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음악을 듣는 세대에겐 생경하게 들릴 만한
올드한 뮤지션인지라 이번 포스팅의 보컬리스트는
조금 더 진지하게 접근해 보려 한다. 잘 모르는 대상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줘야 할 터이니.
재즈는 락과 또 다른 세계이고 어쩌면 훨씬 더 넓고
깊을지 모른다. 이질적인 듯한 두 세계가 음악적으로
크로스오버를 이룩한 적이, 길고 긴 역사에서 왜 없었겠나.
두 세계가 만나 일으킨 화학 반응으로 오늘날 퓨전이라고
부르는 서브장르가 생겨난 시기는 대략 70년대 쯤이다.
재즈락 또는 재즈 퓨전으로 불릴 만한 장르에서 오랫동안
대명사처럼 음악을 이어온 밴드, 시카고에서 젊은 시절의
커리어를 일구었고 이후 솔로 아티스트로서 80~90년대에
화려한 전적을 거둔 분, 피터 세테라 Peter Cetera의
이야기를 해보련다.
1944년 시카고 남부 사우스 사이드 지역에서 폴란드 및
헝가리 혈통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땐 엄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아코디언을 연주하다가 나중에 베이스로 바꿨다고.
블루스와 재즈, 소울이 활발하게 발전한 시카고의 분위기를
좇아 학창 시절부터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일종의 재즈 콤보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영역을 넓혀 나갔다.
67년의 어느 날 시내에 빅씽이란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혼 섹션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이들에게 매료되어 때마침
공석이던 베이시스트 포지션으로 밴드에 영입된다. 이 빅씽이
바로 우리가 아는 밴드 시카고 Chicago의 전신으로서 기타의
테리 카쓰, 키보드의 로버트 램, 트롬본의 제임스 팬코우,
트럼펫의 리 러크네인, 색소폰의 월터 패러자이더, 드럼의
대니 세라핀이 이미 몇 달 전 6인조로 의기투합하여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벌여오던 것. 세테라 영입 전엔 램이 오르간 페달로
베이스 파트를 메꾸었는데 사운드가 부족한지라 현지에서
활동 중인 적당한 베이시스트를 찾고 있었다고.
(Chicago)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클럽을 돌며 연주하다가 이들은 LA로 날아가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성공적인 데뷔 앨범이자 데뷔작으로 흔치 않은
더블 앨범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를 발매한다.
69년 4월의 일. 바야흐로 재즈 퓨전의 큰 물결을 주도할
운명을 타고 난 트럼페터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 씬에서
명반 Bitches Brew를 내기 1년 전의 일이었다.
('Bitches Brew' by Miles Davis, 1970)
https://www.youtube.com/watch?v=MWCjeZdJj7g
물론 오늘날 비슷한 장르로 묶이면서도 두 앨범의 스타일과
완성도는 사뭇 달랐다. 지금 우리가 아는 퓨전 장르의 예술적
초석을 다진 건 천재 데이비스의 작업이었고, 시카고가 하는
음악은 60년대 락앤롤의 문법에 재즈가 본격적인 예술 음악이
되어버린 40년대 비밥 전에 백인 중심으로 성행한, 시카고
빅밴드 재즈의 상업적 음률을 교묘하게 섞은 상품같은 거였다.
(초창기 앨범 슬리브의 사진. 왼쪽서 세번째 상단이 세테라.)
어찌 보면 대도시 빈민 백인이 접근하기에 가장 용이한 형태를
간직한 춤추고 따라부르기 쉬우며 정치적으로 결코 진지하지
않은 재즈의 흉내에 불과할지도 몰라, 정통 재즈 팬들은 사실
이들의 작업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안 써도 될지 모를
이 말을 굳이 하는 이유는 과대도 과소도 아닌 딱 그만큼만
객관적으로 시카고의 음악을 평가하자는 취지이다.
재즈를 표방하면서도 시카고는 철저하게 백인적 오락거리를
추구한 음악가들이고 재즈의 토대가 되는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정치적 여론 형성에 제대로 적극적 의견을 낸 적은 없다. 흑인
특유의 끈끈한 정서가 21세기 대중 음악의 첨단 필수 요소가 된
작금에 와서 이들의 세계는 이미 철 지난 음악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
그러니 재즈의 정통성을 즐기는 팬이라면 당장 이 포스팅을 닫고
마일스 데이비스나 웨더 리포트나 리턴 투 포에버나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로 달려가시길 추천한다. 거듭 명확히 하지만 백인이
보여줄 수 있는 역대 가장 진보적인 재즈 액트는 아마도
프랭크 자파나 발명의 어머니들일 것이다.
('Right Off' by Miles Davis,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sYnzsShbbFM
('Birdland' by Weather Report,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Ae0nwSv6cTU
('Spain' by Return to Forever,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a_OEJ0wqt2g
('Birds of Fire' by Mahavishnu orchestra,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gv_bkS5VVaA
('Waka/Jawaka' by Frank Zappa,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BRBR_SPPXKQ
아 물론, 이들에게도 진지한 작품성을 보여준 수작이 있다.
