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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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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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2. 2018.11.28
    프레디 머큐리 0 - 보랩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

1946년에 태어나 91년, 겨우 마흔 다섯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 하신 이 분은 20세기 음악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대중 예술가이다.






 (Montreux, Switzerland)




디지털 드림 도어 닷컴이라는 대중 문화 랭킹 전문

사이트가 있는데, 남성 락 보컬리스트 부문 랭킹에서

머큐리는 항상 1위였다. 본 블로거 기억으로 이 랭킹이

십여 년에 이른 것 같은데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같은 사이트의 락 보컬 퍼포먼스 부문에서도

보헤미안 랩소디가 현재 1위이다. 락 에픽, 곧 서사적 락

음악곡 부문에서도 이 노랜 1위. 락 앤썸이라고, 공연에서

떼창 유도할 수 있는 상징적 트랙에선 위윌락유가 1위.

락 밴드 최고의 프론트맨 랭킹에서 그는 현재 5위이다.






생소한 사이트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좀 더 미국 친화적인

롤링 스톤 매거진이 있다. 약 10년 주기로 업뎃하는 이곳의

랭킹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가수들 100명 중 그가

18위를 차지한 바 있다. 최근 2008년 집계 결과였다.

18위가 별 건 아니네, 하시는 분들은 그 위쪽 순위에

어떤 분들이 있는지는 보고 얘기했으면 한다.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freddie-mercury-5-225069/



대략만 읊어도 이 정도. 이 분이 왜 위대한 락 보컬리스트로

불리우는지, 누구나 다 깨닫고 있지만 말로 일일히 설명하기도

참 쉽지 않다. 이처럼 전설적인 아티스트에 대한 포스팅이

망설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겨우 이 정도 필력으로 제대로

표현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그는 오늘날 탄자니아 영토에 속한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파르시는 페르시아계 조로아스터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고

이후 여기서 쫓겨나 유년 시절을 인도에서 성장하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와서야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흔하디 흔한 기독교계 앵글로 색슨이 주류인 영미권 음악계

전체를 볼 때 참 특이한 배경이 아닐 수 없고, 그가 보여준

독창적 캐릭터와도 깊은 연관이 있겠다 싶다.



브라이언 메이로저 테일러가 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마일에서 먼저 합을 맞추고 있었을 때 그는 약간 로디

비슷하게 곁을 맴돌다가 두 사람에게 합류한다. 1970년.

밴드 이름을 퀸 Queen으로 바꾸었고 이는 누가 봐도

머큐리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queen에는 속어로

퀴어의 의미가 숨어 있으니..)



밴드 이름과 같은 동명의 데뷔 앨범은 73년에 가서야 늦게

낼 수 있었고, 녹음 두어 해 전 전기공학 전공으로 넷 중 가장

어린 존 디콘이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아는 네 명의

전설적 진용이 다 갖춰진 것이 이 무렵인 셈. 1973년 경.

이듬해 이들은 Queen II 앨범을 발매했다.



 (Queen)




이렇듯 1집과 2집에서 Keep Yourself Alive, Liar,

Seven Seas of Rhye 등 오늘날까지 알려졌고 밴드

역시 콘서트에서 즐겨 연주한 트랙들이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성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신디를

쓰지 않고 보컬이 피아노를 겸하는 피아노 락앤롤 정도로

박한 평가를 받았음이 사실이다.



Sheer Heart Attack 앨범에서 Killer Queen이란 대박

싱글이 나오고 나서야 밴드는 세계구급으로 올라선다. 이

곡은 머큐리가 작곡했다. 본 앨범에 이르러서야 클래식과

락앤롤에 바탕을 둔 밴드 음악성의 아이덴티티가 이제

막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4년..



아울러 Brighton Rock, Now I'm Here, In the Lap of

the Gods, Stone Cold Crazy 등 유명한 트랙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브라이튼 락에서 선보이는 딜레이 테크닉은

그대로 메이의 전매특허가 되었고, 스톤 콜드 크레이지

쓰래쉬한 파괴성은 이후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Sheer Heart Attack)



 (A Night at the Opera)




스튜디오와의 불화로 밴드 멤버들은 여전히 곤궁했고 돈

한 푼 손에 쥐는 일 없었다. 절치부심하여 75년 넉 달 동안

녹음실에 틀어박혔고 창작적 전성기의 시발점이 된 명반

A Night at the Opera를 같은 해에 발매한다. 그렇.

