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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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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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2.09
    브래드 델프 Brad Delp
  2. 2018.05.24
    문정인 특보 애틀랜틱 인터뷰 전문




그의 아름다운 음악을 찬양하는 일은 쉽지만 불행으로 끝난

그의 인생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긴 쉽지 않겠다. 허나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 보스턴 Boston과 함께 톰 숄츠

Tom Scholz를 언급하며 그를 건너뛰고 갈 수는 없으므로,

최대한 담백하게 논평해보겠다. 아메리칸 하드락 찬연히

빛났던 하이테너, 브래드 델프 Brad Delp 이야기이다...













*More Than a Feeling. 79년 뉴저지 라이브.



*Amanda.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Foreplay / Long Time. 79년 뉴저지 라이브.



*Rock & Roll Band.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A Man I'll Never Be. 79년 뉴저지 라이브.




보스턴의 시작과 끝은 탁월한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

엔지니어인 동시에 발명가 창업자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박사 출신 톰 숄츠로 귀결된다. 사실인즉슨 밴드 보스턴

자체를 숄츠의 원맨 밴드로 정의해도 거의 할 말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이 절대적이긴 하다. - 원래 숄즈라고

표기해야 옳긴 한데 관습적으로 숄츠가 더 널리 퍼져서...



MIT 석사 졸업 후 즉석 사진으로 유명한 폴라로이드 사

연구원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47년생 도널드 토머

숄츠가 자기 집에 녹음 스튜디오를 차리고 밴드 프로젝트를

시작한 시점이 일의 시작이었다. 기타리스트 배리 구드로,

베이시스트 프랜 쉬이 세션으로 불려왔을 때 매사추세츠

토박이 51년생 브래들리 에드워드 델프 역시 보컬 제의를

함께 받아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1970년경.



기타, 베이스, 키보드, 송라이팅, 프로듀싱 등 나머지 모든

파트를 맡아 북치고 장구치던 숄츠가 저 멤버들을 규합해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고 레이블마다 퇴짜를 맞으면서도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약 5년만에 에픽 레코드와 계약을

성사시켜 데뷔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이때 데모에 들어간

곡들이 곧 전설적인 첫 앨범의 트랙으로 자리잡았다.




 (Boston)



('More Than a Feeling' from Boston, 1976)

*Boston은 뉴욕 데뷔 무대가 무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었다.




76년, 미국 대중 음악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전설적

데뷔 앨범 Boston이 발매된다. 자그마치 1천 7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았고 빌보드 200 차트

3위까지 기록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이듬해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신인상 후보 지명의 성과를 낸, 바로 그 앨범이다.



('Peace of Mind' from Boston, 1976)

- 핫100 차트 탑40에 오른 세번째 싱글.



*More Than a Feeling.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SSR6ZzjDZ94



1970년대 밴드 낭만의 시대를 상징하는 영원한 락 앤썸

More Than a Feeling이 수록된 앨범이기도 하다. Peace

of Mind, Foreplay / Long Time, Rock & Roll Band,

Smokin' 등 연이은 트랙들이 줄줄이 시그니처 트랙으로

자리잡아 버릴 곡이 없는 명반으로 기억되는 앨범이기도..



(Rolling Stone '04,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https://web.archive.org/web/20061109103736/http://www.rollingstone.com:80/news/coverstory/500songs/page/5

- 이건 04년 archive. '10년 업데이트에선 랭크에 실패했다.

- 10년에 업데이트된 새 랭킹.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500-greatest-songs-of-all-time-151127



(The List of 'The Songs That Shaped Rock and Roll'

selected by the Rock and Roll Hall of Fame, '04)

https://www.infoplease.com/arts-entertainment/music/500-songs-shaped-rock



데뷔 싱글 More Than a Feeling핫100 차트 탑5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롤링 스톤 매거진이 04년에 집계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랭킹에도 당당히 오른, 70년대

시대 정신의 산물인 시그니처 트랙. 락앤롤 명예의 전당

'락앤롤 장르를 형성한 명곡'을 선정할 때도 당당히 올랐다.



('Foreplay / Long Time' from Boston, 1976)

*2' 25"까지 Foreplay. 키보드 솔로는 Hammond M-3로 연주.

