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규네 : MUSIC's POLITICS

블로그 이미지
recently working on music industry and history of rock music, with past history of writing on political science, international relations, world politics, political economy and development macroeconomics ...
잔규네

Article Category

분류 전체보기 (146)
political economics (76)
rock vocalists (23)
other stories (47)

Recent Post

Calenda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1. 2020.02.09
    브래드 델프 Brad Delp
  2. 2019.01.30
    피터 세테라 Peter Cetera 1
  3. 2019.01.05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




그의 아름다운 음악을 찬양하는 일은 쉽지만 불행으로 끝난

그의 인생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전달하긴 쉽지 않겠다. 허나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 보스턴 Boston과 함께 톰 숄츠

Tom Scholz를 언급하며 그를 건너뛰고 갈 수는 없으므로,

최대한 담백하게 논평해보겠다. 아메리칸 하드락 찬연히

빛났던 하이테너, 브래드 델프 Brad Delp 이야기이다...













*More Than a Feeling. 79년 뉴저지 라이브.



*Amanda.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Foreplay / Long Time. 79년 뉴저지 라이브.



*Rock & Roll Band.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A Man I'll Never Be. 79년 뉴저지 라이브.




보스턴의 시작과 끝은 탁월한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

엔지니어인 동시에 발명가 창업자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박사 출신 톰 숄츠로 귀결된다. 사실인즉슨 밴드 보스턴

자체를 숄츠의 원맨 밴드로 정의해도 거의 할 말 없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이 절대적이긴 하다. - 원래 숄즈라고

표기해야 옳긴 한데 관습적으로 숄츠가 더 널리 퍼져서...



MIT 석사 졸업 후 즉석 사진으로 유명한 폴라로이드 사

연구원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하던 47년생 도널드 토머

숄츠가 자기 집에 녹음 스튜디오를 차리고 밴드 프로젝트를

시작한 시점이 일의 시작이었다. 기타리스트 배리 구드로,

베이시스트 프랜 쉬이 세션으로 불려왔을 때 매사추세츠

토박이 51년생 브래들리 에드워드 델프 역시 보컬 제의를

함께 받아 스튜디오에 들어섰다. 1970년경.



기타, 베이스, 키보드, 송라이팅, 프로듀싱 등 나머지 모든

파트를 맡아 북치고 장구치던 숄츠가 저 멤버들을 규합해

데모 테이프를 제작했고 레이블마다 퇴짜를 맞으면서도

혼자 고군분투하다가 약 5년만에 에픽 레코드와 계약을

성사시켜 데뷔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이때 데모에 들어간

곡들이 곧 전설적인 첫 앨범의 트랙으로 자리잡았다.




 (Boston)



('More Than a Feeling' from Boston, 1976)

*Boston은 뉴욕 데뷔 무대가 무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었다.




76년, 미국 대중 음악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전설적

데뷔 앨범 Boston이 발매된다. 자그마치 1천 7백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았고 빌보드 200 차트

3위까지 기록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이듬해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신인상 후보 지명의 성과를 낸, 바로 그 앨범이다.



('Peace of Mind' from Boston, 1976)

- 핫100 차트 탑40에 오른 세번째 싱글.



*More Than a Feeling.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SSR6ZzjDZ94



1970년대 밴드 낭만의 시대를 상징하는 영원한 락 앤썸

More Than a Feeling이 수록된 앨범이기도 하다. Peace

of Mind, Foreplay / Long Time, Rock & Roll Band,

Smokin' 등 연이은 트랙들이 줄줄이 시그니처 트랙으로

자리잡아 버릴 곡이 없는 명반으로 기억되는 앨범이기도..



(Rolling Stone '04,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https://web.archive.org/web/20061109103736/http://www.rollingstone.com:80/news/coverstory/500songs/page/5

- 이건 04년 archive. '10년 업데이트에선 랭크에 실패했다.

- 10년에 업데이트된 새 랭킹.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500-greatest-songs-of-all-time-151127



(The List of 'The Songs That Shaped Rock and Roll'

selected by the Rock and Roll Hall of Fame, '04)

https://www.infoplease.com/arts-entertainment/music/500-songs-shaped-rock



데뷔 싱글 More Than a Feeling핫100 차트 탑5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롤링 스톤 매거진이 04년에 집계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랭킹에도 당당히 오른, 70년대

시대 정신의 산물인 시그니처 트랙. 락앤롤 명예의 전당

'락앤롤 장르를 형성한 명곡'을 선정할 때도 당당히 올랐다.



('Foreplay / Long Time' from Boston, 1976)

*2' 25"까지 Foreplay. 키보드 솔로는 Hammond M-3로 연주.

