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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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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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10.19
    존 앤더슨 Jon Anderson
  2. 2018.12.22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음악 산업과 음악사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상징성

때문에라도, 언젠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제대로 다뤄

드려야 합당하다고 고민해온 이 분을 올리겠다.



프로그레시브 락의 역사에서 뚜렷한 분기점을 제공한

예스 Yes의 영원한 프론트맨으로서 아방가르드 계열

보컬리스트 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봉으로 오래도록

추앙을 받으실, 존 앤더슨 Jon Anderson 이야기이다.











*Roundabout. 90년대 초반 Union Tour 중.

- 라인업은 Anderson-Bruford-Wakeman-Howe

  + Squire-Rabin-Kaye-White = 무대 위 8인조.




1944년 스코틀랜드 출신 가계에서 맨체스터 북방의 랭커셔를

출생지로 태어난 존 로이 앤더슨. 넉넉치 못한 가정에서 축구

선수를 꿈꿨지만 일찍이 열 다섯 나이부터 학교를 그만 두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이런저런 초기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가 알바 뛰던 클럽 사장님 소개로 런던에서 크리스

스콰이어를 만나며 밴드 결성에 의기투합하게 된다. 68년.



앤더슨아트 가펑클의 전성기 보이스 텍스처와 상당히 유사한

면도 발견되거니와, 두 사람이 교집합으로 찾은 음악적 지향성은

놀랍게도 사이먼 앤 가펑클이었다. 그때는 팝씬 전체가 본능적인

포크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으니 사실 당시를 살아 본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긴 하다.



15년에 작고하신 스콰이어는 락 음악 역사상 가장 뛰어난

베이시스트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분이다. 보통 훌륭한

베이스 주자가 핑거링플럭킹, 태핑 등 손가락을 주로 쓰는데

반해 피킹만으로도 후배들 기 팍팍 죽이는 테크닉과 음악성,

두 토끼를 다 잡는 공전절후의 전설이셨다. 디스토션 걸린 거친

톤에도 능하고 재즈 모드도 한 가닥 하는 등 전천후이신지라

상대적으로 기타가 소프트한 예스 사운드에서 핵심이신 분.






('America' from Yesterdays,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3CACWj18ruk

*Simon & Garfunkel 원곡의 커버.

- 72년 싱글 발매 후 75년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




예스의 1집이 포크 색깔을 조금 드러내며 팝 지향적 성향을 가진

것도 이해가 갈 만한 일일 터이다. 결성 초기 예스앤더슨

스콰이어 두 사람의 결탁으로 밴드를 리딩하고 나머지 사람이

하나 둘 규합한 형태였는데 이런 식으로 드럼빌 브루포드,

기타피터 뱅크스, 키보드토니 케이가 모여 들었다고.



그냥 팝 밴드였던 1집 Yes심포닉 락의 가능성을 보여준 2집

Time and a Word는 골수 팬을 제외하고 상업적으로 큰 의미를

찾기 어려우니 과감하게 생략하는 점 양해 바란다. 2집에서

대편성 관현악을 동원한 방법론에 뱅크스가 회의 어린 시각을

보였고 끝내 의견을 좁히지 못해 발매 직전에 탈퇴해 버린다.

대체 연주자로 한때 로버트 프립(!)의 영입을 시도했으나 결국

최종 낙점을 받은 사람은 스티브 하우였다.



폄하하긴 미안하지만 하우뱅크스보다 훨씬 다채로운 기법에

능하고 , 포크, 블루스, 컨트리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를 줄 알며

일렉트릭어쿠스틱을 가리지 않는 방법론에 능하다는 점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 앞선 두 앨범의 상업적 실패로 음반사에서

잔뜩 퇴진 압박을 받고 있던 차였기에 앤더슨스콰이어

새 진용으로 절치부심하고 창작에 몰두하였다.



 (The Yes Album)




71년 3집 The Yes Album이 결과물. 그들이 얻어낸 첫번째

상업적 성공작이다. 전작영국 차트에 처음 진입하긴 했으나

미미한 성적이었고 본작에 와서 앨범 차트 4위까지 오르고

미국 앨범 차트에선 40위까지 올랐다. 앨범의 대표 트랙인

I've Seen All Good People의 1부 파트곡 Your Move

싱글로 발매되어 핫100에서 탑40 오르기까지 한 것.



이번 포스팅 내내 그런 태도를 유지하겠지만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싱글 중심의 상업성 모드로 활동하는 액트가 아니다.

주로 앨범 차트의 성적과 이를 뒷받침하는 팬덤 중심의 끈끈한

유대 관계와 프로모션 투어 실적이 주요한 수익원인 밴드이다.

그렇더라도 이따금 싱글 히트가 올라오면 앨범 전체를 알리는데

살짝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 기실 모든 프로그 씬의

아티스트들 수익 구조가 대동소이할 터이다.



밴드의 오랜 역사를 지탱하는 활동 구조가 The Yes Album

와서 비로소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작이 참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전작 두 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커버 곡을 싹 없애고 본작부터 크게 맘먹고 자신들의 창작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나타난 결과이니 더욱 뿌듯한 것이다. 밴드

멤버들의 치열한 내부 토론을 통해 프로그레시브라는 장르적

지향성 역시 자연스럽게 결론으로 도출해낸 셈이기도 하고.



('Starship Trooper' from The Yes Album, 1971)



 (Portuguese 12-string Guitar)




그런 목표를 명징하게 구현해낸 본작 최고의 트랙은 뭐니뭐니

해도 Starship Trooper가 되겠다. SF장르인 로버트 하인라인

저명한 소설에 영향을 받은 가사이다. 작사는 물론 앤더슨

작품이고 스콰이어하우의 공동 작곡이다. Life Seeker -

Disillusion - Wuerm의 3부로 구성된 9분 여의 대작으로서

프로그레시브의 전성기 역사를 장식하는 명곡이다. 무엇보다

예스의 음악적 지향성을 규정하는데 밑거름이 된 작품이다.



그밖에 오프닝 트랙 Yours Is No Disgrace를 놓치지 않으

본작이 주는 느낌을 잡을 수 있을 테I've Seen All Good

People에서 하우포르투기즈 12현 기타를 멋드러지게 치는

부분도 캐치하시길. (물론 예나 지금이나 하우의 시그니처

기어는 ES-175지만서도..)



전반적으로 하우의 재기발랄한 솔로잉에 비해 키보드 파트가

뭔가 허전하게 들리는 앨범이기도. 케이는 스스로 아이덴티티를

오르가니스트로 규정한 뮤지션인지라 아날로그 신디사이저

도입에 거부감이 있던 편이었고 이 점이 팀의 균열에 영향을

미쳐 결국 해고된다. 그의 대체자로서 데이빗 보위와 음악하던

릭 웨이크먼출현하며 드디어 역사가 다시 쓰여진다.



('I've Seen All Good People' from The Yes Album, 1971)

*73년 라이브 앨범 Yessongs에 실린 버젼.



('Yours Is No Disgrace' from The Yes Album, 1971)

*73년 라이브 앨범 Yessongs에 실린 버젼.




 (Fragile)




71년 하반기 내내 작업하여 연말에 낸 4집 Fragile. 예스 연대기

사상 최대의 히트를 기록했고 프로그레시브 최고의 명반으로

누구나 엄지 척하고 꼽는 세기의 걸작 앨범이 웨이크먼 영입과

함께 나와 버렸다. 락 음악의 역사가 새로 쓰여진 순간이었다.



제작이 이루어지던 당시 밴드의 사정은 여러 모로 어수선했다고.

지난 두 번의 앨범을 거치며 두 명의 주요 멤버를 잃었고 상업적

가능성은 그나마 희망의 불씨를 살렸지만 다 함께 계속 음악을

해나갈 수 있을까 불안해 하던 한창 20대 초중반의 젊은이들에

불과하니 그럴 수밖에. 앨범 타이틀은 언제든지 깨질지도 모를

밴드의 조직 상황과 멤버들의 심리를 상징하는 의미였다 한다.



희한하게도 밴드의 시대였던 70년대는 항상 그렇게 불안불안한

환경에서 최고의 역작이 양산되던 때였다. 미국 앨범 차트 4위,

영국 앨범 차트 7위, 발매 당시 미국 골드영국 실버 인증,

커트한 싱글핫100 차트 13위 등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밴드 커리어 최고 성적의 역사가 이 시기에 쓰여진 것이다.



