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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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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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이데올로기: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2. 2018.07.11
    인구 고령화 시대의 맬서스 트랩
  3. 2018.07.07
    중국의 현대사: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
  4. 2018.07.03
    현대 남북한 경제의 차이점 그리고 미래
  5. 2018.06.30
    경제 개발 전략: 수출 주도형 및 수입 대체형
  6. 2018.06.27
    쿠즈네츠 가설: 성장과 분배, 효율성과 형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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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한국인들은 헨리 8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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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궁병 대 기사, 활과 갑옷의 대결
  10. 2018.06.18
    크레시 전투 및 푸아티에 전투



Political Ideologies:

Conservatism, Liberalism, Socialism




정치학 강의실에서 이데올로기를 가르칠 때

보통 세 가지 큰 줄거리에서 시작합니다.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가 그것이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나온 때가 18세기 말, 사회주의는

19세기 후반에 나왔으니 꽤 오래 전에 나온 것들이고

이런 것들을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긴 힘듭니다.


수백 년이 흘러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섞여

오늘날 정치 세력이 따르는 이데올로기의 양상은

별도로 현대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자유주의 사상이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의 중심입니다.

19세기 중반에 존 스튜어트 밀이 이를 집대성했어요.


밀 이전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전쟁 같은 현상을

읽어 내려는 사상가들이 있었는데 이 중 에드먼드 버크

혁명을 부정하며 보수주의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부정했지만 미국 독립은 지지했죠.

사회 변화가 극단적 폭력으로 나타나면 싫어한 거에요.


19세기 후반에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일으켜

사회 각 부문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산업 자본주의가

득세하며 사회 분배의 문제가 불거지게 되었어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본적 한계의 맥을 짚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가 끼친 영향은 컸어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상의 줄기가 현대 이데올로기를 형성해요.




사회 자유주의와 사회 민주주의, 기타 보수주의



사회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가

사회 정의를 실현하고 분배 형평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수정한 개념이에요. social liberalism..


19세기 후반에 자유 지상주의, libertarianism..가 각국

정부에 자유 방임적 자본주의를 퍼뜨렸고 노동 문제가

부각되니 기존 사상을 수정하며 사회 자유주의가 등장하죠.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골격은 유지하되 분배와 복지 문제에

있어서는 좌파적 시각을 일부 받아들인다는 식이에요.


종전 후 현대 국가에 등장한 민주적 사회 복지의 개념은

사회 자유주의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면 되요.


50년대 이후 미국 민주당의 정강이 여기에 걸쳐 있죠.

리브뎀으로 불리는 영국 자유민주당의 사상도 마찬가지에요.

liberal democrats..


사회 자유주의는 사회주의 영향을 받지만 자유 경쟁이란

시장 경제의 기본 원리는 배척하지 않아요. 도는 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반면 democratic socialism..은..


이에 반해 사회 민주주의는 궁극적 바탕을 사회주의에 두되

폭력 혁명이나 계급 투쟁을 방법으로 하지 않고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권을 벗어나지 않는 특징을 갖습니다.


대신 경제적으로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목표로는 하므로

생산 수단과 기간 시설을 공공 소유하고 국유화하는 등의

사회주의 일부의 방법을 차용합니다.


사회 자유주의가 자유 지상주의의 안티 테제였던데 반해

사회 민주주의는 맑시즘이나 스탈린식의 대안으로 등장했죠.


즉 오늘날 현대 정당들이 대립하는 양상이 그렇게 보일 뿐,

출현하게 된 역사 배경을 보면 사자와 사민은 대립 관계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어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잘 알려져 있지만 종전 후 스웨덴을 위시한 북유럽

국가들이 70년대까지 사회 민주주의 노선을 펼쳐

오늘날 선진국의 기반을 닦아 놓습니다.


그러나 사민주의 성향이 오늘날까지 북유럽에 남아 있다고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70년대 정부 실패 현상 이후에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기존 노선을 수정했죠.


미국 민주당의 큰 줄기가 사회 자유주의이지만 구성원들이

좌파부터 중도 우파까지 다양한 현상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정치 사상의 현상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에요.


토니 블레어노동당은 원래 사회 민주주의 노선이어야

했지만 90년대에 그가 들고 나온 ‘제3의 길’은 아무리 봐도

사회 자유주의 체제였죠. 이와 비슷해요.


보수주의의 현대적 양상이 다소 뜬금없을 수 있어요.

국가나 민족마다 상이한 종교와 관습의 영향을 받아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타났죠. 20세기 초..


이른바 사회 보수주의라거나 social conservatism..

자유 보수주의 등의 형태.. liberal conservatism..


미국 공화당이나 영국 보수당이 종교와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이들의 기조 사상은 의외로 보수적 기독교

사상과 꽤나 맞닿아 있답니다. 독일 기민련도 마찬가지..


이외에 중동에 기성 질서를 옹호하는 회교 정당들이

즐비한데 이런 현대적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세력입니다.

아랍 권역으로 이해하면 감이 빨리 오죠?


우리나라의 이데올로기를 논하고 싶은데

너무 내용이 길어지니 다음 편으로 나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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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Malthusian Trap, Why Population Matters






Thomas Robert Malthus (1766~1834, England)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를 기억하시나요.

Thomas Robert Malthus..



맬서스 트랩 때문에 오늘날은 여기저기서

까이기만 하는 학자 같기도 합니다만.



투박하게 요약한 맬서스 트랩이란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식량 생산이 이를

따라잡지 못하므로 모두 망한다네’랍니다.



산업 혁명 후 거시 경제의 폭발 성장을 경험한 정상적

현대인이라면 이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는 않겠죠.



18세기 후반 1766년에 출생한 그는 전근대, 즉

근대 직전 봉건 경제 이론의 마지막 하울링 같은

구체제의 상징적 인물일 겁니다.






Adam Smith (1723~1790, Scotland)






비슷한 시기를 약간 먼저 살아 1776년에

국부론을 출간하여 산업 혁명 시대를 열어젖힌

애덤 스미스와 여러 모로 비교되죠.



