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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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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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식 입헌 의회 정치의 뿌리, 마그나 카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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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Politics from Tudor to Stuart ..

Until Ended Up with the Petition of Right






권리를 청원하다, Petition of Right..

누군가의 권리에 관해 간언하는 주청을 드린다는 뉘앙스에요.



그 누군가란 자유민 또는 자연인을 가리킨다고 하겠고

왕께 주청 드렸다는 건데 그 왕은 찰스 1세였어요.



찰스 1세를 거론하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6~17세기 잉글랜드 왕조 역사를 짚지 않을 수 없어요.



플랜태저넷, 튜더, 스튜어트…

영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인데, 이거 뭔가요?



왕가 가문의 이름이라고들 아실 텐데 사람 이름의 성,

last name인 건 아시나요들. house of Tudor.. 이러면

Yi dynasty.. 이렇게 부르는 것과 유사한 거에요.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으로 플랜태저넷 사람들의 씨가

말라버려 할 수 없이 핏줄 긁어모아 개창한 왕가가

16세기의 튜더 왕조에요. 헨리 7세였죠.



언젠가 헨리 8세를 짚고 넘어간 적 있는데 이 사람이

16세기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중추적인 군주였어요.

헨리 튜더.. 전임 헨리 7세의 아들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헨리8세-바로알기



튜더 시대의 가장 유명한 왕이기도 했고요.

또 튜더 왕가 최고의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해요.



엘리자베스 튜더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장장 만 44년을 다스리며 그레이트 브리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진, 영국 역사가 사랑하는 군주입니다.



여왕의 치세를 과연 태평성대라 할 수 있었는가, 여왕은

정말 좋은 군주였던가에 대해 오늘날 여러 가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이 시기 누구보다 오래 다스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앞뒤

다른 군주에 비해 자기 정치를 할 시간과 기회가 충분했던 것,

그래서 긍정적으로 볼만한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점이죠.



잘못이라 할 순 없지만 (중세 관점에서) 여왕의 치명적인

흠이 있었는데 혼인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즉, 튜더

왕가의 대가 끊길 것이 미리 예견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스튜어트 왕조입니다.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승계하여

동군 연합의 새 왕조를 개창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거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같은 사람, 다른 이름의 군주인 거에요.



제임스 1세… 평가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려 오늘날

영국 사학자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군주일 거에요.



이 당시 영국 군주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어요.

바로 종교 전쟁이죠.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에 이르기까지, 교회

개혁으로 등장한 청교도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이들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골칫거리였어요.



청교도는 영국 땅의 칼뱅교 신자를 일컬어요. 가톨릭과

많은 교리를 공유하는 신교인 영국 국교회가 있었고..

평민 중 가장 많은 숫자는 여전히 가톨릭이었어요.

청교도는 스코틀랜드와 제3계급에 분포했죠.



*중세 유럽 종교 정치의 폐단을 논하자는 것일 뿐, 현대의

가톨릭교나 성공회를 비난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구요.










국교회를 헨리 8세가 만들었기 때문에 후임 군주가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냐에 따라 나라의 종교가 요동을 쳤어요.



헨리 8세 국교회, 에드워드 6세 국교회, 메리 1세 가톨릭,

엘리자베스 1세 다시 국교회.. 이런 식이었죠.



군주에 따라 종교가 바뀐다는 것, — 감이 오시나요.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종교 신자는 박해하고 탄압하고

더러 죽였다는, 그런 끔찍한 의미라고요. 지금 중세랍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는 서로 배다른 남매에요.

메리의 모친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아버지 이혼으로

쫓겨난 사람.. 메리가 극렬 가톨릭일 수밖에 없는 이유죠.

평생에 걸쳐 부친과 신교를 원망했겠죠. 그렇긴 하나…



메리 때 종교 탄압을 블러디 메리라고 따로 지칭하긴 해요.

그런데 그 정도 사형 집행은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때도

있었어요. 메리 여왕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평가라 할 만해요.










이런 험한 때 제임스 스튜어트가 왕위에 올랐어요. 스코틀랜드

출신이니 그 자신은 청교도의 정신을 백번 이해할 입장에

있었어요. 어려서도 청교도식 교육을 받았다고 하죠.