**이 곡의 기타 솔로는 Barry Goudreau의 솜씨이다. 꽤 하지?



프로그의 영향을 받은 키보드 솔로잉이 작렬한 Foreplay

통상적인 하드락 모드의 Long Time이 접속한 3번 트랙은

본작을 상징할 대표 트랙이며 여느 신인 아티스트와 비교를

불허하는 숄츠/보스턴 만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걸작일 터. 평단이 예스제플린이 결합했다고 칭송했고

핫100 차트 탑40에 올랐다. - 숄츠의 송라이팅은 야드버즈

킹크스에 클래식의 영향을 가미한 거라 한다.



('Rock & Roll Band' from Boston, 1976)

*이 트랙의 드러머는 Jim Masdea.

 - 이 곡을 제외한 전 트랙의 드러머는 Sib Hashian.

**Boston 공연은 대개 이 곡을 오프닝 트랙으로 해 시작한다.



완전한 무명의 신인 밴드로서 일찍이 존재한 적 없던 엄청난

성과를 거둔지라 Boston 앨범이 미국 음악계 전체에 끼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고 9백만 장 판매 인증을 받은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들어서야 겨우 그 여파가 진정되는 기미를

보일 정도였다. - 86년을 넘어서며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고

현재까지 판매고는 미국 1천 7백만 장, 세계 2천 5백만 장..!



('Smokin'' from Boston, 1976)

*이 곡의 Hammond 솔로잉도 꽤 유명하다. Tom Scholz.



블루스 기반의 메탈 원형질에 국한되던 아메리칸 하드락

제멋대로 70년대 격정적 흐름이, 정교한 주법과 기술적

지원에 힘입어 파워 팝 형태로 승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앨범이라고 보통 평가한다. 일부 평단에선 Boston 앨범으로

인해 이후 락 음악이 야성미를 잃은 채 프로듀서 체제의 잘

다듬어진 상품으로 전락하게 만든 주범이라고 까기도 한다.



(Robert Dimery '05, 1001 Albums You Must Hear Before You Die)

http://www.rocklistmusic.co.uk/steveparker/1001albums.htm



완벽주의 성향의 톰 숄츠란 거인, 그리고 그를 도운 브래드 델프

재능있는 뮤지션들이 결합하여 빚어낸 시너지가 음악사의 물줄기를

틀어버린 것이다. 05년에 출간된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

중 하나로도 선정되었다고. 어떤 경로든지, 한 번은 꼭 들어 보시라.



*Smokin'. 77년 캘리포니아 라이브.

https://www.youtube.com/watch?v=kumK8yor1ow




 (Don't Look Back)



('Don't Look Back' from eponymous album, 1978)

- 풍요와 낭만에 가득 찬 미국의 70년대가 보이는가...



본래 Boston 앨범을 준비할 때 소속 레이블인 에픽 레코드

자신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스튜디오에서 음악을 제작할

것을 조건으로 했지만 숄츠는 과감하게 이를 생까고(..) 자기 집에

만든 스튜디오에서만 작업했다. 두번째 앨범에서도 숄츠는 이런

프로세스를 고집하여 그만의 페이스에 따라 제작에 들어갔는데...



('A Man I'll Never Be' from Don't Look Back, 1978)

*Brad Delp, 피아노도 함께 연주하시고 Scholz는 무대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 Delp 관점에선 이때가 보컬의 최전성기인 것 같다.



78년에 발매한 2집 Don't Look Back숄츠가 최대한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천천히 제작해보려 레이블과 신경전을 거듭한

끝에 나온 수작 앨범이었으나 숄츠 입장에선 군데군데 여전히

불만인 채로 작업을 끝낸 셈이었다고.



*Don't Look Back.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AzNL-4sz95I



하지만 동명의 타이틀 트랙 Don't Look Back핫100 차트

탑5에 오르고 발라드 A Man I'll Never Be와 하드락 넘버

Feelin' Satisfied가 후속 싱글로 히트하며 전작의 성공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결과를 선사해주었다.



*A Man I'll Never Be. studio album version.

https://www.youtube.com/watch?v=PqsHWnDBS0Q



전반적으로는 Boston의 작법을 그대로 이어가며 파워 팝

사조를 더욱 굳히는 듯한 모양새의 앨범이었다. 상업적으로는

전작의 성과 절반 정도 판매고에 불과했지만 전작이 워낙

괴물같은 성공이었으며 최종적으로 7x플래티넘 인증까지

기록했고 빌보드 200 차트 탑까지 찍었으니 외려 실패가

아닌 성공임이 분명했다. 보스턴은 이제 공연을 선도하는

거물 투어 액트로 훌쩍 성장해 있었다.