Bohemian Rhapsody가 실린 그 앨범이다.



보랩으로 불린 트랙은 머큐리 온전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Love of My Life, You're My Best

Friend, God Save the Queen, '39, I'm in Love with

My Car 등 명곡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평가는 보랩

곡에 주목할 수밖에 없음을 멤버 모두가 인정했다고 한다.



('Bohemian Rhapsody'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Love of My Life'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A Day at the Races)




이듬해 1976년엔 A Day at the Races 앨범이 나와

Somebody to Love를 필두로 Tie Your Mother Down,

Good Old-Fashioned Lover Boy 등 트랙을 쏟아냈다.

전성기가 이어진 것이고 본작은 여러 모로 전작의 동

반복 같은 위치였지만 팬덤은 신경쓰지 않았다.

(4집5집의 트랙 구성은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반면 언론과 평단은 여전히 냉담하고 냉소적이었다.

은, 대체로 평론가의 칭찬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



('Somebody to Love' from A Day at the Races, 1976)




 (News of the World)




77년 News of the World 역시 창작적 상승가의 연장선에

있던 명반일 거다. 드디어 메이We Will Rock You

선보였고 We Are the Champions는 이 곡의 제2부인

것 마냥 항상 어서 라디오 전파를 타곤 했다. Sheer

Heart Attack, Spread Your Wings 등 정통 락

트랙들도 매력이 있다.



위윌락유의 가사는 의외로 음악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훌리건 패싸움 스토리에 더 가깝다. '락유~'는 문자 그대로

'부셔버릴거야' 정도의 뉘앙스란 뜻. 원곡이 재해석의 여지가

커서 라이브에서 다양한 버젼을 골라볼 수 있는 재미를 주는

곡이기도 하다. 79년 발매된 Live Killers 속 패스트 버젼이

가장 인기가 있는 편인 것 같아 아래에 붙인다.



 (Live Killers)



('We Will Rock You' from News of the World, 1977)



('We Will Rock You' from Live Killers, 1979)




 (Jazz)




78년 7집 Jazz에 와서 연거푸 세 장의 앨범으로 달려온 음악적

지향성이 약간 지친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을 주게 된다. 여러 모로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약간 동떨어진 실험성이 돋보인 역작.

머큐리민족 정체성을 떠올리는 듯한 Mustapha부터 상당히

이채롭고 Fat Bottomed Girls에선 로커빌리의 영향을 읽을

수 있으며 Bicycle Race말랑말랑하고 벌레스크스러운

것이 누가 봐도 머큐리가 쓴 곡임을 알 수 있겠다.



무엇보다 본작엔 Don't Stop Me Now가 있다. 제임스 브라운

인가 싶은 정도의 섹드립도 등장하고 엄청나게 흥겨운 이 트랙은

진성 팬덤이 위윌락유보다도 더 앤썸처럼 친애해온 곡이기도...



단, 머큐리가 이슬람교 신자일 거란 오해는 금물이다. 조로아스터

교는 이슬람과 관련 없다. 그냥 이런저런 상업적 요소를 끌어들여

재미있는 노래 하나 만든 거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서사

사회성은 딱 고만고만하게 적당한 정도만 구사하는 수준이다.



('Mustapha' from Jazz, 1978)



('Don't Stop Me Now' from Jazz, 1978)




 (The Game)




Jazz에서 약간 주춤하나 싶었던 그들은 The Game 앨범으로

다시 한 번 활짝 만개한다. 평단과의 불편한 관계를 전술했는데

하나 더, 이상하게 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

당대의 세계적인 팬덤은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전 세계라고 보면

대략 옳다. 특히 유럽, 남미, 일본은 그들의 밥줄이라고나 할까.



