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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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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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Politics from Tudor to Stuart ..

Until Ended Up with the Petition of Right






권리를 청원하다, Petition of Right..

누군가의 권리에 관해 간언하는 주청을 드린다는 뉘앙스에요.



그 누군가란 자유민 또는 자연인을 가리킨다고 하겠고

왕께 주청 드렸다는 건데 그 왕은 찰스 1세였어요.



찰스 1세를 거론하려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6~17세기 잉글랜드 왕조 역사를 짚지 않을 수 없어요.



플랜태저넷, 튜더, 스튜어트…

영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인데, 이거 뭔가요?



왕가 가문의 이름이라고들 아실 텐데 사람 이름의 성,

last name인 건 아시나요들. house of Tudor.. 이러면

Yi dynasty.. 이렇게 부르는 것과 유사한 거에요.










백년 전쟁과 장미 전쟁으로 플랜태저넷 사람들의 씨가

말라버려 할 수 없이 핏줄 긁어모아 개창한 왕가가

16세기의 튜더 왕조에요. 헨리 7세였죠.



언젠가 헨리 8세를 짚고 넘어간 적 있는데 이 사람이

16세기 잉글랜드 튜더 왕조의 중추적인 군주였어요.

헨리 튜더.. 전임 헨리 7세의 아들이죠.

http://jangyune.tistory.com/entry/헨리8세-바로알기



튜더 시대의 가장 유명한 왕이기도 했고요.

또 튜더 왕가 최고의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해요.



엘리자베스 튜더는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장장 만 44년을 다스리며 그레이트 브리튼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진, 영국 역사가 사랑하는 군주입니다.



여왕의 치세를 과연 태평성대라 할 수 있었는가, 여왕은

정말 좋은 군주였던가에 대해 오늘날 여러 가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해요.



이 시기 누구보다 오래 다스렸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앞뒤

다른 군주에 비해 자기 정치를 할 시간과 기회가 충분했던 것,

그래서 긍정적으로 볼만한 여지를 많이 남겼다는 점이죠.



잘못이라 할 순 없지만 (중세 관점에서) 여왕의 치명적인

흠이 있었는데 혼인하지 않았다는 점이죠. 즉, 튜더

왕가의 대가 끊길 것이 미리 예견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등장한 것이 스튜어트 왕조입니다.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까지 승계하여

동군 연합의 새 왕조를 개창하는 방식으로 해결한 거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같은 사람, 다른 이름의 군주인 거에요.



제임스 1세… 평가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려 오늘날

영국 사학자들이 사랑해 마지 않는 군주일 거에요.



이 당시 영국 군주를 평가하는 절대적 기준이 있었어요.

바로 종교 전쟁이죠.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서 제임스 1세에 이르기까지, 교회

개혁으로 등장한 청교도를 어떻게 다루는가가 이들

재위 기간 중 가장 큰 골칫거리였어요.



청교도는 영국 땅의 칼뱅교 신자를 일컬어요. 가톨릭과

많은 교리를 공유하는 신교인 영국 국교회가 있었고..

평민 중 가장 많은 숫자는 여전히 가톨릭이었어요.

청교도는 스코틀랜드와 제3계급에 분포했죠.



*중세 유럽 종교 정치의 폐단을 논하자는 것일 뿐, 현대의

가톨릭교나 성공회를 비난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마시구요.










국교회를 헨리 8세가 만들었기 때문에 후임 군주가 아버지와

어떤 관계였냐에 따라 나라의 종교가 요동을 쳤어요.



헨리 8세 국교회, 에드워드 6세 국교회, 메리 1세 가톨릭,

엘리자베스 1세 다시 국교회.. 이런 식이었죠.



군주에 따라 종교가 바뀐다는 것, — 감이 오시나요.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종교 신자는 박해하고 탄압하고

더러 죽였다는, 그런 끔찍한 의미라고요. 지금 중세랍니다.



메리와 엘리자베스와 에드워드는 서로 배다른 남매에요.

메리의 모친이 아라곤의 캐서린 왕비.. 아버지 이혼으로

쫓겨난 사람.. 메리가 극렬 가톨릭일 수밖에 없는 이유죠.

