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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8.15
- 2019.07.16
존 웨이트 John Waite가 한국에 알려져 있기나 할까?
..하고 문득 생각해보다가 이 포스팅할 생각이 났다.
아마 인기도 없고 이런 뮤지션이 존재했다는 것도 모르는
한국의 음악 팬이 대다수일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네.
정작 이 분은 이제 완전 할아버지 되셨는데 말이지..
그도 그럴 것이 웨이트의 음악적 성과 중 세계구급의 것을
꼽아보라면 아무래도 아레나 락 밴드 시절 것보다는 80년대
솔로 커리어에서 대히트한 싱글 한 곡이 나올 텐데...
정작 이 노래가 한국에서 더럽게 인기를 못 끌었거덩.
Missing You라는 트랙이다. 1984년에 나왔고.
No Brakes라고 제동 불가란 앨범에서 싱글 커트되어
자그마치 빌보드 핫100 1위까지 했는데도 말이지.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긴 하다. 한국적 정서와 영 동떨어진
음률도 아닌 듯하고, 조성이 특별하게 야시꾸리 복잡스런 것도
아니며, 올드 팝송 팬들 귀에 쏘옥 들어오진 않던 펑키한 힙
싱코페이션 따위로 무장한 곡도 아니니까.
이 곡, 약간의 그루브가 양념처럼 살짝살짝 배어 있어 가수들이
표현하기에 버겁긴 하지만 듣기에는 무지 편안하다. 코드 진행도
매우 단순하고. F#키에 I - I - IV - V 같은 왕단순 코드..
기타 다운워드 백킹하기도 참 편한 곡이기도 하고..
노래도 정말 호소력 짙게 소화하셨다.
오히려 이 트랙의 분위기는 한두 해 전 히트한 폴리스의
Every Breath You Take와 대단히 비슷한 편곡까지
취하고 있다는 말이다. 참 이상도 하지...
(글고 이 노랜 가사도 불건전하지.. 스토커 이야기다.)
존 웨이트나 그가 활동한 베이비스의 지명도가 떨어져서
그런가보다 해석해보면... 그렇게 말하면 스팅이나 폴리스는
저 노래 전에 별다른 히트곡이 있었더냐 말이지... (한국에서)
... 그래서 존 웨이트 옹께서는 이대로 계속 늙어가시면
한국이란 시장과 영영 인연도 없이 사라지실 것 같은
느낌이 마구 든다. 또 그렇게 느끼고 보니 참 서글프네.
좋은 뮤지션이 사라져가는 것이 서글프고 또 지구 반대편에서
그런 이가 있었음을 알지도 못하고 삶을 지나쳐 버리는 사람이
무척 많다는 점도 아울러 안타깝다.
52년 용띠 생이신 존 웨이트가 락 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The Babys란 팝락 밴드에서 베이스와 보컬을 맡으면서였다.
베이비스의 활동 성과는 중박 정도였다 보면 적당할 텐데
인적 라인은 오픈 암스로 유명한 저니 계열과 이어져 있다.
베이비스 초창기 키보디스트 마이클 코비가 탈퇴하고
후임으로 들어간 사람이 나중에 저니에서 아래 뮤비를
찍으신 조나단 케인 선생이시거덩.. 아, 80년대 갬성 오지다..
80년대 후반 들어 각종 슈퍼 밴드가 튀어나올 때 닐 숀과
존 웨이트 중심으로 저니와 베이비스 멤버들이 한데 모여
배드 잉글리쉬를 결성한 배경에는 이런 인맥이 있었던 거다.
배드 잉글리쉬도 딱 중박 정도 했다. 싱글 히트곡 두어 개,
앨범 기록은 그냥저냥 정도...
한국과 인연이 없어서 그렇지 이 곡 하나만은 지금 이 순간도
80년대 서정 감성을 대변하는 대표곡 쯤으로 취급되고 있고
북미나 유럽에서도 이는 꽤 보편적인 반응인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노래를 부른 가수가 나이 들어 사라지기 전에
기억들 하시라고 포스팅으로 남겨놓는 것이고요...
2011년에 유럽인가 어디 모 예능 프로 출연해서 조촐한
트리오 밴드로 라이브하신 버젼도 참 좋다.
워낙 히트곡이고 곡이 잘 뽑혔다고 칭찬이 자자했던지라
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했는데 2007년에는 블루그래스 정통
컨트리하는 후배 여가수 앨리슨 크라우스와 직접 듀엣도 남기셨다.
청자에 따라선 이 버젼이 더 따뜻하다고 선호하는 사람도 많다.
앨리슨 크라우스 특유의 맑고 청아한 분위기가 더해지기도 했고.
가만... 앨리슨 크라우스는 한국인들이 알려나...
좋은 노래는 발견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뿐
발견되고 나면 절대로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이언 길런 Ian Gillan (0) | 2020.03.10 |
---|---|
브래드 델프 Brad Delp (0) | 2020.02.09 |
데니스 드영 Dennis DeYoung (0) | 2020.01.10 |
보노 Bono (0) | 2019.12.07 |
게디 리 Geddy Lee (0) | 2019.11.09 |
하드락과 헤비메탈의 역사를 논할 때 설명이 필요없는
레전드들이 몇 분 계신다. 45년생 브리티쉬 스크리밍
보컬의 살아있는 전설, 이언 길런 Ian Gillan도 그 중
한 분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화 속의 대 밴드
딥 퍼플 Deep Purple의 제2기, 그 화려한 정점과 함께
하얗게 불타올랐던 위대한 이름을 만나자. 아, 길런...!
*Smoke on the Water. Made in Japan.
- 1972년 8월 17일 도쿄. 4'13"부터 후배들의 극찬 릴레이 인터뷰.
*Child in Time. Made in Japan.
- 1972년 8월 16일 오사카.
딥 퍼플을 모르고 락 음악이란 카테고리에 접근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하드락과 헤비메탈이라는 특정
장르의 발전사에서 정말 빼놓을 수 없이 핵심이고 중추를
형성하는 밴드가 대충 한 셋 정도 된다. 속칭 트로이카라고
할 텐데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 그리고 딥 퍼플이다.
간단히 말해 이들 세 팀이 없었다면 하드락이나 헤비메탈이란
장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발로 태동한 모던
락 내지 얼터너티브 역시 전혀 다른 방향의 역사가 쓰여졌을
거란 말. 69년의 Led Zeppelin II, 70년의 Paranoid, 여기에
72년의 Machine Head 등 세 장의 앨범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평론가들이 헤비메탈이란 장르의 본질과 속성을
정의 내리는 일이 가능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Whole Lotta Love' by Led Zeppelin, 1969)
https://www.youtube.com/watch?v=V3u5rWzmhFI
- live from How the West Was Won, 2003
('Paranoid' by Black Sabbath, 1970)
https://www.youtube.com/watch?v=pTHeY0-P4MY
- live from The End Tour, 2016
('Highway Star' by Deep Purple,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Y2qZJ3BHzjY
- live from Come Hell or High Water, 1993
10년 여의 공식 활동 기간에 멤버 교체 없이 활동을 지속한
레드 제플린, 프론트맨 보컬을 교체할 때마다 작품의 방향이
탄력적으로 변모한 블랙 사바스와 비교하여, 딥 퍼플은 10년
좀 안 되는 전성기 시절에 총 4기로 구분될 만큼 멤버 교체
양상이 변화무쌍했고 또 각 기수마다 격변하듯이 음악의 색이
전혀 달리 뽑히는 특징을 보여준 밴드이다.
68~76년의 딥 퍼플 전성기 활동 기간 중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최정상이라고 누구나 인정하는 시기가 바로
제2기, Mk.II**의 멤버 구성이고 인기가 극에 달했던 이
2기 딥 퍼플을 이끈 리드 보컬리스트가 바로 이언 길런.
이분의 전성기 보컬 스타일링을 통해서 헤비메탈이라는
장르가 지향해야 할 음악성이 규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만큼 음악사에서 중요한 분인 셈..
**Mk.II = '마크 투'라고 읽는다. 코믹스의 아이언맨처럼..ㅎ
- 멤버 교체 시기로 구분하는 밴드의 역사를 이렇게 mark/기수
형태로 표시하기 시작한 효시가 딥 퍼플이라고 한다.
딥 퍼플의 출발점은 다소 어수선한 모양새였다. 짝퉁 비틀즈계
머시비트 밴드인 서처스의 드러머 출신 크리스 커티스란 이가
자신을 프론트맨으로 기용하는 밴드를 조직하겠다고 투자할
돈줄을 끌어모으며 각 스튜디오 최고의 세션맨들을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이 레이다에 맨 처음 키보디스트 존 로드가 걸려들었고 베이스의
닉 심퍼, 기타의 리치 블랙모어가 낚였다. 근데 정작 커티스가 약에
쩔어살던 불량품인지라 투자자들이 즉시 해고했고 이왕 모인 일급
세션들에 로드 에반스라는 보컬과 약관 18세의 드러머 이언 페이스를
결합해 아예 새로운 밴드를 만들어낸다. 블랙모어의 제안으로 이름이
정해졌으니 바로 딥 퍼플. 68년의 1기 멤버들인 게다.
*Deep Purple.. 원래는 1930년대 올드팝 히트곡의 제목이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Wll9RSCzoAI
1기 딥 퍼플은 커버 트랙 중심으로 히트 팝을 지향하는 사실상의
락앤롤 밴드였으니 1집의 Hush, 2집의 Kentucky Woman 등
팝 차트 히트 넘버들이 모두 리메이크였다. 오늘날 익히 알려진
딥 퍼플과는 몇 광년쯤 멀리 있는 음악 색이었던 셈. 그나마도
소속사의 막장 운영으로 3집이 돈도 못 벌고 쪽박 차게 생기니
결국 로드, 블랙모어, 페이스 셋이 주도하여 새로운 전략 하에
승부수를 띄워야겠다고 결심했다지.
하드락 밴드로의 변모가 그 주된 골자. 이미 마음이 떠난 상태이던
에반스를 떠나 보내고 심퍼를 교체하기로 한다. 이때 신생 밴드에서
노래하던 런던 출신 이언 길런과 베이스 치는 로저 글로버가 눈에
들어오고 블랙모어가 주동하여 새로운 라인업에 시동을 건다.
('Hush' from Shades of Deep Purple, 1968)
https://www.youtube.com/watch?v=_4QBhC1uCP4
- Joe South 곡의 커버
('Kentucky Woman' from The Book of Taliesyn, 1968)
https://www.youtube.com/watch?v=YcgeAtrVHvA
- Neil Diamond 곡의 커버
이 시기 음악은 대체로 41년생으로 가장 연장자이던 존 로드가
주도하는 모양새로 클래시컬 락 내지 프로그레시브의 원형질을
탐구하는 시기였다. 3집의 April이나 사이드 프로젝트였던 The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가 이런 성향을 대표한
작품들. 길런이나 동갑내기 블랙모어는 살짝 불만이었다고.
두 사람은 동시대에 더 후, 지미 헨드릭스, 크림, 레드 제플린이
선수치고 있던 하드하고 헤비한 어프로치를 가미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하며, 바야흐로 2기의 완전체로 본격 진용을 갖춘
딥 퍼플이 슬슬 8기통 엔진에 시동을 걸며 강렬한 신세계를
막 열어 젖히려는 역사의 순간이었다.
(Deep Purple III) (Deep Purple)
('April' from Deep Purple III, 1969)
https://www.youtube.com/watch?v=RaMmBH3pYxY
*사실상 프로그레시브 락에 가까운 형식이다.
(The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
('The Concerto for Group and Orchestra: First Movement
- Moderato-Allegro' by Deep Purple with Malcolm Arnold
and the Royal Philharmonic Orchestra, 1969)
https://www.youtube.com/watch?v=C6ay6BwgBS8
*실질적으로 Jon Lord의 솔로 프로젝트에 가까웠으나
공식적으론 라이브 앨범으로 분류한다.
- 로드는 정통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은 분.
('Nights in White Satin' by Moody Blues, 1967)
https://www.youtube.com/watch?v=qbqxbGm9hBI
*Days of Future Passed 앨범.
- 사실, 2년쯤 앞서던 이런 작품을 모방한 것..
하드락의 트렌드는 60년대 내내 꾸준하게 자가발전하고 있었다.
비틀즈와 롤링 스톤즈 등 1세대들이 원형을 제시하고 뒤를 이은
밴드들이 비르투오소 스타일 기교와 한층 헤비한 이펙트를 장착한
하드웨어의 구현에 힘입어, 서서히 그 작법을 체계화하고 있었다.
60년대 초반까지 락앤롤이던 팝 음악의 조류가 하드락이란 서브
장르로 분화하면서 3~5명 규모 밴드 포맷에서 중심 권한이 픽업을
장착한 일렉트릭 기타리스트 쪽으로 넘어온다. 여기에 보컬리스트,
베이시스트, 드러머, 리듬 기타리스트, 키보디스트 등의 각 멤버별
책임 영역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픽업을 통해서 나는 이른바 기타의 '생소리'는 카랑카랑하고
얇다란 편인데, 반전 히피 문화에 뿌리를 둔 사이키델릭 및 애시드
요소에 영향을 받으면서, 픽업의 시그널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변형한
각종 이펙트 - 이를테면 distortion, overdrive, phasing, feedback,
vibrato 등 - 를 덧입히게 되니 하드락을 규정하는 필수요소가 된다.
창작 방법론 면에선 기타 리프라는 개념이 돌출하였으니 해당 곡의
성격을 단번에 규정하는 상징적인 악절이나 동기를 가리킨다. 이
리프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작곡할 수 있는지가 기타리스트의 역량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어 버리고 리듬 기타, 베이스, 키보드 등 보조
파트가 리프의 패턴이나 코드를 백업하는 형태로 반주가 진화한다.
(WatchMojo.com '14, Top 10 Guitar Riffs of All Time)
https://www.youtube.com/watch?v=vt8Q8L_I1pw
- 단, 이분들 집계가 다 그렇듯이 순위는 염두에 두지 말자.
- 음악사상 꼭 기억해야 할 리프 몇 가지 알아놓는 의의 정도..
여기에 드러머가 킥 베이스와 스네어를 교차하며 강약의 패턴을
반복하는, 이른바 - 심장 박동과 유사하게 들리는 - 백 비트를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리듬을 받쳐주고, 베이시스트가 이 리듬 섹션에
동참하는 동시에 기타 리프의 패턴을 복사하며, 때때로 리듬 기타
또는 키보드가 한꺼풀 더 가미되는 식으로 곡을 구성하는 것이다.
하드락의 보컬리스트에게 요구되는 테크닉은 기존 팝 장르의 달달한
목소리와 여러 모로 다를 뿐 아니라 훨씬 고난도의 숙성과 장기간의
훈련을 요구했으니 shout, scream, growl, wail, vibrate, rasp 같은
공격적인 것들이었다. 대체로 남성 테너 음역을 넘어서는 고음역을
필수요소로 하게 되었고 때때로 팔세토나 이와 유사한 high register
영역이 보편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각 파트별로 정착하고 발전해간 하드락 장르의 방법론이 더욱
공격적으로 진화한 형태를 헤비메탈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고 60년대
말에 태동한 트로이카 밴드가 이를 주도한 장본인들이다. 딥 퍼플은
그 한 축이자 태풍의 눈이었던 아티스트들. 구체적으로 하드락 진화의
역사에 더 큰 관심이 생긴다면 아래의 음악을 좇아가길 권한다.
"Kinks", 1964
('You Really Got Me' by The Kinks)
https://www.youtube.com/watch?v=fTTsY-oz6Go
- studio album version
"My Generation", 1965
('My Generation' by The Who)
https://www.youtube.com/watch?v=qN5zw04WxCc
- studio album version
Single "Hey Joe / Stone Free", 1966
('Hey Joe' by The Jimi Hendrix Experience)
https://www.youtube.com/watch?v=rXwMrBb2x1Q
- studio single version
"Disraeli Gears", 1967
('Sunshine of Your Love' by Cream)
https://www.youtube.com/watch?v=f3y8jf01UY8
- studio album version
"Led Zeppelin", 1969
('Babe I'm Gonna Leave You' by Led Zeppelin)
https://www.youtube.com/watch?v=UyOg0mt2R2k
- studio album version
"Fire and Water", 1970
('All Right Now' by Free)
https://www.youtube.com/watch?v=5wiF6b4rxno
- studio single version, Paul Rodgers on vocals.
레이블의 삽질로 전작에서 거의 수익을 얻지 못한 딥 퍼플
2기 진용. 여러 프로젝트를 전전하고 돈벌기 위한 투어를
병행하며 틈틈이 새 앨범 녹음을 진행한다. 클래식 음악에
바탕을 둔 고상한 로드식 어프로치로 절대 답이 없다고 여긴
블랙모어의 반강제적 결단으로 제플린을 좇아가는 헤비한
작법에 집중했고 길런과 글로버도 이에 적극 동의했다.
(Deep Purple in Rock) (In Rock)
70년에 발매한 정규 4집 Deep Purple in Rock은 이렇게
전투적인 자세로 얻은 인고의 산물이자 참신한 상상력의
빛나는 결정체였다. 뒤에 나올 후속 앨범으로 해당 장르의
정점을 찍기 이전에는 헤비 사운드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걸작이라고 평단의 찬사를 얻었던 작품이다.
당시 반응도 폭발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평단과 언론이
더 깊이 평가하는 앨범인 듯하다. 영국의 하드락 및 헤비메탈
전문 매거진 케랑!이 89년에 시대를 초월하는 100대 헤비메탈
명반을 집계하며 15위에, 05년에 최고의 100대 브리티쉬락
명반을 집계하며 56위에 올려놓은 바 있다.
(Kerrang! '89, 100 Greatest Heavy Metal Albums of All Time)
- 텍스트 아카이브: http://www.rocklistmusic.co.uk/kerrang_p2.htm
- 그래픽 아카이브:
https://www.listchallenges.com/kerrang-the-100-greatest-heavy-metal-albums-of
(Kerrang! '05, 100 Best British Rock Albums Ever)
- 영국 아카이브:
http://www.rocklistmusic.co.uk/kerrang_p2.htm#British%20Rock%20Albums
- 네덜란드 아카이브: http://www.muzieklijstjes.nl/Kerrang100British.htm
영국 Q 매거진도 98년에 최고의 50대 70년대 명반을 집계하며
48위로 평가했고, 클래식 락 매거진의 06년 100대 브리티쉬락
명반 집계에선 13위를 차지했다. 이외에 05년 출간된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에도 물론 수록되는 등, 찬사가 줄을 이었다.
(Q Magazine '98, 50 Best Albums of The '70's)
http://www.rocklistmusic.co.uk/qlistspage2.html#70’s
(Classic Rock '06, 100 Greatest British Rock Albums Ever)
http://www.muzieklijstjes.nl/Classicrock100GreatestBritish.htm
(Robert Dimery '05,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
http://www.rocklistmusic.co.uk/steveparker/1001albums.htm
시작부터 강렬해 완전히 달라진 그들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
오프닝 트랙 Speed King. 이언 길런이라는 위대한 목소리가
폭발의 갈증에 목말라 하던 세상 만물에 완연히 현신하던 바로
그 순간. 왜 보컬리스트를 바꿨는지, 블랙모어는 왜 그토록
헤비에 목숨 걸었는지, 세상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수긍할
밖에 도리 없는 모멘텀이 도래한 것이다. 솔로잉 끝부분에 나온
길런의 초고음 스크리밍에서 가공할 전율을 느낄 터이다.
('Speed King' from In Rock, 1970)
*original studio album version
- 잼 같은 인트로 50초를 지나 Hammond 전주 등장.
- 3'27" 지나 더블 트랙 녹음한 guitar soloing.
- 4'07" 무렵부터 vocal screaming.
2위까지 올라 딥 퍼플의 역대 영국 싱글 차트 최고 기록을 달성한
Black Night는 앨범과 거의 동시에 발매한 리드 싱글이다. 본래
앨범에는 수록되지 않았으나 팬덤이 기억하는 전성기 딥 퍼플의
거의 초창기 히트곡이다. 글로버에 따르면 거쉬인 커버곡의 반주
베이스라인에서 힌트를 얻은 튠이라고.
('Black Night' from a single Black Night / Speed King, 1970)
- 다음 링크를 들어가면 어디서 모티브를 땄는지 알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tsMj0JD8N8
Child in Time. In Rock의 야수적 음악성을 대표하는 시그니처
트랙은 사실 이 곡 아니겠는가. 보컬 재현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길런 자신이 이미 수십 년 전에 라이브를 그만 둔 곡이기도 하다.
사회적 가사가 많지 않은 딥 퍼플 음악사에서 반전과 베트남전을
소재로 다룬 흔치 않은 트랙이다. 소이탄 피해로 전신 화상을 입은
소녀를 촬영한 종군 보도 사진과 연계해 상상해보면 클라이맥스
스크리밍이 무엇을 표현한 건지 나름 감이 올 것이다.
*Nick Ut, The Terror of War (1972)
- Pulitzer Prize Winner in 1973
('Child in Time' from In Rock, 1970)
*영국 TV쇼의 라이브 버젼. 전성기 전설적 실황.
- Blackmore가 Gibson ES-335로 녹음한 마지막 트랙.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UEjAaLu8Dhs
의외로 자유로운 그루브에 의존하지 않고 클래식처럼 정교하게
파트를 구분하던 블랙모어 및 로드의 성향을 읽을 수 있다. 해먼드
오르간에 레슬리 스피커, 마샬 앰프는 존 로드 전매 특허 사운드의
상징이 된다. 블랙모어는 이 무렵부터 깁슨 버리고 스트랫으로
완전히 갈아탄다.
(Lord)
(Blackmore)
영국 앨범 차트에서 4위에 올랐고 독일, 호주, 오스트리아에선
탑을 찍었으며 발매 당시에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골드를 기록했다. 최종적으로 현재까지 전세계 판매고
4백만 장을 넘어 명실상부한 성공작이다. 딥 퍼플은 이제야
확고부동한 스타덤에 오른 것이다.
('Into the Fire' from In Rock, 1970)
https://www.youtube.com/watch?v=gMbY45kFs7w
('Hard Lovin' Man' from In Rock, 1970)
https://www.youtube.com/watch?v=ziISNxMCC3M
(Glover, Blackmore, Gillan, Lord, Paice)
71년 공식 5집이자 2기 라인업의 두번째 앨범 Fireball은
길런을 제외하고 블랙모어 및 로드 등 나머지 멤버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작품이고 흥행 성적도 전작에 미치지는 못했다.
이리저리 투어 끌고 다니는 소속사 장단 맞추느라 스튜디오
작업에 할애할 여유가 없었다고.
(Fireball)
그래도 영국 앨범 차트 최초의 1위 기록을 포함해 독일,
스웨덴, 벨기에 등 8개국 차트 정상을 석권했고 프랑스,
호주 등 5개국 탑텐에 들어 미국 시장을 제외하고 세계적
지지를 얻은 성공작임은 분명했다. 세계 판매고는 3백만
장이 넘었고 미국에서 골드까지 기록했다.
('Strange Kind of Woman' from Fireball,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awGv_Go-smI
*studio album version
- 가사의 내용은 영 좋지 않다. 매춘부에 연심을 품은 소년의 성장기.
- boogie-woogie란 본래 20년대부터 인기를 끈 블루스의 서브장르.
Strange Kind of Woman은 전작의 Black Night처럼
앨범에 수록되지 않고 리드 싱글로 미리 발매된 케이스.
(미국, 캐나다, 일본에선 앨범에 수록되었다.) 영국 싱글
차트 탑텐에 올라 앨범에 대한 기대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잘 수행한 곡이고 블루스의 서브장르인 부기우기 모드를
맛깔나게 표현했다. 라이브에서 길런과 블랙모어가 주고
받는 애드립으로도 유명한 트랙이다.
*Strange Kind of Woman.
- 73년 뉴욕 라이브 버젼.
- 주고 받는 애드립은 3'40" 지나서 나온다.
타이틀 트랙 Fireball은 특이하게 에어컨 가동음으로 시작하여
로드가 극찬한 페이스의 투베이스 킥킹 패턴이 비트를 지배한다.
(아직 더블 페달이 나오기 전 시절이다.) 이들 음악 중 특이하게
기타 솔로 없이 베이스 및 키보드 솔로가 연이어 등장한다.
('Fireball' from eponymous album, 1971)
*studio album version audio + 'hand-sync' promo video clip
- 꽤 화제를 모았던 프로모션 영상인데 죄다 립싱크+핸드싱크...
- 제작 당시를 설명하는 Lord의 인터뷰가 덤으로 앞뒤에.. 돌아가시기 전.
- 세밀하게 보면 손과 음이 따로 논다는 걸 알 수 있고, 심지어 4분 55초쯤
Blackmore는 기타를 뒤집어 드는 만행을...ㅋ
라이브에서 페이스의 드럼 솔로와 이어지는 걸로 유명한 트랙
The Mule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영감을
받은 가사임이 정설이지만 악마 루시퍼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길런 본인이 코멘트한 바 있다. - 별 중요친 않다.
('The Mule' from Fireball, 1971)
Strange Kind of Woman이 영국 싱글 차트 탑텐까지 올라
기록을 이어나갔으나, 일부러 끈적한 그루브를 제거한 프로듀싱
스타일이 안 먹히는 탓인지 미국 시장 반응은 아직 그저 그러한
편이었다. 미국 빼고 유럽 반응은 물론 폭발적이었고. 일본도..
- 전 세계 판매고 1억 장이 넘는 딥 퍼플의 소비 시장 분포는
묘하게도 퀸과 비슷한 편이다.
('Demon's Eye' from Fireball, 1971)
*71년 서독 TV쇼 라이브
- 인트로에 등장한 Lord의 악기는 RMI 368X Electra-Piano.
일정이 촉박했던 전작에 비해 이번엔 한 달 정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길런이 투어 중 간염에 걸리고 하는 소동으로 스케줄이
약간 꼬였었거든. 그동안 심기일전하여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며
블랙모어는 다양한 창작의 모티브를 구상하게 된다. 가끔 다급한
중에 나오기도 하지만 무릇 명반이란 여유 속에 탄생해야 하는 법.
(Montreux, Switzerland)
요양할 필요도 있겠다, 기분 전환도 필요하겠다, 겸사겸사 밴드
전체가 스위스 몽트뢰로 출장을 떠났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유명한 고장. 이제 신보 녹음해야지. 카지노에 자리를 잡고 롤링
스톤즈의 이동식 녹음 스튜디오에 시동을 걸 준비를 했다. 프랭크
자파와 마더즈 오브 인벤션 공연이 끝나길 기다려 들어가려 했다.
어느 얼빵한 관객놈이 천정에 조명탄을 쏴버려 카지노 건물에 그만
불이 나버렸네. 난리가 났지만 제네바 호수 표면에 비친 화재 풍광은
또 한편의 장관이기도. 할 수 없이 옆에 임시 막사로 옮겨 녹음 좀
하려는데 소음이 너무 시끄럽다고 주민 신고가 들어온다네. 맙소사,
어찌어찌 하여 폐건물 호텔을 빌려 겨우 녹음을 진행했다.
- Smoke on the Water, Fire in the Sky.. Montreux.. 1971.
- 호텔 창밖으로 대략 이런 풍경을 감상하며 악상을 떠올리셨다고.
*Smoke on the Water. lyrics.
https://genius.com/Deep-purple-smoke-on-the-water-lyrics
새옹지마라 했던가. 일이 잘 되려면 사고 좀 나줘야 하고 예로부터
녹음할 때 귀신 나오면 그 노래 대박친다 했다. 락 역사상 공전절후의
명곡 Smoke on the Water는 대략 이런 뒷이야기를 가사로 구성한
밴드 모험담의 풍자적 송가였던 것이다. 기타 샵에서 제발 이 곡 좀
그만 쳐라, 영원불멸의 1위에 빛나는 바로 그 노래... 수록된 절대
명반, 72년 6집 Machine Head. 캬~~
(Machine Head)
(Classic Rock '06, 100 Greatest British Rock Albums Ever)
http://www.muzieklijstjes.nl/Classicrock100GreatestBritish.htm
전술했지만 본작으로 비로소 헤비메탈이란 장르가 독립하여
폭발적으로 시장 형성을 시작한다. 클래식 락 매거진의 06년
100대 브리티쉬락 명반 집계에서 26위를 차지하고, Q 매거진의
01년 시대를 초월한 50대 헤비 명반 및 04년 30대 클래식락
명반 집계에 선정된 이유가 바로 이것.
(Q Magazine '04, 30 Greatest Classic Rock Albums Ever)
http://www.rocklistmusic.co.uk/q_mojo_se.htm#Classic%20Rock
그뿐인가. 케랑! 매거진은 89년에 시대를 초월하는 100대 헤비메탈
명반을 집계하며 35위에, 05년에 최고의 100대 브리티쉬락 명반을
집계하며 34위에, 본작을 선정했다. 영국의 유력 일간지 가디언이
07년에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1000장의 앨범 중 하나로 뽑기도.
(Kerrang! '89, 100 Greatest Heavy Metal Albums of All Time)
http://www.rocklistmusic.co.uk/kerrang_p2.htm
(Kerrang! '05, 100 Best British Rock Albums Ever)
http://www.muzieklijstjes.nl/Kerrang100British.htm
(The Guardian '07, 1000 Albums to Hear Before You Die)
http://www.rocklistmusic.co.uk/guardian100.htm#1000%20Albums
완전 4도 음정인 파워 코드의 대명사로 왕년에 기타 만져봤다는
초짜들은 다 한번씩 쳐보는 리프... (점원의 정신 건강을 위해 제발
낙원동 가서 그만 좀 치라고들..) Smoke on the Water는 리프
하나 만으로도 음악사에 길이 남을 게다. Q 매거진이 05년에
100대 기타 트랙 명곡 랭킹에서 12위에 올린 바 있다.
- the legendary riff that you would already know by heart..
('Smoke on the Water' from Machine Head,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OSXkTm1iRQQ
*original studio album version
(Q Magazine '05, 100 Greatest Guitar Tracks Ever)
http://www.rocklistmusic.co.uk/qlistspage3.htm#Guitar%20Tracks
원래는 계획에 없었는데 이 곡이 세계적으로 왕대박을 쳐버리니
이듬해 개별 싱글로 발매하여 핫100 차트 4위까지 치고 올랐다.
롤링 스톤 매거진이 04년에 선정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랭킹에선 당당 434위를 차지했고. 기록도 풍년이로세.. 얼쑤~
(Smoke on the Water, single)
(Rolling Stone Magazine '04,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이와 함께 본작을 대변하는 시그니처 트랙으로 Highway Star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로드+블랙모어의 듀얼 솔로잉 전성기
극강의 연주력을 상징하고 일찍이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제시한
후기 바로크 화성악 스타일의 프레이징으로 유명한, 70년대식
밴드 연주력 측정기인 바로 그 명곡...!
('Highway Star' from Machine Head, 1972)
*original studio album version
- 오리지널은 박자가 느린 편이고 라이브에선 BPM을 높인다.
**네오클래시컬 메탈
- 일본과 한국 바보들이 한때 바로크 메탈 어쩌구로 불렀었으나 영어권
표현으로 neoclassical metal이 정확한 용어이다. 신고전파..
- 제팽글리쉬로 보이는 바로크 메탈이란, 존재하지 않는 말. 쓰지 마라.
뭐 이런 것까지 일본 바보들을 따라 해야 하남.
- 어쨌든 멀리 JS바하를 시조로 받드는 해당 서브장르가 이 곡을 효시로
한다는 점은 사실이다. 파생 상품 업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스웨덴의
Yngwie Malmsteen이다.
오버드라이브 잔뜩 걸어준 로드의 해먼드 인트로가 블랙모어로
넘어가는 Lazy는 7분여의 대곡이었는데 80년대엔 줄여서 짧은
버젼으로 라이브를 소화하곤 했다. 블루스 필이 강하고 길런이
하모니카 연주를 선보인다.
('Lazy' from Machine Head, 1972)
사이키델릭 냄새가 강한 Space Truckin'은 우주 여행 모험담을
풀어낸 노래. 로드가 ARP 신디 초기형을 도입해 링 모듈레이션
합성 방식의 프레이징을 인트로에서 선보였다.
('Space Truckin'' from Machine Head, 1972)
싱글로도 발매해 영국 차트 탑40의 준수한 성적을 거둔 Never
Before는 라이브 셋리스트에 희한하게 잘 올라오지 않는지라
오히려 팬덤이 희귀 넘버로 찾아다니는 트랙. 2기 이전 초창기
딥 퍼플 냄새가 살짝 나기도 한다.
('Never Before' from Machine Head, 1972)
현재까지 이 앨범의 세계 판매고는 7백만 장을 넘어섰고 발매
당시 빌보드 200 차트 7위에 올랐으며 현재는 미국에서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영불독 및 캐나다, 호주 등 9개국 앨범
차트 탑을 찍었고 이탈리아, 일본 포함 다섯 나라 탑텐에 든다.
딥 퍼플 타이틀 하의 커리어를 통틀어 이때가 최절정기였다.
('When a Blind Man Cries' from Machine Head,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ZLJ8XO7pBu4
- Soldier of Fortune 분위기를 미리 뽑아낸 숨겨진 발라드.
- 원래는 Never Before 싱글의 B면 트랙이었다.
(Blackmore, Gillan, Glover, Lord, Paice)
숱한 라이브에서 각기 다른 버젼의 애드립 프레이징을 창조하며
매번 색깔이 전혀 다른 무대를 만들어온 제2기 딥 퍼플이었지만
의외로 라이브 앨범에는 인색한 편이었다. 스스로가 만든 무대
사운드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
('Sympathy for the Devil' by Rolling Stones, 1968)
https://www.youtube.com/watch?v=qmppOF0_DHE
*live version from Get Yer Ya-Ya's Out!, 1970
하지만 음향 기술도 진보하고 있었다. 70년에 발매된 더 후 및
롤링 스톤즈의 라이브 명반 같은 경우 특히 이들이 가진 부정적
편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한 작업물이었다. 72년 8월에 일본
투어로 세 차례 공연이 잡혔는데 이때 연주 버젼을 녹음하여
결국 그들의 실질적인 첫번째 라이브 앨범을 출시한다.
('My Generation' by The Who, 1965)
https://www.youtube.com/watch?v=PoHCjHtHrVo
*live version from Live at Leeds, 1970
72년 Made in Japan. 롤링 스톤 매거진의 12년 독자 투표서
시대를 초월한 10대 라이브 명반 중 6위에 오른, Mk.II 전성기
최고의 기록을 담고 있다는 그 전설의 작품이다. 얼마나 대단한지,
딥 퍼플 디스코그래피에서 개별 판매고가 가장 높은 앨범이 다른
정규 음반 다 제치고 바로 이 작품일 정도. 8백만 장이 넘었단다.
(Made in Japan)
(Rolling Stone Magazine '12, Readers' Poll:
The 10 Best Live Albums of All Time)
본작은 레드 제플린의 The Song Remains the Same과 여러
면에서 비교될 수밖에 없었는데 동종 장르에서 라이벌 구도이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만 라이브를 대하는 근본 자세에서 두 팀이
전혀 다른 접근법을 취하기 때문이다. 라이브 준비는 개인 연습이
알아서 하는 것이고 실제 무대에선 즉흥적인 합으로 맞추는 것이
진짜 음악이라고 생각한 제플린에 비해, 딥 퍼플은 라이브의 합도
서로 칼같이 약속하고 연습한 플레이만 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
*Smoke on the Water. Made in Japan.
- 1972년 8월 15일 오사카. (유신 직전 광복절이군..)
Made in Japan은 그런 음악적 신조를 배경으로, 실력 면에서
최정점을 찍고 있던 2기 멤버들이 어쩌면 스튜디오 레코딩보다도
훨씬 더 정교할지 모를 연주 합을 들려주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모든 음악팬이 인정하는 최고의 라이브 앨범으로 거듭
재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 제플린 라이브에 대한 평가는 사실
그닥 좋지 못하다. 완성도 면에서 다소 성의 없다고... 퍼플 완승.
*Highway Star. Made in Japan.
- 1972년 8월 16일 오사카.
**Highway Star는 이후 라이브에서 하도 변칙 해석이 난무하여
원곡 버젼 연주를 듣기가 오히려 더 힘든 곡인데, 오리지널 버젼
연주를 스튜디오처럼 충실히 재연한 거의 유일한 아카이브이다.
*Strange Kind of Woman. Made in Japan.
- 1972년 8월 16일 오사카.
(Blackmore, Lord, Glover, Paice, Gillan)
한창 잘 나가던 딥 퍼플. 안타깝지만 균열의 조짐이 슬슬 나타났고
근본적 원흉은 돈벌이에 급급했던 소속사 매니지먼트였다. 휴가도
없이 투어와 레코딩으로 몇 년을 달리다 보니 다른 파트보다 몸이
악기인 보컬리스트에게 가장 큰 여파가 왔다. 길런의 육체 피로와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고 오늘날까지 문제가 되는 블랙모어와의
신경전도 이때 서로 싸우다 보니 싹이 트게 된 것이다.
(Who Do We Think We Are)
2기 황금 라인업의 마지막 작품 73년 7집 Who Do We Think
We Are는 그런 스트레스 전쟁의 산물. 이거 녹음할 때쯤 이미
길런은 탈퇴로 마음의 가닥을 잡은 상황이었다. 73년 6월 일본
투어가 끝나자마자 탈퇴서를 남기고 길런이 아예 음악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글로버는 직후에 해고 당했다. (제발로 걸어 나갔단
설도 있긴 하다.)
*'13 interview with Ian Gillan and Deep Purple.
https://www.rhino.com/article/stay-tuned-by-stan-cornyn-loudest-purple
- 2기 전성기가 오래 가진 못할 거라며 뿌리까지 뽑아 먹으려던 그들.
- 길런, 내가 매니저라면 "암것두 하지 말고 한 석 달 쉬어"라 했을 걸?
Woman from Tokyo는 본작이 남긴 거의 유일한 히트곡. 앨범
판매도 준수했고 차트 성적도 괜찮았지만 마치 혼이 나가듯이 곡
하나하나에 기백이 없어 멤버들이나 팬덤 모두 본작의 수록곡을
그닥 좋아하진 않는 듯하다. 황금의 Mk.II 라인업은 이렇게 역사
속 뒤안길로 사라진다.
('Woman from Tokyo' from Who Do We Think We Are, 1973)
('Rat Bat Blue' from Who Do We Think We Are,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6mQTDlQQ5RE
- 그나마 본작에서 이 곡 정도 건질 만하다는 평을 듣곤 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거니와 길런은 한동안 음악계를 떠나 지냈다.
호텔이나 모터사이클 등 몇 군데 사업 투자를 해보았지만 뜻대로
잘 되진 못했다. 다시 음악을 시작했는데 난데없이 재즈락으로
장르를 바꿔 이언 길런 밴드를 조직한다. 3장의 앨범을 냈지만
사실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punk시대에 재즈를 들고 나왔으니.
('Child in Time' by Ian Gillan Band,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pwkJo9_c3fM
*재즈 퓨전 스타일로 리메이크한 Gillan 자신만의 버젼.
- 부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것도 있고 상당히 끈적하게 바꿔 놓았다.
딥 퍼플은 보컬에 데이빗 커버데일, 베이스 및 보컬에 글렌 휴즈를
받아들여 제3기 라인업을 가동하고 있었다. 블루스와 funk, 소울에
더 가깝게 다가간 3기 라인업, 사실 꽤 괜찮았다. 동명의 앨범에서
걸작 트랙 Burn이나 또 다른 타이틀 트랙 Stormbringer 등, 수작
정도로는 평가할 만큼, 곡도 충실하게 잘 뽑혀 나왔었다.
('Burn' from eponymous album, 1974)
('Stormbringer' from eponymous album, 1974)
블랙모어 입장에선 새 멤버들로 채워진 funk 및 소울 분위기가 영
별로였다. 탈퇴하고 나와 로니 제임스 디오와 레인보우를 결성한다.
또 다른 당대 최강의 보컬리스트가 가세한 블랙모어 사운드는 한층
고강하고 고결해져 Man on the Silver Mountain 및 Stargazer
같은 수작 트랙이 양산된다. 판매고가 살짝 아쉬운 수준이긴 했다.
('Man on the Silver Mountain' from
Ritchie Blackmore's Rainbow, 1975)
('Stargazer' from Rising, 1976)
블랙모어가 없는 딥 퍼플은 - 나중에야 다들 깨닫지만 - 등뼈
큰 조각이 빠진 듯한 모양새였다. 토미 볼린을 영입하여 신작
앨범을 내지만 결국 전성기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다. 볼린과
휴즈가 마약에 빠져 밴드 분위기를 해치는 것이 큰 원인이었다.
76년 투어를 끝내고 딥 퍼플은 공식 해체를 발표한다. (볼린을
과대평가하는 일부 평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결국 팀을 깨뜨린 불성실 약쟁이일 뿐이다.)
(Paice, Hughes, Coverdale, Blackmore, Lord)
블랙모어는 그럭저럭 디오와 잘 하고 있었는데 예술적으로 워낙
변덕이 죽끓듯하는 사람이라 음악의 방향성을 놓고 디오와 의견
대립이 생기니 결국 멤버를 싹 다 갈아치운다. 1978년. 길런을
그 대체자로 영입할까 고려한 적도 한때 있었지만, 솔로 활동에
미련이 컸던지라 길런이 거절했다고. 아까비~ - 아이러니이지만
레인보우는 이후 교체 멤버로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
(Dio, Blackmore)
길런도 생각 잘 한 거였다. 다시 전공인 헤비메탈로 복귀하여
길런이란 밴드 타이틀로 앨범 작업을 시작하는데 영국 골드 및
실버 수준의 성공을 거둔 것. 일본에서 반응도 좋았다 한다.
78~82년에 6장의 앨범을 내고 그럭저럭 짭짤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단, 82년에 성대 결절로 갑자기 활동을
접어야 했던 흑역사도 겪는다.
('Mr. Universe' by Gillan,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3KvCAmPXwD4
('Future Shock' by Gillan,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C2mvWIByJ2A
1980년에 큰 소동이 하나 있었는데 돈벌이에 환장하던 어느
기획사가 1기 보컬 로드 에반스를 꼬드겨 대충 세션을 붙이고
딥 퍼플 재결성이란 제호에 공연을 추진한 것. 당연히 2~3기
멤버들 중심으로 소송전에 들어갔고 에반스는 거의 70만 불에
달하는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다고. 피해를 볼 팬들을 위해
진짜 멤버들이 '우리 안 나옴' 하고 신문에 광고까지 냈단다.
- Bogus Deep Purple & Real Ad..
3기 보컬이자 또 한 명의 레전드 커버데일은 딥 퍼플 해체 후
78년에 화이트스네이크를 결성해 80년 무렵부터 서서히 히트
동력을 높이고 있었다. 일찍이 로드와 페이스도 멤버로 참여해
힘을 모았으니 포스트 퍼플 프로젝트로 중요한 밴드였던 차...
(정작 이들의 전성기는 84년에 로드+페이스 나가고 난 직후
찾아오고 있었으니..ㅎ)
(Murray, Lord, Marsden, Moody, Paice, Coverdale)
('Here I Go Again' from Saints & Sinners, 1982)
*87년에 대박 친 버젼의 82년 오리지널 트랙이다.
앞서 78년에 레인보우를 떠난 디오는 블랙 사바스에 합류해
검은 안식일 제2의 전성기를 빚어내고 있었다. 토니 아이오미,
기저 버틀러의 프레이징에 동기화시키는데 최적화되어 있던
오지 오스본에 비해 디오는 다른 멤버의 백킹을 가로질러 뚫고
나오는 스타일이라 전혀 다른 헤비의 미학을 창조하고 있었다.
- 이 시기 명곡 Heaven and Hell이 디오, 아이오미, 버틀러,
그리고 빌 워드에 의해 멋드러진 향취로 주조되었다.
('Heaven and Hell' from eponymous album, 1980)
이렇게 괜찮았는데 다음 앨범 준비하면서 디오와 아이오미의
사이가 틀어지고 만다. 디오가 사바스와 솔로 프로젝트를 동시
진행하면서 스튜디오를 복잡하게 만들었다는 것. 디오가 떠나
버리고 후임으로 솔로 활동을 접고 있던 길런이 선임된다. 와..