**이 곡의 기타 솔로는 Barry Goudreau의 솜씨이다. 꽤 하지?



프로그의 영향을 받은 키보드 솔로잉이 작렬한 Foreplay

통상적인 하드락 모드의 Long Time이 접속한 3번 트랙은

본작을 상징할 대표 트랙이며 여느 신인 아티스트와 비교를

불허하는 숄츠/보스턴 만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걸작일 터. 평단이 예스제플린이 결합했다고 칭송했고

핫100 차트 탑40에 올랐다. - 숄츠의 송라이팅은 야드버즈

킹크스에 클래식의 영향을 가미한 거라 한다.



('Rock & Roll Band' from Boston, 1976)

*이 트랙의 드러머는 Jim Masdea.

 - 이 곡을 제외한 전 트랙의 드러머는 Sib Hashian.

**Boston 공연은 대개 이 곡을 오프닝 트랙으로 해 시작한다.



완전한 무명의 신인 밴드로서 일찍이 존재한 적 없던 엄청난

성과를 거둔지라 Boston 앨범이 미국 음악계 전체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고 9백만 장 판매 인증을 받은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그 여파가 진정되는 기미를

보일 정도였다. - 86년을 넘어서며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고

현재까지 판매고는 미국 1천 7백만 장, 세계 2천 5백만 장..!



('Smokin'' from Boston, 1976)

*이 곡의 Hammond 솔로잉도 꽤 유명하다. Tom Scholz.



블루스 기반의 메탈 원형질에 국한되던 아메리칸 하드락

제멋대로 70년대 격정적 흐름이, 정교한 주법과 기술적

지원에 힘입어 파워 팝 형태로 승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앨범이라고 보통 평가한다. 일부 평단에선 Boston 앨범으로

인해 이후 락 음악이 야성미를 잃은 채 프로듀서 체제의 잘

다듬어진 상품으로 전락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까기도 한다.



(Robert Dimery '05,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

http://www.rocklistmusic.co.uk/steveparker/1001albums.htm



완벽주의 성향의 톰 숄츠란 거인, 그리고 그를 도운 브래드 델프

재능있는 뮤지션들이 결합하여 빚어낸 시너지가 음악사의 물줄기를

틀어버린 것이다. 05년에 출간된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중 하나로도 선정되었다고. 어떤 경로든지, 한 번은 꼭 들어 보시라.



*Smokin'. 77년 캘리포니아 라이브.

https://www.youtube.com/watch?v=kumK8yor1ow




 (Don't Look Back)



('Don't Look Back' from eponymous album, 1978)

- 풍요와 낭만에 가득 찬 미국의 70년대가 보이는가...



본래 Boston 앨범을 준비할 때 소속 레이블인 에픽 레코드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제작할

것을 조건으로 했지만 숄츠는 과감하게 이를 생까고(..) 자기 집에

만든 스튜디오에서만 작업했다. 두번째 앨범에서도 숄츠는 이런

프로세스를 고집하여 그만의 페이스에 따라 제작에 들어갔는데...



('A Man I'll Never Be' from Don't Look Back, 1978)

*Brad Delp, 피아노도 함께 연주하시고 Scholz는 무대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 Delp 관점에선 이때가 보컬의 최전성기인 것 같다.



78년에 발매한 2집 Don't Look Back숄츠가 최대한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천천히 제작해보려 레이블과 신경전을 거듭한

끝에 나온 수작 앨범이었으나 숄츠 입장에선 군데군데 여전히

불만인 채로 작업을 끝낸 셈이었다고.



*Don't Look Back.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AzNL-4sz95I



하지만 동명의 타이틀 트랙 Don't Look Back핫100 차트

탑5에 오르고 발라드 A Man I'll Never Be와 하드락 넘버

Feelin' Satisfied가 후속 싱글로 히트하며 전작의 성공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결과를 선사해주었다.



*A Man I'll Never Be.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PqsHWnDBS0Q



전반적으로는 Boston의 작법을 그대로 이어가며 파워 팝

사조를 더욱 굳히는 듯한 모양새의 앨범이었다. 상업적으로는

전작의 성과 절반 정도 판매고에 불과했지만 전작이 워낙

괴물같은 성공이었으며 최종적으로 7x플래티넘 인증까지

기록했고 빌보드 200 차트 탑까지 찍었으니 외려 실패가

아닌 성공임이 분명했다. 보스턴은 이제 공연을 선도하는

거물 투어 액트로 훌쩍 성장해 있었다.



('Feelin' Satisfied' from Don't Look Back, 1978)



본작의 진짜 숨은 의미는 따로 있었다. 제작 과정에 불만을

품게 된 숄츠에픽 레코드의 지리한 신경전이 극에 달해

급기야 향후 몇 년에 걸쳐 법정 소송전까지 가는 상황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시발점이 바로 DLB 앨범이란 점이다.