('A Hit by Varese' by Chicago,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GszAAmVEKa4
(1970년대의 라이브 모습)
동시대에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블루스 기반
밴드에 비해 음악을 구성하는 방법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가장 뚜렷한 점은 음률을 이어가는 선법, 즉 모드와 스케일이
달랐고 여기에 기반한 프레이징의 어법이 달랐다. 특정한
악구를 리프로 발전시켜 이를 반복적으로 전개하고 여기에
가사를 싣는, 블루스락 밴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법이
아니란 말씀.
거기에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 각 파트의 비중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동등하게 두는 일반적 락의 밴드 운영
방식과 달리, 이들은 파트를 크게 리듬 섹션(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과 혼 섹션(트럼펫, 색소폰 등 모든 브라스 및
윈드 악기)의 둘로 나누어 접근하는 기존 재즈 앙상블 식의
어레인지 철학을 갖고 있다는 점 또한 동시대 다른 밴드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40년대 재즈의 주류였던 17인조 빅밴드 편성 형태)
(1980년대의 프로필 포토. 좌측 중간에 세테라.)
아직 시카고로 개명하지 않고 CTA로 부르던 초창기 음악
중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Questions 67 and 68을 들어
볼 때 그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인트로 파트에 혼 섹션이
주도하는 프레이즈는 후크에서 반복하지 않고 가사를 싣는
파트와 전혀 상관없이 전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블루스에 기반한 락이 태동할 때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이고
반복적인 리프 패턴을 후크에서 강조하여 장르적 특성을
선명하게 구체화했던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갈지도.
특히 이 곡은 향후 퓨전의 거대 시장으로 발전하는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 아예 일본어 버젼을 따로 발매하기도 했다고..
('Questions 67 and 68' from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1969)
(위 트랙의 일본어 버젼 싱글)
초창기에는 첫 앨범 제목을 그대로 밴드 이름으로 쓰다가
너무 길고 시카고 당국으로부터 상호권 소송 부담도 있어
간단하게 시카고로 개칭한다. 이들은 앨범 제목도 특징이
있는데 밴드 이름에다가 로마자 숫자로 표기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것. 단, 두번째 앨범은 개칭 후 첫 앨범이라
심플하게 Chicago라고 칭했고 팬덤에선 Chicago II로
통칭하기도 한다능... 이들의 매번 앨범 커버도 밴드 이름
로고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패턴인지라 다 모아 놓으면
훌륭한 컬렉션이 되기도 한다.
원래 명칭을 시카고 전철 및 버스 등 공공 교통을 총괄하는
공기업, 시카고 교통 공단에서 따온 것은 물론이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창립 멤버들은 대개 시카고 토박이들이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정서와는 다른 시카고의 애향적
토착인 문화가 꽤 유명한 편이다. 아마도 창립 멤버들의
유난한 시카고 사랑도 이런 정서에 기반했을 터이다.
또한 시카고는 이스트 코스트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서 남부에서 이주한 30~40년대 재즈 뮤지션들이
뉴욕 가려다가 시카고에 정착했다는 가설이 있을 정도로
딕시랜드 재즈와 어번 블루스와 소울 및 가스펠 서브장르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창립 멤버들 모두 유년 시절부터 이런
고향 풍토에서 자연스럽게 클래시컬한 재즈를 듣고 자라며
음악적 지향성을 다잡았을 것이라고 능히 추측할 만하다.
(Chicago) (Chicago II)
이들은 데뷔 앨범부터 - 적어도 북미 시장 내에선 - 성공을
구가한, 실력과 운을 겸비한 뮤지션들이었다. (하긴 본래
시카고의 팬덤이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일본 정도 빼면
거의 시체이긴 하다.) 대곡이 많은 재즈의 특성상 초기 앨범
석 장이 전부 더블이었고 전술한 음악적 개성과 특이성을
기반으로 거의 매년 한 장 꼴로 앨범을 발매했으며 싱글에서
거둔 성적도 탑텐을 11개나 기록하는 등, 70년대 중반까지
상업적으로나 평단으로부터나 꽤 준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70년 Chicago, 71년 Chicago III, 71년 Chicago at
Carnegie Hall, 72년 Chicago V, 73년 Chicago VI,
74년 Chicago VII, 75년 Chicago VIII을 차례로 발표해
락과 퓨전이 발흥한 시대를 배경으로 골드 내지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4집은 스튜디오 판이 아닌 라이브
앨범인데 당시 대중 음악가로선 드물게 카네기홀 무대에
섰을 때 그 실황 녹음을 담았다고.
