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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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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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Jacques Rousseau:

A Man of Revolution, Never Born with Fortune













프랑스 대혁명을 출산한 정신적 아버지 장 자크 루소에 관해

사회계약론 한 가지에만 포커스를 맞춰온 대부분 교과서로 인해

급진적 사상가로 박제한 고정 관념만 양산해온 모양인데요.



그의 인생을 한 번 찬찬히 훑어 보자고요.

의외로 이런 사람이었어..? 하실 걸요.



프랑스의 영웅인데, 태생은 스위스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1712년의 제네바 공화국이죠.

칼뱅파 종교와 정치의 온상 같은 곳이에요, 18세기 말까지는.



왠지 루소와 장 칼뱅의 인생은 정반대 거울을 보는 듯해요.

프랑스 태생의 칼뱅이 제네바에서 명성을 얻고 뼈를 묻었지만

제네바에서 태어난 루소는 프랑스에서 활동해 혁명 사상을

낳고 거기서 죽었거든요. 신기한 우연의 일치죠?



루소는 생전에도 자유로운 의식을 가진 제네바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했다네요.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는 팡테옹 국립

묘지에도 안장된,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건국 지도자입니다.




...Pantheon, Paris where Rousseau is buried





부잣집에서 고이 자란 금수저 인생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었어요.

태어나자 마자 모친을 여의었고 열 살 때 부친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 나머지 방랑 생활을 떠나 자식을 돌볼 수 없었어요.



떨어지기 전까지 부친과의 사이는 그럭저럭 화목했다 해요.

어려서 아버지와 독서 경험을 통해 문학적 소양을 키웠다죠.

이후 삼촌 손에 컸지만 애정과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죠.



그냥 이리저리 떠돌며 보호를 의탁한 청소년기였어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해 눈치보며 삶을 구걸한 처지였죠.

법원 서기나 조각가 공방에서 견습생으로도 있었는데

하도 때리고 갈구는 통에 뛰쳐나온 적도 있었다고…



열 여섯 쯤인가 사보이 공국 토리노로 이주해서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신교도를 돌보던 13세 연상 와랑 부인 밑으로

들어가요. 제대로 학교를 다닌 적 없는 루소가 그나마

그럴 듯한 교육을 받은 유일한 때가 이 시기에요.





Françoise-Louise de Warens






부인 직업의 특성상 주변에 성직자나 지식인들이 넘쳐났고

그들로부터 어깨 너머로 지식 동냥 하듯이 음악, 수학, 철학

등의 학문을 배워 나가요. 30대 중반 무렵까지 한때 연인

관계로 발전했던 부인의 후원을 받아 생활했다 해요.

루소는 부인을 평생 사모하고 경애했다네요.



이런 청년기를 보낸 그의 애정관은 자유분방하지만 방탕한 기질도

있었어요. 서른 셋에 10세 연하의 하녀인 마리 테레즈 르바쇠르

동거를 시작하나 정작 혼인은 나이 들어서야 올렸다죠. 자식을 다섯

낳았는데 부양할 능력이 안 되면 불행해진다며 모두 고아 병원에

보내 버렸고요. (이 행적은 훗날 두고두고 욕을 먹어요.)



그는 수학에 재능있는 음악학자이기도 했어요. 자신만의 숫자

기보법을 개발해 파리의 왕립 과학 한림원에 출품하러 갔다가

드니 디드로 등 백과전서파의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게 되죠.



백과전서파디드로달랑베르, 케네,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참여한 프랑스 계몽주의의 일파에요. 1751년에 초판

출간한 백과전서로 과학의 체계를 재정립하고 지식 교육의

대안을 제시하려던 일종의 지성인 사회 운동이죠.

루소는 음악이나 정치학 관련 항목을 써줬어요.



다재다능한 polymath 루소는 정치 철학 이외 분야의 성공작이

의외로 다양해요. 1752년 오페라 작곡가로서 마을의 점쟁이

루이 15세 앞에서 초연되는 성공을 거두었고, 1761년엔 18세기

낭만파 소설의 걸작 신엘로이즈를, 사회계약론 직후 소설 양식을

빌린 교육론 에밀을 출간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어요.



어쩌면 근대 사상과 문화 다방면에서 재능을 꽃피운, 다 빈치

이후 천재적 르네상스맨의 마지막 인물일지도… 낭만파 문학과

계몽 사상이란 면에서 볼테르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가며

프랑스 시민의 잠재 의식을 일깨운 사람이란 평을 받는 거죠.

(혁명으로 목이 잘린 루이 16세의 평이라는 말도 전해져요.)





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Geneva)






당대 사회의 명성은 비정치 분야에서 거두었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기억하는 루소의 진정한 가치는 정치 사상에 있어요.

첫 철학 논문 학문예술론을 1750년에 발표했는데

디종 학술원 공모에서 1등상을 받았다고 해요.



이 학문예술론을 확장 발전시켜 1755년에 인간불평등기원론

출간했는데 이 유명한 책을 통해 우리가 아는 진보적 공화주의

사상의 싹이 움트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인간 이성에 대한 고찰, 시민 사회 형성을

방해하는 불평등과 그 요인인 사적 재산권 등에서 심층적인 논의를

발전시킨 명작이에요. 원시 공산 사회의 묘사가 카를 마르크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이야기는 유명하죠.



루소의 인생작 두 권은 한 달 간격을 두고 1762년에 출간되요.

프랑스 대혁명의 이론서 사회계약론, 그리고 5월에 나온 에밀.