그러나 연합 왕국의 군주로서 정치적 입장은 개인의 입장과

같을 수가 없었어요. 튜더 가문이 개창한 국교회의 기득권을

해치는 건 국가의 기틀을 흔드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임스는 가톨릭과 청교도 둘 다 적당히 탄압하고

국교회의 근본을 세우는 쪽을 선택해요. 독재자라는 비판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나마 중도를 지킨 결정이 아니었나,

본 블로거는 솔직히 할 만큼 한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가장 유명하다는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한

문화적 통합의 업적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와 대립각을 세우며 살짝살짝

무시 스킬을 시전하는 튜더 군주들의 전통 아닌 전통이

제임스 때에도 이어졌다는 후대의 비판은 유효하겠죠.










제임스 보고 그나마 낫다 할 수 있는 것이, 후임자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였다고 볼 수

있거든요. 1625년 그의 아들로 즉위한 사람은

찰스 스튜어트, 찰스 1세 국왕이었어요.



찰스는… 종교 정치란 면에서 매우 갑갑한 왕이었어요.

국교회를 신봉했고 처가가 가톨릭인지라 가톨릭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국교회적 반동 조치를 도입하니 어땠겠어요?

스코틀랜드청교도젠트리, 당시 영국을 지탱하던

세 집단이 엄청나게 반발하는 결과를 낳게 되요.



탄압과 처형이 따랐겠죠? 거기에 한창 대륙에서 진행

중이던 30년 전쟁에 나라 살림 생각도 안 하고 마구

뛰어들어 용병 경제 창출에 이바지하신…ㅜ



왕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왕권 신수설이란 사조가 한몫을 해요.










일찍이 16세기 말 로마법 법률가인 장 보댕이 신학,

정치, 경제 등 분야에 걸쳐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요.



보댕의 주된 논제는 로마 가톨릭 교황이 프랑스 왕국의

군주 통치권에 행사하는 지나친 간섭에 반대하고 강한

통일 왕정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보댕

자신은 평생 가톨릭의 신앙을 유지했지만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절대 왕정 체제는 이런 보댕의 사상에

힘입은 바가 컸는데, 재미있는 건 보댕이 영국의 왕당파

의회파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에요.



로버트 필머는 보댕을 계수하여 왕권 신수설을 주장한

대표적 인사였어요. 그의 유작은 앞으로 17세기 후반에

벌어질 왕정 복고라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쳐기도…

(나중에 논할 기회 있을 겁니다.)



찰스 1세가 설치는 데는 이런 당대의 흐름이 받쳐준 면이

있었어요. royalist라고.. 왕당파란 정치 집단의 중심

사상이 왕권 신수설이었죠. divine right of kings..










막무가내로 종교 반동 및 전쟁이 휘몰아친 상황.. 막대한

전비와 배상금을 해결하기 위해선 세금이 필요했어요.

이에 과세를 획정하라고 의회를 소집한답니다.

평소 무시할 땐 언제고…



이때가 즉위 후 겨우 2~3년 지난 시점인데 나라 꼴을

이렇게 망쳐 놓으니, 안 되겠다 싶어 의회 정치의 빛나는

전통을 기억하는 귀족들이 반론에 시동을 걸어요.



언젠가 포스팅한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 경이

여기에 앞장선 대표적 의회파 정치인이에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멋대로 용병을 써 전쟁을 일으키고 용병의 전비를 평민 가구에

떠넘기는 망나니 왕을 통제해야 한다는데 의회파 귀족들이

뜻을 모았으며 코크 경이 이 생각을 문서로 기초하죠.



또한 국왕을 압박하는 극단적인 형식으로 가지 않고 군주에게

자유민의 권리 확보를 ‘소청’하는 형식으로 완화하여 찰스가

한결 받아들이기 편하도록 출구 전략을 세워주자는 혜안도

코크 경의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탄생한 국왕과 의회 간 협약서가 바로 우리가 아는

권리 청원, Petition of Right.. 라는 문서랍니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의 불문 헌법 법원 중 대헌장 다음

순서 정도에 꼽을 중대한 문건이면서, 미합중국 건국 및

미국 헌법 수정안 제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적이죠.



청원의 내용은 흔히 4대 원칙으로 알려져 있어요.

조항이 넷이란 뜻이죠.



첫째,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것..

둘째, 군병을 자유민 사유지에 주둔시킬 수 없다는 것..

셋째, 자유민을 명분 없이 투옥할 수 없다는 것..

넷째, 평화 시기에 함부로 계엄령을 공포할 수 없다는 것..

(주어는 모두 존귀하신 국왕 전하...)