(Chicago V)
(Chicago VI)
Beginnings, Make Me Smile,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Colour My World,
Saturday in the Park, Feelin' Stronger Every Day,
Just You 'n' Me, (I've Been) Searchin' So Long,
Call on Me, Old Days 등은 8집까지 시카고를 대표하는
트랙들로서 70년대 중반 싱글 차트에서 성공을 가져온다.
(이 곡들 대부분 빌보드 핫100에서 탑텐에 들었다.)
물론 젊디 젊은 성대를 자랑하던 세테라를 빛나게 해줄 이
시기 최고의 히트 트랙이 25 or 6 to 4임은 자명하겠으나..
Beginnings(램)와 Make Me Smile(카쓰)을 들어보면
알테지만 1970년대 내내 세테라만이 밴드의 리드보컬을
전담한 체제는 아니었다. 램, 카쓰, 세테라... 노래를 할
만한 처지의 = 입으로 뭔가 불지 않거나 북을 두드리지
않는, 리듬 섹션의 세 멤버가, 번갈아 가며 노래라는 - 재즈
밴드 입장에서 아주 귀찮아 마지 않은 - 업무를 뜨거운 감자
돌리듯이 나눠서 맡은 거다. 개념 자체가 다른 셈이다.
('25 or 6 to 4' from Chicago, 1970)
('Make Me Smile' from Chicago, 1970)
*'25 or 6 to 4' live version
그리고 신기하게도 세 사람의 보컬은 각기 서로 다른 매력을
갖고 있어 이 밴드의 음악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맛이
있다. 그것도 세 사람이 서로 균등한 비율로... 아니, 사실은
7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의 음악에서 세테라의 비중이 그닥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은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 시기 작곡과
밴드 리딩의 중심은 리듬 섹션의 로버트 램, 그리고 혼 섹션의
제임스 팬코우 두 사람에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앞에서 소개한 열두 곡 중 한둘 빼고는 모두 이 둘이서
사이좋게 절반씩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면 감이 오실 듯.
Does Anybody Really~의 4분이 넘는 긴 버젼을 들으면
램의 재즈 기반 키보드 실력과 노래를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다. 램이 박력있는 피아노 리프를 보여준 Saturday in
the Park 역시 세테라와 함께 불러 초창기 매력을 엿볼 수
있는 곡. 70년대 초반 무대에서 램은 Hammond B-3에
Wurlitzer 또는 Hohner 장비를 올려놓는 심플한 세팅을
보여주었고 Steinway Concert Grand는 조금 나중에
도입한다. Fender Rhodes가 나온 후엔 이를 애용했고
간간이 Moog와 ARP 및 Mellotron 장비를 썼으나 과도한
아날로그 합성음에 의존하는 플레이어는 결코 아니었다.
http://www.chicagohome.de/cgi-bin/sbb/sbb.cgi?&a=print&forum=13&beitrag=2
(70년 탱글우드 무대의 램)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from CTA, 1969)
('Saturday in the Park' from Chicago V, 1972)
Just You 'n' Me나 Searchin' So Long은 트롬본을 불며
혼 섹션의 구성을 책임진 제임스 팬코우가 작곡한 대표적
트랙들인데 시카고 스타일 재즈 - 실제로 이런 서브장르가
존재함 - 에서 악절에 대한 기본적 어프로치가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알아볼 만한 뚜렷한 개성을 자랑한다. 팬코우가
초기 시카고의 또 다른 창의적 축임을 보여주는 곡들인 셈.
팬코우의 초기 창작 성향을 대표하는 송사이클(스위트;
모음곡)로서 7개 소곡으로 구성한 13분 길이의 Ballet for
a Girl in Buchannon이 2집에서 발표되었는데 Colour
My World는 이 곡의 제5번 파트이자 아름다운 다섯 코드로
구성된 발라드이다. 테리 카쓰의 진중한 보컬과 월터
패러자이더의 플루트 솔로가 매우 유명하다.
('Ballet for a Girl in Buchannon' by Chicago)
https://www.youtube.com/watch?v=XV2MYMaBxMM
... at Carnegie Hall, 1971
Feelin' Stronger~는 특이하게 팬코우와 세테라가 공동으로
작곡한 초기 히트곡. 세테라의 젊은 시절 연인 관계의 경험을
팬코우가 가볍게 읊조리던 잼 음률에 실었다고. 밑에 영상을
보면 이 곡의 녹음 스케치를 관찰할 수 있다. 아직 본격적으로
창작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않던 세테라의 시동이 슬슬
걸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터이다. 또한 왠만한 튠은
세테라의 보이스에 실어 표현하면 어느 정도 믿고 갈 수
있음을 슬슬 멤버들이 깨닫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Colour My World' from Chicago, 1970)
('Just You 'n' Me' from Chicago VI, 1973)
('(I've Been) Searchin' So Long' from Chicago VII, 1974)
('Feelin' Stronger Every Day' from Chicago VI, 1973)
이렇게 75년까지 시카고는 7장의 스튜디오 앨범, 1장의
라이브 앨범을 내며 성공한 메인스트림 밴드로 자리잡게
되었고 열 곡이 넘는 싱글 히트곡도 보유한다. 이 주요한
히트 트랙들은 1975년 11월에 발표한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에 거의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시간과 비용을 줄이면서도 초기 시카고 명곡들을
즐기려는 팬들이 이 한 장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앨범 차트에서도 1위 찍으셨고..