*이때 길런을 사바스로 끌어들인 매니저가 돈 아든이라고, 이
무렵 오지 오스본 장인이 된 분이다.. 즉 샤론 오스본의 부친..
이 가족 이야기는 복잡하니 훗날 기회 있을 때...
(Butler, Gillan, Ward, Iommi)
(Born Again)
또 하나 역사에 남을 슈퍼그룹이 될 수도 있었던 이 프로젝트.
83년 블랙 사바스 공식 11집 Born Again 앨범으로 결실을
맺는다. 블루지하고 자유분방한 길런의 스타일이 사바스 및
아이오미 식 패턴과 맞지 않는다고 평단이 깠고 - 멤버들도
그렇게 느꼈지만 - 팬덤의 반응은 좋았다. 영국 앨범 차트
4위까지 가는 성공을 거둔다.
('Trashed' from Born Again, 1983)
('Hot Line' from Born Again, 1983)
여기까진 그래도 들어줄 만한데 아래 트랙들 들어보면 음울하고
짐짓 답답스런 사바스 정서가 낭만이나 자유로운 미학을 추구하던
길런 스타일과 확실히 어울리진 않음을 알 수 있다.
('Zero the Hero' from Born Again,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7i3URNHQuFo
('Keep It Warm' from Born Again,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MrGja48pfAY
여담이지만, 투어 돌면서 블랙 사바스 예전 트랙들 가사 외우는
데에도 된통 애를 먹었다고. 뭐든 다 잘 할 것처럼 보이는 전설의
보컬리스트 최대 약점은 가사 암기였다...ㅎ 딥 퍼플 때도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줄줄이 나올 정도..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서
중간에 까먹으셔도 팬들이 그러려니 하고 웃으며 넘어간다고.ㅋ
*Highway Star. 독일 TV쇼 '72. 전설의 가사 까먹기.
그런데 암기와는 별개로, 희한하게 작사는 즉흥적인 느낌을 좇아
또 기가 막히게 하시는 스타일... 사바스에서 작사 담당이던 베이스
버틀러와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아이오미가 짐짓 놀라셨다 한다.
사람의 두뇌에서 창작과 암기는 확실히 다른 영역의 기능인가 보다.
*15년 회고 기사, '사바스가 퍼플로 다시 태어났을 때'
헤비메탈 팬덤에게 83-84 시즌의 사바스/길런 조합이 크나큰
선물이었다면, 84-85 시즌에는 경천동지할 더 뜻깊은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MTV시대 헤어 메탈에 열광하던 미국의
새로운 하이틴 팬들에게 더욱 그러했으니, 전설적인 2기 라인업
딥 퍼플의 재결성이었다. 두두둥.
(Glover, Blackmore, Lord, Gillan, Paice)
예전처럼 닥달하던 사람들 말고 새로운 매니저 및 폴리그램과
재결성+신보 계약을 맺었다. 사바스고 자시고 간에 길런이 이
프로젝트로 득달같이 달려갈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2기 퍼플은
길런의 화려한 젊은 시절이자 마음의 고향이니까. 84년 공식
11집을 발매하는 그들. Perfect Strangers였다.
*각자 어디서 뭐 하다 달려들 오셨나...
- Ian Gillan : 별로 안 어울리던 Black Sabbath 3기 보컬 접고..
- Ritchie Blackmore : 판매 부진하던 Rainbow 막 해산시키고..
- Jon Lord : 잘 나가던 Whitesnake 때려치우고.. - 2기에 대한 애정.
- Roger Glover : Blackmore랑 Rainbow 하다 접고..
- Ian Paice : Gary Moore 밴드 접고.. - 거기보단 퍼플이 낫지.
(Perfect Strangers)
솔직히 앨범 자체는 크게 기대할 것이 못 된다. Knocking at
Your Back Door 및 타이틀 트랙 Perfect Strangers, 두
곡이 라이브의 고정 레퍼토리로 정착하긴 하나 그 이외 트랙은
정직하게 영 아니올시다 평가도 받았다. 그냥 전설들이 다시
뭉쳤구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의의를 둘 수 있을 뿐.
('Knocking at Your Back Door' from Perfect Strangers, 1984)
그런데 Reunion Tour는 사정이 달랐다. 시쳇말로 84~85년
당시 세계 공연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대사건 중 하나였다. 이에
필적할 만한 사건은 브루스 스프링스틴 대박 친 것 하나 말고
꼽을 수가 없을 정도.. (Born in the U.S.A.시절)
('Perfect Strangers' from eponymous album, 1984)
호주에서 투어를 개시해 북미와 유럽을 거쳐 남미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는데 특히 유럽 레그의 정점을 Knebworth Festival로
찍어 버렸고 문자 그대로 현지 언론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한다.
- 물론 당시 한국에선 몰랐지만... 이때 딥 퍼플의 수익은 앨범
판매보다는 투어에 전적으로 기댔다고. 돈이 중요친 않았지만..
*Deep Purple: 'Surprise of the Year', Billboard Magazine; May 1985.
- 얼마나 뜨거운 반응이었는가, 당시 빌보드 지 기사 아카이브.
- 원래 하루 공연으로 그칠 계획이었는데 연이어 매진을 기록하니
추가로 공연일 잡느라 진땀 뺐다는 행복한 뒷이야기.. 미국에서.
- 넵워쓰에선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8만 관중이 운집하여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퍼플도 이에 열정적 퍼포먼스로 화답했다는...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까지는 길런과 블랙모어의 앙숙
관계가 주된 화두였다. 길런이 쫓겨나면 블랙모어가 남고
(89년), 길런이 복귀하면 블랙모어가 나가 버리고(93년)..
팬덤은 뭐하는 짓거리냐며 성화고... 결국 블랙모어는 다시
돌아오지 않고 조 새트리아니를 거쳐 스티브 모스가 줄곧
원만하게 활동하며 투어 중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때
한국에도 공연을 오셨더랬다. 본 블로거, 현장에 있었고..)
*Highway Star, live in Seoul
- 1995년 3월 18일
(Deepest Purple: The Very Best of Deep Purple)
88년에 당시 소련이던 아르메니아에서 대지진이 발생해 많은
사상자가 나니 길런을 포함한 락 뮤지션들이 자선 프로젝트로
뭉쳤다. 이때 Smoke on the Water를 커버했는데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Smoke on the Water' by Rock Aid Armenia, 1989)
- (v) Ian Gillan, Bruce Dickinson, Paul Rodgers, Bryan Adams
- (g) Tony Iommi, David Gilmour, Brian May, Alex Lifeson,
and Ritchie Blackmore
- (k) Geoff Downes, Keith Emerson
- (b) Chris Squire
- (d) Roger Taylor
- etc. Jon Lord, John Paul Jones
이때 맺어진 길런과 아르메니아의 인연은 훗날 다양한 프로젝트로
결실을 이어나간다. Rock Aid Armenia 20주년을 기념해 09년에
아르메니아에서 토니 아이오미 및 제프 다운즈와 함께 공로 훈장을
서훈받았다. 이 조합에 2년 후 존 로드를 포함하여 제이슨 뉴스테드,
니코 맥브레인이 가세한 슈퍼그룹이 결성되니 후케어즈였다. 그는
아르메니아 자선 프로젝트에 지속적으로 참여했고 이 멤버 그대로
공연도 이어나갔다.
('Out of My Mind' by WhoCares, 2011)
93년에 길런/퍼플에서 갈라져 나온 블랙모어. 안타깝지만
이후엔 딥 퍼플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앞으로도 복귀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현재는 아내 캔디스 나이트와
포크락(!) 밴드 블랙모어s 나이트를 결성해 루츠 음악에 더
근접한 활동을 지속해오고 계신 실정... 아쉽긴 하다.
(Blackmore's Night)
68년 결성 후 페이스와 함께 줄곧 밴드를 지탱하며 실질적인
리더로 믿음직스러운 맏형이었던 로드. 멤버들과 많게는 열 살
가까이 나이 차가 지는지라 현역에서 물러나는 순서도 이 분을
기점으로 시작되었고 02년에는 스스로 딥 퍼플에서 탈퇴하여
돈 에어리에게 후임 자리를 물려주셨다. 장비 일체 포함...
해먼드 C-3와 레슬리 스피커, 마샬 앰프로 구성하는 로드만의
시그니처 톤은 그 자체로 하드락의 역사가 되었고 로드 자신을
키스 에머슨이나 릭 웨이크먼 같은 동시대 경쟁자들과 확연하게
구분 짓는 강한 차별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피아노의 그것과
전혀 다른 오르간 만의 레가토 주법이 중요하다는 점을 항상
강조하던 존 로드... 12년에 지병인 췌장암으로 별세하셨다.
*Perfect Strangers.
- Jon Lord 추모 콘서트
93년부터 추천 요건이 되었지만 딥 퍼플이 락앤롤 명예의 전당
자격 심사에서 매번 탈락하는 일은 큰 논란거리였다. 키스, 러쉬,
메탈리카, 건즈 앤 로지스 등 까마득한 후배들이 작심하고 비판을
쏟아냈고, 결국 늦었지만 16년에 드디어 딥 퍼플이 헌액 무대에
오른다. 길런, 블랙모어, 로드, 글로버, 페이스, 휴즈, 커버데일,
에반스... 여덟 명에게 영예가 주어졌다.
*Hush & Smoke on the Water. R&R Hall of Fame Induction.
- Jon Lord가 돌아가신지 4년 후.
- 키보드에 Don Airey, 기타에 Steve Morse.
- 현재 라인업을 존중하기 위해 Blackmore는 불참했다고.
- 멤버들 볼 면이 안 서는 Evans는 (당연히) 불참.
락 음악사상 가장 쿨하고 남성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하드락
및 헤비메탈의 장르 존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밴드, 딥 퍼플...
보컬, 기타, 키보드, 베이스, 드럼 각 파트마다 멤버 각자가 후배
뮤지션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일일이 다 언급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어마어마하다.
물론 이들에게도 비판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결국 70년대
전성기의 짧은 스타덤에 기대어 나머지 일생의 투어 수익을 올리는
올드보이들 아니냐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럼 비틀즈조차도 10년을
넘기지 못했는데 실질적인 상업적 전성기가 20년 이상 가는 대중
음악가가 과연 몇 팀이나 되냐고 반문하고 싶다. 30년 넘겨 히트작을
생산하는 아티스트는 딸딸 털어도 롤링 스톤즈, 폴 매카트니, 엘튼 존,
U2, 마돈나 말고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음악 산업의 가치 사슬이나
경기 순환 주기란 것이 그만큼 짧고 지속 가능 못한 것이 현실이니까.
또 총 1억 장이 넘는다는 딥 퍼플 디스코그래피의 세계 판매고 숫자가
몇몇 지표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이것은 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음악 산업 측정 지표란 것이 빅 데이터 통계량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한 시점이 80년대 이후인지라, 절반 이상의 판매고가 70년대에
몰려 있는 이들 상업 실적의 상당수 통계량이 오늘날 추적이 불가능한
상태로 사실상 소멸해버렸기 때문이다. 다이애나 로스, 클리프 리처드,
스콜피온즈, 오지 오스본, 톰 존스, 잭슨 파이브 등 70년대 이전 실적
지분이 큰 다른 아티스트도 같은 이유로 판매고 집계에서 상당히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전언이다.
어찌 되었든 실적 데이터에 관한 것 말고 음악적 기여도에 있어선
왠만해서 딥 퍼플을 까내리려 시도하는 용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했던 찬사를 반복하는 건 의미가 없겠고 그 시간에 멋진
음악이라도 하나 더 소개하는 편이 훨씬 현명하므로, 앞서 72년
Machine Head 앨범에서 각 파트별 밸런스가 어떻게 이렇게 딱
맛깔나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숨겨진 보석 같은 사례로서,
Pictures of Home을 추가로 제시하며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장담컨대 이렇게 멋진 음악을 제시할 수 있는 락 밴드, 예나
지금이나 결코 흔하지 않다.
('Pictures of Home' from Machine Head, 1972)
- Jon Lord 및 모든 멤버의 솔로잉이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특유의 scream 및 shriek 텍스처가 본연의 선굵은 마초 캐릭터와
어우러져 이언 길런이란 불세출의 보컬리스트가 탄생하게 되었고
후배 보컬리스트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
나이를 먹으며 스크리밍 음역은 점점 딸리는 것이 어쩔 수가 없을
테지만, 중후한 블루스 필로 채운 그 자유분방한 리릭 어프로치 만은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평단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지점은 작사가로서의 능력. 그는 평생 작품에서
비속어를 딱 한 번 썼을 만큼 건강한 시적 언어를 강조하는 편이고
흔히 헤비메탈 장르에 대해 대중이 가질 편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창작자이다. 모든 가사에서 시어의 선택 자체가 퍼커션을 조율하듯이
음악성을 근간으로 해야 한다는 지론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생각해보면 70~73년 겨우 서너 해 남짓 한 극전성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고 서서히 하강 그래프를 그려간 뮤지션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냉정한 평가도 내리고 싶다. 하지만 그 몇
해의 성과 만으로도 평생을 평가받기에 충분할 만큼의 족적을 남긴
셈이니 전성기 활동의 질적 완성도에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
브루스 디킨슨, 롭 핼포드, 폴 스탠리, 제임스 헷필드, 제프 테이트,
크리스 코넬, 에디 베더 등... 당장 보컬리스트로서 그의 직속 후임
계보에 들어갈만한 이름을 생각나는 대로 대충만 읊어도 이 정도다.
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느뇨...
*Highway Star. Perfect Strangers World Tour.
- 라이브 실력으로 완벽하게 끗발 날리던 피크 시절의 멤버들.
- Reunion Tour로 왜 공연계 돈을 쓸어담고 다녔는지 이해가 갈 게다.
- 4'33".. 한때 이렇게 애틋한 시절도 있었건만...ㅜ
이언 길런이 하드락의 울타리에서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후대
인류 문화사에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는 특이 지점은 69년말 매우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작업하던
시절. 존 로드의 클래식 협주곡 프로젝트가 이래저래 지겹고
한가롭던 차, 당시 성공의 열망에 부풀어 있던 젊은 뮤지컬
작곡가로부터 호출을 받아 스튜디오에 가봤는데...
아직 정규 딥 퍼플 음반이 나오기 전이었지만 어느 홀을 빌려
샤우팅 질러대며 리허설에 열중하던 길런을 멀찍이서 눈여겨
보고 있었단다. 저런 하이 노트가 가능한 보컬리스트가 있었군,
하면서. 악보를 건네며 일종의 카덴차, 즉 애드립으로 할 수 있는
구간이 여기까지라고 친절히 안내해주니, 길런은 그런가 보다
하고 원래 하던 대로 냅다 질러댔다. 성경 이야기의 무슨 컨셉트
앨범인 모양인데 내년 정도에 앨범이 나온다나 어쨌다나... 암튼.
젊은 작곡가의 이름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 이듬해에 발매한 그
희한한 컨셉트 앨범은 바로 이런 제목이었다. Jesus Christ
Superstar... 그렇다. 웨버 뮤지컬의 전성기를 열어제낀 대박
히트작의 출발선이 바로 이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설의
시작, 가공할 샤우팅 노트로 후대 뮤지컬 배우들을 무던히도
괴롭힌 악마적 프레이즈가 바로 그렇게 탄생한 것. 세상에..
(Jesus Christ Superstar)
뮤덕들 사이에서 하이G 겟세마네로 불리우는, Gethsemane
(I Only Want to Say). 로마군에게 체포되기 직전 예수의 최후
심경을 강렬한 하드락 비트에 실어 절규처럼 토한 마스터피스.
오늘날 모든 뮤지컬 배우를 멘붕에 빠뜨리는 초고음 샤우팅이
바로 이 트랙에서 등장한다. 평범한 성악 트레이닝에 익숙할
배우들이 당황할 수밖에. 오리지널이 헤비메탈의 조상 격인
보컬리스트셨는데.. 급 불쌍해지는 우리의 배우들..
본 블로거 생각하기에, 이미 한물 간 헤비메탈 어쩌구 차치하고
이 프로젝트로 길런이 남긴 문화적 유산이 아마 딥 퍼플 노래보다
훨씬 더 장구하게 인류사에 남지 않겠는가 전망한다. 오늘날의
문화 산업에서 헤비메탈과 뮤지컬은 교집합 규모도 작고 별로
연결될 것 없는, 딱히 상관없는 두 장르. 길런은 전혀 상관없는
두 개의 분야에 강렬하게 흔적을 남긴 음악가로 남는 셈이다.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걸작이 때때로 우연한 사고처럼
탄생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논할 때 길런과 웨버와 겟세마네의
이야기를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이후에 그는 결코
뮤지컬 세계로 돌아간 적 없고 - 한창 영화 찍을 때 딥 퍼플 월드
투어 중이었으니까 - 웨버도 이후 다시 하드락 장르로 돌아온 적
없다. 두 창작 집단의 젊고 피끓던 시절, 우연한 교차점 부근에서
역대급 걸작이 그야말로 우발적으로 탄생한 셈이라 하겠다.
무릇 인생과 예술이란 그러한 것. 화려한 전성기 시절 울트라급
성대를 자랑하시던 길런의 젊은 아우라에 흠뻑 빠져 보시기를
권유하며, 강력한 추천과 함께 금번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가련한 후대 뮤지컬 배우들의 발성 비교 영상은 덤이다.)
('Gethsemane (I Only Want to Say)' from
Jesus Christ Superstar, 1970)
- Ian Gillan on vocals
*Ted Neeley. 73년 영화에 길런 대신 출연하신 명배우.
*Jesus Christ Superstar
- 앤드류 로이드 웨버 & 팀 라이스 콤비의 처녀 히트작.
- 웨버-라이스 시대를 열어젖혀 공고한 초석을 다진 명작.
- 70년 락 오페라 컨셉트 앨범을 먼저 발표. 성공.
- 71년 웨스트엔드 뮤지컬 무대에 데뷔. 성공.
- 73년 뮤지컬 필름으로 제작 상영. 성공.
**배우들 비교질 동영상 - 가볍게 보시라.
https://www.youtube.com/watch?v=yfHt2YfRdSs
- 1'12" Ian Gillan, 70년 원곡 앨범의 가수. 원흉.
- 0'20" Ted Neeley, 73년 오리지널 영화의 배우.
-- 여기 두 분까지는 보통 언터처블 레전드로 분류되고..
- 0'55" Gary Cherone, Extreme의 보컬. 근데 별로다..
- 2'09" Sebastian Bach, Skid Row의 보컬. 더 별로다..
-- 여기 없는데 뮤덕들이 꼽는 역대 최악은 John Legend라고..ㅜ
-- 보통 Steve Balsamo는 현역 최고로 친다고.. 동의하시는지?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존 웨이트 John Waite (0) | 2021.08.10 |
---|---|
브래드 델프 Brad Delp (0) | 2020.02.09 |
데니스 드영 Dennis DeYoung (0) | 2020.01.10 |
보노 Bono (0) | 2019.12.07 |
게디 리 Geddy Lee (0) | 2019.11.09 |
그의 아름다운 음악을 찬양하는 일은 쉽지만 불행으로 끝난
그의 인생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긴 쉽지 않겠다. 허나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 보스턴 Boston과 함께 톰 숄츠
Tom Scholz를 언급하며 그를 건너뛰고 갈 수는 없으므로,
최대한 담백하게 논평해보겠다. 아메리칸 하드락 씬에 찬연히
빛났던 하이테너, 브래드 델프 Brad Delp 이야기이다...
*More Than a Feeling. 79년 뉴저지 라이브.
*Amanda.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Foreplay / Long Time. 79년 뉴저지 라이브.
*Rock & Roll Band.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A Man I'll Never Be. 79년 뉴저지 라이브.
보스턴의 시작과 끝은 탁월한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
엔지니어인 동시에 발명가 창업자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박사 출신 톰 숄츠로 귀결된다. 사실인즉슨 밴드 보스턴
자체를 숄츠의 원맨 밴드로 정의해도 거의 할 말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이 절대적이긴 하다. - 원래 숄즈라고
표기해야 옳긴 한데 관습적으로 숄츠가 더 널리 퍼져서...
MIT 석사 졸업 후 즉석 사진으로 유명한 폴라로이드 사
연구원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47년생 도널드 토머스
숄츠가 자기 집에 녹음 스튜디오를 차리고 밴드 프로젝트를
시작한 시점이 일의 시작이었다. 기타리스트 배리 구드로,
베이시스트 프랜 쉬언이 세션으로 불려왔을 때 매사추세츠
토박이 51년생 브래들리 에드워드 델프 역시 보컬 제의를
함께 받아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1970년경.
기타, 베이스, 키보드, 송라이팅, 프로듀싱 등 나머지 모든
파트를 맡아 북치고 장구치던 숄츠가 저 멤버들을 규합해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고 레이블마다 퇴짜를 맞으면서도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약 5년만에 에픽 레코드와 계약을
성사시켜 데뷔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이때 데모에 들어간
곡들이 곧 전설적인 첫 앨범의 트랙으로 자리잡았다.
(Boston)
('More Than a Feeling' from Boston, 1976)
*Boston은 뉴욕 데뷔 무대가 무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었다.
76년, 미국 대중 음악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전설적
데뷔 앨범 Boston이 발매된다. 자그마치 1천 7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았고 빌보드 200 차트
3위까지 기록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이듬해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신인상 후보 지명의 성과를 낸, 바로 그 앨범이다.
('Peace of Mind' from Boston, 1976)
- 핫100 차트 탑40에 오른 세번째 싱글.
*More Than a Feeling.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SSR6ZzjDZ94
1970년대 밴드 낭만의 시대를 상징하는 영원한 락 앤썸
More Than a Feeling이 수록된 앨범이기도 하다. Peace
of Mind, Foreplay / Long Time, Rock & Roll Band,
Smokin' 등 연이은 트랙들이 줄줄이 시그니처 트랙으로
자리잡아 버릴 곡이 없는 명반으로 기억되는 앨범이기도..
(Rolling Stone '04,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 이건 04년 archive. '10년 업데이트에선 랭크에 실패했다.
- 10년에 업데이트된 새 랭킹.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500-greatest-songs-of-all-time-151127
(The List of 'The Songs That Shaped Rock and Roll'
selected by the Rock and Roll Hall of Fame, '04)
https://www.infoplease.com/arts-entertainment/music/500-songs-shaped-rock
데뷔 싱글 More Than a Feeling은 핫100 차트 탑5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롤링 스톤 매거진이 04년에 집계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랭킹에도 당당히 오른, 70년대
시대 정신의 산물인 시그니처 트랙. 락앤롤 명예의 전당이
'락앤롤 장르를 형성한 명곡'을 선정할 때도 당당히 올랐다.
('Foreplay / Long Time' from Boston, 1976)
*2' 25"까지 Foreplay. 키보드 솔로는 Hammond M-3로 연주.
**이 곡의 기타 솔로는 Barry Goudreau의 솜씨이다. 꽤 하지?
프로그의 영향을 받은 키보드 솔로잉이 작렬한 Foreplay와
통상적인 하드락 모드의 Long Time이 접속한 3번 트랙은
본작을 상징할 대표 트랙이며 여느 신인 아티스트와 비교를
불허하는 숄츠/보스턴 만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걸작일 터. 평단이 예스와 제플린이 결합했다고 칭송했고
핫100 차트 탑40에 올랐다. - 숄츠의 송라이팅은 야드버즈
및 킹크스에 클래식의 영향을 가미한 거라 한다.
('Rock & Roll Band' from Boston, 1976)
*이 트랙의 드러머는 Jim Masdea.
- 이 곡을 제외한 전 트랙의 드러머는 Sib Hashian.
**Boston 공연은 대개 이 곡을 오프닝 트랙으로 해 시작한다.
완전한 무명의 신인 밴드로서 일찍이 존재한 적 없던 엄청난
성과를 거둔지라 Boston 앨범이 미국 음악계 전체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고 9백만 장 판매 인증을 받은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그 여파가 진정되는 기미를
보일 정도였다. - 86년을 넘어서며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고
현재까지 판매고는 미국 1천 7백만 장, 세계 2천 5백만 장..!
('Smokin'' from Boston, 1976)
*이 곡의 Hammond 솔로잉도 꽤 유명하다. Tom Scholz.
블루스 기반의 메탈 원형질에 국한되던 아메리칸 하드락의
제멋대로 70년대식 격정적 흐름이, 정교한 주법과 기술적
지원에 힘입어 파워 팝 형태로 승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앨범이라고 보통 평가한다. 일부 평단에선 Boston 앨범으로
인해 이후 락 음악이 야성미를 잃은 채 프로듀서 체제의 잘
다듬어진 상품으로 전락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까기도 한다.
(Robert Dimery '05,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
http://www.rocklistmusic.co.uk/steveparker/1001albums.htm
완벽주의 성향의 톰 숄츠란 거인, 그리고 그를 도운 브래드 델프 등
재능있는 뮤지션들이 결합하여 빚어낸 시너지가 음악사의 물줄기를
틀어버린 것이다. 05년에 출간된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중 하나로도 선정되었다고. 어떤 경로든지, 한 번은 꼭 들어 보시라.
*Smokin'. 77년 캘리포니아 라이브.
https://www.youtube.com/watch?v=kumK8yor1ow
(Don't Look Back)
('Don't Look Back' from eponymous album, 1978)
- 풍요와 낭만에 가득 찬 미국의 70년대가 보이는가...
본래 Boston 앨범을 준비할 때 소속 레이블인 에픽 레코드는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제작할
것을 조건으로 했지만 숄츠는 과감하게 이를 생까고(..) 자기 집에
만든 스튜디오에서만 작업했다. 두번째 앨범에서도 숄츠는 이런
프로세스를 고집하여 그만의 페이스에 따라 제작에 들어갔는데...
('A Man I'll Never Be' from Don't Look Back, 1978)
*Brad Delp, 피아노도 함께 연주하시고 Scholz는 무대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 Delp 관점에선 이때가 보컬의 최전성기인 것 같다.
78년에 발매한 2집 Don't Look Back은 숄츠가 최대한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천천히 제작해보려 레이블과 신경전을 거듭한
끝에 나온 수작 앨범이었으나 숄츠 입장에선 군데군데 여전히
불만인 채로 작업을 끝낸 셈이었다고.
*Don't Look Back.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AzNL-4sz95I
하지만 동명의 타이틀 트랙 Don't Look Back이 핫100 차트
탑5에 오르고 발라드 A Man I'll Never Be와 하드락 넘버
Feelin' Satisfied가 후속 싱글로 히트하며 전작의 성공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결과를 선사해주었다.
*A Man I'll Never Be.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PqsHWnDBS0Q
전반적으로는 Boston의 작법을 그대로 이어가며 파워 팝의
사조를 더욱 굳히는 듯한 모양새의 앨범이었다. 상업적으로는
전작의 성과 절반 정도 판매고에 불과했지만 전작이 워낙
괴물같은 성공이었으며 최종적으로 7x플래티넘 인증까지
기록했고 빌보드 200 차트 탑까지 찍었으니 외려 실패가
아닌 성공임이 분명했다. 보스턴은 이제 공연을 선도하는
거물 투어 액트로 훌쩍 성장해 있었다.
('Feelin' Satisfied' from Don't Look Back, 1978)
본작의 진짜 숨은 의미는 따로 있었다. 제작 과정에 불만을
품게 된 숄츠와 에픽 레코드의 지리한 신경전이 극에 달해
급기야 향후 몇 년에 걸쳐 법정 소송전까지 가는 상황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시발점이 바로 DLB 앨범이란 점이다.
('Party' from Don't Look Back, 1978)
*라이브에서 팬덤이 매우 열광하는 히든 트랙이다.
(Barry Goudreau)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DLB 앨범 전미 투어를 종료한 후 79년부터
숄츠가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근데 에픽 레코드 및 모회사인
CBS가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물론 숄츠와 레이블 간의 까다로운
신경전은 앞에 썼듯이 DLB 앨범 때부터 시작한 오래 된 문제였다.
제작에 시간 좀 걸리겠다 판단한 숄츠는 델프 등 멤버들을 모아놓고
'계약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다른 돈벌이 해라' 하는 나름 대범한
조처를 취해준다.
배리 구드로, 시브 헤이쉬언과 함께 브래드 델프 등, 오리지널
보스턴 라인업의 멤버들이 80년 구드로의 솔로 앨범 프로젝트로
모인다. 누가 봐도 보스턴과 판박이인 구성인지라 팬덤에선
사실상 보스턴 아류로 인식하지만 물론 숄츠 본인은 정통성을
승인하진 않는다.
('Dreams' from Barry Goudreau, 1980)
*Brad Delp (vocals), Barry Goudreau (guitars), Sib Hashian (drums).
당최 이게 보스턴이지 원..
그리하여 80년에 Barry Goudreau 앨범이 발매되고 소폭의
마이너한 히트로 매니아 팬덤을 형성한다. 누가 들어도 앨범의
사운드 퀄리티는 보스턴 사운드의 재판이었다. 델프 말고도
먼 훗날 보스턴에 가담하게 되는 프랜 코즈모가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 델프가 보컬을 맡은 Dreams가 소폭 히트하였다.
그 사이 숄츠는 여러 모로 머리 아팠다. 레이블과의 분쟁이
급기야 소송으로 비화하고 숄츠 vs CBS의 저작권 및 제작권
법정 공방이 개시해 지리한 몇 년을 소모했다. 먹고 살 방편
때문인지 (취미 생활이기도 하고) 숄츠가 기타 이펙트 개발
전문 회사를 설립하여 자신의 발명품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소위 Rockman amplifier.. 인기 제품이다.
(Rockman Amplifier)
(Orion the Hunter)
구드로의 솔로 앨범을 그럭저럭 마무리하고 보스턴의 3집
준비가 아직 더딘 상황이라 델프는 동료들과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구드로 중심으로 뭉친 프로젝트 그룹
명의의 84년 앨범 Orion the Hunter가 그것.
이번에도 큰 히트는 기록하지 못하고 소규모 매니아 팬덤을
형성하는데 그치지만 델프의 목소리가 여전히 현장과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미국 시장에서 So You Ran,
한국에서 Joanne이란 곡이 소폭 히트하였다.
('Joanne' from Orion the Hunter, 1984)
(Third Stage)
소송은 숄츠의 승소로 매듭지어져 정식으로 레이블을 옮긴다.
이미 몇 년에 걸쳐 찬찬히 준비해오던 데모 버젼들을 정리하여
86년에 드디어 3집을 발매한다. Third Stage.. 보스턴 및 톰
숄츠에게 사상 최초로 핫100 차트 탑을 선사한 시그니처 트랙
Amanda를 수록한 바로 그 앨범이다. 아만다~
('Amanda' from Third Stage, 1986)
*첫 싱글이고 대표 트랙인데도 공식 뮤직 비디오를 찍지 않는 등
당시 트렌드를 따르지 않고 히트한, 이례적 기록을 남겼다.
- 고로 현재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상물은 모두 팬덤이 제작한
비공식 뮤비들이다.
3집을 얻기 위해 소송이다 뭐다 해서 고생한 여파 때문인지 새
앨범이 종전보다는 사뭇 진지해지고 다소 침울해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숄츠 본인이 70년대에 방법론을
확립한 파워 팝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우주 탐사 로켓 이야기를
하나의 틀 안에서 연결한 컨셉트 앨범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빌보드 200 차트 탑을 찍었고 최종적으로 4x플래티넘을 기록한다.
('We're Ready' from Third Stage, 1986)
파워 발라드 Amanda는 본래 80년대초 2집 투어 마치자 마자
작곡해둔 곡인데 뒤늦게 빛을 보게 되어 보스턴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되었다. 또 핫100 차트 탑텐에 오른 We're Ready,
메인스트림 락 차트 상위에 랭크된 Cool the Engines, 탑40를
기록한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
앨범의 마지막 트랙 Hollyann, 팬덤이 특별한 애정을 보여준
I Think I Like It 등 줄지어 많은 곡이 사랑을 받았다.
('The Launch' from Third Stage, 1986)
*로켓 발사 및 3단 분리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연주곡.
- 앞뒤의 We're Ready 및 Cool the Engines와 이어져
우주 개발이란 컨셉트 스토리를 완성하는 것..
전작들만큼은 아니어도 명실상부한 80년대의 히트 앨범임에는
틀림없다. 구드로는 공식적으로 제작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쉬언과 헤이쉬언도 제작 초기 단계에만 참여한
걸로 되어 있어, 전작에서부터 이어지는 멤버는 델프가 유일하다.
거의 전곡의 드러머로 짐 매즈디어가 다시 연주해줬고, 다른
기타리스트로 새미 헤이거 투어 연주자 게리 필이 참여했다.
('Cool the Engines' from Third Stage, 1986)
완벽주의 성향과 그밖의 잡다한 문제들이 얽혀, 스튜디오 앨범
사이 제작 주기 간극이 엄청나게 벌어지기 시작한 신호탄의
작품이기도. 전작의 8년이 지나 발매되었는데 차기작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리게 되고, 이런 점은 그냥 숄츠/보스턴의
전매특허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I Think I Like It' from Third Stage,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3tD2Id2T4jU
*Gary Pihl on guitars.
('To Be a Man' from Third Stage,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CLkuXEeQNrE
*88년 뉴욕 라이브.
(Return to Zero)
Third Stage Tour를 끝내고 4집 준비에 착수하던 숄츠. 델프가
갑자기 나타나 다른 프로젝트가 잡혀서 잠시 탈퇴를 선언한다.
선선히 그러라 하고 - 그래봤자 어디 가는지 뻔히 알겠고 왠지
느낌상 다시 돌아올 것 같으니까 - 그를 대신할 보컬리스트로
예전에 배리 구드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찌르는 샤우팅에 능한
프랜 코즈모를 영입하시는 숄츠.
델프는 좋게 보자면 담백하고 우직한 분이셨고 쉽게 말해 마당발은
아니셨다. 아는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 뻔할 뻔 자로, 지금까지 쓴
내용으로 짐작하셨겠지만 델프를 꼬셔낼 만한 프로젝트를 들고
올 사람은 구드로 및 옛 보스턴 멤버들 정도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 아직 뜨지 못한 - 구드로가 노래 잘 하는 델프를 구슬른 것.
RTZ란 프로젝트 그룹으로 다시 돌아와 91년에 Return to Zero,
곧 그룹명의 앨범을 내는 그들. 구드로는 꽤 재능있는 연주자이긴
하지만 숄츠만큼의 독창성을 가진 아티스트는 아니었는지, 이번
작품도 소소한 마이너 히트에 그쳤다. 델프 보컬의 호소력이 담뿍
드러난 파워 발라드 Until Your Love Comes Back Around
정도는 한때 히트했다.
('Until Your Love Comes Back Around' from Return to Zero, 1991)
*Brad Delp가 관여한 곡의 뮤비 중에 완성도가 가장 높을 듯.
(Walk On)
물론 숄츠와 델프 사이에 묘한 마찰과 긴장이 올라와서 델프가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도 있긴 하다. (녹음 스튜디오에 가끔
놀러와서 일부 곡에 자기 흔적도 남긴 거 봐선 낭설 같지만...)
어쨌든 코즈모를 데리고 제작을 시작해 94년에 4집 Walk On
발매를 밀어붙인다.
('I Need Your Love' from Walk On, 1994)
보컬이 바뀌어서인지 얼터너티브 시대에 뒤떨어져서인지, 앨범
전체 성과는 그저 그랬다. 플래티넘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탑40
이상 가는 히트 싱글을 만들지 못했다. 그나마 I Need Your
Love 및 Livin' for You 정도 트랙이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이듬해 투어 시작 전에 델프가 복귀한다.
('Livin' for You' from Walk On, 1994)
https://www.youtube.com/watch?v=WaU0n3MLtlw
(Greatest Hits)
다음 앨범 들어가기 전 97년에 첫 컴필레이션 앨범 Boston:
Greatest Hits를 발매하는데 라이브를 주름잡아 팬덤의 트랙
충성도가 높으니 컴필레이션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려 더블 플래티넘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The Star-Spangled Banner / 4th of July Reprise'
from Greatest Hits, 1997)
https://www.youtube.com/watch?v=u8QkNJ8B-JU
미국을 대표하는 밴드이니만큼 약간 국뽕 캐릭터도 있어서
라이브에서 국가를 하드락 버젼으로 자주 연주하던 차, 본
앨범에서 그 인스트루멘탈을 정식 트랙으로 수록하여 꽤
눈길을 끌기도 했다.
(Corporate America)
02년엔 다시 돌아온 델프와 다른 후배 보컬리스트 등을 규합해
5집 Corporate America로 돌아온 숄츠/보스턴. 상업적인
성과는 이전에 비해선 극히 미미해 별다른 히트곡을 양산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닥칠 불행한 미래로 인해 델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규 앨범이란 의의는 갖는다.
(Delp)
(Scholz)
*사망 당시 현장 정황에 대한 보도.
https://www.guitarworld.com/news/brad-delp-details-emerge-about-his-tragic-suicide
*숄츠와 언론의 소송전, 그리고 불편한 진상에 관한 보도.
https://ultimateclassicrock.com/brad-delp-suicide-lawsuit/
07년 3월 9일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에서 비보가 날아든다.
브래드 델프가 사망했다는 것. 그것도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사인에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다고 한다. 즉 바베큐용 숯불을
피워놓고 자살했다는 말...ㅠㅠ
이미 자살 규명에 대해선 사법 당국의 수사가 완료하여 다른
가능성을 전혀 따질 수 없으니 문제는 무엇이 그를 자살로
몰았는가 하는 쪽으로 세간의 이목이 전환된다. 유족과 일부
언론이 지저분하게 얽혀 억측 기사가 난무하니 각종 폭로전
및 명예훼손 소송으로 사건이 발전하기까지 한다.
유족 일부는 한때 제기된 델프와 숄츠 사이의 반목이 원인이라
지목했고 이를 보도한 언론과 유족을 상대로 숄츠는 정식으로
명예훼손 제소를 건다. 물론 불법행위 혐의가 드러나진 않는 걸로
대법원이 최종 각하하여 마무리는 되었으나... 그럼 도대체 자살
원인이 뭐냐고 대중이 반문하던 차에...
놀라운 곳에서 은밀한 내막이 드러난다. 약혼녀의 언니가
객식구 성격으로 델프와 한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망 몇 일
전에 언니 방에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었음을 발견했고 언니
남자친구가 델프를 추궁하니 잘못을 시인했다는 것. 아이고.
아마도 몇 일 후에 약혼녀를 직접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 잠깐 동안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것으로... 현재 입장에서 드러난 최종 결론은
이러하며 이 이상 더 파봤자 망자의 명예만 더 깎일 뿐이니
대충 여기서 접자는 것이 미국의 일반적인 여론 추세이다.
몰래 카메라 설치 이유에 대해선 약혼녀가 바람 피우는 정황을
잡기 위해서란 설이 있는가 하면 흔히 할 수 있는 지저분한
상상 그대로 변태 성욕 때문이란 설까지 난무하지만... 바로
그 진실을 밝힐 주인공인 약혼녀와 만남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델프가 사망했으니 사실 확인할 길은 요원할 따름이다.
어찌 되었든 40년 가까이 밴드 보스턴의 목소리로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국적 하드락의 보이스를 대변해온 브래드 델프...!
그의 독창적 하이테너 목소리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점만이 중요할 터... R.I.P..
*I Think I Like It.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We're Ready.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Cool the Engines.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Don't Look Back. 79년 뉴저지 라이브.
*Peace of Mind. 79년 뉴저지 라이브.
*Giants Stadium Concert NJ. June 17,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7SSrZjSoRj4
- full version (video)
*The Centrum Concert MA. August 13,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E9bhmgiVjNM
- full version (audio)
*Hamilton Ontario Concert (Canada). 1988
https://www.youtube.com/watch?v=zcbNNuEzH2M
- full version (bootleg video)
톰 숄츠 중심의 밴드 보스턴이 아메리칸 하드락의 트렌드를
바꾸었고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성적을 거두기는 했다만 절대
과대평가는 금물이다. 보스턴의 팬덤 베이스는 미국과 캐나다
정도가 고작이고 북미 경계를 벗어나서 세계구급 히트를 누린
대형 액트라 보기는 어렵다. 미국과 캐나다를 합한 역대 판매
성적이 3천만 장을 살짝 웃도는 정도..
그런 와중에 실질적으로 보스턴의 사운드 중 절반을 차지할
만큼 상징적인 보이스 컬러의 브래드 델프가 가진 위상은 리더
숄츠의 절대적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음이다.
디지털 드림 도어 랭킹에서도 델프의 가치를 꽤 높게 쳐주는
편이고 상대적으로 기타리스트 숄츠보다 더 높은 편이기도.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Vocal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html
팔세토나 카운터테너라고 오해를 많이 사는 델프의 보컬 스타일에
관해선, 하이 테너와 알토 테너의 중간 위치에 하드락에 흔치 않게
가성이 많이 섞인 깨끗한 소리라고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목소리들은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체력 저하로 급격하게
파워가 딸리게 마련인지라, 델프 보컬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80년대말 이전 라이브에 집중하는 것이 사실 좋다.
보통 흉성과 반가성의 거친 소리를 선호하는 미국 락씬에서도
델프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데에 대부분의
음악 팬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아왔고 보스턴 파워 팝이 지닌
대중적 음률 및 70년대 정신과 극강의 조화를 이루어 일정한
연령대 이상 세대에게 상당히 향수를 자극하는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강하게 굳어온 듯하다.
사운드 메이킹에 일가견이 있는 톰 숄츠의 음악 실력에 관해선
한때 상당한 과대평가가 섞여 갖가지 루머를 양산한 적도 있긴
했다만, 전반적으로는 이펙트 뽑아내는 기술력에 비해 주법의
특이성이나 특히 리프를 빚어내는 창조성에 있어선 여느 연주자에
비해 다소 밀린다고 보는 편이 정설에 가까운 것 같다. 보스턴
음악을 떠올릴 때 특별히 귀에 남는 리프는 딱히 없지 않나...
(아, More Than a Feeling은 예외..)
갑자기 델프를 잃은 숄츠는 이후에 예전에도 그랬듯이
프랜 코즈모나 스트라이퍼 출신 마이클 스위트 등 다른
보컬리스트를 번갈아 기용하며 올드팬과 만나는 공연
스케줄을 이어오고 있다 한다. 델프 이외에 딱히 한 사람
지정된 보컬에 꽂히진 않은 듯하다.
*1980년대 브래드 델프와의 TV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FimeJJQVglQ
*Amanda. Michael Sweet & Tommy DeCarlo on vocals.
https://www.youtube.com/watch?v=CFRxqGOBGYM
- Brad Delp 사후엔 이 두 분 중심으로 그럭저럭 하는 듯.
*Tommy DeCarlo story on TV.
https://www.youtube.com/watch?v=9rbX0xITFxA
- DeCarlo는 보스턴의 아넬 피네다 같은 분. 아마추어였다가
인터넷으로 발탁되셨다 한다. 전엔 마트 매니저였다고..
('Honestly' by Stryper,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w6IvUOZBZME
*Michael Sweet on vocals.
- 마이클 스위트의 전직은 헤어 메탈 아티스트였다.
본 블로거가 꼽는 숄츠/보스턴 하의 델프 최고의 노래는 Third
Stage 앨범 중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이다. DLB 앨범의 A Man I'll Never Be에서 이어진
파워 팝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법이면서도 훨씬 세련되고 처연한
정서를 깊게 느낄 수 있어 항상 좋아하는 곡이다.
스튜디오 앨범 버젼과 함께 87년 Third Stage Tour 중
매사추세츠 주 워스터의 센트룸 아레나 공연 오디오 실황을
링크로 걸며 본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브래드 델프를
그리워하는 올드팬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
from Third Stage, 1986)
*studio album version.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 원키 E flat에서 하나 낮춘 D major.
- 위아래 두 트랙을 연이어 들으면 앨범 버젼과 같다.