('Roundabout' from Fragile, 1971)

*가사는 회전 교차로 위 유쾌한 드라이브 이야기.

- 의외로 심각한 가사는 아니다. 단순한 메세지도 명곡의 조건.



 (Gibson ES-175)




커트 싱글은 물론 프로그 최고의 명곡 Roundabout. 예스

시그니처 튠이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작품이다.

하우어쿠스틱 인트로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다가 베이스

다이나믹스의 교과서 같은 스콰이어의 유명한 리프

verse를 이끌고 가는 구조이다.



키보드 파트가 전작에 비해 훨씬 더 탄탄해졌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며 런던 왕립 음악원 출신으로 클래식 기본기가 강한

웨이크먼이 왜 불세출의 연주자인지 탄식하게 만들 터이다.

변칙 어프로치에도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브루포드

jazzy한 프리 스타일에도 경탄을 자아내게 될 것이며...



70년대가 아니면 나오기 힘든 슈퍼그룹의 빈틈없는 합.

중심에 앤더슨의 미성이 자아내는 신비로움과 장중함의

고결한 합성 작용 같은 것이 있다. 평생에 걸친 예스 라이브

무대에서 이 곡은 오랜 팬덤의 애국가처럼 셋리스트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앵콜 곡이었다. 전성기 예스를 상징하는

전형성을 간직하면서도 대중적 감성을 잃지 않은 명곡...

더 말해 무엇 하랴. 어떤 라이브든 찾아서 즐겨 보길.



 (Roundabout, single)




('Long Distance Runaround' from Fragile, 1971)

*dissolved into 'The Fish (Schindleria Praematurus)'.



총 9개 트랙 중 넷은 다섯 명의 합동 작업, 다섯은 개인이

창작한 곡으로 구성된다. 그룹 트랙 중 Long Distance

Runaround는 비록 앤더슨이 작곡을 주도하긴 했어도

멤버 전체의 팀워크가 빛나는 또 하나의 명곡이다. 역시

오래도록 무대에서 팬덤이 사랑해 마지 않는 시그니처 튠.

하우의 기타 리프와 스콰이어의 콤비네이션이 인상적이며

Roundabout의 싱글 B사이드에 실리기도 했다.



The Fish스콰이어의 솔로잉 곡인데 팬덤에서는 오랫동안

LDR의 2부 파트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LDR에서

트랙을 커트하지 않고 디졸브로 바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라이브에선 두 곡을 한 곡처럼 묶어 6분 짜리로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Heart of the Sunrise' from Fragile, 1971)



예스라이브 셋리스트에서 네번째로 빈번하게 연주된다는

Heart of the Sunrise브루포드스콰이어가 중심이

되는 트랙이다. 6/8, 3/4, 4/4 등 타임 시그니처를 이리저리

사정없이 옮겨가며 프레이징을 구성해 수많은 후배 밴드를

좌절시켰던ㅠ.. '따라올테면 따라와봐' 하는 느낌을 받을 듯.




('South Side of the Sky' from Fragile, 1971)



South Side of the Sky에선 하우헤비한 어프로치조차

능수능란하다는 것, 예스웨이크먼을 영입한 것 참 잘한

일이라는 것, 앤더슨스콰이어 등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보컬 하모니예스 음악의 재미를 더하는 요소라는 것 등

세 가지 매력을 발견하리라 확신한다.







최근까지 미국에서만 2백만 장이 팔려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 영국에선 플래티넘. 구불구불 물결치는 듯

독특한 예스의 로고는 저명한 디자이너 로저 딘이 만든 건데

바로 본작에서부터 등장함을 알 수 있다.



Fragile 앨범을 듣고도 예스가 왜 최고의 밴드인지 모르겠다고?

그럼 요즘 세상의 쓰레기 음악에 지쳐서 귀가 썩었다는 뜻이니

귀청 정화의 시간을 급속하게 가지길 권유한다. 헤비메탈 씬에

딥 퍼플의 제2기가 있다면 프로그 씬에는 제3기가 있다...

이거슨 만고불변의 진리일지니.



('Roundabout' from Yessongs, 1973)

*73년 라이브 앨범 Yessongs에 실린 버젼.




 (Close to the Edge)




1972년. 음악 활동의 상업성 면에서 최고의 시기를 구가하던

다섯 명의 젊은 뮤지션들이 연초의 전작 투어를 마치고 다음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 예술적 창의성에 있어 강한 자신감으로

무장해 있던 이들은 교만하다는 오해를 살 만큼 완성도 높은

대곡 셋으로 채운 작품을 주조해낸다. Close to the Edge.

다섯번째 앨범으로 예스 음악성의 정점을 찍었다는 앨범이다.



비교적 짧은 스코어로 상업적 코드를 맞춰 보려던 전작에 비해

정말 원없이 하고 싶은 것 다 질러버리고 전성기 멤버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역작이었다. 19분, 10분, 9분에 달하는 단

세 개의 대작 트랙으로만 앨범을 채워 음악적 자존감이 하늘을

찌른다는 부러움 섞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72년경 Wakeman의 gear set.

- Minimoog Model D

- Mellotron M400

- Hammond C-3

- RMI 368 Electra-piano

- Steinway Concert Grand





('Close to the Edge' from eponymous album, 1972)
*pipe organ 솔로잉은 12' 10"쯤.
- 13' 55"쯤의 무그 솔로잉도 매우 유명한 프레이즈.


음악가로서 실력과 에고의 정점을 찍던 사람은 단연 웨이크먼.
피아노해먼드무그, 멜로트론, RMI를 종횡무진 갈아타며
신들린 연주를 들려주었고 동료들은 그의 창의성에 매료되었다.
특히 타이틀 트랙 Close to the Edge의 3부 클라이맥스에선
하우의 조언으로 런던 바비컨 교회 파이프 오르간을 섭외해
종교적 순고함의 극치를 표현한 기념비적 연주를 구현해낸다.
(라이브에선 직접 표현하기가 힘들어 여러 모로 아쉽다.)


Close to the Edge클래식 악곡 구성의 영향을 반영해 마치
교향곡처럼 4개의 파트로 구성한 명실상부 예스의 대표 작품.
헤르만 헤세가 석가모니의 행적을 엮어 써낸 소설 싯다르타
내용을 앤더슨 가사로 풀어낸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너무
오리엔탈 판타지 같아 오글거리기도 하지만 70년대 초반임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용인할 법하지 않을까.
- 사실 헤세의 원작 소설이 지나치게 유럽 백인 관점에서
  지적 허영심을 부추긴다 비판 만하다.


1부의 과감한 불협화음 어프로치에서,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
함께 투어하며 터득한 당시 퓨전의 사조를, 예스 식으로 풀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물론 원류는 60년대 프리 재즈일 터. 전체
프레이징의 밑바닥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동력이 강력한 베이스
라인임을 깨닫게 된다면 스콰이어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가진 연주자인지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따라가며
자기 음악을 별도로 완성하고 있는 브루포드는 또 어떻고.



('And You and I' from Close to the Edge, 1972)



시벨리우스, 바그너, 브루크너 등 19세기 후반 후기 낭만파
짙은 영향을 읽을 수 있는 And You and I싱글로도 커트해
핫100 42위에 올랐었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멜로트론
무그를 적정배합할 줄 아는 웨이크먼의 창조성이 빛을 발한다.



('Siberian Khatru' from Close to the Edge, 1972)


아랍어 방언에서 제목을 따온 Siberian Khatru는 대단히
역동적인 하우리프로 유명하다. 파트별 콤비네이션이 흡사
funk 장르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레드 핫 칠리
페퍼스존 프루시안테가 영향받은 트랙이라고 한다.


 (Rickenbacker 4001)




미국 앨범 차트 3위로 역대 최고의 성적을 세웠고 영국 차트에선

4위까지 올랐다. 최근까지 영미 양국과 캐나다 플래티넘 기록을

세운 디스코그래피 사상 최고의 완성도와 성적을 보여준 걸작.