Chicago IX 수록 트랙:
25 or 6 to 4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Colour My World
Just You 'n' Me
Saturday in the Park
Feelin' Stronger Every Day
Make Me Smile
Wishing You Were Here
Call on Me
(I've Been) Searchin' So Long
Beginnings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
('Wishing You Were Here' from Chicago VII, 1974)
(이 곡은 초기에 흔치 않은 세테라 단독 작곡 트랙..)
76년 6월에 발매한 Chicago X은 디스코그래피 전체에서
큰 전기를 마련한 앨범이다. 세테라가 단독 작곡한 어쿠스틱
발라드 If You Leave Me Now가 메가히트를 기록하면서
영미 양국에서 최초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고 77년 19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팝보컬 퍼포먼스 부문 상을 결성
후 최초로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유일한 그래미 수상
기록이기도 하다.)
앨범 막판에 가서야 겨우 수록한 곡의 대성공으로 싱글은 발매
직후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였고 이후 전체적인 창작 성향이
발라드로 기울게 되는 엄청난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앨범은
차트 3위까지 올라 골드와 플래티넘을 기록하였고 시카고가
그때까지 발매한 앨범 중 가장 먼저 플래티넘을 넘어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앨범에 대한 평가도 높아서 그래미 본상인
올해의 앨범 후보로 지명되는 영예도 얻는다. 팬의 투표로
결정되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선 최우수 팝락 밴드
부문을 수상하는 성공을 누리게 된다.
물론 이 하나의 명곡은 멀리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이들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지되는 계기를 만든다. 지금도
흘러간 팝송으로 많이들 들어보셨을 것..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수는 결국 히트곡으로 말하는 법.
(Chicago X)
('If You Leave Me Now' from Chicago X, 1976)
(독일 방송 출연. 보컬은 라이브, 반주는 MR..)
세테라 표 파워 발라드의 성공 공식은 다음 앨범에서도
계속 이어져 77년의 Chicago XI은 이들이 70년대에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 탑텐(4위)을 기록한 Baby, What
a Big Surprise를 배출한다.
전부터 비치 보이스의 음악적 영향을 줄기차게 받은
세테라가 이 곡에선 아예 칼 윌슨을 모셔와 백킹 보컬로
기용하기도. 패러자이더가 플루트를, 러크네인이 피치가
높은 피콜로 트럼펫을 연주한 점이 특색이 있다.
Chicago XI은 세테라가 중심이 되는 발라드에의 의존을
떨쳐내려 몸부림치는 듯한 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
그 노력이 과연 성공적이었는가 하는 점은 미지수일 듯.
또한 후술하게 될 비극적 사건 때문에 테리 카쓰가 참여한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되고 만다.
(Chicago XI)
('Baby What a Big Surprise' from Chicago XI, 1977)
78년은 이들에게 시련으로 기억될 터. 지난 다섯 장의 정규
앨범을 작업한 프로듀서 제임스 구에르치오가 밴드의 재정적
성공을 독차지한다고 판단하여 결별하였다. 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1월 말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기타와 보컬을 겸하던
밴드의 기둥 테리 카쓰가 총기 오발 사고로 숨지고 만 것.
두 사건은 70년대 말이 되어 격변하고 있는 음악 시장의
변화와 더불어 멤버들 모두를 미치도록 몰아세웠다.
78년에 발표한 신보 Hot Streets는 카쓰가 주도한 재즈락
기조에서 많이 후퇴하여 팝과 디스코에 경도된 앨범이었다.
숫자로 매기던 타이틀을 처음으로 배격한 점이나 최초로
멤버들 사진을 커버에 실은 점부터가 사람들에게 뭔지 모를
이질감을 준 것 같다. 지금까지 앨범 중 처음으로 차트에서
탑텐을 기록하지 못해 실질적으로 실패작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실패는 79년의 Chicago 13에서 더 심해져 카쓰 대신
오디션으로 영입한 기타리스트 도니 데커스는 본작을 끝으로
탈퇴해 버린다. 80년 Chicago XIV은 탑40 진입마저 실패할
정도였고 레코드사에선 Chicago XV을 신보가 아닌 대표곡
모음집으로 강행하는 수모까지 안긴다.
(Hot Streets)
(Chicago 13)
(Chicago XIV)
(Greatest Hits, Volume II) (Chicago XV)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몇 해에 걸쳐 별 볼 일 없는
성과에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고 예전의 빅밴드 튠이 결코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세상은 이미
디스코도 한물 가고 뉴웨이브와 포스트 펑크가 고전적인
정서를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프로듀서를 영입한다.