*Still in Love.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 soundboard archive: 공연장에서 의무적으로 녹음하는 기록 보관용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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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음악사의 흐름을 바꿀 만큼 거창한 의의를 갖진 않지만
퍼포머 및 프로듀서로서 남긴 독창적 캐릭터를 되새겨볼 때
분명히 눈여겨볼 만한 한 획을 그었다고 인정하기 충분한
아티스트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음악가가 이 분 아닌가 한다. 미국의 팝락
밴드 스틱스 Styx의 70~80년대 전성기를 이끌고 청아한
고음 창법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보컬리스트, 키보디스트
겸 송라이터, 데니스 드영 Dennis DeYoung이시다.
*Caught in the Act 버젼.
- 인트로는 State Street Sadie란 곡.
*Caught in the Act 버젼.
*Caught in the Act 버젼.
*Caught in the Act의 영상물 버젼. 07년 DVD로 출시.
스틱스의 결성은 파노조 형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카고 지역 토박이로 각각 베이스와 드럼을 연마하던 척
파노조 및 존 파노조 쌍둥이가, 한 살 많은 지나가던 동네
형(...) 47년생 데니스 드영과 트리오로 결합한 밴드...
이것이 바로 오늘날 널리 알려진 스틱스의 원형이란다.
60년대 내내 동네 파티란 파티는 죄다 쓸고 다녔다고.
축하 연주 백밴드로서. 69년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존 설루스키가 가담해 초창기 포크 비슷한 사운드에
기여했고, 이듬해엔 하드락 기타리스트 제임스 영이
들어와 기본 5인조 구성이 갖춰진다.
이 시기 드영은 창립 멤버이면서 리더이고 리드 보컬과
작편곡 등 모든 면에서 밴드를 이끄는 입장. 스틱스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기 전엔, 교육대학으로 유명한
시카고 주립대 졸업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로 일하랴
밴드 겸업하며 레이블과 계약하랴 눈코뜰새 없으셨다.
72년에 밴드 이름을 스틱스로 개칭하고 데뷔 앨범을 내지만
그닥 반응은 없었고 여전히 시카고 로컬 밴드에 불과하였다.
초기엔 프로그레시브의 영향을 받아 직선적인 락 컨셉을
융합하려 했으나 4집까지도 주류 진입엔 실패한 때였다.
(Styx II)
다만 73년 2집 Styx II 중 파워 발라드 곡 Lady가 시카고
지역 방송국 전파를 슬슬 타기 시작하여 앨범 발매 2년이나
지난 75년 초엽에 핫100 차트 탑텐에 오르게 되니 이 시기
이들의 거의 유일한 성과였다.
('Lady' from Styx II, 1973)
*95년 컴필레이션 앨범 수록 재녹음 버젼
https://www.youtube.com/watch?v=eU_MoPHeG2A
(Equinox)
스틱스의 메인스트림 진입은 75년 5집 Equinox부터 기점을
잡아야 한다. 핫100 차트 탑40까지 오른 Lorelei가 소폭의
히트를 기록했고 AOR 계열 앤썸인 Suite Madame Blue가
전국적인 매니아 팬덤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전미 단위의
투어가 갑자기 잡히기 시작하자 가족에게로 돌아오려고 탈퇴를
희망한 설루스키가 마지막으로 참여한 앨범이기도.
('Lorelei' from Equinox,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Oo8apevCeAY
('Suite Madame Blue' from Equinox, 1975)
*Caught in the Act 버젼.
당장 투어 뛰기 위해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드영의 앞에 여섯 살
아래 앳되고 재기발랄한 기타리스트가 등장하니, 스틱스 변혁의
큰 엔진으로 급성장할 토미 쇼였다. 노래도 잘 하고 연주력에
송라이팅 실력도 겸비한 재주꾼이다. (이때까진 참 좋았는데..)
(Crystal Ball)
76년 6집 Crystal Ball은 새 멤버를 소개하기 위한 드영의
배려가 돋보인 앨범. 쇼의 달란트를 썩히지 않고 작곡과 리드
보컬에 적극적으로 참여시켰고 핫100 탑40를 기록한 쇼
작곡의 Mademoiselle이나 타이틀 트랙이 소폭의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다. 두 곡 모두 쇼의 리드 보컬..
('Mademoiselle' from Crystal Ball,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G3WlNZb0Jv4
('Crystal Ball' from eponymous album,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j5M1x_SAGsw
(The Grand Illusion)
진정한 스틱스의 전성기는 77년 7월 7일에 발매한 7집 The
Grand Illusion과 함께 달아올랐다. 미국 시장에서 현재까지
트리플 플래티넘을 찍은 올타임 히트 앨범. 드영이 주도한
Come Sail Away와 쇼가 리드한 Fooling Yourself (The
Angry Young Man), 두 히트곡을 배출한 수작이다.
('Come Sail Away' from The Grand Illusion, 1977)
('Fooling Yourself (The Angry Young Man)' from
The Grand Illusion, 1977)
*Caught in the Act 버젼.
드영의 리드로 일구는 키보드락의 전체적인 모양새가 상당히
여물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앨범이었다. 쇼와 영의 안정적인
트윈 기타 체제도 점점 자리를 잡아서 스틱스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캐릭터로 슬슬 발현하고 있었다. Come Sail Away가
핫100 탑텐에 들고 Fooling Yourself가 탑40로 히트했다.
('The Grand Illusion' from eponymous album,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aIuCdQtNBgg
('Miss America' from The Grand Illusion,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mzrgbsLDiK8
*James Young의 작곡과 리드 보컬.
(Pieces of Eight)
78년 8집 Pieces of Eight은 전작의 성공을 그대로 계승하여
연속 히트를 기록하면서도 쇼의 창작 역량이 한층 더 전면에서
부각되는 계기를 마련한 앨범. (상대적으로 드영의 기세는 다소
물러난 듯이 보여 이때부터 미세한 균열이 포착되기도 했다.)
쇼의 스틱스 시대를 대표하며 그의 음악 커리어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트랙 Blue Collar Man (Long Nights)... 바로
본작에 수록되어 핫100 20위권 직전까지 히트를 쳤다.
Renegade, Sing for the Day 등 쇼가 주도하고 노래한
후속곡까지 연이어 반응을 얻어 거의 온전하게 토미 쇼
위주의 앨범이라 할 만했다.
('Blue Collar Man (Long Nights)' from Pieces of Eight, 1978)
*studio album version.
Renegade가 핫100 탑20에 진입하는 행운까지 겹쳤다.
거친 상남자들의 스토리와 사운드를 갈구하는 듯한 쇼의
창작 성향은 확실히 드영과 뚜렷한 차별점을 제공한 데다
트윈 기타의 또 다른 축인 영과의 궁합도 묘하게 잘 맞았다.
('Renegade' from Pieces of Eight, 1978)
*기타 솔로는 James "JY" Young.
('Sing for the Day' from Pieces of Eight,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aglWbPkl-QM
(Cornerstone)
프로그와 포크의 중첩적인 영향 하에서 자신들만의 아레나락
전략을 도모하던 스틱스. 79년 9집 Cornerstone은 70년대
밴드의 시대 낭만을 간직한 이들 경력의 정점이자 활화산의
끝물 같은 것이었다.
(Babe, single)
('Babe' from Cornerstone, 1979)
*official video archive. 79~80년경으로 추정.
스틱스의 유일한 핫100 차트 탑 히트의 싱글 Babe가 수록된
바로 그 앨범이다. 전작의 트리플에 이어 더블 플래티넘으로
상업적인 성과를 이어갔고 탑40에 오른 Why Me를 비롯해
Borrowed Time, Lights 등 팬덤에게 선물같은 트랙들이
줄을 이었다.
('Borrowed Time' from Cornerstone,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J4QqmeMaqBw
('Lights' from Cornerstone,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YraWuJxPcyU
전작의 쇼에 뒤질세라 자신의 소프트한 성향을 더 가열차게
밀어붙인 드영의 창작성이 돋보였으나 그 와중에도 Boat
on the River 같은 히트 트랙에서 쇼의 재능은 빛이 났다.
('Boat on the River' from Cornerstone, 1979)
*유럽과 일본에서 인기가 좋았다. 한국에서도..
- 원래 밴드 초창기에 드영은 아코디언을 연주했었다.
본격 긴장 국면이 펼쳐진다. First Time의 싱글 발매 여부를
두고 드영과 쇼가 대놓고 대립했고 창립 멤버인 드영이 무려
해고까지 당했다가 다시 복귀하는 일대 참사가 벌어지는 등,
커리어의 정점에서 복잡한 내부 요인이 폭발하고 있었다.
('First Time' from Cornerstone, 1979)
*너무 드영스러운 말랑말랑한 발라드에 쇼가 질려 버렸다고...ㅠ
('Why Me' from Cornerstone, 1979)
*First Time이 반대에 봉착해 대신 타협한 트랙이 이 곡.
어쨌든 세간의 반응은 좋았다. 앨범이 빌보드 200 차트
2위까지 올랐고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 후보로도 지명이
되었다. 갤럽 여론 조사로 80년에 가장 인기있는 밴드로도
뽑히고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도 받았다...만.
(Paradise Theatre)
81년 10집 Paradise Theatre는 스틱스가 유일하게 빌보드
200 차트 탑을 찍어본 앨범. 핫100 차트 탑텐 히트 싱글도
둘이나 나왔으니 The Best of Times 및 Too Much Time
on My Hands. 각각 드영과 쇼의 작품이다. 둘 사이에
여전히 신경전이 지속 중이었다. 으이그.
('The Best of Times' from Paradise Theatre, 1981)
*Dennis DeYoung on leading vocals.
스틱스 최초의 컨셉트 앨범으로서 하나의 스토리텔링 구조를
가지고 가사가 연결되는 방식이었다. 이런 구상은 아이디어가
나름 풍부했던 드영이 제안한 것. 70년대 프로그에서 벗어나
새로운 80년대를 준비한다는 마음가짐이 다양한 시도를
가능케 한 요인인 듯하다.
('Too Much Time on My Hands' from Paradise Theatre, 1981)
*Tommy Shaw on leading vocals.
Rockin' the Paradise는 80년대 투어마다 오프닝을 장식한
트랙으로 팬덤이 좋아하고 락 트랙 차트에서 반응이 뜨거웠다.
Nothing Ever Goes as Planned와 영이 주도한 Snowblind
등의 반응도 괜찮았다.
('Rockin' the Paradise' from Paradise Theatre, 1981)
*Caught in the Act 버젼.
('Nothing Ever Goes as Planned' from Paradise Theatre,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OOR5abTAiMI
('Snowblind' from Paradise Theatre,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piUt0PdC-3o
(Kilroy Was Here)
83년 11집 Kilroy Was Here에 이르러 드영은 아예 한술 더
떠 락 오페라 컨셉트 앨범을 시도한다. 음악의 절정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판단한 때문인지 하고 싶은 거 다 하시고 계셨다.
('Pinball Wizard' from The Who's Tommy, 1969)
https://www.youtube.com/watch?v=joxyFDmh_LY
('Superstar' from Jesus Christ Superstar OST,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LBB26xe01XM
더 후의 69년작 Tommy나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70년작
Jesus Christ Superstar를 동종의 기원 작품으로 꼽는다.
다소 한물 간 장르인 줄 알았는데 MTV 시대에 락 오페라?
상당히 이례적이란 반응이었고 스토리도 그닥 재미는 없는
듯했으나 드영은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락 음악이 종교적 죄악으로 터부시되는 근미래의 세상에
킬로이란 뮤지션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살고 간수는 일제
로봇이며 후배 뮤지션이 그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는 뭐
그런 스토리란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고..ㅠ
('Mr. Roboto' from Kilroy Was Here, 1983)
앨범이 빌보드 200 차트 2위까지 오르고 핫100 차트 탑텐
싱글이 둘이나 나왔다. Mr. Roboto 및 Don't Let It End..
Mr. Roboto는 가상의 일제 로봇 얘기인데 일본어 가사도
등장하고 보코더 이펙트도 이채롭다. 뭐, 당시엔 참신한
사운드였으니까.. 왜색이 짙어 한때 한국선 금지곡...
('Don't Let It End' from Kilroy Was Here, 1983)
본작의 진정한 백미는 파워 발라드 Don't Let It End인데
반드시 아래에서 설명할 라이브 앨범 버젼으로 들어보실
것을 강력히 추천하는 바이다. 이외에 제임스 영 색깔이
확 드러나는 Heavy Metal Poisoning도 들을 만하다.
('Heavy Metal Poisoning' from Kilroy Was Here, 1983)
('High Time' from Kilroy Was Here,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6vGE-FM-BDg
결국 토미 쇼의 임계점을 넘어선 모양이다. 본작 프로모션
목적의 전미 투어가 끝나자 마자 밴드 탈퇴를 단행하시고
결국 스틱스는 해체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ㅠㅠ
(Caught in the Act)
해체가 결정되고 나서 스틱스 최전성기 아카이브를 담은
유일한 라이브 앨범 Caught in the Act가 발매된다. 가장
실력이 팔팔한 젊은 시절의 유일한 아카이브이기 때문에
팬덤이 매우 중시하는 앨범이다. 음반과 동영상 두 가지
경로로 출시되었다. 84년.
본 블로거가 스틱스를 최초로 접신한 앨범도 실은 이 라이브
앨범부터였다. 사운드 퀄리티야 90년대 이후 재결성 녹음이
더 좋겠지만 전성기 실력이란 면에선 비교를 불허하는
가치를 지닌다.
본작엔 단 한 곡의 스튜디오 버젼 신곡이 있다. 핫100 차트
탑40 히트를 기록한 Music Time. 아직 저작권 개념이 없던
90년대에 모 대학에서 무단으로 번안해 응원가로 쓰기도
했던 곡이니 의외로 익숙할지도...
('Music Time' from Caught in the Act, 1984)
(Desert Moon)
찢어지고 나서 멤버들은 각자도생해야 했고 드영과 쇼는 각각
솔로 앨범을 낸다. 이 대결 구도에선 드영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84년 솔로 데뷔 앨범 Desert Moon에서 동명의 타이틀
트랙이 핫100 차트 탑텐에 오르는 성과를 냈다. 8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 들을 만한 노래..
('Desert Moon' from eponymous album, 1984)
(Damn Yankees)
쇼의 솔로 커리어 정점은 80년대말 슈퍼그룹 이합집산의
유행 속에 찾아왔다. 테드 뉴젠트 및 잭 블레이즈 등과 함께
댐 양키스를 창단하여 데뷔 앨범으로 무려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성공을 거둔 것. 대표 싱글인 High Enough가
핫100 차트 탑텐을 기록하기도 했다.
('High Enough' by Damn Yankees, 1990)
(Edge of the Century)
90년에 쇼는 댐 양키스 활동으로 일본까지 와서 투어 도는 등
돈 버느라 바쁘던 상황. 쇼만 빼고 전성기 스틱스 멤버가 다시
재결성에 이른다. 같은 해 12집 Edge of the Century를
발매하고 대표 싱글로 Show Me the Way를 발표하는데
이 곡이 핫100 차트 탑텐에 오르는 성과를 거둔다.
('Show Me the Way' from Edge of the Century, 1990)
*걸프전 시기인지라 운때가 맞아 히트했다는 말도 들었다.
**Tommy Shaw의 빈 자리를 메꾼 연주자는 Glen Burtnik.
그러나 전반적으로 드영은 시대 감각에 둔한 상황이었다. 세상의
음악은 이미 그런지 락으로 바뀌어가고 있거늘.. 결국 15년 넘게
인연을 맺었던 레이블로부터 방출 당하고 스틱스는 또 다시
쓸쓸하게 해산하였다.
('Love at First Sight' from Edge of the Century, 1990)
https://www.youtube.com/watch?v=xmmymL5zsFU
(Greatest Hits)
95년에 컴필레이션 Styx Greatest Hits를 발매하기 위해
왕년의 멤버들이 다시 뭉쳤다. 이번엔 토미 쇼를 포함해서.
존 파노조가 빠졌다. 알콜 중독 습관으로 간에 이상이 왔고
그는 결국 이듬해 사망한다.
*컴필레이션 홍보를 위해 이때 미국 아침마당 같은 TV쇼에
드영, 쇼, 영 셋만 출연해 주요 히트곡의 간단한 축약 버젼을
들려주는데 이때 호흡이 기가 막혀 좋아한 팬이 많았다.
(Return to Paradise)
96년에 오랜만에 뭉쳐 출발한 전미 투어는 성공적이었다.
이 실황을 모아 두번째 라이브 앨범 Return to Paradise를
내는데 골드까지 인증받는 등 나름대로 깜짝 성공이라 할
만했다. 97년.
2년 후엔 신보 앨범 좀 내보자고 뭉쳐 보았으나 드영, 쇼,
영 세 사람의 음악적 견해 차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확인할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드영의 안구
건강 문제가 겹쳐 자연스럽게 또 다시 방출 수순을 탔고
드영을 대체할 로렌스 고완을 섭외하여 나머지 멤버들만
투어를 감행하는 단계까지 가버린다.
이때 틀어진 관계는 아직까지 복원이 안 된 상태. 쇼와 영
두 사람이 여전히 올드팬을 위한 투어 중심으로 스틱스를
이끌고 있으며 드영의 빈 자리는 그럭저럭 고완이 메꾸고
있다. 드영은 상표권 소송에서 패소하여 스틱스란 이름을
대놓고는 못 쓰고 소규모 라이브 및 이벤트 중심으로 예전
팬덤을 만나고 있다고. 아이고...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75~84년 10년간의 전성기를
뒤로 한 채 스틱스의 스토리는 아마도 여기서 끝을 맺을 것
같다. 현재는 쇼+영 중심의 스틱스와 드영의 솔로 이벤트
양쪽으로 갈라져 올드팬 중심의 무대에들 서고 계시다고.
*Blue Collar Man. '15년.
*The Best of Times. '14년.
*Too Much Time on My Hands. '16년경 추정.
*Babe. '04년경.
*Come Sail Away. with Lawrence Gowan on leading vocals.
데니스 드영과 스틱스의 오랜 팬으로서 영원히 둘로 갈라진
현재의 모습은 여러 모로 안타깝다. 예전 포스팅의 다른 액트
사례에서도 종종 다루었듯이 이런 문제는 어느 한쪽 편의
손을 들어주기 애매한 경우가 많아 논평하기 쉽진 않다.
드영은 과연 훌륭한 리더였는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부터
해야 하지 않나 싶다. 객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뮤지션으로서, 락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10년의 전성기를
일군 제1의 원동력을 그에게서 찾아야 함은 지당하겠지만,
80년대 초중반 후반기 활동의 모습은 꽤 의아한 면이 있다.
그의 가장 큰 문제는 음악사의 시대 흐름을 읽어내는 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자신의 창작 성향이 70년대
밴드 시대의 낭만 끝물을 움켜잡고 있는 면이 강하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80년대엔 이미 한물 간 것으로 평가받던 락
오페라 컨셉트나 10대 어린이에게나 통할 꿈과 희망 타령의
스토리텔링이, 상대적으로 세련된 자신 혹은 멤버들의 작곡
및 연주 능력에 심대하게 못 미치는 균열을 보인다는 것이다.
90년대 재결성 시점에 음악의 대세인 그런지 락의 유행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사례를 통해, 드영이 음악사를 읽는 감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또 한 번 입증이 된다. 70년대에 초등
교사 하던 시절의 감각으로 영원히 간다고 하면 오산인데...
대중 음악이란 결국 대중을 향한 메세지의 싸움이다. 바로
앞 포스팅의 U2 만큼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시대 정신이나
대중의 기호 흐름을 따라갈 각오는 되어야 도태되지 않는
것이다. 청소년 시절엔 쉽고 감동적인 그의 가사에 격하게
공감하기도 했지만 사회인이 된 이후 잘 듣지 않게 된 것이
곧 '세상은 이렇게 천연색의 낭만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아'
하는 점을 청자 스스로가 깨닫고 각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치하고 조악한 경향은 당장 같은 진영의 멤버인
토미 쇼조차도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 아닌가. 나름대로
반골 및 아웃사이더 경향이 강하고 개성이 뚜렷한 쇼나
제임스 영을 포용하지 못하고 솔로 프로젝트로나 추진할
소재를 지나치게 강요한 책임은 결국 드영에게 있다.
쇼 역시 노래 잘 하는 랜디 로즈 같은 이미지로 더 성장할
수도 있었던 뮤지션인데 힘들고 어려웠던 청년기에 자신을
발탁해준 드영이나 스틱스에 조금 더 이해하고 다가서려는
노력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다.
80년대의 헤어 메탈 시대가 약간 그런 성향이 강하긴 했지만
청바지에 가죽 재킷을 휘날리며 허세와 야성을 좇는 상남자의
삶은 결코 오래 갈 수가 없다. 환갑을 넘긴 나이까지도 쇼가
그렇게 살고 계신지는 알 길이 없으나 길지도 않은 인생에
젊은 전성기 기억을 공유하는 인연이 소중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인간적으로 잘 좀 풀었으면 한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드영이 눈 때문에 아파서 투어 연기하면
안 되겠냐고 솔직히 나왔을 때 단칼에 거절한 싸가지 없음은
전적으로 쇼의 잘못이 분명하다. 힘들고 배고팠을 때 서로
보듬어주던 기억은 싹 달아나 버린 거냐. 지들 가사는 꿈과
희망 식으로 쓰면서 왜 실천들은 못하고 사시는지 원...
어쨌든 포스팅의 주인공이신 데니스 드영은 미국 시장에서
2천만 장에 달하는 판매고를 올리시는 등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실적을 올린 아티스트임은 분명하고 음악적 능력에
관해선 아래와 같은 매체의 평가로도 입증할 수 있다.
훌륭한 키보디스트로서, 그의 음악을 카피하며 아마추어
밴드메이트 생활을 한 본 블로거를 포함해 수많은 후진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신 바, 일흔이 넘은 지금도 전성기에
버금가는 음역(!)을 유지하며 팔팔하게 현역으로 뛰고
계신다고 한다. 노익장에 경의를 표한다.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Vocal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html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Keyboard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keyboard.html
*Dennis DeYoung gear:
https://equipboard.com/pros/dennis-deyoung
*critique on Dennis DeYoung soloing:
https://www.keyboardmag.com/lessons/the-art-of-synth-soloing-dennis-deyoung-of-styx
본 블로거가 좋아하는 데니스 드영과 스틱스의 노래는 다양한데
그 중 Don't Let It End를 최우선으로 꼽고 싶다. 특히 84년
Caught in the Act 라이브는 인생 앨범 중 하나로 밴드 음악의
편성을 어떻게 하면 찰지게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하나의 모범
답안으로 받아들여왔다. 들국화 등 80년대 기억을 공유하는
한국의 음악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들었다.
Don't Let It End를 처음 들은 앨범이 Caught in the Act라서
이 버젼을 가장 좋아한다. 거의 동기나 악절 단위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외울 만큼. 70년대 밴드의 시대 끝자락의 낭만적 작법과
80년대스런 감성 같은 것이 묘하게 어우러진, 떠나간 연인을 향한
애절함이 느껴지는 파워 발라드이다. 추천하며 포스팅을 마친다.
('Don't Let It End' from Caught in the Act, 1984)
*Caught in the Act의 영상물 버젼. 07년 DVD로 출시.
https://www.youtube.com/watch?v=UOqeuupZndg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oKUOy-Tam70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이언 길런 Ian Gillan (0) | 2020.03.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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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 델프 Brad Delp (0) | 2020.02.09 |
보노 Bono (0) | 2019.12.07 |
게디 리 Geddy Lee (0) | 2019.11.09 |
존 앤더슨 Jon Anderson (0) | 2019.10.19 |
드디어 이분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네. 사상 최초
내한 공연의 직관 준비는 하고들 계신지 몰겄다.
팝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이분들 스토리 제껴놓고
간다는 게 말이 되나... 매도 얼른 맞았어야 했건만.
80년대 이후 세계 락 음악사 전체를 상징하며 그 전설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레전더리 액트, 유투 U2의 네 멤버와
그들을 대표하는 프론트맨 보노 Bono의 이야기... 시작한다.
*Sunday Bloody Sunday from A Conspiracy of Hope
**86년 6월 Amnesty International 주관 콘서트.
- Bono 보컬에 있어 궁극의 최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공연.
- http://www.u2gigs.com/Conspiracy_Of_Hope.html
*Bad from Live Aid
**85년 7월 13일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
- 7분경 관중을 막지 말라며 객석으로 몸소 난입하시는 Bono.
- 9' 25"에 갑자기 삽입한 음률은 Rolling Stones가 원곡.
- The Edge, 아직 모자 쓰시기 전..
팝 음악에 입문하여 청소년기를 보낸 시기가 이들의
전성기와 시절을 공유하기에 U2와 함께 성장한 세대의
일원이라 자부할 수 있겠는데.. 사실 한창 인기 있을 때
이들을 아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딱 인기있는
만큼만 바라본 것 같다.
누군가에게 U2를 설명할 때 기준점을 어디에 둬야 할까.
연주력? 멤버 모두 한 가닥씩 하는 프로듀서들임을 부인하긴
힘들지만 흔히 정통 락 성애자들이 선호하는 비르투오소 풍의
테크닉을 가진 연주자들이라고 하기보다... 개성으로 충만한,
스타일링에 능한 재주꾼들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장르? 포스트 펑크에서 실력을 갈고 닦아 출발한 점은
맞겠으나 초창기 몇 장의 앨범까지만 한정했을 때이다.
익스페리멘탈의 영향을 받은 80년대는 이노 중심이던
이례적 시기였을 터이고... 얼터너티브의 기준을 제시한
90년대를 지나.. 결국 U2의 장구한 음악사는 특정한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락이라는 보편적 줄거리 하나로
통일할 수 있을 터이다.
가사 및 메세지? 정치사회적인 주제를 빈번하게 드러내는
밴드임에 틀림없고 영미권의 비주류인 아일랜드 가톨릭의
정체성이 예술적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가들이겠지만...
그들의 모든 음악을 프로파간다나 저항 가요로 취급할
순 없는 노릇..
수상 경력? 2억 장에 가까운 판매고, 스물 두 개의 그래미
어워드 트로피, 락앤롤 명예의 전당 헌액 - 그것도 단번에,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 랭킹 등 숱한 영예의 기록을
남겼건만... 어디 그것만으로 충분히 정의 내릴 분들이던가.
투어 실적? 공연 성적에서 이들에 필적할 만한 액트가
롤링 스톤즈나 마돈나, 플로이드 정도 외에 없을 듯하니
세상에서 공연 가장 잘 하는 음악가로 소개할 만하지만,
단순히 상업적인 성공 이상을 상회하는 대중 문화 전체
아이콘으로서의 상징성을 제쳐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능.
결국 이 모든 요소를 합친 존재감... 대중적 락밴드 포맷
위에 독창적인 스타일을 가진 개성 만점의 네 캐릭터들이,
결성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사회를 진지하게
인식하는 세계관을 구축함으로써 음악 산업을 총체적으로
표징하는 심볼로 발전하니, 숱한 수상 기록과 기념비적인
투어 성적은 부수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락 음악
사상 최고의 아티스트 다섯 손가락에 능히 꼽힐 만큼
위대한 이름이 바로 U2가 아닐까 싶다.
본 포스팅에서 U2를 풀어냄에 있어 종전처럼 시간 순서대로
하는 방식은 다소간의 식상함도 있을 듯하고 논평하시는 다른
분들이 얼마든지 다른 데서 하시고 있는 듯하여.. 대략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제별로 포인트만 줄줄 풀어보려고 한다.
글 솜씨가 궁하야 시대순에 가까운 서술이 되었지만서두..
- 글 싣는 순서 -
포스트 펑크와 릴리화이트 중심의 출발선
메세지에 눈을 뜨다: 아일랜드, 사회정치, 기독교
브라이언 이노와의 만남 - 조슈아 트리, 라누아
밴 모리슨의 영향과 아이리쉬 루츠 소울
얼터너티브의 새 기준, 90년대와 악퉁 베이비
월드 투어와 스타디움... 더 후를 꿈꾸며
기본으로 돌아오다 - 2000년대 이후
그래미가 사랑한 그들, 사회 활동가로서
U2/ 헤어 메탈과 글램이 아닌 것들의 여집합
(Boy)
(October)
(War)
(The Unforgettable Fire)
(The Joshua Tree)
(Rattle and Hum)
(Achtung Baby)
(Zooropa)
(Pop)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No Line on the Horizon)
(Songs of Innocence)
(Songs of Experience)
포스트 펑크와 릴리화이트 중심의 출발선
('I Will Follow' from Boy, 1980)
*U2의 투어 셋리스트에서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가장 오랜 트랙.
('Fire' from October, 1981)
1~2집 무렵까지 U2가 밴드 포맷을 형성하는 데엔 포스트 펑크
장르의 기반과 경험이 큰 도움이 되었으며, 이는 초기부터 평생
이들과 함께 사운드 메이킹의 궂은 일을 도맡아 온 프로듀서
스티브 릴리화이트가 분전한 덕택이다.
특히 텔레비전과 조이 디비전 등 70년대 액트의 영향이 컸다.
릴리화이트의 영향으로 수지 앤더 밴쉬스도 엄청 탐구했다고.
래리 뮬렌 주니어가 학생 게시판에 밴드 멤버 공고를 올렸을
때만 해도 형편없는 실력이었다던 이들은 릴리화이트를 만나
음악을 일구는 방법론을 터득하게 되었다능. 이들과 동시대
혹은 약간 앞서던 저 밴드들의 음악에서 힌트를 얻었다네.
더 클래쉬, 라몬즈, 패티 스미스를 위시한 정통 펑크 씬 선배들이
예술과 유흥의 적당한 중간 지점에서 음악적 자유를 추구하는
태도를 시발점으로 하였다 하며, 여기에 미니멀한 어프로치와
장르의 변형을 혼합하는 포스트 펑크의 기본 정신을 적절하게
배합함으로써 자신들만의 방법론을 확립하게 된다.
('Marquee Moon' by Television,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g4myghLPLZc
('Hong Kong Garden' by Siouxsie and the Banshees,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Y-l9GQJRl9Y
*공동 프로듀서가 Steve Lillywhite였다.
('Love Will Tear Us Apart' by Joy Division,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zuuObGsB0No
80년 1집 Boy 및 81년 2집 October는 그런 방법론이 너무나
선연하게 드러나 당황스럽기까지 한 초창기 작업물. 릴리화이트
중심의 프로듀싱 체제가 유지된 83년 3집 War에 이르기까지도
이런 성향은 줄곧 일관성을 가지고 이어져 간다.
Boy의 I Will Follow나 October의 Fire를 들어보면 솔직히
동시대 포스트 펑크와 별반 차이가 느껴지진 않는다. 어딘가
잠재한 가능성이 꿈틀대는 기미가 느껴지네, 까지는 알겠는데
아직은 가능성에만 머무르던 꿈많던 시절. 위에 동시대 해당
장르를 이끌던 선배들의 음악과 비교하면 그 미세한 차이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I Will Follow 및 Fire 등에서 자신만의 스타일링을
완성해가는 디 에지를 발견하는 일은 큰 기쁨이다. 이런 문법에
쉽게 동의가 어렵다면 어차피 U2와 친해진다는 건 어불성설이니.
확실히 이 당시 디 에지를 보면 펑크의 정신을 따라가면서도 여느
포스트 펑크 기타리스트와 다른 캐릭터임이 또렷해지고 있었다.
릴리화이트의 절대적 영향력은 83년 3집 War까지 지속되었다.
War는 릴리화이트의 카리스마와 네 뮤지션들 스스로의 주체적
정체성 자각이 바톤을 교환하듯이 서서히 오버랩하는 모멘텀의
증거물이었다. 바야흐로 진짜 음악가가 되어가는 그들..
메세지에 눈을 뜨다: 아일랜드, 사회정치, 기독교
('Sunday Bloody Sunday' from War, 1983)
* "This song is NOT a rebel song."
- 세속의 정파적 이익을 좇으려 한 것이 아니라 비참하고
슬픈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 한 예술적 의도이니
거기에만 주목해 달라는 메세지를 줄곧 설파하곤 했다.
('New Year's Day' from War, 1983)
*80년대 바웬사가 이끈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 이야기.
('Bad' from The Unforgettable Fire, 1984)
*당시 더블린에 만연하던 헤로인 중독 현상을 노래한 가사.
U2 멤버들이 뮤지션으로서 스스로 봉인을 깨는 계기는
사회와 정치 환경의 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이들이 열 살을 갓 넘겼을 무렵 72년 1월말 북아일랜드
데리에서 벌어진 대사건은 여러 변화 가운데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으로서 이들 넷의 본질적인 역린을 건드리고
만다.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 바로 그것이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 블러디 선데이라 명명된 사건은 5.18
광주의 아일랜드 버젼. 83년 3집 War의 가사를 작업하던
보노는 Sunday Bloody Sunday란 걸작을 창작하기에
이르고 정치사회적 심볼로 급성장하는 밴드의 이미지는
이 시그니처 트랙을 기화점으로 하여 형성된다. -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02년 영화와 본작 가사를 동시에
음미하며 감상한다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80년대 유럽과 북미는 부패한 기득권에 대항하는 저항적
사회 집단의 투쟁이 다양한 양상으로 터져나온 시기였고
보노는 세상의 뜨거운 이면에 눈을 뜬다. War의 New
Year's Day는 폴란드 바웬사가 이끈 자유노조 연대의
반독재 투쟁에 주목하였고, 84년 4집 The Unforgettable
Fire에 실린 Bad는 더블린의 사회 현상이 되어버린 마약
중독 소재를 다루었다.
4집의 Pride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 관한 책을 읽고 받은
느낌을 술회한 히트 트랙이었고, 87년 5집 The Joshua
Tree에 이르러 Mothers of the Disappeared는 중미
엘살바도르 내전의 피해자들을 위무한 곡이다. 같은 앨범
Running to Stand Still에선 아일랜드인들의 마약 중독
문제를 다시 진지하게 다루기도 하였다.
애초부터 U2는 종교적 정신 세계를 가사로 쓰곤 했는데
작사가인 보노의 철학적 자의식이 성장함에 따라 외연이
더욱 확장한 셈이다. 원래 그가 즐겨 다룬 스토리로 가톨릭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영성적 이미지가 한 축을 차지했는데
October의 Gloria 같은 트랙이 대표적이었다.
솔까말, Joshua Tree의 전체 컨셉 자체가 미국 투어 중에
경험한 영적 체험과 연관이 있다는 썰이... 제목부터 여호와
나무 아닌감. - 실은, 중앙 아메리카를 여행하며 미국 대외
정책의 폐해를 몸소 체험한 보노가 '위대한 아메리카의 정신이
이런 거냐!'고 통렬하게 일갈하는 메세지란 것이 정설이다.
레이건 시대 아니였겠냐.. 속 터지는.. 커버 아트에 담은
식물은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 자생하는 희귀종이며
본작 이후 U2의 심볼로서 세계적인 이미지를 얻게 된다.
('Gloria' from October,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4X_45Yngey4
*83년 라이브 Under a Blood Red Sky 버젼.
- 사실 이 곡의 진정한 백미는 Adam Clayton의 베이스 연주.
('Running to Stand Still' from The Joshua Tree,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7OFmMDYTOt0
*아일랜드인들의 마약 중독 현상을 주제로 한 문제작.
브라이언 이노와의 만남 - 조슈아 트리, 라누아
('Pride (in the Name of Love)' from The Unforgettable Fire, 1984)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
('With or Without You' from The Joshua Tree, 1987)
*전설의 시작. 뮤직 비디오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 심오한 어덜트 로맨스 가사이지만 중의적인 종교적 해석도 가능.
- 인트로 프레이즈에서 드럼 머신 비트를 차용. Yamaha DX-7.
- 1절에 음을 무한정 sustain하는 infinite guitar 기술이 등장.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from The Joshua Tree, 1987)
*이 시기부터 가스펠과 소울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했다.
**AFKN에서 이 영상 보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from The Joshua Tree, 1987)
- The Edge의 상징과도 같은 딜레이 이펙트가 작렬한다.
War를 끝내고 자아에 눈을 뜬 U2는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
위해 그릇이 큰 프로듀서를 찾았고 이는 릴리화이트도 동의한
점이었다. 미팅 제의를 받은 브라이언 이노가 본인은 거절하고
대신 추천하기 위해 대니얼 라누아를 데리고 나갔는데, 이들의
잼 세션과 보노의 열정적인 설득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네.
팝 음악 역사상 역대급의 대사변. U2가 이노를 만났다. 거기에
대니얼 라누아는 부록.. 릴리화이트를 내친 것도 아니다. 이노,
라누아, 릴리화이트. 이 세 분은 이후 평생에 걸쳐 U2 음악을
지원하는 든든한 프로듀서 사단으로 자리잡는다. - 이노, 이때
음악 커리어 때려치울까 하던 참이었다는데.. 인생 참 모른다..
브라이언 이노가 어느 정도 레벨의 음악가인지 모르는 사람도
간혹 있던데... 중상위급 히트를 기록한 록시 뮤직에서 기괴한
메이크업의 깡마른 무그 신디 연주자로 커리어를 시작하셨다.
프로그씬 3대 또라이 중 하나로 불리던 시기였다. 물론 앨범
두 장 내고 탈퇴했지만.
또라이 기질로 결코 뒤지지 않는 데이빗 보위나 피터 가브리엘,
로버트 프립 등의 70년대 앨범들 프로듀싱을 도맡으면서 음악계
최고 수준의 명성을 얻게 된다. 뭔가 아방가르드하고 익스페리멘탈
하면서 프로그레시브 같은데 일렉트로닉 스러운... 어딘지 묘한
실험적 전자음악 분위기 창출에 있어선, 70년대 후반 유럽권을
통틀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셨다.
앰비언트란 장르의 창시자이기도 하셨고. 뉴에이지의 조상인 게지..
음향 디자인에도 일가견이 있고 전파 망원경 설계에도 조력했으며
예술 창작 패러다임 전반에 철학적 영향을 끼친 분인지라 단순히
대중 음악가 한 가지 면으로 규정할 수가 없는 먼치킨 천재인 분.
존경받는 대선배와의 작업은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영감을 얻는
과정이었던 바, 이노는 일련의 즉흥 잼을 통해 보노와 디 에지와
클레이튼 등이 스스로의 껍데기를 부수고 새로운 악상을 떠올릴
수 있도록 자신감을 북돋는 역할을 했다. 이노가 채 챙기지 못한
영역을 찾아 다니며 기술적 절차를 메꾸는 역할은 라누아가 큰
도움을 주었고 특히 뮬렌과 짝을 이뤄 드러밍이나 리듬 파트의
음향을 개선하고 혁신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래리 역시 이 시기 라누아의 도움으로 실력이 확 늘어났음을
지금까지도 흔쾌히 인정한다. 라누아는 애덤의 베이스 플레잉
테크닉에도 깊은 영향을 끼쳐 종전보다 훨씬 미묘한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는 연주자로 변화시켰다고 한다.
https://www.atu2.com/news/the-larry-mullen-jr-interview.html
('Life During Wartime' by Talking Heads,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jShMQw2H2cM
*excerpts from live '83 Los Angeles.
- 보컬 David Byrne, 베이스 Tina Weymouth
- 키보드 Jerry Harrison, 게스트 키보드 Bernie Worrell
('Once in a Lifetime' by Talking Heads,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TGofoH9RDEA
*excerpts from live '83 Los Angeles.
U2 멤버들은 특히 이노가 작업한 토킹 헤즈의 앨범들을 좋아했다.
하지만 새로운 작업은 기존 포스트 펑크에서 한두 차원 더 진보해
실험적인 전자 합성음을 도입하고 디 에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딜레이 등 다채로운 이펙트를 시험하거나 반대로 아메리칸 포크,
아이리쉬 루츠, 컨트리 블루스 등 전통적인 장르를 탐구하는 등
실로 광폭적인 범주까지 확장이 이루어졌다고.
마틴 루터 킹을 모티브로 한 Pride (in the Name of Love)나
동명의 타이틀 트랙을 앞세운 84년 4집 The Unforgettable
Fire는 실험 정신의 첫 결과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들을 세계구급의 진짜 거물로 키운 진정한 대박 작품이 곧
기다리고 있었으니 87년 5집 The Joshua Tree였다. U2의
빌보드 200 차트 첫 정상 앨범... 바야흐로 전설이 시작된 것.
With or Without You와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는 U2의 커리어 전체를 상징하는 올타임 시그니처
트랙이 되었고 이들에게 유이한 핫100 차트 탑을 남긴 대박
히트를 선사한다. 뒤를 이은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등 수록 트랙 전곡이 평단과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버릴 곡 없는 명반이 탄생한 것. 대한민국이 민주화의
열망으로 뜨거웠던 1987년, 세계 음악계의 위너는 U2였다.
('The Unforgettable Fire' from eponymous album, 1984)
https://www.youtube.com/watch?v=oxRr3umJz5Y
*가사는 히로시마 원폭 참상에 대한 내용.
밴 모리슨의 영향과 아이리쉬 루츠 소울
('Desire' from Rattle and Hum, 1988)
('Angel of Harlem' from Rattle and Hum, 1988)
('All I Want Is You' from Rattle and Hum, 1988)
*17년 U2 at the BBC 버젼.
밴 모리슨 이야기를 빼놓으면 안 되지 않을까. 아이리쉬
쇼밴드 및 소울의 출발점은 60년대말 모리슨으로부터
잡아야 마땅하니까. 80년대 이후 보편화한 블루 아이드
소울의 아일랜드식 원형이던 그는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켓, 팻츠 도미노, 재키 윌슨 등 오리지널 흑인풍과 또
다른 풍미와 그루브로 R&B를 재창조한 선구자였다.
베이스 라인의 그루브 백킹을 중시하고 독자적인 기타
리프를 앞장세우는 작편곡 패턴이나, 흑인들의 감성에
일견 가까워 보이지만 뭔가 한 끝 차이로 미세한 조정을
가미한 보이싱 등 측면에서, 모리슨의 스타일링이 후대
음악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물론 70년대초에 형성한 R&B의 패턴이 다 이러니
특별하다 평할 순 없다고 비판할지도 모르겠으나...
적어도 아일랜드라는 토양과 문화적 기반 위에서 밴
모리슨이란 이름의 존재감은 폄하할 수 없을 것이다.
('Brown Eyed Girl' by Van Morrison, 1967)
https://www.youtube.com/watch?v=UfmkgQRmmeE
*줄리아 로버츠 생각나는 사람 많을 듯..
('Domino' by Van Morrison, 1970)
https://www.youtube.com/watch?v=yiDcPUOD-vY
*Fats Domino에게 헌정한 곡.
('Wild Night' by Van Morrison,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bXoBnmJtqhY
*94년 John Mellencamp의 커버도 히트했다.
('Jackie Wilson Said' by Van Morrison,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TY0_1VN7h8c
*당연하지만 Jackie Wilson에게 헌정한 곡.
80년대 내내 전미 투어를 돌며 보노와 디 에지 등이 모리슨,
스톤즈, 딜런 등 선배로부터 펑크 이전 시대의 음악에 관해
꾸준히 전수를 받곤 했는데 이 영향이 직접 드러난 작품이
88년 더블 앨범으로 나온 6집 Rattle and Hum이었다.
- 이 앨범에 대한 평가는 물론 호불호가 갈리긴 한다.
2005년 락앤롤 명예의 전당 헌액에 즈음하여 U2 멤버나
평단의 공통적인 평가로 밴 모리슨을 그들 음악의 원류로
이미 인정한 바 있다. 아래 링크에선 87년과 07년 각각의
인터뷰를 통해 보노와 디 에지가 어떤 술회를 고백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딴지 걸지 말자구..
*Los Angeles Times' interview with Bono, 1987
https://www.latimes.com/archives/la-xpm-1987-12-20-ca-30278-story.html
*ABC's interview with The Edge, 2007
https://abcnews.go.com/Nightline/Playlist/story?id=3440730&page=1
*아일랜드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갖고 흑인 음악을
받아들여 50년대 이후 독창적 문화를 발전시킨 면은,
91년 앨런 파커 감독 영화 커미트먼츠 - 87년 출간된
동명의 로디 도일 소설 원작 - 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Try a Little Tenderness' from The Commitments OST,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PKfHC5eY5CI
*Otis Redding이 커버한 66년 버젼이 유명하다. 원곡은 32년작.