('Party' from Don't Look Back, 1978)

*라이브에서 팬덤이 매우 열광하는 히든 트랙이다.




 (Barry Goudreau)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DLB 앨범 전미 투어를 종료한 후 79년부터

숄츠가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근데 에픽 레코드 및 모회사인

CBS가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물론 숄츠와 레이블 간의 까다로운

신경전은 앞에 썼듯이 DLB 앨범 때부터 시작한 오래 된 문제였다.

제작에 시간 좀 걸리겠다 판단한 숄츠델프 등 멤버들을 모아놓고

'계약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다른 돈벌이 해라' 하는 나름 대범한

조처를 취해준다.



배리 구드로시브 헤이쉬과 함께 브래드 델프 등, 오리지널

보스턴 라인업의 멤버들이 80년 구드로의 솔로 앨범 프로젝트로

모인다. 누가 봐도 보스턴과 판박이인 구성인지라 팬덤에선

사실상 보스턴 아류로 인식하지만 물론 숄츠 본인은 정통성을

승인하진 않는다.



('Dreams' from Barry Goudreau, 1980)

*Brad Delp (vocals), Barry Goudreau (guitars), Sib Hashian (drums).

당최 이게 보스턴이지 원..



그리하여 80년에 Barry Goudreau 앨범이 발매되고 소폭의

마이너한 히트로 매니아 팬덤을 형성한다. 누가 들어도 앨범의

사운드 퀄리티는 보스턴 사운드의 재판이었다. 델프 말고도

먼 훗날 보스턴에 가담하게 되는 프랜 코즈모가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 델프가 보컬을 맡은 Dreams가 소폭 히트하였다.



그 사이 숄츠는 여러 모로 머리 아팠다. 레이블과의 분쟁이

급기야 소송으로 비화하고 숄츠 vs CBS의 저작권 및 제작권

법정 공방이 개시해 지리한 몇 년을 소모했다. 먹고 살 방편

때문인지 (취미 생활이기도 하고) 숄츠기타 이펙트 개발

전문 회사를 설립하여 자신의 발명품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소위 Rockman amplifier.. 인기 제품이다.



 (Rockman Amplifier)




 (Orion the Hunter)



구드로의 솔로 앨범을 그럭저럭 마무리하고 보스턴의 3집

준비가 아직 더딘 상황이라 델프는 동료들과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구드로 중심으로 뭉친 프로젝트 그룹

명의의 84년 앨범 Orion the Hunter가 그것.



이번에도 큰 히트는 기록하지 못하고 소규모 매니아 팬덤을

형성하는데 그치지만 델프의 목소리가 여전히 현장과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미국 시장에서 So You Ran,

한국에서 Joanne이란 곡이 소폭 히트하였다.



('Joanne' from Orion the Hunter, 1984)




 (Third Stage)



소송은 숄츠의 승소로 매듭지어져 정식으로 레이블을 옮긴다.

이미 몇 년에 걸쳐 찬찬히 준비해오던 데모 버젼들을 정리하여

86년에 드디어 3집을 발매한다. Third Stage.. 보스턴

숄츠에게 사상 최초로 핫100 차트 탑을 선사한 시그니처 트랙

Amanda를 수록한 바로 그 앨범이다. 아만다~



('Amanda' from Third Stage, 1986)

*첫 싱글이고 대표 트랙인데공식 뮤직 비디오를 찍지 않는 등

당시 트렌드를 따르지 않고 히트한, 이례적 기록을 남겼다.

 - 고로 현재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상물은 모두 팬덤이 제작한

비공식 뮤비들이다.



3집을 얻기 위해 소송이다 뭐다 해서 고생한 여파 때문인지 새

앨범이 종전보다는 사뭇 진지해지고 다소 침울해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숄츠 본인이 70년대에 방법론을

확립한 파워 팝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우주 탐사 로켓 이야기를

하나의 틀 안에서 연결한 컨셉트 앨범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빌보드 200 차트 탑을 찍었고 최종적으로 4x플래티넘을 기록한다.



('We're Ready' from Third Stage, 1986)



파워 발라드 Amanda는 본래 80년대초 2집 투어 마치자 마자

작곡해둔 곡인데 뒤늦게 빛을 보게 되어 보스턴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되었다. 또 핫100 차트 탑텐에 오른 We're Ready,

메인스트림 락 차트 상위에 랭크된 Cool the Engines, 탑40를

기록한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

앨범의 마지막 트랙 Hollyann, 팬덤이 특별한 애정을 보여준

I Think I Like It 등 줄지어 많은 곡이 사랑을 받았다.