(에밀은 사회적 인간 교육에 대한 진보 철학적 담론.. 역시

대성공하여 칸트의 규칙적 시간을 빼앗았다는 걸작이지만,

여기선 아주 대충 언급만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학문예술론에서 사상의 문제를,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국가 사회를

진단한 그가 모든 생각을 결집하여 내놓은 역작이 사회계약론이며

오늘날 민주 정치의 뿌리는 이 한 권의 책에서 갈라져 나온 거죠.










개인과 사회가 서로 양립하여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게 할 인간

본성으로서의 일반 의지가 작용한 사회 계약을 통해 비로소,

양도나 분할이 불가능한 절대적 속성의 국가 주권이 나오기에

오직 피치자인 인민만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우리 모두

잘 아는 근대 공화정 사상이 여기에서 완성되는 거에요.



아울러 토머스 홉스리바이어던존 로크통치론을 거치며

혼돈의 쌍곡선으로 피어 오르던 공화주의 정치 사상이, 이 한

사람의 깔끔한 논변으로 종합 정리되어 곧 깨어날 근현대

시민 사회 계급에게 선물처럼 다가온 것이기도 해요.

1651년 - 1689년 - 1762년의 연속성인 셈이죠.



루소가 가장 강조한 핵심 가치는 인간 본성이 추구하는 본질로서

자유평등, 그리고 인류 보편적 사회 연대 의식이었어요.

liberty, equality, fraternity* …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직접 민주주의에 의한 공화적 정치체의 구성을

실천적 대안으로 제시했죠.



*일본에서 초기 번역이 잘못 자리잡는 바람에 박애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만 오늘날 현대어 어감으로도 박애가

와닿지 않으시니만큼, 계급을 초월한 사회적 연대감 정도로

해석함이 제일 타당하다는 최근의 의견을 반영하고자 해요.

- 자유, 평등, 연대..


이는 혁명을 이끈 자코뱅 당원들에게 투쟁 프로세스를

매뉴얼로 만들어준 것이나 진배 없었어요. 대혁명 시절

루소의 이 책 하나 손에 안 들고 다니는 사람 없었다죠.

이론적 기본서라고 불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사회계약론과 에밀, 둘 다 국가 체제의 근본적 혁신과 가톨릭

사회 비판 등 급진적 내용을 담고 있었고 하필 두 명저가

연달아 출판되는 바람에 루소는 유럽 전역에서 폭풍같은

논란의 주인공이 되요. 덕분에 8년간 유럽 각지를

떠돌아 살 수밖에 없었다나…



변변한 학교도 나오지 못하고 당대 최고 인기의 예술가 반열에

오르지만 특유의 철학적 성찰을 통해 근대 공화정의 바탕을

완성한 장 자크 루소… 안타깝지만 혁명의 발화점을 몸소

목격하지 못하고 바스티유 사건 11년 전 프랑스의 작은

마을에서 조용히 살다 갑니다.



자유로운 기질을 타고났다고 미화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적

기준으로도 결코 윤리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인물은 아녔어요.

말년에 참회록을 써서 스스로 반성하기도 했거니와…



하지만 오늘날 민주 정치 체제의 비호 아래 열심히 인생의

좋은 날을 구가하는 현대인이라면 급진적이라고 맹비난받은

루소의 사상 덕을 입지 않았다고 누구도 부인할 수는 없을 터…



역사와 인생이라는 것이 그래요. 살아가던 그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아주 가끔은 진심으로 뭔가를

추구했던 한두 사람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는 거죠.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의 은덕에 힘입어 부지불식

간에 삶이 윤택해지고 평화로워지지만 대부분 그냥

모르고 지나간다는 사실…



고상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만이 역사의 위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평범한 상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인생의 진리인 법이죠.



종교적 이유로 내세를 믿는 분이라면 죽어서 모든 것의 화해를

받아들일 때쯤 깨닫게 될 거라고 봐요. 아, 내가 몰랐었는데

이런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 그 덕에 잘 산 거였구나 하고..



장 자크 루소도 모르는 사이에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돕고 있는 숨은 현자로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래는 그의 인생을 축약한 짧은 동영상..

에밀 내용이 부족한 분은 그 아래 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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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Does Chinese Despotism Ever Understand

What the Press Is Supposed to Be About?








중국은 공식적으로 집단 지도 체제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란 문제를 민주 정치 국가에서 상정할 수 있는 만큼

궁극적인 사회 통합의 가치로 취급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먼저 봉착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중국 헌법에도 언론의 자유란 항목이 있기는 한 건가...

하는 의문이 들죠. 예, 있기는 있어요. 어디 그것 뿐인가요.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 오늘날 민주 국가의 기본 덕목으로 꼽는

요소는 다 갖고 있어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또 축자적으로는.



그러나 — 헌법학이나 정치학 일반 이론을 한 번이라도 공부해본

분들은 다 알겠지만 — 현대 헌법의 가치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적

규정이 아니라 실질적 준수 여부와 그 온존의 수준입니다.



헌법전이 문자 몇 마디 박아놓는 것 정도는 사실 일도 아니에요.

그냥 좋은 말 갖다가 잘 써놓으면 그뿐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문자로 써놓은 내용이 가리키는 무형의 정신적 가치가 그 나라

정치 문화에 깊게 배어 생활의 수준에까지 다다를 정도로 눈에

보일 만큼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일 거에요.








최근의 홍콩 소요 사태를 관찰하신 분들은 이미 느끼시겠지만..

