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
1946년에 태어나 91년, 겨우 마흔 다섯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 하신 이 분은 20세기 음악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대중 예술가이다.
(Montreux, Switzerland)
디지털 드림 도어 닷컴이라는 대중 문화 랭킹 전문
사이트가 있는데, 남성 락 보컬리스트 부문 랭킹에서
머큐리는 항상 1위였다. 본 블로거 기억으로 이 랭킹이
십여 년에 이른 것 같은데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같은 사이트의 락 보컬 퍼포먼스 부문에서도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가 현재 1위이다. 락 에픽, 곧 서사적 락
음악곡 부문에서도 이 노랜 1위. 락 앤썸이라고, 공연에서
떼창 유도할 수 있는 상징적 트랙에선 위윌락유가 1위.
락 밴드 최고의 프론트맨 랭킹에서 그는 현재 5위이다.
생소한 사이트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좀 더 미국 친화적인
롤링 스톤 매거진이 있다. 약 10년 주기로 업뎃하는 이곳의
랭킹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가수들 100명 중 그가
18위를 차지한 바 있다. 최근 2008년 집계 결과였다.
18위가 별 건 아니네, 하시는 분들은 그 위쪽 순위에
어떤 분들이 있는지는 보고 얘기했으면 한다.
대략만 읊어도 이 정도. 이 분이 왜 위대한 락 보컬리스트로
불리우는지, 누구나 다 깨닫고 있지만 말로 일일히 설명하기도
참 쉽지 않다. 이처럼 전설적인 아티스트에 대한 포스팅이
망설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겨우 이 정도 필력으로 제대로
표현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그는 오늘날 탄자니아 영토에 속한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파르시라는 페르시아계 조로아스터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고
이후 여기서 쫓겨나 유년 시절을 인도에서 성장하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와서야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흔하디 흔한 기독교계 앵글로 색슨이 주류인 영미권 음악계
전체를 볼 때 참 특이한 배경이 아닐 수 없고, 그가 보여준
독창적 캐릭터와도 깊은 연관이 있겠다 싶다.
브라이언 메이 및 로저 테일러가 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마일에서 먼저 합을 맞추고 있었을 때 그는 약간 로디
비슷하게 곁을 맴돌다가 두 사람에게 합류한다. 1970년.
밴드 이름을 퀸 Queen으로 바꾸었고 이는 누가 봐도
머큐리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queen에는 속어로
퀴어의 의미가 숨어 있으니..)
밴드 이름과 같은 동명의 데뷔 앨범은 73년에 가서야 늦게
낼 수 있었고, 녹음 두어 해 전 전기공학 전공으로 넷 중 가장
어린 존 디콘이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아는 네 명의
전설적 진용이 다 갖춰진 것이 이 무렵인 셈. 1973년 경.
이듬해 이들은 Queen II 앨범을 발매했다.
(Queen)
이렇듯 1집과 2집에서 Keep Yourself Alive, Liar,
Seven Seas of Rhye 등 오늘날까지 알려졌고 밴드
역시 콘서트에서 즐겨 연주한 트랙들이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성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신디를
쓰지 않고 보컬이 피아노를 겸하는 피아노 락앤롤 정도로
박한 평가를 받았음이 사실이다.
Sheer Heart Attack 앨범에서 Killer Queen이란 대박
싱글이 나오고 나서야 밴드는 세계구급으로 올라선다. 이
곡은 머큐리가 작곡했다. 본 앨범에 이르러서야 클래식과
락앤롤에 바탕을 둔 밴드 음악성의 아이덴티티가 이제
막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4년..
아울러 Brighton Rock, Now I'm Here, In the Lap of
the Gods, Stone Cold Crazy 등 유명한 트랙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브라이튼 락에서 선보이는 딜레이 테크닉은
그대로 메이의 전매특허가 되었고, 스톤 콜드 크레이지의
쓰래쉬한 파괴성은 이후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Sheer Heart Attack)
(A Night at the Opera)
스튜디오와의 불화로 밴드 멤버들은 여전히 곤궁했고 돈
한 푼 손에 쥐는 일 없었다. 절치부심하여 75년 넉 달 동안
녹음실에 틀어박혔고 창작적 전성기의 시발점이 된 명반
A Night at the Opera를 같은 해에 발매한다. 그렇지.