80년의 이 앨범 와서 결국 그들은 빌보드 앨범 및 싱글 차트 양쪽서

처음으로 1위를 찍는다. 엘비스 프레슬리 캐릭터 모방으로 유명한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은 그들의 유일한 1위 싱글이다.

Another One Bites the Dust는 무려 마이클 잭슨이 일찌감치

히트를 예감한 곡이다. 꽉찬 funky 비트에 그냥 지나칠 리 없었겠지.



Another One~ 가사 역시 동네 양아치들 패싸움 이야기이다.

'(싸우다) 또 하나 뒈졌군' 정도의 뉘앙스라고. 사회 비판적 가사가

비교적 많지 않은 그들에겐 이런 가사 스토리가 의외로 많다.

또한 방식으로 디스코를 받아들인 증거이기도 하다.



Play the GameSave Me 역시 들어볼 만한 트랙들이다.

키보디스트 아닌 사람들은 별 관심 없겠지만 의 디스코그래피

중 처음으로 신디사이저가 등장한 앨범이기도 하다. Oberheim

OB-X란 명기이다.


https://queenvinyls.com/articles/from-harspichord-to-synthesizer-and-beyond-an-introduction-to-queen-organology/



(Oberheim OB-X)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from the Game, 1980)



('Another One Bites the Dust' from the Game, 1980)




(Hot Space)




81년엔 Flash Gordon이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만든다.

여기서의 플래쉬는 DC의 그 히어로는 아니다. 한국에 개봉한

적이 없는 SF물이다.



이듬해 Hot Space 앨범을 내는데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다

안 좋아 이후 2~3년간 멤버들이 붕뜬 상태로 솔로 활동에나

매진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데이빗 보위와 함께 한

Under Pressure는 여전히 훌륭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사회성 짙은 가사로 영국병 걸린 경제 상황을 위무한

걸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총리는 대처..ㅠ)



('Under Pressure' from Hot Space, 1982)




 (The Works)




영화에서 나타났듯이 밴드의 침체기는 결국 라이브 에이드

가서야 부활의 동력을 얻게 된다. 그 전 82년 5월에서 84년 2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메이테일러디콘 솔로 작업을 열심히들

하셨다. 정작 머큐리는 다음 앨범이 나오고 난 후에 자신의 앨범을

냈다. 즉,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과 다르다는 말.



라이브 에이드 전인 84년에 비교적 성과가 좋았던 The Works

앨범을 낸다. 신디사이저를 광폭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입증한

본작에서 Radio Ga Ga, It's a Hard Life, Hammer to Fall

그리고 I Want to Break Free 등 성공작이 쏟아져 나왔다.



멤버들을 전부 여장(!)시켜 찍은 ~Break Free의 뮤비는 매우

유명했고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밴드의 곡 중 흔치 않게

신디사이저 솔로가 등장하여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프레드

맨델이란 세션이 연주했다고 한다. Linn LM-1이란 드럼머신

사용도 괜찮았다.



레디오가가보코더로는 77년에 출시됐던 EMS 2000

쓰였단다. (희한하게도 은, 아날로그 신디 전성기인 70년대엔

단 한 번도 무그를 쓴 적이 없다. 모든 이펙트는 기타

몰아주려 했다나 뭐래나.)



(Linn LM-1)



(EMS Vocoder 2000)



('Radio Ga Ga' from the Works, 1984)



('I Want to Break Free' from the Works, 1984)

*다소 민망한 일본 라이브




(Mr. Bad Guy)




라이브 에이드에서 완전히 부활한 . 하지만 머큐리 자신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멤버들에게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사망이 거의

임박한 훨씬 뒤였으나 이미 눈치들은 다 채고 있었다고.



85년엔 이미 예정되어 있던 첫 솔로 앨범 Mr. Bad Guy

발매한다. 그의 솔로 앨범은 두 장 뿐이고 두번째 앨범이 한창

오페라에 탐닉한 말년의 특이성을 보여준다고 본다면, 진정

대중적인 음악 앨범은 이것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신디사이저와 뉴웨이브 요소를 팍팍 쓴 미래 지향적 레트로

사운드의 본작은 마지막 전성기를 달리던 머큐리를 느껴볼

만한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다.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Living on My Own

양질의 곡들을 수록하였다. 메이드 인 헤븐은 추후 밴드가

재녹음하여 수록한 그 곡의 원곡이다.