그런 관점에서 중국적 사회주의 정체가 인민의 대의를 반영하는

진정성을 가진 정치 이데올로기인가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현대 중국의 헌법 구조 및 구체적인 헌법

가치에 관해 홍콩 문제와 중국식 정치 이데올로기, 언론의

기능이란 면으로 고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 관점을 돌려보면 근본적으로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하고 깨달을지 모릅니다. 중화 인민 공화국의 현대적 정체를

완성한 82년 덩샤오핑 헌법 이후, 현대 중국의 정치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개념으로서 일당제 집단 지도 체제에 의한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것을 끄집어낼 수 있는데요.



근본이 사회주의에 있는데 인민의 풀뿌리 의사를 억압하고

박해한다..? 모름지기 폭력 혁명에 의해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세상에 태어난 이데올로기가 사회주의 아니었던가요? 우리가

역사를 거꾸로 알고 있는 겁니까?








물론 중국 공산당 당국은 여기에 일당 지도 체제의 단일 국가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 선택이란 정치적 명분을 언제나

간편하게 대입해 왔습니다. 언뜻 넓은 영토에 연방적 자치를

추구하는 나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중국은 중앙 집권적 정치

논리에 충실한 사실상의 독재 국가이거든요.



자유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의아한 지점이지만,

사회주의 국가의 언론 기능이란 것도 양상이 참 기형적입니다.

권력을 통제하여 삼권 분립과 다른 제4의 견제균형을 제공하는

민주적 언론 기능과는 큰 차이가 있어요.



지난 3월에 독일 언론 DW(Deutsche Welle; 도이체 벨레)

대만 주재 특파원을 통해 기술한 현대 중국의 언론 양상에 관한

기사도 바로 이런 맹점을 짚었어요. 국경없는 기자회로부터

매년 언론 자유도 하위권을 기록하는 중국 언론의 사회적

효용이 중국을 넘어서서 세계 언론 지형을 위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는 한탄이었지요.



이 특파원 보도의 주요 골자는 이거에요. 중국의 언론이 과연

언론 기관인가, 아니면 공산당 선전 매체인가 구분이 안 가는

행태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마치 히틀러 시절 괴벨스 정책에

버금가는 파시즘 독재 수단의 현대 버젼을 보고 있는 것 아냐,

하는 생각이 들 거란 말이에요. — 아, 괴벨스-파시즘 표현은

본 블로거의 주관적 해석입니다. 오해는 마시고.










공산 국가의 선전 선동 방책에 대해, 나이가 어느 정도 되는

시민들은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감이 오실

겁니다. 북한, 소련, 중공, 동독 등 과거의 사회주의 세력들

모두 이런 정책을 썼고 (일부는 지금도 쓰고 있으며) 현대적

관점에서 이런 것들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구태의연한

인상을 주는지 능히 상상이 가능할 거에요.



그런데 21세기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중국의 현대적 정책상은 매우 기이한 모습입니다. 언론이란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거든요. 언론이라 쓰고 선전이라

읽는 식인 거죠.



냉전이 종식한 상황에서 과거처럼 자본주의보다 우월하다느니

하는 일차원적 노선을 걷진 않습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로의 개방을 받아들인 수정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왔어요. 78년 이후 벌써 40년이 넘었네요.



대신 지금의 중국은 일대일로 같은 대외 슬로건을 표방하며

‘하나 된 중국’의 통일된 중앙집권적 국력을 광고하는 데에

집중하는 형국입니다. 즉, 시진핑 시대 G2 중국의 정치 노선

일체는 일대일로 하나의 개념으로 통일하여 설명할 수 있어요.








현대판 실크로드를 표방하며 중국 경제권의 해외 시장 정복

목적으로 시진핑 리더쉽 시스템이 추진하는 정책적 전략 체계를

가리켜 일대일로, 一带一路 = Belt and Road Initiative /

One Belt One Road(OBOR) ..로 칭합니다. Yídài Yílù..



주로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를 표적으로 삼아

그 나라 산업 인프라 시설의 대규모 기간 공사를 수주해 중국

기업에 몰아주고, 건설 자금의 융통은 AIIB,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 같은 중국 중심 금융 인프라와 그 나라 정부를 이어주는

식으로 사업이 이루어지고요. 표적이 되는 국가들이 주로 예전

실크로드 비슷한 모양새로 군집을 형성하는 특징이 있죠.



쉬운 말로요? 중국 기업이 미국 등 서방 제치고 세계를 양분해

먹어 치우게끔 이끄는 시진핑 황제의 전략인 거에요. G2로서

기득권을 철저하게 보전하고 2049년(중국 건국 100주년)까지

중국의 먹고 살 길을 확보하고자 하는 초국가적 범지역적 경제

계획인 셈이에요, 시진핑 정치 집단이 구상하고 시행하는…



사실 실상을 까보면 오로지 중국이 먹고 살기 위한 방편

불과해요. 과거에 미국이나 소련이 주도했듯이 우호 진영을

위해 호혜적 성격으로 펼치는 경제 구호책.. 마셜 플랜 같은

것..? — 이런 거 아니에요. 착각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반중파들이 있죠.








문제는 중국이 일대일로를 현대적 마셜 플랜인 듯이 둔갑하여

선전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거기에 자본주의 언론 시장

복잡성 지형도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 또 다른 문제이죠.

예의 도이체 벨레 기사가 잘 분석해 주었는데요.



중국은 대부분 국영인 그네들 언론사를 서방 자본주의 시장에

꽤나 전략적으로 풀어 놓았어요, 서구 광고 수익 시장에서의

엄청난 큰손으로 활약하는 새로운 위상과 함께. 뭔 말이냐고요?