평생에 걸쳐 부친과 신교를 원망했겠죠. 그렇긴 하나…



메리 때 종교 탄압을 블러디 메리라고 따로 지칭하긴 해요.

그런데 그 정도 사형 집행은 명군이라는 엘리자베스 때도

있었어요. 메리 여왕으로서는 다소 억울한 평가라 할 만해요.










이런 험한 때 제임스 스튜어트가 왕위에 올랐어요. 스코틀랜드

출신이니 그 자신은 청교도의 정신을 백번 이해할 입장에

있었어요. 어려서도 청교도식 교육을 받았다고 하죠.



그러나 연합 왕국의 군주로서 정치적 입장은 개인의 입장과

같을 수가 없었어요. 튜더 가문이 개창한 국교회의 기득권을

해치는 건 국가의 기틀을 흔드는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임스는 가톨릭과 청교도 둘 다 적당히 탄압하고

국교회의 근본을 세우는 쪽을 선택해요. 독재자라는 비판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나마 중도를 지킨 결정이 아니었나,

본 블로거는 솔직히 할 만큼 한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날 가장 유명하다는 킹 제임스 성경을 편찬한

문화적 통합의 업적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와 대립각을 세우며 살짝살짝

무시 스킬을 시전하는 튜더 군주들의 전통 아닌 전통이

제임스 때에도 이어졌다는 후대의 비판은 유효하겠죠.










제임스 보고 그나마 낫다 할 수 있는 것이, 후임자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치세였다고 볼 수

있거든요. 1625년 그의 아들로 즉위한 사람은

찰스 스튜어트, 찰스 1세 국왕이었어요.



찰스는… 종교 정치란 면에서 매우 갑갑한 왕이었어요.

국교회를 신봉했고 처가가 가톨릭인지라 가톨릭 영향을

강하게 받은 국교회적 반동 조치를 도입하니 어땠겠어요?

스코틀랜드청교도젠트리, 당시 영국을 지탱하던

세 집단이 엄청나게 반발하는 결과를 낳게 되요.



탄압과 처형이 따랐겠죠? 거기에 한창 대륙에서 진행

중이던 30년 전쟁에 나라 살림 생각도 안 하고 마구

뛰어들어 용병 경제 창출에 이바지하신…ㅜ



왕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왕권 신수설이란 사조가 한몫을 해요.










일찍이 16세기 말 로마법 법률가인 장 보댕이 신학,

정치, 경제 등 분야에 걸쳐 많은 저작을 남겼는데요.



보댕의 주된 논제는 로마 가톨릭 교황이 프랑스 왕국의

군주 통치권에 행사하는 지나친 간섭에 반대하고 강한

통일 왕정을 구축해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보댕

자신은 평생 가톨릭의 신앙을 유지했지만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절대 왕정 체제는 이런 보댕의 사상에

힘입은 바가 컸는데, 재미있는 건 보댕이 영국의 왕당파

의회파 양쪽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에요.



로버트 필머는 보댕을 계수하여 왕권 신수설을 주장한

대표적 인사였어요. 그의 유작은 앞으로 17세기 후반에

벌어질 왕정 복고라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쳐기도…

(나중에 논할 기회 있을 겁니다.)



찰스 1세가 설치는 데는 이런 당대의 흐름이 받쳐준 면이

있었어요. royalist라고.. 왕당파란 정치 집단의 중심

사상이 왕권 신수설이었죠. divine right of kings..










막무가내로 종교 반동 및 전쟁이 휘몰아친 상황.. 막대한

전비와 배상금을 해결하기 위해선 세금이 필요했어요.

이에 과세를 획정하라고 의회를 소집한답니다.

평소 무시할 땐 언제고…



이때가 즉위 후 겨우 2~3년 지난 시점인데 나라 꼴을

이렇게 망쳐 놓으니, 안 되겠다 싶어 의회 정치의 빛나는

전통을 기억하는 귀족들이 반론에 시동을 걸어요.



