로 조선 후기와 구한말에 아래로부터 혁명의 싹이

움트지 못한 역사를 맞은 거에요. 문제는 위로부터라도

개혁과 혁신이 성공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ㅜ

구한말 기득권의 외교 실력이 너무 형편없었죠.



제3계급의 역할은 이 정도로 중요하답니다. 흔히 상식 선에서

이 시기 영국 정치가의 대표자로 올리버 크롬웰을 상정하실 텐데

크롬웰이 이 표본 집단 특성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쟎아요.

신기하죠?



자, 다음엔 더욱 골치아픈 남의 나라 역사 이야기로

우리 함께 들어가 보아요.



돌아가신 분인데 어린이 영화 치티치티 뱅뱅으로 유명했던

켄 휴즈 감독이라고 있었어요. 이 분이 1970년에 크롬웰이란

작품을 선보이며 올리버 크롬웰 역에 ‘덤블도어’ 리처드 해리스

옹을 캐스팅했죠. 작품의 흥행은 신통치 않았지만 해리스의

사자후 연기는 정말 후덜덜하군요. 아래에서 맛만 보시지요.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Magna Carta Libertatum,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현대 영국 불문 헌법의 가장 오래 된 법원*으로서

대헌장의 의의는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편이에요.



*법원 = 사법부 기관 시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법을 해석 적용할 근거로서 참조할 성문 법전이나

관습법 등 일체의 범위.. 法院이 아니라 法源...



charter는 영미법 중 영국 권역에서 협약, 계약, 헌장,

공인, 승인, 인증, 등기, 등록(명부) 정도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말이고요.



미국에서 certify나 register로 받을 법한 표현에

이 말이 들어가는 영국권 실무 용어가 많아요.

현대어 용법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라틴어 원 용어를 풀어보면 자유 대헌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여기서의 자유란 신민 전체가 아니라

13세기 당시엔 주로 귀족으로 국한한 의미였고요.



자유민 전체 범위로 확대된 것은 16세기. 역사 발전의

흐름을 좇아 법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때 이 능동적인 법리 해석에 앞장선 인물이 언젠가

포스팅한 적 있는 에드워드 코크 대법원장이에요.

권리 청원을 주도하여 정치 발전에 기여한 분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 존 왕의 전제적 실정에 반기를

든 귀족들이 역사상 최초로 왕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도록

왕으로 하여금 조인시킨 문서를 가리켜요.



귀족 평의회, Council of 25 Barons란 개념이 왕권을 제한할

기구로 등장하는데 영국식 내각제 의회 민주 정치의 원형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겠고요. parliament의 전신이겠죠.



King John of England.. 영국사에서 지지리도 인기없는

군주의 대명사에요. 하필 선왕인 형 리처드 1세사자왕..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지라 더더욱 비교되어 까이는 거죠.



사자심왕 리처드가 대중의 상상과는 달리 불어를 구사하고

내정에 소홀한 군주이긴 했어요.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전쟁 능력이 과장없이 진짜배기인 건 백퍼 옳아요.



오늘날 민족 국가의 관점만을 전격 적용하여 사자심왕 리처드를

평가할 순 없지만 당대에도 그렇고 이후 역사에서도 영국인들의

보편적인 애정을 듬뿍 받은 군주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죠.



잊을 만하면 줄기차게 영화화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쟎아요.

하필이면 즉위 직전에 자기 형과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인지라

존 왕이 더욱 밉살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거고요.



실제 존 왕의 실정은 위태위태했어요. 이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가 바다 건너 프랑스 카페 왕가 주변에 영지를

갖고 있어 우리가 아는 세력권 지도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덧붙여, 플랜태저넷 왕족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지금과

많이 다른 중세 영어는 농노들의 말이었다 하고요.)










원래 사자심왕이 프랑스 땅 영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의 라이벌이던

카페 왕족 필리프 2세가 공격하여 지휘관으로선 비교도 안 되게

능력없는 동생 존 왕이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요.



이를 탈환하기 위해 존 왕이 무리하게 군비를 충원해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세금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귀족과 자유민, 농노들이 똘똘 뭉쳐 반발한 것…

이 점이 대헌장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문건상의 정치적 자유가 주로 귀족에게 국한한 건 사실이지만

귀족들이 반발하는 데에 시티 오브 런던 길드 소속 자유민들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노들이 적극적으로 합세했기에 헌장의

시대 정신이 시민의 총의를 담았다고 해석할 근거가 충분한 거고

무엇보다 막장 상황을 조장한 당사자가 존 왕 본인이었으니까요.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바다 건너서 십 년도 넘게 전쟁 노름에

빠졌지만 워낙 전략가로서 무능력한지라 허망하게 패배하고

돌아온 거에요. 거기다 귀족의 딸을 범하려던 적도 있다나요.

귀족들이 있는 대로 꼭지가 돌 수밖에요.