('Feelin' Satisfied' from Don't Look Back, 1978)



본작의 진짜 숨은 의미는 따로 있었다. 제작 과정에 불만을

품게 된 숄츠에픽 레코드의 지리한 신경전이 극에 달해

급기야 향후 몇 년에 걸쳐 법정 소송전까지 가는 상황으로

악화일로를 걷는 시발점이 바로 DLB 앨범이란 점이다.



('Party' from Don't Look Back, 1978)

*라이브에서 팬덤이 매우 열광하는 히든 트랙이다.




 (Barry Goudreau)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DLB 앨범 전미 투어를 종료한 후 79년부터

숄츠가 다음 앨범 준비에 들어갔다. 근데 에픽 레코드 및 모회사인

CBS가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물론 숄츠와 레이블 간의 까다로운

신경전은 앞에 썼듯이 DLB 앨범 때부터 시작한 오래 된 문제였다.

제작에 시간 좀 걸리겠다 판단한 숄츠델프 등 멤버들을 모아놓고

'계약 생각하지 말고 하고 싶은 다른 돈벌이 해라' 하는 나름 대범한

조처를 취해준다.



배리 구드로시브 헤이쉬과 함께 브래드 델프 등, 오리지널

보스턴 라인업의 멤버들이 80년 구드로의 솔로 앨범 프로젝트로

모인다. 누가 봐도 보스턴과 판박이인 구성인지라 팬덤에선

사실상 보스턴 아류로 인식하지만 물론 숄츠 본인은 정통성을

승인하진 않는다.



('Dreams' from Barry Goudreau, 1980)

*Brad Delp (vocals), Barry Goudreau (guitars), Sib Hashian (drums).

당최 이게 보스턴이지 원..



그리하여 80년에 Barry Goudreau 앨범이 발매되고 소폭의

마이너한 히트로 매니아 팬덤을 형성한다. 누가 들어도 앨범의

사운드 퀄리티는 보스턴 사운드의 재판이었다. 델프 말고도

먼 훗날 보스턴에 가담하게 되는 프랜 코즈모가 보컬리스트로

참여했다. 델프가 보컬을 맡은 Dreams가 소폭 히트하였다.



그 사이 숄츠는 여러 모로 머리 아팠다. 레이블과의 분쟁이

급기야 소송으로 비화하고 숄츠 vs CBS의 저작권 및 제작권

법정 공방이 개시해 지리한 몇 년을 소모했다. 먹고 살 방편

때문인지 (취미 생활이기도 하고) 숄츠기타 이펙트 개발

전문 회사를 설립하여 자신의 발명품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소위 Rockman amplifier.. 인기 제품이다.



 (Rockman Amplifier)




 (Orion the Hunter)



구드로의 솔로 앨범을 그럭저럭 마무리하고 보스턴의 3집

준비가 아직 더딘 상황이라 델프는 동료들과 또 다른 사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구드로 중심으로 뭉친 프로젝트 그룹

명의의 84년 앨범 Orion the Hunter가 그것.



이번에도 큰 히트는 기록하지 못하고 소규모 매니아 팬덤을

형성하는데 그치지만 델프의 목소리가 여전히 현장과 무대를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미국 시장에서 So You Ran,

한국에서 Joanne이란 곡이 소폭 히트하였다.



('Joanne' from Orion the Hunter, 1984)




 (Third Stage)



소송은 숄츠의 승소로 매듭지어져 정식으로 레이블을 옮긴다.

이미 몇 년에 걸쳐 찬찬히 준비해오던 데모 버젼들을 정리하여

86년에 드디어 3집을 발매한다. Third Stage.. 보스턴

숄츠에게 사상 최초로 핫100 차트 탑을 선사한 시그니처 트랙

Amanda를 수록한 바로 그 앨범이다. 아만다~



('Amanda' from Third Stage, 1986)

*첫 싱글이고 대표 트랙인데공식 뮤직 비디오를 찍지 않는 등

당시 트렌드를 따르지 않고 히트한, 이례적 기록을 남겼다.

 - 고로 현재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영상물은 모두 팬덤이 제작한

비공식 뮤비들이다.



3집을 얻기 위해 소송이다 뭐다 해서 고생한 여파 때문인지 새

앨범이 종전보다는 사뭇 진지해지고 다소 침울해졌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숄츠 본인이 70년대에 방법론을

확립한 파워 팝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우주 탐사 로켓 이야기를

하나의 틀 안에서 연결한 컨셉트 앨범이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빌보드 200 차트 탑을 찍었고 최종적으로 4x플래티넘을 기록한다.