프로그레시브 장르의 신기원을 이룩한 장르의 명작 앨범. 더는

올라갈 곳 없을 듯하던 이들에게도 위기가 오고 있었으니 제작

프로세스에 불만을 가지던 브루포드가 탈퇴를 선언한 것이다...




 (Yessongs)




브루포드재즈아방가르드 성향이 꽤나 강한 뮤지션인지라

전작의 제작 과정에서 음악 취향 차이가 심해 고생했다고. 결국

킹 크림슨으로 이적하기 위해 Close to the Edge 녹음제작

끝내자마자 탈퇴를 단행한다. 이후 킹 크림슨에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여줬으니 제자리를 찾아간 셈일까. 아쉽긴 하지만.



후임으로는 플라스틱 오노 밴드에서 존 레논의 세션을 담당하던

앨런 화이트가 낙점된다. 장르를 두루 거친 다양한 경험치에다가

당장 영입이 가능했던 운신의 폭이 영향을 미쳤던 듯. (후보 중엔

에인슬리 던바도 있었단다.) 단, 팬덤에 따라서는 스콰이어 -

하우 - 웨이크먼 - 브루포드 시절의 환상적 연주 합이 그리워

화이트를 폄하하는 경향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Perpetual Change' from Yessongs, 1973)

*Bill Bruford on drums.

- original track belonging to The Yes Album, 1971

- 11' 30"쯤부터 브루포드의 솔로잉이 등장하는 소중한 트랙.



('Long Distance Runaround' from Yessongs, 1973)

*Bill Bruford on drums.

- The Fish가 왜 Squire의 곡인지, 수려한 솔로잉을 들어 보시라.




73년에 발매된 최초의 라이브 앨범 Yessongs는 과도기 시절의

질풍노도 같은 연주력 상승치를 담아낸 유일한 아카이브라서

팬덤이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작품이다. 트리플 앨범으로 대부분

화이트의 연주를 담고 있지만 Long Distance Runaround

일부 트랙은 브루포드의 연주를 담고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동명의 콘서트 필름도 발매되어 정말 흔치 않은 당시 동영상도

구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 플래티넘에 차트 12위까지 올랐고

영국에선 7위까지 올라 라이브 앨범 중 가장 히트한 성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물오른 전성기 시절의 기록이니까.




('Close to the Edge' from Yessongs, 1973)

*Alan White on drums.



('Starship Trooper' from Yessongs, 1973)

*Alan White on drums.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73년 6집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에 대해선 어찌

논평해야 하나 퍽 망설여진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 처음으로

을 찍고 미국에선 6위에 올랐으며 양국에서 골드 인증을 받아

상업적으로 실패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결과가

전작들의 성공에 기댄 것이 아니었나 하는 회의도 생긴다.



당시 힌두교 베다 철학에 심취해 있던 앤더슨이 산스크리트

경론서를 바탕으로 작사했고 주요 동기의 작곡은 하우

둘이서 전담한 방식으로 진행했다. 네 개의 전 트랙이 18~

22분에 달하는 대곡 구성이고 워낙 길어서 싱글 커트도 할

형편이 아니었다.



프로그 장르 미학의 정점을 찍는 것은 좋은데 너무 과하지 않나

싶은 느낌이랄까. 또 하우의 역량에 집중하는 것은 좋았으나

상대적으로 웨이크먼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듯했다. 이 과정에

불만을 품은 웨이크먼이 결국 밴드를 떠나는 결과도 초래했고.



네 사람 연주의 조합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는

두번째 트랙 The Remembering을 들어볼 만하다. 웨이크먼

혹은 스콰이어의 연주력도 가장 만족스러운 편이다. 현재까지도

본작에 대한 평가는 팬덤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라 하겠다.



('The Remembering (High the Memory)' from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438-Ii_BueM




 (Relayer)




다소간 창작적 과욕을 부린 앤더슨의 패착으로 좋은 멤버를

잃은 상황이었다. 대체자로 반젤리스를 고집해보기도 했지만

밴드 포맷에 어울리는 뮤지션은 아니었다. 결국 로잔 음악원

출신으로 클래식재즈에 능한 패트릭 모라즈가 영입된다.



74년의 7집 Relayer는 영국에서 4위, 미국에서 5위까지

오르며 중흥과 쇄신을 향해 몸부림친 결과물이었다. 다소간

예전의 예술적 성과를 회복하는 듯했고 평단도 대체로 우호적

평가를 내렸다. 어찌 보면 문제가 이들 자신에게 있다기보다

프로그 장르의 인기가 서서히 사그러들고 있었다는 점 아닐까.



웨이크먼과 질감이 전혀 다른 모라즈의 연주는 잘 녹아들고

는데 어딘지 퓨전의 느낌도 묻어났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소재로 한 22분짜리 대곡 The Gates of Delirium

본작을 대표하는 트랙. 후반부 파트가 싱글로 커트되기도 했다.

싱글 차트 성적은 별로였지만.



('The Gates of Delirium' from Relayer, 1974)

https://www.youtube.com/watch?v=g8kLYZvVP7s




 (Yesterdays)



75년 발매된 첫 컴필레이션 앨범 Yesterdays는 1~2집의

트랙을 종합한 거라서 당시엔 반응이 좀 있었지만 요새는

상당한 희귀 음반이 되었을 게다. 로저 딘이 1970년대에

마지막으로 디자인한 커버라는 점이 더 중요할지 모른다.




 (Going for the One)




77년 8집 Going for the One의 제작 구상 과정에서 앤더슨

다시 웨이크먼을 꼬시는데 성공하여 모라즈가 쫓겨난다.ㅠ 꽤

안타깝기는 하지만 웨이크먼의 재결합으로 모두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지난 두 앨범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또

모라즈화이트 결합이 전체 균형에 어떤 균열을 가져왔는지.



욕먹을 각오하고 논평하지만 본 블로거는 디지털 드림 도어 같은

사이트에서 더 높게 평가한 TfTORelayer보다 Going for the

One이 훨씬 더 높은 완성도의 '' 앨범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 프로그란 장르에 한정해서는 DDD의 평가가 옳을지 모르지. 물론

이젠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이런 데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Wonderous Stories' from Going for the One, 1977)

*이들이 발표한 최초의 공식 뮤직 비디오.




돌이켜보면 모라즈화이트는 의외로 플레이 스타일이 직선적이고

선이 굵은 편이었다. 아기자기하게 디테일을 살린 장식음을 잔뜩

먹인 어프로치에 그리 최적화한 연주자는 아닌 것. 문제는 이들의

단점이 곧 브루포드웨이크먼의 장점이라는데 있고 그런 특징이

예스의 최전성기 작품성을 일궈낸 동력원이라는 점. 브루포드

그렇다 치고 웨이크먼의 가세로 이런 점이 보완되니 작풍 자체가

수 년 전 전성기의 모드를 회복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Going for the One' from eponymous album, 1977)

*이 곡의 Anderson은 왠지 후배 Geddy Lee를 연상케 한다.




상업적인 감각이 살아 있는 Wonderous Stories, 다이내믹한

락의 코드를 살린 타이틀 트랙 Going for the One, 15분여의

대곡으로 5집 시절 구성력을 되살린 Awaken, 평단의 극찬을

받은 신비주의 감성의 트랙 Turn of the Century 등 다섯 개의

알찬 트랙이 제각기 상이한 매력을 뽐내며 맛있는 조합을 보여

주었고 이는 팬덤으로 하여금 Fragile의 부활이란 연상 작용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Turn of the Century' from Going for the One,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g0k-Klq-FNA




즉 연주력 과잉의 오만한 군더더기를 없애고 음악적 풍미의

조합과 구성이란 본질에 충실하니 평단과 팬덤의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진 셈이다. 영국 앨범 차트에서 마지막으로

기록했고 미국에선 8위를 기록해 상업적 성과도 준수했다.

Wonderous Stories영국 싱글 차트 7위에 올라 역대

최고 기록을 세우기도. - 영국에서. 미국 최고 성적은 후에..



('Awaken' from Going for the One, 1977)

*Wakeman이 5집에 이어 church pipe organ을 다시 도입했다.

- 스위스 브베에 있는 교회에서라고.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Progressive Rock Album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albumsprog.html




 (Tormato)




78년 9집 Tormato는 밴드의 시대 후반기에 콘서트 투어의

티켓 판매고가 정점을 찍던 시절을 대변하는 앨범일 것이다.