현재 세계 언론계 광고 시장의 가장 큰손 중 하나가 바로 중국

공산당이란 말이에요.



서방의 언론사 중 상당 지분이 중국 광고주의 영향 하에 있다고,

많은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나름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어요.

물론 기사의 내용을 입맛대로 좌지우지 한다거나 중국 국내에서

하듯이 장난치는 구도를 만들 수는 없어요. 하지만 여러 변수를

통해서 중국의 중앙 정책에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게 진실에 가깝다는 주장인 거죠.








중국이 취하고 있는 방법은 다양한데 특기할 만한 양태 두 가지를

거론하자면... 첫째, 세미나 같은 국제 규모의 이벤트를 활용하고

있어요. 이동 및 체류 비용 전액을 공산당이 부담하여 전 세계의

언론인을 중국으로 초청하고 호화로운 접대와 교류, 취재의 환경을

제공하는 거죠. 물량 공세인 셈이에요.



둘째, 중국 국영 방송 중 가장 유명한 CGTN 같은 곳에서 현재도

지속 제작 중인 콘텐츠 중에 '차이나 워치'라고 있어요. 유튜브만

검색해봐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종의 짧은 단편 꼭지용 TV포맷

콘텐츠인데요. 중국이 벌이고 있는 대내외 사업이나 경제 개발

현황을 철저하게 중국적 관점에서 묘사하고 설명하는 동영상

단편물 시리즈 정도로 보면 되요. China Watch..



세계 방송 네트워크에 이 시리즈를 대량으로 배포하며 무의식 중에

중국적 사고 방식이 공산당 수뇌부에서 서방 가정의 시청자 층으로

옮겨갈 수 있도록 치밀한 전략을 전개하고 있다는 거에요. 서구권

방송사 입장에서도 꽤 그림이 좋은 단편 꼭지 시리즈가 안정적으로

공급될 경우 마다할 이유는 없거든요. (정규 프로그램 사이 사이에

끼워 편성 메꾸기 딱 좋으니까) 아울러 적정하게 광고 수익도 올릴

수 있을 테고요. 바로 이 빈틈을 노린다는 거죠.








G1인 미국도 이런 작태를 보이지는 않아요. 미국이 취하는 소프트

파워 전략은 훨씬 덜 노골적이죠. 헐리우드 영화나 각종 씽크탱크

연구소의 리포트 같은 방법을 주로 쓰잖아요. (지난 반세기 동안

여기에 열심히 투자한 나라가 일본이고요.) 바야흐로 중국도 자기

나름의 소프트 파워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셈인데 그 양상이 훨씬

저열하고 노골적인지라, 뭐라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네요.



기사는 차이나 워치를 일종의 현대판 트로이 목마 같은 거라고

표현해요. 은연중에 중국 공산당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자본주의 국가 백인 주류 사회에 퍼질 거라는.. 뭐 그런

얘기이죠. 쉽게 수긍하긴 어렵지만.



과연 이런 전략이 먹힐까요? 한국의 주류 시민 사회만 하더라도

수천 년간 중국의 역사와 얽히고 부대낀 역사적 DNA로 인하여

일본 만큼이나 가깝고도 먼 나라처럼 느끼기에, 북미와 유럽이

우리가 느끼는 정도로 깊이있는 식견을 가질 수 있을까, 쉽사리

감이 오지는 않아요.








한국인은 중국의 생각에 동화되기에는 지나치게 중국을 잘 안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죠. 오히려 우리와 공감대를 형성할 만한 나라는

베트남 정도에요. 북미나 유럽은 한국이나 베트남에 견줄 만치

역사적 경험의 깊이가 부족하고 되려 오리엔탈리즘 같은 편견성

동인으로 인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집단 의식이 변화할

변수가 크지 않을까, 하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에요.



헐리우드 영화에 차이나 머니를 무식하게 투입해 되레 대중적인

역효과를 일으키고 다니는 것이 현재 중국 공산당식 소프트 파워

정책의 현주소이니, 또한 사회주의식 프로파간다의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는 점이 이미 역사의 반면교사 사례를 통해 입증이 되고도

남았으니, 괜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도 듭니다만.



다만 가뜩이나 위축되어 가고 있는 기성 언론 시장의 지형에 중국

자본이 위력을 떨치고 있다는 점만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사에 취재원으로 나선 멜버른 대학교 루이자 림 교수 역시, —

프로파간다의 효과성이 입증된 것인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 광고

수익 자체에서 오는 중량감이 현장 언론인의 재갈을 물리는 암묵적

검열 수단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했어요.








기사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논평하자면 이와 같고요. 전문 해석을

게재하면 좋겠습니다만, 이 기사 역시 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 정도 선에서 에둘러 인용하고 마는 점을 양해해주기 바랍니다.

도이체 벨레 기사 전체에 제한이 걸린 것은 아직 아닙니다. 나머진

원문 기사를 그대로 정독하시길 권장합니다.




*DW: original link

https://www.dw.com/en/how-chinas-new-media-offensive-threatens-democracy-worldwide/a-48063437



How China's new media offensive threatens democracy worldwide

중국의 언론 공격은 어떤 방식으로 세계 민주 정치를 위협하고 있는가





덧붙여서, 중국 언론의 한심한 한계를 목도하며 홍콩의 현재 모습이

슬프게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정부 차원에서야 쉽사리

나설 수 없는 공식적 명분이 있지만, 개인과 시민 사회 차원에서야

어디 그러합니까, 사람 사는 세상인데. 특히 우리 80년과 87년 등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진다는 시민들 반응이 많은 듯해요.