('I Was Born to Love You' from Mr. Bad Guy, 1985)




 (A Kind of Magic)




86년에 그들은 앨범 A Kind of Magic으로 돌아온다.
웸블리 이후 첫 공식작이자 발매 기념 월드 투어를 단행한
마지막 앨범이다. 또한 러셀 멀케이 감독의 SF액션 영화
하이랜더의 비공식 OST이기도 하다. (하이랜더 시리즈는
1편까진 괜찮게 봐줄 만하다.)


A Kind of Magic, One Vision, Friends Will Be Friends,
Who Wants to Live Forever, One Year of Love  히트
싱글을 배출했다. 특히 영화의 스토리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 머큐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Who Wants~를 들으면 괜시리 숙연해지게 마련이다.


('A Kind of Magic' from eponymous album, 1986)



('Who Wants to Live Forever' from A Kind of Magic, 1986)




대략 이 무렵부터 이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머큐리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멤버들과의 녹음이나 평소 받아오던
오페라 및 발레 레슨 등 일상적인 예술 작업에는 죽는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임했다. 메이도 부부간 사생활에 문제가 생겨 여러
모로 밴드가 앨범 작업에 매진하기는 힘든 때였다고..


86년에는 영국의 프로듀서 데이브 클락의 뮤지컬 컨셉트 앨범
Time에 참여하여 동명의 트랙을 싱글로 발매하여 호평받았다.
87년엔 55년 발표된 플래터스의 R&B곡 The Great Pretender
리메이크 발표하여 원곡보다 훌륭한 해석이란 칭찬도 받게 된다.
(전에 한 번 썼듯이 이 두 곡은 그의 인생작이라고 생각한다.)


88년에 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대비하여 스페인 최고의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와 일종의 팝페라 앨범인 Barcelona
발표한다. 이때 함께 작업하던 사람들이 성악과 오페라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에 놀랐다는 풍문도 남아 있다.


그러던 와중 89년이 되어 The Miracle 앨범을 출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출시된 본작의 완성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The Miracle, I Want It All, The Invisible Man, Breakthru
등 얼핏 들어도 생각나는 좋은 트랙들이 성공을 거두었다. 아래에
아원잇올의 뮤비, 잠깐만 봐도 그의 모습이 초췌해보여 착잡하다..


 (The Miracle)



('The Great Pretender', 1987)

*독일 방송에 출연하여 립싱크하시는...



('I Want It All' from the Miracle, 1989)




 (Innuendo)




거의 말년이 되어간 그의 삶은 조용하게 음악 작업하는 나날들로
채워진 듯하다. 마지막 연인이 된 짐 허튼과 함께. 91년에 드디어
그의 생전 마지막 앨범 Innuendo가 죽기 아홉 달 전에 발표된다.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고 사라져가는 촛불처럼 머큐리
멤버들의 작업물은 놀라웠다.


타이틀 트랙 Innuendo는 80년대 내내 선보인 머큐리의 연극적
퍼포먼스를 음악으로 표현한 듯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였으며
예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하우가 특별히 초빙되어 어쿠스틱 기타
협연을 펼쳐 보였다. I'm Going Slightly Mad, Headlong,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 등 한 곡 한 곡이 예술가의
인생을 통째로 정리하는 듯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절정감은 The Show Must Go On에서 느낄 수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 말고 이런 주제를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보컬리스트가
과연 또 있겠는가, 탄식하는 팬 투성이였다. (단, 작곡은 메이가..)
하지만, 롤링 스톤 지는 이번에도 더럽게 까댔다.


('Innuendo' from eponymous album, 1991)



('The Show Must Go On' from Innuendo, 1991)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사른지 아홉 달 후에 그는 숨을 거둔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그를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이듬해

92년 4월 20일에 대대적 규모의 헌정 공연 The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가 개최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 음악 소비자가 팬덤화하는 과정에서 처음

접했을 법한 외국의 공연 문화였을 거다. 당시 영미권 음악계를

지배했던 주류 아티스트들이 쪽팔림도 무릅쓰고 머큐리의 음악을

따라 부르며 비교질 당하는 영예를 기꺼이 마다 하지 않았다. 한

음악가가 또 다른 음악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인 셈.