('When Love Comes to Town' from Rattle and Hum, 1988)
https://www.youtube.com/watch?v=BpaAcIovUtk
('Stay (Faraway, So Close!)' from Zooropa, 1993)
('Hold Me Thrill Me Kiss Me Kill Me'
from Batman Forever OST, 1995)
('Discotheque' from Pop, 1997)
솔직히 전작에 대한 평가는 그닥 좋지 못했고 90년대가 되어
U2는 변화의 전기가 필요했다. 초창기 사운드로 돌아가자는
클레이튼 및 뮬렌 vs 완전 새로운 것을 도입하자는 보노 및 디
에지. 이런 갈등 구도가 오히려 명곡을 탄생시켰는데 Achtung
Baby의 One이 바로 그 곡. 아이러니이다.
91년 7집 Achtung Baby는 변화에 대한 욕구와 와신상담
끝에 나온 역작이다. 결국 보노와 디 에지의 창작 성향이 밴드
내에서 주도권을 얻는 모양새로 가게 된 바, U2는 당시 움트기
시작한 얼터너티브와 모던 락의 문법을 받아들이고 일렉트로닉
및 인더스트리얼의 새로운 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모던
락 태동의 80년대 단초를 제공한 이들이 거꾸로 그 거센 흐름을
다시 자기들 것으로 융합한 셈..
The Fly가 이런 새 경향을 대표하는 트랙. Mysterious Ways
및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이 들려준 참신한
모드 역시 90년대다운 사운드의 산물이었다. 어딘가 변화의
전기를 마련한 본작의 혁신적 성향은 평단과 대중의 즉각적인
찬사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93년 8집 Zooropa 및 97년 9집 Pop 역시 Achtung Baby
출산의 연장선상에 있음이 뚜렷했다. 하지만 워낙 변화의 물결이
거셌던 세기말의 90년대인지라 두 장 앨범의 끝물쯤 와서는
일부 팬덤이 피로감을 호소하는 역효과를 감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포스트 펑크 액트가 아님을 여실히
증명한 90년대식 U2 음악을 확인할 필요는 있다. Zooropa에서
Stay (Faraway, So Close!), Lemon, Numb 등을, Pop에서
Discotheque, Staring at the Sun 정도는 체크할 만하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90년대를 넘어서며 U2는 바야흐로
음악 산업을 통틀어 역대급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거물 중의
거물로 몸집이 커지고 있었다.
('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 from Achtung Baby,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Y4AX2CGYl7Q
*The Fly보다 이 곡을 우위에 두는 팬도 많다.
('Lemon' from Zooropa,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9YoAQ50BK74
('Numb' from Zooropa,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sfYcqzQ2PaQ
*단조로운 톤의 만트라 랩을 시전하시는 분은 The Edge.
('Staring at the Sun' from Pop, 1997)
https://www.youtube.com/watch?v=q4Gr8Lf2Bzo
('Sweetest Thing' from The Best of 1980-1990, 1998)
https://www.youtube.com/watch?v=ikUpmvPjN0I
월드 투어와 스타디움... 더 후를 꿈꾸며
*Pride (in the Name of Love) from Zoo TV Tour
*One from PopMart Tour
*Stay (Faraway, So Close!) from Elevation Tour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from Vertigo Tour
*With or Without You from U2 360° Tour
U2 멤버들이 유년 시절부터 받은 영향을 따져 본다면
더 후와의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됨을 알 수 있다. 같은
편성의 밴드를 운영하고 있고 기타리스트의 캐릭터가
중요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이미지의 리드 보컬, 각각의
독자적 노선을 추구하는 리듬 섹션 두 멤버의 위치 등
측면에서 꽤나 비슷하다.
무엇보다 아레나 또는 스타디움 환경에서 대규모의 군중을
휘어잡는 음악적 폭발력이 스튜디오 앨범과 또 다른 형질의
매력을 형성한다는 측면에서, U2를 가리켜 80~90년대의
더 후라고 새롭게 규정할 수 있을 터이다. (앨범으로 듣는
음악과 현장에서의 사운드, 둘 사이에 서로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대표적인 두 밴드일 게다.)
Joshua Tree의 대성공 이후 자신들의 위상과 외부적인 음악
산업 지형의 변화를 체감하면서, 투어 현장의 분위기가 왠지
이건 아닌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을 네 분이 공통으로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Achtung Baby 지원을 위한 92~93년 Zoo TV
Tour부터 U2는 공연 문화의 일대 혁명을 시도한다.
이전까지 이들 투어의 무대는 일반적인 아레나락 패턴을
좇는 간소함 뿐이었는데, 투어 컨셉트 디자인을 전담하는
전문가를 선임하고 대규모 조명과 세트 디자인, 대형 스크린,
뉴 미디어를 과감하게 투자하여 스타일리쉬한 비디오형
투어 - 오늘날 U2 공연 하면 떠오르는 예의 이미지 - 를,
Zoo TV를 전환점으로 하여 구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Zoo TV가 그래서 이들 음악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인
것이며 Zoo TV 이후 U2의 공연 실적이 음악 산업 전체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해 오늘날 U2 하면 떠오르는 투어
황제로서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시발점이 된 것이다.
- 즉 세계 공연 수익을 싹쓸이해 갔다는 말이다...
이에 견줄 만한 상대론 솔직히 스톤즈 외엔 없다..
*U2 월드 투어 연혁 - 공연 회수 및 매출:
- Zoo TV Tour (1992~93; 157회, 1.5억불)
- PopMart Tour (1997~98; 93회, 1.7억불)
- Elevation Tour (2001; 113회, 1.4억불)
- Vertigo Tour (2005~06; 131회, 3.8억불)
- U2 360° Tour (2009~11; 110회, 7.3억불)
- Innocence + Experience Tour (2015; 76회, 1.5억불)
- The Joshua Tree Tour '17 (2017; 51회, 3.1억불)
- Experience + Innocence Tour (2018; 60회, 1.2억불)
- The Joshua Tree Tour '19 (2019; 14회 예정)
('Pinball Wizard' by The Who, 1969)
https://www.youtube.com/watch?v=-J03yCE15rg
('Won't Get Fooled Again' by The Who,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x1_69AAX-OY
*Beautiful Day from Glastonbury Festival '11
*Vertigo from Innocence + Experience Tour
기본으로 돌아오다 - 2000년대 이후
('Beautiful Day' from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2000)
('Walk On' from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2000)
*아웅산 수찌에 관한 가사지만 미국에선 9.11에 대한 위로의 뜻을 담기도.
('Vertigo' from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2004)
('Sometimes You Can't Make It on Your Own from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 2004)
*가사의 주제는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감정.
90년대 후반의 앨범들 반응을 읽고 있던 멤버들이 또 한 번
태세를 전환하여 음악적 방향을 바꾼 역작을 내놓기에 이른다.
2000년 10집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및 04년
11집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이 그것. U2의
음악적 생명력이야말로 실로 마르지 않는 샘물 아니겠는가.
이른바 back-to-basic, 기본으로 돌아온 락 본연의 정신이라
세간의 평단이 일제히 환영과 찬사를 보낸 바, 포스트 펑크와
얼터너티브의 다양한 실험을 거쳐 마치 그 옛날 전성기 시절
더 후의 영광을 재현하듯이 콘서트형 정통 하드락의 계보를
충실히 잇는 히트 트랙을 줄줄이 내놓는다.
ATYCLB에서 Beautiful Day, HtDaAB에서 Vertigo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금세기의 걸작 히트곡. 디스토션 걸린
디 에지의 기타가 불을 뿜어 쿨함이 작렬하는 넘버들이다.
그 해 그래미가 즉각 화답한 Walk On이나 Sometimes
You Can't Make It on Your Own 역시 빼놓을 수 없고.
연이어 09~11년의 U2 360° Tour는 역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한 공연 투어로 수위를 다투는 대기록을 세우며 이들의
이름을 다시 드높인다. 물가 상승률을 고려해 환산하면 무려
미화 8억 2천만 달러.. 한화 9천억 원의 돈방석에 오르셨다.
실질적으로 역대 매출 최정상이라지... 1위라고.
이후 현재까지 09년 12집 No Line on the Horizon, 14년
13집 Songs of Innocence, 17년 14집 Songs of Experience
등 정규 앨범을 통해 여전히 정상의 자리에서 노래하는 U2...!
이들이 앞으로 걸어나갈 한 걸음 한 걸음이 곧바로 음악사의
새로운 장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모두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대중 음악계의 전설을 목격하고 있는 셈인 게지...
('Stuck in a Moment You Can't Get Out Of' from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2000)
https://www.youtube.com/watch?v=1sn3bJ5Ya-A
('Elevation' from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2000)
https://www.youtube.com/watch?v=xbyjeHKSn-E
('Electrical Storm' from The Best of 1990-2000, 2002)
https://www.youtube.com/watch?v=anhRKfOkBSY
('City of Blinding Lights' from
How to Dismantle and Atomic Bomb, 2004)
https://www.youtube.com/watch?v=Fg4MfA3BCyI
('Get On Your Boots' from No Line on the Horizon, 2009)
https://www.youtube.com/watch?v=JcDNilZbZg8
*쿨한 90년대 분위기로 잠시 복귀한 듯..
그래미가 사랑한 그들, 사회 활동가로서
('Theme from Mission: Impossible by
Adam Clayton and Larry Mullen Jr., 1996)
76년 결성 후 그 상업적인 성과 만큼 U2에 관한 예술적 평가
역시 당대에나 후대에나 찬사 일색이다. 특히 그래미 어워드가
이들을 후하게 아낀다고 널리 알려져 있고 19년 현재까지 46회
후보 지명되어 이 중 무려 22회의 수상 기록을 남겼다.
최초의 후보 지명이 Joshua Tree 앨범부터인데 지명된 첫
해 88년에 실질적 대상인 올해의 앨범 상을 안기는 전무후무한
결과를 기록하는 등, 그래미의 편애는 일찍부터 시작하였다.
Achtung Baby 시기엔 올해의 앨범 후보 지명으로 그쳤다가
All That You Can't Leave Behind 때는 Beautiful Day에
01년 올해의 레코드 및 올해의 노래 두 개 트로피를 안겼고,
거기에 같은 앨범에서 2년 연속으로 이듬해 Walk On에
올해의 레코드 트로피를 선사하는 진기록을 남겼다.
06년 시상식에서 How to Dismantle an Atomic Bomb에
올해의 앨범 상을, 여기 수록된 Sometimes You Can't Make
It on Your Own에 올해의 노래 상을 시상함으로써 명실공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에 또 하나의 명예를 추가해줬다.
이들이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오르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
추천 자격이 주어지는 첫 해 2005년에 단번에 헌액을 받아
U2가 괜히 U2가 아니구나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헌액식에서 서훈 수여자는 바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Rock and Roll Hall of Fame, official archive)
https://www.rockhall.com/inductees/u2
(U2 fans' web archive)
https://www.atu2.com/events/05/rockhall/
2010년에 롤링 스톤 매거진이 시대를 초월한 100대 아티스트
랭킹을 발표했던 바, 여기서 U2는 브루스 스프링스틴, 프린스,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 동시대에 호각을 다투고 자웅을 겨루던
선후배 음악가들을 제치고 비틀즈, 밥 딜런, 롤링 스톤즈, 스티비
원더 등 선각자들의 뒤를 이어 당당히 22위로 평가를 받았다.
- 강조하지만, 이거 엄청 높은 거다...
(Rolling Stone '10, 100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artists-147446/u2-10-92368/
돈 많이 버는 졸부로서의 의무감이 아니라 진정성을 가지고
사회와 세상에 메세지를 전달하는 성숙한 성인으로서, U2는
언제나 범진보적인 사회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해왔다.
80년대 Band Aid 및 Live Aid 참가쯤이야 너무 유명하니
생략해도 될 것 같고 국제 앰네스티, 그린피스, 월드비전,
주빌리 2000 등이 주관하는 행사와 공연에 협력해왔다.
86년엔 앰네스티 주관의 A Conspiracy of Hope 공연에
올랐고 보스니아 내전 중 행사 경험을 바탕으로 95년에
파바로티와 친구들 프로젝트를 통해 Miss Sarajevo란
노래를 발표했다. 이듬해 굿 프라이데이 협약을 앞두고
벨파스트 무대에 올라 노래했고 지우마 호세프, 아웅산 수찌,
넬슨 만델라 등 세계 지도자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어왔다.
보노 개인적으로는 80년대 니카라과 및 엘살바도르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 활동에 참여한다거나 아프리카 및 제3
세계 국가 채무 청산을 위해 무하마드 알리 및 밥 겔도프와
연대 모금 활동에 분주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03년에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07년에 영국
여왕의 명예 훈장을 받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이밖에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보노 및 멤버들의 사회
운동 이력은 차고 넘치며 하나같이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진짜배기 활동 내용이다. 매년 발표되는 노벨 평화상 후보자
명단에 보노나 U2가 괜히 단골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Mothers of the Disappeared' from The Joshua Tree,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kjuIAuSzGbc
*엘살바도르 내전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을 위한 노래.
**Brian Eno의 드럼 루프 이펙트가 매우 독특하다.
('Miss Sarajevo' by U2 and Brian Eno, 1995)
https://www.youtube.com/watch?v=PVl2lluR_Tw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알린 곡. ft. Luciano Pavarotti.
('The Hands That Built America' from Gangs of New York OST, 2002)
https://www.youtube.com/watch?v=uUzixzRufbk
*마틴 스콜세지 영화 갱스 오브 뉴욕에 수록된 곡.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from The Joshua Tree, 1987)
*official music video
**네 분 모두 참 젊고 멋지며 섹시한... good-old dayz..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브래드 델프 Brad Delp (0) | 2020.0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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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드영 Dennis DeYoung (0) | 2020.01.10 |
게디 리 Geddy Lee (0) | 2019.11.09 |
존 앤더슨 Jon Anderson (0) | 2019.10.19 |
데이빗 보위 David Bowie (1) | 2019.09.22 |
이야기를 해보자. (캐나다가 3세계가 과연 맞는가 문제는
잠시 제껴두자... 같은 영연방인데..? 궁시렁..)
캐나다를 대표하는 국민 락밴드로서 50년의 세월 동안
굳세게 자신들만의 자리를 지켜온 최강의 파워 트리오...
러쉬 Rush의 프론트맨 게디 리 Geddy Lee의
시간이 왔노라. 드디어..
미리 밝히긴 한다, 본 블로거가 러쉬의 전문가는 아님을.
상세한 수준의 논평을 원한다면 이 포스팅이 적합하진 않다.
*깊은 정보를 원하는 분은 해외 팬클럽부터 정식 가입하시길.
게디 리의 일생 프로젝트인 러쉬의 장구한 디스코그래피를
함축적으로 요약해보는 것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 예전 스팅 정도 수준의 깊이...
('YYZ' from Rush in Rio, 2003)
홀로코스트를 겪은 폴란드계 유태인 가구의 53년생 토론토
토박이 게리 리 와인립. 그는 동향의 세르비아계 이민자 2세대
알렉산더 지보지노비치와 우연히도 유년 시절을 공유한 친구
사이였는데 68년경 '우리 프론트맨이 없다, 밴드 같이 안 할래'
하는 연락을 받게 된다.
러쉬는 초기에 이 두 사람의 의기투합에 차후 닐 엘우드 피어트가
드러머로 영입되어 형성한 밴드였다. 결성 초기의 프론트맨 역은
제프 존스란 사람이었는데 2주 만에 교체되었고, 드러머는 존
럿시였다가 1집 내고 당뇨 합병증 발병으로 교체된다. 74년.
락 음악사상 최고의 트리오 밴드 러쉬. 베이스와 보컬, 키보드를
겸한 게디 리와 함께 기타와 이펙트를 책임진 알렉스 라이프슨,
그리고 여기에 드럼과 작사를 맡은 닐 피어트의 셋으로서, 지난
50년의 유구한 역사를 창의적 음악으로 채워온 거장들이면서
사실상 캐나다의 국민 락밴드라고 하겠다.
('R30 Overture' from R30 Tour, 2004)
*70년대 트랙의 테마만 모아 콘서트 인트로로 편곡한 버젼.
- 데뷔 30주년 기념 04~05년 R30 Tour 중.
(Rush)
74년 밴드와 동명 타이틀의 데뷔 앨범 Rush는 프로그레시브의
장르 색을 아직 입지 않은 작품. 프로그 문파로 넘어오기 전의
러쉬는 리의 보컬 스타일 면 유사성 때문에 레드 제플린 아류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스코어의 기본 베이스도 철저하게
블루스락에 기반하였으니 일견 타당한 비판이기도 한 셈.
1집은 그냥저냥 묻힐 뻔했다가 클리블랜드 지역 방송 DJ로 있던
도나 핼퍼란 분이 Working Man이란 숨은 트랙을 발견해 끄집어
내줌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는 고마운 행운을 얻는다. 지금도
오랜 팬덤이 송가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의미있는 트랙.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는 초기 수작이다.
('Working Man' from Rush, 1974)
*10~11년 Time Machine Tour 중. 클리블랜드(!).
- studio version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편곡이다.
- 하드락 스타일의 오리지널은 저 아래에 링크해 두었다.
(Fly by Night)
앞서 언급했듯이 럿시도 꽤 유능한 창립 드러머였지만 지병으로
안타깝게 하차하게 되고 닐 피어트가 후속 멤버로 충원되어 이후
50년의 음악 장정을 함께 하게 된다. 연주자이자 작사가로서.
두번째 앨범 Fly by Night부터 이들은 악곡 구성에 복잡성을
가미해 프로그 장르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진입한다. 75년 앨범의
동명 타이틀 트랙이 일반적으로는 가장 인기가 있는데 처음으로
대곡 구성을 시도해본 By-Tor and the Snow Dog도 나름
의미있는 실험으로서 매니아적 지지를 꾸준히 얻어왔다. 앨범이
캐나다 차트에서 처음으로 탑텐에 진입하는 성과도 아울러..
('Fly by Night' from eponymous album, 1975)
('By-Tor and the Snow Dog' from Fly by Night, 1975)
*live version from All the World's a Stage, 1976
- studio version은 거의 9분에 달한다.
('Anthem' from Fly by Night,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xBdUSueSh9s
*studio version.
(Caress of Steel)
같은 해 3집 Caress of Steel에서 러쉬는 잠시 주춤한다.
장르의 이행기인지라 방향성을 놓고 갈팡질팡 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소속사 고위층으로부터 더 대중 지향적인 팝락
장르로의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세 멤버는 절치부심하여
드디어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 반대로 가자고.
('Bastille Day' from Caress of Steel,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nrXFvs2XxN0
*live version from All the World's a Stage, 1976
(2112)
제플린에게 IV 앨범이 기념비적이듯이 러쉬의 76년 2112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전기이자 변곡점으로 작용한 걸작 중 걸작.
드디어 방황을 끝내고 프로그레시브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로
결론을 얻었으며 해당 장르 수십 년 역사를 대변하는 최고의
트랙 2112는 그 증거물임이 역력했다. 마침내, 러쉬는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현신하게 된다. 신난다~
오늘날 음악계에서 러쉬가 차지하는 거대한 형상을 기초하는데
첫번째로 중요한 전환점이 된 타이틀 트랙 2112. 본작은 20분이
넘는 이 거대한 트랙을 이해하는 지점에서부터 접근해야만 한다.
긴 곡 자체가 하나의 큰 독립적 컨셉트 가사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본 스토리와 철학은 스타워즈나 스타쉽 트루퍼스
비슷한 SF 문학에서 차용한 것이다. 가사 쓰신 피어트를
비롯하여 세 멤버가 이런 책을 즐겨 읽으시거든.
('2112' from eponymous album, 1976)
*애니메이션 및 스토리 아크가 결합한 동영상 버젼.
- Rush 팬덤을 왜 음악계의 trekkie라 부르는지 알 만하다.
철학자이자 과학 문학가인 러시아계 유태인 아인 랜드의 직접
영향 하에서 출범한, 이 범상치 않은 디스토피아 가사는 22세기
미래를 배경으로 파시즘을 돌려까는 은근한 냄새를 풍기기도..
휴 사임이란 그래픽 아티스트 겸 키보디스트가 인트로의 ARP
Odyssey를 연주하여 화제가 되었다. 7부의 소곡으로 구성되어
Overture와 The Temples of Syrinx는 묶어 싱글로 커트했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스토리 아크와 클래식 음악에 영향받은 듯한
작법으로 프로그레시브 장르의 끝물 시대상을 적확하게 반영한
역작. - Overture 프레이징 중엔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의
유명한 곡조가 대포 소리 효과와 함께 등장한다. 가사를 직접
되새겨보며 동영상으로 접근하면 한결 용이할 것 같다.
(ARP Odyssey)
2112 소곡 구성 (스튜디오 버젼 기준):
i. Overture [0:00~4:33]
ii. The Temples of Syrinx [4:33~6:45]
iii. Discovery [6:45~10:14]
iv. Presentation [10:14~13:56]
v. Oracle: The Dream [13:56~15:56]
vi. Soliloquy [15:56~18:17]
vii. Grand Finale [18:17~20:33]
*'2112' from eponymous album,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1sCxCHggxEI
*97년경 라이브. 물에 오른 연주력을 뽐낸 절정기일 듯.
(Rickenbacker 4001)
트랙들의 탁월한 완성도에 힘입어 2112는 이전의 모든 앨범
판매고 기록을 갈아엎고 러쉬 최고의 히트작으로 등극한다.
캐나다 앨범 차트 5위까지 오르고 미국에서도 소기의 성과를
얻어 처음으로 북미와 유럽을 통합한 월드 투어 길에 올랐다.
현재까지 미국에서 트리플 플래티넘, 캐나다에서 더블 플래티넘,
영국에서 골드를 기록하며 상업적 성과도 매우 훌륭하다.
05년 출간된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중 하나로
선정된 바 있고 12년에 롤링 스톤 매거진이 선정한 시대를
초월한 프로그 락 앨범 중 2위를 차지했다.
키보드를 쳐준 사임이 디자인한 스타맨 로고가 이때부터
등장하여 라이브마다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 여러
모로 터닝 포인트가 된 앨범이 아닐 수 없다.
(Robert Dimery '05,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
http://www.rocklistmusic.co.uk/steveparker/1001albums.htm
(Rolling Stone '12, Your Favorite Prog Rock Albums of All Time)
('A Passage to Bangkok' from 2112,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6s7damT8Szw
*studio version.
- 제플린의 Kashmir에서 영향받았다 함.
- 일부 평론에서는 앨범의 숨은 백미로 꼽기도 한다.
('The Twilight Zone' from 2112,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fA79lLwRYTY
*animated lyric video.
- 유명한 TV드라마에서 모티브를 따옴. 싱글로 발매.
(A Farewell to Kings)
전작의 성공에 힘입어 소속사에서 입지도 굳건해졌고
러쉬로선 자신들의 음악적 신념을 더 공고하게 밀어붙일
공간이 커졌다. 이를 배경으로 77년의 5집 A Farewell
to Kings는 프로그 장르 미학을 더 확고부동하게 세운
수작이 되어 돌아온다. 어느 관점에선 2112보다 더
중요할지 모를, 더 잘 다듬은 콘텐츠가 담긴 셈이었다.
Closer to the Heart는 러쉬의 영국 차트 첫 히트곡이자
본작을 대표하는 트랙. 영국 싱글 차트 36위까지 오르는
성공으로 앨범의 판매고를 이끌었다. 전작의 뒷면 커버에
등장한 스타맨 로고가 싱글의 커버로 쓰여 화제가 되기도.
(Closer to the Heart, single)
('Closer to the Heart' from A Farewell to Kings, 1977)
다소 팝적인 Closer~에 비해 프로그 대작 지향성을 상징하는
작품은 역시 Xanadu와 Cygnus X-1 Book 1: The Voyage.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영문학에서 모티브를 따와 오리엔탈
판타지를 표현한 Xanadu는 러쉬 디스코그래피를 상징하는
대표곡 중의 대표곡이 아닐 수 없다.
라이브에서 Xanadu를 연주할 때 리와 라이프슨이 바쁜 걸로
유명하다. 두 분 다 베이스 및 이펙트 페달에 더블넥 기타를
종횡무진하며 능수능란한 연주를 뽐내시기 때문. 명실상부한
러쉬 플레이의 시그니처 무브라고나 할까. 세 멤버 공히 이
무렵부터 스테이지 기어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돈 벌기
시작하면 장비부터 욕심내는 게 뮤지션의 숙명일지니.
(Gibson EDS-1275 & Rickenbacker 4080)
('Xanadu' from A Farewell to Kings, 1977)
('Cygnus X-1 Book 1: The Voyage' from
A Farewell to Kings,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4MlYgt-QdMI
('A Farewell to Kings' from eponymous album,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eV-5iNu6Sd8
(Hemispheres)
78년 6집 Hemispheres 역시 전작의 기조를 이어나가 더욱
공고한 팬덤 기반을 구축한 수작. 전반적인 음악성은 전작과
유사하며 La Villa Strangiato와 Cygnus X-1 Book 2:
Hemispheres 등 양대 대작을 대표곡으로 꼽을 수 있다.
'희한한 동네네~' 정도 뉘앙스로 번역할 Villa Strangiato는
라이프슨의 개인적 정서가 반영된 명품 인스트루멘탈 트랙.
사실 그의 꿈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풀어낸 것이라고. 12부의
소곡으로 나누어지고 라이브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팬덤이
지대한 충성도를 아끼지 않은 시그니처 수작이라 하겠다.
('La Villa Strangiato' from Hemispheres, 1978)
(Neil Peart drum set)
Cygnus X-1은 전작 앨범에서 이어지는 연작 형식의 작품이다.
AFtK의 Book 1이 영화 인터스텔라처럼 백조 자리 블랙홀로
탐험을 떠나는 비행사의 이야기이고, Book 2는 그 너머에서
이성을 지배하는 아폴로 및 감성을 지배하는 디오니소스 간의
극단적 대립을 상상한 이야기이다. 스토리의 배경을 이해하고
가사를 해석해보면 색다르게 다가갈 수 있을 게다.
('Cygnus X-1 Book 2: Hemispheres' from Hemispheres, 1978)
*studio version audio.
(Oberheim 8 Voice)
이밖에 환경 파괴에 관한 우화 The Trees도 팬덤이 참으로
사랑해마지 않는 작품이다. 전작과 본작의 두 장을 거치며
영미 양국에서 팬덤이 확장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었다.
('The Trees' from Hemispheres,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JnC88xBPkkc
*official music video.
(Permanent Waves)
사실 70년대가 끝나가면서 프로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러쉬 정도만이 끝자락을 부여잡고 시간 연장을 계속
외쳐대는 아티스트였을 것. 뉴웨이브의 시대를 맞아 어떠한
식으로든 음악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만은 자명했다.
잠시 휴식한 후 새로 발매한 80년 7집 Permanent Waves는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적확하게 부응한 역작으로서 80년대란
시기에 맞추어 태세를 전환하는 러쉬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한 앨범이다. 영국과 캐나다 앨범 차트에서 각 3위,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서 4위에 오르는 등 상업성도 성공적이었고.
('The Spirit of Radio' from Permanent Waves, 1980)
*studio version.
영국 싱글 차트 13위까지 오른 The Spirit of Radio, 그리고
라디오 친화적인 팬덤 최고의 송가 Freewill.. 두 곡은 본작의
탁월한 음악성을 대변하는 명곡들이자 수십 년간 러쉬 라이브의
셋리스트를 장식한 시그니처 튠이다. 점점 신디사이저의 비중이
늘어가는 세부 편성에도 많은 이가 주목하고 있었다.
('Freewill' from Permanent Waves, 1980)
*studio version.
('Jacob's Ladder' from Permanent Waves,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iuKEp-ropCc
*studio version.
- 당시 헤비메탈과 뉴에이지를 결합했다는 평을 얻었다.
(Moving Pictures)
변화와 혁신의 80년대. 흑인 음악과 뮤직 비디오가 미디어
콘텐츠의 새로운 맹아로 떠오르던 이때 모든 아티스트는
생존을 위한 변혁을 추구했다. 러쉬는 이에 슬기롭게 대응하며
마침내 81년, 그들 커리어 최고의 명반 Moving Pictures를
8집으로 발매한다. 미국과 캐나다, 북미 시장 공히 쿼드러플
플래티넘에 빛나는 최고의 판매 실적을 올린 바로 그 앨범.
캐나다 앨범 차트에서 최초로 탑을 찍고 미국 빌보드 200
3위 및 영국 차트 3위에 오른 최고의 성공작. 러쉬 특유의
독창성을 시대적인 상업 감각에 탁월하게 조화시켜 어느
면에서 듣더라도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명반이었다.
전술한 롤링 스톤 선정 시대를 초월한 프로그레시브 락 앨범
랭킹에서 12년에 10위, 15년 집계로 3위를 차지했고,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중 2112와 함께 선정되는 등..
('Tom Sawyer' from Moving Pictures, 1981)
*official music video.
(Rolling Stone '12, Your Favorite Prog Rock Albums of All Time)
(Rolling Stone '15, 50 Greatest Prog Rock Albums of All Time)
리의 Oberheim OB-X 리프가 불을 뿜는 오프닝 트랙 Tom
Sawyer... 본작을 상징하고 러쉬 전체 디스코그래피 최고의
명곡을 꼽을 때 종종 탑을 차지하는 시그니처 튠이다. 가사는
시대상을 반영하여 개인주의적 정서의 변화를 노래하려 했던
피어트가 이웃 밴드의 동료와 협업하여 만든 내용. - 70년대
후반부터 작사의 성향이 변화하고 있었다.
(Oberheim OB-X)
('Limelight' from Moving Pictures, 1981)
*official music video.
미 메인스트림 락 차트 4위까지 오른 Limelight는 팬덤이
러쉬 최고의 인기곡을 꼽을 때 함께 수위를 다투는 작품.
셰익스피어 희곡 뜻대로 하세요의 구절을 인용하며 당시
절정을 구가하던 밴드의 성공가도에서 느낀 왠지 모를 회한과
부담감을 풀어낸 내용이다. 독특한 비브라토 효과를 노리고
암을 장착한 라이프슨의 Fender Stratocaster 사운드가
트레이드 마크인 곡.
(Fender Stratocaster)
('Red Barchetta' from Moving Pictures, 1981)
*80년 캐나다 라이브.
자동차를 주제로 한 단편 소설을 가사로 엮은 Red Barchetta
및 인스트루멘탈 YYZ 역시 본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그니처
트랙. 라이브마다 빼놓지 않고 셋리스트에 들어가는 팬덤 최고의
인기곡들이다. YYZ는 토론토 공항 식별 코드를 모르스 부호로
바꿔 4분의 5박자 타임 시그니처로 표현한 독창적 연주곡으로서
비록 수상은 폴리스에게 밀렸지만 82년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락 인스트루멘탈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다.
('YYZ' from Moving Pictures, 1981)
*studio version audio.
*YYZ 제작 과정에 대한 코멘터리를 담은 다큐.
https://www.youtube.com/watch?v=2ht8_3WYWzo
- 10년에 발매된 DVD 중 해당 파트만 발췌한 편집본.
- 멤버들은 제목을 '와이와이젯~'이라 발음한다.
(Fender Jazz Bass)
이 시기 본작이 앨범으로서의 성과를 따질 때는 사실상 러쉬
커리어의 최정점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롤링 스톤즈로 치면
78년 Some Girls 앨범 정도 시기랄까, 밴드의 기나긴 음악
여정의 변화 양상에서 두세 차례에 걸친 중간 변곡점으로 꼽을
걸작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 블루스에서 프로그레시브를
거쳐 포스트펑크로 이행하는 데까지 완성한 셈. 그래서 대곡
구성에의 의존도가 점점 줄어든 것이다. 90년대 이후엔
얼터너티브까지 영역을 확장한다.
특기할 사항으로 리가 그의 상징이던 Rickenbacker 4001에서
Fender Jazz Bass로 처음 갈아탄 앨범이기도.. 역사상 손에
꼽히는 베이시스트이시니.
('Vital Signs' from Moving Pictures,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Yh5RSv52g6U
*official music video.
- 레게나 폴리스의 영향이 돋보이고 시퀀서 이펙트로도 유명.
- sequencing은 Oberheim OB-X로 만들었다고.
- 3분쯤 지나서 뮤비 장면에도 스치듯이 지나간다.
(Exit... Stage Left)
같은 해 하반기에 발표한 두번째 라이브 앨범 Exit...
Stage Left는 러쉬의 라이브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아카이브이다. 76년 첫 라이브 앨범 All the
World's a Stage가 4집까지 초창기 활동 기록을 담고
있는데 반해 본작은 음악적 창의성이 정점에 올랐던
70년대 후반의 모습을 온전히 실은 역작이므로.
미국 빌보드 200에서 10위까지 오르는 등 당시 반응도
매우 좋았던 데다가 유튜브 등 오늘날의 미디어에서도
팬덤이 광적인 지지를 보여온 더블 앨범으로서 4~8집
중 웬만큼 핵심적인 트랙은 다 담고 있다.
아래는 수록된 주요곡 목록.
- 4집: A Passage to Bangkok
*2112는 첫 라이브 AtWaS에 수록
- 5집: Closer to the Heart, Xanadu
- 6집: La Villa Strangiato, The Trees
- 7집: The Spirit of Radio, Freewill, Jacob's Ladder
- 8집: Tom Sawyer, YYZ, Red Barchetta
('Tom Sawyer' from Exit... Stage Left, 1981)
*81년 캐나다 몬트리올 아카이브.
(All the World's a Stage)
('2112' from All the World's a Stage, 1976)
*76년 캐나다 토론토 아카이브.
- 곡의 말미에서 원곡에 들어간 내레이션을 확인할 수 있다.
(Signals)
앨범으로서 최고의 성과가 전작이라면 82년 9집 Signals는
싱글로서 정점을 찍어낸 작품이다. 러쉬 최고의 시그니처 송
Subdivisions가 실린 바로 그 앨범 맞다. 70년대 블루스에서
프로그를 거쳐 뉴웨이브까지 섭렵한 러쉬가 바로 이 지점까지
도달한 완성형 밴드임을 입증한 수작이었다.
라디오 친화적 장르에 학원가 왕따 문제를 가사로 적절히 배합해
메인스트림 락 차트 5위까지 오른 Subdivisions는 팬들이 이들
대표곡을 논할 때 능히 Tom Sawyer와 자웅을 겨룰 만큼 러쉬를
상징하는 노래가 아닐 수 없다. Minimoog와 Oberheim OB-X로
리가 빚어낸 키보드 프레이즈는 락 음악사상 가장 유명한 리프로
꼽힌다. 한국에서 반응은 별로였지만 해외에선 신디사이저 하면
떠오르는 곡조로 밴 헤일런의 Jump와 함께 80년대 대표 멜로디.
(Geddy Lee gear set)
('Subdivisions' from Signals, 1982)
*official music video.
*Keyboard Magazine's interview with Geddy Lee, 1984
https://www.cygnus-x1.net/links/rush/keyboard-09.1984.php
- 신디 비중이 늘어나며 기타와 밸런스 맞추기가 힘들었다고.
캐나다 1위, 영국 3위, 미국 10위 등 영미권 앨범 차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싱글로 발매되어 메인스트림 락 차트
탑에다 빌보드 핫100 탑40 뿐 아니라 러쉬의 유일한 캐나다
싱글 차트 탑 기록의 깜짝 성공을 거둔 New World Man은
본래 수록 안 될 수도 있었던 행운의 트랙이라고. LP 시간이
남아서 맨 마지막에 극적으로 수록되었다네.
('New World Man' from Signals, 1982)
*studio version audio.
81년 Moving Pictures, Exit Stage Left, 82년 Signals에
이르는 일련의 앨범은 러쉬의 음악 세계가 뉴웨이브의 시대적
소명에 완연하게 정착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이라 하겠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까 참 쉬워 보일지 모르겠는데, 10년 - 20년을
넘어서서 시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창작 성향을 변화시키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작업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탄탄한 여정을 보여주며
비로소 러쉬라는 아티스트가 북미를 넘어서서 세계구급 인정을
받는 위상에 올라선 셈이다. 토론토나 클리블랜드 지역 밴드에
머무른 채 멈춰설 수도 있었던 실력자들의 홀로서기 과정이
세상 모든 무명 뮤지션들에게 주는 강력한 시사점이 아닐까.
두 번 정도 걸친 변곡점을 보여주며 20년에 가깝게 지속하는
음악적 발전을 이 지점까지 입증해냈기에 이후 수십 년 동안
탄탄한 팬덤이 형성되었다고 논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은 본작을 끝으로 2집부터 프로듀싱 책임을
공유해온 테리 브라운과 결별한 것. 80년대에 변화한 신디
중심의 경향에 회의를 느꼈다 한다.
('Countdown' from Signals,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XW-8yCKwhBE
*official music video.
- 여기 녹음된 교신은 NASA의 실제 기록을 따온 것.
- 러쉬 멤버들은 우주 왕복선 발사식에 공식 초청된 적 있다.
('The Analog Kid' from Signals,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56qyILcZZuY
*studio version audio.
- 같은 앨범의 Digital Man과 대구를 이루는 트랙.
(Grace Under Pressure)
84년 10집 Grace Under Pressure는 전작의 기조를
이어가되 신디사이저가 라이프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게
조율에 신경을 썼다고. 차트 성적은 미미했으나 Distant
Early Warning이 대표적 트랙으로 팬덤의 지지를 얻었다.
('Distant Early Warning' from Grace Under Pressure, 1984)
*official music video.
('Red Sector A' from Grace Under Pressure, 1984)
https://www.youtube.com/watch?v=B3ytkyn3vUU
*live version from Grace Under Pressure Tour
(Power Windows)
85년 11집 Power Windows에 이르러 러쉬는 더 이상 프로그
냄새를 찾을 수 없는 온전한 밸런스를 이루고 있었다. 전작들에
비해서야 심플한 패턴이지만 그 균형을 맞추기는 더 어려웠다고.
사람 사이 권력 관계라는 주제를 탐구한 전체 트랙 중 The Big
Money나 Manhattan Project에서 개괄적 맥을 짚을 수 있다.
('The Big Money' from Power Windows, 1985)
*official music video.
- 당시 CG 기술이 집약된 듯. 이런 게 유행이었다.
('Manhattan Project' from Power Windows,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n6CaKoX5a6o
*studio version audio.
- 내용은 당연히 동명의 핵미사일 실험을 다룬 것.
- 이 한 곡을 쓰기 위해 수백 페이지 전문서를 연구하셨다고.
('Marathon' from Power Windows,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cxxgEzVkEjI
*official music video.
(Hold Your Fire)
87년 12집 Hold Your Fire에서 80년대 앨범 중 상업적 성과는
비교적 저조한 편이었다. 단 에이미 맨이 백킹 보컬로 참여한
Time Stand Still 같은 대표 싱글에서 여전히 재기발랄한
밴드 전체의 가치관을 쫓아갈 수 있었다.
('Time Stand Still' from Hold Your Fire, 1987)
*official music video.
- 백킹 보컬 하신 Aimee Mann은 당시 포스트펑크 씬의 여신이셨다.
('Force Ten' from Hold Your Fire,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8mch3CbR4Sc
*studio version audio.
- Geddy Lee의 베이스 라인과 시퀀서 프로그래밍이 탁월하다.
(Presto)
(Roll the Bones)
89년 13집 Presto 및 91년 14집 Roll the Bones에 이르러
시대는 더 이상 포스트펑크 계열의 팝락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러쉬는 다시 기타-센트릭한 하드락 베이스에 색다른
맛을 가미하기로 전략을 수정한다. 또 다른 변곡점.. 14집의
Dreamline은 이 지점을 대표하는 90년대의 대표 트랙이다.
('Presto' from eponymous album, 1989)
https://www.youtube.com/watch?v=5-tqtgQFcHc
*studio version.
('Dreamline' from Roll the Bones, 1991)
*live version from Rush in Rio, 2003
(Counterparts)
(Test for Echo)
93년 15집 Counterparts 및 96년 16집 Test for Echo는
트리오 구성의 기타-센트릭 성향을 얼터너티브하게 한층 더
굳힌 앨범들. 재즈, funk, 힙합 등 당대에 믹스가 유행하던
장르와 상생을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중년이 되어 버린
러쉬였지만 여전히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Leave That Thing Alone' from Counterparts, 1993)
*instrumental - studio version.
('Test for Echo' from eponymous album, 1996)
*studio version.
(Vapor Trails)
(Rush in Rio)
97~98년에 피어트에게 개인사적인 불행이 닥쳤다. 교통 사고로
딸을 잃고 연이어 지병으로 아내가 사망한 것. 그는 한때 은퇴를
결심하고 북미 대륙을 바이크로 횡단하는 여행을 하며 몇 해 동안
마음을 다잡았다. 01년에 다시 러쉬로의 복귀를 선언하고 이듬해
17집 Vapor Trails로 다시 팬을 만나게 된다.
기타-센트릭한 밴드 포맷으로의 혼연일체를 보여주기 위해 신디
백킹이나 기타 솔로잉마저 빼는 모던한 성향이 새로운 세기의
러쉬 팬덤에게 신선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발매 직후 커리어
최초로 멕시코 및 브라질 투어를 단행했는데 이 아카이브는
03년 라이브 앨범 Rush in Rio로 결실을 맺게 된다.
('One Little Victory' from Vapor Trails, 2002)
*studio version.
(Snakes & Arrows)
(Clockwork Angels)
04년에 러쉬는 데뷔 30주년 투어인 R30를 전격적으로 단행해
이듬해 그 아카이브를 발매한다. 07년 18집 Snakes & Arrows는
프로그 메탈의 본령으로 돌아온 듯이 하드한 원숙미를 뽐내면서
싱글 Far Cry를 각인시킨다. 앨범은 미 빌보드 200 차트 3위로
데뷔하고 60만 장 이상의 전세계 판매고를 기록한다.
10년엔 캐나다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Tom Sawyer,
Subdivisions, The Spirit of Radio, Limelight, Closer to
the Heart의 다섯 트랙을 올린다. 12년에 나온 공식 19집
Clockwork Angels는 원숙한 장인의 솜씨를 자랑하듯이
팬덤의 성원을 얻었고, 이듬해 13년엔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린다.
15년에 R40 투어를 결행한 후 18년초에 러쉬는 지난 50년간
뜨거웠던 밴드 활동을 공식 청산하고 해체를 선언한다. 프로그
메탈의 장르적 단초를 제공한 락 음악계의 거장들은 이제
노년의 휴식을 즐기며 여생을 보낼 터이다...
('Far Cry' from Snakes & Arrows, 2007)
*official music video.
('Clockwork Angels' from eponymous album, 2012)
*studio version audio.
*'Subdivisions' live in Frankfurt
- 04년 R30 Tour 중.
('The Spirit of Radio' from Exit... Stage Left, 1981)
- live in Canada 1980
('YYZ' from Exit... Stage Left, 1981)
- live in Canada 1980
('Closer to the Heart' from Exit... Stage Left, 1981)
- live in United Kingdom 1980
('Working Man' from Rush,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IrxzRFj03Ro
*studio version.
러쉬, 캐나디안 밴드 액트를 상징하는 대명사이자 세계적으로
4천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대형 아티스트. 레드 제플린과
예스와 킹 크림슨을 결합하여 프로그레시브 메탈의 서브장르를
창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선도적 실력자들. 한 분 한 분이
자신들의 부문에서 랭킹 상위에 들 정도로 비르투오소 성향이
강한 창작자들이며 크림, 폴리스와 함께 역사상 최강의 트리오.
러쉬 음악의 뿌리인 프로그 장르에서 특히나 그들의 유산은
특별하여 메탈리카, 드림 씨어터, 퀸즈라이크,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레드 핫 칠리 페퍼스, 툴, 심포니 엑스, 트렌트 레즈너
같은 후배들이 직접 영향을 받았음을 천명한 바 있을 정도이다.
디지털 드림 도어 프로그레시브 락 아티스트 부문에선 현재
6위에 랭크돼 있으며 웬만해선 탑7을 벗어나지 않을 게다.