과세할 수 없다는 건 이 사단이 모두 찰스가 절차 무시하고

세금을 획정하려 하다 보니 당연히 나온 조항이겠고요.



오늘날 현대 민주 정치에서도 세금을 정할 수 있는 조세권

입법부만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이지요. 행정부가

단독으로는 절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어요. 이 전통이

여기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거랍니다.



찰스 왕이 용병으로 구성된 군사를 무단으로 자유민들 집에

주둔시켜 버렸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 군사들

먹고 입히고 재우는 건 너희들이 부담하란 뜻인 거거든요.



국방 운영의 핵심은 사실 전쟁 기술이 아니라 군수와 보급인

것… 아시죠? 전쟁은 순간이지만 군사를 유지하는 건 평시에

엄청난 돈을 부담해야 하는 일 아니겠어요. 평시의 군대란

밥먹고 싸움 연습하는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이로 인해 자유민 중 선의의 피해자가 엄청 나온 관계로..

두번째 조항이 나오게 된 거고요.



이런 주둔 조치에 반발한 자유민들을 또 엄청나게 투옥하고

탄압했어요, 못난 찰스 왕께서. 재판도 없이, 영장도 없이.



세번째 조항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거고 habeas corpus..

라고, 근대 공법에 등장하는 인신 보호 영장의 법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죄형 법정주의 같은 현대적 형법 법리를

의회 정치의 역사에서 그 맥락을 찾아볼 수 있는 거에요.



마지막 조항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왕께서 심심하면 계엄을 선포하시니…

별 명분 없이 그냥 자기 말 안 듣는다고..ㅜ










다른 때 같았으면 상원이 열심히 나서 국왕 쉴드를 쳤을 텐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대헌장 파괴의 현장인지라, 영국 의회

역사상 보기 드물게 상하원이 대동 단결하여 가결시켰다죠.



대헌장… 예, 1215년 마그나 카르타 맞습니다. 13세기 이래

잉글랜드의 의회 정치란 이것이 지켜지는 둥 마는 둥 오락가락

들고 낢을 반복한 요지경이었다 보면 대략 맞을 거고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영국입헌의회정-마그나카르타



의회가 강할 땐 대헌장을 지키라며 군왕을 압박하고 반대일 땐

왕이 의회를 무시하거나 문을 닫아 버리거나 하는 상황이 약

4백 여년 역사의 각 단계마다 주기적으로 펼쳐진 거에요.



대헌장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재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조부터고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강력한 군주 집권기엔 의회와 적당한 거리에서

반목과 줄다리기 상황을 연출하곤 했어요.



이제 17세왕들께서 본격적으로 의회 정치의 판을 손수

깔아주시는 시대(!)로 넘어와선, 권리 청원을 필두로 하여

별별 익사이팅한 사건들이 요지경처럼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바야흐로 인간사 정치의 문화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하는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원대한 풍경화의 전주곡처럼 등장한 1628년 6월 7일

영국 역사의 한 페이지는 바로 권리 청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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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na Carta Libertatum,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










현대 영국 불문 헌법의 가장 오래 된 법원*으로서

대헌장의 의의는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편이에요.



*법원 = 사법부 기관 시설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법을 해석 적용할 근거로서 참조할 성문 법전이나

관습법 등 일체의 범위.. 法院이 아니라 法源...



charter는 영미법 중 영국 권역에서 협약, 계약, 헌장,

공인, 승인, 인증, 등기, 등록(명부) 정도로 다양하게

번역이 되는 말이고요.



미국에서 certify나 register로 받을 법한 표현에

이 말이 들어가는 영국권 실무 용어가 많아요.

현대어 용법이 그렇다는 말이에요.



라틴어 원 용어를 풀어보면 자유 대헌장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여기서의 자유란 신민 전체가 아니라

13세기 당시엔 주로 귀족으로 국한한 의미였고요.



자유민 전체 범위로 확대된 것은 16세기. 역사 발전의

흐름을 좇아 법원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때 이 능동적인 법리 해석에 앞장선 인물이 언젠가

포스팅한 적 있는 에드워드 코크 대법원장이에요.

권리 청원을 주도하여 정치 발전에 기여한 분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1215년 6월 15일, 잉글랜드 존 왕의 전제적 실정에 반기를

든 귀족들이 역사상 최초로 왕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도록

왕으로 하여금 조인시킨 문서를 가리켜요.