예스의 스튜디오 앨범 중 가장 빠른 시간에 최고 판매고를

기록하여 미국에서 플래티넘, 영국에서 골드 인증을 받은,

당대 상업적 아레나 락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당시 언더그라운드를 점령한 punk rock

뮤지션들로부터는 집중적인 비토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허나

당시 예스의 공연은 어디 가나 매진의 연속이었고 돈을 제일

잘 벌던 시절이었는데 뭐.. 앨범 트랙들의 전반적인 경향도

대중성과 상당히 타협한 혐의가 짙었고.



('Don't Kill the Whale' from Tormato, 1978)




영국 싱글 차트 탑40까지 오른 Don't Kill the Whale이나

Release Release 같은 트랙을 들어보면 이 사람들 참 많이

달라졌구나 싶을 게다. 웨이크먼리드 기어를 Polymoog

갈아타던 때였는데 이 두 트랙에 나오는 솔로잉은 꽤 들어볼

만하다, 키보디스트 팬이라면. RR에 나오는 화이트의 드럼

솔로잉은 ADT란 녹음 기술로 구현한 것이라고. RR의 하이

노트는 꽤 버거워라이브에선 앤더슨이 늘 제외시켰단다.



*ADT = automatic double tracking.

- 믹싱 과정에서 테이프 딜레이 방식으로 원본 파형을 두 개

트랙으로 강화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소리를 두텁게 키우는 것.



('Release Release' from Tormato, 1978)




('Future Times / Rejoice' from Tormato,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Nt0w7upsRq4

*대체로 비중이 웨이크먼에 치우쳐 있다는 느낌적 느낌이랄까..



('Onward' from Tormato,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hbowD1NZ-zc

*Squire가 쓴 곡 중 가장 아름다운 음률인 듯.




성공적인 투어였지만 차기작을 위해 다시 모였을 때 예스

음악 방향성을 놓고 둘로 갈라져 있었다. 더 가볍고 판타지를

강조하는 쪽으로 가자는 앤더슨웨이크먼. 반면 하드하고

헤비한 어프로치를 원한 하우, 스콰이어, 화이트. 프로세스가

진척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고 결국 앤더슨

웨이크먼이 탈퇴를 선언하는 지경까지 가버린다. 아이고.



물론 역사가 스포일러라고 몇 년 후에 다시 뭉치긴 하는데 -

예스의 사운드에서 앤더슨의 보이스를 빼면 뭐가 남겠나. -

밴드와 떨어져 있던 몇 년 사이 앤더슨은 오래도록 꿈꿔온

개인 프로젝트 활동에 전념한다. 바로 반젤리스와의 협업.

야~ 신난다..






앤더슨은 두어 차례 그를 예스 액트에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멤버나 제작진이 반대하기도 하고 반젤리스의 음악 패턴도

궁합이 안 맞기도 하여 한동안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사실 75년에 그와의 첫 결합 기회가 찾아왔다.



이젠 희귀 명반으로 남은 반젤리스의 솔로 앨범 Heaven

and Hell이 75년에 발매되면서 가사가 들어간 트랙이 딱

하나 들어갔는데 여기에 앤더슨을 초빙한 것. So Long

Ago So Clear란 곡인데 신비로운 감수성을 가진 보컬과

연주자가 만나 궁극의 상생을 보여준다.



('So Long Ago, So Clear' by Vangelis feat. Jon Anderson, 1975)



('12 o'clock' by Vangelis,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C6eFcCL-Ync

*익히 들어봤을 마성의 BGM. Heaven and Hell 앨범.




 (The Friends of Mr. Cairo)




존 앤 반젤리스로 명명하게 된 이들의 협업. 전성기는 80년대

초반까지인데 - 앤더슨이 예스로 복귀하기 전까지 - 81년에

영국 차트 6위까지 오르는 등 The Friends of Mr. Cairo

앨범의 반응이 가장 좋았다. I'll Find My Way Home이란

싱글 히트 튠까지 나왔더랬다. - 영국 차트 6위.



('I'll Find My Way Home' by Jon and Vangelis, 1981)



('The Friends of Mr. Cairo' by Jon and Vangelis, 1981)

*원곡은 12분짜리인데 이건 뮤비에 맞춘 짧은 버젼.

- 30~40년대 말타의 매 같은 느와르 필름의 경향을 표현.



이듬해 무려 디스코의 여왕 도나 섬머가 커버하시기도 한 State

of Independence는 원곡 반응은 시원치 않았지만 섬머

커버가 핫100에서 탑40에 근접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State of Independence' by Jon and Vangelis, 1981)



('State of Independence' by Donna Summer,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cPlNrP9B2Zs

*심지어 프로듀싱은 바로 그 Quincy Jones.







그 사이 예스는 죽쑤고 있었냐고? 평론가들을 설득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팬덤이 문제였다. 핵심 멤버 둘을 잃고 어수선한

가운데 급하게 낸 80년 10집 Drama의 초반 반응은 영국

차트 2위까지 오르는 등 괜찮았으나 팬들이 멤버 교체를

인지한 때문인지 뒷심이 받쳐주지 못했다. 투어 끝내고 그

싸늘함을 실감한 밴드는 결국 해체를 선언한다. 아이고2.



('Into the Lens' by Yes, 1980)

*MTV 시대인지라 많이들 준비한 것이 눈에 띈다.

- 교체 멤버는 Trevor Horn과 Geoff Downes.

- The Buggles 시즌2 및 Asia와 GTR 프리퀄.



('Machine Messiah' by Yes,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dXsFByRJsos

*Drama의 오프닝 트랙이자 가장 긴 대곡.

- Vocoder 혼합한 헤비메탈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극단적인 팬덤은 버글스의 아류 냄새가 너무 난다고 깐다.ㅜ

- 의외로 혼의 음색이 앤더슨 느낌을 꽤 풍긴다는 것이 함정.







82년경이었나. 해체하고 어슬렁대던 스콰이어화이트에게

남아공 출신 기타리스트 트레버 래빈과 연결될 기회가 생긴다.

합이 잘 맞네, 싶어 토니 케이까지 끌어들여 밴드 새로 만들까

하는 궁리를 하던 차... 스콰이어가 파티에서 앤더슨을 만난다.

같이 해볼래? 제안을 덥썩 무는 그. 요상하게 전설적 밴드의

새 버젼 모양새가 되자 래빈은 내켜하지 않았다고.. 궁시렁..



 (90125)




그렇게 어영부영 몇 해 만에 예스는 다시 재결합한다. 83년에

새 앨범 90125를 들고. 프로그예스뉴웨이브 버젼으로

완전 변신하여 새로운 팬덤을 형성하지만 기존 프로그 팬에게

지대하게 욕쳐먹은... Owner of a Lonely Heart란 명곡을

배출한... 바로 그 앨범, 11집.



발매 당시 미국 빌보드200에서 5위, 영국 앨범 차트 16위까지

오르는 등 예전 전성기 정도의 성적을 회복하는 정도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가장 시장이 큰 미국에서 판매고가 넘사벽 급으로서

현재까지 3백만 장을 넘기고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빼어난

결과를 얻어낸지라 본작이 중요한 것.



('Owner of a Lonely Heart' from 90125, 1983)

*앨범 타이틀에 큰 의미는 없고 그저 소속사의 카탈로그 일련번호.



('Cinema' from 90125,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qSRzlThuXmM




시그니처 히트 싱글 Owner of a Lonely Heart예스의 유일한

핫100 1위 곡. 인스트루멘탈 트랙 Cinema로 이들의 유일한 그래미

어워드까지 수상했을 정도였다. 개별적으로는 소소한 히트였으나

Leave It, It Can Happen, Hold On, Changes 등 후속

싱글도 줄을 이어 앨범의 판매를 도왔다.



본작의 성공에 힘입은 84~85년의 9012Live Tour예스의 역대

투어 중 최대 투자가 이루어져 최대 수익을 거둬들였다. 저명한 영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연출로 9012Live콘서트 필름을 제작해

발매했고 당시 예산으로 1백만 불이 넘는 특수효과를 차용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단다.