- 탑5는 거의 고정이고 6~7위를 제쓰로 툴과 다툴 테니..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Progressive Rock Art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artistsprog.html
디지털 드림 도어 락 기타리스트 부문 현재 28위에 랭크된
알렉스 라이프슨은 블루스와 하드락에서 시작하여 프로그,
포스트펑크, 레게, 스카, funk, 재즈까지 전 장르를 귀신같이
다루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전형이다. 이펙터를 조율하여
톤과 모드에의 어프로치를 다변화하는 면에 있어서는 80년대
앤디 서머스 및 디 에지와 함께 트리니티로 추앙받던 인물.
또한 가장 저평가 받아온 기타리스트 중 하나로 항상 꼽힌다.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Guitar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newguitar.html
디지털 드림 도어 락 드러머 부문 현재 탑을 찍고 계신 - 본
블로거 기억에 3위 이하로 내려간 적이 별로 없다 - 닐 피어트.
키스 문, 진저 베이커, 존 본햄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들을
한참 뛰어넘는 완성도로 후배 연주자의 숭앙을 받는 거장이다.
특히 90년대에 재즈 드러밍으로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면서
아예 기초 그립부터 다시 레슨을 받은 일화는 재능이란 것이
결국 성실한 노력에서 비롯된다는 진리를 설파한다. 평단에선
작사가로서의 능력도 크게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Drummer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drummers.html
그리고 게디 리. 디지털 드림 도어 락 베이시스트 부문 현재
7위에 올라 있는 최고의 연주자이자 키보디스트로서도 명함을
내밀 만한 실력자. 하이 테너를 넘어가는 초고음 레지스터라서
보컬리스트로선 다소 호불호가 갈리는 듯도 하다만 러쉬의
시그니처 톤을 형성하는 코어라는데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스티브 해리스, 존 명, 클리프 버튼, 빌리 시언 등 후배들이
존경과 헌사를 바친 그 전설의 뮤지션이 바로 이분인 게다.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Bass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bassguitar.html
(Hit Parader '06, Top 100 Heavy Metal Vocalists)
*13위로 랭크되셨다.
한 분 한 분의 실력이 대단히 출중함에도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고 새로운 변화에 도전하는 정신을 간직한 대인배들이기도.
섹스나 마약 등 락계에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일으킨 적이 없는
깨끗한 사생활의 소유자들이면서 진지하게 서적을 탐독하며
음악 세계를 살찌우는데 항상 노력하는 진지한 선구자들 세
분의 아름다운 결합... 50년의 락 음악사를 신실과 창의란
이름으로 수놓은 그 영광의 이름이 곧 러쉬인 것이다.
('Limelight' from Rush in Rio, 2003)
*'Tom Sawyer' live in Dallas
- 13년경 Clockwork Angels Tour로 추정.
*'Subdivisions' live in Dallas
- 13년경 Clockwork Angels Tour로 추정.
본 블로거는 세대가 세대인지라 Grace Under Pressure
및 Power Windows 무렵부터 러쉬를 즐겨왔는데 90년대
이후 기타 중심 트리오로 복귀한 세번째 변곡점 후 음악을
특히 눈여겨본 편이다. - 물론 70~80년대 튠도 좋아한다만.
특히 Roll the Bones에 수록된 인스트루멘탈 Where's
My Thing?은 YYZ와 함께 가장 완성도가 높은 연주곡인
동시에 베이스와 드럼의 리듬 섹션 매력이 제일 선명하게
드러난 트랙이라 여겨 참 좋아한다. 오랫동안 라이브에서
종적을 감추었다가 12년 투어 이후에 다시 셋리스트에
등장하여 반가웠던 기억도 있다. 이에 강하게 필청을
권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치려 한다.
('Where's My Thing?' from Roll the Bones, 1991)
*live version from Clockwork Angels Tour, 2013.
- 셋리스트에 올리면 보통 Peart의 솔로잉에 연결하는 곡이다.
**동영상 버젼.
https://www.youtube.com/watch?v=AKIc20Liw3c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데니스 드영 Dennis DeYoung (0) | 2020.01.10 |
---|---|
보노 Bono (0) | 2019.12.07 |
존 앤더슨 Jon Anderson (0) | 2019.10.19 |
데이빗 보위 David Bowie (1) | 2019.09.22 |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 (0) | 2019.08.15 |
음악 산업과 음악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상징성
때문에라도, 언젠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제대로 다뤄
드려야 합당하다고 고민해온 이 분을 올리겠다.
프로그레시브 락의 역사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제공한
예스 Yes의 영원한 프론트맨으로서 아방가르드 계열
보컬리스트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봉으로 오래도록
추앙을 받으실, 존 앤더슨 Jon Anderson 이야기이다.
*Roundabout. 90년대 초반 Union Tour 중.
- 라인업은 Anderson-Bruford-Wakeman-Howe
+ Squire-Rabin-Kaye-White = 무대 위 8인조.
1944년 스코틀랜드 출신 가계에서 맨체스터 북방의 랭커셔를
출생지로 태어난 존 로이 앤더슨.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 축구
선수를 꿈꿨지만 일찍이 열 다섯 나이부터 학교를 그만 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런저런 초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가 알바 뛰던 클럽 사장님 소개로 런던에서 크리스
스콰이어를 만나며 밴드 결성에 의기투합하게 된다. 68년.
앤더슨이 아트 가펑클의 전성기 보이스 텍스처와 상당히 유사한
면도 발견되거니와, 두 사람이 교집합으로 찾은 음악적 지향성은
놀랍게도 사이먼 앤 가펑클이었다. 그때는 팝씬 전체가 본능적인
포크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실 당시를 살아 본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15년에 작고하신 스콰이어는 락 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베이시스트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분이다. 보통 훌륭한
베이스 주자가 핑거링과 플럭킹, 태핑 등 손가락을 주로 쓰는데
반해 피킹만으로도 후배들 기 팍팍 죽이는 테크닉과 음악성,
두 토끼를 다 잡는 공전절후의 전설이셨다. 디스토션 걸린 거친
톤에도 능하고 재즈 모드도 한 가닥 하는 등 전천후이신지라
상대적으로 기타가 소프트한 예스 사운드에서 핵심이신 분.
('America' from Yesterdays,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3CACWj18ruk
*Simon & Garfunkel 원곡의 커버.
- 72년 싱글 발매 후 75년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
예스의 1집이 포크 색깔을 조금 드러내며 팝 지향적 성향을 가진
것도 이해가 갈 만한 일일 터이다. 결성 초기 예스는 앤더슨과
스콰이어 두 사람의 결탁으로 밴드를 리딩하고 나머지 사람이
하나 둘 규합한 형태였는데 이런 식으로 드럼에 빌 브루포드,
기타에 피터 뱅크스, 키보드에 토니 케이가 모여 들었다고.
그냥 팝 밴드였던 1집 Yes나 심포닉 락의 가능성을 보여준 2집
Time and a Word는 골수 팬을 제외하고 상업적으로 큰 의미를
찾기 어려우니 과감하게 생략하는 점 양해 바란다. 2집에서
대편성 관현악을 동원한 방법론에 뱅크스가 회의 어린 시각을
보였고 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해 발매 직전에 탈퇴해 버린다.
대체 연주자로 한때 로버트 프립(!)의 영입을 시도했으나 결국
최종 낙점을 받은 사람은 스티브 하우였다.
폄하하긴 미안하지만 하우가 뱅크스보다 훨씬 다채로운 기법에
능하고 락, 포크, 블루스, 컨트리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를 줄 알며
일렉트릭과 어쿠스틱을 가리지 않는 방법론에 능하다는 점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 앞선 두 앨범의 상업적 실패로 음반사에서
잔뜩 퇴진 압박을 받고 있던 차였기에 앤더슨과 스콰이어는
새 진용으로 절치부심하고 창작에 몰두하였다.
(The Yes Album)
71년 3집 The Yes Album이 결과물. 그들이 얻어낸 첫번째
상업적 성공작이다. 전작이 영국 차트에 처음 진입하긴 했으나
미미한 성적이었고 본작에 와서 앨범 차트 4위까지 오르고
미국 앨범 차트에선 40위까지 올랐다. 앨범의 대표 트랙인
I've Seen All Good People의 1부 파트곡 Your Move가
싱글로 발매되어 핫100에서 탑40에 오르기까지 한 것.
이번 포스팅 내내 그런 태도를 유지하겠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싱글 중심의 상업성 모드로 활동하는 액트가 아니다.
주로 앨범 차트의 성적과 이를 뒷받침하는 팬덤 중심의 끈끈한
유대 관계와 프로모션 투어 실적이 주요한 수익원인 밴드이다.
그렇더라도 이따금 싱글 히트가 올라오면 앨범 전체를 알리는데
살짝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 기실 모든 프로그 씬의
아티스트들 수익 구조가 대동소이할 터이다.
밴드의 오랜 역사를 지탱하는 활동 구조가 The Yes Album에
와서 비로소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이 참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전작 두 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커버 곡을 싹 없애고 본작부터 크게 맘먹고 자신들의 창작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나타난 결과이니 더욱 뿌듯한 것이다. 밴드
멤버들의 치열한 내부 토론을 통해 프로그레시브라는 장르적
지향성 역시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도출해낸 셈이기도 하고.
('Starship Trooper' from The Yes Album, 1971)
(Portuguese 12-string Guitar)
그런 목표를 명징하게 구현해낸 본작 최고의 트랙은 뭐니뭐니
해도 Starship Trooper가 되겠다. SF장르인 로버트 하인라인의
저명한 소설에 영향을 받은 가사이다. 작사는 물론 앤더슨의
작품이고 스콰이어와 하우의 공동 작곡이다. Life Seeker -
Disillusion - Wuerm의 3부로 구성된 9분 여의 대작으로서
프로그레시브의 전성기 역사를 장식하는 명곡이다. 무엇보다
예스의 음악적 지향성을 규정하는데 밑거름이 된 작품이다.
그밖에 오프닝 트랙 Yours Is No Disgrace를 놓치지 않으면
본작이 주는 느낌을 감잡을 수 있을 테고 I've Seen All Good
People에서 하우가 포르투기즈 12현 기타를 멋드러지게 치는
부분도 캐치하시길. (물론 예나 지금이나 하우의 시그니처
기어는 ES-175이지만서도..)
전반적으로 하우의 재기발랄한 솔로잉에 비해 키보드 파트가
뭔가 허전하게 들리는 앨범이기도. 케이는 스스로 아이덴티티를
오르가니스트로 규정한 뮤지션인지라 아날로그 신디사이저의
도입에 거부감이 있던 편이었고 이 점이 팀의 균열에 영향을
미쳐 결국 해고된다. 그의 대체자로서 데이빗 보위와 음악하던
릭 웨이크먼이 출현하며 드디어 역사가 다시 쓰여진다.
('I've Seen All Good People' from The Yes Album, 1971)
*73년 라이브 앨범 Yessongs에 실린 버젼.
('Yours Is No Disgrace' from The Yes Album, 1971)
*73년 라이브 앨범 Yessongs에 실린 버젼.
(Fragile)
71년 하반기 내내 작업하여 연말에 낸 4집 Fragile. 예스 연대기
사상 최대의 히트를 기록했고 프로그레시브 최고의 명반으로
누구나 엄지 척하고 꼽는 세기의 걸작 앨범이 웨이크먼 영입과
함께 나와 버렸다. 락 음악의 역사가 새로 쓰여진 순간이었다.
제작이 이루어지던 당시 밴드의 사정은 여러 모로 어수선했다고.
지난 두 번의 앨범을 거치며 두 명의 주요 멤버를 잃었고 상업적
가능성은 그나마 희망의 불씨를 살렸지만 다 함께 계속 음악을
해나갈 수 있을까 불안해 하던 한창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에
불과하니 그럴 수밖에. 앨범 타이틀은 언제든지 깨질지도 모를
밴드의 조직 상황과 멤버들의 심리를 상징하는 의미였다 한다.
희한하게도 밴드의 시대였던 70년대는 항상 그렇게 불안불안한
환경에서 최고의 역작이 양산되던 때였다. 미국 앨범 차트 4위,
영국 앨범 차트 7위, 발매 당시 미국 골드 및 영국 실버 인증,
커트한 싱글의 핫100 차트 13위 등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밴드 커리어 최고 성적의 역사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Roundabout' from Fragile, 1971)
*가사는 회전 교차로 위 유쾌한 드라이브 이야기.
- 의외로 심각한 가사는 아니다. 단순한 메세지도 명곡의 조건.
(Gibson ES-175)
커트 싱글은 물론 프로그 최고의 명곡 Roundabout. 예스의
시그니처 튠이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작품이다.
하우의 어쿠스틱 인트로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다가 베이스
다이나믹스의 교과서 같은 스콰이어의 유명한 리프가
verse를 이끌고 가는 구조이다.
키보드 파트가 전작에 비해 훨씬 더 탄탄해졌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며 런던 왕립 음악원 출신으로 클래식 기본기가 강한
웨이크먼이 왜 불세출의 연주자인지 탄식하게 만들 터이다.
변칙 어프로치에도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브루포드의
jazzy한 프리 스타일에도 경탄을 자아내게 될 것이며...
70년대가 아니면 나오기 힘든 슈퍼그룹의 빈틈없는 합.
중심에 앤더슨의 미성이 자아내는 신비로움과 장중함의
고결한 합성 작용 같은 것이 있다. 평생에 걸친 예스 라이브
무대에서 이 곡은 오랜 팬덤의 애국가처럼 셋리스트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앵콜 곡이었다. 전성기 예스를 상징하는
전형성을 간직하면서도 대중적 감성을 잃지 않은 명곡...
더 말해 무엇 하랴. 어떤 라이브든 찾아서 즐겨 보길.
(Roundabout, single)
('Long Distance Runaround' from Fragile, 1971)
*dissolved into 'The Fish (Schindleria Praematurus)'.
총 9개 트랙 중 넷은 다섯 명의 합동 작업, 다섯은 개인이
창작한 곡으로 구성된다. 그룹 트랙 중 Long Distance
Runaround는 비록 앤더슨이 작곡을 주도하긴 했어도
멤버 전체의 팀워크가 빛나는 또 하나의 명곡이다. 역시
오래도록 무대에서 팬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시그니처 튠.
하우의 기타 리프와 스콰이어의 콤비네이션이 인상적이며
Roundabout의 싱글 B사이드에 실리기도 했다.
The Fish는 스콰이어의 솔로잉 곡인데 팬덤에서는 오랫동안
위 LDR의 2부 파트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LDR에서
트랙을 커트하지 않고 디졸브로 바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라이브에선 두 곡을 한 곡처럼 묶어 6분 짜리로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Heart of the Sunrise' from Fragile, 1971)
예스의 라이브 셋리스트에서 네번째로 빈번하게 연주된다는
Heart of the Sunrise는 브루포드와 스콰이어가 중심이
되는 트랙이다. 6/8, 3/4, 4/4 등 타임 시그니처를 이리저리
사정없이 옮겨가며 프레이징을 구성해 수많은 후배 밴드를
좌절시켰던ㅠ..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하는 느낌을 받을 듯.
('South Side of the Sky' from Fragile, 1971)
South Side of the Sky에선 하우가 헤비한 어프로치조차
능수능란하다는 것, 예스가 웨이크먼을 영입한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것, 앤더슨과 스콰이어 등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보컬 하모니도 예스 음악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라는 것 등
세 가지 매력을 발견하리라 확신한다.
최근까지 미국에서만 2백만 장이 팔려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 영국에선 플래티넘. 구불구불 물결치는 듯
독특한 예스의 로고는 저명한 디자이너 로저 딘이 만든 건데
바로 본작에서부터 등장함을 알 수 있다.
Fragile 앨범을 듣고도 예스가 왜 최고의 밴드인지 모르겠다고?
그럼 요즘 세상의 쓰레기 음악에 지쳐서 귀가 썩었다는 뜻이니
귀청 정화의 시간을 급속하게 가지길 권유한다. 헤비메탈 씬에
딥 퍼플의 제2기가 있다면 프로그 씬에는 예스 제3기가 있다...
이거슨 만고불변의 진리일지니.
('Roundabout' from Yessongs, 1973)
*73년 라이브 앨범 Yessongs에 실린 버젼.
(Close to the Edge)
1972년. 음악 활동의 상업성 면에서 최고의 시기를 구가하던
다섯 명의 젊은 뮤지션들이 연초의 전작 투어를 마치고 다음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 예술적 창의성에 있어 강한 자신감으로
무장해 있던 이들은 교만하다는 오해를 살 만큼 완성도 높은
대곡 셋으로 채운 작품을 주조해낸다. Close to the Edge.
다섯번째 앨범으로 예스 음악성의 정점을 찍었다는 앨범이다.
비교적 짧은 스코어로 상업적 코드를 맞춰 보려던 전작에 비해
정말 원없이 하고 싶은 것 다 질러버리고 전성기 멤버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작이었다. 19분, 10분, 9분에 달하는 단
세 개의 대작 트랙으로만 앨범을 채워 음악적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는 부러움 섞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72년경 Wakeman의 gear set.
- Minimoog Model D
- Mellotron M400
- Hammond C-3
- RMI 368 Electra-piano
- Steinway Concert Grand
(Rickenbacker 4001)
미국 앨범 차트 3위로 역대 최고의 성적을 세웠고 영국 차트에선
4위까지 올랐다. 최근까지 영미 양국과 캐나다 플래티넘 기록을
세운 디스코그래피 사상 최고의 완성도와 성적을 보여준 걸작.
프로그레시브 장르의 신기원을 이룩한 장르의 명작 앨범. 더는
올라갈 곳 없을 듯하던 이들에게도 위기가 오고 있었으니 제작
프로세스에 불만을 가지던 브루포드가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Yessongs)
브루포드는 재즈와 아방가르드 성향이 꽤나 강한 뮤지션인지라
전작의 제작 과정에서 음악 취향 차이가 심해 고생했다고. 결국
킹 크림슨으로 이적하기 위해 Close to the Edge 녹음제작을
끝내자마자 탈퇴를 단행한다. 이후 킹 크림슨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여줬으니 제자리를 찾아간 셈일까. 아쉽긴 하지만.
후임으로는 플라스틱 오노 밴드에서 존 레논의 세션을 담당하던
앨런 화이트가 낙점된다. 장르를 두루 거친 다양한 경험치에다가
당장 영입이 가능했던 운신의 폭이 영향을 미쳤던 듯. (후보 중엔
에인슬리 던바도 있었단다.) 단, 팬덤에 따라서는 스콰이어 -
하우 - 웨이크먼 - 브루포드 시절의 환상적 연주 합이 그리워
화이트를 폄하하는 경향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Perpetual Change' from Yessongs, 1973)
*Bill Bruford on drums.
- original track belonging to The Yes Album, 1971
- 11' 30"쯤부터 브루포드의 솔로잉이 등장하는 소중한 트랙.
('Long Distance Runaround' from Yessongs, 1973)
*Bill Bruford on drums.
- The Fish가 왜 Squire의 곡인지, 수려한 솔로잉을 들어 보시라.
73년에 발매된 최초의 라이브 앨범 Yessongs는 과도기 시절의
질풍노도 같은 연주력 상승치를 담아낸 유일한 아카이브라서
팬덤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작품이다. 트리플 앨범으로 대부분
화이트의 연주를 담고 있지만 Long Distance Runaround 등
일부 트랙은 브루포드의 연주를 담고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동명의 콘서트 필름도 발매되어 정말 흔치 않은 당시 동영상도
구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플래티넘에 차트 12위까지 올랐고
영국에선 7위까지 올라 라이브 앨범 중 가장 히트한 성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물오른 전성기 시절의 기록이니까.
('Close to the Edge' from Yessongs, 1973)
*Alan White on drums.
('Starship Trooper' from Yessongs, 1973)
*Alan White on drums.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73년 6집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에 대해선 어찌
논평해야 하나 퍽 망설여진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 처음으로
탑을 찍고 미국에선 6위에 올랐으며 양국에서 골드 인증을 받아
상업적으로 실패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전작들의 성공에 기댄 것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도 생긴다.
당시 힌두교 베다 철학에 심취해 있던 앤더슨이 산스크리트
경론서를 바탕으로 작사했고 주요 동기의 작곡은 하우와
둘이서 전담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네 개의 전 트랙이 18~
22분에 달하는 대곡 구성이고 워낙 길어서 싱글 커트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프로그 장르 미학의 정점을 찍는 것은 좋은데 너무 과하지 않나
싶은 느낌이랄까. 또 하우의 역량에 집중하는 것은 좋았으나
상대적으로 웨이크먼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했다. 이 과정에
불만을 품은 웨이크먼이 결국 밴드를 떠나는 결과도 초래했고.
네 사람 연주의 조합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는
두번째 트랙 The Remembering을 들어볼 만하다. 웨이크먼
혹은 스콰이어의 연주력도 가장 만족스러운 편이다. 현재까지도
본작에 대한 평가는 팬덤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라 하겠다.
('The Remembering (High the Memory)' from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438-Ii_BueM
(Relayer)
다소간 창작적 과욕을 부린 앤더슨의 패착으로 좋은 멤버를
잃은 상황이었다. 대체자로 반젤리스를 고집해보기도 했지만
밴드 포맷에 어울리는 뮤지션은 아니었다. 결국 로잔 음악원
출신으로 클래식과 재즈에 능한 패트릭 모라즈가 영입된다.
74년의 7집 Relayer는 영국에서 4위, 미국에서 5위까지
오르며 중흥과 쇄신을 향해 몸부림친 결과물이었다. 다소간
예전의 예술적 성과를 회복하는 듯했고 평단도 대체로 우호적
평가를 내렸다. 어찌 보면 문제가 이들 자신에게 있다기보다
프로그 장르의 인기가 서서히 사그러들고 있었다는 점 아닐까.
웨이크먼과 질감이 전혀 다른 모라즈의 연주는 잘 녹아들고
있는데 어딘지 퓨전의 느낌도 묻어났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소재로 한 22분짜리 대곡 The Gates of Delirium은
본작을 대표하는 트랙. 후반부 파트가 싱글로 커트되기도 했다.
싱글 차트 성적은 별로였지만.
('The Gates of Delirium' from Relayer,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g8kLYZvVP7s
(Yesterdays)
75년 발매된 첫 컴필레이션 앨범 Yesterdays는 1~2집의
트랙을 종합한 거라서 당시엔 반응이 좀 있었지만 요새는
상당한 희귀 음반이 되었을 게다. 로저 딘이 1970년대에
마지막으로 디자인한 커버라는 점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Going for the One)
77년 8집 Going for the One의 제작 구상 과정에서 앤더슨이
다시 웨이크먼을 꼬시는데 성공하여 모라즈가 쫓겨난다.ㅠ 꽤
안타깝기는 하지만 웨이크먼의 재결합으로 모두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지난 두 앨범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또
모라즈와 화이트 결합이 전체 균형에 어떤 균열을 가져왔는지.
욕먹을 각오하고 논평하지만 본 블로거는 디지털 드림 도어 같은
사이트에서 더 높게 평가한 TfTO나 Relayer보다 Going for the
One이 훨씬 더 높은 완성도의 '락' 앨범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 프로그란 장르에 한정해서는 DDD의 평가가 옳을지 모르지. 물론
이젠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이런 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Wonderous Stories' from Going for the One, 1977)
*이들이 발표한 최초의 공식 뮤직 비디오.
돌이켜보면 모라즈와 화이트는 의외로 플레이 스타일이 직선적이고
선이 굵은 편이었다. 아기자기하게 디테일을 살린 장식음을 잔뜩
먹인 어프로치에 그리 최적화한 연주자는 아닌 것. 문제는 이들의
단점이 곧 브루포드와 웨이크먼의 장점이라는데 있고 그런 특징이
예스의 최전성기 작품성을 일궈낸 동력원이라는 점. 브루포드는
그렇다 치고 웨이크먼의 가세로 이런 점이 보완되니 작풍 자체가
수 년 전 전성기의 모드를 회복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Going for the One' from eponymous album, 1977)
*이 곡의 Anderson은 왠지 후배 Geddy Lee를 연상케 한다.
상업적인 감각이 살아 있는 Wonderous Stories, 다이내믹한
락의 코드를 살린 타이틀 트랙 Going for the One, 15분여의
대곡으로 5집 시절 구성력을 되살린 Awaken, 평단의 극찬을
받은 신비주의 감성의 트랙 Turn of the Century 등 다섯 개의
알찬 트랙이 제각기 상이한 매력을 뽐내며 맛있는 조합을 보여
주었고 이는 팬덤으로 하여금 Fragile의 부활이란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Turn of the Century' from Going for the One,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g0k-Klq-FNA
즉 연주력 과잉의 오만한 군더더기를 없애고 음악적 풍미의
조합과 구성이란 본질에 충실하니 평단과 팬덤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진 셈이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 마지막으로 탑을
기록했고 미국에선 8위를 기록해 상업적 성과도 준수했다.
Wonderous Stories가 영국 싱글 차트 7위에 올라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 영국에서. 미국 최고 성적은 후에..
('Awaken' from Going for the One, 1977)
*Wakeman이 5집에 이어 church pipe organ을 다시 도입했다.
- 스위스 브베에 있는 교회에서라고.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Progressive Rock Album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albumsprog.html
(Tormato)
78년 9집 Tormato는 밴드의 시대 후반기에 콘서트 투어의
티켓 판매고가 정점을 찍던 시절을 대변하는 앨범일 것이다.
예스의 스튜디오 앨범 중 가장 빠른 시간에 최고 판매고를
기록하여 미국에서 플래티넘, 영국에서 골드 인증을 받은,
당대 상업적 아레나 락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당시 언더그라운드를 점령한 punk rock
뮤지션들로부터는 집중적인 비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허나
당시 예스의 공연은 어디 가나 매진의 연속이었고 돈을 제일
잘 벌던 시절이었는데 뭐.. 앨범 트랙들의 전반적인 경향도
대중성과 상당히 타협한 혐의가 짙었고.
('Don't Kill the Whale' from Tormato, 1978)
영국 싱글 차트 탑40까지 오른 Don't Kill the Whale이나
Release Release 같은 트랙을 들어보면 이 사람들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을 게다. 웨이크먼은 리드 기어를 Polymoog로
갈아타던 때였는데 이 두 트랙에 나오는 솔로잉은 꽤 들어볼
만하다, 키보디스트 팬이라면. RR에 나오는 화이트의 드럼
솔로잉은 ADT란 녹음 기술로 구현한 것이라고. RR의 하이
노트는 꽤 버거워서 라이브에선 앤더슨이 늘 제외시켰단다.
*ADT = automatic double tracking.
- 믹싱 과정에서 테이프 딜레이 방식으로 원본 파형을 두 개
트랙으로 강화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소리를 두텁게 키우는 것.
('Release Release' from Tormato, 1978)
('Future Times / Rejoice' from Tormato,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Nt0w7upsRq4
*대체로 비중이 웨이크먼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적 느낌이랄까..
('Onward' from Tormato,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hbowD1NZ-zc
*Squire가 쓴 곡 중 가장 아름다운 음률인 듯.
성공적인 투어였지만 차기작을 위해 다시 모였을 때 예스는
음악 방향성을 놓고 둘로 갈라져 있었다. 더 가볍고 판타지를
강조하는 쪽으로 가자는 앤더슨과 웨이크먼. 반면 하드하고
헤비한 어프로치를 원한 하우, 스콰이어, 화이트. 프로세스가
진척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고 결국 앤더슨과
웨이크먼이 탈퇴를 선언하는 지경까지 가버린다. 아이고.
물론 역사가 스포일러라고 몇 년 후에 다시 뭉치긴 하는데 -
예스의 사운드에서 앤더슨의 보이스를 빼면 뭐가 남겠나. -
밴드와 떨어져 있던 몇 년 사이 앤더슨은 오래도록 꿈꿔온
개인 프로젝트 활동에 전념한다. 바로 반젤리스와의 협업.
야~ 신난다..
앤더슨은 두어 차례 그를 예스 액트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멤버나 제작진이 반대하기도 하고 반젤리스의 음악 패턴도
궁합이 안 맞기도 하여 한동안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사실 75년에 그와의 첫 결합 기회가 찾아왔다.
이젠 희귀 명반으로 남은 반젤리스의 솔로 앨범 Heaven
and Hell이 75년에 발매되면서 가사가 들어간 트랙이 딱
하나 들어갔는데 여기에 앤더슨을 초빙한 것. So Long
Ago So Clear란 곡인데 신비로운 감수성을 가진 보컬과
연주자가 만나 궁극의 상생을 보여준다.
('So Long Ago, So Clear' by Vangelis feat. Jon Anderson, 1975)
('12 o'clock' by Vangelis,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C6eFcCL-Ync
*익히 들어봤을 마성의 BGM. Heaven and Hell 앨범.
(The Friends of Mr. Cairo)
존 앤 반젤리스로 명명하게 된 이들의 협업. 전성기는 80년대
초반까지인데 - 앤더슨이 예스로 복귀하기 전까지 - 81년에
영국 차트 6위까지 오르는 등 The Friends of Mr. Cairo
앨범의 반응이 가장 좋았다. I'll Find My Way Home이란
싱글 히트 튠까지 나왔더랬다. - 영국 차트 6위.
('I'll Find My Way Home' by Jon and Vangelis, 1981)
('The Friends of Mr. Cairo' by Jon and Vangelis, 1981)
*원곡은 12분짜리인데 이건 뮤비에 맞춘 짧은 버젼.
- 30~40년대 말타의 매 같은 느와르 필름의 경향을 표현.
이듬해 무려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섬머가 커버하시기도 한 State
of Independence는 원곡 반응은 시원치 않았지만 섬머의
커버가 핫100에서 탑40에 근접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State of Independence' by Jon and Vangelis, 1981)
('State of Independence' by Donna Summer,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cPlNrP9B2Zs
*심지어 프로듀싱은 바로 그 Quincy Jones.
그 사이 예스는 죽쑤고 있었냐고? 평론가들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팬덤이 문제였다. 핵심 멤버 둘을 잃고 어수선한
가운데 급하게 낸 80년 10집 Drama의 초반 반응은 영국
차트 2위까지 오르는 등 괜찮았으나 팬들이 멤버 교체를
인지한 때문인지 뒷심이 받쳐주지 못했다. 투어 끝내고 그
싸늘함을 실감한 밴드는 결국 해체를 선언한다. 아이고2.
('Into the Lens' by Yes, 1980)
*MTV 시대인지라 많이들 준비한 것이 눈에 띈다.
- 교체 멤버는 Trevor Horn과 Geoff Downes.
- The Buggles 시즌2 및 Asia와 GTR 프리퀄.
('Machine Messiah' by Yes,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dXsFByRJsos
*Drama의 오프닝 트랙이자 가장 긴 대곡.
- Vocoder 혼합한 헤비메탈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극단적인 팬덤은 버글스의 아류 냄새가 너무 난다고 깐다.ㅜ
- 의외로 혼의 음색이 앤더슨 느낌을 꽤 풍긴다는 것이 함정.
82년경이었나. 해체하고 어슬렁대던 스콰이어와 화이트에게
남아공 출신 기타리스트 트레버 래빈과 연결될 기회가 생긴다.
합이 잘 맞네, 싶어 토니 케이까지 끌어들여 밴드 새로 만들까
하는 궁리를 하던 차... 스콰이어가 파티에서 앤더슨을 만난다.
같이 해볼래? 제안을 덥썩 무는 그. 요상하게 전설적 밴드의
새 버젼 모양새가 되자 래빈은 내켜하지 않았다고.. 궁시렁..
(90125)
그렇게 어영부영 몇 해 만에 예스는 다시 재결합한다. 83년에
새 앨범 90125를 들고. 프로그의 예스가 뉴웨이브 버젼으로
완전 변신하여 새로운 팬덤을 형성하지만 기존 프로그 팬에게
지대하게 욕쳐먹은... Owner of a Lonely Heart란 명곡을
배출한... 바로 그 앨범, 11집.
발매 당시 미국 빌보드200에서 5위, 영국 앨범 차트 16위까지
오르는 등 예전 전성기 정도의 성적을 회복하는 정도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가장 시장이 큰 미국에서 판매고가 넘사벽 급으로서
현재까지 3백만 장을 넘기고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빼어난
결과를 얻어낸지라 본작이 중요한 것.
('Owner of a Lonely Heart' from 90125, 1983)
*앨범 타이틀에 큰 의미는 없고 그저 소속사의 카탈로그 일련번호.
('Cinema' from 90125,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qSRzlThuXmM
시그니처 히트 싱글 Owner of a Lonely Heart는 예스의 유일한
핫100 1위 곡. 인스트루멘탈 트랙 Cinema로 이들의 유일한 그래미
어워드까지 수상했을 정도였다. 개별적으로는 소소한 히트였으나
Leave It, It Can Happen, Hold On, Changes 등 후속
싱글도 줄을 이어 앨범의 판매를 도왔다.
본작의 성공에 힘입은 84~85년의 9012Live Tour는 예스의 역대
투어 중 최대 투자가 이루어져 최대 수익을 거둬들였다. 저명한 영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연출로 9012Live란 콘서트 필름을 제작해
발매했고 당시 예산으로 1백만 불이 넘는 특수효과를 차용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단다.
('Leave It' from 90125, 1983)
('It Can Happen' from 90125, 1983)
래빈, 스콰이어, 화이트, 케이에 앤더슨 조합이 8기 예스를 구성한
멤버들. 당시에는 래빈의 스타일을 놓고 설왕설래,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팬덤에서. 또 뭔가 2프로 부족한 케이의 스타일 놓고도
웨이크먼 언제 복귀하냐, 반젤리스 가능성 없냐, 등등 온갖 썰이
난무했더랬지... 다 옛날 이야기다.
래빈은 본래 싱어송라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라 넘사벽급
앤더슨의 존재감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졌다는 후문. 또 신디 다루는
실력도 한 가닥 하는지 묘하게 반목하는 사이였던 케이가 잠시나마
탈퇴했다가 에디 잡슨이 메꾸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단다.
하긴 전체 방향성에 있어 래빈과 스콰이어가 다 만든 모양새에
앤더슨은 숟가락만 얹은 느낌이 살짝 들기 시작한 것도 사실..
('Hold On' from 90125, 1983)
('Changes' from 90125, 1983)
(Big Generator)
어쨌든 물들어올 때 노저으라고, 잘 팔리면 장땡이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86년부터 12집 제작에 착수한다. 프로듀서
맡던 트레버 혼과 래빈 사이에도 트러블이 생겨 아예 제작
전반을 래빈이 주도했단다. 그래서 이듬해 나온 것이 신작,
Big Generator.
이제 예스는 더 이상 프로그 아니에요, 선언한 듯한 앨범.
래빈의 입김이 정말 센 앨범이었다. 미국 앨범 차트 15위,
영국 17위에, 미국 시장 인증은 플래티넘까지 받는 등...
상업성과 예술성 양쪽에서 꽤 어중간한 평가를 받았다.
앤더슨은 여전히 붕뜬 분위기에서 넘사벽급 보컬 실력만
자랑하는 모양새랄까. 어쨌든 그래미 어워드 후보 지명도
받고 (마지막) 핫100 탑40 히트 싱글도 둘이나 나오는 등
선방은 했다...만. 앤더슨의 위상이 뭔가 물과 기름인 것..
('Love Will Find a Way' from Big Generator, 1987)
*미국 싱글 차트 Hot 100 30위, 메인스트림 락 차트 탑 기록.
('Rhythm of Love' from Big Generator, 1987)
*미국 싱글 차트 Hot 100 40위, 메인스트림 락 차트 2위.
('Shoot High Aim Low' from Big Generator,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CNnKau1OLp4
*미 메인스트림 락 차트 11위.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으악. 80년대 말은 온갖 슈퍼그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밴드의 시대 마지막 광채를 휘날리던 때였는데, 옛 예스와
앤더슨이 이 기회를 놓칠소냐. 앤더슨이 붕뜬다고 했잖나.
결국 가장 잘 나갔던 3기 멤버들 - 스콰이어 빼고 - 그들을
다시 소환하여 슈퍼그룹을 결성하고 만다. ABWH. 두둥.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커버 디자인도
로저 딘이 컴백하시고 누가 봐도 예스 앨범인데 예스를
예스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사태의 원인은 스콰이어..
상표권을 그가 독점 소유하고 있었거덩. 이그. - 베이스
누가 쳤냐고? 전가의 보도, 토니 레빈께서..
사이드 프로젝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진성 팬덤은 누구든
본작의 가치를 알아봤기에 영국 앨범 차트 14위, 미국 30위
등 성적도 준수한 편이었다. 가사 연속성에서 예스 시절과
연결되는 Quartet, 싱글로도 나온 Order of the Universe
등 대곡 트랙들에 진정한 매력이 있다고 하겠다. 특히나
디지털 신디사이저의 시대를 맞아 웨이크먼의 표현력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Quartet' from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1989)
('Order of the Universe' from ABWH, 1989)
뭐 이렇게 이합집산이 심하냐 싶은 이분들, 결국 스콰이어의
예스 네 명과 ABWH 네 명이 합쳐 새롭게 예스를 결성한다.
- 8인조. 이쯤되면 팬덤 고문이다. 90년대 초반 이렇게 뭉쳐
앨범도 내고 여덟 명이서 사이좋게 투어 다니면서 연주력의
정점을 세계 만방에 자랑하셨더랬다.
이후엔 여전히 여러 멤버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지금까지도
투어를 이끌며 잘 살고들 계신다. 금세기까지도 예스의 라이브
아카이브가 여러 버젼 남아 있지만 개인적으론 90년대 초중반
시기가 가장 반짝반짝 하지 않나 싶다. 그 이후엔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서, 특히 앤더슨의 기량은 많이 떨어져 보인다.
마지막까지 예스에서 탈퇴하지 않아 상표권을 움켜쥐고 계셨던
크리스 스콰이어는 15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만다. RIP...
안타깝게도 그가 돌아가신 후 17년에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원년 멤버 중 그만 빼고 다 모여 자축하기도 했다.
(이때 공연에서 베이스는 게디 리가 쳐줬다.)
*Roundabout. 01년 네덜란드 Symphonic Live; Magnification Tour.
- 무대 난입해 춤추는 분들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피날레 곡이라서..
- 라인업은 Anderson-Squire-Howe-White.
- 키보드에 투어 세션 Tom Brislin.
*Starship Trooper. 84년 독일 공연, 9012Live Tour.
- 라인업은 Anderson-Squire-Rabin-Kaye-White.
*Long Distance Runaround. 04년 스위스 공연, Lugano Festival.
- 라인업은 Anderson-Squire-Howe-Wakeman-White.
*Close to the Edge. 75년 영국 공연, Relayer Tour.
- 라인업은 Anderson-Squire-Howe-White-Moraz.
*Heart of the Sunrise. 89년 ABWH로서 공연.
- 베이스에 투어 세션 Jeff Berlin.
전성기 시절 천사처럼 하늘에서 강림한 듯한, 천상의 목소리를
자랑하신 존 앤더슨. 보컬리스트로서 프로그레시브라는 서브
장르에서 길고 굵게 한 획을 당당히 그은 그 발자취는 대단히
존경스러운 것이며, 영미 시장 합계 총 1천 5백만 장에 달하는
판매고의 예스 디스코그래피 전체에서 이를 관통하는 신비주의적
정서의 가사 철학은 분명히 그의 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솔로 아티스트로서 또는 하나의
자립한 음악가로서의 존재감이 그다지 크진 않다. 이 분의 솔로
앨범을 들어보면 창법이 작곡을 삼켜 버린다고나 할까, 독창적
음역과 보이스의 질감이 오히려 운신의 폭을 좁혀 어떤 음악을
들어도 존 앤더슨임이 드러나지만 반대로 보컬리스트로서
다채로운 변화의 폭을 표현하는 데에는 큰 한계가 있다.
본인의 공식 웹사이트에도 올려 놓았지만 하도 음역이 높아서
팔세토 창법을 구사하는 남성 카운터테너란 오해를 많이 받으신
모양인데, 아니라고 명명백백히 밝히셨다. 남성의 테너와 여성의
알토 사이엔 세부적으로 여러 유형이 존재하는데 굳이 분류하면
본인은 알토 테너 - 콘트라알토나 카운터테너보다 낮고 보통
테너보다 높은 - 에 해당한다고... 참고하시길.
*Roundabout. 17년 헌액식 공연 중. 베이스 Geddy Lee.
- 자기 관리에 철저하여 노년에도 기량이 딸리지 않는 점만은 존경스럽다.
*Owner of a Lonely Heart. 17년 영국 공연.
- Yes feat. Jon Anderson, Trevor Rabin, Rick Wakeman이란
액트로 2010년 이후 최근 노년까지도 활발하게 투어를 열고 사신다.
- Wakeman과 Rabin이 원곡에 없는 솔로잉을 어떻게 더 연장했는가..
4' 25"쯤 이후. 이런 점이 노장들 라이브의 묘미이다.
(Polonaise, single?)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존 앤더슨의 곡은 의외의 작품인데
한국의 중장년층에겐 흘러간 팝송일 테고 전세계 팬덤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존 앤 반젤리스의 숨은 명곡으로 꼽힌다.
바로 83년 Private Collection 앨범의 네번째 트랙 Polonaise.
곡명이 폴로네이즈인 이유는 첫째, 반젤리스가 시작하고 2분 40초
지나서 프리데릭 쇼팽이 쓴 A플랫 장조 작품 53번 피아노 독주곡의
유명한 악절을 차용했기 때문이며, 둘째, 앤더슨이 가사의 배경으로서
- 1981~83년에 걸친 공산당 독재 정권의 계엄령 공세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항거와 투쟁을 벌였던 - 평범한 폴란드 국민들의
이야기를 끌어와 그 정신을 기렸기 때문이다.
음악 이야기 포스팅하면서 웬만하면 가사 해석 안 하려고 하는데
이 곡의 가사는 역사 배경도 있거니와 작사 능력 출중한 앤더슨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예외적으로 공개한다.
노랫말과 뒷이야기에 한층 더 집중하면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옛
음악을 즐기길 바라 마지 않고, 80년 광주 및 83년 바르샤바의
못내 이룬 '연대'의 회한을 반추하며... 금번 포스팅을 마치련다.
https://genius.com/Jon-and-vangelis-polonaise-lyrics
('Polonaise' by Jon and Vangeli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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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 Bono (0) | 2019.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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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디 리 Geddy Lee (0) | 2019.11.09 |
데이빗 보위 David Bowie (1) | 2019.09.22 |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 (0) | 2019.08.15 |
필 콜린스 Phil Collins (0) | 2019.07.16 |
돌아가신지 몇 해가 지났지만 이제사 이 분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음악을 중심으로 20세기
대중 문화예술의 중심적 페르소나였고 노래나 앨범 등
결과물 뿐 아니라 예술가 자신이 창조의 테마였던 인물.
지나간 세기 각종 논란의 핵이면서도 지금은 존경과 숭앙의
대상으로 변모한 아티스트.. 데이빗 보위 David Bowie이시다.
(데이비드 보위가 사실 옳은 표기이다..만.)
본명 데이비드 로버트 존스. 런던 근교에서 1947년에 태어나
음악, 무용, 미술, 디자인에 감각이 뛰어난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열 여섯 즈음에 직업 뮤지션으로 데뷔하여 겨우 스물 둘 된
나이에 히트 메이커가 되고 평생을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아이콘으로 사신 분이다. 뮤지션이자 영화배우로서.
16년에 갑자기 유명을 달리 하기 전까지 세계적으로 1억
4천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 메가톤급 스타였고 20대
시절 스타덤에 오른 이후 인생 내내 미디어의 주목을 받는
스타로만 살아오셨다. 둘째 아내인 모델 이만도 평생 스타로
사신 분이고 자식들마저 이름값 하는 집안을 일구셨다.
아드님은 영화 소스 코드의 감독 던컨 존스. 오오.
영국 시장에서 1위에 오른 앨범을 11장, 플래티넘 이상의 히트
앨범을 10장 배출했으며, 미국 시장에선 탑텐을 6장, 플래티넘
5장, 골드 9장을 배출했다. 롤링 스톤 매거진이 선정한 시대를
초월한 100대 송라이터 및 아티스트 부문서 각각 39위를
차지했고, 96년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주로 70년대 성과물에만 치중하여 살짝 아쉽긴 하지만
롤링 스톤 매거진은 보위를 매우 사랑하는 편이다. 03년에
처음 발표하고 12년에 업데이트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에서 그의 앨범 5장을, 04년에 처음 발표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에서 그의 노래 4곡을 선정하였다.