언젠가 포스팅한 대법관 에드워드 코크 경이

여기에 앞장선 대표적 의회파 정치인이에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에드워드코크-사법부독립



멋대로 용병을 써 전쟁을 일으키고 용병의 전비를 평민 가구에

떠넘기는 망나니 왕을 통제해야 한다는데 의회파 귀족들이

뜻을 모았으며 코크 경이 이 생각을 문서로 기초하죠.



또한 국왕을 압박하는 극단적인 형식으로 가지 않고 군주에게

자유민의 권리 확보를 ‘소청’하는 형식으로 완화하여 찰스가

한결 받아들이기 편하도록 출구 전략을 세워주자는 혜안도

코크 경의 아이디어였어요.










이렇게 탄생한 국왕과 의회 간 협약서가 바로 우리가 아는

권리 청원, Petition of Right.. 라는 문서랍니다.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의 불문 헌법 법원 중 대헌장 다음

순서 정도에 꼽을 중대한 문건이면서, 미합중국 건국 및

미국 헌법 수정안 제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사적이죠.



청원의 내용은 흔히 4대 원칙으로 알려져 있어요.

조항이 넷이란 뜻이죠.



첫째, 의회의 동의 없이 과세할 수 없다는 것..

둘째, 군병을 자유민 사유지에 주둔시킬 수 없다는 것..

셋째, 자유민을 명분 없이 투옥할 수 없다는 것..

넷째, 평화 시기에 함부로 계엄령을 공포할 수 없다는 것..

(주어는 모두 존귀하신 국왕 전하...)










과세할 수 없다는 건 이 사단이 모두 찰스가 절차 무시하고

세금을 획정하려 하다 보니 당연히 나온 조항이겠고요.



오늘날 현대 민주 정치에서도 세금을 정할 수 있는 조세권

입법부만이 행사할 수 있는 고유한 권한이지요. 행정부가

단독으로는 절대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어요. 이 전통이

여기서부터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거랍니다.



찰스 왕이 용병으로 구성된 군사를 무단으로 자유민들 집에

주둔시켜 버렸는데,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그 군사들

먹고 입히고 재우는 건 너희들이 부담하란 뜻인 거거든요.



국방 운영의 핵심은 사실 전쟁 기술이 아니라 군수와 보급인

것… 아시죠? 전쟁은 순간이지만 군사를 유지하는 건 평시에

엄청난 돈을 부담해야 하는 일 아니겠어요. 평시의 군대란

밥먹고 싸움 연습하는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요.



이로 인해 자유민 중 선의의 피해자가 엄청 나온 관계로..

두번째 조항이 나오게 된 거고요.



이런 주둔 조치에 반발한 자유민들을 또 엄청나게 투옥하고

탄압했어요, 못난 찰스 왕께서. 재판도 없이, 영장도 없이.



세번째 조항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거고 habeas corpus..

라고, 근대 공법에 등장하는 인신 보호 영장의 법리가 바로

여기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겁니다.



무죄 추정의 원칙이나 죄형 법정주의 같은 현대적 형법 법리를

의회 정치의 역사에서 그 맥락을 찾아볼 수 있는 거에요.



마지막 조항도 유사한 맥락입니다.

왕께서 심심하면 계엄을 선포하시니…

별 명분 없이 그냥 자기 말 안 듣는다고..ㅜ










다른 때 같았으면 상원이 열심히 나서 국왕 쉴드를 쳤을 텐데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대헌장 파괴의 현장인지라, 영국 의회

역사상 보기 드물게 상하원이 대동 단결하여 가결시켰다죠.



대헌장… 예, 1215년 마그나 카르타 맞습니다. 13세기 이래

잉글랜드의 의회 정치란 이것이 지켜지는 둥 마는 둥 오락가락

들고 낢을 반복한 요지경이었다 보면 대략 맞을 거고요.

http://jangyune.tistory.com/entry/영국입헌의회정-마그나카르타



의회가 강할 땐 대헌장을 지키라며 군왕을 압박하고 반대일 땐

왕이 의회를 무시하거나 문을 닫아 버리거나 하는 상황이 약

4백 여년 역사의 각 단계마다 주기적으로 펼쳐진 거에요.