바로 데이빗 포스터, 80년대를 씹어먹은 네임드 뮤지션.
포스터는 고전적 재즈보다 팝 발라드의 문법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작곡가 겸 프로듀서. 브라스를 뒤로 밀어내고
신디사이저를 앞세웠으며 심지어 기존 멤버가 아닌 세션을
고용하여 - 스티브 루카서라든가 데이빗 페이치라든가 -
80년대 첨단의 파워 발라드를 직조해냈다. 이 작업에
세테라가 가진 창작 아이디어가 핵심적 에너지를 기여하게
되고 포스터와 세테라, 바야흐로 두 위대한 거장이 최고의
시너지로 한 시대의 역사를 새로 쓰는 순간이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음악사 최고의 명곡이 1982년 5월에
발매되었고 이를 수록한 새 앨범 Chicago 16이 다음 달에
선을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밴드 시카고 하면 떠올리는
대표곡이면서 80년대 어덜트 컨템포러리의 대명사 격인
싱글 차트 탑의 히트 트랙, Hard to Say I'm Sorry였다.
그 해 9월 11일에 Hard to Say I'm Sorry가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선다. 16과 이 곡의 성공으로 이들은 그래미
팝 퍼포먼스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고 발매된 해에 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하였다. 빌보드 앨범 차트 200에서는
9위까지 오르는 성공이었다.
(Chicago 16)
('Hard to Say I'm Sorry' from Chicago 16, 1982)
(앨범 버젼 원곡. Get Away와의 접속곡 형태.)
(뮤직 비디오. Get Away가 잘린 싱글 버젼.)
(가장 상태가 양호한 82년 도르트문트 라이브)
A면에 마지막 트랙이었던 Hard to Say I'm Sorry와
대구를 이루는 B면의 마지막 트랙 Love Me Tomorrow
역시 두번째로 싱글 커트되어 성공을 거둔다. 세테라가
스스로 발굴하기 시작한 80년대식 발라드의 표현력이
애정과 인간 관계 같은 정서를 깊게 어루만지며 타고난
발성과 어우러져 일정한 궤도에 올라가고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트랙이다.
왠만한 한국의 음악 팬이나 이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Chicago 16부터 앨범을 즐기게
되었을 텐데, 전술한 두 곡을 제외하고 나머지에서는
이전 시카고의 전매특허인 브라스 사운드가 생경하게
배어 나오니 이에 익숙하지 않은 팬이라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16을 기점으로 이전 시카고
음악을 하나 하나 정복해 가다 보면 단순하게 팝락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음악에 숨겨진 깊은
내력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다.
16 발매 전 80~90년대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보컬 겸 키보디스트 빌 챔플린도 새롭게 영입된다. 이
분도 커리어가 화려한 편인데 80년대 초에 대히트한 명
발라드 After the Love Has Gone을 포스터 등과 공동
작곡하여 무려 그래미 상을 수상한 분이시다. 시카고에
가담하게 된 건 포스터 및 세라핀과의 친분으로 인해..
('Love Me Tomorrow' from Chicago 16, 1982)
(아웃트로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어찌 변주되는지 주목하면 흥미롭다.)
(Chicago 17)
큰 전기를 마련한 16이 냉정하게 앨범에서 초대박은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반해 84년 5월에 발매한
Chicago 17은 가히 시카고 디스코그래피의 베스트
앨범이라 할 만하다. 비록 16이 기록한 싱글 1위 곡은
나오지 않지만 빌보드 핫100 싱글 3위까지 오른 곡을
둘, 탑20까지 오른 곡을 또 둘이나 배출하고 무엇보다
앨범 판매로 6x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
(원래 미국 시장 성공의 척도는 싱글보다 앨범이다.)
판매 뿐 아니라 역대 앨범 중 음악적 평가가 가장 좋다는
점이 여러 모로 내실을 거둔 성과임을 입증한다. 16에서
성공한 두 싱글과 나머지 전통적 브라스 트랙들 사이에
괴리감이 잔존하여 일반 음악 팬을 당혹케 했던 점에
비교한다면, 17은 비록 브라스락이나 재즈의 색을 싹
지우더라도 80년대 소프트락의 문법 하나에 집중해
시대를 대변할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할 만하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그래미 본상 올해의 레코드와 최우수
팝 퍼포먼스 부문 후보에 지명되는 결과까지 온다.
85년 팝계 최고의 이벤트였던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에도 곡을 하나 기증했고 앨범 전체가 그래미
올해의 앨범 후보에 지명되며 함께 이름을 올리는 깜짝
영광을 누리기도. 86년의 13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선 77년에 이어 두번째로 최우수 팝락 밴드
부문 수상의 영예를 가져갔다. 밴드로서 시카고는
활동 기간 중 최고의 해를 맞고 있었고 그 중심에
피터 세테라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Stay the Night' from Chicago 17, 1984)
(싱글 핫100 16위까지 올랐고 스턴트로 가득 찬 뮤직 비디오는 꽤 화제였다.)