존 왕에게 그 어떤 억울한 상황 요인 하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쉴드 쳐줄 만한 꺼리도 없이 본인의 무능에다 통치자로서

기본 인성의 실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귀족들이 급기야 거병하고 교활한 존 왕이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아첨하여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지만

반란군이 런던 성곽을 포위하고 국왕파 내부 동조자를

포섭하는 등 상황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스티븐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로 양쪽이 템즈 강 남쪽에

모였고 왕권 제한을 약속하는 문서에 존 왕이 조인해버리는

듣도 보도 못하던 초유의 사태로 발전하죠.



1215년 최초 조인시엔 서수로 조항 구분이 없었어요. 1759년

윌리엄 블랙스톤 대법관의 영국법 주해라는 이론서를 통해

총 63개조로 정리되었죠.



대부분의 조항은 이후 일반법으로 대체 입법이 이루어졌으니

역사적 의의 이외에 현대적 의미는 없는 편이긴 한데요.



제12조를 보면 ‘군역 대납금 등 모든 과세는 오직 (시민의) 총의에

의해서만 이를 부과할 수 있다’고 하여 1215년 상황을 직접 엿볼

수 있고요.



제39조가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하거나 그 법익을 강탈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현대에 와서도

재판 법원으로 유효한 세 가지 조항 중 하나입니다. 현대적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법조문이자 법리임을 알 수 있겠죠.









이 때부터 영국의 민주 정치가 시작되어 의회가 짜잔 열리고…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 한국에서 영국사를

잘 안 가르치기도 하니까 — 사실 이 문서는 조인 직후부터 그

효력을 의심하고 1215년 해프닝은 사실상 상징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진실에 더 부합한답니다.



당장 조인 직후 존 왕은 (치사하게도) 교황에게 쪼르르 달려가

헌장 무효화를 요청하고 교황이 이를 교서로 내려 내전이

벌어지거든요. 개싸움인 거죠.



이후 국왕들과 몇 차례에 걸쳐 개정도 하고 밀고 당기고 개싸움이

지속되는데 핵심은 이거에요. 왕은 안 지키려고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리고, 귀족들은 틈날 때마다 문서 들이밀고…



그럼 오늘날 민주 정치의 효시 어쩌구…는 뭔데? 하실 텐데..

정작 옛날 옛적 무슨무슨 종이 쪼가리에 서명했네 어쨌네..

그런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민주 정치란, 문서나 법전의 종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주권을 당연시하는 동시대 시민의 사회 의식시대

정신에서 나오는 힘, 바로 그것 아니겠어요?



대헌장이 역사적 명분과 권원으로서의 힘을 갖게 된 시기는

전술했듯이 16~18세기. 바야흐로 계몽 사상으로 무장한

자유 시민의 정치 의식이 성숙하여 그에 합당한 전례를

능동적으로 찾아 공부하던 그때인 거죠.



이때에야 비로소 대헌장에 헌법으로서의 권위가 생겨난 거에요.

엘리자베스 1세제임스 1세의 자랑스런 치세를 몸소 겪고

네덜란드와 맞장뜨며 강한 나라로 가는 발판을 자기 손으로

일구어 가던 잉글랜드 삶의 현장의 지성인과 신민들…



그들이 성숙한 체제를 만들어 후손에 물려줘야 한다는 자의식에

스스로 눈을 뜬 거에요. 물론 겪어야 했던 세월은 힘들었어요.

허나 권리 청원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명예 혁명

권리 장전의 지난한 세월을 통째로 견뎌내고 더러는 고난에

희생되는 와중에 공동체가 지향할 가치를 찾아낸 거에요.



찾고 찾다 보니 자신들의 뿌리는… 아,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에

있었던 것이로구나. 몰랐었는데, 이젠 스스로 알게 된 거죠.



제헌절이 따로 없는 영국… 고작 달력 쪼가리에 기념일을 박는

것이 중요할까요. 박물관에 잠자던 대헌장의 거울에 비친 자신들

마음 속에 헌법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은 거에요.



에드워드 코크, 올리버 크롬웰, 존 로크, 윌리엄 블랙스톤

이런 이름들이 중요하다기보다 이들 뒤에서 세상을 움직인

평범한 영국의 시민들에게 더 큰 헌사를 돌려야겠죠.



이런 중차대한 시대 정신을 담고 있기에 수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대헌장을 법리적으로 계수했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연방 헌법UN 인권 선언



우리나라도 마그나 카르타란 말이 고유 명사 내지

관용적 수사로 발전한 것 보면 제도권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헌장의 현대적 이모저모를 다시 새기는 계기였길 빌고…

대영 도서관이 마련한 귀여운 동영상을 보며 즐겨봐요.









그리고 리처드 1세 얘기 나온 김에, 역대 영화화 사례 중

사자왕을 가장 포스 넘치게 묘사한 히트작을 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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