대헌장에 대한 역사적 의의가 재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튜더 조부터고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같은 강력한 군주 집권기엔 의회와 적당한 거리에서

반목과 줄다리기 상황을 연출하곤 했어요.



이제 17세왕들께서 본격적으로 의회 정치의 판을 손수

깔아주시는 시대(!)로 넘어와선, 권리 청원을 필두로 하여

별별 익사이팅한 사건들이 요지경처럼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바야흐로 인간사 정치의 문화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전진하는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합니다.



원대한 풍경화의 전주곡처럼 등장한 1628년 6월 7일

영국 역사의 한 페이지는 바로 권리 청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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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use of Wisdom, the Greatest Library of Baghdad

During Islamic Golden Age in Medieval Times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 역사 최고의 전성기를 꼽을 수 있어요.

정치의 양상이야 각기 제각각이지만 한 국가가 전성기를 달리고

있을 때 역사와 문화에서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지요.



현명한 통치자가 신분에 상관 없이 능력에 따라 사람을 끌어모으고

그들의 능력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운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 세종 및 영정조,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 루이 14세 등… 쉽게 감이 오시죠?



5~15세기 유럽이 암흑기를 맞고 있을 때 세계사의 전성기는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 꽃피고 있었을까요. 즉 중세 시대

정치 문화적 최강국을 어디로 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죠.



(일단 중국의 거대한 경제 규모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이슬람 제국을 상정하고 싶습니다. 서로마 제국의 패러다임이

붕괴하고 동로마와 인도, 중국을 잇는 허브로서 교역과 치세의

정점을 찍었거든요. 배경에는 종교의 뒷받침이 있었고요.



이슬람 제국의 황금 시대는 우리가 주로 관심을 갖는 유럽의

근대사와 간접적 연속성이 성립하기 때문에 또한 중요해요.

르네상스의 개혁은 사실 이슬람으로부터 온 것이었거든요.



이 주장의 근거 중 하나를 여기에 제시할 수 있어요.

중세 당시 세계 최고의 학술원이자 도서관이 바로

이슬람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있었거든요.



House of Wisdom, Bayt al-Hikma, بيت الحكمة …

지혜의 집 또는 지혜의 전당으로 불리던 바로 그곳이에요.










이슬람 제국의 전성기는 아바스 왕조의 흥망성쇠와 운명을

같이 합니다. 8세기 중반 우마이야 왕조를 전복하고 성립한

두번째 칼리파 왕조로서 아랍인 중심 정치에 치중했던 전대에

비해 출신 배경을 초월해 보편적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흔히

이슬람의 황금 시대라 하면 아바스 왕조 치세를 가리키죠.



칼리파란 기독교의 교황과 황제를 합한 위치입니다.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최고 통치자를 뜻하죠. 이슬람교 발흥 초기만

하더라도 제정 일치를 이루어내지만 아바스 조 후반에

가서 정치 실권의 힘이 빠지게 되죠.



아바스 조 2대 군주 알 만수르는 바그다드로 천도한 후

7세기 초에 망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요. 엄청난 양의 중세 서적이 쏟아져 들어오자

사산 조의 전례를 본따 궁정 도서관을 설립해요.



도서관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지식의 보고가 대중에게 널리

퍼질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했어요. (인쇄술..은 훨씬

나중 시대 얘기고) 도서를 필사해서 보급할 수 있을 텐데

종이가 충분했을까요..



8세기 중반까지 서아시아의 기록 매체는 양피지였어요.

(유럽은 11~12세기까지도..) 종이보다 더 두껍고 잘

찢기고.. 당시 제지 기술은 전 세계에서 중국 등

동아시아 권역에서만 보유하고 있었거든요.



751년에 호재가 있었어요. 탈라스 전투… 역사상 최초로

이슬람 제국과 중국 정권이 전쟁을 벌였어요. 문명의 충돌!

당나라가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팽창하고 있었고

이슬람이 이에 적정한 제동을 건 거에요.



지금의 카자흐스탄 쪽에서 양국 지방 장군들끼리 맞붙었는데

이슬람이 이기고…는 별 의미없고, 중요한 건 이때 당군 포로

중에 제지 기술자가 섞여 드디어 이슬람으로 넘어온 거에요.