('The Launch' from Third Stage, 1986)

*로켓 발사 및 3단 분리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연주곡.

 - 앞뒤의 We're Ready 및 Cool the Engines와 이어져

우주 개발이란 컨셉트 스토리를 완성하는 것..



전작들만큼은 아니어도 명실상부한 80년대의 히트 앨범임에는

틀림없다. 구드로는 공식적으로 제작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쉬언헤이쉬언도 제작 초기 단계에만 참여한

걸로 되어 있어, 전작에서부터 이어지는 멤버는 델프가 유일하다.

거의 전곡의 드러머로 짐 매즈디어가 다시 연주해줬고, 다른

기타리스트로 새미 헤이 투어 연주자 게리 필이 참여했다.



('Cool the Engines' from Third Stage, 1986)



완벽주의 성향과 그밖의 잡다한 문제들이 얽혀, 스튜디오 앨범

사이 제작 주기 간극이 엄청나게 벌어지기 시작한 신호탄의

작품이기도. 전작의 8년이 지나 발매되었는데 차기작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리게 되고, 이런 점은 그냥 숄츠/보스턴

전매특허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I Think I Like It' from Third Stage,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3tD2Id2T4jU

*Gary Pihl on guitars.



('To Be a Man' from Third Stage,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CLkuXEeQNrE

*88년 뉴욕 라이브.




 (Return to Zero)



Third Stage Tour를 끝내고 4집 준비에 착수하던 숄츠. 델프

갑자기 나타나 다른 프로젝트가 잡혀서 잠시 탈퇴를 선언한다.

선선히 그러라 하고 - 그래봤자 어디 가는지 뻔히 알겠고 왠

느낌상 다시 돌아올 것 같으니까 - 그를 대신할 보컬리스트로

예전에 배리 구드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찌르는 샤우팅에 능한

프랜 코즈모를 영입하시는 숄츠.



델프는 좋게 보자면 담백하고 우직한 분이셨고 쉽게 말해 마당발은

아니셨다. 아는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 뻔할 뻔 자로, 지금까지 쓴

내용으로 짐작하셨겠지만 델프를 꼬셔낼 만한 프로젝트를 들고

올 사람은 구드로 및 옛 보스턴 멤버들 정도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 아직 뜨지 못한 - 구드로가 노래 잘 하는 델프를 구슬른 것.



RTZ란 프로젝트 그룹으로 다시 돌아와 91년에 Return to Zero,

곧 그룹명의 앨범을 내는 그들. 구드로는 꽤 재능있는 연주자이긴

하지만 숄츠만큼의 독창성을 가진 아티스트는 아니었는지, 이번

작품도 소소한 마이너 히트에 그쳤다. 델프 보컬의 호소력이 담뿍

드러난 파워 발라드 Until Your Love Comes Back Around

정도는 한때 히트했다.



('Until Your Love Comes Back Around' from Return to Zero, 1991)

*Brad Delp가 관여한 곡의 뮤비 중에 완성도가 가장 높을 듯.




 (Walk On)



물론 숄츠델프 사이에 묘한 마찰과 긴장이 올라와서 델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도 있긴 하다. (녹음 스튜디오에 가끔

놀러와서 일부 곡에 자기 흔적도 남긴 거 봐선 낭설 같지만...)

어쨌든 코즈모를 데리고 제작을 시작해 94년에 4집 Walk On

발매를 밀어붙인다.



('I Need Your Love' from Walk On, 1994)



보컬이 바뀌어서인지 얼터너티브 시대에 뒤떨어져서인지, 앨범

전체 성과는 그저 그랬다. 플래티넘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탑40

이상 가는 히트 싱글을 만들지 못했다. 그나마 I Need Your

Love Livin' for You 정도 트랙이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이듬해 투어 시작 전에 델프가 복귀한다.



('Livin' for You' from Walk On, 1994)

https://www.youtube.com/watch?v=WaU0n3MLtlw




 (Greatest Hits)



다음 앨범 들어가기 전 97년에 첫 컴필레이션 앨범 Boston:

Greatest Hits를 발매하는데 라이브를 주름잡아 팬덤의 트랙

충성도가 높으니 컴필레이션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려 더블 플래티넘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The Star-Spangled Banner / 4th of July Reprise'

from Greatest Hits, 1997)

https://www.youtube.com/watch?v=u8QkNJ8B-JU



미국을 대표하는 밴드이니만큼 약간 국뽕 캐릭터도 있어서

라이브에서 국가를 하드락 버젼으로 자주 연주하던 차, 본

앨범에서 그 인스트루멘탈을 정식 트랙으로 수록하여 꽤

눈길을 끌기도 했다.