('We're Ready' from Third Stage, 1986)



파워 발라드 Amanda는 본래 80년대초 2집 투어 마치자 마자

작곡해둔 곡인데 뒤늦게 빛을 보게 되어 보스턴 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이 되었다. 또 핫100 차트 탑텐에 오른 We're Ready,

메인스트림 락 차트 상위에 랭크된 Cool the Engines, 탑40를

기록한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

앨범의 마지막 트랙 Hollyann, 팬덤이 특별한 애정을 보여준

I Think I Like It 등 줄지어 많은 곡이 사랑을 받았다.



('The Launch' from Third Stage, 1986)

*로켓 발사 및 3단 분리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연주곡.

 - 앞뒤의 We're Ready 및 Cool the Engines와 이어져

우주 개발이란 컨셉트 스토리를 완성하는 것..



전작들만큼은 아니어도 명실상부한 80년대의 히트 앨범임에는

틀림없다. 구드로는 공식적으로 제작 과정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나오고 쉬언헤이쉬언도 제작 초기 단계에만 참여한

걸로 되어 있어, 전작에서부터 이어지는 멤버는 델프가 유일하다.

거의 전곡의 드러머로 짐 매즈디어가 다시 연주해줬고, 다른

기타리스트로 새미 헤이 투어 연주자 게리 필이 참여했다.



('Cool the Engines' from Third Stage, 1986)



완벽주의 성향과 그밖의 잡다한 문제들이 얽혀, 스튜디오 앨범

사이 제작 주기 간극이 엄청나게 벌어지기 시작한 신호탄의

작품이기도. 전작의 8년이 지나 발매되었는데 차기작도 그

정도 시간이 걸리게 되고, 이런 점은 그냥 숄츠/보스턴

전매특허 전통으로 자리잡게 된다.



('I Think I Like It' from Third Stage,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3tD2Id2T4jU

*Gary Pihl on guitars.



('To Be a Man' from Third Stage,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CLkuXEeQNrE

*88년 뉴욕 라이브.




 (Return to Zero)



Third Stage Tour를 끝내고 4집 준비에 착수하던 숄츠. 델프

갑자기 나타나 다른 프로젝트가 잡혀서 잠시 탈퇴를 선언한다.

선선히 그러라 하고 - 그래봤자 어디 가는지 뻔히 알겠고 왠

느낌상 다시 돌아올 것 같으니까 - 그를 대신할 보컬리스트로

예전에 배리 구드로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찌르는 샤우팅에 능한

프랜 코즈모를 영입하시는 숄츠.



델프는 좋게 보자면 담백하고 우직한 분이셨고 쉽게 말해 마당발은

아니셨다. 아는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 뻔할 뻔 자로, 지금까지 쓴

내용으로 짐작하셨겠지만 델프를 꼬셔낼 만한 프로젝트를 들고

올 사람은 구드로 및 옛 보스턴 멤버들 정도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 아직 뜨지 못한 - 구드로가 노래 잘 하는 델프를 구슬른 것.



RTZ란 프로젝트 그룹으로 다시 돌아와 91년에 Return to Zero,

곧 그룹명의 앨범을 내는 그들. 구드로는 꽤 재능있는 연주자이긴

하지만 숄츠만큼의 독창성을 가진 아티스트는 아니었는지, 이번

작품도 소소한 마이너 히트에 그쳤다. 델프 보컬의 호소력이 담뿍

드러난 파워 발라드 Until Your Love Comes Back Around

정도는 한때 히트했다.



('Until Your Love Comes Back Around' from Return to Zero, 1991)

*Brad Delp가 관여한 곡의 뮤비 중에 완성도가 가장 높을 듯.




 (Walk On)



물론 숄츠델프 사이에 묘한 마찰과 긴장이 올라와서 델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도 있긴 하다. (녹음 스튜디오에 가끔

놀러와서 일부 곡에 자기 흔적도 남긴 거 봐선 낭설 같지만...)

어쨌든 코즈모를 데리고 제작을 시작해 94년에 4집 Walk On

발매를 밀어붙인다.



('I Need Your Love' from Walk On, 1994)



보컬이 바뀌어서인지 얼터너티브 시대에 뒤떨어져서인지, 앨범

전체 성과는 그저 그랬다. 플래티넘을 기록하는데 그쳤고 탑40

이상 가는 히트 싱글을 만들지 못했다. 그나마 I Need Your

Love Livin' for You 정도 트랙이 주목을 받았을 뿐이었다.

결국 이듬해 투어 시작 전에 델프가 복귀한다.