('Leave It' from 90125, 1983)



('It Can Happen' from 90125, 1983)




래빈, 스콰이어, 화이트, 케이앤더슨 조합이 8기 예스를 구성한

멤버들. 당시에는 래빈의 스타일을 놓고 설왕설래,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팬덤에서. 또 뭔가 2프로 부족한 케이의 스타일 놓고도

웨이크먼 언제 복귀하냐, 반젤리스 가능성 없냐, 등등 온갖 썰이

난무했더랬지... 다 옛날 이야기다.



래빈은 본래 싱어송라이터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라 넘사벽급

앤더슨의 존재감에 상당한 부담감을 가졌다는 후문. 또 신디 다루는

실력도 한 가닥 하는지 묘하게 반목하는 사이였던 케이가 잠시나마

탈퇴했다가 에디 잡슨이 메꾸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단다.

하긴 전체 방향성에 있어 래빈스콰이어가 다 만든 모양새

앤더슨은 숟가락만 얹은 느낌이 살짝 들기 시작한 것도 사실..



('Hold On' from 90125, 1983)



('Changes' from 90125, 1983)




 (Big Generator)




어쨌든 물들어올 때 노저으라고, 잘 팔리면 장땡이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86년부터 12집 제작에 착수한다. 프로듀서

맡던 트레버 혼래빈 사이에도 트러블이 생겨 아예 제작

전반을 래빈이 주도했단다. 그래서 이듬해 나온 것이 신작,

Big Generator.



이제 예스는 더 이상 프로그 아니에요, 선언한 듯한 앨범.

래빈의 입김이 정말 센 앨범이었다. 미국 앨범 차트 15위,

영국 17위에, 미국 시장 인증은 플래티넘까지 받는 등...

상업성과 예술성 양쪽에서 꽤 어중간한 평가를 받았다.



앤더슨은 여전히 붕뜬 분위기에서 넘사벽급 보컬 실력만

자랑하는 모양새랄까. 어쨌든 그래미 어워드 후보 지명도

받고 (마지막) 핫100 탑40 히트 싱글도 둘이나 나오는 등

선방은 했다...만. 앤더슨의 위상이 뭔가 물과 기름인 것..



('Love Will Find a Way' from Big Generator, 1987)

*미국 싱글 차트 Hot 100 30위, 메인스트림 락 차트 탑 기록.



('Rhythm of Love' from Big Generator, 1987)

*미국 싱글 차트 Hot 100 40위, 메인스트림 락 차트 2위.



('Shoot High Aim Low' from Big Generator,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CNnKau1OLp4

*미 메인스트림 락 차트 11위.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으악. 80년대 말은 온갖 슈퍼그룹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밴드의 시대 마지막 광채를 휘날리던 때였는데, 옛 예스

앤더슨이 이 기회를 놓칠소냐. 앤더슨이 붕뜬다고 했잖나.

결국 가장 잘 나갔던 3기 멤버들 - 스콰이어 빼고 - 그들을

다시 소환하여 슈퍼그룹을 결성하고 만다. ABWH. 두둥.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커버 디자인도

로저 딘이 컴백하시고 누가 봐도 예스 앨범인데 예스를

예스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사태의 원인은 스콰이어..

상표권을 그가 독점 소유하고 있었거덩. 이그. - 베이스

누가 쳤냐고? 전가의 보도, 토니 레빈께서..



사이드 프로젝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진성 팬덤은 누구든

본작의 가치를 알아봤기에 영국 앨범 차트 14위, 미국 30위

등 성적도 준수한 편이었다. 가사 연속성에서 예스 시절과

연결되는 Quartet, 싱글로도 나온 Order of the Universe

등 대곡 트랙들에 진정한 매력이 있다고 하겠다. 특히나

디지털 신디사이저의 시대를 맞아 웨이크먼의 표현력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하다.



('Quartet' from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1989)



('Order of the Universe' from ABWH, 1989)




뭐 이렇게 이합집산이 심하냐 싶은 이분들, 결국 스콰이어

예스 네 명과 ABWH 네 명이 합쳐 새롭게 예스를 결성한다.

- 8인조. 이쯤되면 팬덤 고문이다. 90년대 초반 이렇게 뭉쳐

앨범도 내고 여덟 명이서 사이좋게 투어 다니면서 연주력의

정점을 세계 만방에 자랑하셨더랬다.



이후엔 여전히 여러 멤버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지금까지도

투어를 이끌며 잘 살고들 계신다. 금세기까지도 예스라이브

아카이브가 여러 버젼 남아 있지만 개인적으론 90년대 초중반

시기가 가장 반짝반짝 하지 않나 싶다. 그 이후엔 아무래도

나이가 있어서, 특히 앤더슨의 기량은 많이 떨어져 보인다.



마지막까지 예스에서 탈퇴하지 않아 상표권을 움켜쥐고 계셨던

크리스 스콰이어는 15년에 지병으로 돌아가시고 만다. RIP...

안타깝게도 그가 돌아가신 후 17년에 락앤롤 명예의 전당

헌액되어 원년 멤버 중 그만 빼고 다 모여 자축하기도 했다.

(이때 공연에서 베이스게디 리가 쳐줬다.)




*Roundabout. 01년 네덜란드 Symphonic Live; Magnification Tour.

- 무대 난입해 춤추는 분들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피날레 곡이라서..

- 라인업은 Anderson-Squire-Howe-White.

- 키보드에 투어 세션 Tom Brislin.



*Starship Trooper. 84년 독일 공연, 9012Live Tour.

- 라인업은 Anderson-Squire-Rabin-Kaye-White.



*Long Distance Runaround. 04년 스위스 공연, Lugano Festival.

- 라인업은 Anderson-Squire-Howe-Wakeman-White.



*Close to the Edge. 75년 영국 공연, Relayer Tour.

- 라인업은 Anderson-Squire-Howe-White-Moraz.



*Heart of the Sunrise. 89년 ABWH로서 공연.

- 베이스에 투어 세션 Jeff Berlin.






전성기 시절 천사처럼 하늘에서 강림한 듯한, 천상의 목소리를

자랑하신 존 앤더슨. 보컬리스트로서 프로그레시브라는 서브

장르에서 길고 굵게 한 획을 당당히 그은 그 발자취는 대단히

존경스러운 것이며, 영미 시장 합계 총 1천 5백만 장에 달하는

판매고의 예스 디스코그래피 전체에서 이를 관통하는 신비주의

정서의 가사 철학은 분명히 그의 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솔로 아티스트로서 또는 하나의

자립한 음악가로서의 존재감이 그다지 크진 않다. 이 분의 솔로

앨범을 들어보면 창법이 작곡을 삼켜 버린다고나 할까, 독창적

음역과 보이스의 질감이 오히려 운신의 폭을 좁혀 어떤 음악을

들어도 존 앤더슨임이 드러나지만 반대로 보컬리스트로서

다채로운 변화의 폭을 표현하는 데에는 큰 한계가 있다.



본인의 공식 웹사이트에도 올려 놓았지만 하도 음역이 높아서

팔세토 창법을 구사하는 남성 카운터테너란 오해를 많이 받으신

모양인데, 아니라고 명명백백히 밝히셨다. 남성의 테너와 여성의

알토 사이엔 세부적으로 여러 유형이 존재하는데 굳이 분류하면

본인은 알토 테너 - 콘트라알토나 카운터테너보다 낮고 보통

테너보다 높은 - 에 해당한다고... 참고하시길.




*Roundabout. 17년 헌액식 공연 중. 베이스 Geddy Lee.

- 자기 관리에 철저하여 노년에도 기량이 딸리지 않는 점만은 존경스럽다.



*Owner of a Lonely Heart. 17년 영국 공연.

- Yes feat. Jon Anderson, Trevor Rabin, Rick Wakeman이란

  액트로 2010년 이후 최근 노년까지도 활발하게 투어를 열고 사신다.

- Wakeman과 Rabin이 원곡에 없는 솔로잉을 어떻게 더 연장했는가..

  4' 25"쯤 이후. 이런 점이 노장들 라이브의 묘미이다.






 (Polonaise, single?)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존 앤더슨의 곡은 의외의 작품인데

한국의 중장년층에겐 흘러간 팝송일 테고 전세계 팬덤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존 앤 반젤리스의 숨은 명곡으로 꼽힌다.