('Along Comes a Woman' from Chicago 17, 1984)
(싱글 핫100 14위까지 올랐으며 흑백 고전 영화를 패러디한 뮤직 비디오.)
17에서 가장 탁월한 트랙은 Hard Habit to Break로서
그래미 본상 후보 지명도 이 곡의 빼어남 때문이었다. 81년
메가히트곡으로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Physical을 공동
작곡한 스티브 키프너가 송라이팅을 주도하고 데이빗 포스터가
프로듀싱한 트랙으로서, 피터 세테라와 빌 챔플린이 듀오로
합을 맞춘 모든 곡 중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면서도 시카고가
지닌 재즈락의 매력도 아울러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시대의 또 다른 히트곡 스티비 원더의 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와 빌리 오션의 Caribbean Queen에 밀려서 끝내
핫100 차트 3위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워낙 명곡이 넘쳐난
시절이었으니 뭐. 세테라와 포스터가 다시 합작한 또 다른 명곡
You're the Inspiration 역시 잭 와그너의 All I Need와 무려
마돈나의 Like a Virgin에 밀려 싱글 3위가 최고 기록이었다니.
가히 대중 음악이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80년대 아니었겠나.
싱글 16위까지 오른 Stay the Night이나 14위까지 기록한
Along Comes a Woman을 들으면 그렇다. 세테라 목소리를
쏙 빼놓고 반주만 틀었을 때 이걸 시카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네. 당시에는
브라스 빼고 신디 넣으라고 레코드사 차원에서 압력이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니 80년대 사운드를 완벽하게 창조해냈다고 위무라도
하는 편이 나을지도. 어쨌든 흥행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지만 뭔가 위기감이 스멀스멀 닥쳐오는 느낌 아닌 느낌이
분명히 감지되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계속 가도 괜찮은 걸까.
위에 뮤직 비디오가 참 쌈마이다우면서 돈도 많이 들인 티가
팍팍 나는데 당시엔 저런 것이 유행이었다. 바야흐로 MTV
시대가 절정을 찍던 80년대 중반이었던 거다. 그나저나
저 발연기를 어쩔...
('You're the Inspiration' from Chicago 17, 1984)
(세테라 재적 시절 거의 마지막 라이브로 추정)
(정말 흔치 않은 전성기 세테라의 이 곡 라이브 아카이브)
락 밴드의 시대였던 70년대를 통과한 80년대의 음악
산업에선 보컬리스트의 솔로 독립과 밴드 와해의 수순이
마치 모든 뮤지션의 통과의례처럼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이는 시카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가요계에는 10년 정도 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사실
이들은 70년대엔 프론트맨을 따로 두지 않았고 심지어
보컬의 책임도 세 사람이 나눠 맡는 구조였는데도 말이지.
변화한 산업의 환경이 밴드에게 얼굴을 요구하였고
세테라는 이에 적절하게 응할 수 있는 멤버였던 거다.
오늘날까지도 골수 팬들 사이에선 논쟁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프론트맨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냔
옹호론, 카쓰가 죽은 후 램이 정신 못 차리고 제 역할을
못할 때 세테라가 자리를 차고 들어갔다는 설, 레코드사
쪽에서 혼 섹션은 아예 취급도 안 하려고 하니 이 기회를
세테라가 낚아채 이기적 이득을 챙긴 거였다는 비난론 등,
양상은 참 다양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분명한 건 세테라를 시대적 흐름의 희생양 쯤으로 봐주는
감상적 생각은 남아 있는 자료로 볼 때 아닌 건 아니라는
것. 이 시기 그는 확실히 자신의 성공 가도를 향해 확실한
기회를 찾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이고,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의 에고를 적당히 내세우며 약간은 허세끼가 다분한
셀럽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던 걸로 추정한다.
이런 자세는 뮤지션 개인의 영예로선 물론 박수받을 일일
것이고 골수 시카고 팬들 입장에서야 환장할 노릇일 것.
결국 그는 85년 여름에 밴드를 떠날 것을 천명한다. 딴에는
당시 옆동네 제네시스와 필 콜린스의 관계처럼 밴드와 솔로
양쪽을 병행하겠다고 조율을 시도한 모양이지만 다른 멤버
입장에선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다. 아래에 TV쇼
아카이브로 남아 있는 영상이 독립 의사를 밝힌 최초 시기
쯤에 찍힌 거라고 하는데, 40대 초반 인생의 전성기를 달리던
뮤지션으로서 매우 당당한 자세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한 번 보시기를. 영상의 댓글은
그에 대한 욕이 많은데 판단은 각자의 몫인 듯.