연대의 감성을 떠올려 보시길 조심스럽게 권유합니다.







*차이나 워치의 대략적 모습은 아래와 같답니다.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and




History of Europe in Early Modern Times V

Rise of Western Modern Philosophers




오늘날 정치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압도적으로 유럽 출신

백인들의 시각과 사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다들 아실테죠.


그래서 서유럽 주요 국가의 근세사를 따라가보는 것이 종종

큰 의미가 있답니다. 하여 근세를 열어젖힌 몇 가지 트렌드를

시리즈처럼 훑어보는 시간을 마련해 볼까요.




V. 근대 철학 Modern Philosophy 



모든 학문은 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가지를 치고 생장합니다.

철학은 정치경제 등 사회 현상 전반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요.

유럽 역사에서 근대 철학의 태동이란 현상은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현대 문화의 바탕을 형성하죠.


인문주의의 부활, 무역 항로의 개척, 프로테스탄트의 발호,

자연 철학의 과학화 등 지금까지 상술한 각 현상들이 서로

밀접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점차 사회가 생동하고 변화하는데,

이를 설명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철학자들이 맡은 거죠.


16~17세기를 살며 새로운 움직임을 포착한 초기 철학자들이

선각자로서의 사명을 찾았습니다.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 철학

극복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을 되살려 그네들이 살던

현재의 시간에 적합한 시대적 사상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죠.


초기 선구자들을 지역과 성향에 따라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를 아우르는 서유럽 대륙에선 합리주의,

rationalism으로, 영국에선 경험주의, empiricism으로 부르며

각자 독자적 체계를 조성했어요.


이성과 경험으로 나뉘는 흐름을 당시에 인지한 건 아니고 정작

후대에 이 일을 한 사람은 칸트입니다. 현대 철학의 하위 분과를

구분하면 인식론, 형이상학, 존재론, 윤리학, 논리학, 미학, 정치

철학 등인데 대륙과 영국의 논쟁은 인식론에서 출발하였죠.


합리주의는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초월적 절대 진리를 찾아 인식의

근본으로 삼자는 생각입니다. 30년 전쟁 참전 중 신비한 꿈을 꾸고

학문의 길에 들어선 르네 데카르트가 선구자로서, 그는 철학, 수학,

광학, 천문학 등 방대한 연구를 한 대학자이자 철학의 아버지에요.


1637년에 출간한 방법서설에서 그는 이른바 방법적 회의

반복하여 종국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의심할 수 없는 제1원리로 제시했어요. 이로부터 시작하는

연역적 추론을 통해 신과 사물의 존재를 증명하자는 거죠.


경험주의는 사물의 현상에 대한 인식의 출발점을 사유자가

직접 경험한 지점으로 잡자는 생각으로서, 평생 법관으로 산

프란시스 베이컨이 데카르트보다 수십 년 앞서 늘그막에

실험과 저작에 몰두하며 새로운 생각을 집대성했어요.


그가 죽기 여섯 해 전 1620년에 집필한 신기관은 그리스

이래 과학 연구론의 체계를 장악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관에

의문을 품고 귀납적 실증으로 진리에 접근할 것을 주문했고

(아는 것이 힘이다..란 명제) 우상론에서 - 종족, 동굴, 시장,

극장 - 인간의 보편적 편견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대륙의 합리론을 계승한 이는 네덜란드의 바뤼흐 스피노자와 독일의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였어요. 둘은 데카르트와 함께 3대 거장으로

꼽힙니다. 스피노자는 1674년 에티카를, 라이프니츠는 1710년

신정론을 출간하여 인간 이성의 탐구를 이어갑니다.


에티카는 스피노자 필생의 역작으로서 살려는 본능적 의지,

코나투스가 지배하는 감정을 통제하려면 오직 이성에 기댈 수

있을 뿐이라 썼죠. 라이프니츠는 신정론에서 철학과 신학이

서로 모순되지 않아 양자 모두 신의 섭리일 뿐이라고 설파해요.


영국의 경험론은 존 로크가 계승하고 데이빗 흄이 발전시켜

후대로 넘어갑니다. 1690년에 로크가 출간한 인간오성론

백지 상태의 인간이 경험으로 지식을 축적한다고 봤지요.

(빈 서판 같은 백지 상태, 라틴어로 타뷸라 라사라고..)


한편 계몽주의가 발전한 사회계약론이 주류를 형성하여 공화주의

정치 사상으로 또 하나의 줄거리를 이룹니다. 토머스 홉스가 단초를

풀기 시작하죠. 1651년 명저 리바이어던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같은 자연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계약을 맺고

국가를 세운다는, 현대적 이데올로기의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존 로크는 왕당파가 왕권신수설을 부활하려는데 반발해 1688년

통치론에서 그해에 일어난 명예혁명을 옹호하고 인간의 자연권,

피치자로서의 저항권, 선거제와 권력 분립의 원리, 노동 가치설

등의 주제로 미국과 프랑스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어요.


장 자크 루소는 1762년 출간한 동명의 저서로 아예 사회계약론

완성한 사람이죠. 양도할 수 없는 국가의 주권은 오직 인민에게서만

나오며 자유의지와 사회계약으로 공공선을 추구한다고. 익숙하죠?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정립함으로써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

기반을 완성하지만… 본인은 혁명 발발 11년 전에 사망…ㅜ


이렇게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을 중심으로 맹렬하게 발전한

세 줄거리가 합하여 근대 철학이 집대성되는 전기를 맞습니다.