엘튼 존, 로버트 플랜트, 데이빗 보위, 로저 달트리, 토니 아이오미,

애니 레녹스, 폴 영건즈 앤 로지스, 데프 레파드, 메탈리카, 익스트림

등이 여기에 동참한 당시 탑클래스의 헤드라이너들. 지금 봐도 이런

사람들 어떻게 다시 모을까 싶다.



모두 쪽팔림을 감당하며 어려운 원곡을 쩔쩔 매고 소화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는데, 단 한 사람만은 왠지 '어쩌면 원곡만큼 매력적일지도'

하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대 최고의 블루 아이드 소울 보컬리스트

조지 마이클이었고 그가 의 세 멤버 및 합창단과 함께 한

Somebody to Love는 그해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



이 공연 두 달 전에는 음악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 웨인스월드

개봉해 Bohemian Rhapsody를 삽입했고 영화 속 헤드뱅잉

인기 덕분에 원곡을 역주행시켜 빌보드 핫100 2위에 재진입시킨

엄청난 흥행몰이를 가져오기도 했다.





('Somebody to Love' by Queen ft. George Michael, 1992)




 (Made in Heaven)




머큐리의 목소리를 담은 마지막 정규 앨범 Made in Heaven

95년에 발매된다. 그의 솔로 앨범에 실렸던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등에 멤버들이 어레인지를 추가해

포함시켰고 Too Much Love Will Kill You, Heaven for

Everyone 같은 새로운 트랙과 생전 마지막 육성 녹음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헌정 앨범의 연장선이었다.



메이가 다른 작곡가들과 만든 Too Much Love~는 밴드의

앨범에 수록된 것과 메이의 솔로 앨범에 실린 것, 두 가지

버젼이 존재한다. 테일러는 그렇다 치고 메이도 참 노래 잘

하는구나, 하는 점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킨 곡이었다.



('Too Much Love Will Kill You' from Made in Heaven, 1995)



('Too Much Love Will Kill You' by Brian May, 1995)




97년에 존 디콘은 영원히 음악계에서 은퇴한다. 본래부터

내성적이고 머큐리의 카리스마적 퍼포먼스를 존경했던

밴드의 막내였기에 남은 두 사람도 존중한 결정이었다.

04년부터 09년까지 나머지 두 사람은 의 이름으로 역시

전설적 보컬리스트인 폴 로저스와 투어를 돌기도 했다.



70년대 전설적 블루스락 밴드 프리배드 컴퍼니의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던 폴 로저스. 뭔가 새로운 창작 활동이 생기나

기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저 예전 곡들을 불러주는 것에

그쳤고 반응도 아주 뜨거웠다고 보기는 애매했다고 본다.



다만 생전에 머큐리가 보여주고 가지 못하고 떠난 몇몇

트랙의 라이브를 구경할 수 있었다는 보람은 있었다고.

아래 아원잇올처럼. 이들 세 사람은 이 포맷으로 08년에

앨범도 한 장 냈지만 반응은 뜨뜨미지근한 수준에 그쳤다.






폴 로저스와의 작업을 통해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메이테일러 두 사람은 신임 보컬리스트

수소문 작업을 벌였고 11년부터 아메리칸 아이돌 스타로

널리 알려진 애덤 램버트를 리투르트하여 투어 멤버로

기용하고 있다. (이 친구는 영화에도 카메오 등장했지.)



워낙 나이 차도 있고 램버트의 젊디 젊은 기량에서 오는

안정감이나 탄탄한 보컬 실력 덕도 있어, 대체로 기존

팬덤은 이렇게나마 들을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는 듯하다......만, 누구도 프레디

대체할 수 없다는 여론도 만만치는 않다.