두 사람은 서로 오버랩되는 것 같아요.

봉건 체제가 저물고 자본주의가 열리는 시기였죠.



개인사적으로는 부유한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네요.

성공회 성직자로 살다가 대학의 교수가 되기도 했고.



세대가 전혀 다른 애덤 스미스보다는

10년 정도 후배인 데이비드 리카도와 절친한 동료였고..






David Ricardo (1772~1823, England)






그가 서른 둘이던 1798년에 발표한 논문 ‘인구론’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역사책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구론의 요지는 인구가 기하 급수로 증가하는데 반해

식량 생산은 산술 급수로 증가한다는 것, 들어들 보셨죠.



산술 급수는 1차 함수 그래프, 즉 직선 기울기란 뜻이고

기하 급수는 2차 또는 지수 함수.. 즉 이자 복리 같은 것..






Malthusian Trap






수학적으론 이런 뜻이고요. (사람이 이자냐ㅠ)

이건 이미 여러 번 논파 당한 이론이에요.



경제학 강의실에서 가르칠 때에는 보통 농업 기술

발전에 의해 식량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것을

예상치 못한 것이라고 흔히 설명들 하고요.



현대적 의미에서 맬서스 트랩의 가치는 아마도

고전 경제학의 흐름에 안티 테제로서 훌륭하게

작용하였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아요.



그가 저소득층 복지 축소를 주장한 덕분에

복지 제도가 현대 자본주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아주 아이러니컬하게 강조가 된 것 같고요..—.—



다소 뜬금없긴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다윈 진화론

영향을 주기도 했어요. 생물 종 사이 경쟁은 결국 식량

자원의 희소성 때문이라는 힌트를 줬다고 하죠.






Charles Darwin (1809~1882, England)






경제학자들은 그가 고전파 사상가 중 거의 최초로

과잉, excess의 개념을 들고 나와 체계화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듯해요.



다소 희화화시켜 설명하긴 했지만 이미 논파 당했다고

과소평가할 학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현대에 와서까지

맬서스의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대한민국만 해도 무려 90년대까지 산아 제한 정책을 편

병크로 인해 지금 고령화 질병을 앓고 있쟎아요.



일본중국 등 70~80년대를 낡은 개발 논리에

젖어 산 나라들도 이 폐해를 겪고 있고요.





The Principle of Population (1798)






(스미스가 자본주의의 미래를 내다본 반면)

맬서스는 과거의 경제를 바라보고 산 사상가였죠.



산업 혁명 전까지 수천 년의 인류 역사는 인구가 곧

국력이고 사람 숫자가 GDP이던 때였습니다.

쪽수만 많으면 거의 모든 전쟁을 이겼고요.



산업 혁명과 경기 변동의 시대를 겪으면서 약 2백년 간

인류는 이런 인구의 중요성을 잠시 잠깐 망각하며 살짝

성장의 환각에 취했었습니다만.



성장 중심 고전 경제학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 지금은

이제 다시 기본으로 돌아와 인구의 중요성에 새로운

현대적 해석을 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창고에 켜켜이 쌓아두고 돌아보지 않던

맬서스 이론의 페이지를 다시 들쳐봐야 할지도…



오늘날의 맬서스는 그렇게 새로운 의의를

선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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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Post-War China:

Great Leap Forward & Cultural Revolution




오늘날 중국은 미국에 이은 제2의 강대국이죠.

또 중국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항상 강대국이었습니다.


한번쯤은 들어봤을 ‘조공’이라는 봉건적 외교 원리가

중국의 이런 지역적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요.


중화 국력의 대외 신인도에 의문이 생긴 기간은

수천 년 역사에서 그리 길지는 않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아편 전쟁부터 덩 샤오핑 집권 전까지 시기이겠죠.


현대 중국의 정통성은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계승하는데요. 오늘날과 같은 경제력의 기반은 1978년

집권한 덩 샤오핑으로부터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49~78년까지 중공은 국정의 역대급 저점을 찍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들의 50~60년대를 지배한 정책 실패는 처참했죠.


두 가지 사례가 있었습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이 그것인데요.

마오이즘의 속빈 민낯을 드러낸 사건이었어요.




대약진 운동, 마오의 경제 공산화 실책



마오 쩌둥이 실시한 대표적 병크 정책들입니다.

굳이 한줄 요약하자면 대약진 운동은 공산주의 경제 정책,

문화 대혁명은 대중 공산주의 운동인데요. 둘다 대실패했죠.


대약진 운동은 소련처럼 산업 노동자 계급이 중심이 아니라

농경제 중심의 체제 구도를 들고 나온 초기 중공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줍니다. 농촌 중심의 변혁을 일으키려는 시도였죠.


일종의 집산화 체제 구축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농이나 자영농의

존재를 부정하고 지역 촌락 단위로 생산 공동체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이 안에서 농업 및 공업 생산을 주도하게 한 거에요.


마을 단위로 생산 수단을 철저하게 공유하여 다 함께 경작하고

밥을 지어먹는 것도 다 함께 한다는 발상이에요. 흔히 시체말로

원시적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을 현대에 재현한 거에요.


언뜻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하죠? 하지만 이게 가능하겠어요?

‘철저하게 생산 수단을 공유한다’고 했는데 그 실상이…ㅠ


개인 단위로는 숟가락 하나도 가질 수가 없는 구조였어요.

커다란 농경기에서 사소한 잡기까지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

발상이니 인간 행위의 미세한 프로세스를 모두 통제한 거죠.


이런 상황에서 사회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떻게 나오겠어요.

자기 것을 가질 수가 없는 상황이니 생산량 따위 개나 줘버려..

이런 형국이 되어 버린 거에요.


생산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는 거죠. 그 목표량을

달성해야 그 공동체의 인구를 먹여 살릴 텐데 각자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쁜 거에요.


이기적인 사람들이군, 하고 비판하지 마세요. 원래 인간의

본성이 그런 거에요. 현대의 이성적인 한국인이라 한들 이런

상황이라면 같은 행동 패턴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 본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없이 이념에 휩쓸려

정책을 개발한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죠.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수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공식적인 통계로는 아사자 4천만 명 정도라고..ㅠ

58년에서 62년까지 밀어붙인 결과였죠.