(이 과정을 확인할 수는 없으니 이슬람으로 전승된 계기가

탈라스 전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반대 학설도 물론 있어요.)



사산 조가 망하면서 이슬람으로 넘어온 페르시아인 출신

유력 가문이 이슬람 최초의 제지소를 차렸다고 해요. 전문

필사가들이 고용되어 열심히 도서를 보급했고요.










아바스 조의 전성기는 5대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가 다스린

8세기 말 ~ 9세기 초인데 천일야화에도 등장하는 왕이에요.

이 사람의 아들로 7대 칼리프 알 마문이 즉위하는데 궁정

도서관의 위용은 이 시기에 정점을 찍게 됩니다.



군주 입장에서 중요한 점은 자국어인 아랍어로 보편적 지식을

최대한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어요. 번역가, 문필가, 필사가,

제지업자, 제책업자, 문구업자 등등의 직역이 필요한 일이죠.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화학, 물리학, 지구과학, 약학, 생물학,

지리학의 서적들이 저 다양한 사람들 앞에 펼쳐졌어요. 그리스,

로마, 소아시아, 이집트, 아프리카, 페르시아, 중앙 아시아, 인도

등 당시 기준으로 온 세상에서 다 모인 지식의 총량인 거죠.



알 마문은 번역 작업한 종이 묶음의 무게를 달아 그만큼의 금화를

하사했다고 해요. 이 소문이 아라비아 전역에 퍼지니 어떤 일이

벌어졌겠어요? 아랍인, 시리아인, 유대인, 페르시아인, 터키인,

쿠르드인, 인도인 가릴 것 없이 구름떼처럼 인재가 모여든 거죠.

(나중에 가면 일부 동로마인이나 유럽인들까지 가세했죠.)



치사하게 아랍인만 우대한 전대 우마이야 조와 달리 아바스 조는

민족이나 배경으로 차별하지 않고 철저하게 능력을 중시했어요.

번역 결과만 있으면 보상한다는 원칙이 지켜졌죠.



번역… 이란 작업을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단순히 말대 말을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에요. 언어에는 문화 배경이

녹아들게 마련이므로 상당수 작업에서는 어문의 학술 배경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해졌어요. 곧 전문 번역이 가능한 각

분야의 학자 집단이 모여들고 양성될 조건이 형성된 거죠.



학자들이 모여 뭘 하겠어요. 아무 때나 그곳에 가면 누구도

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토론, 실험, 저술, 연구를 할 수 있는

거에요. 학회가 형성되고 도서관은 학술원이 되었죠. 나중엔

천문 관측대도 만들어줘요. 전쟁으로 갈 곳 잃은 학자들을

받아 피난처도 제공했다고 해요. 대단하죠?



이곳을 체험한 많지 않은 유럽인 학자의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

도서관과 유사하게 수학, 천문학, 의학 등 분야별로 각기 다른

방마다 수많은 책을 분류해 보관했다고 해요. 당시 유럽엔

그런 거 없었죠. 유럽인 학자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나요.

듣도 보도 못한 고금의 명저가 거기만 가면 다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이슬람 제국 문화의 꽃, 지혜의 집이에요!

고대사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렉산드리아도서관

꼽힌다는 것 아시죠. 고대에 알렉산드리아가 첨단 지식의

전당이었다면 중세엔 바그다드에 이곳이 있었던 거죠.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이집트 해안에 면한 곳..)



하지만 참으로 슬프게도 바그다드 지혜의 집은 지금 남아

있지 않아요. 1258년 원나라 몽골 군과 벌인 바그다드

공방전 때 불타 없어져요.ㅠ 아, 왜 저절로 탄식이…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로마 침입으로 없어졌다는 설이..)



유형의 문화재는 사라졌지만 무형의 지식은 형태를 달리 하여

영원히 살아남아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서적이 정작

본고장 유럽에선 실전된지 오래였어요. 지혜의 집에는 남아

있었어요. 아랍어 번역본이 다시 라틴어로 재번역되어 다시

유럽으로 넘어가니, 르네상스의 지적 원동력이 바로 이거에요.