('Livin' for You' from Walk On, 1994)

https://www.youtube.com/watch?v=WaU0n3MLtlw




 (Greatest Hits)



다음 앨범 들어가기 전 97년에 첫 컴필레이션 앨범 Boston:

Greatest Hits를 발매하는데 라이브를 주름잡아 팬덤의 트랙

충성도가 높으니 컴필레이션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무려 더블 플래티넘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The Star-Spangled Banner / 4th of July Reprise'

from Greatest Hits, 1997)

https://www.youtube.com/watch?v=u8QkNJ8B-JU



미국을 대표하는 밴드이니만큼 약간 국뽕 캐릭터도 있어서

라이브에서 국가를 하드락 버젼으로 자주 연주하던 차, 본

앨범에서 그 인스트루멘탈을 정식 트랙으로 수록하여 꽤

눈길을 끌기도 했다.




 (Corporate America)



02년엔 다시 돌아온 델프와 다른 후배 보컬리스트 등을 규합해

5집 Corporate America로 돌아온 숄츠/보스턴. 상업적인

성과는 이전에 비해선 극히 미미해 별다른 히트곡을 양산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닥칠 불행한 미래로 인해 델프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규 앨범이란 의의는 갖는다.




 (Delp)



 (Scholz)



*사망 당시 현장 정황에 대한 보도.

https://www.guitarworld.com/news/brad-delp-details-emerge-about-his-tragic-suicide



*숄츠와 언론의 소송전, 그리고 불편한 진상에 관한 보도.

https://ultimateclassicrock.com/brad-delp-suicide-lawsuit/




07년 3월 9일 뉴햄프셔 주의 작은 마을에서 비보가 날아든다.

브래드 델프가 사망했다는 것. 그것도 일산화탄소 중독에 의한

사인에다 외부 침입 흔적이 없다고 한다. 즉 바베큐용 숯불을

피워놓고 자살했다는 말...ㅠㅠ



이미 자살 규명에 대해선 사법 당국의 수사가 완료하여 다른

가능성을 전혀 따질 수 없으니 문제는 무엇이 그를 자살로

몰았는가 하는 쪽으로 세간의 이목이 전환된다. 유족과 일부

언론이 지저분하게 얽혀 억측 기사가 난무하니 각종 폭로전

및 명예훼손 소송으로 사건이 발전하기까지 한다.



유족 일부는 한때 제기된 델프숄츠 사이의 반목이 원인이라

지목했고 이를 보도한 언론과 유족을 상대로 숄츠는 정식으로

명예훼손 제소를 건다. 물론 불법행위 혐의가 드러나진 않는 걸

대법원이 최종 각하하여 마무리는 되었으나... 그럼 도대체 자살

원인이 뭐냐고 대중이 반문하던 차에...



놀라운 곳에서 은밀한 내막이 드러난다. 약혼녀의 언니가

객식구 성격으로 델프와 한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망 몇 일

전에 언니 방에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었음을 발견했고 언니

남자친구가 델프를 추궁하니 잘못을 시인했다는 것. 아이고.



아마도 몇 일 후에 약혼녀를 직접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지만 그 잠깐 동안 정신적으로 무너져버려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내린 것으로... 현재 입장에서 드러난 최종 결론은

이러하며 이 이상 더 파봤자 망자의 명예만 더 깎일 뿐이니

대충 여기서 접자는 것이 미국의 일반적인 여론 추세이다.



몰래 카메라 설치 이유에 대해선 약혼녀가 바람 피우는 정황을

잡기 위해서란 설이 있는가 하면 흔히 할 수 있는 지저분한

상상 그대로 변태 성욕 때문이란 설까지 난무하지만... 바로

그 진실을 밝힐 주인공인 약혼녀와 만남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델프가 사망했으니 사실 확인할 길은 요원할 따름이다.



어찌 되었든 40년 가까이 밴드 보스턴의 목소리로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미국적 하드락의 보이스를 대변해온 브래드 델프...!

그의 독창적 하이테너 목소리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점만이 중요할 터... R.I.P..



*I Think I Like It.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We're Ready.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Cool the Engines.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Don't Look Back. 79년 뉴저지 라이브.



*Peace of Mind. 79년 뉴저지 라이브.




*Giants Stadium Concert NJ. June 17,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7SSrZjSoRj4

 - full version (video)



*The Centrum Concert MA. August 13,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E9bhmgiVjNM

 - full version (audio)



*Hamilton Ontario Concert (Canada). 1988

https://www.youtube.com/watch?v=zcbNNuEzH2M

 - full version (bootleg video)









톰 숄츠 중심의 밴드 보스턴아메리칸 하드락의 트렌드를

바꾸었고 기념비적인 데뷔 앨범 성적을 거두기는 했다만 절대

과대평가는 금물이다. 보스턴의 팬덤 베이스는 미국과 캐나다

정도가 고작이고 북미 경계를 벗어나서 세계구급 히트를 누린

대형 액트라 보기는 어렵다. 미국과 캐나다를 합한 역대 판매

성적이 3천만 장을 살짝 웃도는 정도..