바로 83년 Private Collection 앨범의 네번째 트랙 Polonaise.



곡명이 폴로네이즈인 이유는 첫째, 반젤리스가 시작하고 2분 40초

지나서 프리데릭 쇼팽이 쓴 A플랫 장조 작품 53번 피아노 독주곡의

유명한 악절을 차용했기 때문이며, 둘째, 앤더슨이 가사의 배경으로서

- 1981~83년에 걸친 공산당 독재 정권의 계엄령 공세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항거와 투쟁을 벌였던 - 평범한 폴란드 국민들의

이야기를 끌어와 그 정신을 기렸기 때문이다.



음악 이야기 포스팅하면서 웬만하면 가사 해석 안 하려고 하는데

이 곡의 가사는 역사 배경도 있거니와 작사 능력 출중한 앤더슨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예외적으로 공개한다.

노랫말과 뒷이야기에 한층 더 집중하면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옛

음악을 즐기길 바라 마지 않고, 80년 광주 및 83년 바르샤바의

못내 이룬 '연대'의 회한을 반추하며... 금번 포스팅을 마치련다.




https://genius.com/Jon-and-vangelis-polonaise-lyrics




('Polonaise' by Jon and Vangeli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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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

1946년에 태어나 91년, 겨우 마흔 다섯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 하신 이 분은 20세기 음악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대중 예술가이다.






 (Montreux, Switzerland)




디지털 드림 도어 닷컴이라는 대중 문화 랭킹 전문

사이트가 있는데, 남성 락 보컬리스트 부문 랭킹에서

머큐리는 항상 1위였다. 본 블로거 기억으로 이 랭킹이

십여 년에 이른 것 같은데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같은 사이트의 락 보컬 퍼포먼스 부문에서도

보헤미안 랩소디가 현재 1위이다. 락 에픽, 곧 서사적 락

음악곡 부문에서도 이 노랜 1위. 락 앤썸이라고, 공연에서

떼창 유도할 수 있는 상징적 트랙에선 위윌락유가 1위.

락 밴드 최고의 프론트맨 랭킹에서 그는 현재 5위이다.






생소한 사이트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좀 더 미국 친화적인

롤링 스톤 매거진이 있다. 약 10년 주기로 업뎃하는 이곳의

랭킹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가수들 100명 중 그가

18위를 차지한 바 있다. 최근 2008년 집계 결과였다.

18위가 별 건 아니네, 하시는 분들은 그 위쪽 순위에

어떤 분들이 있는지는 보고 얘기했으면 한다.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freddie-mercury-5-225069/



대략만 읊어도 이 정도. 이 분이 왜 위대한 락 보컬리스트로

불리우는지, 누구나 다 깨닫고 있지만 말로 일일히 설명하기도

참 쉽지 않다. 이처럼 전설적인 아티스트에 대한 포스팅이

망설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겨우 이 정도 필력으로 제대로

표현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그는 오늘날 탄자니아 영토에 속한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파르시는 페르시아계 조로아스터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고

이후 여기서 쫓겨나 유년 시절을 인도에서 성장하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와서야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흔하디 흔한 기독교계 앵글로 색슨이 주류인 영미권 음악계

전체를 볼 때 참 특이한 배경이 아닐 수 없고, 그가 보여준

독창적 캐릭터와도 깊은 연관이 있겠다 싶다.



브라이언 메이로저 테일러가 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마일에서 먼저 합을 맞추고 있었을 때 그는 약간 로디

비슷하게 곁을 맴돌다가 두 사람에게 합류한다. 1970년.

밴드 이름을 퀸 Queen으로 바꾸었고 이는 누가 봐도

머큐리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queen에는 속어로

퀴어의 의미가 숨어 있으니..)



밴드 이름과 같은 동명의 데뷔 앨범은 73년에 가서야 늦게

낼 수 있었고, 녹음 두어 해 전 전기공학 전공으로 넷 중 가장

어린 존 디콘이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아는 네 명의

전설적 진용이 다 갖춰진 것이 이 무렵인 셈. 1973년 경.

이듬해 이들은 Queen II 앨범을 발매했다.



 (Queen)




이렇듯 1집과 2집에서 Keep Yourself Alive, Liar,

Seven Seas of Rhye 등 오늘날까지 알려졌고 밴드

역시 콘서트에서 즐겨 연주한 트랙들이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성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신디를

쓰지 않고 보컬이 피아노를 겸하는 피아노 락앤롤 정도로

박한 평가를 받았음이 사실이다.



Sheer Heart Attack 앨범에서 Killer Queen이란 대박

싱글이 나오고 나서야 밴드는 세계구급으로 올라선다. 이

곡은 머큐리가 작곡했다. 본 앨범에 이르러서야 클래식과

락앤롤에 바탕을 둔 밴드 음악성의 아이덴티티가 이제

막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4년..



아울러 Brighton Rock, Now I'm Here, In the Lap of

the Gods, Stone Cold Crazy 등 유명한 트랙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브라이튼 락에서 선보이는 딜레이 테크닉은

그대로 메이의 전매특허가 되었고, 스톤 콜드 크레이지

쓰래쉬한 파괴성은 이후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Sheer Heart Attack)



 (A Night at the Opera)




스튜디오와의 불화로 밴드 멤버들은 여전히 곤궁했고 돈

한 푼 손에 쥐는 일 없었다. 절치부심하여 75년 넉 달 동안

녹음실에 틀어박혔고 창작적 전성기의 시발점이 된 명반

A Night at the Opera를 같은 해에 발매한다. 그렇.

Bohemian Rhapsody가 실린 그 앨범이다.



보랩으로 불린 트랙은 머큐리 온전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Love of My Life, You're My Best

Friend, God Save the Queen, '39, I'm in Love with

My Car 등 명곡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평가는 보랩

곡에 주목할 수밖에 없음을 멤버 모두가 인정했다고 한다.



('Bohemian Rhapsody'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Love of My Life'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A Day at the Races)




이듬해 1976년엔 A Day at the Races 앨범이 나와

Somebody to Love를 필두로 Tie Your Mother Down,

Good Old-Fashioned Lover Boy 등 트랙을 쏟아냈다.

전성기가 이어진 것이고 본작은 여러 모로 전작의 동

반복 같은 위치였지만 팬덤은 신경쓰지 않았다.

(4집5집의 트랙 구성은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반면 언론과 평단은 여전히 냉담하고 냉소적이었다.

은, 대체로 평론가의 칭찬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



('Somebody to Love' from A Day at the Races, 1976)




 (News of the World)




77년 News of the World 역시 창작적 상승가의 연장선에

있던 명반일 거다. 드디어 메이We Will Rock You

선보였고 We Are the Champions는 이 곡의 제2부인

것 마냥 항상 어서 라디오 전파를 타곤 했다. Sheer

Heart Attack, Spread Your Wings 등 정통 락

트랙들도 매력이 있다.



위윌락유의 가사는 의외로 음악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훌리건 패싸움 스토리에 더 가깝다. '락유~'는 문자 그대로

'부셔버릴거야' 정도의 뉘앙스란 뜻. 원곡이 재해석의 여지가

커서 라이브에서 다양한 버젼을 골라볼 수 있는 재미를 주는

곡이기도 하다. 79년 발매된 Live Killers 속 패스트 버젼이

가장 인기가 있는 편인 것 같아 아래에 붙인다.



 (Live Killers)



('We Will Rock You' from News of the World, 1977)



('We Will Rock You' from Live Killers, 1979)




 (Jazz)




78년 7집 Jazz에 와서 연거푸 세 장의 앨범으로 달려온 음악적

지향성이 약간 지친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을 주게 된다. 여러 모로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약간 동떨어진 실험성이 돋보인 역작.

머큐리민족 정체성을 떠올리는 듯한 Mustapha부터 상당히

이채롭고 Fat Bottomed Girls에선 로커빌리의 영향을 읽을

수 있으며 Bicycle Race말랑말랑하고 벌레스크스러운

것이 누가 봐도 머큐리가 쓴 곡임을 알 수 있겠다.



무엇보다 본작엔 Don't Stop Me Now가 있다. 제임스 브라운

인가 싶은 정도의 섹드립도 등장하고 엄청나게 흥겨운 이 트랙은

진성 팬덤이 위윌락유보다도 더 앤썸처럼 친애해온 곡이기도...