귀족 평의회, Council of 25 Barons란 개념이 왕권을 제한할

기구로 등장하는데 영국식 내각제 의회 민주 정치의 원형임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겠고요. parliament의 전신이겠죠.



King John of England.. 영국사에서 지지리도 인기없는

군주의 대명사에요. 하필 선왕인 형 리처드 1세사자왕..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는지라 더더욱 비교되어 까이는 거죠.



사자심왕 리처드가 대중의 상상과는 달리 불어를 구사하고

내정에 소홀한 군주이긴 했어요.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보여준 전쟁 능력이 과장없이 진짜배기인 건 백퍼 옳아요.



오늘날 민족 국가의 관점만을 전격 적용하여 사자심왕 리처드를

평가할 순 없지만 당대에도 그렇고 이후 역사에서도 영국인들의

보편적인 애정을 듬뿍 받은 군주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말이죠.



잊을 만하면 줄기차게 영화화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쟎아요.

하필이면 즉위 직전에 자기 형과 신경전을 벌이던 사이인지라

존 왕이 더욱 밉살스러워 보이기도 하는 거고요.



실제 존 왕의 실정은 위태위태했어요. 이 당시만 해도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가 바다 건너 프랑스 카페 왕가 주변에 영지를

갖고 있어 우리가 아는 세력권 지도와는 많이 달랐는데요.

(덧붙여, 플랜태저넷 왕족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지금과

많이 다른 중세 영어는 농노들의 말이었다 하고요.)










원래 사자심왕이 프랑스 땅 영지를 갖고 있었는데 그의 라이벌이던

카페 왕족 필리프 2세가 공격하여 지휘관으로선 비교도 안 되게

능력없는 동생 존 왕이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요.



이를 탈환하기 위해 존 왕이 무리하게 군비를 충원해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세금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귀족과 자유민, 농노들이 똘똘 뭉쳐 반발한 것…

이 점이 대헌장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문건상의 정치적 자유가 주로 귀족에게 국한한 건 사실이지만

귀족들이 반발하는 데에 시티 오브 런던 길드 소속 자유민들과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노들이 적극적으로 합세했기에 헌장의

시대 정신이 시민의 총의를 담았다고 해석할 근거가 충분한 거고

무엇보다 막장 상황을 조장한 당사자가 존 왕 본인이었으니까요.



막대한 전비를 쏟아붓고 바다 건너서 십 년도 넘게 전쟁 노름에

빠졌지만 워낙 전략가로서 무능력한지라 허망하게 패배하고

돌아온 거에요. 거기다 귀족의 딸을 범하려던 적도 있다나요.

귀족들이 있는 대로 꼭지가 돌 수밖에요.



존 왕에게 그 어떤 억울한 상황 요인 하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딱히 쉴드 쳐줄 만한 꺼리도 없이 본인의 무능에다 통치자로서

기본 인성의 실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답니다.



귀족들이 급기야 거병하고 교활한 존 왕이 당시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 아첨하여 상황을 타개해보려 했지만

반란군이 런던 성곽을 포위하고 국왕파 내부 동조자를

포섭하는 등 상황은 이미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어요.



스티븐 랭턴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로 양쪽이 템즈 강 남쪽에

모였고 왕권 제한을 약속하는 문서에 존 왕이 조인해버리는

듣도 보도 못하던 초유의 사태로 발전하죠.



1215년 최초 조인시엔 서수로 조항 구분이 없었어요. 1759년

윌리엄 블랙스톤 대법관의 영국법 주해라는 이론서를 통해

총 63개조로 정리되었죠.



대부분의 조항은 이후 일반법으로 대체 입법이 이루어졌으니

역사적 의의 이외에 현대적 의미는 없는 편이긴 한데요.



제12조를 보면 ‘군역 대납금 등 모든 과세는 오직 (시민의) 총의에

의해서만 이를 부과할 수 있다’고 하여 1215년 상황을 직접 엿볼

수 있고요.



제39조가 ‘적법한 판결이나 국법에 의하지 않고 자유민을 체포하거나

구금하거나 그 법익을 강탈할 수 없다’고 규정하는데 현대에 와서도

재판 법원으로 유효한 세 가지 조항 중 하나입니다. 현대적 자유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법조문이자 법리임을 알 수 있겠죠.









이 때부터 영국의 민주 정치가 시작되어 의회가 짜잔 열리고…

식으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참 많은데, — 한국에서 영국사를

잘 안 가르치기도 하니까 — 사실 이 문서는 조인 직후부터 그

효력을 의심하고 1215년 해프닝은 사실상 상징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 진실에 더 부합한답니다.