Bohemian Rhapsody가 실린 그 앨범이다.
보랩으로 불린 트랙은 머큐리가 온전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Love of My Life, You're My Best
Friend, God Save the Queen, '39, I'm in Love with
My Car 등 명곡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평가는 보랩 한
곡에 주목할 수밖에 없음을 멤버 모두가 인정했다고 한다.
('Bohemian Rhapsody'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Love of My Life'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A Day at the Races)
이듬해 1976년엔 A Day at the Races 앨범이 나와
Somebody to Love를 필두로 Tie Your Mother Down,
Good Old-Fashioned Lover Boy 등 트랙을 쏟아냈다.
전성기가 이어진 것이고 본작은 여러 모로 전작의 동어
반복 같은 위치였지만 팬덤은 신경쓰지 않았다.
(4집과 5집의 트랙 구성은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반면 언론과 평단은 여전히 냉담하고 냉소적이었다.
퀸은, 대체로 평론가의 칭찬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터..
('Somebody to Love' from A Day at the Races, 1976)
(News of the World)
77년 News of the World 역시 창작적 상승가의 연장선에
있던 명반일 거다. 드디어 메이가 We Will Rock You를
선보였고 We Are the Champions는 이 곡의 제2부인
것 마냥 항상 붙어서 라디오 전파를 타곤 했다. Sheer
Heart Attack, Spread Your Wings 등 정통 락
트랙들도 매력이 있다.
위윌락유의 가사는 의외로 음악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훌리건 패싸움 스토리에 더 가깝다. '락유~'는 문자 그대로
'부셔버릴거야' 정도의 뉘앙스란 뜻. 원곡이 재해석의 여지가
커서 라이브에서 다양한 버젼을 골라볼 수 있는 재미를 주는
곡이기도 하다. 79년 발매된 Live Killers 속 패스트 버젼이
가장 인기가 있는 편인 것 같아 아래에 붙인다.
(Live Killers)
('We Will Rock You' from News of the World, 1977)
('We Will Rock You' from Live Killers, 1979)
(Jazz)
78년 7집 Jazz에 와서 연거푸 세 장의 앨범으로 달려온 음악적
지향성이 약간 지친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을 주게 된다. 여러 모로
퀸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약간 동떨어진 실험성이 돋보인 역작.
머큐리의 민족 정체성을 떠올리는 듯한 Mustapha부터 상당히
이채롭고 Fat Bottomed Girls에선 로커빌리의 영향을 읽을
수 있으며 Bicycle Race는 말랑말랑하고 벌레스크스러운
것이 누가 봐도 머큐리가 쓴 곡임을 알 수 있겠다.
무엇보다 본작엔 Don't Stop Me Now가 있다. 제임스 브라운
인가 싶은 정도의 섹드립도 등장하고 엄청나게 흥겨운 이 트랙은
진성 팬덤이 위윌락유보다도 더 앤썸처럼 친애해온 곡이기도...
단, 머큐리가 이슬람교 신자일 거란 오해는 금물이다. 조로아스터
교는 이슬람과 관련 없다. 그냥 이런저런 상업적 요소를 끌어들여
재미있는 노래 하나 만든 거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퀸의 서사적
사회성은 딱 고만고만하게 적당한 정도만 구사하는 수준이다.
('Mustapha' from Jazz, 1978)
('Don't Stop Me Now' from Jazz, 1978)
(The Game)
Jazz에서 약간 주춤하나 싶었던 그들은 The Game 앨범으로
다시 한 번 활짝 만개한다. 평단과의 불편한 관계를 전술했는데
하나 더, 이상하게 퀸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
당대의 세계적인 팬덤은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전 세계라고 보면
대략 옳다. 특히 유럽, 남미, 일본은 그들의 밥줄이라고나 할까.