지혜의 집에서 형성된 담대한 학풍은 역사에 이름을 떨친 많은

대학자를 길러내기도 했어요. 너무나 많지만 대표적 인물들은…



페르시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인도의 수학을 집대성한 9세기

대수학의 아버지 알 콰리즈미, 그리스와 아랍의 철학과 의학을

종합해 유럽 중세 의학의 기초를 세운 11세기의 이븐 시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서에 주해를 제공해 르네상스 사상에

다리를 놓은 12세기 이베리아의 철학자 이븐 루시드 등이죠.



이븐 루시드가 정립한 사상은 단테 알리기에리에게도 영향을

미쳤어요. 신곡에 그를 회상하며 극찬한 구절도 등장하죠.










르네상스의 역사를 피상적으로만 훑으며 유럽 중심 사관을

벗어나지 못한 채 단테나 다 빈치 정도 끄적거리는 것으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한 듯이 만족해 하는 실수를,

우리가 흔히 저지르고는 하쟎아요.



조금만 시각을 넓혀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여 애정을 갖고 역사를

바라보면 현대사의 흐름을 결정 지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어느

특정 지역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권 모든

사람들이 전 지구적으로 노력하고 영향을 주고 받은 끝에

이루어낸 결과임을 깨달을 수 있답니다.



지혜의 집에 보존된 고대 철학의 보고가 유럽으로 전달되어

중세 후반 스콜라 철학의 마지막 불을 활활 태웠듯이, 단테는

루시드의 철학서로 소양을 쌓고 코페르니쿠스가 바그다드에서

넘어온 천문서로 지동설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



현대인들이 흔히 접하고 있는 동서양 문화의 증폭 합성은 이미

천 년도 더 전에 바그다드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일이랍니다.



아래는 지혜의 집에 대해서 더 알아볼 수 있는 동영상이에요.

아랍 역사 문화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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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I

Renaissance, the Rebirth of Humanitie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I. 문예 부흥 Renaissance 



르네상스, 재생(부흥), rebirth 이야기에요. 14~17세기 유럽인의

생각과 감정을 열어젖힌 광범위한 수준의 문화예술 운동입니다.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인 피렌체 공화국에서 시작하여 인근

베네치아제노바로 옮겨갔고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프랑스,

제네바를 거쳐 네덜란드, 영국, 폴란드까지 퍼져 갔다고 합니다.


주로 문학과 회화, 조각, 건축을 중심으로 기독교 유일신 교리의

성상화에 치중했던 중세 성향을 탈출하여 철학적 사고와 예술적

표현의 중심에 인간이란 존재를 대체한 광역 거시적 사조랍니다.


문예를 ‘부흥한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예술

성향을 되살리고 고전으로 돌아간다는 정신을 공유했기 때문이에요.


장장 19세기까지 통일 군주 없이 공화국이나 공국으로 찢어 살아야

했던 북부 이탈리아 사람들로서는 그네들의 아이덴티티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가 고대 시절 화려했던 문화의 향수거든요.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가 본래는 이태리어인 rinascimento

라고 불려야 정상이지만 19세기 중반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가

불어로 규정하며 대히트를 친 바람에 그렇게 고착해 버렸다죠.


피렌체나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북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서

발발한 이유는 말이죠.. 중세 후반에 지중해 해상 무역을 장악한

사람들이 이런 해양 국가의 중추 계급인 상인 집단이었거든요.


이 나라들은 해양 중개 무역으로 성장한 상인들이 사회의 중추를

형성하고 과두 공화정 형태의 정치 체제로 빽과 돈줄과 문화

예술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답니다.


이들이 중개한 무역 루트는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 소아시아와

중동, 인도, 중국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동방이었는데 보통 이슬람

상단을 통해 향신료, 도자기, 차 등 사치재를 구해 이문을 챙겼어요.


이렇게 넘어오는 과정에서 물자 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비잔티움의

제국이 잘 보존해온 (정작 자신들은 오래 전에 잃어버린) 고대 문물이

역수입되어 사람들을 일깨우고 르네상스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죠.