(왜 꼭 대체 보컬을 계속 구해야 하냐고? 그냥 그만 두면

안 되냐고? 이 분들의 직업이 계속 연주하고 투어를 도는

밴드 뮤지션인데 그렇게 반응을 보이면 좀 섭섭할지도...

어찌 되었든 지구상 어딘가에서 의 음악이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연주되고 있다면 만족스러운 일 아닐까.)



(하지만 비교가 되는 건 사실...)




프레디 머큐리의 너무 이른 죽음은 30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당시 참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민

2세대로서 사회 소수 계층의 설움을 동병상련했던 그의

존재감이나 이에 영향받아 형성된 예술적 자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후였던 것 같다.



은, 참 미국 시장 주류와 인연이 없었다. 언론으로부터의

야박한 평가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은 이른바 그래스루츠라고 하는 블루스 계열

코드에 있다. 이들 음악은 상대적으로 블루스의 영향이

약하다. 재즈나 컨트리, 포크와도 멀다.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겠나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루츠가 채우지 않는 빈 자리를 머큐리디콘 멤버들이 클래식,

펑크funk, 뉴웨이브 등으로 메꾸어 드라마틱한 표현성을 중시한

작품을 만들어갔다. 미국에선 절대로 먹히지 못한 창작 문법이다.

대신 미국을 제외한 세상은 항상 프레디를 연호했다. 전 세계

판매고 2억 장이 어디 그냥 나올 기록이겠는가.



 (The Great Pretender, single)




포스팅의 주인공인 머큐리가 피아니스트이고 일렉트릭 피아노

싫어한 반면 신디사이저는 꽤 다룬 성향인지라 상세히 들고 파진

못했는데, 사실 사운드의 핵심적 매력은 메이가 연주한 특별한

일렉트릭 기타 레드 스페셜에 있다. Danelectro Shorthorn

비슷하게 생긴 기타는 참 특별한 것이, 메이가 음악을 시작할

무렵 무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악기이기 때문이다.



http://www.queenconcerts.com/instruments/piano.html



독특한 보드와 픽업 디자인을 거친 탓인지 다른 기타리스트

누구보다 그의 톤은 특별하고 이채로워 음색 만으로도 그가

연주한 것임을 구분할 수 있다. 또한 탈 블루스 성향이면서도

클래식하고 글램스러운 의 사운드에 여지없이 어울리는

톤이기도 하다. 세간의 박한 평가의 이면에 뭔가 이질적인

기타 톤까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일까.



(Steinway Concert Grand)



(Red Special)






첫 히트작 킬러퀸이나 바이시클 레이스처럼 머큐리가 작곡한

트랙들을 보면 수십 년 전 벌레스크 쇼뮤직 홀 사운드를 듣는

홍키통크 피아노가 중심이 된 살롱 음악이 연상된다. 아마도

그가 겪은 유년 시절의 추억과 연관이 있을 터이다. 살롱의 낡은

피아노에 맞추어 화려한 가운을 흐느적거리며 끈적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모습. 그가 평생 꿈꾼 음악적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굿올패션 러버보이 같은 트랙이야말로 전성기
프레디 머큐리의 섬세한 음악성을 대변할 만한 곡인 듯싶다.
개인적으로 최애하는 곡이기도 하고. 아껴 두었다가 링크를
걸며, 끝으로 그의 열정적 예술혼에 헌사를 바친다. 아름다운
음악을 남겨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제한 공으로, 저 세상에선
멋쟁이 차림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행복하게 노래하고 계시.


('Good Old-Fashioned Lover Boy' from A Day at the Race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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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록 불사라 포스팅은 정말 망설여 왔는데

보랩 영화를 봐버렸다. 보지 말걸. 안 할 수 없네.

여기선 영화 얘기만 하고 본격 보컬 스토리는

나중에 할 때가 오겠지..



매우 큰 히트를 치고 있음은 자명하지만

해외 평이 정확해 보이네. 딱 반쪽짜리 작품이다.

아울러 국내 영화 평론가들의 음악적 소양에

다시 한번 절망하기도 하며...



오랜 팬임을 자처하며 평가질 해대는 꼰대

어디 본 블로거 혼자이겠냐마는... 그래도 할 말은

혀야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 터인데.