당장 조인 직후 존 왕은 (치사하게도) 교황에게 쪼르르 달려가

헌장 무효화를 요청하고 교황이 이를 교서로 내려 내전이

벌어지거든요. 개싸움인 거죠.



이후 국왕들과 몇 차례에 걸쳐 개정도 하고 밀고 당기고 개싸움이

지속되는데 핵심은 이거에요. 왕은 안 지키려고 있는 고집 없는

고집 다 부리고, 귀족들은 틈날 때마다 문서 들이밀고…



그럼 오늘날 민주 정치의 효시 어쩌구…는 뭔데? 하실 텐데..

정작 옛날 옛적 무슨무슨 종이 쪼가리에 서명했네 어쨌네..

그런 게 중요할까요, 아니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민주 정치란, 문서나 법전의 종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 주권을 당연시하는 동시대 시민의 사회 의식시대

정신에서 나오는 힘, 바로 그것 아니겠어요?



대헌장이 역사적 명분과 권원으로서의 힘을 갖게 된 시기는

전술했듯이 16~18세기. 바야흐로 계몽 사상으로 무장한

자유 시민의 정치 의식이 성숙하여 그에 합당한 전례를

능동적으로 찾아 공부하던 그때인 거죠.



이때에야 비로소 대헌장에 헌법으로서의 권위가 생겨난 거에요.

엘리자베스 1세제임스 1세의 자랑스런 치세를 몸소 겪고

네덜란드와 맞장뜨며 강한 나라로 가는 발판을 자기 손으로

일구어 가던 잉글랜드 삶의 현장의 지성인과 신민들…



그들이 성숙한 체제를 만들어 후손에 물려줘야 한다는 자의식에

스스로 눈을 뜬 거에요. 물론 겪어야 했던 세월은 힘들었어요.

허나 권리 청원청교도 혁명잉글랜드 내전명예 혁명

권리 장전의 지난한 세월을 통째로 견뎌내고 더러는 고난에

희생되는 와중에 공동체가 지향할 가치를 찾아낸 거에요.



찾고 찾다 보니 자신들의 뿌리는… 아,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에

있었던 것이로구나. 몰랐었는데, 이젠 스스로 알게 된 거죠.



제헌절이 따로 없는 영국… 고작 달력 쪼가리에 기념일을 박는

것이 중요할까요. 박물관에 잠자던 대헌장의 거울에 비친 자신들

마음 속에 헌법의 정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은 거에요.



에드워드 코크, 올리버 크롬웰, 존 로크, 윌리엄 블랙스톤

이런 이름들이 중요하다기보다 이들 뒤에서 세상을 움직인

평범한 영국의 시민들에게 더 큰 헌사를 돌려야겠죠.



이런 중차대한 시대 정신을 담고 있기에 수많은 다른

나라에서도 대헌장을 법리적으로 계수했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연방 헌법UN 인권 선언



우리나라도 마그나 카르타란 말이 고유 명사 내지

관용적 수사로 발전한 것 보면 제도권에서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헌장의 현대적 이모저모를 다시 새기는 계기였길 빌고…

대영 도서관이 마련한 귀여운 동영상을 보며 즐겨봐요.









그리고 리처드 1세 얘기 나온 김에, 역대 영화화 사례 중

사자왕을 가장 포스 넘치게 묘사한 히트작을 즐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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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ward Coke: A True Democratic Judiciary

Who Enacted the Petition of Right, 17th Century




에드워드 코크라는 영국인이 있었습니다.

(원래 발음은 ‘쿠크’에 가깝다고 하네요)

500년 전에 활동하시던 판사이신데요.


이 분의 행적을 보면 요즘 사법 거래 파동과

여러 모로 비교를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네요.


1552년에 태어나 1634년에 돌아가셨으니

법관으로서는 주로 엘리자베스 1세제임스 1세

시대에 활동했고 말기에 찰스 1세를 거친 거죠.







Rule of Law라고 ‘법의 지배’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 같은 대륙법 국가에서는 법치주의에 대응되는데

보통법 국가들 법률의 기초적 구성 원리입니다.


(물론 법치주의와 법의 지배는 정의에 경미한 차이가 있어요.

법치주의는 보통 ‘모든 행위는 법의 규정에 의해 해야 한다’고

법의 지배는 ‘개인과 사회를 규율하는 법의 권위와 정통성’..