네, 이마누엘 칸트.. 지구상 역대 최고의 지성이 등장해요. 짠.


칸트가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에요. 첫째, 합리든 경험이든 계몽이든

그때까지 발전한 유럽의 모든 철학을 종합하여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신학, 미학, 존재론, 정치학 등 전 영역을 집대성한 체계를

완성하고 수백 년 후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에요.


둘째, 이렇게 완성한 독일 관념론의 비판 철학이 제시한 모든 논제가

결국 선험적 이성이 주재하는 사상의 중심에 인간을 주체로 놓았고

이는 르네상스 이후 수백 년만에 유럽이 신의 그늘을 드디어 완전히

벗어나 인류가 최상위 존재로 올라섰음을 의미하는 거란 점이죠.


1781년 순수이성비판, 1788년 실천이성비판, 1790년 판단력비판

차례로 출간하며 그는 인류의 철학을 종합합니다. 전 영역에 걸쳐서요.

이성을 중시하나 경험론을 끌어와 a priori, 선험적 관념론을 세웠죠.


칸트 이후의 철학은 어떻게 그를 계승하여 발전시킬지가 관건이었죠.

게오르크 헤겔이 독일 관념론의 적통을 계승했습니다. 칸트 만큼이나

철학의 전 영역을 통찰하며 절대적 관념론변증법, 역사 철학

종합하여 수많은 헤겔주의 추종자를 낳았습니다.


18세기 공화주의를 일단락짓고 맞은 혁명의 시대에 사상의 조류는

자유주의로 흘러갑니다. 제레미 벤담은 1789년 저서 도덕입법원리

통해 공리주의를 확립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했고

후대의 자유주의자에게 영감을 줬어요.


존 스튜어트 밀은 1859년 자유론으로 19세기 자유주의 정치 사상을

종합한 대가입니다. 이미 벌어진 정치 현상의 사변을 세운 것이 밀의

역할이었다면 카를 마르크스는 1867년 자본론으로 미래에 등장할

사회주의 정치 체제의 철학 기반을 제공하는데 앞장섰죠. 18세기

말엔 에드먼드 버크가 보수주의의 근간을 다진 적도 있었어요.




영화의 소재로는 철학자 자신보다 철학책 속 논쟁 주제가 더

알맞을 겁니다. 인식론이 와닿지 않는다면 매트릭스

숟가락 씬을 다시 한번 음미하는 것이 좋겠고요.



리들리 스코트해리슨 포드와 작업한 블레이드 러너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을 탐구했었죠. 같은

감독의 프로메테우스는 신의 존재를 파고 들었고요.



인과론의 비극적 참상은 2004년작 나비효과

처절하리만치 극적으로 묘사했었고요.



욕망에 빠진 인간의 윤리적 모순에 대해선 작고하신 앨런 파큘라

감독이 노년에 작업한 1990년작 의혹(무죄추정)을 추천해요.

해리슨 포드가 여기에도… 출연진 면모와 연기가 엄청나죠.

(원제는 Presumed Innocent.. 미성년자 특히 주의)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돌아가시기 전 블루-화이트-레드 시리즈에서 다루었는데요.

이 연작의 프로토타입 작품을 잘 모르시더라고요.

1991년작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이렌느 야콥이 여기서 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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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 the New Economic Policy

During Early Years of Lenin-Soviet Regime





소련 얘기에요. 없어진 국체의 나라이죠.

물론 정통성은 러시아 연방국이 잇습니다.

차르 푸틴두마의 나라…


1917년에 10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집니다.

무능과 비효율과 선민 의식에 쩔던 러시아 제국이 사라지죠.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이오시프 스탈린)은

혁명 직후 국가의 기반 시설을 점령했지만 이에 반발한

왕조 추종 세력과 귀족 집단이 전쟁으로 대항합니다.


1921년까지 러시아 땅을 휩쓴 적백 내전의 광풍이 바야흐로

불어제끼기 시작한 거죠. (요즘은 러시아 내전으로 부른다죠.)


볼셰비키 적군에게 초기 전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나

지휘 체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던 귀족 반동파 백군을

몰아붙여 전세를 뒤집어갑니다.


이기는 전쟁의 기본은 뭘까요. 딱 두 가지.

잘 훈련된 전투력, 그리고 군수 물자의 보급입니다.


레닌의 고민이 군량 조달에 있었기에 내전 초창기부터

할당량 징발을 근간으로 하는 정책으로 농민을 밀어붙여요.


그러나 계속된 전쟁과 징발식 경제 운용으로

나라의 총생산이 눈에 띄게 떨어집니다.

태세를 전환할 때가 되었구나, 결심하죠.


1921년쯤 되면 전황이 정리되는 단계였죠.

레닌이 오늘날 NEP라고 널리 불리는 유명한

신경제 정책 카드를 가지고 나옵니다.




사회주의 국가 경영의 기본 강령은 완전 국유화입니다.

사유 재산시장 기능을 절대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정부계획한 정책을 통해서만 자원을 분배합니다.


그런데 이 핵심을 건드리지 않고 경제가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거에요.


그래서 기존 이데올로기를 수정한 뉴 버젼을 주창합니다.

국가 자본주의’라는 신제품이었죠. 사회주의 정부가 잘

통제할 수만 있다면 시장 일부를 도입해도 된다는 거에요.


극좌적 사상에 경도된 사회주의자들의 반발도 컸습니다.

그들 중 우두머리가 트로츠키였죠. 트로츠키와의 균열은

이 지점부터 조짐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거에요.