그런 와중에 실질적으로 보스턴의 사운드 중 절반을 차지할

만큼 상징적인 보이스 컬러의 브래드 델프가 가진 위상은 리더

숄츠의 절대적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결코 간과할 수 없음이다.

디지털 드림 도어 랭킹에서도 델프의 가치를 꽤 높게 쳐주는

편이고 상대적으로 기타리스트 숄츠보다 더 높은 편이기도.



(Digital Dream Door's 100 Greatest Rock Vocal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html



팔세토나 카운터테너라고 오해를 많이 사는 델프의 보컬 스타일에

관해선, 하이 테너와 알토 테너의 중간 위치에 하드락에 흔치 않게

가성이 많이 섞인 깨끗한 소리라고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목소리들은 30대 중반을 넘어서며 체력 저하로 급격하게

파워가 딸리게 마련인지라, 델프 보컬의 진면목을 확인하려면

80년대말 이전 라이브에 집중하는 것이 사실 좋다.



보통 흉성과 반가성의 거친 소리를 선호하는 미국 락씬에서도

델프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한 매력이 있다는 데에 대부분의

음악 팬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아왔고 보스턴 파워 팝이 지닌

대중적 음률 및 70년대 정신과 극강의 조화를 이루어 일정한

연령대 이상 세대에게 상당히 향수를 자극하는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강하게 굳어온 듯하다.



사운드 메이킹에 일가견이 있는 톰 숄츠의 음악 실력에 관해선

한때 상당한 과대평가가 섞여 갖가지 루머를 양산한 적도 있긴

했다만, 전반적으로는 이펙트 뽑아내는 기술력에 비해 주법의

특이성이나 특히 리프를 빚어내는 창조성에 있어선 여느 연주자에

비해 다소 밀린다고 보는 편이 정설에 가까운 것 같다. 보스턴

음악을 떠올릴 때 특별히 귀에 남는 리프는 딱히 없지 않나...

(아, More Than a Feeling은 예외..)



갑자기 델프를 잃은 숄츠는 이후에 예전에도 그랬듯이

프랜 코즈모스트라이퍼 출신 마이클 스위트 등 다른

보컬리스트를 번갈아 기용하며 올드팬과 만나는 공연

스케줄을 이어오고 있다 한다. 델프 이외에 딱히 한 사람

지정된 보컬에 꽂히진 않은 듯하다.



*1980년대 브래드 델프와의 TV 인터뷰.

https://www.youtube.com/watch?v=FimeJJQVglQ



*Amanda. Michael Sweet & Tommy DeCarlo on vocals.

https://www.youtube.com/watch?v=CFRxqGOBGYM

 - Brad Delp 사후엔 이 두 분 중심으로 그럭저럭 하는 듯.



*Tommy DeCarlo story on TV.

https://www.youtube.com/watch?v=9rbX0xITFxA

 - DeCarlo는 보스턴의 아넬 피네다 같은 분. 아마추어였다가

인터넷으로 발탁되셨다 한다. 전엔 마트 매니저였다고..



('Honestly' by Stryper,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w6IvUOZBZME

*Michael Sweet on vocals.

 - 마이클 스위트의 전직은 헤어 메탈 아티스트였다.






본 블로거가 꼽는 숄츠/보스턴 하의 델프 최고의 노래는 Third

Stage 앨범 중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이다. DLB 앨범의 A Man I'll Never Be에서 이어진

파워 팝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법이면서도 훨씬 세련되고 처연한

정서를 깊게 느낄 수 있어 항상 좋아하는 곡이다.



스튜디오 앨범 버젼과 함께 87년 Third Stage Tour

매사추세츠 주 워스터의 센트룸 아레나 공연 오디오 실황을

링크로 걸며 본 포스팅을 마치고자 한다. 브래드 델프

그리워하는 올드팬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 Still in Love'

from Third Stage, 1986)

*studio album version.



*Can'tcha Say (You Believe in Me).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 원키 E flat에서 하나 낮춘 D major.

- 위아래 두 트랙을 연이어 들으면 앨범 버젼과 같다.



*Still in Love. 87년 매사추세츠 라이브.