 (Corporate America)



02년엔 다시 돌아온 델프와 다른 후배 보컬리스트 등을 규합해

5집 Corporate America로 돌아온 숄츠/보스턴. 상업적인

성과는 이전에 비해선 극히 미미해 별다른 히트곡을 양산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닥칠 불행한 미래로 인해 델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규 앨범이란 의의는 갖는다.




 (Delp)



 (Scholz)



*사망 당시 현장 정황에 대한 보도.

https://www.guitarworld.com/news/brad-delp-details-emerge-about-his-tragic-suicide



*숄츠와 언론의 소송전, 그리고 불편한 진상에 관한 보도.

https://ultimateclassicrock.com/brad-delp-suicide-lawsuit/




07년 3월 9일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에서 비보가 날아든다.

브래드 델프가 사망했다는 것. 그것도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사인에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다고 한다. 즉 바베큐용 숯불을

피워놓고 자살했다는 말...ㅠㅠ



이미 자살 규명에 대해선 사법 당국의 수사가 완료하여 다른

가능성을 전혀 따질 수 없으니 문제는 무엇이 그를 자살로

몰았는가 하는 쪽으로 세간의 이목이 전환된다. 유족과 일부

언론이 지저분하게 얽혀 억측 기사가 난무하니 각종 폭로전

및 명예훼손 소송으로 사건이 발전하기까지 한다.



유족 일부는 한때 제기된 델프숄츠 사이의 반목이 원인이라

지목했고 이를 보도한 언론과 유족을 상대로 숄츠는 정식으로

명예훼손 제소를 건다. 물론 불법행위 혐의가 드러나진 않는 걸

대법원이 최종 각하하여 마무리는 되었으나... 그럼 도대체 자살

원인이 뭐냐고 대중이 반문하던 차에...



놀라운 곳에서 은밀한 내막이 드러난다. 약혼녀의 언니가

객식구 성격으로 델프와 한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망 몇 일

전에 언니 방에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었음을 발견했고 언니

남자친구가 델프를 추궁하니 잘못을 시인했다는 것. 아이고.



아마도 몇 일 후에 약혼녀를 직접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 잠깐 동안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것으로... 현재 입장에서 드러난 최종 결론은

이러하며 이 이상 더 파봤자 망자의 명예만 더 깎일 뿐이니

대충 여기서 접자는 것이 미국의 일반적인 여론 추세이다.



몰래 카메라 설치 이유에 대해선 약혼녀가 바람 피우는 정황을

잡기 위해서란 설이 있는가 하면 흔히 할 수 있는 지저분한

상상 그대로 변태 성욕 때문이란 설까지 난무하지만... 바로

그 진실을 밝힐 주인공인 약혼녀와 만남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델프가 사망했으니 사실 확인할 길은 요원할 따름이다.



어찌 되었든 40년 가까이 밴드 보스턴의 목소리로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국적 하드락의 보이스를 대변해온 브래드 델프...!

그의 독창적 하이테너 목소리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점만이 중요할 터... R.I.P..



*I Think I Like It.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We're Ready.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Cool the Engines.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Don't Look Back. 79년 뉴저지 라이브.



*Peace of Mind. 79년 뉴저지 라이브.




*Giants Stadium Concert NJ. June 17,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7SSrZjSoRj4

 - full version (video)



*The Centrum Concert MA. August 13,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E9bhmgiVjNM

 - full version (audio)



*Hamilton Ontario Concert (Canada). 1988

https://www.youtube.com/watch?v=zcbNNuEzH2M

 - full version (bootleg video)









톰 숄츠 중심의 밴드 보스턴아메리칸 하드락의 트렌드를

바꾸었고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성적을 거두기는 했다만 절대

과대평가는 금물이다. 보스턴의 팬덤 베이스는 미국과 캐나다

정도가 고작이고 북미 경계를 벗어나서 세계구급 히트를 누린

대형 액트라 보기는 어렵다. 미국과 캐나다를 합한 역대 판매

성적이 3천만 장을 살짝 웃도는 정도..



그런 와중에 실질적으로 보스턴의 사운드 중 절반을 차지할

만큼 상징적인 보이스 컬러의 브래드 델프가 가진 위상은 리더

숄츠의 절대적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음이다.