내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레닌은 마르크스 자본론

기본 논리로 돌아간다는 방어 논리를 구축하는 방법으로

국가 자본주의의 정통성을 옹호하고 나섰어요.


무슨 말이냐면 원래 자본론이란 것이 자본주의를 무정부

상태처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에요. 자본주의가 극에 달하다가

어느 순간에 무너져 공산주의 세상이 된다는 판타지이죠.


그러니까 체제 과도기에는 어느 정도 자본주의 성향을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시장 기능을 일부 용인하고 있지만

나중에 결국 완전한 사회주의로 갈 거니까 걱정 없단 말에요..


어째 논리에 오류가 가득한 게 현대인들의 눈에 어쩔 수 없이

보이지만 논리의 과학성보다 권력 관계의 현실이 실제 정치에선

더 중요하쟎아요. 레닌이 권력자였으니 누가 뭐라 했겠어요.




그래서 21년부터 28년까지 신경제 정책으로 NEP의 시대가

도래한 겁니다. 당시 소련 경제의 주축 세력은 농민이에요.


할당량에 따라 무조건 징발 당하던 농민들이 이제 일정하게

고시한 비율에 따라 현물세금납부하는 때가 된 거죠.


왜 현물 납부였냐 하면 이때 제국 멸망과 전쟁으로 엄청난

초초초 인플레를 겪고 있었거든요. 화폐 가치가 휴지 조각이니

돈으로 세금을 낼 수 없었죠. (24년부턴 현금 납부 시작합니다.)


정책의 성과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죠.


첫째, 1차 대전과 적백 내전 등 전쟁의 상흔을 딛고

빠른 시간 안에 국가 체제를 회복할 수 있었어요.


둘째, GDP 상승에 즉효를 보여 농민의 삶이 안정되었어요.

NEP-men이라고 이때 부유해진 사회 계층을 가리키는

용어가 따로 존재할 정도이니 상상이 가죠.


셋째, 통화 가치가 안정화하여 하이퍼 인플레이션

극복하고 정상적인 금융 경제로 복귀하였어요.




28년까지 정책이 시행되다 끝났는데 실제로는 1924년쯤에

이미 정책 효과가 시들시들해지고 있었어요. 왜냐고요?


1924년은 소련 및 러시아인들에게는 중요한 해였거든요.

국부 레닌이 사망한 해랍니다. 이후 스탈린이 집권했어요.


트로츠키의 반대 입장을 전술했쟎아요. 스탈린은 오히려

우파적이어서 수정 자본주의적 정책 도입에 적극적이었어요.

결국 정책 성과에 힘입어 집권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하죠.


그리고 집권과 동시에 스탈린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스타트..! 개시하게 됩니다. 이후 역사에서 등장한 수많은

나라들이 이 패턴을 모방하게 된 거죠. 한국도 역시.


사실 현대 한국사에 큰 영향을 준 소련의 집권기는 스탈린

체제였죠. 레닌보다 집권기가 더 길었으니까. 오래 사셨음.


스탈린 체제 이전 소련은 참 답이 안 나오는 저개발 국가에다

안팎으로 외세의 개입으로 누란지위의 형국이었어요.

20세기 초 대한 제국이나 비슷했을 걸요.


하지만 인민의 먹고 사는 문제를 먼저 해결한 정책 수정

효과에 힘입어 국가 초창기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고

그 중심에는 바로 NEP이라는 역사가 있었답니다.


소련의 뉴딜 정책이라고 볼 수 있겠죠.

레닌 죽고 스탈린이 집산화로 말아먹기 전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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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dicalism and Georges Sorel






20세기 유럽의 정치 사상사에서 꽤 중요했지만

오늘날 (특히 한국에서) 다소 잊혀진 철학자입니다.


프랑스의 조르주 외젠 소렐이란 사상가이고요.

생디칼리즘 syndicalism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에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사람입니다.


이 분의 일생에서 매우 이채로운 점이 있는데

좌우 사상의 양 극단을 왔다갔다 했다는 거에요.


젊어서는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 사회주의를 신봉했고

1908년 소렐 최고의 문제작 ‘폭력론’을 출간했으나

말년에는 수구적 왕당파를 자처했죠. 특이하죠?


폭력론은 ‘폭력에 대한 성찰’로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데

2007년 번역물이 한국에선 역대 최초라고 해요.

그만큼 우리 사상계에서 알려지지 않았다는…






생디칼리즘은 사회주의의 한 분파입니다.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 중간 시기에 나온 것..


노동 공산주의라 하기도 하는데 용어 통일이 필요해요.

하긴 오늘날 거의 사라진 이데올로기이니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질 법하죠.


생디칼리즘 운동의 특징적인 개념은 신디케이트입니다.

syndicate의 본래 뜻은 이익을 위해 결합한 단체인데

여기선 국가 생산 체제를 소유한 노동 조합을 가리켜요.


코퍼러티즘이란 개념과도 비슷한데 협동 조합주의라고

번역하는 이 개념은 기업가와 노동자를 국가가 통제하는

체계를 뜻하는지라 약간 달라요.


코퍼러티즘의 핵심은 노사정 위원회. 기업, 노조, 정부를

상호 균등하게 취급한다는 뜻인데, 생디칼리즘의 노조는

국가의 생산 자원을 독점하는 식이니까 완전히 다르죠.


즉 노동자가 자본주의를 전복하여 국가 생산을 독점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혁명 사상의 기본 줄거리를 따라가는 거죠.

생디칼리즘 자체는 사회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아요.