(Rolling Stone '15, 100 Greatest Songwriters of All Time)
https://www.rollingstone.com/interactive/lists-100-greatest-songwriters/#david-bowie
(Rolling Stone '10, 100 Greatest Artists of All Time)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artists-147446/david-bowie-9-90254/
(Rolling Stone '04,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500-greatest-songs-of-all-time-151127/
(Rolling Stone '03,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500-greatest-albums-of-all-time-156826/
70년대로만 국한해서 그의 음악 세계를 조명한다면 말이다.
그런데, 평생에 걸친 음악 세계가 얼마만큼 다채로운
파노라마를 펼치며 변화했는가 하는 추이를 죄다 좇아
추적해 보겠다면 결코 녹녹치 않은 문제이다.
보위를 가리켜 만만하게 봤다가 큰코 다치며 결코 분석이 쉽지
않은 음악가란 이미지를 덧씌우는 요인은 이런 특징일 게다.
미리 밝히지만 본 블로거가 보위의 전문가라 자처하기엔 여러
모로 민망한 수준이고 그래도 꽤 정확한 정보로 채워진 한글
인터넷 페이지도 넉넉한 편인지라 이 포스팅에선 중요한
요점 중심으로만 논평할 것임을 미리 밝힌다.
한 줄 요약. 깊게 들어갈 생각은 없다.
본시 이 블로그가 그리 깊진 않지 않은가.
그런데 그 뿐일지라도 참 화려할 터이다.
*"Heroes", Live Aid '85.
(David Bowie)
보위의 데뷔는 63년경. 첫 싱글은 64년에, 첫 앨범은 67년에
나왔다. 이 초창기 역사는 보위 자신도 지우고 싶어하는 흑역사.
공식적으로 음악사가들이 꼽는 보위의 첫 역사는 만장일치로
69년의 2집인 David Bowie이다. 명곡 Space Oddity가
가끔 앨범 타이틀로 둔갑하기도 해 실린 바로 그 앨범.
아더티를 영미식으로 발음하면 Odyssey와 비슷하게 들리니
일부러 노리고 지은 제목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그 모방의
대상이 스탠리 큐브릭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고 아서 클라크의
원작으로 보는 편이 옳지 않을까 한다. 가사의 내용도 큐브릭
영화의 플롯과는 뚜렷하게 궤적을 달리 한다. 훨씬 염세적.
그의 커리어 최초로 영국 싱글 차트 5위까지 오르고 앨범은 영미
양국에서 탑20까지 올랐다. 메이저 톰(톰 소령? 영국인데?)이란
우주 조종사 캐릭터가 중심이 되어 탐사 미션 중 교신이 끊기고
미아가 되는 비극을 가사의 플롯으로 한다는...
너무 유명한 바로 그 곡이다.
(The List of 'The Songs That Shaped Rock and Roll'
selected by the Rock and Roll Hall of Fame, '04)
https://www.infoplease.com/arts-entertainment/music/500-songs-shaped-rock
(VH1 '00, 100 Greatest Rock Songs)
http://www.rockonthenet.com/archive/2000/vh1rocksongs.htm
(New Musical Express '12, Greatest No.1 Singes in History)
http://www.rocklistmusic.co.uk/nme_singles.htm
04년 락앤롤 명예의 전당이 선정한 '락앤롤 장르를 형성한 명곡'
중 하나로 꼽혔고 NME, VH1, 채널4, 가디언 등 언론 선정 명곡
리스트에서도 어김없이 확인할 수 있는 명불허전의 작품이다.
세션 중에 무려 예스 가입 전 릭 웨이크먼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고 그는 Mellotron을 연주했다 한다.
본작에서 보위 음악관의 중요한 키워드 하나가 도출되는데 곧
아트락이다. 브리티쉬 포크의 영향도 꼽긴 하겠으나 그 당시
모든 팝 음악이 포크의 영향 하에 있었으니 그건 뭐... 아직
대단한 포텐셜이 터졌다고 하기는 부족했으나 이 신인의
미래에 뭔가 창창한 창의성이 아트팝의 영역에서 성을 쌓아
올릴지 모르겠구나 하는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베이시스트이면서 이후 프로듀싱에도 공동으로 참여하게 될
영혼의 동료 토니 비스콘티와 만남이 이루어진 앨범이기도.
음악계 전체가 그러했으니 비틀즈의 영향을 읽는 것도 어렵지
않은.. 전체 완성도는 중박 정도의 작품..? 영국서 골드..
('Space Oddity' from David Bowie, 1969)
(The Man Who Sold the World)
이듬해에 낸 3집 The Man Who Sold the World를 논할
때 이젠 너바나를 빼놓고 할 수가 없다. 한국과 세계에 걸쳐
90년대에 본작이 재발견되는데 커트 코베인의 기여도는 가히
절대적이다.
보위가 하드락의 문법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작품이다. 기존
비스콘티에 기타 믹 론슨, 드럼 믹 우드맨시를 받아들여
백킹 밴드 체제를 출범시켰다. 초기 작법 체계를 일구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파트 멤버들이다.
포스트 펑크의 다크한 서브 장르에도 영향을 주기도 하는 등,
사실 알게 모르게 보위의 영향력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던
때였는데 아직 시기가 여물지는 않아 보였다.
('The Man Who Sold the World' from eponymous album, 1970)
('The Man Who Sold the World' by Nirvana,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fregObNcHC8
*MTV unplugged live
(Hunky Dory)
71년 4집 Hunky Dory에 이르러 드디어 보위의 음악은
기틀을 잡아 활짝 꽃을 피운다. 물론 더 큰 상업적 성공은
이후 작품에서 나오지만 보위의 70년대 전반기를 책임질
글램락의 체계가 확립한 명반으로 보통 꼽힌다.
롤링 스톤이 일찍이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을 선정하며
108위에 올렸고, '10년에 타임 지가 시대를 초월한 100대
명반을 꼽을 때에도 포함시켰다. 롤링 스톤의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랭킹에선 본작의 최대 히트 싱글 Changes가
128위로 올랐을 정도이다.
Changes는 보위의 70년대를 규정하는 시그니처 트랙
중 하나가 되었고 예스에 영입되기 직전까지 스파이더
멤버로 뛴 릭 웨이크먼에다 기타의 론슨, 드럼의 우드맨시,
베이스의 트레버 볼더가 맛나는 조합을 빚어낸다.
웨이크먼의 피아노 연주가 빛나는 Life on Mars는 영국
싱글 차트 3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앨범은 영국
차트에서 3위까지 올라 82년에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사실 다음 앨범 성공에 힘입어 뒤늦게 팔리긴 한 거지만)
이제 그는 본격적인 성공 가도를 타게 된 것. 스타 탄생 직전.
('Changes' from Hunky Dory, 1971)
*73년 라이브 버젼.
('Life on Mars?' from Hunky Dory, 1971)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전작에서 확립한 음악적 지향성이 포텐을 터뜨린 것이 72년
5집.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라는 긴 제목의 명반이 나와 보위라는 이름을
희대의 트렌드 세터 반열에 올린다. 지기 스타더스트라는
페르소나의 작중 흥망성쇠를 그린 컨셉트 앨범인 셈.
지기는 외계인과의 중개자 역할인 양성애자의 뮤지션이라고.
이 컨셉으로 가사 전체의 스토리를 끌고 간 상상력의 산물인
거다. 양식있는 오늘날 네티즌에게 황당할지는 모르겠는데
희한하지만 하나의 문화 현상처럼 당시 영국의 음악 대중에게
잘 먹히던 설정 같은 거라고 이해하시길. 보위의 페르소나란
개념은 무한도전 비슷해서 설정 깨닫고 잘 즐기면 그만이다.
(잘 못 깨닫겠다고? 그럼 딱 모르는 만큼만 즐겨라!)
론슨, 우드맨시, 볼더로 전작들부터 구성한 백킹 밴드가 이제
스파이더 프롬 마스란 타이틀로 함께 코스튬 입고 무대 뛰는
태세로 전환한다. 이 멤버들의 연주는 천재적이진 못할 망정
대단히 재기발랄하고 맛깔나는 결과물을 빚어냈다.
('Starman' from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영국 앨범 차트 5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기에 최초로
영국, 북미와 일본까지 월드 투어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롤링
스톤의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 랭킹에서 무려 35위에
오르고 타이틀 트랙에 해당하는 Ziggy Stardust는 롤링
스톤의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랭킹 282위에 올랐다.
Starman은 영국 싱글 차트 탑텐, Rock 'n' Roll Suicide는
탑30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Suffragette City에선 ARP
2500의 솔로잉이, Moonage Daydream에선 헤비메탈의
스타일이 등장하는 등 맛있는 어법으로 가득 찬 명반임을
마구마구 입증한 작품이다. 한 번만 들어봐도 왜 시대를
구가한 앨범인지 단박에 느낌이 올 게다.
심지어 앨범과 동명의 콘서트 필름까지 출시했을 정도로
당시 공연 문화 전반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밥 딜런,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은 전작에 이어 이기 팝, 루 리드,
마크 볼란, 지미 헨드릭스, 킹 크림슨 등 당대 최전선
아티스트들의 영향을 뾰족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최근까지
전세계 75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고..
보위의 음악관을 논할 때 필청의 코스임은 분명하다.
('Ziggy Stardust' from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73년 라이브 버젼.
('Suffragette City' from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Rock 'n' Roll Suicide' from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SOgVoxqKU7U
('Lady Stardust' from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EcKZEOsgvdI
('Moonage Daydream' from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ZEde35UbwUI
*끝내주는 노래라서 가오갤 믹스에 실린 거다. 믿으시라.
(Aladdin Sane)
73년 6집 Aladdin Sane은 본래 a lad insane을 멋대로
발음한 제목. 보위가 조현병을 앓고 있던 의붓 형과 각별한
사이였던지라 그 직접적 영향을 개진한 앨범이다. 덕분에
글램락을 아방가르드 재즈와 결합하여 짐짓 일부러 혼돈의
카오스 같은 모드를 꾸며낸 분위기가 팍팍 난다.
그런 분위기를 가꾸는데 정통 재즈 피아니스트 출신의 세션
마이크 가슨이 큰 일조를 했다. 유명한 세션 색소포니스트
데이빗 샌본의 역할도 컸다. 보위가 유년 시절 처음 배우기
시작한 악기가 색소폰이었다능. 쇤베르크와 힌데미트의
atonal한 영향력을 읽어내는 팬덤도 일부 존재한다.
본작의 커버 아트에 번개 모양 페이스 페인팅을 한 채로 그가
등장하는데 이후 모든 공연에서 팬덤이 따라하기 시작했다나.
전반적으로 한 템포 쉬어가는 듯 예술 지향성의 앨범이었지만
팬덤의 충성도를 한층 더 깊게 제고하는 역할도 수행했다고.
영국 싱글 차트 2위까지 오른 The Jean Genie나 3위까지
오른 Drive-In Saturday의 히트도 계속 이어졌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 처음으로 탑을 찍어봤고 롤링 스톤의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 랭킹에선 279위를 기록하는 등, 확실히
이때 보위는 상업적 전성기였다.
('The Jean Genie' from Aladdin Sane, 1973)
('Aladdin Sane' from eponymous album, 1973)
*부제: (1913-1938-197?)
- 이 숫자는 1차-2차 대전 발발 직전 연도라고. 3차는?
('Drive-In Saturday from Aladdin Sane,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WABWNOEwC9A
(Pin Ups)
73년 7집 Pin Ups는 최초의 커버 모음 앨범이다. 남의
곡 리메이크만 녹음했다는 말. 야드버즈, 핑크 플로이드,
더 후, 킹크스의 곡들을 커버했고 에인슬리 던바가
드러머로 이름을 올리기도.
머지스의 곡을 커버한 Sorrow가 영국에서 3위까지 올랐다.
킹크스 오리지널인 Where Have All the Good Times
Gone도 들을 만하다.
('Sorrow' from Pin Ups,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RmQ2OJgzkMg
('Where Have All the Good Times Gone from Pin Ups,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TcLxjL28fZk
(Diamond Dogs)
74년 8집 Diamond Dogs에서 영국 활동 기간 마지막
대박이 터진다. 조지 오웰 1984를 포스트 아포칼립스
형식으로 보위 페르소나에 믹스한 컨셉이었는데, 글램과
서서히 결별하고 펑크의 프로토타입 쪽으로 이행하는
음악적 변화를 확인할 수작이다.
미국 앨범 차트에서 최초로 탑텐에 진입해 5위까지 오르고
영국에선 당연하다는 듯이 탑을 찍는다. - 연속 세 장째.
영국 싱글 차트 5위까지 오른 시그니처 튠 Rebel Rebel이
히트를 이끌었고 유럽에선 타이틀 트랙도 괜찮은 반응을
얻었다. 파워 발라드 Rock 'n' Roll with Me도 좋았다고.
Sweet Thing Suite라고 팬덤이 받드는 일련의 트릴로지선
보위의 선굵은 초저음의 매력이 터졌다. 1984에선 이후
그가 발전시킬 소울 모드의 초기 경향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당시 왠만한 가수가 아이작 헤이스의 영향은 다 받았고.
앨범 타이틀을 딴 74년 월드 투어는 당시 최대 규모였다고.
이 실황이 그의 첫 라이브 앨범 David Live로 발매되기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미국 시장 활동의 간을 보고 있었다.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가 13년에 선정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 랭킹에서 447위를 차지한 수작이다.
('Rebel Rebel' from Diamond Dogs, 1974)
*03년 A Reality Tour 중에서. 미중년 꽃간지.
('Diamond Dogs' from eponymous album, 1974)
(David Live)
('Rock 'n' Roll with Me' from Diamond Dogs,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6js_R4A41p4
('Sweet Thing Suite' from Diamond Dogs,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IvJnF5JRDAs
('1984' from Diamond Dogs,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KByxC7B9WH0
(Young Americans)
75년 9집 Young Americans. 플라스틱 소울이라 스스로
칭한 보위식 소울 funk R&B를 본격화한 작품이며 미국 시장
진출이란 대의를 표방하여 이에 걸맞는 성공을 거둔 앨범이다.
70년대 보위 음악 세계의 주요한 변곡점 중 손에 꼽는다고
하는 음악적 성과물일 것이다. - 서브 장르로선 필라델피아
소울로 분류하며 비틀즈 앨범 타이틀과 관련이 있다고..
향후 보위 백킹 체제에서 핵심 세션으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카를로스 알로마가 본작부터 그와 인연을 맺었다. 소울 보위를
상징하는 시그니처 튠 Young Americans - 영국 싱글 차트
탑20, 미국 탑30, 롤링 스톤 선정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486위 - 에선 무려 커리어 초기의 루서 밴드로스가 백킹 보컬
편곡을 지휘하였다.
거기에 존 레논... 플라스틱 소울의 상징곡 Fame서 알로마와
함께 기타 백킹 리프를 주조해낸 공신 역할을 해낸다. 슬라이
앤 패밀리 스톤 출신 드러머 앤디 뉴마크에 샌본까지... 당대
최강의 뮤지션들이 공동의 창작적 책임을 연대한 최고의
결과물, 그것이 본작이다. 미국 앨범 차트 탑텐에 오르고
영국에선 2위까지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전작의 미국 투어 중에 계속 체류하며 비스콘티와 보위가
레코딩에 몰두한 결과이기도 했고 이후 보위는 줄곧 미국에서
머물게 된다. 미국 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기는 하나
마약 중독으로 개인의 삶은 파괴되어 가는 와중이기도 했다.
- 깡마른 이유가 음식을 먹지 않고 약물에만 의존해서라고ㅠ
('Young Americans' from eponymous album, 1975)
*중간에 비틀즈 노래 멜로디가 나오는 걸로 유명하다.
**83년 Serious Moonlight Tour 중 라이브인데, David Bowie의 콘서트
중 가장 빼어나다고 역대급 평가를 받는 투어가 이것이다.
('Fame' from Young Americans, 1975)
(Station to Station)
76년 10집 Station to Station. 보통 보위의 글램 시대가
끝났음을 선언한 앨범이라고 규정한다. 이후 그의 음악은
본격 아트락에 이따금 소울 양념을 섞는 요리로 논평할 수
있을 듯. 다음 앨범부터가 또 하나의 변곡점인데 그 변화로
가기 위한 과도기로서 또 하나의 역작이 나왔다고 논한다.
알로마를 주축으로 베이스에 조지 머레이, 드럼에 데니스
데이비스의 새 트리오가 진용을 꾸린 작품. 피아노는 가슨
대신 E스트리트의 로이 비턴이 초빙되었다. 일찍이 롤링
스톤 매거진이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 랭킹에서 본작을
324위에 올린 바 있다.
영미 양국 앨범 차트에서 탑5를 기록했고 본작을 대표한
싱글 Golden Years가 양국 싱글 차트 탑텐에 오르는
성공을 거두었다. 싱글의 히트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
확실히 이때부터 신디와 이펙트의 프로세싱이 두드러지는
성향을 보여주고 이것이 새 페르소나 Thin White Duke와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의 변화가 멋을 풍기다'.
가사의 세계는 신화와 종교, 철학에까지 손대고..
('Golden Years' from Station to Station, 1976)
('Station to Station' from eponymous album, 1976)
- 향후 음악적 변화의 전초전 격인 10분짜리 대곡.
('TVC 15' from Station to Station,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Dh8RDktOdnc
- 본격 이기 팝이랑 약빨고 만든 환각 노래ㅠ
(Low)
미국에서 한창 약빨고 건강을 해치니 안 되겠다 싶어 결국
유럽으로 이주를 결정한다. 마음 다잡고 브라이언 이노와
진지한 창작 작업으로 심기일전하니 팬덤이 꼽는 최고의
분기점, 베를린 3부작이란 작품으로 화답한다. 토니
비스콘티 역시 공동 프로듀싱에 기여했고.
이노의 영향으로 일렉트로닉, 앰비언트, 아방가르드,
뉴웨이브, 크라우트락, 월드뮤직 장르로 천착하여 만든
본격 아트락 연작 앨범을 베를린 3부작이라 정의한다.
그때까지 살짝살짝 맛보기로 들락날락 하던 영역을
이제 대놓고 들이파겠다는 뜻. 그러고 보면 글램락이
아트락의 먼 방계가 맞긴 맞나 보다.. (그런가?)
("Heroes")
77년 11집 Low, 77년 12집 "Heroes", 79년 13집 Lodger..
이 세 앨범이 연작으로 묶인다. Low는 롤링 스톤 선정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 랭킹 251위에 올랐고, "Heroes"의 가장
유명한 시그니처 타이틀 트랙은 롤링 스톤 선정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랭킹서 무려 46위에 올랐다. 설명이 필요 없지.
Low - "Heroes" - Lodger 이어지며 영국 앨범 차트 각 2위,
3위, 4위에 올라 골드 인증을 받았다. 미국 성적은 탑20, 탑40,
탑20로 상대적으로 약하긴 하나 평단의 반응만은 뜨거웠다.
앨범을 꽉 채운 다크 모드의 보위식 인스트루멘탈 트랙들에
특히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Minimoog, ARP, EMS Synthi
등 첨단의 신스 기어들을 두루 기용했다. - 이노니까.
(Lodger)
이 시기를 대표하는 트랙은 단연 "Heroes". 동서로 분단된
과거 베를린의 통합을 염원하는 정치 연대의 주제가처럼
불린 바로 그 노래이다. 통일 직전 87년 6월 베를린 장벽 옆
무대에서 동쪽을 향해 보위가 이 곡을 열정적으로 불러제낀
콘서트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된 것이다. 체제 장벽을
사랑으로 극복하려던 평범한 연인들을 영웅으로 노래한 것.
87년, 베를린도 서울도 용기있는 사람들이 나서던 그 시절..
Sound and Vision, Warszawa, V-2 Schneider, DJ,
Look Back in Anger, Yassassin 등 세 앨범의 곳곳을
차지하는 예술적 대중 음악의 지극한 향연을 음미해 보길
권장한다. 보위는 건강과 음악성, 두 토끼를 되찾게 된다.
('"Heroes"' from eponymous album, 1977)
*기타 솔로잉을 로버트 프립이.. 오오오...
*The moment when Bowie was singing to appraise
brave lovers towards the wall...
https://www.vox.com/2016/1/11/10749546/david-bowie-berlin-wall-heroes
- 87년 6월 6일: 6.10 나흘 전.. 장벽 철거는 90년 6월 13일.
('Sound and Vision' from Low,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WoDamvrfUbQ
- 영국 싱글 차트 3위까지 오른 히트 튠.
('Warszawa' from Low,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EAD1j32TiiY
- 조이 디비전의 초기 밴드 이름이 여기서 영향 받았다.
('V-2 Schneider' from "Heroes",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Li8T0lcgbh0
- 크라프트베르크 리더에게 바치는 노래.
('DJ' from Lodger,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MRRmU_pOXnk
- 기타는 에이드리안 벨류. 보위가 토킹 헤즈를 모방한 거라고.
('Look Back in Anger' from Lodger,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5iI-ysibI-0
- 오아시스의 노래 제목이 여기서 따온 것.
('Yassassin' from Lodger,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SSfFuNqy1q4
- 중근동 전통 음악과 레게를 혼합한 것.
(Stage)
3부작 시기 퍼포먼스는 78년 두번째 라이브 앨범 Stage가
들려준다. 영국서 골드를 받았지만 평단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
이후 보위의 음악성이 완벽하게 부활했음을 입증한 80년의
14집이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 뉴웨이브
및 포스트펑크로 완벽하게 갈아탄 모습을 구현해낸다. 이노
및 비스콘티의 영향도 벗어나 거의 개인적으로 프로듀싱을
마친 결과였다.
영국 앨범 차트 탑을 찍었고 플래티넘을 기록했으며 미국선
12위까지 올랐다. 영국 싱글 차트에서도 탑을 찍은 Ashes
to Ashes는 본작의 대표곡으로서 메이저 톰 캐릭터가
재언급되며 척 해머의 신스 기타 솔로잉이 유명하다.
영국 싱글 5위까지 오른 Fashion의 뮤직 비디오는 정치적
풍유를 강하게 내포하고 있어 당시 유명했다. 이밖에 타이틀
트랙과 Teenage Wildlife, It's No Game을 들어볼 만하다.
('Ashes to Ashes' from Scary Monsters, 1980)
('Fashion' from Scary Monsters, 1980)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 from eponymous album,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NHywdqH3F6Y
- 런던 방언이 등장한다고. 퍼커션 이펙트가 유명하다.
('Teenage Wildlife' from Scary Monsters,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1hIwB97p3r0
- 프립과 알로마에 척 해머, 3인의 기타 앙상블.
('It's No Game' from Scary Monsters,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24Ur_OdR7yo
- 일본어 대사가 등장하니 놀라지 마시길.
(Under Pressure, single)
사실 보위 작업이 아니고 퀸 프로젝트에 초빙된 건데 81년
Under Pressure를 언급 안 하고 가면 화내는 팬이 많다.
별도 싱글로도 발매되었고 퀸이 역대급으로 말아먹은 앨범
Hot Space에도 실려 있다.
머큐리가 사망한 후 보위 혼자서 라이브 뛰기 위해 90년대
이후 베이스 겸 보컬 게일 앤 도시와 협업을 많이 했는데
개인적으로 96년 암스테르담 TV 라이브를 좋아한다.
('Under Pressure' by Queen & David Bowie, 1981)
*TV Live feat. Gail Ann Dorsey in Amsterdam 1996
(Let's Dance)
83년 15집 Let's Dance의 대성공은 솔직히 보위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그 자신도 생전에 인정한 듯하다.
정말 우연히 찾아든 대박. 3부작 등 예술 작업을 통해 꽤
탄탄한 창작 역량을 축적해 놓았고 십여 년 전부터 미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건만, 정작 이렇게
대단한 성공이 예고도 없이 찾아든 상황이라니.
이게 다 동명의 타이틀 트랙 Let's Dance가 미국에서 너무
히트를 쳐버린 탓이다. 보위 커리어 최고의 히트 튠. 영국,
미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에서
싱글 탑에 올랐고 호주, 독일, 오스트리아서 2위를 찍었다.
앨범? 미국에서 4위, 영국, 호주, 네덜란드, 노르웨이 등에서
탑을 찍었고 독일, 오스트리아에선 2위를 찍었다. 거기에
영국,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에서 플래티넘을 기록.. 오오오.
84년 당시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 후보로도 올랐으며 -
비록 수상은 Thriller에 밀렸어도 - 현재까지 1천 1백만 장이
팔렸다고. Young Americans 이후 제대로 작업해보자 해서
시크 출신 나일 로저스를 프로듀서로 영입해 미국 정통의 흑인
사운드를 접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세션
기타리스트조차 아직 무명이었던 스티비 레이 본.
('Let's Dance' from eponymous album, 1983)
*저 술집 씬의 엑스트라 분들은 당시 현지 주민들이시다.ㅎ
- 뮤직 비디오인지 뭔지 도통 모르셨다고. 정직한 리액션을 찍은 거다.
Let's Dance는 영국에서 싱글 데뷔를 5위로 했을 정도이며
호주에서 원주민 배우와 아마추어처럼 찍은 뮤직 비디오조차
당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고.. 싱글만 영국에서 실버 기록한
Modern Love와 China Girl은 후속 싱글로 차트 2위까지
올랐고 미국에서도 각각 탑20위, 10위까지 올랐을 정도이다.
보위가 OST에 참여했던 Cat People(Putting Out Fire)은
조르지오 모로더 작곡의 원곡에 스티비 레이 본의 그루브 필
충만한 기타 솔로잉을 가미한 버젼으로 앨범에 실리기도 했다.
보위 자신은 타이틀 트랙에 대한 애정이 크지 않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지만, 생애 최고의 메가히트임은 부인할 수 없겠다.
보통 이 정도로 대박을 쳐버리고 나면... 어떨까. 정답,
다음 작품 때문에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하게 다음 앨범부터 그는 잘 안 풀리기 시작한다..ㅠ
('Modern Love' from Let's Dance, 1983)
('China Girl' from Let's Dance, 1983)
('Cat People (Putting Out Fire)' from Let's Dance, 1983)
*데이빗 보위의 Let's Dance 앨범 버젼 - 기타 Stevie Ray Vaughan
https://www.youtube.com/watch?v=6NUy1ZH6ViE
*영화 캣피플 OST 앨범 버젼 - 주연 Nastassja Kinski
https://www.youtube.com/watch?v=VpdHMaccjw4
(Tonight)
84년 16집 Tonight은 영미 싱글 차트 탑텐에 든 Blue Jean을
보유했지만 여러 모로 음악적 성과가 아쉬운 그냥저냥 상업적인
80년대 앨범에 불과했다. 앨범도 영국 차트 탑에 오르긴 했으나
누가 봐도 전작의 동력에 힘입은 결과였다.
('Blue Jean' from Tonight, 1984)
(Dancing in the Street, single)
85년엔 우주 최강 스타로서 라이브 에이드 무대에 올랐다. 믹
재거와 듀엣으로 싱글 Dancing in the Street를 발매해 영국
차트 탑과 미국 차트 탑텐을 기록했다. 원래 라이브 에이드의
영미 양쪽 무대에서 부르려 했는데 기술이 따라주지 않아 실패.
('Dancing in the Street' by Mick Jagger & David Bowie, 1985)
*Marvin Gaye 작곡의 64년 소울 곡을 커버한 것.
- 성격상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원래 위 두 분은 절친이다.
(This Is Not America, single)
같은 해 영화 주제가로 발표한 This Is Not America는 핫100
차트 탑40까지 오르는 중박을 기록했다. 팻 메스니의 도움으로.
87년 17집 Never Let Me Down의 어중간한 실험성과 상업
코드는 더욱 실망스러웠다. 앨범과 싱글 차트 성적도 별로였고.
('This Is Not America' by Pat Metheny Group & David Bowie, 1985)
*Sean Penn 맞다. John Schlesinger 감독의 스파이물 영화.
- 'The Falcon and the Snowman'이란 제목. 꽤 재밌다고..
('Absolute Beginners' from eponymous OST album,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iCJLOXqnT2I
*또 하나의 주제가. 영화는 말아 먹었는데 노래만은 반응이 좋았다.
- 그가 직접 출연도 하신 음악 영화였다.
(Tin Machine)
90년대에 돌파구로서 Tin Machine이란 4인조 하드락 밴드를
조직해 딴엔 70년대 초창기처럼 다른 멤버들과 대등하게 창작에
매진해 보려 했으나.. 이미 거물인데 그게 가능한감. 실패였다.
('Under the God' from Tin Machine, 1989)
*약간 칩트릭 류의 하드락이 연상된다. 그래서 안 어울림..
92년엔 프레디 머큐리 헌정 공연에서 애니 레녹스와 좋은 무대를
선보였다. 직후에 소말리아 출신 탑 모델 이만과 결혼하셨고 향후
음악 노선은 일렉트로닉과 인더스트리얼을 지향하여 이것저것
익스페리멘트.. 성과는 미미했다. 한물 갔다는 말도 나오고.
('All the Young Dudes' feat. David Bowie, 1972)
*Live from the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 1992.
- 원래 보위가 72년에 Mott the Hoople에게 작곡해준 곡.
('Jump They Say' from Black Tie White Noise, 1993)
- 조현병으로 자살한 형 이야기
('Hallo Spaceboy' from 1. Outside, 1995)
- 근 20년 만에 Brian Eno와 다시 협업한 결과물
('Little Wonder' from Earthling, 1997)
- 가장 히트한 트랙인데 완벽한 인더스트리얼 장르이다
('Thursday's Child' from 'hours...', 1999)
- 앨범 전체가 원래 비디오게임의 OST 목적으로 제작된 것
('Slow Burn' from Heathen, 2002)
- Pete Townshend on guitars
('New Killer Star' from Reality, 2003)
- post-9/11 쪽으로 해석하는 설이 있다
투어에서는 여전히 셀링 파워가 강한 슈퍼스타셨는데, 04년에
오슬로에서 공연 도중 눈 부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고 심장에도
무리가 와서 이래저래 이후 공식 활동은 자제하고 계셨다...
그렇게 음악가로서 저물어 가는 줄, 알. 았. 는. 데.
(The Next Day)
13년에 전격적으로 공식 24집 The Next Day를 발매하신다,
예순 여섯 생신일인 1월 8일에. 전세계 팬덤과 평단 양쪽에서
뜨겁게 호응하였고 영국 앨범 차트에선 탑으로, 미국에서는
2위로 데뷔를 끊었다. 영국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하고.
('Where Are We Now' from The Next Day, 2013)
https://www.youtube.com/watch?v=QWtsV50_-p4
('The Next Day' from eponymous album, 2013)
*Gary Oldman은 그의 절친이시다.. 후덜덜한 캐스팅과 충공깽의 연출.
- 미성년자는 주의하기 바란다. 극보수적 기독교도 역시.
('The Stars (Are Out Tonight)' from The Next Day, 2013)
*Tilda Swinton 맞다. 미성년자는 주의하기 바란다.
(Blackstar) (★)
16년 예순 아홉 생신일엔 공식 25집 Blackstar를 발매하셨고
평단의 지지를 이끌어낸 후 이틀 지나 갑작스럽게 영면하셔서
세상은 슬픔에 잠겨 버렸다. 온 지구인의 친구 지기 스타더스트가
우주로 훌쩍 날아가 버린 것이다. 영원히..ㅠㅠ
('Blackstar' from eponymous album, 2016)
*이미 암 선고를 받은 상태였기에 죽음의 암시가 곳곳에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Lazarus' from Blackstar, 2016)
한 사람의 당당한 창작자로서 삶을 열어졎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음악 창조에 인생을 갈아넣은 진정한 뮤지션.
평생 음악 산업과 예술 분야의 중심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오롯이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자아를 잃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사표를 세워준 시대의 예술가.
그가 일찍이 페르소나 작법을 통한 상상력의 극치를 선물한
점은 혹자가 논평했듯이 전후 포스트 모던 사회의 폭압적인
성역할을 전복하고 젠더의 평등을 통해 진정한 자아의 해방을
구현하려 했던 그 자신만의 소통 어법이라고 정리하겠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화성으로 돌아가
우주의 물질과 영혼을 위로하는 책무에 눈을 뜬 것이라고.
마치 그가 수십 년 전에 내놓은 작품에 가련한 수십 억의
지구인들이 아직까지도 마음의 위무를 기대고 있듯이.
('Pablo Picasso' from Reality, 2003)
- Modern Lovers의 76년 튠 커버.
과거를 회상해보면 아무래도 세대가 세대인지라 당시 그토록
욕을 먹었던 80~90년대 일렉트로닉 보위의 곡들에 첫 정을
주었던 것 같다. 엄청 욕먹었는데 사실 그때 그 곡들 지금
들어보면 하나같이 상당한 역량의 음악이다. 그만큼 요즘
음악가들이 쳐지지 않은가 싶은...
Life on Mars, Aladdin Sane, Station to Station,
Teenage Wildlife 등 애정하는 보위 튠들이 많이 있지만..
본 블로거는 Fame을 75년 원곡이 아니라 Fame '90라고
90년 리믹스 버젼으로 먼저 듣고 깊은 인상을 받았더랬다.
(영화 귀여운 여인 OST 앨범으로 기억한다.)
특히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만든 뮤직 비디오에 데이빗 보위와
함께 캐나다 현대 무용수 루이스 르카발리에가 출연하시는데,
가뜩이나 완성도가 높은 보위 영상물 중에서도 단연 최고라고
여긴다. 하여 강력한 추천을 때리며 이번 포스팅을 마무리한다.
('Fame '90' from Changesbowie, 1990)
*연출 Gus Van Sant, 안무 Louise Lecavalier.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게디 리 Geddy Lee (0) | 2019.11.09 |
---|---|
존 앤더슨 Jon Anderson (0) | 2019.10.19 |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 (0) | 2019.08.15 |
필 콜린스 Phil Collins (0) | 2019.07.16 |
브루스 스프링스틴 Bruce Springsteen (0) | 2019.06.15 |
필 콜린스와 이어 붙여서 이분 포스팅 안 하면 뭔가 허전하게
생각할 사람들 있을 거다. 그런데 일부 매니아들에 알려진 지적
명성에 비교해 한국 시장에서 그의 인지도는 낮아도 너무 낮다.
게다가 지극히 제한적인 경로로 얻을 수 있는 그에 대한 한글
정보는 매우 부정확하기까지 하다. 가끔 열받을 정도로.
이에 반해 유럽 중심 사회에서 20세기 후반을 통틀어 형성한
그의 사회적 이미지는 사뭇 진지하고 웅대하다. 20세기 대중
음악계에서 가장 지성적이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인물로 보통
꼽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거둔 음악 산업에서의 객관적
성과와 업적도 결코 만만히 볼 만한 수준이 아니다.
하여 이제 약간은 한물 간 진보 대중 음악가를 다시 정확하게
해설하여 제대로 알고 넘어가자는 뜻으로, 작정하고 진중하게
접근해보려 한다. 제네시스에서 파생한 최고의 월드뮤직
아티스트, 피터 가브리엘 Peter Gabriel에게로 말이다.
('Solsbury Hill' from Peter Gabriel 1/Car, 1977)
('Sledgehammer' from So, 1986)
*뮤직 비디오 감독은 Stephen R. Johnson.
(From Genesis to Revelation)
(Trespass)
(Nursery Cryme)
('The Musical Box' from Nursery Cryme,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9LlbYixG1GU
*73년 영국 라이브 중 - 앞에 1분간 가사의 목 댕강 스토리를 설명한다.
('The Fountain of Salmacis' from Nursery Cryme,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In2fRySroH8
('Watcher of the Skies' from Foxtrot, 1972)
(Foxtrot)
눈물겨웠던 전작들 활동을 마치고 진정한 성공작을 만들기
위해 모든 멤버가 절치부심했다. 4집 준비를 위해 모이기
직전 어느 페스티벌에 참가했을 때 가브리엘이 느닷없이
메이크업 및 코스튬과 함께 등장했고 영국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얻었기에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72년 Foxtrot는 밴드 결성 후 최초로 영국 앨범 차트에
진입하는 성공을 거둔 작품. 80~90년대 제네시스 역사를
아는 사람들이야 그게 뭐 대수냐 하겠지만, 눈물젖은 빵을
먹어본 그들에겐 의미있는 성과였다. 해킷이 열심히 꼬신
덕인지 첫 트랙 Watcher of the Skies의 인트로부터
뱅크스가 장엄하게 Mellotron Mk II를 쳐댔다.
다들 아시겠지만 앨범의 백미는 퀸텟 시절을 대표하는 프로그
장르의 걸작이며 22분이 넘는 대곡인 Supper's Ready. 와~
이 시절 다섯 멤버가 얼마나 치열한 예술적 감성으로 충만한
상태였는지, 오로지 한 곡으로 입증된다. 가브리엘의 가사가
으레 그렇듯이 난해한 내용이지만 꿈과 현실이 섞여 약간
기독교적인 일화와 연관이 있다고.. 가브리엘 아내가 겪은
영적 체험 관련설이란 떡밥도 존재.. 해석은 각자의 몫.
(Mellotron Mk II)
https://equipboard.com/pros/tony-banks/mellotron-mkii
('Supper's Ready from Foxtrot, 1972)
*팬덤에서 애니메이션으로 구성한 버젼.
Supper's Ready 소곡 구성 (스튜디오 버젼 기준):
i. Lover's Leap [0:00~3:47]
ii. The Guaranteed Eternal Sanctuary Man [3:48~5:43]
iii. Ikhnaton and Itsacon and Their Band of Merry Men [5:44~9:42]
iv. How Dare I Be So Beautiful? [9:43~11:04]
v. Willow Farm [11:05~15:36]
vi. Apocalypse in 9/8 [15:37~20:50]
(Co-Starring the Delicious Talents of Gabble Ratchet)
vii. As Sure As Eggs Is Eggs [20:51~22:54]
(Aching Men's Feet)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szJq1lwnkNw&t=
*가장 유명한 74년 파리 방송 라이브 버젼.
- Supper's Ready 본곡은 6분 20초경부터.
무대를 주름잡는 가브리엘의 똘끼 충만 시절을 느끼려면
화질 안 좋은 예전 라이브 영상을 꼭 보시길. 7개 소곡으로
나뉘는 이 대작의 절정부라면 역시 5부 Willow Farm 및
6부 Apocalypse in 9/8. 커다란 꽃 가면을 쓴 그의 스틸
사진을 많이 구경했을 텐데 - 맨 위 사진 - 바로 5부에 나오는
코스튬이다. 6부의 '9/8'은 8분의 9박자라는 뜻. 이런 파트를
들어보면 각 파트 멤버들의 연주 기본기가 얼마나 충실한지
깨달을 게다. 5부는 싱글로도 발매된 바 있다.
이밖에 Get 'Em Out by Friday는 곡 안에 서로 다른 세
캐릭터끼리 서사를 주고 받는 진정한 씨애트리컬 락으로서
가브리엘의 문학적 똘끼가 빛나는 곡. 해킷의 영향이 짙은
트랙으로 JS바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본뜬 Horizons와
Can-Utility and the Coastliners를 꼽을 수 있다.
프로그레시브 락의 정수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필청의 음반일
것이다. 이 앨범으로 제네시스 다섯 사람은 1970년대 락밴드
시대의 중심 세력 중 하나로 급부상하게 되고 음악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를 세운 셈. 장르가 너무 복잡해 귀찮다 싶어도
이 앨범만 들어보면 충분히 감이 올 듯...
('Get 'Em Out by Friday' from Genesis Live, 1973)
('Can-Utility and the Coastliners' from Foxtrot, 1972)
('Horizons' from Foxtrot,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oHmjbwfYf-k
그 외에 프로그 장르의 발전사에 관해 굳이 더 큰 호기심이
동한다면 아래의 앨범들에 추천을 때린다. 시간 순서대로..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1969
('21st Century Schizoid Man' by King Crimson)
https://www.youtube.com/watch?v=MM_G0IRLEx4
- an excerpt from legendary Hyde Park Live
"Fragile", 1971
('Roundabout' by Yes)
https://www.youtube.com/watch?v=GWIEZQ63NhI
- a tour live in 1991
"The Dark Side of the Moon", 1973
('Money' by Pink Floyd)
https://www.youtube.com/watch?v=Kjgwjh4H7wg
- a concert live in London 2005
"Tubular Bells", 1973
('Tubular Bells' by Mike Oldfield)
https://www.youtube.com/watch?v=_86Gm9iclAg
- an excerpt from legendary Montreux Live in 1981
"Brain Salad Surgery", 1973
('Karn Evil 9' by Emerson Lake & Palmer)
https://www.youtube.com/watch?v=BugmeXR7_V8
- 1st Impression, Part 1 - studio album version
"2112", 1976
('2112' by Rush)
https://www.youtube.com/watch?v=RtdKhwhAcd4
- 2112 Overture / The Temples of Syrinx - studio single version
('Dancing with the Moonlit Knight' from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1973)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Foxtrot가 영국 시장에서 처음으로 스타덤을 안겨준 첫
성공작이라 한다면 73년의 5집은 자신감을 장착한 다섯
멤버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영국 앨범 차트 3위까지 오르고
미국 차트에 처음으로 진입하여 전작의 성공을 확대 재생산한
명반 Selling England by the Pound가 바로 그것.
전작의 창작 코드가 훨씬 더 정제되면서도 뭔가 한층 더
대중적인 어프로치를 통해 팬덤을 확대하는데 성공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해킷 본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한 앨범이기도
하거니와, 명곡 반열에 오른 첫 트랙 Dancing with the
Moonlit Knight에서 그는 태핑과 스윕 피킹 주법을 통해
잉베이 말름스틴 같은 후배들에게 충격적 영향을 끼친다.
I Know What I Like는 유일하게 싱글로 커트되어 이들의
영국 내 첫 탑30 히트를 기록한다. 유명한 뱅크스의 피아노
인트로로 시작하는 Firth of Fifth에서 해킷은 커리어 전체를
대표한다는 빼어난 솔로잉을 들려줘 곡 전체가 탁월한 음률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이에 반해 The Cinema Show에서 ARP
Pro Soloist로 연주한 솔로 파트는 뱅크스 커리어 전체에서
가장 빼어나다고 극찬을 받는 프레이징.
데뷔 시절부터 기반한 브리티쉬 포크의 색깔을 지우고 미국
음악의 우산으로 옮겨간다는 뜻이 제목에 내포되어 있듯이,
영국식 껍데기를 벗고 진화한 제네시스의 변화가 산뜻하다는
팬덤의 찬사가 터져나왔다. 영국과 미국에서 골드를 기록했고
앨범의 전 트랙이 제네시스 라이브의 단골 연주곡으로 정착..
아울러 배트윙, 여우머리, 마곡으로 발전해온 가브리엘의
코스튬 세계는 Dancing with the Moonlit Knight에서
로마시대 투구를 쓴 브리태니아 기사로, I Know What I
Like에서 소방수 헬멧을 장착한 잔디깎이로 변화해갔다.
(ARP Pro Soloist)
(70년대 초반 뱅크스 장비 도해)
('I Know What I Like' from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1973)
('The Cinema Show' from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1973)
*후반부 1분 30초는 앨범 마지막 트랙인 'Aisle of Plenty'.
- 컨셉트 앨범의 대미이므로 두 곡을 접속해서 듣는 것이 옳다.
**ARP Pro Soloist로 연주한 시그니처 솔로는 7분경부터 등장.
('Carpet Crawlers' from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from eponymous album, 1974)
*탈퇴 직전 마지막 투어 라이브.
*Phil Collins joins Peter Gabriel's concert in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1dJbdSTmDs
필경 이 무렵부터 가브리엘이 솔로 활동에 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세간에 호사가들 말처럼 콜린스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이 쫓아낸 것은 결코 아니다. 단독으로 활동할 수
있을 만큼 음악 산업에서 자신의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하고 있던
가브리엘의 전략적 판단이 가장 큰 결정 요인이라고 추측한다.