문화 대혁명, 마오이즘식 보수 반동 쿠데타



문화 대혁명은 사실 대약진 운동의 결과입니다.

마오에 대한 지지도가 급감하니 이를 만회하기 위해

일종의 마오 신격화 운동을 벌인 것이 문혁입니다.


반동 쿠데타를 민중 운동화한 것이라고 보면 되요.

홍위병이라고 하는 청년(또는 청소년) 집단이 등장합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까지 젊은 사람들이 마오의 사주를 받아

몰려다니며 우파 인사들을 때려잡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때려잡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생긴 일입니다.

피해자를 조롱하는 두건을 씌우고 때려죽였다고 해요. 헐.


직접 때려잡은 것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기 미국에선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 사람을 ‘사회적으로’ 때려잡았죠.


인명을 살상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또 모르겠는데

오늘날 중국사에 더 치명적인 병크가 또 있었죠.

반달리즘이라고.


홍위병들이 유무형 문화재를 파괴한 거에요.

공자의 사당을 부숴 버리거나 전통 예술 장인들을

때려잡거나 하는… 더 끔찍하죠.


패왕별희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 많을 거에요.

후반부에 세 명의 주인공이 홍위병에 둘러싸여 서로

자아비판을 하는 장면이 바로 이 상황인 거에요.


덕분에 오늘날 중국은 자국 문화재가 자국에 있지 않고

그들이 인정하지 않는 타이완에 더 많은, 웃기지도 않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네요.




대체 왜 이런 일이



한국의 보수 기성 언론은 이런 역사를 보통 공산주의

체제의 폐해 운운하며 단편적으로만 전하는 것 같아요.

의외로 그다지 정확하게 분석은 하지 않는데요.


물론 공산주의의 한계로 볼 수도 있어요.

공산당 정권이 빚어낸 역사 자체가 커다른 모순 덩어리죠.


공산주의 국가에게만 특징적인 현상이었다기보다

마오이즘 독재가 극에 달한 시기의 정책 실패에 가깝겠죠.

독재 정치의 일반적 현상 중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을 거에요.


독재 체제가 경제를 그르치고 대중 프로파간다를 통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을 둘러봐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니까요.


이승만 정권이나 박정희 정권의 프로파간다도 비슷했어요.

이승만은 소위 말하는 ‘국부’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고

애썼죠. 국부주체나.. 뭐가 다르죠.


박정희 정권은 프로파간다를 발전시켜 법제화해 버렸어요.

그래서 유신 체제가 탄생했죠. 김일성이 북에서 주체 사상을

푸쉬한 바로 그 순간에 말이에요.


대약진, 문혁, 국부, 유신, 주체, 매카시즘…

어쩌면 전후 봉건적 근대성이 아직 종식되지 않은 세계의

마지막 보수 반동적 사건들인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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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of Economic Policy,

South and North Koreas




남북한 경제의 짤막한 변천사를 짚고

미래를 그려 볼까요.




전후 한국의 경제 정책 특징



네 마리 용 나라들은 보통 공통적인 특성이 있어요.

적절하게 많은 인구, 그 인적 자원의 높은 지적 수준,

애매한 부존 자원, 중앙 집권적 정부, 선진국과의 네트워크..


즉 자원은 별볼일없고 사람이 재산인 나라들이죠.

대개 미국 및 서방의 원조를 바탕으로 기초를 다진 후

독재 성향의 중앙 정부가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했어요.


팔아먹을 자원이나 운용할 금융 자본이 많지 않으므로

노동 집약적 분야에 유치 산업을 지정하여 집중 육성해요.

저임금의 비교 우위를 앞세워 생산품의 단가를 낮추는 거죠.


초기엔 경공업으로 시작하여 이후 제철, 정유, 제련 등

기간 중공업을 공기업 기반으로 일으켜 생산 여건을 갖춘 후

가전, 기계, 자동차, 조선 등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행했죠.


멀리 갈 것 없어요. 박정희 정권 시기 섬유 공업에서 시작,

일본 배상금을 몽땅 베팅하여 포항 제철을 세우고 이병철과

정주영 등 재벌에 지원을 집중한 것… 다 이 방식입니다.


한국의 경제는 이런 수출 주도형 계획 경제에 힘입어

90년대 초반까지 성장을 이루어냈습니다. 이 덕분에 김영삼

정권 때 금융 시장을 개방하고 자유 무역 시대를 열죠.


(그러나 아직 체질이 허약한 경제 체제의 한계로 곧바로

IMF 크리를 맞습니다. 같은 시기 주요 아시아 국가들도..)


*유치 산업이란 계획 경제에서 성장의 기점으로 잡아

집중 육성하는 일종의 시드 머니 같은 산업을 일컬어요.

알렉산더 해밀턴 같은 관료 겸 학자가 내놓은 개념입니다.




현대 북한의 경제 변천사 요약



김일성 집권기 북한의 50~70년대는 소련과 중공을 좇아

중공업 중심 계획 경제를 실현하고 수입 대체형으로

자급자족 체제를 구현하는 데 있었어요.


그러나 소련과 중공이 그러했듯이 북한의 계획 경제는

심각한 균열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경공업 소비재 부문이

절대적으로 취약한 구조를 노출하고 말았죠.


80년대부터는 김일성 주석의 고령화로 김정일 위원장이

실질적으로 섭정하는 체계로 넘어갔는데 합영법을 도입하여

외국 투자를 유치하려 했으나 큰 성과 없이 실패했어요.


외국 투자단이 매력을 느낄 만큼 자국의 경제 요소가

비교 우위를 갖고 있음을 입증했어야 했는데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경직된 관료 체제가 이를 따라주지 못했어요.


또한 김정일 위원장 집권 기간은 공식적인 운영 구조가

군사-경제 병진 체제였습니다. 선군 정치라고 하는 그것..

자본주의 체제가 제대로 도입될 수가 없었어요.