(코퍼러티즘은 사회주의의 범위를 벗어나 민주주의의

한계 안에서만 움직인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의 차이라면 폭력 혁명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총파업 등 노동 투쟁의 방법으로 자본

활동을 저지하는데 우선 순위를 둔다는 점 정도…?


19세기 후반 마르크스주의가 시간이 흘러

시대적 의미가 조금 변화한 형태라고 보면 될 거에요.


마르크스의 폭력 혁명 — 생디칼리즘의 총파업 활동이

등장한 후에 러시아에서 레닌-스탈린 정부가 등장한..

대충 이런 연대순입니다. 19세기 후반에서 1917년까지..


생디칼리즘은 사상 체계가 먼저 등장하여 정치를 이끈

형태가 아니라 먼저 실제적 활동이 등장한 후에 이를

뒷받침하는 사상이 나온 형태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 운동이 불거진 연후에 조르주 소렐

같은 사람이 정리하는 의미로 저서를 내어 사상 체계를

정리했답니다. 1908년의 폭력론은 그런 책입니다.


오늘날 사상계에 의의를 확장해야 할 시대성은 없는 것

같고 다만 공산당 선언에서 볼셰비키 혁명으로 가는 연대기

선상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기억하면 되요.


참고적으로 소렐은 정치 활동과 폭력 활동의 동기 부여를

위한 수단으로서 정치적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어요. 이채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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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al Ideologies:

Conservatism, Liberalism, Socialism




정치학 강의실에서 이데올로기를 가르칠 때

보통 세 가지 큰 줄거리에서 시작합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가 그것이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나온 때가 18세기 말, 사회주의는

19세기 후반에 나왔으니 꽤 오래 전에 나온 것들이고

이런 것들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긴 힘듭니다.


수백 년이 흘러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섞여

오늘날 정치 세력이 따르는 이데올로기의 양상은

별도로 현대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사상이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의 중심입니다.

19세기 중반에 존 스튜어트 밀이 이를 집대성했어요.


밀 이전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전쟁 같은 현상을

읽어 내려는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이 중 에드먼드 버크

혁명을 부정하며 보수주의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부정했지만 미국 독립은 지지했죠.

사회 변화가 극단적 폭력으로 나타나면 싫어한 거에요.


19세기 후반에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일으켜

사회 각 부문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산업 자본주의가

득세하며 사회 분배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어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본적 한계의 맥을 짚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가 끼친 영향은 컸어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상의 줄기가 현대 이데올로기를 형성해요.




사회 자유주의와 사회 민주주의, 기타 보수주의



사회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분배 형평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한 개념이에요. social liberalism..


19세기 후반에 자유 지상주의, libertarianism..가 각국

정부에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를 퍼뜨렸고 노동 문제가

부각되니 기존 사상을 수정하며 사회 자유주의가 등장하죠.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골격은 유지하되 분배와 복지 문제에

있어서는 좌파적 시각을 일부 받아들인다는 식이에요.


종전 후 현대 국가에 등장한 민주적 사회 복지의 개념은

사회 자유주의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되요.


50년대 이후 미국 민주당의 정강이 여기에 걸쳐 있죠.

리브뎀으로 불리는 영국 자유민주당의 사상도 마찬가지에요.

liberal democrats..


사회 자유주의는 사회주의 영향을 받지만 자유 경쟁이란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는 배척하지 않아요. 도는 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반면 democratic socialism..은..


이에 반해 사회 민주주의는 궁극적 바탕을 사회주의에 두되

폭력 혁명이나 계급 투쟁을 방법으로 하지 않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권을 벗어나지 않는 특징을 갖습니다.


대신 경제적으로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목표로는 하므로

생산 수단과 기간 시설을 공공 소유하고 국유화하는 등의

사회주의 일부의 방법을 차용합니다.


사회 자유주의가 자유 지상주의의 안티 테제였던데 반해

사회 민주주의는 맑시즘이나 스탈린식의 대안으로 등장했죠.


즉 오늘날 현대 정당들이 대립하는 양상이 그렇게 보일 뿐,

출현하게 된 역사 배경을 보면 사자와 사민은 대립 관계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어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잘 알려져 있지만 종전 후 스웨덴을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이 70년대까지 사회 민주주의 노선을 펼쳐

오늘날 선진국의 기반을 닦아 놓습니다.


그러나 사민주의 성향이 오늘날까지 북유럽에 남아 있다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70년대 정부 실패 현상 이후에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기존 노선을 수정했죠.


미국 민주당의 큰 줄기가 사회 자유주의이지만 구성원들이

좌파부터 중도 우파까지 다양한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정치 사상의 현상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에요.


토니 블레어노동당은 원래 사회 민주주의 노선이어야

했지만 90년대에 그가 들고 나온 ‘제3의 길’은 아무리 봐도

사회 자유주의 체제였죠. 이와 비슷해요.


보수주의의 현대적 양상이 다소 뜬금없을 수 있어요.

국가나 민족마다 상이한 종교와 관습의 영향을 받아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타났죠. 20세기 초..


이른바 사회 보수주의라거나 social conservatism..

자유 보수주의 등의 형태.. liberal conservatism..


미국 공화당이나 영국 보수당이 종교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이들의 기조 사상은 의외로 보수적 기독교

사상과 꽤나 맞닿아 있답니다. 독일 기민련도 마찬가지..


이외에 중동에 기성 질서를 옹호하는 회교 정당들이

즐비한데 이런 현대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입니다.

아랍 권역으로 이해하면 감이 빨리 오죠?


우리나라의 이데올로기를 논하고 싶은데

너무 내용이 길어지니 다음 편으로 나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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