이 시기까지 가브리엘과 제네시스의 관계는 일곱 살 앞서는 선배
짐 모리슨과 도어즈의 관계와 유사했다. 밴드의 브랜드 가치보다
프론트맨의 대중적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다른 멤버들을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밴드 안에서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 상당한
역량을 가진 멤버들끼리 적당한 긴장감은 늘상 있었다.
6집을 녹음할 때는 이상하게 그 긴장이 서로 극에 달한 상황이
되었다. 앨범의 스토리텔링을 위해 영화감독과도 교류하는 등
안팎의 사정으로 늘 바쁘고 어수선한데다 가브리엘이 이제 막
결혼해 첫 아이를 출산할 때가 다가왔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한
뱅크스나 러더포드 등과 신경전을 벌이곤 했다.
신작 앨범은 그런 난장판 속에 탄생했다. 가브리엘이 작사만
맡을 뿐 모든 작곡은 네 명 멤버들이 전담했는데, 정작 팬덤이
가브리엘-제네시스 시대의 최고 명작이라고 열광하는 상황..
- 뭐, 이런 아이러니가... 74년 11월 앨범 발매를 기점으로
투어를 개시하기 전, 그는 밴드 전체에 탈퇴 의사를 알렸으며
공식 발표는 투어 마치고 이루어졌다.
('In the Cage' from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
*Brian Eno가 보컬에 Enossification 효과를 입혀주었다.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Back in N.Y.C.' from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가브리엘 시대
제네시스의 마지막 걸작인 더블 앨범이다. 현대인의 결핍된
심리와 병리적 환상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온전한 세계관을
구축해온 가브리엘의 창의성이 극에 달해 만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전설의 명반이다.
본작에서 토니 뱅크스는 발군하다. 스티브 해킷도 이에 못지
않다. 두 사람 사이에서 묘한 경쟁과 반목을 관찰했다는 말도
몇몇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리듬 섹션의 두 사람도 실로
창의적이다. 연주를 맡은 네 멤버의 조화는 더없이 아름답다.
개인적으로 꼽는 최고의 키보디스트는 뱅크스인데, 순전히
이 앨범만 듣고 평가를 내려도 충분하다고 믿을 정도이다.
여러 모로 제네시스와 밀접한 관계였던 브라이언 이노 역시
Enossification이란 사운드 이펙트를 접목시켜 주었다.
곡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접근할지 막연한 분이 많을 터.
보통 팬덤에서는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와
함께 In the Cage, Back in N.Y.C., Carpet Crawlers,
Fly on a Windshield, The Lamia 등등으로 서서히 애호의
범위를 넓히는 쪽을 추천한다. 카페트 크롤러와 Counting Out
Time은 싱글로도 커트되었으니 참고하면 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가브리엘 자신이 꿈으로 본 기묘한 이야기를
푸에르토리코 소년 라엘이란 캐릭터가 뉴욕에서 겪는 초현실에
빗대어 플롯을 구성했다. 즉 남의 꿈 얘기를 들여다보는 셈. 사실
그의 가사가 대부분 해석이 안 되는 원인인즉슨 해몽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략 그러려니 하고 물 흐르듯이 느끼고 즐기는 쪽이
제일인 법. 남의 꿈을 못 읽어냈다 해서 큰일나는 거 아니쟎나.
요샌 애니메이션으로 그려낸 영상도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Counting Out Time' from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
('Fly on a Windshield' from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k9X2QtzCvBQ
('The Lamia' from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g09mTchpOPU
사실 찬찬히 들어보면 의외로 음률이 대중적이다. 난해하다고
잔뜩 어려운 말로 속물처럼 갈긴 평만 읽고 실제로 음악을 듣는
데 주저하진 말라. 이미 수십 년 지난 음악이며 그 사이 수많은
팬이 즐기며 자신만의 문화를 구축해왔다. 이 음악을 만든 이는
좀 사는 나라의 제법 사는 집 출신으로 약간의 음악적 훈련에
온갖 상상력을 섞는데 성공한 스물 몇 살 청년들에 불과하다.
너무 난해해서 정신과 의사급만 알아 듣는다는 해석글이
여러 사이트에 돌아 다니던데 그런 거 없고, 그냥 들을 수
있는 만큼만 듣고 즐기면 그뿐이다. - 이런 뻘소리는 본
블로거 어렸을 때도 있던, 팬덤이 지은 2차 창작 같은 건데
아직도 돌아다니다니.. 제발 이상한 뻘글 좀 퍼담거나
싸질러 놓지 말라고들. 인터넷 공해다. 무릇 음악이란,
듣고 즐길 수 있으면 그뿐이다. 경전이 아니지 않은가.
이 세상에 난해한 음악이 얼마나 많은데 수십 년 전 대중 가요
정도가 뭐 얼마나 어려울까. 본작이 일본과 한국 바보들에게
어렵게 다가오는 건 단 한 가지, 영어로 쓴 가사를 해석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단순히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영시문학을
어느 정도 즐기는 훈련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영어가 안 되요 하는 소린 할 수 있을지언정 - 현재 영미권을
사는 사람들도 어려워하니 쪽팔린 일도 아니니까 - 음악이
난해하다는 한 마디로 퉁치고 제껴놓지 말자고들.
선입견을 제거하고 들어보면 멋진 앨범이다. 어떻게 40년 전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이런 악상을 떠올렸을까 싶은,
젊디 젊은 재능으로 충만한 멜로디와 패턴이 군데군데 숨어
있으니 귀한 보물을 잘 찾아 보시길.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운 후 75년 8월, 제네시스는 피터 가브리엘의 탈퇴를
공식 발표한다. 팬덤은 난리가 났고.
*가브리엘-제네시스 시대 9대 코스튬에 관하여
- 탈퇴하면서 이제 그만의 독창적 무대의상 시대는 끝난 거다.
https://www.musicalbrick.com/top-9-peter-gabriel-costumes-1972-1975/
*animated illustration created by fan artists (side 1)
- Enossification은 20'14"부터 나오는 트랙에서 더 두드러진다.
('The Grand Parade of Lifeless Packaging')
*animated illustration created by fan artists (side 2)
쿼텟이 된 제네시스는 이미 다른 포스팅에서 썼듯이 콜린스가
보컬의 소임을 맡는다. 그는 의외로 잘 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가 스포일러이지만 80~90년대를 주름잡은 가수 아닌가.
네 사람 체제에서는 76년에 A Trick of the Tail 및 Wind
& Wuthering 두 장의 앨범을 냈는데, 사실 두 작품이 퀸텟
시절 제네시스의 잔상을 지우기가 쉽지는 않아서, 여전히
프로그레시브 팝락의 어딘가 복잡미묘한 위치에서 조금씩
새로운 음악의 시대를 향해 변화를 품고 있었다. - 근데 판매
실적은 퀸텟 시대보다 더 좋아졌다는 것이 함정..ㅜ 제네시스
판매고 1억 장은 사실 대개 가브리엘 나간 후에 거둔 거라능.
이 중엔 A Trick of the Tail, Dance on a Volcano, Squonk
같은 트랙들이 프로그레시브 성향을 견지하는 팬덤에서 꾸준히
지지를 받고 있어 들어볼 만하다. Los Endos는 아기자기한 잔
리듬에 강한 콜린스식 드러밍이 폭발하는 또 다른 인기 트랙.
뱅크스가 작곡한 Afterglow는 신비로운 질감의 백킹이 어여쁜
발라드. 시종일관 울려퍼지는 Moog Taurus의 이펙트가 매우
예쁜 소리를 빚어내 팬덤의 지지가 높다.
이외에도 Eleventh Earl of Mar, Entangled, Your Own
Special Way, Mad Man Moon, One for the Vine 등
곡이 팬덤과 평단의 꾸준한 지지를 받았다. 두 장의 앨범을
내고 해킷이 탈퇴하여 솔로 아티스트로서 활동을 이어간다.
사실 그는 원래 솔로였다가 제네시스에 영입된 것이니 본디
독립 의지가 강한 입장이었다. 자존감도 강한 분이시고.
('Dance on a Volcano' by Genesis,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2JGK6Q8rbRU
('A Trick of the Tail' by Genesis,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ZXqSEw3H_PI
('Eleventh Earl of Mar' by Genesis,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vmp6mUlguyQ
('When the Heart Rules the Mind' by GTR, 1986)
('Toe the Line' by GTR,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uUtZkaMAPLw
제네시스의 라이브 앨범은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접근하면 된다.
가브리엘 시대 라이브는 유일하게 73년 앨범 Genesis Live에서
들을 수 있고, 쿼텟 시대 라이브는 77년 Seconds Out을 통해
접할 수 있다. 82년 Three Sides Live와 92/93년 The Way
We Walk Vol.I&II는 트리오 시대 라이브이다.
제네시스 재적 중인 75년에 솔로 앨범 Voyage of the Acolyte을
낸 전적이 있는 스티브 해킷은 탈퇴 후엔 철저하게 프로그 장르를
추구하는 예술적 대중 음악을 다룬다. 예스 출신 기타리스트로서
해당 장르에서 쌍벽을 이루는 스티브 하우와 슈퍼그룹 GTR을
결성하여 86년에 셀프 타이틀 앨범을 내기도 했다. 딱히 프로그
성향 앨범은 아니지만 매니아들로부터 각광받은 작품이다. 싱글
히트곡으로 When the Heart Rules the Mind를 배출했다.
트리오 제네시스 멤버들은 되레 과거 프로그 시대 히트 튠에서
거리를 두려는 경향을 보여왔다. 70년대 히트 트랙을 공연에서
꾸준히 선보인 사람은 오히려 해킷. 90년대 중반 이후 Genesis
Revisited라는 공연 프로젝트를 통해 게스트 멤버를 규합하여
프로그 시대 제네시스 음악을 무대에서 꾸준히 재현해오고 있다.
*Firth of Fifth의 가브리엘 퀸텟 시대 라이브. 74년.
*Firth of Fifth의 Genesis Revisited 공연 라이브. 13년 로열 앨버트 홀.
*The Cinema Show의 Genesis Revisited 공연 라이브. 15년.
*The Cinema Show 후반부의 쿼텟 제네시스 시대 라이브. 76년.
https://www.youtube.com/watch?v=Zhvq0XZGOSE
- Phil Collins와 Bill Bruford가 트윈 드러밍을 보여준다. 오오.
(Seconds Out)
(Voyage of the Acolyte)
(GTR)
(Genesis Revisited, poster)
*'Solsbury Hill'의 03년 Growing Up 투어 공연 모습.
- 03년 라이브 무렵부터 머리를 삭발하고 등장하신다.
(Solsbury Hill, single)
(Games Without Frontiers, single)
피터 가브리엘의 솔로 앨범 초기 네 장은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앨범 타이틀이 없이 네 장 모두 Peter Gabriel로
명명했고 자신의 얼굴을 일부 왜곡시키는 효과를 앨범의
커버 아트로 채택한 것. 보통 팬덤은 1, 2, 3, 4의 숫자를
붙이거나 커버 아트에서 착안하여 Car, Scratch, Melt,
Security로 따로 부른다. 각 77년, 78년, 80년, 82년작.
세밀한 온도차는 있지만 앞의 두 장 앨범은 제네시스 시절
프로그 아티스트 같은 모습이 아직 채 씻기지 않은 음악을
들려주고, 뒤의 두 장 앨범은 포스트 펑크와 일렉트로닉을
광범위하게 받아 들이면서도 월드뮤직으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는 변신 과정을 보여준다는 차이가 있다.
('Games Without Frontiers' from Peter Gabriel 3/Melt, 1980)
(Peter Gabriel 1) (Car)
77년 Peter Gabriel 1/Car는 밥 에즈린이 프로듀서로서
작업을 마친 작품. 앨리스 쿠퍼의 70년대 성공작 작업물로
유명한 프로듀서이다. 진지하고 명석하지만 뭔가 재미없는
우울함으로 가득해 보이던 가브리엘의 음악적 이미지를
정겹고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히려 애썼다.
결과는 성공. 일생에 걸쳐 가브리엘을 대표하는 싱글 히트곡
Solsbury Hill이 터져 영국 차트 탑20에 들고 미국 차트에도
진입한다. 4분의 7박자에 목가적인 따뜻함을 실은 이 곡은
가브리엘이 제네시스를 떠나며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했던
경험을 술회한 내용이라고.
스티브 헌터가 유명한 어쿠스틱 기타 리프를 맡았고 군데군데
기타 프레이징을 킹 크림슨의 로버트 프립이 도왔다. 베이시스트
토니 레빈, 키보디스트 래리 패스트, 드러머 앨런 슈워츠버그 등
향후 가브리엘 밴드의 단골 세션이 모두 참여한 명곡이다.
Down the Dolce Vita 및 Here Comes the Flood에서
오케스트라 파트는 런던 심포니가 초빙되었다.
강렬한 인트로 튠 Moribund the Burgermeister, 싱글로 커트한
Modern Love, 블루스 색이 짙게 배어나오는 Waiting for the
Big One, 헌터의 백킹이 인상적인 Slowburn 역시 매우 인상적인
트랙들로서 공연마다 팬덤이 열광해왔다. 가브리엘 자신은 Here
Comes the Flood의 관현악 편성이 과하다고 여겨, 이후 공연에선
자신이 직접 키보드 백킹을 치는 식으로 이를 대체해왔다. - 그는
기타보다 키보드로 작곡하는 스타일의 뮤지션이며 솜씨도 수준급.
영국 앨범 차트 탑텐 및 골드 인증과 미국 앨범 차트 탑40 등,
기록도 준수했고 솔로 아티스트로서 자리 잡는데 매우 성공적인
발판을 제공한 앨범이다. 클래식, 포크, 블루스, 락앤롤 등 모든
장르의 균형이 골고루 잡힌 수작. 그의 작곡 실력은 출중하다.
('Modern Love' from Peter Gabriel 1/Car, 1977)
('Here Comes the Flood' from Peter Gabriel 1/Car, 1977)
*1979년 TV 라이브 중. 미니멀한 피아노 백킹 버젼이다.
('Moribund the Burgermeister' from Peter Gabriel 1/Car,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oqkqxvxla4w
('Slowburn' from Peter Gabriel 1/Car,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VTgYKNZM9KM
('Exposure' from Peter Gabriel 2/Scratch, 1978)
(Peter Gabriel 2) (Scratch)
78년 Peter Gabriel 2/Scratch는 전작에서 호흡을 맞춘
로버트 프립이 프로듀서로 나섰는데 익스페리멘탈 경향이
강한 프립의 에고가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서 여러 모로 좀
과하다는 인상을 준 듯. 가브리엘 자신도 이 점은 인정하는
모양이긴 하나, Frippertronics를 아는 사람은 알듯이 독특한
사운드메이킹 만큼은 인정 안 할 수 없다는 매니아도 많다.
Frippertronics는 프립의 전매특허인 사운드 이펙트 기술로
테이프 루프를 이용하는 방식이고 8번 트랙 Exposure에서
들을 수 있다. On the Air, White Shadow, Perspective
등 트랙에서 프립의 연주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토니 레빈 역시 앨범 전반에 걸쳐 일렉트릭 베이스와 채프먼
스틱을 넘나들며 예의 넘사벽 연주력을 제공한다.
E스트리트 밴드의 저명한 피아니스트 로이 비턴도 참여했다.
다양한 이펙트가 지배하는 모드이다 보니 돋보이지는 않는다.
드럼 제리 마로타, 기타 시드 맥기니스, 색소폰 팀 카펠로가
참여한 첫 앨범이기도 하다. 싱글로 발매된 4분의 5박자 튠
D.I.Y.는 독창적이지만 뭔가 씹어먹는 카리스마가 부족해 차트
진입엔 실패했다. 차라리 On the Air나 Animal Magic을
커트했어야 옳지 않았나 싶은..
음악성 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많이 받았고 Indigo 같은 곡에서
보인 실험성은 매니아를 양산했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이라
평가하기엔 부족했다. 그리하여 가브리엘이 다음 앨범부터
프립의 비중을 줄이기로 작정했다..나... 흠.
(Chapman Stick)
('On the Air' from Peter Gabriel 2/Scratch, 1978)
('D.I.Y.' from Peter Gabriel 2/Scratch, 1978)
('No Self Control' from Peter Gabriel 3/Melt, 1980)
*영국의 인기 TV쇼 Top of the Pops 출연분.
('I Don't Remember' from Peter Gabriel 3/Melt, 1980)
*인트로 리프에 쓰인 악기가 바로 Chapman Stick.
(Peter Gabriel 3) (Melt)
(Rolling Stone Magazine's 100 Best Albums of the 1980s, 1989)
80년 Peter Gabriel 3/Melt로부터 피터 가브리엘이란 세계적
스타가 탄생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Hipgnosis의
전위적인 커버 아트로 유명한 본작은 영미 양국에서 동시에 골드
인증을 받고 영국 차트 탑, 미국 차트 22위에 오른 성공작이다.
롤링 스톤 매거진이 1989년에 선정한 80년대의 100대 명반에도
올랐고 영국 싱글 차트 탑텐에 처음으로 든 히트곡을 배출한다.
- Games Without Frontiers.. 4위까지 올랐다.
가브리엘의 열성팬이라면 라이브에서 숱하게 접했을 명곡들이
이 앨범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Games Without Frontiers,
No Self Control, Biko, I Don't Remember, Intruder,
Family Snapshot 등.. And Through the Wire나 Not
One of Us 같은 곡도 인기가 높다.
Intruder는 필 콜린스가 드럼 세션을 맡으면서 gated reverb란
기술을 도입한 기념비적 트랙. No Self Control은 미니멀리즘
작곡가 스티브 라이히에게 영감을 얻었으며 콜린스, 프립에다
케이트 부쉬까지 세션에 참여한 곡이고. 채프먼 스틱이란 악기가
뭔지 궁금하다면 I Don't Remember의 인트로를 들어보시길.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극에 달하던 잔혹한 정세 속에서
77년 9월에 목숨을 잃은 저항 운동가 스티븐 비코를 위해 쓴
진혼곡, Biko는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아울러
가브리엘이 서서히 아프리카 월드비트에 눈을 뜨고 있음을
입증하는 음악이기도 했다.
가브리엘의 최고 디스코그래피를 논할 때 반드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명반이다. 한 곡 한 곡에 깃든 완성도가 결코 만만치
않다. 이것저것 귀찮을 때 이 앨범부터 가브리엘을 영접해보는
것도 초심자들에겐 괜찮은 선택지일 수 있다.
('Biko' from Peter Gabriel 3/Melt, 1980)
*라이브 아카이브와 87년 영화 Cry Freedom의 장면을 결합.
- 덴젤 워싱턴 주연 이 영화가 스티븐 비코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
('Intruder' from Peter Gabriel 3/Melt, 1980)
*드럼에 Phil Collins. gated reverb 기술로 녹음했다.
('Family Snapshot' from Peter Gabriel 3/Melt,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XFDgBSk1ghM
('Not One of Us' from Peter Gabriel 3/Melt,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dbwQ0Wy3ljQ
('San Jacinto' from Peter Gabriel 4/Security, 1982)
*가사는 아메리카 인디언 원주민 공동체의 고통에 관한 것.
('The Family and the Fishing Net' from Peter Gabriel 4/Security,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obtgGtrpPJM
(Peter Gabriel 4) (Security)
82년 Peter Gabriel 4/Security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포스트
펑크의 색이 짙게 배어나온 앨범인데 관점에 따라서 전작에 비해
더 휼륭하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관행대로 제목 없이 가려 했는데
음반사 쪽에서 하도 불평이 많아서 미국에서만 제목을 붙였다고.
영미 양국에서 골드를 기록하고 영국 차트 탑텐에 든 성공작.
가브리엘 일생의 셋리스트를 채울 명곡들이 여기서도 많이 나온다.
싱글로 커트된 Shock the Monkey 및 I Have the Touch는 그
대표작. 오랜만에 메이크업하고 뮤직 비디오를 찍은 Shock the
Monkey는 질투와 욕망 같은 심리를 풍자적으로 풀어내 최초로
핫100 차트 탑30에 든 수작이다. - 메인스트림 락 차트에선 1위.
Fairlight CMI 등 샘플러를 십분 활용하며 리듬 시퀀싱에 관한
레시피가 더 맛있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월드비트 장르나
아프리카계 전통 음악에서 받아온 영향이 곳곳에 드러났다. 토니
레빈, 제리 마로타, 래리 패스트 등 호흡을 맞춰온 세션들이 힘을
더하고 기타리스트 데이빗 로즈가 새롭게 가담하였다.
The Rhythm of the Heat, San Jacinto, The Family and
the Fishing Net, Wallflower 등에서 세계의 다양한 민족과
인종의 삶과 이야기에 폭넓은 이해와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월드뮤직 음악가로서의 현신이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한 것.
본작의 공동 프로듀서인 데이빗 로드는 여러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난봉꾼 같은 인물. 가브리엘의 첫 아내 질과 불륜을 저질러 피터로
하여금 오랜 시간 정신과 치료에 매달리도록 했으며, 최근에는 아예
대놓고 매춘업소를 운영하다가 적발되었다고. 맙소사.
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3284933/Music-producer-ran-brothel-550-000-home-Bath.html
('Shock the Monkey' from Peter Gabriel 4/Security, 1982)
*그는 동시대 Genesis나 Phil Collins보다 영상 메세지에 능숙했다.
('I Have the Touch' from Peter Gabriel 4/Security, 1982)
*영상은 오리지널 뮤비는 아닌 듯하고 방송사에서 제작한 판본으로 추정.
('Wallflower' from Peter Gabriel 4/Security,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YeI-FtSayS4
(Fairlight CMI)
*Peter Gabriel on South Bank Show, 1982 UK
https://www.youtube.com/watch?v=scmYG1Pv1_Q&t
- 16분경부터 Fairlight CMI의 샘플링 기능을 설명
(Rockpalast 1978, poster)
아마도 보컬리스트로서 능력만 따져본다면 77~85년 시기가
가브리엘의 절정이 아니었을까 싶어 개인적으론 이 시간대의
라이브를 가장 좋아한다. 2/Scratch와 3/Melt 사이 78~80년
투어는 독일에서 열린 Rockpalast 공연 실황이 가장 상태가
좋은 것 같다. 레빈, 맥기니스, 카펠로, 마로타, 패스트의 다섯
세션들 실력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Rockpalast TV performance in 1978 (Essen, Germany)
https://www.youtube.com/watch?v=amxDkP_0gxs&t=
https://www.genesisfan.net/peter-gabriel/articles-2017/peter-gabriel-rockpalast-tv-performance-1978
(Six of the Best, poster)
80년 3/Melt 이후 줄곧 그의 관심은 월드뮤직에 있었다.
오늘날 이 장르에 대한 현대적 정의는 각국 민족이 가진
고유한 전통 음악(우리로 치면 국악)을 뜻하지만 당시 유럽
사회에선 아프리칸 월드비트에 국한하여 해석했다. 80년에
페스티벌인 WOMAD를 출범시켰는데 빚더미에 앉아야
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제네시스 다섯 멤버와 다시 뭉쳐
Six of the Best란 콘서트로 기금을 모으기도 했다.
('Solsbury Hill' from Six of the Best bootleg archives,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4rxSDBzFRU0
*1982년 10월 2일. 마이크 러더포드의 생일이기도 했다.
(Plays Live)
83년엔 첫 라이브 앨범 Plays Live를 냈는데 4/Security
및 3/Melt의 트랙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82년 투어
아카이브를 발췌한 거고 성대가 가장 팔팔할 때 활동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아쉽게도 동영상은 없다. 여기서 기타
세션은 데이빗 로즈로 바뀌었다.
*full tracks from Plays Live, 1983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Up2NMQv0VIex_dG6paxzUjH8eTui4naa
(Birdy)
84년 연말엔 앨런 파커 감독의 영화 Birdy가 개봉하고 OST
앨범을 가브리엘이 만들어 발표하는데 새로운 트랙들과 기존
발표곡의 변주를 혼합하여 각광받았다. Family Snapshot,
Not One of Us, The Rhythm of the Heat, Wallflower,
San Jacinto 등 분위기가 유사한 곡들을 엄선한 작업이었다.
('Under Lock and Key' from Birdy,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h7E-tnn_uOs
*잘 들어보면 4/Security의 트랙 Wallflower와 같은 곡임.
('Red Rain' from So, 1986)
(So)
이때까지 피터 가브리엘이 받은 상업적 성공과 언론의 평가가
그리 박하진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초대형 스타라고 부르기엔
왠지 뭔가 한 방이 부족했다. 물론 본인이야 그런 성공에 목말라
하는 속물도 아니었지만. 그저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음악적 지향점을 향해 묵묵히 길을 걷던 그 와중에,
그의 커리어 최정점의 순간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86년작 앨범 So. 롤링 스톤 매거진 선정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 랭킹에서 당당하게 187위를 차지한 80년대 최고의 명반.
물론 전술한 80년대의 100대 명반 랭킹에서도 무려 14위에
올랐다. - 3/Melt는 46위. 드디어 이 작품 얘기를.. 와 신난다..
(Rolling Stone Magazine's 500 Greatest Albums of All Time)
(Rolling Stone Magazine's 100 Best Albums of the 1980s)
77년부터 90년대 초반까지 1~6집을 발매하면서 홀수 순번
앨범은 다소 상업적으로, 짝수는 다소 개인적인 예술성으로
프로듀싱해온 편이었는데, So는 자신만의 독창성을 상업적
흐름에 최적화하여 균형을 잡을 줄 아는 그의 천재성이 일체
여지를 두지 않고 남김없이 발현한 결실이었다. 아프리카와
브라질 전통 음악의 배경이 살아 숨쉬고 있어 월드뮤직의
창작으로 한창 물이 올라 있음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Birdy에서 한 번 가브리엘과 함께 했고 이후 브라이언 이노와
U2의 앨범을 프로듀싱할 운명이던 대니얼 라누아가 공동으로
프로듀싱을 맡았다. 베이스 레빈, 기타 로즈, 드럼 마로타가
여전히 참여했고 본작부터 드러머 마뉘 캇셰가 세션 조력을
시작했다. 일부 곡의 하이해트를 스튜어트 코플랜드가 쳤고
브라스 섹션은 60년대 소울의 시대부터 경력을 일궈온
트럼페터 웨인 잭슨을 중심으로 사운드를 만들었다.
*86년경 So Tour 중.
완벽하게 대중적인 섹드립 노래 Sledgehammer는 그의 경력
전체를 대표하는 초대박 싱글이다. 그에게 유일하게 핫100 차트
탑이란 기록을 선사했고 영국 싱글 차트는 4위까지 오른다. 올해의
노래 및 올해의 레코드를 포함하여 최초의 그래미 후보로서 영예를
누린다. 진짜 압권은 클레이메이션과 스톱모션을 아방가르드하게
혼합한 뮤직 비디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이 작품으로
MTV 어워드 9개 부문에서 수상했는데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라네. - 가사는 제플린의 레몬송처럼 남녀간 정사 이야기.
케이트 부쉬가 피처링을 담당한 Don't Give Up. 그의 커리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발라드이다. 직접 시퀀싱한 리듬 패턴에
삶의 고단함에 지친 남녀가 서로를 위로하는 가사를 쌓아올렸다.
신자유주의의 미친 정책을 앞장세운 대처리즘 시대, 만연하던
살인적인 실업률과 빈부 격차를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 쓴 가사.
가브리엘과 부쉬가 부둥켜 안고 피를 토하듯이 목놓아 연기한
뮤비도 꽤 화제를 모았다. 꼭 동영상으로 감상해 보시라.
('Don't Give Up' from So, 1986)
*가사를 몰라서 에로틱하게 해석하는 무식자들 많았다. 그러지 말자.
가브리엘 최고의 연가로 꼽히는 In Your Eyes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은 내용. 세네갈 출신
월드뮤직 보컬리스트 유수 은두르가 코다 파트를 장식하여
화제를 모았다. 80년대 여피족들의 물질 만능주의를 풍자한
Big Time은 그가 제임스 브라운이나 오티스 레딩의 funk
soul 장르에 큰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신스 베이스로
시퀀싱한 베이스라인이 압권인데 라이브에서 재현하기 힘든
난이도로 악명이 높은 나머지, 공연에서 듣기가 어렵다고.
코플랜드가 인트로 연주에 참가한 Red Rain은 팬덤 최고의
명곡 중 하나로서 가브리엘이 꿈에서 본 환상을 엮은 이야기.
많은 평론가가 핵전쟁 및 에이즈에의 대중적 공포가 일반화한
80년대 사회상을 읽어내려 애썼다. 그가 직접 Fairlight CMI로
시퀀싱한 이외 모든 트랙도 결코 만만치 않음은 물론. 한 곡 한
곡에 풍부한 스토리와 창의성을 품고 있어 버릴 곡이 없는 또
하나의 명반이다.
미국 앨범 차트 2위를 비롯하여 영국, 캐나다, 이탈리아 등 6개국
앨범 차트에서 정상에 올랐다. 메가히트 싱글 Sledgehammer를
포함하여 Big Time이 미국에서, Don't Give Up이 유럽에서
연이어 폭발하며 상업적 측면에서 명실상부한 호시절이었다.
슬레지해머는 하필 제네시스의 Invisible Touch를 밀어내고
핫100 탑에 올라 호사가들 신나게 만들었다. - 걍 우연이라고,
이 사람들아. - 그의 디스코그래피 중 유일한 미국 시장 멀티
플래티넘 앨범이 본작이다.
('Big Time' from So, 1986)
('In Your Eyes' from So, 1986)
('Mercy Street' from So,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Ej6NGrZ0iUM
*영국의 시인 앤 섹스튼을 기린 내용. 브라질 전통 음악을 결합했다.
('That Voice Again' from So,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aukeZxt-FDM
*종교적 양심과 마음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관한 성찰적 내용이다.
(Passion)
86년 앨범 발매 후 So Tour를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이후
리얼월드 레코드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한다. 본격적으로
월드뮤직을 탐구하겠다는 뜻이며 이 회사는 현재까지도 그와
관련한 모든 콘텐츠를 공급할 책임을 갖는다. 이 시기 그는
WOMAD의 운영 책임은 내려놓고 고문으로 물러난 상황.
88년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문제작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에
OST 작업으로 참여한다. 이듬해에 리얼월드를 통해 더 세심하게
다듬은 사운드트랙을 앨범 발매했는데 그때까지 서구 팝음악계가
한 번도 조명한 적 없던 제3세계 전통 음률을 고결하게 빚어낸
월드뮤직 명반이었다. 결국 이 작업의 결과로 90년에 생애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를 수상하게 된다. 골든 글로브 후보에도 오르고.
('Zaar' from Passion, 1989)
https://www.youtube.com/watch?v=zk1jHVkLEZs&index=9&t=0s&list=PLAC5905D15E1BB425
*오늘날엔 오히려 보편적인 음률. 이 시기부터 그가 개척한 결과이다.
(Shaking the Tree)
90년엔 첫 공식 컴필레이션 앨범 Shaking the Tree: Sixteen
Golden Greats를 발매한다. 정규 음반이 아님에도 판매량이
의외로 쏠쏠하여 영미 양국에서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한다. 첫
컴필레이션이니 개업빨이 먹힌 듯.
1/Car, 3/Melt, 4/Security, So, Passion 등 2/Scratch와
Birdy를 제외하고 그때까지 모든 솔로 앨범의 트랙을 총망라하여
팬덤이 반응할 만하다. 타이틀을 제공한 Shaking the Tree는
유수 은두르의 원곡을 조금 바꾼 것. 1/Car에서 뽑은 Here Comes
the Flood는 과한 편성을 톤다운하여 재녹음한 버젼이라능.
('Shaking the Tree' from eponymous album, 1990)
https://www.youtube.com/watch?v=jDsr54YBmdk
('Blood of Eden' from Us, 1992)
(Us)
92년에 그는 6집 Us를 발매한다. 실패한 첫번째 결혼, 소원해진
첫딸과의 관계 등, 개인적인 주제에 더 천착한 결과물이었다. 영미
앨범 차트 각 2위에 오르고 미국 시장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하지만
전작만큼 대박은 아닌...
메인스트림 락 차트 탑에 오른 첫 싱글 Digging in the Dirt는
아내의 불륜 때문에 숱하게 받은 심리치료 이야기. 미국 싱글 차트
탑40에 오른 Steam은 슬레지해머의 방법론을 계승했고 컴퓨터
그래픽과 외설적인 콜라주를 앞세운 예술적 뮤직 비디오로 화제를
모았다. 시네이드 오코너가 케이트 부쉬처럼 피처링을 맡은
Blood of Eden의 뮤비도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Digging in the Dirt' from Us, 1992)
('Steam' from Us, 1992)
*노골적이진 않지만 정사를 암시한 표현이 많아 미성년자는 주의하기 바란다.
('Kiss That Frog' from Us, 1992)
https://www.youtube.com/watch?v=S4Ah2dxTcWw
*개구리 왕자 동화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이야기.
('Secret World' from Us, 1992)
https://www.youtube.com/watch?v=amoyq8FRurg
*앨범 발매 직후 투어의 타이틀로 사용된 트랙.
('Come Talk to Me' from Us, 1992)
https://www.youtube.com/watch?v=cnC5RMkkd7M
*Sinead O'Connor가 피처링을 맡았다.
*앨범의 제작 배경을 직접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미성년자 주의.
https://www.youtube.com/watch?v=Cs7lxCG_sug
- 실은 앨범 커버 촬영 장면에 전라의 모델이 등장한다.
(Revisited)
첫 컴필레이션에서 제외시킨 2/Scratch와 1/Car의 대표 트랙을
묶어서 92년엔 Peter Gabriel Revisited란 독특한 컴필레이션
앨범을 낸다. 1집서 7곡, 2집서 8곡을 발췌한 버젼인지라 정규
음반을 이미 갖고 있는 팬에겐 거의 쓸모없는 앨범이긴 하다. 단,
초기 앨범을 구하기 어려운 사람에겐 꽤 좋은 선택지이니 참고..
*Steam의 라이브로는 역대 최고라고 소문난 Secret World Tour 중.
**Tony Levin, David Rhodes, Manu Katche, Paula Cole.. 아름다운 조합.
(Secret World Live)
94년엔 두번째 라이브 앨범 Secret World Live를 발매한다.
So 및 Us 앨범 트랙을 중심으로만 편집되어 평단의 반응은
시큰둥했지만, 사실 90년대 초중반이 가브리엘 라이브 보컬
능력의 최전성기였다는 팬덤의 평이 많아서 진정한 가브리엘
무대를 즐기려면 이 앨범이 필수라고 한다.
이 라이브와 투어에는 97년 스타덤에 오르기 전 폴라 콜이
백킹 보컬로 참여하여 엄청난 노래를 들려줬다. 그는 98년에
무려 그래미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할 운명의 실력자시거든.
마뉘 캇셰의 드러밍도 팬덤의 극찬을 받았다.
('Where Have All the Cowboys Gone' by Paula Cole, 1997)
https://www.youtube.com/watch?v=JPR108kwNo4
*Secret World Tour 중에 부른 Don't Give Up.
(OVO)
1999년 12월 31일 뉴밀레니엄을 맞이할 마지막 밤에 영국에서
매우 뜻깊은 이벤트가 있었다. 런던 동부 그리니치 강둑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복합 컨벤션 건축물 밀레니엄 돔이 이날 개장했는데
미래를 바라보는 영국의 발전을 상징하기 위해 내노라 하는 아티스트를
초청하여 개장 기념 초대형 콘서트를 열었고 그 사운드트랙을 당대
영국 최고의 대중 음악가 피터 가브리엘에게 위촉한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사운드트랙이 2000년에 OVO란 앨범으로 발매된다.
순수한 예술성보다 선전 목적의 음악임을 감안하더라도 당대 첨단의
공연 기술을 추구한 가브리엘 사단의 창의성을 남김없이 확인할 수
있다. 인생 말년의 아버지 랄프 파튼 가브리엘과의 관계를 담담하게
술회한 Father Son이 팬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곡 뮤비를 첫딸
애나 마리 가브리엘이 연출하는 등, 이 무렵부터 가브리엘 사단이
본격 가족형 창작 집단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Father Son' from OVO, 2000)
https://www.youtube.com/watch?v=EQH6qu2pHT8
- 뮤비 감독이 Anna-Marie Gabriel.
('More Than This' from Up, 2002)
(Up)
5~7집은 각각 So, Us, Up.. 알파벳 두 글자로 된 심플한
타이틀로 유명하다. 02년 Up 앨범은 가브리엘에게 있어
실질적으로 마지막 창작 음반이라고 한다. 10년 Scratch
My Back 및 11년 New Blood가 다른 가수 및 자신의
곡을 커버한 작품에 그치기 때문이다.
황혼을 바라보는 커리어인 만큼 예전만큼 상업적 성과가
시원시원하진 못했다만. The Barry Williams Show
및 More Than This 등 커트한 싱글을 통해 이제 원숙한
단계로 접어드는 백전노장의 내공을 느낄 수도 있다.
('The Barry Williams Show' from Up, 2002)
*00년 넘어서면서 그는 삭발 스타일로 등장하신다. 나이도 드셨고.
- 시청률만 높은 자극적인 TV프로 까는 내용. Sean Penn 연출.
('Growing Up' from Up, 2002)
https://www.youtube.com/watch?v=tn2VPj1R76U
(Hit)
03년 컴필레이션 앨범 Hit는 80~90년대 트랙에 중점을 둔
구성이다. 아쉽게도 초창기 명곡들은 빠져 있지만 대중적
스타가 된 가브리엘에만 관심을 두고자 하는 팬은 가볍게
스타터로 고려해볼 만하다. 영국에서 골드를 기록했다.
(Scratch My Back)
(New Blood)
아직 은퇴하신 분도 아니고 여전히 경력이 이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아티스트 피터 가브리엘.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긴 경력 중 제네시스 챕터는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짧은 시간에 찰나처럼 얽힌 관계를 죽은 아들 뭐
만지듯이 붙잡고 늘어지는 추한 팬덤에 동참하지 마시길.
마이클 잭슨 같은 초대형 팝스타가 아닐진 몰라도 또 다른
관점에서 음악사를 해체해보면 그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를
독창적 위상을 가진 뮤지션임에 틀림없는 분이다. 한국에서
잘 아는 사람도 없다는 점은 이해한다만, 모모 사이트들에
사실을 왜곡해 휘갈겨 기록된 쓰레기 정보 정도는 최소한
정확하게 바로잡고 이해를 새롭게 할 줄 아는 성숙한
네티즌이 되었으면 한다. 모르면 쓰지를 말라고 제발.
- 백킹 보컬에 차녀 Melanie Gabriel이 참여했다.
*Sinead O'Connor와 함께 부른 Don't Give Up. 90년.
피터 가브리엘의 장구한 디스코그래피 중에서 본 블로거는
특히 리듬 패턴이나 다이나믹스를 맛깔나게 어레인지한
트랙들을 좋아라 하는 편이다. So의 Big Time이 이런
계열의 대표곡인데 Us의 Steam도 역시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4/Security의 숨은 보석으로서 프린스의 1999
및 필 콜린스의 Sussudio를 연상케 하는 Kiss of Life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세 곡 중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이 곡이다.) 마지막으로 강력하게 추천을 때리며 이번
포스팅을 마치련다. 특별히 이번 편은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싶다. 이 나라에 결코 흔치 않은 PG 열성 팬인지라..
('Kiss of Life' from Peter Gabriel 4/Security, 1982)
*Kiss of Life의 82년경 라이브.
*Big Time의 87년 필라델피아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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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앤더슨 Jon Anderson (0) | 2019.1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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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보위 David Bowie (1) | 2019.09.22 |
필 콜린스 Phil Collins (0) | 2019.07.16 |
브루스 스프링스틴 Bruce Springsteen (0) | 2019.06.15 |
로드 스튜어트 Rod Stewart (0) | 2019.05.15 |
팝 음악의 역사에서 80년대는 애시당초 마이클 잭슨의
시대 아닌가. 누가 뭐라 할 여지가 전혀 없지. 절대 왕정이
군림한 그 시대에 남성 팝가수로서 MJ의 거의 유일한
대안으로 당당한 업적을 거둔 뮤지션이 있었다.
어차피 지금 시대야, 저 안경 쓴 빠른 51년생 할아버지가
백설공주 릴리 콜린스 아빠래, 정도 밖에 관심은 두지도
않겠지만. 20년 전쯤 얘길 꺼냈다면 누가 진성 제네시스
팬덤이냐며 피터 가브리엘 진영과 찢어갈려 진정
쓰잘데기 없는 키보드 전쟁이 벌어졌을 걸.
왠지 음악 산업계에 만연한 숱한 오해와 루머의 희생양
이미지이신데.. 사실, 70~90년대를 당당하게 관통하며 총
판매고 1억 5천만 장이란 역대급 성공을 거둔, 한 사람의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겸 프로 세션맨이셨다. 제네시스에서
음악을 시작해 한 시대를 호령한 명가수...!
필 콜린스 Phil Collins 이야기를 해볼까.
언제부턴가 캐릭터가 되어버린 원형 탈모에 속지 마시길
바라옵고, 이 분 원래 아역 배우 출신이시다. 올리버 같은
뮤지컬에도 출연하셨고 재미없기로 악명높은 비틀즈 영화
A Hard Day's Night에도 단역 출연하셨다. 80년대
뮤비에서 꽤 기본기 충실한 연기력을 보여준 데엔 다
그런 배경이 있었던 거다. 또 한때 영화 주연도 했고.
다섯 살 때부터 유아용 드럼 키트를 다루었고 본격적인
성인용 세트는 청소년이 되면서부터 썼다고. 링고 스타나
버디 리치의 영향을 깊게 받아 빅밴드 재즈의 테크닉을
익숙하게 다루게 되었다지.
그래, 콜린스를 얘기하면서 훌륭한 드러머로서의 경력을
건너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음악가로서 시작을
드럼 치면서 시작한 분이니까.
(Genesis)
현장에서 다른 뮤지션의 영향을 재빠르게 캐치하는 순발력
면에서는 아마도 최고일 것 같다. 숱한 히트곡을 들어봐도
알 수 있지만 여러 모로 영리한 뮤지션임에 틀림없을 듯.
특히 탄탄한 재즈 드러밍 기본기에서 비롯된 사이드 탐탐
컴비네이션은 드러머로서의 트레이드 마크일 것이다.
흡사 버디 리치의 재림을 보는 듯..
여기서 자주 언급하는 디지털 드림 도어 랭킹에서 현재
34위이시고 모던 드러머가 선정한 50대 연주자 랭킹에선
21위. 논란이 컸던 16년의 롤링 스톤 매거진 랭킹에선
43위를 차지하셨을 정도. (그래도 별다른 지표로 인용할
것이 없어 언급은 하겠다. 욕먹은 내용은 아래에 링크.)
(Digital Dream Door, 100 Greatest Rock Drummer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drummers.html
(Modern Drummer, 50 Greatest Drummers of All Time)
https://www.moderndrummer.com/article/march-2014-50-greatest-drummers-time/
- Consequence of Sound rebukes the Rolling Stone ranking.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미 50년생 고딩 동기들끼리 데뷔해
끈기있게 활동하고 있던 제네시스와의 인연도 드러머 공고
난 거 보고 오디션에 응하면서부터. 밴드의 창단 멤버 앤서니
필립스가 탈퇴하면서 드러머였던 존 메이휴를 내보내고 새
드러머 공고를 낸 것이 1970년의 일이었다.
퀸의 로저 테일러가 아직 아무 것도 아닐 때여서 오디션 보러
오라는 제안을 받았었단다. 피터 가브리엘 부모님 집에서 치른
오디션. 기다리는 동안 앞의 경쟁자들 리듬 패턴을 모조리 외워
똑같이 카피해내 멤버들이 감탄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든지
한 번은 들어봤을 유명한 일화. 여기에 기타 주법의 선구자
대접을 받는 명인 스티브 해킷이 이때 함께 영입되었다.
제네시스에서의 필 콜린스는 재기발랄한 fill-in을 넣을 줄
아는 데다 탄탄한 박자감을 가진 드러머이면서도 훌륭한
노래 실력도 겸비한 멤버였다. 테너-바리톤 음역대에 지성미
넘치는 카리스마와 연극적 스토리텔링에 강한 리드 보컬
피터 가브리엘에 비해 낭만적 감성을 표현할 줄 아는 하이
테너로서 가브리엘 위로 화음을 넣거나 한 옥타브 높이는
방식의 다채로운 연출이 콜린스로 인해서 가능해졌다.