디지털 드림 도어 랭킹에서도 델프의 가치를 꽤 높게 쳐주는

편이고 상대적으로 기타리스트 숄츠보다 더 높은 편이기도.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Vocal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html



팔세토나 카운터테너라고 오해를 많이 사는 델프의 보컬 스타일에

관해선, 하이 테너와 알토 테너의 중간 위치에 하드락에 흔치 않게

가성이 많이 섞인 깨끗한 소리라고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목소리들은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체력 저하로 급격하게

파워가 딸리게 마련인지라, 델프 보컬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80년대말 이전 라이브에 집중하는 것이 사실 좋다.



보통 흉성과 반가성의 거친 소리를 선호하는 미국 락씬에서도

델프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데에 대부분의

음악 팬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아왔고 보스턴 파워 팝이 지닌

대중적 음률 및 70년대 정신과 극강의 조화를 이루어 일정한

연령대 이상 세대에게 상당히 향수를 자극하는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강하게 굳어온 듯하다.



사운드 메이킹에 일가견이 있는 톰 숄츠의 음악 실력에 관해선

한때 상당한 과대평가가 섞여 갖가지 루머를 양산한 적도 있긴

했다만, 전반적으로는 이펙트 뽑아내는 기술력에 비해 주법의

특이성이나 특히 리프를 빚어내는 창조성에 있어선 여느 연주자에

비해 다소 밀린다고 보는 편이 정설에 가까운 것 같다. 보스턴

음악을 떠올릴 때 특별히 귀에 남는 리프는 딱히 없지 않나...

(아, More Than a Feeling은 예외..)



갑자기 델프를 잃은 숄츠는 이후에 예전에도 그랬듯이

프랜 코즈모스트라이퍼 출신 마이클 스위트 등 다른

보컬리스트를 번갈아 기용하며 올드팬과 만나는 공연

스케줄을 이어오고 있다 한다. 델프 이외에 딱히 한 사람

지정된 보컬에 꽂히진 않은 듯하다.



*1980년대 브래드 델프와의 TV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FimeJJQVglQ



*Amanda. Michael Sweet & Tommy DeCarlo on vocals.

https://www.youtube.com/watch?v=CFRxqGOBGYM

 - Brad Delp 사후엔 이 두 분 중심으로 그럭저럭 하는 듯.



*Tommy DeCarlo story on TV.

https://www.youtube.com/watch?v=9rbX0xITFxA

 - DeCarlo는 보스턴의 아넬 피네다 같은 분. 아마추어였다가

인터넷으로 발탁되셨다 한다. 전엔 마트 매니저였다고..



('Honestly' by Stryper,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w6IvUOZBZME

*Michael Sweet on vocals.

 - 마이클 스위트의 전직은 헤어 메탈 아티스트였다.






본 블로거가 꼽는 숄츠/보스턴 하의 델프 최고의 노래는 Third

Stage 앨범 중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이다. DLB 앨범의 A Man I'll Never Be에서 이어진

파워 팝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법이면서도 훨씬 세련되고 처연한

정서를 깊게 느낄 수 있어 항상 좋아하는 곡이다.



스튜디오 앨범 버젼과 함께 87년 Third Stage Tour

매사추세츠 주 워스터의 센트룸 아레나 공연 오디오 실황을

링크로 걸며 본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브래드 델프

그리워하는 올드팬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

from Third Stage, 1986)

*studio album version.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 원키 E flat에서 하나 낮춘 D major.

- 위아래 두 트랙을 연이어 들으면 앨범 버젼과 같다.



*Still in Love.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 soundboard archive: 공연장에서 의무적으로 녹음하는 기록 보관용 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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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y, the ally is never an issue now, stupid!




우리가 지금 자극적인 헤드카피에 일희일비할 때인가 싶음

https://www.theatlantic.com/international/archive/2018/05/moon-south-korea-us-alliance/560501/


디 애틀랜틱은 보스턴 소재의 월간지 정도에 해당합니다.

아주 월간은 아니고 연 10회 정도 발간한다고 하더군요.


심층 보도 전문 정론지 정도로 볼 수 있을 텐데

지역이 지역인 만큼 백인 보수층에 어필하는 기사가 많은 듯합니다.


문정인 교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세력이 창궐하네요.

전문 번역 보시고 판단하시길.


본건에 대한 분석은 5월 21일 뉴스 공장에 나오신

김종대 의원 논평을 참고하시면 거의 정확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m7AIfY4ln0


다만, 한 가지는 김종대 의원에 동의 안 하는데요.