별다른 대책 없이 몇 가지 치명적 정책 병크씩이나 경험하며

90년대 중반부터 널리 알려진 고난의 행군 시대를 겪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정책 기조는 베트남식 ‘도이머이’ 경제 개혁.

사회주의 독재 정치 기반을 굳건히 유지하며 자본주의 개방

경제로 체질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전략입니다.


2012년경 기존에 자생적으로 존재한 장마당을 인정하여

시장 경제 요소를 공식 편입하고 2013년초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합니다. 박정희 정권의 그것과 같은 겁니다.


아직 완전하게 자유 무역 체제로 개방하기에는 북한의 체질이

허약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입 대체 전략을 병행하는 것 같아요.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주요 제품을 자체 조달하고 있죠.




한반도 경제 협력 지구의 미래



북한이 완전한 개방 경제로 변화하기 위해선 자국 경제 요소의

대외 신용도를 국제적으로 인증받는 것이 필수입니다.

일단은 경제 제재부터 풀어야 하겠고요.


4.27 선언과 6.12 회담은 그런 경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치적 선결 조건입니다.


북미 관계의 해소를 통해 제재를 풀고 외국 투자의 유치 기회를

증대해 나가야 하는데 그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한국의 정부와

기업이 능히 해낼 수 있습니다.


한국으로서는 새로운 경제 도약의 기회를 창출한 셈이니

그동안 성장이 정체되어 풀리지 않던 경제 해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셈이고요.


지금은 그런 시대를 막 열어 젖히고 있는 문턱에

모두가 첫 발을 내딛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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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elopment Strategies:

Export-Oriented EOI vs Import Substitution ISI




개발 경제학의 기본 원리 얘기를 해보죠.




경제 개발의 기본 개념



경기 변동이란 한 나라의 거시 경제가 기본적으로

업 앤 다운을 반복하여 순환하여 움직인다는 것…


경제 성장이란 한 나라 경기 변동의

장기 그래프가 상승 국면으로 올라가는 현상…


경제 개발이란 한 나라가 경제 성장이란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인위적인 국가 정책을 펴는 것…


(즉 경제 성장은 현상이고 이걸 만들어 보려는

행위 뭐시기 일체를 경제 개발이라 한다능..)


개발 경제학이란 경제 개발에 도달할 원리를

연구하는 거시 경제학의 각론 중 하나입니다.


지금까지는 후진국이 개발 도상국에 이르는 과정에

많은 동인과 배경을 제공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개발 경제학이란 개념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1950~90년대 현대사를 공부하지 않았다는 뜻이고요.


정부 수립 이후 90년대 초중반까지 발전 이면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같은 정부 주도형 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답니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우리도 채택한 적 있고

종전 직후 선진국이 아닌 나라들 이거 많이 했어요.


(90년대 말 경제 개방과 IMF를 기점으로

한국의 거시 경제는 체질이 바뀝니다.)




수출 주도형 그리고 수입 대체형



경제 개발 전략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많이들 들어봤을 거에요.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전략, Export Oriented Industralization

수입 대체형 산업화 전략, Import Substitution I…

EOI vs ISI.


수출 주도형은 국제 비교 우위를 갖는 경제 자원을

몰빵하여 수출품 생산에 전력을 다하는 방법입니다.


수출해서 얻은 수익으로 부족한 경제재를 수입하는

방식이므로 근본적으로 수출입 개방 경제를 전제로 해요.


수입 대체형은 대체로 개방 경제를 염두에 두진 않아요.

수입해서 충원할 부족한 경제재라도 되도록 국내 생산하여

전체 물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발상이니까요.


수출형의 대표적인 사례는 70~80년대 이른바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린 나라들이 대표적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타이완 그리고 대한민국.

경제 체질이 비슷하기 때문에 대개 일본도 포함합니다.


수입형의 대표적인 사례는 50~60년대 계획 경제를

펼친 공산권 국가들과 종속 이론의 피해자라고 불리는

남미 및 아프리카 등 제3세계 나라들입니다.


소련, 중공, 브라질, 아르헨티나, 가나가 대표적이고

ISI와 종속 이론을 결합한 개발 경제학 주류 이론은

주로 남미 출신 경제학자들이 연구를 주도했답니다.


남북한을 구분하여 생각해 보면

대략 남한이 수출 주도형, 북한이 수입 대체형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또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박정희 정권만 하더라도 두 가지 전략을 혼용했죠.

물론 수출 중심에 더 큰 방점이 찍혀 있었지만요.


남북한 경제의 서로 다른 상황은

다음 편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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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znets Hypothesis: Quantity or Quality?






쿠즈네츠 가설에 대해 알아볼까요.

성장분배의 관계를 논한 가장 오래 된 이론 중 하나..



‘무릇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는 과정이란 것이

처음엔 시장의 양적 규모가 커지는 방향으로 가다가

나중에 불평등을 개선하는 쪽으로 변화한다’는 가설…



즉, 어느 나라든 경제 발전의 초반 이슈는 성장이고

말기에 가서야 분배 이슈가 대두된다는 뜻이에요.



양적 성장과 질적 분배 사이의 논쟁..

효율성이 먼저냐 형평성이 우선인가 하는

아직 어떤 경제학도 풀지 못한 핵심 문제인 겁니다.



사이먼 쿠즈네츠가 주로 1950~60년대까지의 미국

거시 데이터를 손에 들고 이 가설을 다듬었다고 합니다.

관찰해보니 이런 결과가 나오더라 하는 결론인 건데…



쿠즈네츠 본인이 현상을 놓고 그럴 듯한 설명을

붙여 보려고 무진 애를 쓰긴 한 모양이에요.



성장 초기에 투자는 곱절로 불어나는 반면

저임금 고용은 얼마든지 이루어지니 파이 크기는

커지게 마련이다.. 라고 설명을 붙였고요.