80년의 이 앨범 와서 결국 그들은 빌보드 앨범 및 싱글 차트 양쪽서
처음으로 1위를 찍는다. 엘비스 프레슬리 캐릭터 모방으로 유명한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은 그들의 유일한 1위 싱글이다.
Another One Bites the Dust는 무려 마이클 잭슨이 일찌감치
히트를 예감한 곡이다. 꽉찬 funky 비트에 그냥 지나칠 리 없었겠지.
Another One~의 가사 역시 동네 양아치들 패싸움 이야기이다.
'(싸우다) 또 하나 뒈졌군' 정도의 뉘앙스라고. 사회 비판적 가사가
비교적 많지 않은 그들에겐 이런 가사 스토리가 의외로 많다.
또한 퀸 방식으로 디스코를 받아들인 증거이기도 하다.
Play the Game과 Save Me 역시 들어볼 만한 트랙들이다.
키보디스트 아닌 사람들은 별 관심 없겠지만 퀸의 디스코그래피
중 처음으로 신디사이저가 등장한 앨범이기도 하다. Oberheim의
OB-X란 명기이다.
(Oberheim OB-X)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from the Game, 1980)
('Another One Bites the Dust' from the Game, 1980)
(Hot Space)
81년엔 Flash Gordon이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만든다.
여기서의 플래쉬는 DC의 그 히어로는 아니다. 한국에 개봉한
적이 없는 SF물이다.
이듬해 Hot Space 앨범을 내는데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다
안 좋아 이후 2~3년간 멤버들이 붕뜬 상태로 솔로 활동에나
매진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데이빗 보위와 함께 한
Under Pressure는 여전히 훌륭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사회성 짙은 가사로 영국병 걸린 경제 상황을 위무한
걸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총리는 대처..ㅠ)
('Under Pressure' from Hot Space, 1982)
(The Works)
영화에서 나타났듯이 밴드의 침체기는 결국 라이브 에이드에
가서야 부활의 동력을 얻게 된다. 그 전 82년 5월에서 84년 2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메이와 테일러와 디콘은 솔로 작업을 열심히들
하셨다. 정작 머큐리는 다음 앨범이 나오고 난 후에 자신의 앨범을
냈다. 즉,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과 다르다는 말.
라이브 에이드 전인 84년에 비교적 성과가 좋았던 The Works
앨범을 낸다. 신디사이저를 광폭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입증한
본작에서 Radio Ga Ga, It's a Hard Life, Hammer to Fall
그리고 I Want to Break Free 등 성공작이 쏟아져 나왔다.
멤버들을 전부 여장(!)시켜 찍은 ~Break Free의 뮤비는 매우
유명했고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밴드의 곡 중 흔치 않게
신디사이저 솔로가 등장하여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프레드
맨델이란 세션이 연주했다고 한다. Linn LM-1이란 드럼머신
사용도 괜찮았다.
레디오가가의 보코더로는 77년에 출시됐던 EMS 2000이
쓰였단다. (희한하게도 퀸은, 아날로그 신디 전성기인 70년대엔
단 한 번도 무그를 쓴 적이 없다. 모든 이펙트는 기타에
몰아주려 했다나 뭐래나.)
(Linn LM-1)
(EMS Vocoder 2000)
('Radio Ga Ga' from the Works, 1984)
('I Want to Break Free' from the Works, 1984)
*다소 민망한 일본 라이브
(Mr. Bad Guy)
라이브 에이드에서 완전히 부활한 퀸. 하지만 머큐리 자신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멤버들에게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사망이 거의
임박한 훨씬 뒤였으나 이미 눈치들은 다 채고 있었다고.