본건을 왜곡하고 자극적 카피를 뽑은 주역은 미국인 기자 본인입니다.

조선일보는 충실하게 번역했을 뿐이죠. 맨 앞 두 단락만.


본 블로거는 그렇게 보네요.


헤드카피가 자극적이라 문제가 되고 있음을

언론사 자체적으로 알아차리기는 한 모양.


5월 21일 경에 ‘Get Rid Of’를 삭제하고

Questions’(동사)로 수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5월 17일자의 원문으로 게재합니다.

저작권 문제가 있을 경우 삭제하겠습니다.






A Top Adviser to the South Korean President

Wants to 'Get Rid Of' the U.S. Alliance

대한민국 외교안보 특보, ‘한미 동맹 종식을 바라다’


북핵 협상에 참여한 주요 인사 문정인 특보가 대한민국 안보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


우리 프리드먼 기자


2018년 5월 17일


대한민국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 한미 동맹의 종결을 보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얼핏 트럼프 비슷하게도 들리는 어조로 문정인 외교안보 특보는 일반적인 국제 관계에서 동맹이란 것이 “아주 부자연스런 것”일 수 있다며 “개인적으로야 동맹을 종식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조국의 이해 관계에 더 부합하는 조정 과정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당분간은 “주한 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을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한다.


이는 당면한 북핵 협상에 결정적인 자문역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측 고위 인사로부터 나온 발언치고는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한국이 1950년대 이후 북한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한미 동맹에 의존해온 것이 사실이며 북한이 오랫동안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해왔기에, 동맹의 존속 여부가 앞으로 있을 김정은 — 도널트 트럼프 북미 협상에서 상당한 논쟁의 여지를 남길 의제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미 양국의 당국자들은 동맹이 협상의 거래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계속 못박아왔다. 여기에 오로지 사견일 뿐임을 전제로 하며 문 특보는 동맹 관계가 아시아 안보 지형의 미래에 논리적 의제로 떠오를 수 있지만 북핵 협상 테이블에 오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의제가 지속되어 한반도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제고하는 기회로 발전할 경우 동맹 관계에 대한 새로운 셈법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가능은 하다.


“중단기적으로 한국이 동맹에 의존함은 불가피한 일일 터이다.” 본지 기자가 최근 서울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문 특보(연세대학교 석좌교수 겸임중)가 한 말이다. 이 말은 때마침 워싱턴의 핵 폐기 요구에 전면 취소로 협박해온 북한의 극적인 움직임이 금주에 나오기 전에 이루어진 논평이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지금의 동맹 체계를 일종의 상호 안보 협력 체제 같은 것으로 전환하는 일에도 희망을 걸어본다. 왜 우린 항상 서로를 잠재적인 주적 내지 준적으로만 다루어야 하겠는가?”


대중국 억제력으로 아시아에 동맹 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미국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이 가설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남한이 새로운 “동북아 안보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지지하고 나서는 상황을 가정해 보라며 문 특보는 말한다. “한국은 중국의 편을 들 필요도 없고 미국의 일방적 편을 들 이유도 없어진다. 우리 입장에서는 양 강대국에 우방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평화와 안정과 번영을 지속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 특보는 — 일찍이 트럼프가 지적했듯이 — 동맹의 부담에 대해 얘기한다. 동맹 체계로부터 벗어날 경우 “한반도는 지정학적 멍에나 지정학적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기자는 그가 한국이 갈등 상황 종식의 주체로 나서기 위해 군사 문제에서의 대미 의존도를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던 몇 해 전 발언에 대해 질문했다. 문 특보는 일전에 미국을 안보 동맹으로, 중국을 교역 대상으로, 북한을 안보 위협으로 대하고 있는 남한의 상황에 개탄해 마지 않으며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일”이라고 표현한 바 있었다.