또 기업 활동이란 본래 시간이 흐를수록 아직 미지급한 인적

자원 관련 액수가 미지급한 물적 자본 액수보다 커지기 마련이니

결국 임금 분배 문제가 나중에 불거지는 속성을 갖는다고도…



빈곤층일수록 등록금 대출 받기가 어려워지니 교육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경제적 불평등이

성장의 발목을 잡을 것이란 주장도 있었어요.



그리고 유명한 ‘역U자형’ 곡선이 등장해요.

경제적 불평등도를 가리키는 지니 계수가 1인당 소득과

어떤 관계를 보이는가를 표현한 그래프이죠. 아래에..










시간이 흐르며 소득 평균이 상승해갈 때

분배 불평등은 점점 악화하다가 정점을 찍고

다시 개선되어 갈수밖에 없다는 그림이에요.



잠시 이 그래프를 뚫어지게 응시해 보세요.

복잡한 설명 제쳐두고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시면…



문제점이 뭔지 아시겠죠? 이런 이론은 그냥 가설이에요.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실제 데이터를 측정해보니

‘때마침’ 우연하게도 이론에 들어맞더라 했던 거죠.



실제로 100년간 미국의 지니 계수를 측정해보니

1930~50년대에 저 역U자와 비슷한 그림이 나오긴 했어요.



거기 놀라면 안 되요. 그냥 우연이고 횡재에요.

그때 당시에‘만’ 우연히 맞아떨어진 현상임을 간과한 거에요.

그토록 저명한 경제학자가 저지른 오류인 거죠.



60년의 시간이 흘러 토마 피케티가 아래 그림을 제시하며

그 오류를 입증합니다. 21세기 자본론이 등장하죠.













위 그림에서 1928년경의 고점과 1944년경의 저점을 보세요.

이 하락 국면은 쿠즈네츠의 역U자와 귀신같이 일치하죠.



하지만 이를 어째요. 이후 지니 계수가 다시 상승해서 2008년

금융 위기 무렵엔 대공황 저리가라 할 정도로 치솟아버리죠.



그림에 보이시죠? 쿠즈네츠는 금융 위기 전에 노벨 상 챙기고

돌아가셨으니 이 점을 미처 예상할 수가 없었어요.



21세기 자본론에 ‘쿠즈네츠는 틀렸다’고 주장한 요점이

바로 이거에요. 그래서 효율성이 아닌 형평성의 경제학을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역설한 거죠.



물론 쿠즈네츠 가설의 역사적 가치가 퇴색하진 않습니다.

케인지언들이 기세등등하던 시절 주류의 관점에서

형평성을 연구해야 한다고 외친 학자는 많지 않았어요.



그의 가설은 이후 오랜 시간을 두고 수백년간 경제학자들이

다 같이 달려들어 풀어야 할 고차 방정식의 첫번째 해에

불과한 거에요. 이걸로 결론이라고 못박아버리면 곤란해요.



우리 사회의 분배와 형평성의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못했어요.

사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 경제학자가 해결할 리 만무하겠죠.



또한 관점을 뒤바꿔서, 아직 주류에서 충분하게 연구하지 못한

미완성의 형평성 개념을 놓고 전체 경제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건 학자로서 버려야 할 오만이라고 볼 수 있고요.



경제학자들에게만 맡겨 두기에 어쩌면 너무 중요한 문제일지도.

우리 다 같이 형평성에 대해 토론을 시작하면 어떨까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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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방선거, 집권 여당 압승 (영국 이코노미스트)

https://www.economist.com/asia/2018/06/14/south-koreas-ruling-party-wins-a-landslide-victory-in-local-elections



6.13 지방 선거에서 압도적인 결과가 나왔네요.

영국의 이코노미스트 지가 이를 발빠르게 보도했습니다.


인터넷판 말고 인쇄판에는 라이징 ‘문’이란

표제를 대문짝 만하게 실었다고 하네요.


6월 14일 기사의 전문 번역입니다.

저작권에 문제 있을 경우 삭제하겠습니다.






Rising Moon

라이징 ‘문’


South Korea’s ruling party wins a landslide victory in local elections

한국 집권 여당이 지방 선거에서 거둔 엄청난 승리


Detente with North Korea has made the president wildly popular

남북 데탕트로 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


2018년 6월 14일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지방 선거 사전 투표제를 통해 미리 투표권을 행사하였다.선거일 당일인 6월 13일에 그는 산행을 떠났다. 반바지에 등산화, 반팔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얌전히 옆을 따른 애견 마루를 데리고 나온 채, 그는 북악산에 올랐다.



선거 당일 홀가분한 문 대통령의 분위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몇 시간 후 공표된 출구 조사 결과는 대통령이 속한 좌파 계열 더불어 민주당의 승리를 예측했으며 이는 대통령 임기 1년차 행정의 우등 성적표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 당선은 탄핵 사태로 급하게 치른 2017년 5월 선거에서 이루어졌다.) 여당은 총 17개 광역 단체장 선거구에서 단 셋을 제외하고 압승을 거두었고 이는 전례에 없던 대승이다. 또한 공석 상태였던 12석의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11석을 낚아채는 성과를 거둠으로써 여소야대 정국의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투표율도 60퍼센트를 기록하며 1995년 첫 회 68퍼센트를 기록한 역대 지방 선거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다. 70퍼센트 중반을 맴돌던 대통령의 고공 지지율도 선거일 당일 여론 조사로는 80퍼센트를 찍었다고 한다.



선거 결과가 충격적인 이유는 문 대통령의 높은 인기가 이제 한국 정치에 뿌리깊은 문제점인 고질적 지역 구도를 타파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다는 점에 있다. 한국 동남권인 부산-울산-경남 권역은 사상 최초로 민주당 소속 광역 단체장을 선출하였다. 원내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지겹도록 끈질긴 국회 발목잡기가 다소간의 지지자를 확보했는지는 모르겠다. 자유한국당은 1년 내내 대통령 정책을 조준 사격하였고 특히 (어처구니없게도) 대통령 및 행정부의 권한을 축소하는 개헌안마저도 궤도 이탈시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또한 남북 관계 데탕트 정책마저 공산당의 위장 평화쇼 운운하며 깎아내리기 일쑤였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6월 13일 선거의 열풍이 지나간 후 페이스북에 “모든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고 포스팅을 날리며 대표직 사임 의사를 내비췄다.