반쪽 짜리가 정말 딱 적당한 말이네.

전기 영화로서의 함량, 음악 영화로서의 완성도,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해석.. 뭐 여러 가지 관점

다 따져도 반쪽만 익히다 만 것임에 틀림 없겠으나..



특히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한 가지는 꼭

짚고 싶을 따름이오니.. 라미 말렉의 연기를 100%

극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100% 싱크로율을 자랑한다고 평가받는 역대 연기를

꼽아볼 수 있다. 링컨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대처의

메릴 스트립이 최근 대표적 사례이겠고 음악가를

다룬 예로는 톰 헐스가 여전히 독보적일 것이다.

세월이 30년 넘게 흘렀음에도...



이쯤 되면 싱크로율이란 개념에 대해 현대의 대중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깊게 고찰해볼 만하다. 단순히

똑같이 재연한다면 그것이 100% 싱크로일까?








현대인들이 링컨의 생전 모습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과연 우리가 목격한 명연기가 싱크로가

맞기는 한 건지 되짚어볼 수 있다. 결국 단순한 재연이란

개념이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있지 않나.



재연이라면 대상의 외양을 피상적으로 구현해내는 데

집착한다는 말이리라. 명연기라고 기억하는 링컨이나

대처는 외양 이전에 인물의 심리와 철학을 분석하여

표현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었음을 이해하시라.



적어도 현재까지 외신으로 접한 수준의 보도로 보면

라미 말렉의 곁은 무브먼트 코치가 지켜온 듯하다.

공연 중 보여준 프레디의 스테이지 모션이 너무

독창적이기에 나온 결정인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결국 거기까지만 보여주고 용두사미처럼

끝나 버린 것 아닌가 싶다. 몸짓을 복사하는 것까지만.

프레디란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 약간 패션모델 비슷하

몸의 선을 중시하는 무브먼트, 그것이 다는 아니지 않은가.



프레디의 정체성과 카리스마, 그리고 그것과 복잡하게

한몸처럼 엮여 있는 컴플렉스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페르시아 민족 계열 이민자 출신의 영국 아웃사이더란 것이

하나, 또 하나는 다들 알다시피 바이 양성애자란 것이다.






그에게 어린 시절의 컴플렉스를 선사한 이국적 두상과

용모는 사실 그의 민족 정체성인 파르시 종족의 특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페르시아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이 청소년기

억압적 가치관 형성에 기여했을 터이고.



여기에다가 유년기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 자각해온,

뭔가 다른 성적 정체성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킨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완벽한 재현으로 해석되는

(아버지를 죽였다고 어머니께 고백하는 첫 소절..)

보랩의 가사와 프레디의 철학은 이렇게 형성된 것.



바이 영국 이민자라는 아이덴티티가 곧 프레디인 셈.

단순 무브먼트에 치중한 듯한 디렉션이 뭔가 의아하고

쉽게 와닿지 않는다고 느끼는 요점이 이것이다.





무브먼트 자체도 그렇다. 프레디의 독창적 몸짓을

응원단 치어리딩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탄탄한 발레 기본기에서 나온 거란 점...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라미의 저 액션이 그냥 투박한 치어리딩에서 온 것인가

발레의 기본기에서 나온 것인가, 되게 고민고민하면서

본 장면이 사실 많았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꽤 의아-궁금했음이 솔직한 심정..






흔히 프레디의 배나온 중년 콧수염 아저씨 시절로

기억되는 80년대 초중반 몸매도 발레 레슨에서 나온

산물임을 상기한다면, 그의 무브먼트에 대해 깊이를

갖고 접근한 것인지 한번쯤 회의적인 시각을 들이댈

수밖에 없을 터이다.



(80년대의 프레디는 발레와 오페라 레슨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많은 사람이 모르지만.

그만큼 감각을 갈고 닦기 위해 노력했다.)



아래는 역대 가장 기이한 코스튬 사이로 비집고 나온

프레디의 육덕진 몸매를 적나라하게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 뮤직 비디오.. 1984년 The Works 앨범에서..