미국이 아시아나 유럽이나 북미에 맺고 있는 동맹 관계를 훼방하는 주역은 보통 트럼프라고 인식된다. 한국에 대한 FTA 재협상, 미군 주둔 비용 인상에 대한 압박과 함께 북한에 대한 초강경 공세는 모두 한국 내 여론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문 특보의 논평에 따르자면 한국 대통령을 위시한 주요 관계자가, 특히 남북미 평화 협상을 체결할 때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북한이 단계적으로 수 년 내 취할 핵 폐기 수순이 가시화할 경우에, 동맹의 현실적 효용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맹의 미래란 것이 워낙 첨예한 사안인지라 언급만으로도 최근 한미 양국에 상당한 잡음을 일으킨 바 있다. 이번 달 초 트럼프가 — 앞서 제임스 매티스 국방 장관이 한미 동맹 및 북한 문제 관련하여 언급하기도 했던 — 28,500명 주한 미군 중 일부의 철수 가능성을 알아보라고 국방성에 요청했음이 뉴욕 타임스 보도로 알려지자, 존 볼턴 보좌관이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일”이라 일축하였고 한국 정부 역시 국민들에게 사태를 진정시키는 발언을 긴급 공표한 것이다. (2016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70퍼센트가 현 주한 미군 체제 유지에 찬성하였으며, 2018년 여론 조사에서는 한국인 중 무려 96퍼센트가 반드시 한미 동맹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북핵 협상의 중대성으로 익명을 요구한 한 한국 관료는 최근 밝히기를 북한조차도 주한 미군 철수를 “절대로 요구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 관료의 표현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미국을 일종의 동아시아의 “균형자”로 인식한다고 하며 “한반도 안보 및 번영을 위한 기반이 바로 미국”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햇볕 정책 실행 계획의 진보적 입안자이기도 한 문 특보를 만났을 때 그는 한미 동맹을 조국 안보의 필수 불가결 요소로 생각하는 한국 보수층으로부터 집중 포화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들 보수층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은 문 특보가 포린 어페어 기사에서 평화 협정 체결시 현재와 같은 주한 미군 유지를 “정당화할 이유를 찾기가 힘들지도 모른다”고 언급한 점이다. 이에 대해 문재인 정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고 (문 특보가 한 편으로는 보좌관이지만 또 한 쪽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학자라며) 평화 협정과 주한 미군 지위의 직접적인 연계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문 특보는 계속해서 — 구체적 일정은 빼고 — 남북 통일의 장기 시나리오 청사진을 제시해본다. “통일이 되면 우리 앞에는 아주 힘들고 어려운 선택지가 놓이게 된다. — 계속해서 미국의 편을 들며 중국을 적대시하는 균형 블록에 편입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과의 시류에 편승하며 대미 관계를 그대로 둘 것인가. (그게 아니면) 아예 홀로서기로 독자 노선을 걸을 것인가.” 그의 개인적 선호는 분명하다. “북한과 같은 공동의 적이 사라진다고 가정한다면, 동북아 공동의 상호 안보 체계를 구축하는데 훨씬 더 주체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게 된다.” (한국 내 여론은 중국보다 미국을 더 우호적인 나라로 인식하고 있고 한국인 상당수가 통일 한국에 가장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나라를 중국이라고 본다.)


문 특보는 그를 비난한 사람들이 포린 어페어 기사에서 자신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는 오독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는 단순히 분석적인 관점을 제시한 것이었다. 김정은이 평화 협정의 조건으로 주한 미군 체제 종식을 요구해올 경우 “사실 문제는 철수 이후에 올 것이다”는 점이다. “낡은 시대의 적국이 사라질 경우” 필연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쪽은 오히려 미국인들인 것이다. 바로 “북한이 없어졌는데 한국에서 미군은 뭘 하고 있는 것인가?”란 질문이 그것이다. 문 특보는 설명한다. “한국의 진보층 중 일부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 평화로운 한국에서 외국 군대가 왜 필요한 것인가? 트럼프가 재선되면, 아니 재선되기 전이라도 또 따지고 들 것이다. 봐라. 평화가 왔지만 미군은 여전히 한국에 있다, 한국은 주둔 비용을 더 대야 한다고. — 미군이 주둔하는데 드는 비용 중 이제는 전체 다 부담해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이렇게 되면 한국에서는 아주 새로운 국면의 논의가 벌어진다. 통일 후 주한 미군의 지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내 입장은 분명하다. 북한에서 별다른 반대 의견이 없다면, 평화 협정 이후에도 주한 미군을 계속 주둔시키자는 것이다. 주한 미군이 “동북아에서 집단 안보상의 이익”을 제공함이 분명하므로 한국 내 여론이 지나치게 갈라지는 것도 피할 수 있다고 문 특보는 설명한다. 그러나 “평화시 주한 미군의 주둔 목적, 역할, 규모”는 변화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당장 북한에 대한 남한 영토의 보호라는 명분이 사라지고 지역 안정을 유지하는 것으로 당면 과제가 이동할 터이다.


만약 북한이 끝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한다면? “그럼 아주 큰 문제이다”라고 그는 대답한다. “그렇게 되면 평화 협정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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