야당 입장에서야 선거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및 김정은 위원장 간의 북미 정상 회담 바로 다음 날에 벌어진 점을 특히 안타까워 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두 정상을 만나게 하기까지 맡은 역할이 결코 작지 않았고 대통령 본인이 김 위원장을 두 차례나 만났기 때문이다. 이런 외교적 노력의 서막이 작용하여 한국인들이 한반도 대립 국면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안도의 감성을 스스로 일깨우는데 이른 것이다.



TV 방송 매체는 전력을 다하여 북미 회담의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이후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선거 개표를 방송하였다. 한 방송사는 개표 상황 묘사에 해리 포터 주제를 끌어와 후보자들을 망토와 지팡이를 든 마법사로 그려내었다. 다른 곳은 광선검을 든 제다이 기사 그래픽을 그린 후보자들 모습을 내보내기도 했다.



더불어 민주당 선거 승리의 강한 여파는 문재인 대통령 집권 행보에 강한 힘을 실어줄 것이다. 여당을 포함하여 진보 좌파 계열의 독립 정당을 합하면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여 앞으로 정부의 법 개정 움직임을 강화해줄 것이다. 한국의 시민들은 재벌 및 대기업에 철퇴를 가하는 문 대통령의 적폐 청산 및 공정 사회 정책에 광범위한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건강 보험 및 국민 연금 운영 개혁과 노동 조건 향상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북 관계에 차질이 빚어지면 분위기는 또 싸늘하게 식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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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 You Aware Who Henry VIII Really Was?




미디어는 다양한 모습으로 헨리 8세를 묘사해왔습니다.


60년대에 나왔던 리처드 버튼의 영화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나탈리 포트먼과 스칼렛 요한슨이 자매로 나온 영화도 생각나며

캐나다 드라마 시리즈도 기억나네요.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한 작품으로서야 이런 창작물을 깔 만한

구석이 없을 거에요. 각각이 모두 독창적 완성도를 구축했고요.


69년작 ‘천일의 앤'은 당시 수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었어요.

리처드 버튼의 연기는 지금 봐도 감탄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긴,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진짜 배우들이었으니까요.


대체적으로 미디어가 소비해온 헨리 8세는 그러했습니다.

여자에 눈이 멀어 조강지처를 버리고 종교를 버린 난봉꾼, 색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ㅎ


이런 이미지는 조선 후기 숙종 같은 군주와 자주 오버랩되어

사극을 좋아하는 중장년의 보수적 시청자층에게 뭔가 묘하게

동질감의 판타지를 조장해온 느낌이에요. 저쪽도 비슷했구나.. 하는.


현대 한국의 사회가 미디어에서 장희빈을 소비하는 방식의

연장선상 어딘가에 비슷한 형상을 한 앤 불린이 있을 겁니다.


이 이미지는 진실에 가까운 정당한 것일까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어떤 인물인가요.






헨리 8세가 걸어온 행보, 그 목적



열 여덟의 나이에 즉위한 헨리 7세의 왕자는

튜더 왕조가 기록하는 두번째 군주였습니다.


튜더 왕조는 장미 전쟁 이후에 탄생한 16세기

잉글랜드의 왕가 가문이고요.


장미 전쟁이란 랭커스터와 요크, 두 가문 사이에 발발한

15세기의 왕위 계승 내전이었습니다.

(두 왕가의 인장이 장미 문양이라서 저렇게 부른다능..)


튜더 왕조는 오늘날 영국,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왕국의

실질적 토대를 형성한 공이 있는 가문입니다.


우리로 치면 14세기 말에 조선조가 시작하여

현대 한국의 골격을 형성한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튜더 왕조에서 이런 공의 8~9할은 대략

두 명의 군주에게 그 몫이 돌아갑니다.

헨리 8세와 그 딸인 엘리자베스 1세. 아시죠?





헨리 8세는 해군을 양성했습니다.

이 해군이 엘리자베스 시대에 북해를 주름잡으며

해상 강국인 잉글랜드의 기반을 형성했어요.


헨리 8세는 교황 및 대륙의 군주와 활발하게 교류하며

복잡한 외교전에 잉글랜드의 발언권을 높여갔어요.

(이 시기 잉글랜드는 유럽의 중류국 정도에 불과했어요.)


헨리 8세는 귀족을 탄압하고 젠트리 등 중간 계급을

지지하는 정책을 펼쳤고 민심과 인기를 얻게 되죠.


즉위 전반기의 헨리 8세는 교황과 구교를 옹호하는

보수 정치의 화신 같았고 신교도를 박해하는데도 앞장섰어요.

교황에게 가톨릭의 보호자라는 찬사도 받았어요.


첫 아내인 아라곤 왕국의 캐서린 왕비는

헨리 8세보다 겨우 여섯 살 연상인 미인이었다고 해요.

아라곤은 지금의 스페인. 당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어요.


원래 캐서린은 요절한 형의 왕자비로 정해진 사람이었으나

초야도 치르지 못하고 정혼자를 떠나보냈다고 하죠.

헨리 8세는 이런 캐서린을 연모했고 그 기록도 남아 있죠.


문제는 나이가 들며 아내가 가임기를 지났음에도

캐서린이 왕자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죠.

헨리 본인도 나이가 들어가고.


헨리 8세는 토머스 울지 추기경을 들들 볶아

캐서린과 이혼할 수 있는 교리를 찾아보라고 했죠.

왕자 출산처(?)를 교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에요.


본래 헨리 8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선진 문물에 밝은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독일과 스위스에 종교 개혁이 벌어지고 있음도 알았지만

정작 본인은 신교도들을 철저하게 압살하고 있었어요.


교리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고

그때까지 통제하던 종교 개혁 카드를 꺼내듭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존속하는 영국 국교회, 성공회가 출범합니다.


약간 선동적 조치로 가톨릭 수도원을 폐쇄하고

재산을 몰수한 후 그 재산을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매각하기도 합니다, 헐값에. 민심이 환호했죠.