단, 머큐리가 이슬람교 신자일 거란 오해는 금물이다. 조로아스터

교는 이슬람과 관련 없다. 그냥 이런저런 상업적 요소를 끌어들여

재미있는 노래 하나 만든 거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서사

사회성은 딱 고만고만하게 적당한 정도만 구사하는 수준이다.



('Mustapha' from Jazz, 1978)



('Don't Stop Me Now' from Jazz, 1978)




 (The Game)




Jazz에서 약간 주춤하나 싶었던 그들은 The Game 앨범으로

다시 한 번 활짝 만개한다. 평단과의 불편한 관계를 전술했는데

하나 더, 이상하게 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

당대의 세계적인 팬덤은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전 세계라고 보면

대략 옳다. 특히 유럽, 남미, 일본은 그들의 밥줄이라고나 할까.



80년의 이 앨범 와서 결국 그들은 빌보드 앨범 및 싱글 차트 양쪽서

처음으로 1위를 찍는다. 엘비스 프레슬리 캐릭터 모방으로 유명한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은 그들의 유일한 1위 싱글이다.

Another One Bites the Dust는 무려 마이클 잭슨이 일찌감치

히트를 예감한 곡이다. 꽉찬 funky 비트에 그냥 지나칠 리 없었겠지.



Another One~ 가사 역시 동네 양아치들 패싸움 이야기이다.

'(싸우다) 또 하나 뒈졌군' 정도의 뉘앙스라고. 사회 비판적 가사가

비교적 많지 않은 그들에겐 이런 가사 스토리가 의외로 많다.

또한 방식으로 디스코를 받아들인 증거이기도 하다.



Play the GameSave Me 역시 들어볼 만한 트랙들이다.

키보디스트 아닌 사람들은 별 관심 없겠지만 의 디스코그래피

중 처음으로 신디사이저가 등장한 앨범이기도 하다. Oberheim

OB-X란 명기이다.


https://queenvinyls.com/articles/from-harspichord-to-synthesizer-and-beyond-an-introduction-to-queen-organology/



(Oberheim OB-X)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from the Game, 1980)



('Another One Bites the Dust' from the Game, 1980)




(Hot Space)




81년엔 Flash Gordon이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만든다.

여기서의 플래쉬는 DC의 그 히어로는 아니다. 한국에 개봉한

적이 없는 SF물이다.



이듬해 Hot Space 앨범을 내는데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다

안 좋아 이후 2~3년간 멤버들이 붕뜬 상태로 솔로 활동에나

매진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데이빗 보위와 함께 한

Under Pressure는 여전히 훌륭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사회성 짙은 가사로 영국병 걸린 경제 상황을 위무한

걸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총리는 대처..ㅠ)



('Under Pressure' from Hot Space, 1982)




 (The Works)




영화에서 나타났듯이 밴드의 침체기는 결국 라이브 에이드

가서야 부활의 동력을 얻게 된다. 그 전 82년 5월에서 84년 2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메이테일러디콘 솔로 작업을 열심히들

하셨다. 정작 머큐리는 다음 앨범이 나오고 난 후에 자신의 앨범을

냈다. 즉,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과 다르다는 말.



라이브 에이드 전인 84년에 비교적 성과가 좋았던 The Works

앨범을 낸다. 신디사이저를 광폭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입증한

본작에서 Radio Ga Ga, It's a Hard Life, Hammer to Fall

그리고 I Want to Break Free 등 성공작이 쏟아져 나왔다.



멤버들을 전부 여장(!)시켜 찍은 ~Break Free의 뮤비는 매우

유명했고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밴드의 곡 중 흔치 않게

신디사이저 솔로가 등장하여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프레드

맨델이란 세션이 연주했다고 한다. Linn LM-1이란 드럼머신

사용도 괜찮았다.



레디오가가보코더로는 77년에 출시됐던 EMS 2000

쓰였단다. (희한하게도 은, 아날로그 신디 전성기인 70년대엔

단 한 번도 무그를 쓴 적이 없다. 모든 이펙트는 기타

몰아주려 했다나 뭐래나.)



(Linn LM-1)



(EMS Vocoder 2000)



('Radio Ga Ga' from the Works, 1984)



('I Want to Break Free' from the Works, 1984)

*다소 민망한 일본 라이브




(Mr. Bad Guy)




라이브 에이드에서 완전히 부활한 . 하지만 머큐리 자신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멤버들에게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사망이 거의

임박한 훨씬 뒤였으나 이미 눈치들은 다 채고 있었다고.



85년엔 이미 예정되어 있던 첫 솔로 앨범 Mr. Bad Guy

발매한다. 그의 솔로 앨범은 두 장 뿐이고 두번째 앨범이 한창

오페라에 탐닉한 말년의 특이성을 보여준다고 본다면, 진정

대중적인 음악 앨범은 이것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신디사이저와 뉴웨이브 요소를 팍팍 쓴 미래 지향적 레트로

사운드의 본작은 마지막 전성기를 달리던 머큐리를 느껴볼

만한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다.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Living on My Own

양질의 곡들을 수록하였다. 메이드 인 헤븐은 추후 밴드가

재녹음하여 수록한 그 곡의 원곡이다.



('I Was Born to Love You' from Mr. Bad Guy, 1985)




 (A Kind of Magic)




86년에 그들은 앨범 A Kind of Magic으로 돌아온다.
웸블리 이후 첫 공식작이자 발매 기념 월드 투어를 단행한
마지막 앨범이다. 또한 러셀 멀케이 감독의 SF액션 영화
하이랜더의 비공식 OST이기도 하다. (하이랜더 시리즈는
1편까진 괜찮게 봐줄 만하다.)


A Kind of Magic, One Vision, Friends Will Be Friends,
Who Wants to Live Forever, One Year of Love  히트
싱글을 배출했다. 특히 영화의 스토리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 머큐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Who Wants~를 들으면 괜시리 숙연해지게 마련이다.


('A Kind of Magic' from eponymous album, 1986)



('Who Wants to Live Forever' from A Kind of Magic, 1986)




대략 이 무렵부터 이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머큐리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멤버들과의 녹음이나 평소 받아오던
오페라 및 발레 레슨 등 일상적인 예술 작업에는 죽는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임했다. 메이도 부부간 사생활에 문제가 생겨 여러
모로 밴드가 앨범 작업에 매진하기는 힘든 때였다고..


86년에는 영국의 프로듀서 데이브 클락의 뮤지컬 컨셉트 앨범
Time에 참여하여 동명의 트랙을 싱글로 발매하여 호평받았다.
87년엔 55년 발표된 플래터스의 R&B곡 The Great Pretender
리메이크 발표하여 원곡보다 훌륭한 해석이란 칭찬도 받게 된다.
(전에 한 번 썼듯이 이 두 곡은 그의 인생작이라고 생각한다.)


88년에 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대비하여 스페인 최고의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와 일종의 팝페라 앨범인 Barcelona
발표한다. 이때 함께 작업하던 사람들이 성악과 오페라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에 놀랐다는 풍문도 남아 있다.


그러던 와중 89년이 되어 The Miracle 앨범을 출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출시된 본작의 완성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The Miracle, I Want It All, The Invisible Man, Breakthru
등 얼핏 들어도 생각나는 좋은 트랙들이 성공을 거두었다. 아래에
아원잇올의 뮤비, 잠깐만 봐도 그의 모습이 초췌해보여 착잡하다..


 (The Miracle)



('The Great Pretender', 1987)

*독일 방송에 출연하여 립싱크하시는...



('I Want It All' from the Miracle, 1989)




 (Innuendo)




거의 말년이 되어간 그의 삶은 조용하게 음악 작업하는 나날들로
채워진 듯하다. 마지막 연인이 된 짐 허튼과 함께. 91년에 드디어
그의 생전 마지막 앨범 Innuendo가 죽기 아홉 달 전에 발표된다.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고 사라져가는 촛불처럼 머큐리
멤버들의 작업물은 놀라웠다.