- soundboard archive: 공연장에서 의무적으로 녹음하는 기록 보관용 음원.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rock vocalis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웨이트 John Waite  (0) 2021.08.10
이언 길런 Ian Gillan  (0) 2020.03.10
데니스 드영 Dennis DeYoung  (0) 2020.01.10
보노 Bono  (0) 2019.12.07
게디 리 Geddy Lee  (0) 2019.11.09
and




요즘 음악을 듣는 세대에겐 생경하게 들릴 만한

올드한 뮤지션인지라 이번 포스팅의 보컬리스트는

조금 더 진지하게 접근해 보려 한다. 잘 모르는 대상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줘야 할 터이니.



재즈는 락과 또 다른 세계이고 어쩌면 훨씬 더 넓고

깊을지 모른다. 이질적인 듯한 두 세계가 음악적으로

크로스오버를 이룩한 적이, 길고 긴 역사에서 왜 없었겠나.

두 세계가 만나 일으킨 화학 반응으로 오늘날 퓨전이라고

부르는 서브장르가 생겨난 시기는 대략 70년대 쯤이다.



재즈락 또는 재즈 퓨전으로 불릴 만한 장르에서 오랫동안

대명사처럼 음악을 이어온 밴드, 시카고에서 젊은 시절의

커리어를 일구었고 이후 솔로 아티스트로서 80~90년대에

화려한 전적을 거둔 분, 피터 세테라 Peter Cetera

이야기를 해보련다.









1944년 시카고 남부 사우스 사이드 지역에서 폴란드 및

헝가리 혈통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땐 엄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아코디언을 연주하다가 나중에 베이스로 바꿨다고.

블루스재즈, 소울이 활발하게 발전한 시카고의 분위기를

좇아 학창 시절부터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일종의 재즈 콤보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영역을 넓혀 나갔다.



67년의 어느 날 시내에 빅씽이란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혼 섹션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이들에게 매료되어 때마침

공석이던 베이시스트 포지션으로 밴드에 영입된다. 이 빅씽

바로 우리가 아는 밴드 시카고 Chicago의 전신으로서 기타

테리 카쓰, 키보드로버트 램, 트롬본제임스 팬코우,

트럼펫리 러크네인, 색소폰월터 패러자이더, 드럼

대니 세라핀이 이미 몇 달 전 6인조로 의기투합하여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벌여오던 것. 세테라 영입 전엔 이 오르간 페달로

베이스 파트를 메꾸었는데 사운드가 부족한지라 현지에서

활동 중인 적당한 베이시스트를 찾고 있었다고.



 (Chicago)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클럽을 돌며 연주하다가 이들은 LA로 날아가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성공적인 데뷔 앨범이자 데뷔작으로 흔치 않은

더블 앨범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를 발매한다.

69년 4월의 일. 바야흐로 재즈 퓨전의 큰 물결을 주도할

운명을 타고 난 트럼페터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 씬에서

명반 Bitches Brew를 내기 1년 전의 일이었다.



('Bitches Brew' by Miles Davis, 1970)

https://www.youtube.com/watch?v=MWCjeZdJj7g



물론 오늘날 비슷한 장르로 묶이면서도 두 앨범의 스타일과

완성도는 사뭇 달랐다. 지금 우리가 아는 퓨전 장르의 예술적

초석을 다진 건 천재 데이비스의 작업이었고, 시카고가 하는

음악은 60년대 락앤롤의 문법에 재즈가 본격적인 예술 음악이

되어버린 40년대 비밥 전에 백인 중심으로 성행한, 시카고

빅밴드 재즈의 상업적 음률을 교묘하게 섞은 상품같은 거였다.



(초창기 앨범 슬리브의 사진. 왼쪽서 세번째 상단이 세테라.)




어찌 보면 대도시 빈민 백인이 접근하기에 가장 용이한 형태를

간직한 춤추고 따라부르기 쉬우며 정치적으로 결코 진지하지

않은 재즈의 흉내에 불과할지도 몰라, 정통 재즈 팬들은 사실

이들의 작업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안 써도 될지 모를

이 말을 굳이 하는 이유는 과대도 과소도 아닌 딱 그만큼만

객관적으로 시카고의 음악을 평가하자는 취지이다.



재즈를 표방하면서도 시카고는 철저하게 백인적 오락거리를

추구한 음악가들이고 재즈의 토대가 되는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정치적 여론 형성에 제대로 적극적 의견을 낸 적은 없다. 흑인

특유의 끈끈한 정서가 21세기 대중 음악의 첨단 필수 요소가 된

작금에 와서 이들의 세계는 이미 철 지난 음악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



그러니 재즈의 정통성을 즐기는 팬이라면 당장 이 포스팅을 닫

마일스 데이비스웨더 리포트리턴 투 포에버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로 달려가시길 추천한다. 거듭 명확히 하지만 백인이

보여줄 수 있는 역대 가장 진보적인 재즈 액트는 아마도

프랭크 자파나 발명의 어머니들일 것이다.