85년엔 이미 예정되어 있던 첫 솔로 앨범 Mr. Bad Guy를
발매한다. 그의 솔로 앨범은 두 장 뿐이고 두번째 앨범이 한창
오페라에 탐닉한 말년의 특이성을 보여준다고 본다면, 진정
대중적인 음악 앨범은 이것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신디사이저와 뉴웨이브 요소를 팍팍 쓴 미래 지향적 레트로
사운드의 본작은 마지막 전성기를 달리던 머큐리를 느껴볼
만한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다.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Living on My Own 등
양질의 곡들을 수록하였다. 메이드 인 헤븐은 추후 밴드가
재녹음하여 수록한 그 곡의 원곡이다.
('I Was Born to Love You' from Mr. Bad Guy, 1985)
(A Kind of Magic)
(The Miracle)
*독일 방송에 출연하여 립싱크하시는...
(Innuendo)
('The Show Must Go On' from Innuendo, 1991)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사른지 아홉 달 후에 그는 숨을 거둔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그를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이듬해
92년 4월 20일에 대대적 규모의 헌정 공연 The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가 개최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 음악 소비자가 팬덤화하는 과정에서 처음
접했을 법한 외국의 공연 문화였을 거다. 당시 영미권 음악계를
지배했던 주류 아티스트들이 쪽팔림도 무릅쓰고 머큐리의 음악을
따라 부르며 비교질 당하는 영예를 기꺼이 마다 하지 않았다. 한
음악가가 또 다른 음악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인 셈.
엘튼 존, 로버트 플랜트, 데이빗 보위, 로저 달트리, 토니 아이오미,
애니 레녹스, 폴 영, 건즈 앤 로지스, 데프 레파드, 메탈리카, 익스트림
등이 여기에 동참한 당시 탑클래스의 헤드라이너들. 지금 봐도 이런
사람들 어떻게 다시 모을까 싶다.
모두 쪽팔림을 감당하며 어려운 원곡을 쩔쩔 매고 소화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는데, 단 한 사람만은 왠지 '어쩌면 원곡만큼 매력적일지도'
하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대 최고의 블루 아이드 소울 보컬리스트
조지 마이클이었고 그가 퀸의 세 멤버 및 합창단과 함께 한
Somebody to Love는 그해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
이 공연 두 달 전에는 음악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 웨인스월드가
개봉해 Bohemian Rhapsody를 삽입했고 영화 속 헤드뱅잉 씬
인기 덕분에 원곡을 역주행시켜 빌보드 핫100 2위에 재진입시킨
엄청난 흥행몰이를 가져오기도 했다.
(Made in Heaven)
머큐리의 목소리를 담은 마지막 정규 앨범 Made in Heaven은
95년에 발매된다. 그의 솔로 앨범에 실렸던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등에 멤버들이 어레인지를 추가해
포함시켰고 Too Much Love Will Kill You, Heaven for
Everyone 같은 새로운 트랙과 생전 마지막 육성 녹음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헌정 앨범의 연장선이었다.
메이가 다른 작곡가들과 만든 Too Much Love~는 밴드의
앨범에 수록된 것과 메이의 솔로 앨범에 실린 것, 두 가지
버젼이 존재한다. 테일러는 그렇다 치고 메이도 참 노래 잘
하는구나, 하는 점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킨 곡이었다.
('Too Much Love Will Kill You' from Made in Heaven, 1995)
('Too Much Love Will Kill You' by Brian May, 1995)
97년에 존 디콘은 영원히 음악계에서 은퇴한다. 본래부터
내성적이고 머큐리의 카리스마적 퍼포먼스를 존경했던
밴드의 막내였기에 남은 두 사람도 존중한 결정이었다.
04년부터 09년까지 나머지 두 사람은 퀸의 이름으로 역시
전설적 보컬리스트인 폴 로저스와 투어를 돌기도 했다.
70년대 전설적 블루스락 밴드 프리와 배드 컴퍼니의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던 폴 로저스. 뭔가 새로운 창작 활동이 생기나
기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저 퀸 예전 곡들을 불러주는 것에
그쳤고 반응도 아주 뜨거웠다고 보기는 애매했다고 본다.
다만 생전에 머큐리가 보여주고 가지 못하고 떠난 몇몇
트랙의 라이브를 구경할 수 있었다는 보람은 있었다고.