프레디는 사실 원래부터 육체의 곡선을 드러내는데

실로 열성적인 집착을 보여준 아티스트인 것이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탐미적 기호랄까.



또 하나의 기벽을 폭발시킨 뮤직 비디오

(무려 멤버 전원의 성별을 역전시킨..)

I Want to Break Free.. 같은 앨범..






라미와 프레디의 체형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살짝 통통한 80년대 몸매로 세밀하게

다잡고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크다.



80년대는 프레디의 인생에서 참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10년이었고 처음으로

에이즈 감염 사실을 확인하였기에 더더욱 섹스와

연애와 생에 집착한 복잡한 시절이었으니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라미의 목소리이다.

물론 말할 때 목소리. (극중 노래 목소리의 99%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레디 본인의 아카이브와

마크 마텔을 적정 배합한 것이다.)



쉰 듯한 반가성을 많이 섞은 톤으로 해석의 기준을

잡았는데 이걸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해석이 뭐지? 성적으로 뭔가 모호한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캐릭터란 느낌을 주고 싶었나?



(상당히 남아 있는 프레디의 평소 대화 녹화분을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말할 때 목소리도

노래와 비슷하게 명료하고 또렷한 질감이었고

영화처럼 거칠고 투박한 팀버는 아니었다고.)







그런데 실제 프레디가 생의 절반을 넘기고도 아직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사람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확고부동한 주관을 가진

살짝 고집불통에 가까웠다. 패션이나 무용계의

까다로운 예술가 스테레오타입에 더 가까웠지..



물론 그의 삶은 섹스와 파티로 가득 차 있었다.

프레디의 실제 삶을 제대로 묘사한다면 여지없이

X등급을 받을 거라고 멤버들이 전했을 정도이니.

(단, 마약과의 연관성은 크지 않은 것 같고

그의 중독성은 술과 담배 쪽이었다고... 특히

담배는ㅠ.. 그의 대부분 삑사리가 흡연 때문..)



즉, 고민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당당한 바이 섹슈얼의 사생활을 산 사람이었다.

라미의 목소리와 해석에, 불안한 미래를 꿈꾼

20대 시절 연기를 빼고 절반 밖에 동의가 안

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http://ultimateclassicrock.com/bohemian-rhapsody-movie-hetwashing/




이쯤 되면 라미의 LGBT 해석 전체에 살짝 의문을

품게 된다. 생의 전반에 걸쳐 자신의 게이 라이프에

고민하는 예술가의 스테레오타입이라면 프레디보다

차이코프스키의 삶에 더 가까운 듯한데... 이러면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된 것 아닌감...



더구나 게이 브라이언 싱어가 이런 디렉션을 줬다고..?

이 부분에서 더더욱 의뭉스럽네. 싱어가 중간에 하차한

이유가 대략 어디서 발화했는지도 감이 오고.






브라이언 메이로저 테일러 같은 분은 연예계에서

거물이기에 동료 전기 영화의 묘사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했을 것 같고 아마도 싱어 같은 사람도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여러 번 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왜.. 예전부터 메이와 테일러는 프레디의 인생을

실제에 가깝도록 19금으로 묘사하는데 반대하지

않았던가.. 이런 의견을 갖고 있는 원로들이 이런

저런 의견으로 도움이랍시고 던지는 상황이라면,

방향 잡기가 참 혼란스러웠을 터...






그렇지.. 프레디는 엄청 '척' 하고 산 사람이다.

바이가 아닌 척, 이민 2세대가 아닌 척, 즉 진퉁

영국인인 척.. 사실 모두 알면서 쉬쉬한 거지만.

 노래, 그래서 나름 프레디의 인생곡이다.



아래는 프레디 솔로 프로젝트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타임.. 의외로 많이들 모르셔서.






네네... 길게 썼는데 두세 줄 요약..

라미 연기 이해 안 되고 영화는 반쪽 완성도.

연예인도 나이 들면 꼰대가 되야 하나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줘 감사해요.



역사상 전무후무한 보컬리스트라서

보컬 이야기하려면 큰 각오가 필요하다.

나중에 하자. 원 참, 황망스럽기는.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html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fe-rr.html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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