(Peter Cetera and David Foster interviewed, circa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Mj9BK7ih8Q0
꽤 어수선하게 지나간 시대처럼 보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성공의 길을 착실하게 다지던 시절이었다. 80년대 후반은
피터 세테라란 뮤지션에게 최고의 전성기를 선사한 시기.
독립하고 이듬해에 영화 가라데 키드 2탄의 주제가로
발표한 Glory of Love가 빌보드 싱글 차트 탑을 찍고,
연이어 (당시만 해도 완전 무명이던) 에이미 그랜트와
듀엣을 이룬 The Next Time I Fall마저 연달아 핫100
1위를 달성해버린 것.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 어워드의
주제가상 후보에도 오르고 그래미에서도 후보에 오른다.
쉬워 보이는지 몰라도 싸이의 사례에서 모든 한국인이
간접 경험했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성과는 쉽게
폄하할 일이 아니다. 비록 평가는 그냥저냥 그랬더라도
86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 Solitude/Solitaire가 거둔
상업적 성과 - 앨범 차트 23위 및 플래티넘 인증 - 는
완벽하게 한 시대를 규정하고 있었다. 파워 발라드가
주종을 이루던 당시 백인 락 씬의 대세적 흐름일 터.
(당시 오스카 무대에서. 6분 47초부터. 음정이 살짝 불안정.)
https://www.youtube.com/watch?v=bx8062XOUGk
참고로 Glory~는 가라데 키드에 삽입될 노래가 원래
아니었다고. 85년에 나온 록키 4탄 OST로 본래 기획한
트랙이었단다. 가사 분위기가 많이 비슷하긴 하다. 위
TV쇼 인터뷰 중간에도 록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Solitude/Solitaire)
(Glory of Love, single)
(The Next Time I Fall, single)
('Glory of Love' from The Karate Kid Part II, 1986)
솔로 아티스트로서 그의 성공은 8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88년에 발매한 앨범 One More Story는 차트 58위까지
오르고 싱글 4위까지 올라가는 One Good Woman을
배출한다. 대략 이 시기까진 그래도 시대의 흐름을 잘 좇아
히트할 튠을 만들어내는 감각을 유지한 셈.
90년대까지 이어지면 다른 아티스트와의 싱글 협업, 흔히
일컫는 피처링 작업으로 유명세를 이어간다. 89년엔 또
다른 빅스타 셰어와 듀엣을 이룬 After All, 91년에는
데이빗 포스터와 다시 공동 작곡으로 걸프전 군인들을
향한 위문 가요 Voices That Care에서 여전히 건재한
그의 하이 테너 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창 솔로 콘서트에 매진하던 97년엔 베이비페이스가
키우던 신예 R&B 그룹 애즈옛이 리메이크한 Hard to
Say I'm Sorry의 커버 버젼에서 마지막 찌르는 고음
파트에 재등장하여 꽤 화제가 되기도. 핫100 8위까지
오르는 저력을 과시했다. You're the Inspiration 역시
이들과 재녹음하기도.
현재로선 92년에 앨범 World Falling Down에서
커트한 싱글 Restless Heart가 마지막 핫100
차트 탑40 기록이다.
('One Good Woman' from One More Story, 1988)
('Voices That Care', 1991)
(91년 스타 연예인들 총출동. 세테라는 네번째 등장.)
('Hard to Say I'm Sorry' by Az Yet, 1996)
세테라가 맞은 솔로 전성기 동안 시카고의 행보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직후 86년에 발표한 Chicago
18에선 유사하게 베이스와 보컬을 겸할 줄 아는 제이슨
셰프를 영입해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했고, 88년의
Chicago 19에선 빌 챔플린의 보컬이 돋보인 싱글
1위 곡을 배출했지만, 음악적 완성도는 글쎄...
문제는 사운드였다. 피터 가브리엘이 나간 후의 제네시스,
로저 워터스가 나간 후의 핑크 플로이드처럼 시카고는
피터 세테라와 묘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차...
포스터와 세테라가 주도한 팝 정서를 비판했으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의 새 앨범에선 외부 작곡가만 교체했을 뿐
80년대 사운드에서 단 한 걸음 진보하지 못한 수준에
머물렀으며 하다 못해 70년대식 재즈 본령으로 복귀한
것도 아니었다. 언론의 평이 싸늘할 만하지.
('If She Would Have Been Faithful' from Chicago 18, 1986)
('Look Away' from Chicago 19, 1988)
*Chicago 19에서 싱글 차트 탑을 찍은 곡. 다이앤 워렌 작곡.