문화적 변동이란 것이 이렇게 정치와 경제의 기반이 없으면 생존할

수가 없는지라 15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이 발호하며 동방 루트를

막아버리자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쇠퇴하고 맙니다.


14세기 초를 시점으로 잡는 것이 통설인데 이는 이탈리아 문학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활동 기간이 대략

1308년 무렵부터 사망하는 1321년까지 이어지기 때문이죠.


단테가 정계에서 축출된 후 망명 생활을 하며 창작한 신곡

이태리어를 처음으로 문학의 언어로 끌어올린 명작입니다.

중세 유럽인의 내세적 종교관을 엿볼 수 있기도 하죠.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는 계관 시인으로 임명되어 국가 대소사를

라틴어 시문으로 남겼고 로마 시대의 역사를 시로 썼으며 고대

문헌을 발굴 연구하여 후대에 영향을 준 인문주의자였습니다.


그와 교류했던 지오반니 보카치오는 열흘이란 속뜻을 지닌

이야기식 서사시 데카메론을 통해 당대 유럽인의 다채로운

생활상을 묘사하고 사회상을 우회적으로 비꼬기도 했죠. 서사

구조는 영국의 제프리 초서캔터베리 이야기로 계승해요.


이탈리아 문학의 태동은 다른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요.

네덜란드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우신예찬을 썼고

스페인에서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창작하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라파엘로 산치오

16세기 초를 화려하게 수놓은 예술가들이야 더 말할 나위 있나요.


이들은 교황령을 비롯하여 유력 가문의 후원을 받아 오늘날까지

인류적 자산으로 분류되는 초월적 걸작들을 창작해냈습니다.

한두 번 곁눈질 만으로도 거장의 자취가 느껴지실 겁니다.


다 빈치의 모나 리자라든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라든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라든가…



르네상스는 순수 문예작의 범위를 초월해서 영향을 미치기도

했는데요. 이전 시대 거장의 스타일과 작풍이 한창 정치적 격변을

겪던 북부 공화국 인민의 의식 성장을 반영하기도 했지요.


대표적인 사람이 군주론로마사 논고를 저작하고 폭풍처럼

일생을 살다 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며, 그가 남긴 충격적 사상은

이후 고전적 현실주의로 분류되는 정치학 연구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와 동시대에 영국에서는 헨리 8세 시대를 뜨겁게 살았던

토머스 모어유토피아를 통해 민중을 배격하는 위정자의

위선을 한껏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모어의 실제 삶도 참

극적이었죠. 헨리 8세에게 직언하다가 참수되었답니다.)


영국의 르네상스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가 집권한 17세기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이르러 뒤늦게 꽃을 피웠다고 봅니다.

현대 영문학의 효시인 인물이라 할 수 있겠죠.




현대 대중 문화에서도 르네상스는 아주 자주 언급됩니다. 재작년에

개봉한 다빈치 코드 3부작 중 최졸작인 인페르노에서는 시종일관

산드로 보티첼리가 15세기 말에 그린 단테 신곡의 삽화가 삽입되요.



물론 레오나르도를 상업적으로 폭발시킨 건 댄 브라운론 하워드죠.

재미는 있는데.. 이 얘기 아직도 믿는 분들 계시려나요.



또한 데이빗 핀처가 모건 프리먼 및 브래드 피트와 작업하여 1995년에

내놓은 히트작 세븐에서는 단테의 신곡에 언급되는 인류의 일곱 가지

죄악이 직접적인 내러티브의 소재로 언급되죠. (미성년자는 주의)



세르반테스는 작품과 함께 영원히 사실 겁니다.

심지어는 뮤지컬로도 살아남을 거에요.

아랜 72년 토니상 공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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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Aware Who Henry VIII Really Was?




미디어는 다양한 모습으로 헨리 8세를 묘사해왔습니다.


60년대에 나왔던 리처드 버튼의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이 자매로 나온 영화도 생각나며

캐나다 드라마 시리즈도 기억나네요.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으로서야 이런 창작물을 깔 만한

구석이 없을 거에요. 각각이 모두 독창적 완성도를 구축했고요.