살짝 뉘앙스가 다르죠? 그냥 그런가보다 하시고.)


영국이나 미국 같은 보통법 국가에서 법의 지배 원리를

바로 세우고 시대에 맞게 해석하기 위해 안 보이는 데서

애쓰신 정말 위대한 법관이나 법학자들이 많습니다.


에드워드 코크가 그런 분 중의 하나이죠.

크게 두 가지 공적으로 유명하신 분이에요.


첫째, 본햄 판결을 통해 사법 심사의 개념을 개척하셨으며,

둘째, 1628년 권리 청원의 조문을 기초하셨답니다.


사법 심사, 즉 judicial review란 권력 분립 구도에서

행정부의 행정 행위나 입법부가 제정한 법률이 헌법에

합치하는가를 심사하는 사법부의 견제 권한을 뜻합니다.


뭔가 비슷한 게 떠오르죠? 예, 우리 같은 대륙법 국가에서

헌법 재판이라고 부르는 절차가 곧 사법 심사입니다.


우리는 헌법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이 독립해서 존재합니다.

이건 독일의 헌법 재판소나 프랑스의 헌법 평의회를 본따서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독립 재판소가 아니라 최고 법원, 즉 대법원이 헌법 재판을

담당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미국의 연방 대법원이 그러하죠.


역사상 사법 심사는 행정부 견제 이전에 입법부의 입법권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먼저 발달했더랬습니다.


보통법 국가를 예로 들어 미국에서는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1801)이 사법 심사의 첫 판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헌법학 교과서에서도 자주 소개된 적 있죠?


영국의 사법 심사는 역사가 훨씬 길어 200년을 앞서가요.

1610년의 ‘닥터 본햄’ 사건이 첫번째 사례이고 이 판결을

내린 선구적 법관이 바로 에드워드 코크 경이었어요.


본햄 사건을 짧게 설명하면 의료 면허하고 관련이 있어요.

의회가 입법 절차를 통해 잉글랜드 내과의사 협회를

출범시켰는데 이 단체가 갑질이 좀 심했습니다.


전국의 내과의사 회원 숫자를 딱 24명으로 제한해 놓고

결원이 생기지 않는 한 대기 번호만 줄 뿐 절대로 면허를

허용하지 않았어요.


그냥 면허증 교부만 안 하는 수준이면 다행일텐데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은 심지어 구속하고 벌금을 때릴

수 있는 권한까지 행사한 거에요.


토마스 본햄이라는 용감한 외과의사가 여기에 반기를 들고

자신은 외과의사 면허도 있는 사람이니 내과의 면허 역시

확대해야 한다고 소송을 제기했죠.


(당시엔 외과의사와 이발사가 동종 업종으로 분류되고

내과의사는 이보다 상류 계급으로 거들먹거리던 시절ㅠ)


내과 협회는 이에 반발하여 본햄에 징역형을 때리고(!)

벌금을 대폭 인상하여 부과하는 등 갖가지 봉건적

패악질을 서슴지 않았는데…


에드워드 코크 판사는 애초에 협회에 이런 관습적 전권을

부여한 의회의 제정 법률 자체가 자유민의 천부인권을

침해하고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에 위배된다 판결했죠.


그래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의회의 입법권을

사법부 재판관이 견제하는 사례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 후 이러한 적극적 해석의 정신이 미국에도 영향을 미쳐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을 맡은 존 마샬 연방 대법원장이

건국 이후 최초의 사법 심사를 단행합니다.


에드워드 코크 경은 이후에도 존경받는 법관으로 남아

1628년에 왕당파와 의회파가 한 판 붙은 역사의 현장,

권리 청원의 조문을 기초한 판사로 한 몫을 톡톡히 합니다.


보셨죠? 애초에 사법 심사니 헌법 재판이니 하는 것들은

법관으로 하여금 정치적 이해 관계에 휘둘리지 말고

의회와 정부를 견제하라고 개발한 제도입니다.


썩은 대통령의 정치적 입김에 맞춰 판결을 거래하라고

만들어준 권한이 아니란 말입니다.


통치자의 똥구녘이나 핥으라고 판결을 거래하는 판사

나부랭이들이 사법부의 독립 씩이나 외친다고요?

재판관의 독립이라고라고요…


당신들 죽어서 에드워드 코크 같은 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나 있겠습니까, 판사님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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