보컬에 피터 가브리엘, 키보드에 토니 뱅크스, 베이스에
마이크 러더포드, 기타에 스티브 해킷, 드럼에 필 콜린스.
이 멤버로 만든 최초의 앨범이 71년에 발표한 제네시스
3집 Nursery Cryme. 72년 Foxtrot, 73년 Selling
England by the Pound, 74년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등 정규 명반이 줄을 잇다가... 밴드보다
솔로 활동이 필요하다 느낀 가브리엘이 팀을 탈퇴한다.
('Supper's Ready' from Foxtrot, 1972)
*이건 스튜디오 버젼 오리지널.
(Genesis Live)
가브리엘이 리드하던 제네시스 시절은 추후 다른 편에서
상술하는 편이 더 낫겠지...만, 이 시기 드러머 콜린스의
활약상을 확인하고 싶다면 Supper's Ready를 비롯하여
In the Cage, The Knife 같은 트랙을 추천한다.
Supper's Ready는 퀸텟 전성기의 제네시스에서 가장
중요한 걸작 대곡인지라 다섯 멤버 전부 엄청난 기여도를
보여주는 곡이다. 옆에서 뱅크스, 뒤에서 콜린스가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기에,
꼭 라이브를 감상하길 추천하고..
In the Cage는 스튜디오 버젼으로만 들어도 뱅크스-콜린스
-러더포드의 백킹 조합이 톱니바퀴 맞물리듯이 오밀조밀하게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 이 앨범은 대체로
가브리엘이 플롯과 작사에만 신경쓰느라 음악적인 작편곡은
나머지 넷이 오롯이 책임졌고 특히 뱅크스가 빛을 발한다.
The Knife는 본래 콜린스가 들어오기 전 2집에 있던 곡인데
제네시스의 1973년 라이브 앨범 Genesis Live에서 콜린스로
교체해 연주한 버젼이 원곡보다 낫다는 말이 많다. 이 앨범은
가브리엘-제네시스 시대의 유일한 라이브. 원래 정규 앨범에서
드러머는 존 메이휴였다.
('In the Cage' from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1974)
('The Knife' from Genesis Live, 1973)
*The Knife의 스튜디오 버젼 오리지널.
https://www.youtube.com/watch?v=O-78TeJlq24
넷만 남게 된 제네시스가 리드 보컬 공고를 또 냈는데
수백 명 지원자보다 콜린스가 더 노래를 잘 했다네..?!
(이때 부른 노래가 제플린 Kashmir의 영향 하에 만든
Squonk였다고.) 앞으로 한 시대를 풍미할 보컬리스트
필 콜린스의 공식 탄생은 이렇게 소소한 일화로부터
시작했다. 75년경.
네 사람 체제에서는 76년에 A Trick of the Tail 및
Wind & Wuthering 두 장의 앨범을 냈다. 이 시기는
리듬 섹션의 러더포드 및 콜린스를 제외하고 해킷과
뱅크스 사이에 작편곡의 주도권을 놓고 미묘한 신경전이
관찰되던 때이기도.
어느 밴드나 키보드를 메인 파트로 갖고 가면 기타와의
밸런스를 어떻게 맞출 건지가 창작 과정에서 논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도 그 의례를 피할 수 없었으니 앨범을
달랑 두 장만 내고 해킷이 떠난 이유가 이런 면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도 있겠다.
(A Trick of the Tail)
(Wind & Wuthering)
('Squonk' from A Trick of the Tail, 1976)
쿼텟 시기 콜린스는 아직 뮤지션으로서 100% 자아를
각성했다고 볼 순 없지만 무한한 포텐셜에 슬슬 예열 시동을
걸고 있었다. Robbery Assault and Battery 같은 곡에서
가브리엘과 전혀 다른 결로 풍자적 수사에 능한 콜린스풍
보컬 스타일이 움트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Los Endos는 아기자기한 잔 리듬에 강한 콜린스식 드러밍이
폭발하는 팬덤의 인기 트랙이고, 재즈 퓨전의 영향을 받고 있던
그의 색깔은 Wot Gorilla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뱅크스가 쓴
Afterglow는 신비로운 질감의 백킹이 아름다운 발라드로서
시종일관 울려퍼지는 Moog Taurus의 이펙트가 매우 예뻐서
숨겨진 보석처럼 좋아하는 팬이 많다.
아닌 게 아니라 쿼텟 시대에 오히려 숨은 명곡이 많다는 평도
자자하다. 원래 제네시스의 특징이 파도 파도 새로운 좋은
노래가 끊임없이 나온다는 데 있다...고, 대다수 열성 팬들이
입을 모으곤 한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지. 남은
셋과 해킷과의 관계 등, 쿼텟 시대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 같다.
('Robbery Assault and Battery' from A Trick of the Tail, 1976)
('Los Endos' from A Trick of the Tail, 1976)
('Afterglow' from Wind & Wuthering, 1976)
지금까지 서술한 제네시스의 성과가 음악적인 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음에 눈치 채셨겠지만, 사실 퀸텟 및 쿼텟 시대의
상업적 성과가 메가히트 급은 아니었다. 공식 인증도 골드가
전부였고 앨범 차트로만 영국 3위, 미국 30위권이 가장 높은
기록이며 싱글 히트곡은 거의 없다고 보면 정확하다. 물론
팬덤의 매니아적 충성도가 높고 당시 지지층이 현재 인터넷
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음도 엄연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제네시스의 새로운 시대는 아마도 이 무렵부터 새 방점을
찍는 편이 옳지 않을까. 프로그레시브 기원으로부터 서서히
졸업하고 시대의 흐름을 좇아 포스트 펑크의 영향을 받은
프로그팝과 소프트락으로 변신한 트리오 제네시스. 그
옛날 한때만 하더라도 기존 팬덤으로부터 맹혹한 비난을
받아야 했던 그 변화는 멤버의 탈퇴에서 비롯된다.
77년에 결국 기타리스트 해킷이 탈퇴한다. 앨범 구성에
소외감을 느꼈고 밴드 일원으로서 더 이상 원하는 음악이
나오지 않음을 깨달으셨다고. - 본래 솔로 아티스트셨으니..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정신 차린 뱅크스, 러더포드, 콜린스는
어덜트팝을 향해 일보전진하기로 마음먹고 뛰어난 연주력을
가진 투어 멤버를 보강한다. 물론 앨범 작업은 병행하고.
프랭크 자파 밴드에서 연주한 재즈 드러머 체스터 톰슨,
장 뤽 폰티 그룹에서 연주한 재즈 기타리스트 대릴 스투머
등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제네시스와 함께 한 정상급 세션
멤버가 이때 영입된다. - 전작 앨범들의 투어 땐 예스 및
킹 크림슨 출신 빌 브루포드(!)가 작업한 적도 있다.
우여곡절을 딛고 세 멤버가 새로 완성한 78년의 앨범
And Then There Were Three. 제목은 물론 애거서
크리스티의 저명한 소설에서 따왔겠지. 리드 기타로
포지션을 바꾼 러더포드가 약간은 버벅댔고 뱅크스의
신디가 전체 사운드를 메꿔 프로그라기보다 신스락에
더 가까운 색과 결을 선보인다.
본작은 영국 앨범 차트 3위, 독일 2위, 미국 14위 등
그때까지의 제네시스 앨범 중 최고의 성공을 거두고
핫100 차트 23위까지 오른 최초의 싱글 히트까지 낸다.
소폭 히트한 Many Too Many 같은 발라드가 있었지만
지금도 트리오를 대표하는 어덜트 발라드 Follow You
Follow Me가 역시 세계적으로 히트한 대표곡일 게다.
러더포드가 인트로의 리듬 리프를 치고 뱅크스가 스트링
코드 시퀀스를 깔아주니 콜린스가 중심 선율을 부르는..
인터뷰에서도 인정했듯이 지나치게 긴 음악을 복잡하게
만들기 즐겼던 세 멤버에게 있어 스스로 새로운 음악에
눈뜨게 한 진일보의 프로세스가 이 노래에서 나온 거다.
물론 모든 트랙을 팝으로 채운 건 아니고 Down and Out,
Ballad of Big, Deep in the Motherlode, The Lady
Lies가 보여준 신스-프로그 락 정체성은 여전하다. 다만
히트 튠의 파급 효과가 너무 컸던 거겠지.
(And Then There Were Three)
('Follow You Follow Me' from And Then There Were Three, 1978)
('Many Too Many' from And Then There Were Three, 1978)
('Ballad of Big' from And Then There Were Three,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dlqn2_n9FW4
('Down and Out' from And Then There Were Three,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HeqFXo5xtcE
앨범 한 장만이면 해프닝으로 그칠 테지만 제네시스는 정말
변화하고 있었고 80년 10집 Duke는 시대의 엄혹한 흐름에
강력한 화룡점정을 찍어준 수작 앨범이다. 아트 락의 미약한
손아귀를 이제는 뿌리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본작만은
프로그레시브 정체성을 온몸으로 기억하는 이들의 마지막
결산 같은 성과였다 할 만하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Duke Suite라 칭하는 Behind the
Lines - Duchess - Guide Vocal - Turn It On Again -
Duke's Travels - Duke's End의 6곡 연작은 본작의 대표
트랙. 원래는 Supper's Ready처럼 30분짜리 대곡으로
묶으려 했지만 그냥 쪼개서 앨범 전체에 분산시켰다고.
(Supper~도 본래 7곡 소곡의 연작 형식.)
이후 제네시스에서 이런 대곡 구성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아,
팬덤은 72년 Foxtrot와 유사한 구조의 Duke를 소중한
마지막 마스터피스 급으로 취급한다. Suite에 속하지 않는
Misunderstanding도 별도 싱글로서 미국 차트 14위까지
오르고 Man of Our Times, Alone Tonight 등 트랙이
독자적인 인기를 누리는 등, 여러 면에서 수작 앨범이다.
수작일 뿐 아니라 상업적인 성공도 전작을 넘어서게 된다.
최초로 영국 앨범 차트 정상을 밟았고 미국에선 11위를
찍는다. Suite 6곡 중 가장 역동적인 Turn It On Again은
싱글로 발매되어 영국 차트 탑텐에 든다. Duchess는
인트로에서 Roland CR-78을 써서 밴드가 처음으로
드럼 머신을 적용한 곡으로 남게 된다.
분명 시대는 변하고 있었고 팬덤의 구성도 예전에 짐짓
진중한 프로그에 열광하던 남성 중심에서 짧은 어덜트
발라드에 반응하는 여성층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미
전작에서부터 이를 캐치한 세 멤버의 대담한 선택이
성공을 거둔 것이었으나 기존 팬덤과의 지리한 전쟁도
이제 막 시작한 셈이었다.
(Duke)
(Roland CR-78)
*아래 Duchess 뮤비 맨앞에 등장.
('Turn It On Again' from Duke, 1980)
('Misunderstanding' from Duke, 1980)
('Duchess' from Duke, 1980)
('Behind the Lines' from Duke, 1980)
('Alone Tonight' from Duke, 1980)
*Duke Suite 80년 런던 라이브 편집본
https://www.youtube.com/watch?v=VUr1dcg-PEw&t=1115s
아마도 79~81년 기간은 갓 서른 언저리의 젊은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하던 세 멤버들 모두에게 도전과 갈등의
시기였을 것이다. 첫 결혼에 위기가 닥쳐 밴드에서 잠시
멀어져야 했던 콜린스를 위해 뱅크스와 러더포드는 활동
잠정 중단을 용인하고 각자의 첫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끝내 콜린스가 이혼에 이르게 되고 이는 젊은 음악가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성숙해질 기회를 부여하게 되었으니
이런 질풍노도의 내적 변화가 81년에 발표한 콜린스의
첫 솔로 앨범에 그대로 반영된다. 혁신적 사운드 레코딩
기술을 담은 히트작 Face Value 앨범이었다.
형해화한 부부 관계의 종말에서 겪은 상실감을 처절하게
묘사한 In the Air Tonight은 이 앨범의 대표곡이다. 영국
싱글 차트 2위, 미국 차트 탑20까지 오른 성공을 거두고
앨범이 거둔 성공 - 영국 정상과 미국 탑텐 - 을 리드했다.
80년대 콜린스표 어덜트 컨템포러리 명곡의 출발점이자
신호탄인 거다.
이 곡의 드럼 녹음 방식이 그를 상징하는 혁신적 기술이다.
gated reverb라고, 악기의 주음을 잡는 마이크와 방음벽
등에 부딪혀 잔상으로 돌아오는 부차적 음을 잡는 마이크를
항상 한 쌍으로 갖춰 집음하는 기술이다. 80년대 필 콜린스
드럼 사운드라 하면 누구나 다 기억할 만한 소리가 바로 이
방식으로 만든 것. 특히 탐탐이 가진 풍부한 팀버 질감을
손실없이 담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가 여전히 친하게 지내던 동료 피터 가브리엘의 솔로 앨범
곡 중 Intruder의 드럼을 쳐주다가 엔지니어 휴 팻검이 개발한
방법이다. - 자기들끼리는 이렇게 동료애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팬덤이란 명분으로 괜한 싸움 좀 붙이지 말자.
(Face Value)
('In the Air Tonight' from Face Value, 1981)
*이 뮤직 비디오도 꽤 화제였다. 제네시스 드러머 맞냐며.
('Intruder' by Peter Gabriel,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xvAmj3k3Imc
*gater reverb 기술에 대한 설명
https://www.youtube.com/watch?v=cTo75yjL9R4
81년 11집 Abacab에 이르면 제네시스가 더 이상
프로그레시브 락과 상관이 없음을 모두가 깨닫게 된다.
그만큼 이 앨범의 팝락 성향은 신선했지만 프로그를
좋아하던 기존 팬덤은 충격과 공포에 부들부들 떨고..
- 왜인지 콜린스는 더 큰 욕을 먹는다. 왜 그가?
프로그에서 비롯된 역사적 배경 없이 순수하게 즐기면
매우 훌륭한 대중음악 앨범이다. 당시 뉴웨이브의 패턴을
완벽하게 체화한 세 사람의 작편곡 감각이 눈부시고 특히
신디사이저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토니 뱅크스의 솜씨는
괄목할 만하다. 본작쯤에 이르게 되면 묻혀 있던 마이크
러더포드의 내공조차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싱글로 발매한 Abacab, No Reply at All, Keep It
Dark, Man on the Corner 모두 탁월한 대중적 감각을
자랑하며 탑40급의 성공을 거두었다. 앨범이 최초로
더블 플래티넘에 이르렀고. 콜린스의 보컬 실력은 이때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참고로 abacab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악절 구성을
A-B-A-C-A-B 형식으로 가져가려던 초기 아이디어가 그냥
제목으로 굳은 것. No Reply at All에 등장하는 멋들어진
브라스는 얼쓰 윈드 앤 파이어의 혼 섹션 주자들이 결성한
피닉스 혼즈의 연주. 이들은 이후 필 콜린스 및 제네시스의
앨범 및 투어에서 세션으로 자리를 잡아가신다.
(Abacab)
('Abacab' from eponymous album, 1981)
*백킹 보컬은 Tony Banks와 Mike Rutherford의 실제 목소리.
('No Reply at All' from Abacab, 1981)
*뮤비 속 브라스 연기자들은 물론 Phenix Horns가 아니라 멤버들.
('Keep It Dark' from Abacab,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gQkiqQ7zZBQ
('Man on the Corner' from Abacab,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hUMti7b41yw
82년엔 Paperlate 등 세 곡을 담은 EP 3X3를 발매하고,
연이어 다음 달엔 포스트 펑크 시대 제네시스의 기념비적
라이브 앨범인 Three Sides Live - 같은 제목의 콘서트
필름도 포함 - 를 발표해 팬의 지지를 얻었다.
같은 해 10월 2일, 러더포드의 생일이기도 한 날 비내리던
토요일 저녁 잉글랜드 버킹엄셔에서는 경천동지할 일회성
콘서트가 열렸다. Six of the Best. 사실상 탈퇴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브리엘과 해킷이 남은 세 사람과 재결합하여
70년대 히트 트랙을 연주한 초유의 사건.. 기존 팬과 신규
팬이 모두 대동 단결하는 신기한 현상이 목격되었다. - 이날
기타는 대릴 스투머, 드럼은 체스터 톰슨이 메인이었다.
이 무렵 피터 가브리엘은 솔로 활동의 성공에 힘입어 월드
뮤직 페스티벌 WOMAD를 막 출범시킨 시점이었는데
축제 초창기 막대한 빚을 청산하기 위해 이런 이벤트를
벌였다고. 덕분에 깔끔하게 빚갚고 오늘날 세계인이 아는
워마드 음악제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 페미니즘 단체와
상관없는 축제 말하는 거임. 세계적으론 이쪽이 더 유명.
이후에도 이들이 이렇게 재결합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또 이 시기가 뮤지션으로서 기량이 전성기였던 때인지라
여러 모로 중요한 공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석하게도
아카이브 레코딩이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들어보려면 당시
관객이 소장해온 부틀렉 말고 방법이 없다. 아..ㅠㅠ
그리고 이런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피터 가브리엘 진영과
스티브 해킷 진영과 제네시스 세 사람 사이 인간적인 친분은
아무런 문제 없었다고, 여러 번 반복한다. 아, 왜 '식스'냐고?
뱅크스, 러더포드, 콜린스, 스투머, 톰슨 + 가브리엘이니까.
원래 해킷은 스케줄이 안 되어 못 오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부랴부랴 달려와 끝내기 앵콜 두 곡 연주하고 가셨다고.
(3X3)
(Three Sides Live)
('Paperlate' from 3X3,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8AhBJwARAes
Six of the Best 셋리스트:
Back in N.Y.C.
Dancing with the Moonlit Knight
The Carpet Crawlers
Firth of Fifth
The Musical Box
Solsbury Hill - 피터 가브리엘(!) 솔로 히트곡
Turn It On Again
The Lamb Lies Down on Broadway
Fly on a Windshield
Broadway Melody of 1974
In the Cage
Supper's Ready
(encore) I Know What I Like
(encore) The Knife
*당시 관객들이 녹음한 부틀렉 아카이브
https://www.youtube.com/watch?v=KPdEPC2AsB8
https://www.youtube.com/watch?v=o3e3w48rZrw&t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kvNP54Usc1On51kHceanFKhw-P9ysmWG
그로부터 한 달 여 후, 82년 11월에 콜린스는 그의 솔로 2집
Hello I Must Be Going을 발표한다. 데뷔 앨범에서 촉발한
우울 결혼 생활 백서의 분위기가 이어지는 작품이었다. 더블
플래티넘을 넘고 영미 앨범 차트 탑텐에 들었지만 전작의 In
the Air Tonight만큼 임팩트 강한 싱글이 없었다.
그래도 Don't Let Him Steal Your Heart Away나 Why
Can't It Wait 'Til Morning처럼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발라드가 전체 트랙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과거
슈프림즈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You Can't Hurry Love에
이르면 그가 모타운풍 R&B 작법에서 받은 영향을 느낄 수
있고 영국 차트 탑에 오르는 등 가장 크게 히트친 싱글이 된다.
히트와 상관없이 팬덤과 평단이 극찬한 트랙은 I Don't Care
Anymore. In the Air Tonight에서 연결되는 정서가 강한
비트에 실려 폭발한 수작 싱글이었다. 이 노래로 솔로 아티스트
자격으로는 생애 최초로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지명되었다.
(Hello, I Must Be Going!)
('You Can't Hurry Love' from Hello I Must Be Going, 1982)
*약간 깨방정이신데 이건 60년대 슈프림즈를 따라 한 것.
('I Don't Care Anymore' from Hello I Must Be Going, 1982)
*베이시스트 Mo Foster가 Moog Taurus를 손으로 연주한다.
('Don't Let Him Steal Your Heart Away' from Hello I Must Be Going,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b2W-lxDq4-Y
('Why Can't It Wait 'Til Morning' from Hello I Must Be Going,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1sjkge59ndw
이들은 83년에 열두번째 정규 앨범 Genesis로 돌아온다.
그렇다.. 그때까지 데뷔 앨범에서도 셀프 타이틀을 쓴 적이
없었는데, 이는 수록한 전 트랙을 멤버들이 공동 작곡으로
만들었음을 시사하는 의도였지만, 평론가들은 이제 이들이
본격적인 팝락 밴드로서 재도약한다는 뜻이라고 우겼다.
전작의 성공을 또 뛰어넘은 앨범이었다. 영국과 독일의 앨범
차트에서 탑을 찍고 유럽 4개국에선 2위를, 미국 차트에선
9위를 기록한다. 그때까지 가장 큰 싱글 히트이던 Follow
You Follow Me를 뛰어넘어, Mama라는 세계구급 히트
싱글이 영국 등 9개국에서 탑텐에 들었고 미국의 핫100
차트에선 That's All이 최초로 탑텐에 드는 성공이었다.
이밖에 Home by the Sea, Illegal Alien, Taking It
All Too Hard가 싱글로 커트되어 현재까지 스테디셀러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물론 한국 시장이 이 성공을
좇아가는 데엔 아직 시간이 걸리고 있었지만.)
밴드가 자체 보유한 스튜디오에서 창작과 녹음 전체를
편안하게 진행한 첫 앨범으로서 라디오 친화적인 대중적
소프트락으로 채워진 작품이었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거부감 없는 이들인지라 Linn LM-1, Simmons SDS-V,
ARP Quadra, Sequential Circuits Prophet-10, E-mu
Emulator 등 첨단 장비를 적극적으로 선보였다. 콜린스가
이제 드러밍보다 드럼 머신에 더 재미를 들여가고 있었고.
(Genesis)
('Mama' from Genesis, 1983)
*당시 Tony Banks가 쓰던 악기를 샅샅이 살필 수 있다.
('That's All' from Genesis, 1983)
('Home by the Sea' from Genesis, 1983)
('Illegal Alien' from Genesis,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pKWyJOz1rUU
('Taking It All Too Hard' from Genesis,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l-dSgRGFVYU
(Linn LM-1)
(Simmons SDS-V)
*물론 세트 뒤 연주자는 빌 브루포드.
*이 시기 Tony Banks의 gear set.
84~86년 기간은 지금까지 상술한 제네시스고 뭐고 모든
활동 성과를 갈아엎어 역사를 새로 쓸 만큼 명실상부한 필
콜린스의 최전성기였고 그는 원탑이었다. 대등한 경쟁자라
해봐야 마이클 잭슨이나 프린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정도?
그 외엔 다 쩌리 취급 받던 초대박 호시절이었지.
84년 3월에 테일러 핵포드가 연출하고 제프 브리지스와
레이첼 워드가 주연한 어덜트 스릴러 영화가 개봉하는데
래리 칼튼과 미셸 콜롱비에가 주도한 사운드트랙의 전체
스코어와 상관없이 몇몇 가수가 삽입곡 작업에 참여했다.
이 중 필 콜린스가 자작곡 발라드를 제공하는데... 두둥..
Against All Odds (Take a Look at Me Now).. 80년대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팝 음악의 고전이 되어버린 명 발라드가
이렇게 탄생해 버린다. 콜린스는 생애 최초로 핫100 차트 탑에
오르고 싱글만 골드를 기록하며 인생 첫 그래미 상을 이 곡으로
받게 된다. 말이 필요 없다. 듣고 가자.
('Against All Odds' from eponymous soundtrack, 1984)
이 정도 명곡이라면 예상들 하겠지만 그 해 아카데미 어워드에
당연히 주제가상 후보로 올랐다. 그런데 담당PD 왈, 콜린스가
그렇게 대단한 가수인지 몰랐다네. 하여 본인 섭외 안 하고 왠
뮤지컬하던 여자 연예인에게 립싱크를 시키는 엄청난 무대를
만들고 만다. 역대 최악의 주제가상 공연으로 지금도 악명이
높았던 해프닝.. 노래라도 잘 했으면 또 몰라..
한국 시장에서 필 콜린스라는 가수를 처음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곡으로 기억하며 지금까지 대표 히트곡이기도..
*Against All Odds at Oscar Ceremony, 1985
(Against All Odds, single)
*영화 속 엔딩 크레딧에 흐르는 노래.
('Against All Odds' by Mariah Carey, 2000)
https://www.youtube.com/watch?v=Dc3YAINjlyE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콜린스는 얼쓰 윈드 앤 파이어와
인연이 깊다. EWF 출신 명 보컬리스트로 필립 베일리가
84년 11월에 자신의 솔로 앨범 Chinese Wall을 들고
나왔는데, 여기에 콜린스와 함께 한 듀오 튠을 싱글로 낸다.
R&B 돋는 또 하나의 명곡 Easy Lover. 본래 EWF야
당연하고 콜린스 역시 R&B로 한가닥 하는 양반인지라
두 사람의 조합은 완벽했다. 콜린스의 드럼 세션은 덤.
한국엔 이 앨범이 정식 발매되지 못해서 당시에 라디오
방송 녹음해서 듣고 다니던 팬이 참 많았다고..
11월 25일엔 밥 겔도프 도우러 바쁘게 달려와서 Do They
Know It's Christmas의 드럼 파트를 도맡아 연주했다.
참고로 이 곡 베이스는 듀란듀란의 존 테일러 솜씨. 저명한
싱글은 12월초에 발매되어 라이브 에이드로 이어진다.
(Easy Lover, single)
('Easy Lover' by Philip Bailey & Phil Collins, 1984)
(Do They Know It's Christmas, single)
('Do They Know It's Christmas' by Band Aid, 1984)
이 시기 사실 콜린스도 세번째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고
85년 1월에 발매한다. 역사상 가장 히트한 앨범 중 하나로
기록된 80년대 명반 중 하나, No Jacket Required. 두둥.
그래머 어워드의 4개 최고 수상 부문 중 명실상부한 대상은
역시 올해의 앨범상, Album of the Year일텐데 86년도
그래미 올해의 앨범으로 선정된 작품이 바로 이 앨범.
전세계 누적 판매고가 무려 2천 5백만 장에 달해 미국 시장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았고 영국, 미국, 캐나다 등 9개국에서
차트 탑을 찍었으며 Sussudio 및 One More Night 등 미국
핫100 차트 탑에 오른 두 싱글은 각각 골드를 기록했다. 객관
지표를 대략만 훑어도 이 정도..
본 앨범의 진정한 가치는 뉴웨이브, R&B, 어덜트 컨템포러리
등 80년대를 대표하는 모든 음악적 요소를 집대성한 명작이란
점. 그래미에서 경쟁도 했거니와 이 정도 완성도의 동년 발매
경쟁작은 Brothers in Arms, We Are the World, Whitney
Houston, Born in the U.S.A. 정도 꼽을 수 있을 뿐이다.
본 블로그에서 계속 쓰는 표현이지만 버릴 곡이 없는 앨범을
몇 차례 짚은 적 있고 본작도 마찬가지이다. 전술한 메가히트
두 싱글 뿐 아니라 Don't Lose My Number, Take Me Home
등 추가 싱글에 Long Long Way to Go, Who Said I Would,
Inside Out 등 다른 많은 트랙들도 평단으로부터 골고루 극찬을
들은 바 있다.
콜린스와 오랜 시간 함께 할 세션들도 대거 등장한다. 전곡의
기타는 대릴 스투머가 쳤고 One More Night의 코다 색소폰
파트는 돈 마이릭의 솜씨이다. Take Me Home에서 백킹
보컬은 무려 스팅과 피터 가브리엘(!)이 손수 도와줬다.
한 가지 더.. 신디 로퍼가 86년에 마돈나와 트루 경쟁을 벌일
때 8월에 낸 싱글 True Colors엔 누구나 들으면 알아차릴
드럼 머신의 시그니처 프레이즈가 등장하는데, 이 작업에
콜린스가 도움을 줬다 한다. 이 시절 드럼 머신 프로그래밍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였던 것 같다.
(No Jacket Required)
('Sussudio' from No Jacket Required, 1985)
*제목 단어는 뜻 없이 지어낸 말. Prince의 1999과 유사하단 비판도 받았다.
('One More Night' from No Jacket Required, 1985)
*멋진 색소폰은 Phenix Horns 출신 Don Myrick의 솜씨.
('Take Me Home' from No Jacket Required, 1985)
('Don't Lose My Number' from No Jacket Required, 1985)
('Who Said I Would' from No Jacket Required, 1985)
*90년 베를린 투어. 백킹 밴드 실력이 가장 빵빵할 때의 라이브이다.
('Long Long Way to Go' from No Jacket Required,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M-7LOzT73PU
('Inside Out' from No Jacket Required,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QiwGEWmpUuQ
('True Colors' by Cyndi Lauper, 1986)
*86년 핫100 차트에서 2주간 탑을 찍었다.
(True Colors, single)
본래 마이크 러더포드는 80년과 82년에 자신의 솔로 앨범을
낸 적 있다. 그냥 냈다는 의미 정도 부여할 수 있을 뿐, 사실상
성과는 그저 그랬음이 사실이다. 왜일까. 그는 스스로 깊게
고민을 거듭하여 자신이 개인 작업보다 밴드 안에서 타인과
교감하는 과정에서 더 효율적인 뮤지션임을 깨닫는다. 하여
제네시스와는 다른 궤도선상의 사이드 프로젝트 밴드를 따로
결성하니, 곧 마이크 앤 더 미케닉스, M+TM가 출현하게 된다.
제네시스 뿌리에서 파생한 또 하나의 성공적 액트, Mike +
The Mechanics. 85년 10월에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을
내놓는데 러더포드의 솔로 앨범과 비교도 안 되는 성공을
거둔다. All I Need Is a Miracle, Silent Running 등
두 곡의 핫100 탑텐에, 미국 탑40 히트곡 Taken In까지
배출하며 앨범 자체는 골드를 기록한다.
All I Need~는 폴 캐랙, Silent Running은 폴 영이 각각
보컬을 맡았는데 M+TM는 목소리를 두 명으로 이끌고
가는 특이한 체제이다. 가볍고 대중적인 곡은 캐랙이, 더
헤비하고 진중한 곡은 영이 부르는 구성이라고. - 여기서
말하는 폴 영은 유명한 56년생 가수와는 동명이인이다.
Every Time You Go Away 아니라고..
필 콜린스도 85년 솔로 투어를 마치는 와중에 영화 White
Nights, 백야의 사운드트랙을 녹음하여 Separate Lives란
제목으로 11월에 발표했는데 미국 핫100 차트 탑에 오르는
성공을 거둔다. 음색이 매력적이며 나중에 데이빗 포스터와도
작업을 한 미국 여가수 마릴린 마틴과의 듀엣이었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제네시스 사운드 메이킹의 핵심인
멤버가 사실 토니 뱅크스임에도, 희한하게 그는 모든 멤버를
통틀어 솔로 프로젝트 성적이 가장 신통치 않았다. 80년대
중반엔 주로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작업하곤 했는데 몇몇 곡을
모아 86년 3월에 앨범을 내기도 했다. Soundtracks.
(Mike + The Mechanics)
(Soundtracks)
(White Nights)
('All I Need Is a Miracle' by Mike + The Mechanics, 1985)
('Silent Running' by Mike + The Mechanics, 1985)
멤버들이 솔로 활동에 열을 올리면 밴드 전체 작업엔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일반적일 텐데, 제네시스는 이상하게
그 반대라고. 밖에서 받은 음악적 자극이 안으로 모여 새롭게
융합하고 폭발한 것. 그 증거가 86년 6월에 발표한 정규
13집 앨범 Invisible Touch였다. 또 두둥.
세 사람이 다 함께 스튜디오에서 잼 세션을 통해 프레이징을
발전시키는 작업 방식이 전작에서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외부 환경에서 받은 다양한 음악적인
센스가 최고조에 달해 있던 이 자신만만한 뮤지션들은, 6x
플래티넘에 영국 차트 탑 및 미국 차트 3위의 앨범을 빚어낸다.
버릴 곡 없는 앨범이 한 장 더 나온 셈이었다. 타이틀 트랙
Invisible Touch가 밴드 디스코그래피 사상 최초로 핫100 차트
탑에 올랐고 Throwing It All Away가 4위, In Too Deep이 3위,
Land of Confusion이 4위, Tonight Tonight Tonight이 3위에
오르는 등 초대박이었다. 70년대 대곡 시절을 떠올리게 할 만한
Domino는 유난히 팬덤이 열광하는 트랙이었고.
바야흐로 제네시스의 전성기, 커리어의 절정이었다. 음악이 너무
상업적이고 필 콜린스 솔로 앨범과 차이가 뭐냐는 비판도 있긴
했으나 그래미 어워드 수상 등 호재도 함께 찾아오고 있었다.
80년대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서, 이러니 저러니 해도 꼭 한 번
들어보면 결코 밑지는 장사 아닐 게다. 86년 9월에 시작해 87년
7월에 끝난 월드 투어는 역대 최대 규모였고, 이후 이들은 약
5년간 동면에 들어간다.
(Invisible Touch)
('Invisible Touch' from eponymous album, 1986)
('Throwing It All Away' from Invisible Touch, 1986)
('In Too Deep' from Invisible Touch, 1986)
('Land of Confusion' from Invisible Touch, 1986)
*캐리커처 퍼펫이 등장하는 뮤비가 당시 엄청난 화제였다. 서구에서..
('Tonight Tonight Tonight' from Invisible Touch, 1986)
('Domino' from Invisible Touch,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uFXY7Et6pQ4
이미 언급했지만 이 분 원래 배우 출신이다. 어떤 대본을
들이대도 기본기는 하는 연기자란 뜻. 88년말에 느닷없이
버스터라는 범죄물 코미디 영화에 주연으로 등장하셨을
때 놀란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건 80년대 이후 뒤늦게 팬이
된 때문일 거고.
그해 9월에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발매되는데 여기서도
싱글 히트를 두 곡이나 기록한다. Two Hearts는 미국
핫100 탑에 그래미와 골든글러브 어워드를 수상했고
65년 곡을 커버한 발라드 A Groovy Kind of Love는
역시 핫100 탑과 영국 차트 2위를 찍는다.
빌리 엘리어트와 맘마 미아로 유명하신 영국의 좋은
배우 줄리 월터스와 공연하셔서 연기도 괜찮았다고.
이땐 정말 뭘 해도 다 되는 마이더스 터치의 시대셨다.
한 달 정도 앞서 러더포드는 M+TM의 가장 큰 싱글 히트
The Living Years를 발표해 핫100 차트 탑을 기록하는
깜짝 성공을 거두기도. 두 사람의 프로젝트가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듯했다. 폴 캐랙이 리드 보컬을 맡았다.
(Buster)
('Two Hearts' from Buster, 1988)
('A Groovy Kind of Love' from Buster, 1988)
('The Living Years' by Mike + The Mechanics, 1988)
*가사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화해를 이루지 못한 아들의 풍수지탄.
전작의 대성공 후 약 5년이 좀 못 되어 솔로 4집으로 더
성숙해진 ...But Seriously가 89년 11월에 발매되고
필 콜린스의 명성이 90년대까지 이어지는 데에 탄탄한
발판으로 작용한다. 영미를 포함 15개국 앨범 차트에서
탑을 기록한 또 하나의 역작.
일렉트로닉에서 조금 거리를 두어 어쿠스틱한 소울로
방향타를 바꾼 흐름은 이 앨범부터 시작된다. Hang in
Long Enough, Something Happened on the Way
to Heaven 등 트랙이 R&B와 재즈의 뿌리에 천착하는
그의 여전한 성향을 보여준다.
Do You Remember, That's Just the Way It Is 같은
트랙은 그만의 어덜트 컨템포러리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가 보여준 수작이었는데 다소 자기 복제가 되어가지
않나 하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에릭 클랩튼이 세션에 참가한 I Wish It Would
Rain Down이나 핫100 차트 탑에 오르고 그래미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Another Day in Paradise의 성숙한
음률에는 모두가 공감했다.
Colours - 남아공, Another Day~ - 미국, That's Just
the Way~ - 북아일랜드 등 각국 정치 상황을 고찰하는
트랙이 유난히 많은 앨범이다. 하지만 보수당 지지자라는
오해도 받아왔거니와 그의 성찰적 시각엔 한계가 뚜렷하다는
비판에 또한 직면했다. 무엇보다 팬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이런 면이라 볼 수 있을까. 필이 피터는 아니잖아.
(...But Seriously)
('Another Day in Paradise' from But Seriously, 1989)
*워싱턴DC 뒷골목의 노숙자 문제를 다룬 가사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I Wish It Would Rain Down' from But Seriously, 1989)
*에릭 클랩튼이 출연하셔서 대사에 연기까지...
('Something Happened on the Way to Heaven' from But Seriously, 1989)
*어느 개 한 마리의 시점으로 구성한 재미있는 뮤비이다.
('Do You Remember' from But Seriously, 1989)
('Hang in Long Enough' from But Seriously, 1989)
*타이타닉 영화를 패러디했는데 이땐 카메론 작품이 나오기 전이다.
('That's Just the Way It Is' from But Seriously, 1989)
https://www.youtube.com/watch?v=zP7pgInSybI
91년이 되어 제네시스로 다시 돌아온 콜린스와 그들. 14집
We Can't Dance는 4x 플래티넘을 기록하고 영국 차트 탑,
미국 차트 4위를 기록하는 등 제네시스의 여전한 브랜드
파워를 입증했지만 전작만한 성공작은 결코 아니었다. 락
씬의 지형이 바뀌어 더 이상 첨단의 감각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상황이 아닌 거다.
다양한 장르 배경을 가지면서도 희한하게도 블루스 계열
영향이 빈약한 제네시스였는데 I Can't Dance는 희미한
흔적을 남기며 영미 싱글 차트 탑텐까지 오른다. No Son
of Mine은 영국 차트 탑텐에, Hold on My Heart,
Never a Time, Jesus He Knows Me 등 싱글이
그밖에 각광을 받았다.
(We Can't Dance)
('I Can't Dance' from We Can't Dance, 1991)
('No Son of Mine' from We Can't Dance, 1991)
('Hold on My Heart' from We Can't Dance,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V4pLqznEe3I
('Never a Time' from We Can't Dance,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21Zw22g36JI
*팬이 만든 헌정 동영상으로 추정된다.
('Jesus He Knows Me' from We Can't Dance,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35K6vQRt67g
솔로 앨범 전작들이 모두 영미 차트 탑텐을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 미국 차트 13위까지 오른 것이 최고 기록인
93년 11월의 5집 Both Sides는 확실히 그의 하락세를
방증하는 결과일 거다. - 영국과 독일 등지에선 그래도
여전히 앨범 차트 탑에 올랐다. 그래도 필 콜린스니까
이렇게 폄하라도 할 만한 거겠지.
하지만 성숙한 소프트락 일변도의 본작에서 예전에 보던
재기발랄한 젊은 감각이 들리지 않는다는 점만은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성숙하지만 어딘가 진부하게 들린다는..
그도 이제 나이를 먹었음을 Both Sides of the Story,
Everyday, We Wait and We Wonder 등 트랙에서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러나 명심하시라. 그는 필 콜린스이다. 신곡의 행보가
예전만 못 하다는 것일 뿐 전작들의 성과가 누적되어 한껏
폭발하는 종합 성적표는 결국 투어의 성패에 달려 있으며
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쳐 여전히 그는 음악계 정상급의
공연 아티스트이다. 티켓 파워는 여전하고 거듭 말하지만
그를 능가할 만한 가수는 많지 않다.
그리하여 솔로 투어에 더 집중하기 위해 96년 3월 결국
그가 제네시스를 탈퇴한다. 뱅크스와 러더포드는 새롭게
레이 윌슨을 발탁하여 15집 Calling All Stations를
발매하지만... 대차게 말아먹는다. 사람들은 바야흐로
깨달았다. 제네시스는 여기까지로구나 하고..
점점 나이를 먹은 콜린스의 솔로 작업도 투어가 여전한
흥행일 뿐 신보는 그저 그런 단계로 접어들어간다. 단,
99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타잔의 주제가로 발표한
You'll Be in My Heart의 성공은 눈여겨볼 만하다.
2000년 아카데미에서 그에게 유일한 오스카를 안긴다.
사람들이 모두 라이온킹에서 엘튼 존이 해낸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고 그는 이에 부응한 것.
(Both Sides)
('Both Sides of the Story' from Both Sides, 1993)
('You'll Be in My Heart' from Tarzan, 1999)
('Everyday' from Both Sides,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xQpsXA36uq4
('We Wait and We Wonder' from Both Sides,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52NbxxVUGzk
(Calling All Stations)
본 블로거가 필 콜린스와 제네시스의 오랜 광팬이기도 하고
제네시스의 음악사가 워낙 광대한 변화와 끊임없는 발견이
응집된 총체인지라 이번 포스팅은 할 이야기가 참 많았다.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부득이하게 줄이고 삭제한 내용이
꽤 많았음을 살짝 밝힌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솔로 활동에서 별 재미를 못 본 토니
뱅크스야말로 역설적으로 제네시스 사운드의 코어라고 본다.
마이크 러더포드와 콜린스의 솔로 커리어만 훑어 보더라도
얼마나 재능있는 뮤지션들이 오랫동안 뭉치고 엮여 창의적인
시간을 함께 했는지 느낄 수 있으리라 본다.
장대한 인생의 여정에서 다섯 사람이 서로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고 각자의 길을 걸어오기도 했으나 그들 서로가 느껴온
신뢰감은 근본적으로 변한 적이 없다. 아래 링크에서 다시
한 번 그 점을 확인하고 오해들 풀기 바란다.
연예계에 만연한 여러 풍문과 몰이해의 중심에 휩싸이기도
했던 콜린스의 인생과 음악이었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가수, 작곡가, 프로듀서, 연주자로서 그의 가치는
많은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고 믿는다.
*피터 가브리엘이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 불참한 이유
- 새 앨범 리허설 때문에 바빠서. 서로 사이는 괜찮다.
*명예의 전당 운영진의 공식 입장:
https://www.rockhall.com/inductees/genesis
(ARP Quadra)
(Sequential Circuits Prophet-10)
(E-mu Emulator)
(Separate Lives, single)
본 블로거는 너무나 많은 필 콜린스의 작업물들을 일생에
걸쳐 접해왔다. 추천할 트랙이 참 많지만 인생 노래라고
생각하는 Separate Lives를 빼놓고는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덜트 컨템포러리 프로듀서로서 콜린스의 재능이
극에 달하던 때 나온 최고의 히트곡이며 투어에서도 여러
다양한 버젼으로 많은 백킹 보컬리스트들과 연주해왔다.
원곡을 소화한 마릴린 마틴은 80년대 중반에 솔로로 나서
일본 프로모션도 소화하는 등 불타 올랐었지만 그뿐이었고
지금은 음악계에서 은퇴하여 공인 중개사로 사신다 한다.
Stealing Home이라고 컬트적 인기를 누려온 88년 영화
주제가로 많은 매니아 팬을 거느려 오기도. 추억의 첫사랑.
('Separate Lives' by Marilyn Martin & Phil Collins,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vmMinSOWKQk
*공식 뮤직 비디오는 이쪽. 화질음질 좀 업글해 달라..
('And When She Danced' by Marilyn Martin & David Foster, 1988)
https://www.youtube.com/watch?v=JzEB_V8qg04
https://www.youtube.com/watch?v=1f4HaTgcfQ8
이 곡의 가사는 헤어진 연인 또는 이혼한 부부 사이 이야기.
남자의 호텔 방에 여자가 전화 와서 새로 연애를 시작했다고
전하며 애틋한 옛 감정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여러 아름다운
버젼이 있는데 팬덤에서 가장 충성도가 높은 두 가지 라이브
아카이브를 아래에 강추로 링크하며 금번 포스팅을 마친다.
('Separate Lives' from White Nights, 1985)
*작곡은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Stephen Bishop.
*90년경 투어. 유명한 백킹 보컬리스트 Bridgette Bryant와 함께.
**원곡에 대한 새 해석이 시작된 버젼이라 하며 팬덤의 인기가 높다.
*97년 파리 투어에서 Amy Keys 및 Arnold McCuller와 함께.
**원곡 가수를 왠지 쩌리 만들어 버린 어마무시한 두 백킹 보컬리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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