69년작 ‘천일의 앤'은 당시 수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었어요.

리처드 버튼의 연기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긴,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배우들이었으니까요.


대체적으로 미디어가 소비해온 헨리 8세는 그러했습니다.

여자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종교를 버린 난봉꾼, 색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ㅎ


이런 이미지는 조선 후기 숙종 같은 군주와 자주 오버랩되어

사극을 좋아하는 중장년의 보수적 시청자층에게 뭔가 묘하게

동질감의 판타지를 조장해온 느낌이에요. 저쪽도 비슷했구나.. 하는.


현대 한국의 사회가 미디어에서 장희빈을 소비하는 방식의

연장선상 어딘가에 비슷한 형상을 한 앤 불린이 있을 겁니다.


이 이미지는 진실에 가까운 정당한 것일까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어떤 인물인가요.






헨리 8세가 걸어온 행보, 그 목적



열 여덟의 나이에 즉위한 헨리 7세의 왕자는

튜더 왕조가 기록하는 두번째 군주였습니다.


튜더 왕조는 장미 전쟁 이후에 탄생한 16세기

잉글랜드의 왕가 가문이고요.


장미 전쟁이란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 사이에 발발한

15세기의 왕위 계승 내전이었습니다.

(두 왕가의 인장이 장미 문양이라서 저렇게 부른다능..)


튜더 왕조는 오늘날 영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왕국의

실질적 토대를 형성한 공이 있는 가문입니다.


우리로 치면 14세기 말에 조선조가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골격을 형성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튜더 왕조에서 이런 공의 8~9할은 대략

두 명의 군주에게 그 몫이 돌아갑니다.

헨리 8세와 그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아시죠?





헨리 8세는 해군을 양성했습니다.

이 해군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북해를 주름잡으며

해상 강국인 잉글랜드의 기반을 형성했어요.


헨리 8세는 교황 및 대륙의 군주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복잡한 외교전에 잉글랜드의 발언권을 높여갔어요.

(이 시기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류국 정도에 불과했어요.)


헨리 8세는 귀족을 탄압하고 젠트리 등 중간 계급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민심과 인기를 얻게 되죠.


즉위 전반기의 헨리 8세는 교황과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 정치의 화신 같았고 신교도를 박해하는데도 앞장섰어요.

교황에게 가톨릭의 보호자라는 찬사도 받았어요.


첫 아내인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보다 겨우 여섯 살 연상인 미인이었다고 해요.

아라곤은 지금의 스페인. 당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어요.


원래 캐서린은 요절한 형의 왕자비로 정해진 사람이었으나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정혼자를 떠나보냈다고 하죠.

헨리 8세는 이런 캐서린을 연모했고 그 기록도 남아 있죠.


문제는 나이가 들며 아내가 가임기를 지났음에도

캐서린이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죠.

헨리 본인도 나이가 들어가고.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들들 볶아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는 교리를 찾아보라고 했죠.

왕자 출산처(?)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본래 헨리 8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선진 문물에 밝은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독일과 스위스에 종교 개혁이 벌어지고 있음도 알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교도들을 철저하게 압살하고 있었어요.


교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그때까지 통제하던 종교 개혁 카드를 꺼내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존속하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출범합니다.


약간 선동적 조치로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그 재산을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매각하기도 합니다, 헐값에. 민심이 환호했죠.


하지만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사실상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어요.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그 한 가지의 차이 뿐이었습니다. 루터교 흉내만 살짝 내주고.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그냥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 현상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종교 개혁의 의미를 그만큼 적확하게 알았다는 뜻도 되죠.


그렇게 족쇄가 풀려 다섯 번 추가로 결혼하고 두 명의 왕비를

참수합니다. 그가 낳은 왕자 1명, 공주 2명이 뒤를 이어

튜더 왕조의 마지막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과 재혼과 왕자 출산에 집착했을까요.

왕좌의 정통성을 추구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그 자신

집권의 궁극적 목표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이 취약한 왕가의 내전으로 평생을 골머리 썩여야 했던

선왕 헨리 7세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기 때문이고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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