하지만 잉글랜드의 국교회는 사실상 가톨릭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어요. 교회의 수장이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뀐 것,

그 한 가지의 차이 뿐이었습니다. 루터교 흉내만 살짝 내주고.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애초부터 없었어요.

그냥 종교 개혁이라는 사회 현상을 이용한 것 뿐입니다.

종교 개혁의 의미를 그만큼 적확하게 알았다는 뜻도 되죠.


그렇게 족쇄가 풀려 다섯 번 추가로 결혼하고 두 명의 왕비를

참수합니다. 그가 낳은 왕자 1명, 공주 2명이 뒤를 이어

튜더 왕조의 마지막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합니다.


왜 그렇게 이혼과 재혼과 왕자 출산에 집착했을까요.

왕좌의 정통성을 추구하여 왕권을 강화하는데 그 자신

집권의 궁극적 목표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정통성이 취약한 왕가의 내전으로 평생을 골머리 썩여야 했던

선왕 헨리 7세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 지켜봤기 때문이고요.


역사가 기록하는 헨리 8세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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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glish Longbowmen vs French Armored Knights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http://jangyune.tistory.com/entry/크레시-푸아티에-전투

http://jangyune.tistory.com/entry/롱다리-에드워드1세




장궁롱보우라고 합니다. 아주 큰 활이죠.

어느 나라나 있던 것인데 잉글랜드 장궁이 가장 유명해요.


활이 커져야 하는 이유는… 파괴력을 높이기 위해서죠.

활대가 커질수록 탄성력이 증가할 테니까요.


잉글랜드 장궁은 원래 웨일스 지방 산물입니다.

웨일스 왕국이 잉글랜드의 영토로 복속한 때가

13세기말 롱다리 에드워드 1세때였죠.


잉글랜드 군을 애먹인 이 무기에 에드워드가 주목합니다.

당시엔 파괴력이 너무 강해 교황이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죠.

전쟁에서 그런 게 있나요. 잉글랜드 군이 도입해 버립니다.


장궁에 대비되는 당시 보편적 활은 쇠뇌였어요.

석궁이라고 하죠. 영어로 크로스보우..


석궁이 자주 쓰인 이유는 간편성 때문입니다.

별다른 훈련을 받지 않고도 능숙하게 발사할 수 있었어요.

장궁은 이에 반해 능숙해지기 위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죠.


그러나 석궁의 치명적 단점은 연사 속도였습니다.

장궁의 연사 간격을 3~5초, 석궁은 15~20초 정도로

보통 추산한다고 합니다. 너다섯 배의 차이가 있었죠.


또한 장궁은 사격 자세에 따라 원거리 공격도 가능했어요.

고지대에서 발사하면 파괴력이 훨씬 증가하기도 했죠.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가 이 점을 십분 활용했습니다.


에드워드 1세는 국가적으로 롱보우를 적극 권장합니다.

일요일마다 궁술 대회를 열어 포상도 했다고 하네요.


왠만한 잉글랜드의 남성들이 장궁에 익숙해졌습니다.

웨일스의 평민들은 원래부터 능숙한 궁사들이었고요.

덕분에 이후 전쟁에 웨일스 장궁병 군단이 특별 편제되죠.


장궁이 상대해야 했던 대상은 무엇일까요. 석궁?

아뇨. 장궁이 깨부셔야 할 적은 기사의 갑옷이었습니다.

중세의 전쟁은 중장 기사의 기마전이었거든요.


백년 전쟁에서 잉글랜드가 프랑스에게 밀리는 지점이 바로

중장 기병의 숫자였어요. 서너 배 또는 그 이상 차이났다고 하죠.


프랑스가 전쟁 초반에 자신만만하게 무식한 전략을 편 원인도

기사의 숫자에서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봤기 때문이고요.

잉글랜드는 이를 상대하기 위해 장궁을 이용합니다.


중세 초기에는 사슬 갑옷이라고 체인 메일이 보편적이었는데

14세기에 와서 철판을 몸에 두르기 시작했어요. 플레이트 아머.

방호력은 철판 갑옷이 더 앞섭니다.


오늘날 장궁이 석궁보다 갑주에 대한 관통력이 우수해서

잉글랜드 군이 이겼다는 썰이 돌고 있는 듯도 한데

사실 관통력에는 크게 차이가 없었다는 연구가 있어요.


백년 전쟁 당시 양국 기사들은 철판 갑옷이 주종이었다는 썰도

돌고 있는데 사슬과 철판을 혼용했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겠죠.


하지만 원거리라면 모를까, 가까운 거리에서 제대로 자세 잡아

장궁을 날리면 철판을 꿰뚫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래 유튜브 링크 1분 50초부터 보시면 확인할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u0fu4k2cbB4







아 물론, 철판 갑옷이라면 인체에 맞춰 곡면 처리가 되어 있으니

왠만큼 비스듬한 각도에서는 방호가 가능했을 겁니다.


장궁병들이 주로 겨냥한 곳은 기사의 관절 접합 부분.

목과 어깨 사이나 사타구니 골반 부분의 취약점이라네요.

겨드랑이 사이 심장 가까운 곳도 많이 노렸다고 합니다.


또한 기병의 신체가 아니라 말을 겨냥한 전법도 빈번했어요.

말의 측면과 후면 방호가 약한 편이었다고 하죠.


크레시 전투에서 잉글랜드 좌익의 언덕에 위치한 장궁병을

제압하기 위해 프랑스 기사들이 산줄기를 뛰어 올라갔는데

우익 언덕의 장궁병들이 측면에서 연사하여 떨궈냈다고 합니다.


갑주가 불리했던 원인은 무엇보다도 둔중한 무게감 때문이죠.

보통 아머를 전면 장착하면 무게가 25킬로그램에 달했답니다.


이 무게로 진흙이 많은 곳으로 진격하는 동안 제대로

민첩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었고 이 틈새를 노려 장궁을

쏘거나 보병이 기습하니 속수무책이었다고 합니다.