('You're Not Alone' from Chicago 19, 1988)
결국 90년대를 넘어서며 탈퇴한 멤버와 원 밴드 양측 모두
상업적 성공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졌고 이제는 옛날 히트
트랙에 의존하며 투어를 순회하는 한물간 가수로 취급받는
실정이다. 애초에 멤버들 모두 40대를 넘긴 나이에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어 상업적 동력을 되살리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터이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블루스로 다시 회귀한 에릭 클랩튼이나
클래식 작품을 발표한 폴 매카트니 같은 분이 있음을 볼 때
늦은 나이가 핑계는 될 수 없음일 것이다. 애초에 시카고가
데뷔 모토를 '나팔 부는 락앤롤 밴드'로 표방하고 시작했으니
늘그막의 음악적 귀결은 정통 딕시랜드 사운드를 재창조한
창의적 커버 또는 창작곡 정도로 맺었어야 마땅할 얘기이다.
아니, 그렇게 주장한다.
(Scheff)
시카고가 미국 시장에서 보수 성향의 백인계 미국인들에게
주는 영향력과 비교할 때, 도대체 이런 대단한 밴드가 트리플
A급 세계구 아티스트로 올라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곤 했는데, 아마도 이런 결정적 한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터이다. (냉정하게 말해 이들의 시장 파급력은 북미
및 일부 지역에 국한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도 판매고
합하면 1억 장에 달한다.)
제임스 팬코우와 로버트 램을 중심으로 리 러크네인과
월터 패러자이더가 더해진 터줏대감 멤버들이, 과연 말이
통하는 방향으로 밴드를 이끌어왔는가 하는 점도 한번쯤
곱씹어볼 대목이다. 사람 숫자가 많을 뿐더러 멤버 교체가
너무 빈번하게 발생한데다, 창립 멤버인 피터 세테라와
대니 세라핀에, 교체로 들어오지만 밴드 역사의 중요한 한
대목을 오래도록 지탱해온 빌 챔플린 및 제이슨 셰프까지,
결국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은 과연 무엇일까.
(Champlin)
우리가 중심이니 우리 생각대로 따르지 않으면 결국 떠날
수밖에 없을 거다 하는 식으로, 기둥 멤버들의 묘한 꼰대
의식 같은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
역사에서의 기여도를 따질 때 세테라, 세라핀, 셰프 등 세
사람은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낼 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버디 리치가 극찬해 마지 않았다는 대니 세라핀은
심지어 해고라는 형식으로 떠나 보내다니.
창작자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노력하지
못한 한계, 여기에 함께 한 공동의 세월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 묘한 아집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고 만 관계의
응어리.. 미국 음악사 수십 년간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면서
어느 일정한 선 이상은 뚫지 못했던 유리벽의 원인인즉슨
멤버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아울러 저 세상에서 테리 카쓰가 이런 멤버들의 행보를
보고 참 무던히도 안타까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Seraphine)
(Kath)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노년에 접어든 세테라 옹의 음악
활동도 대략 이런 정도에서 마무리가 될 것 같다. 시카고
및 그 자신의 관계에 관해 수많은 사람들의 억측이나 공분,
오해와 회한을 뒤로 하고... 적어도 두 시대, 약 30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미국의 대중 음악 시장에서 일정한 창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타고난 섬세한 보이스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 공로는 결코 폄하할 수 없으리라.
일부 시카고 광팬들이 세테라를 욕하는 결정적 원인은
명예의전당 헌액식에 참석도 안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한 가지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연예인들이
욕먹는 마약, 폭력, 섹스 류의 이렇다 할 스캔들을
일으킨 적은 없는 세테라이기에 이거 하나 갖고 몇
년치 욕을 울궈먹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어쨌든 조만간
팬들의 오랜 오해도 풀어주는 포용을 보여 주시기를.
http://ultimateclassicrock.com/peter-cetera-chicago-rock-hall-2016/
사실 본 블로거가 가장 좋아하는 시카고의 트랙은 피터
세테라가 떠난 직후 발표하여 싱글 3위까지 오른 Will You
Still Love Me이다. Chicago 18에서 가장 빼어난 곡이고
데이빗 포스터가 조율한 팝 발라드 시대의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운 역작일 터이다. 제이슨 셰프의 장점이 가장
두드러지기도 했고. 당시엔 세테라가 떠난 자리를 꿰찬
그를 두고 어디서 어린 놈이 나타나 노래를 이렇게 잘
하나 생각하기도. 다 옛날 일이지만.
피터 세테라가 피처링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던 시절인
89년엔 영화 Chances Are의 주제가로 After All을 셰어와
함께 불렀는데 이것 역시 강력하게 추천하는 명곡이다. 바다
건너 미국에선 결혼식 축가 올타임 리퀘스트 송이라고. 꽤
빼어난 클래식 코메디인 영화 역시 추천할 만한 수작이다.
특히 빛나는 보석 같던 로다주의 젊은 시절을 기억한다면.
두 아름다운 노래를 추천 때리며 포스팅을 끝내련다.
('Will You Still Love Me' from Chicago 18, 1986)
('After All' by Cher & Peter Cetera,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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