타이틀 트랙 Innuendo는 80년대 내내 선보인 머큐리의 연극적
퍼포먼스를 음악으로 표현한 듯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였으며
예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하우가 특별히 초빙되어 어쿠스틱 기타
협연을 펼쳐 보였다. I'm Going Slightly Mad, Headlong,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 등 한 곡 한 곡이 예술가의
인생을 통째로 정리하는 듯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절정감은 The Show Must Go On에서 느낄 수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 말고 이런 주제를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보컬리스트가
과연 또 있겠는가, 탄식하는 팬 투성이였다. (단, 작곡은 메이가..)
하지만, 롤링 스톤 지는 이번에도 더럽게 까댔다.


('Innuendo' from eponymous album, 1991)



('The Show Must Go On' from Innuendo, 1991)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사른지 아홉 달 후에 그는 숨을 거둔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그를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이듬해

92년 4월 20일에 대대적 규모의 헌정 공연 The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가 개최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 음악 소비자가 팬덤화하는 과정에서 처음

접했을 법한 외국의 공연 문화였을 거다. 당시 영미권 음악계를

지배했던 주류 아티스트들이 쪽팔림도 무릅쓰고 머큐리의 음악을

따라 부르며 비교질 당하는 영예를 기꺼이 마다 하지 않았다. 한

음악가가 또 다른 음악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인 셈.



엘튼 존, 로버트 플랜트, 데이빗 보위, 로저 달트리, 토니 아이오미,

애니 레녹스, 폴 영건즈 앤 로지스, 데프 레파드, 메탈리카, 익스트림

등이 여기에 동참한 당시 탑클래스의 헤드라이너들. 지금 봐도 이런

사람들 어떻게 다시 모을까 싶다.



모두 쪽팔림을 감당하며 어려운 원곡을 쩔쩔 매고 소화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는데, 단 한 사람만은 왠지 '어쩌면 원곡만큼 매력적일지도'

하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대 최고의 블루 아이드 소울 보컬리스트

조지 마이클이었고 그가 의 세 멤버 및 합창단과 함께 한

Somebody to Love는 그해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



이 공연 두 달 전에는 음악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 웨인스월드

개봉해 Bohemian Rhapsody를 삽입했고 영화 속 헤드뱅잉

인기 덕분에 원곡을 역주행시켜 빌보드 핫100 2위에 재진입시킨

엄청난 흥행몰이를 가져오기도 했다.





('Somebody to Love' by Queen ft. George Michael, 1992)




 (Made in Heaven)




머큐리의 목소리를 담은 마지막 정규 앨범 Made in Heaven

95년에 발매된다. 그의 솔로 앨범에 실렸던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등에 멤버들이 어레인지를 추가해

포함시켰고 Too Much Love Will Kill You, Heaven for

Everyone 같은 새로운 트랙과 생전 마지막 육성 녹음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헌정 앨범의 연장선이었다.



메이가 다른 작곡가들과 만든 Too Much Love~는 밴드의

앨범에 수록된 것과 메이의 솔로 앨범에 실린 것, 두 가지

버젼이 존재한다. 테일러는 그렇다 치고 메이도 참 노래 잘

하는구나, 하는 점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킨 곡이었다.



('Too Much Love Will Kill You' from Made in Heaven, 1995)



('Too Much Love Will Kill You' by Brian May, 1995)




97년에 존 디콘은 영원히 음악계에서 은퇴한다. 본래부터

내성적이고 머큐리의 카리스마적 퍼포먼스를 존경했던

밴드의 막내였기에 남은 두 사람도 존중한 결정이었다.

04년부터 09년까지 나머지 두 사람은 의 이름으로 역시

전설적 보컬리스트인 폴 로저스와 투어를 돌기도 했다.



70년대 전설적 블루스락 밴드 프리배드 컴퍼니의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던 폴 로저스. 뭔가 새로운 창작 활동이 생기나

기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저 예전 곡들을 불러주는 것에

그쳤고 반응도 아주 뜨거웠다고 보기는 애매했다고 본다.



다만 생전에 머큐리가 보여주고 가지 못하고 떠난 몇몇

트랙의 라이브를 구경할 수 있었다는 보람은 있었다고.

아래 아원잇올처럼. 이들 세 사람은 이 포맷으로 08년에

앨범도 한 장 냈지만 반응은 뜨뜨미지근한 수준에 그쳤다.






폴 로저스와의 작업을 통해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메이테일러 두 사람은 신임 보컬리스트

수소문 작업을 벌였고 11년부터 아메리칸 아이돌 스타로

널리 알려진 애덤 램버트를 리투르트하여 투어 멤버로

기용하고 있다. (이 친구는 영화에도 카메오 등장했지.)



워낙 나이 차도 있고 램버트의 젊디 젊은 기량에서 오는

안정감이나 탄탄한 보컬 실력 덕도 있어, 대체로 기존

팬덤은 이렇게나마 들을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는 듯하다......만, 누구도 프레디

대체할 수 없다는 여론도 만만치는 않다.



(왜 꼭 대체 보컬을 계속 구해야 하냐고? 그냥 그만 두면

안 되냐고? 이 분들의 직업이 계속 연주하고 투어를 도는

밴드 뮤지션인데 그렇게 반응을 보이면 좀 섭섭할지도...

어찌 되었든 지구상 어딘가에서 의 음악이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연주되고 있다면 만족스러운 일 아닐까.)



(하지만 비교가 되는 건 사실...)




프레디 머큐리의 너무 이른 죽음은 30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당시 참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민

2세대로서 사회 소수 계층의 설움을 동병상련했던 그의

존재감이나 이에 영향받아 형성된 예술적 자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후였던 것 같다.



은, 참 미국 시장 주류와 인연이 없었다. 언론으로부터의

야박한 평가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은 이른바 그래스루츠라고 하는 블루스 계열

코드에 있다. 이들 음악은 상대적으로 블루스의 영향이

약하다. 재즈나 컨트리, 포크와도 멀다.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겠나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루츠가 채우지 않는 빈 자리를 머큐리디콘 멤버들이 클래식,

펑크funk, 뉴웨이브 등으로 메꾸어 드라마틱한 표현성을 중시한

작품을 만들어갔다. 미국에선 절대로 먹히지 못한 창작 문법이다.

대신 미국을 제외한 세상은 항상 프레디를 연호했다. 전 세계

판매고 2억 장이 어디 그냥 나올 기록이겠는가.



 (The Great Pretender, single)




포스팅의 주인공인 머큐리가 피아니스트이고 일렉트릭 피아노

싫어한 반면 신디사이저는 꽤 다룬 성향인지라 상세히 들고 파진

못했는데, 사실 사운드의 핵심적 매력은 메이가 연주한 특별한

일렉트릭 기타 레드 스페셜에 있다. Danelectro Shorthorn

비슷하게 생긴 기타는 참 특별한 것이, 메이가 음악을 시작할

무렵 무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악기이기 때문이다.



http://www.queenconcerts.com/instruments/piano.html



독특한 보드와 픽업 디자인을 거친 탓인지 다른 기타리스트

누구보다 그의 톤은 특별하고 이채로워 음색 만으로도 그가

연주한 것임을 구분할 수 있다. 또한 탈 블루스 성향이면서도

클래식하고 글램스러운 의 사운드에 여지없이 어울리는

톤이기도 하다. 세간의 박한 평가의 이면에 뭔가 이질적인

기타 톤까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일까.



(Steinway Concert Grand)



(Red Special)






첫 히트작 킬러퀸이나 바이시클 레이스처럼 머큐리가 작곡한

트랙들을 보면 수십 년 전 벌레스크 쇼뮤직 홀 사운드를 듣는

홍키통크 피아노가 중심이 된 살롱 음악이 연상된다. 아마도

그가 겪은 유년 시절의 추억과 연관이 있을 터이다. 살롱의 낡은

피아노에 맞추어 화려한 가운을 흐느적거리며 끈적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모습. 그가 평생 꿈꾼 음악적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굿올패션 러버보이 같은 트랙이야말로 전성기
프레디 머큐리의 섬세한 음악성을 대변할 만한 곡인 듯싶다.
개인적으로 최애하는 곡이기도 하고. 아껴 두었다가 링크를
걸며, 끝으로 그의 열정적 예술혼에 헌사를 바친다. 아름다운
음악을 남겨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제한 공으로, 저 세상에선
멋쟁이 차림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행복하게 노래하고 계시.


('Good Old-Fashioned Lover Boy' from A Day at the Race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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