넓게 산개하여 공격하면 되지 않겠는가 할 수 있으나

잉글랜드가 이미 좁은 경로를 선점하여 양익에서 활을

쏘아대고 있으므로 결국 좁은 중앙으로만 몰릴 수밖에요.


무거운 철갑을 짊어지고 무릎까지 오는 진창길을 걸어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적 보병의 냉병기를 온몸으로

맞아야 하는 상황… 한 번 상상해 보면 이해가 될 거에요.


더군다나 잉글랜드 군의 진짜 강점은 장궁이 아니었어요.

병종 간에 기동과 협력, 즉 팀웍과 소통이 원활했다는 거죠.


궁병이 기병을 엄호 사격하고 위험에 처한 궁병을 향해

보병이 보호하러 달려오며 기병은 적의 측면을 공략하는…

예나 지금이나 상하 협동과 지엄한 군률은 필승의 비결입니다.


오래 전에 히트한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편에 보면

잉글랜드 군의 강점을 석궁으로 그려놓고 이 편견이

오랫동안 정착해 버렸다고 하는데 바로 잡으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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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s of Crecy and Poitiers, 14th Century




http://jangyune.tistory.com/entry/백년전쟁-잉글랜드프랑스




백년 전쟁이 시작하자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압살합니다.


초창기 전투에서 뚜껑 열어보니

양국 군사력에 큰 차이가 있음이 드러났어요.


이를 여실히 입증한 두 사건이 바로

크레시 전투(1346년 8월 26일)와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입니다.






잉글랜드 대 프랑스, 숫자의 차이



크레시는 프랑스 북서부 칼레 바로 밑에 있고요.

칼레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가까운 도버 해협 근처랍니다.


잉글랜드의 지휘관은 에드워드 3세.

프랑스의 지휘관은 필리프 6세.


잉글랜드 군은 6천에서 2만 정도로 추정되고

프랑스 군은 2만에서 10만 근처까지 추정됩니다.


칼레 남쪽의 크레시 숲 인근 구릉 지대에

잉글랜드가 V자 형 진을 짜고 프랑스를 맞습니다.


양익의 끝 언덕 위엔 장궁병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하마 기사라고, 중무장한 기사들을 말에서 내려

중보병으로 진을 짜고 있었습니다.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양상은 비슷하게 전개했는데요.

프랑스 중부 푸아티에 남쪽에 잉글랜드가 먼저 진을 쳤어요.


이때 잉글랜드 지휘관은 흑태자 에드워드.

크레시에서 열여섯 나이에 보병 분대장으로 출전했었죠.

푸아티에에선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 됩니다.


프랑스 지휘관은 장 2세.

잉글랜드 군 약 7천, 프랑스 군 약 2만.







크레시와 푸아티에에서, 전황의 전개



크레시와 푸아티에 양쪽 전투 모두

잉글랜드를 프랑스가 추격하는 양상으로 시작했어요.


프랑스는 오랜 시간 추격하여 피로한 상태였지만

머릿수 차이를 믿고 그대로 진격하기로 했죠.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가 승리한 데에는

크게 네 가지 원인을 꼽을 수 있습니다.


첫번째, 잉글랜드 지휘관이 유리한 지대를 선점하여

지형의 이점을 끌어안고 적군을 압박할 수 있었습니다.


크레시에서 에드워드 3세는 V자형 언덕를 뒤로 한 구릉을,

푸아티에의 흑태자는 언덕과 개천을 뒤로 배수진을 선점했죠.


두번째, 지휘 체계가 일사불란했던 잉글랜드에 비해

프랑스의 명령 통제 상황은 개판 오분 전이었습니다.


심지어 프랑스는 추격전의 피로에도 불구하고

휴식을 취하지 않고 공격을 감행했는데 그 이유가

서로 먼저 싸우겠다고 나서대는 통에 그러했다고…ㅠ


잉글랜드 군은 숫자 차이 때문에 두려움이 컸으나

철저히 명령을 수행하는 훈련이 된 정신 상태였던 반면,

프랑스 군은 사기만 드높은 상태였다고 하네요.


세번째, 잉글랜드 전력을 효율적으로 만든 가장 큰 이점은

기병, 보병, 궁병 간 협력 전술이 잘 먹혀들어간 점이에요.


기병이 하마하여 중앙에 진을 치고 그 양익의 장궁병

적 기병을 제압하는 방식이었는데 궁병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보병이 나서서 이들을 보호하는 패턴이 아주 원활했어요.


(하마란 말에서 내렸다는 뜻입니다. 기병이 자진하여 전술적으로

보병이 되었다는 뜻. 잉글랜드는 이 전술을 자주 썼어요.)


푸아티에에선 배후 숲에 기병 분대를 숨겨두었다가

결정적 순간에 적 측면을 돌격하여 궤멸시키는 눈부신

기동성까지 보여주었어요. 흑태자의 전략이었죠.


장궁병에 맞서 프랑스엔 제노바 용병인 석궁병들이 있었고

초반에 방패 없이 싸우다가 나중에 방패 가지러 후퇴했는데..

기사들이 도망친다고 베어버리는ㅠ, 환상적 팀웍을 보여줬죠.


네번째, 무기 면에서 중무장 기사의 갑주잉글랜드 장궁

전혀 먹히지 않음을 완벽하게 입증했기 때문이었어요.


중세 전쟁사는 중장 기병의 시대였습니다.

전신을 무거운 갑주로 보호하고 말에 올라탄 기사인데요.

이들이 대형을 갖춰 속공 돌격하면 막을 수가 없었어요. 왠만해선.


기사가 전장에서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된 것은 중세 말기 들어

활과 총포 등 원거리 사격 무기가 기병의 진격을 제압하면서부터..


백년 전쟁은 활이 갑주를 앞선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였어요.

특히 웨일스에서 유래한 잉글랜드 장궁은 전쟁의 전기를 바꾼,

당시에는 실로 무시무시한 게임 체인저였어요.


장궁의 활약상은 깊이가 있는 내용이니

다음 편에서 설명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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