아래 아원잇올처럼. 이들 세 사람은 이 포맷으로 08년에
앨범도 한 장 냈지만 반응은 뜨뜨미지근한 수준에 그쳤다.
폴 로저스와의 작업을 통해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메이와 테일러 두 사람은 신임 보컬리스트
수소문 작업을 벌였고 11년부터 아메리칸 아이돌 스타로
널리 알려진 애덤 램버트를 리투르트하여 투어 멤버로
기용하고 있다. (이 친구는 영화에도 카메오 등장했지.)
워낙 나이 차도 있고 램버트의 젊디 젊은 기량에서 오는
안정감이나 탄탄한 보컬 실력 덕도 있어, 대체로 기존
팬덤은 이렇게나마 들을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는 듯하다......만, 누구도 프레디를
대체할 수 없다는 여론도 만만치는 않다.
(왜 꼭 대체 보컬을 계속 구해야 하냐고? 그냥 그만 두면
안 되냐고? 이 분들의 직업이 계속 연주하고 투어를 도는
밴드 뮤지션인데 그렇게 반응을 보이면 좀 섭섭할지도...
어찌 되었든 지구상 어딘가에서 퀸의 음악이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연주되고 있다면 만족스러운 일 아닐까.)
(하지만 비교가 되는 건 사실...)
프레디 머큐리의 너무 이른 죽음은 30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당시 참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민
2세대로서 사회 소수 계층의 설움을 동병상련했던 그의
존재감이나 이에 영향받아 형성된 예술적 자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후였던 것 같다.
퀸은, 참 미국 시장 주류와 인연이 없었다. 언론으로부터의
야박한 평가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은 이른바 그래스루츠라고 하는 블루스 계열
코드에 있다. 이들 음악은 상대적으로 블루스의 영향이
약하다. 재즈나 컨트리, 포크와도 멀다.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겠나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루츠가 채우지 않는 빈 자리를 머큐리나 디콘 등 멤버들이 클래식,
펑크funk, 뉴웨이브 등으로 메꾸어 드라마틱한 표현성을 중시한
작품을 만들어갔다. 미국에선 절대로 먹히지 못한 창작 문법이다.
대신 미국을 제외한 세상은 항상 프레디를 연호했다. 전 세계
판매고 2억 장이 어디 그냥 나올 기록이겠는가.
(The Great Pretender, single)
포스팅의 주인공인 머큐리가 피아니스트이고 일렉트릭 피아노는
싫어한 반면 신디사이저는 꽤 다룬 성향인지라 상세히 들고 파진
못했는데, 사실 퀸 사운드의 핵심적 매력은 메이가 연주한 특별한
일렉트릭 기타 레드 스페셜에 있다. Danelectro Shorthorn
비슷하게 생긴 기타는 참 특별한 것이, 메이가 음악을 시작할
무렵 무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악기이기 때문이다.
http://www.queenconcerts.com/instruments/piano.html
독특한 보드와 픽업 디자인을 거친 탓인지 다른 기타리스트
누구보다 그의 톤은 특별하고 이채로워 음색 만으로도 그가
연주한 것임을 구분할 수 있다. 또한 탈 블루스 성향이면서도
클래식하고 글램스러운 퀸의 사운드에 여지없이 어울리는
톤이기도 하다. 세간의 박한 평가의 이면에 뭔가 이질적인
기타 톤까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일까.
(Steinway Concert Grand)
(Red Special)
첫 히트작 킬러퀸이나 바이시클 레이스처럼 머큐리가 작곡한
트랙들을 보면 수십 년 전 벌레스크 쇼나 뮤직 홀 사운드를 듣는
듯 홍키통크 피아노가 중심이 된 살롱 음악이 연상된다. 아마도
그가 겪은 유년 시절의 추억과 연관이 있을 터이다. 살롱의 낡은
피아노에 맞추어 화려한 가운을 흐느적거리며 끈적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모습. 그가 평생 꿈꾼 음악적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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