('Right Off' by Miles Davis,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sYnzsShbbFM


('Birdland' by Weather Report,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Ae0nwSv6cTU


('Spain' by Return to Forever,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a_OEJ0wqt2g


('Birds of Fire' by Mahavishnu orchestra,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gv_bkS5VVaA


('Waka/Jawaka' by Frank Zappa,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BRBR_SPPXKQ



아 물론, 이들에게도 진지한 작품성을 보여준 수작이 있다.

('A Hit by Varese' by Chicago,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GszAAmVEKa4




(1970년대의 라이브 모습)




동시대에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블루스 기반

밴드에 비해 음악을 구성하는 방법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가장 뚜렷한 점은 음률을 이어가는 선법, 즉 모드스케일

달랐고 여기에 기반한 프레이징의 어법이 달랐다. 특정한

악구를 리프로 발전시켜 이를 반복적으로 전개하고 여기에

가사를 싣는, 블루스락 밴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법이

아니란 말씀.



거기에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 각 파트의 비중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동등하게 두는 일반적 락의 밴드 운영

방식과 달리, 이들은 파트를 크게 리듬 섹션(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과 혼 섹션(트럼펫, 색소폰 등 모든 브라스

윈드 악기)의 둘로 나누어 접근하는 기존 재즈 앙상블 식의

어레인지 철학을 갖고 있다는 점 또한 동시대 다른 밴드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40년대 재즈의 주류였던 17인조 빅밴드 편성 형태)



(1980년대의 프로필 포토. 좌측 중간에 세테라.)




아직 시카고로 개명하지 않고 CTA로 부르던 초창기 음악

중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Questions 67 and 68을 들어

볼 때 그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인트로 파트에 혼 섹션

주도하는 프레이즈는 후크에서 반복하지 않고 가사를 싣는

파트와 전혀 상관없이 전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블루스에 기반한 락이 태동할 때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이고

반복적인 리프 패턴을 후크에서 강조하여 장르적 특성을

선명하게 구체화했던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갈지도.

특히 이 곡은 향후 퓨전의 거대 시장으로 발전하는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 아예 일본어 버젼을 따로 발매하기도 했다고..



('Questions 67 and 68' from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1969)

(72년경 일본 공연 실황. 보컬은 세테라와 카쓰.)


(위 트랙의 일본어 버젼 싱글)




초창기에는 첫 앨범 제목을 그대로 밴드 이름으로 쓰다가

너무 길고 시카고 당국으로부터 상호권 소송 부담도 있어

간단하게 시카고로 개칭한다. 이들은 앨범 제목도 특징이

있는데 밴드 이름에다가 로마자 숫자로 표기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것. 단, 두번째 앨범은 개칭 후 첫 앨범이라

심플하게 Chicago라고 칭했고 팬덤에선 Chicago II

통칭하기도 한다능... 이들의 매번 앨범 커버도 밴드 이름

로고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패턴인지라 다 모아 놓으면

훌륭한 컬렉션이 되기도 한다.



원래 명칭을 시카고 전철 및 버스 등 공공 교통을 총괄하는

공기업, 시카고 교통 공단에서 따온 것은 물론이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창립 멤버들은 대개 시카고 토박이들이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정서와는 다른 시카고의 애향적

토착인 문화가 꽤 유명한 편이다. 아마도 창립 멤버들의

유난한 시카고 사랑도 이런 정서에 기반했을 터이다.



또한 시카고는 이스트 코스트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서 남부에서 이주한 30~40년대 재즈 뮤지션들이

뉴욕 가려다가 시카고에 정착했다는 가설이 있을 정도로

딕시랜드 재즈어번 블루스 소울 및 가스펠 서브장르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창립 멤버들 모두 유년 시절부터 이런

고향 풍토에서 자연스럽게 클래시컬한 재즈를 듣고 자라며

음악적 지향성을 다잡았을 것이라고 능히 추측할 만하다.



(Chicago) (Chicago II)




이들은 데뷔 앨범부터 - 적어도 북미 시장 내에선 - 성공을

구가한, 실력과 운을 겸비한 뮤지션들이었다. (하긴 본래

시카고의 팬덤이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일본 정도 빼면

거의 시체이긴 하다.) 대곡이 많은 재즈의 특성상 초기 앨범

석 장이 전부 더블이었고 전술한 음악적 개성과 특이성을

기반으로 거의 매년 한 장 꼴로 앨범을 발매했으며 싱글에서

거둔 성적도 탑텐을 11개나 기록하는 등, 70년대 중반까지

상업적으로나 평단으로부터나 꽤 준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70년 Chicago, 71년 Chicago III, 71년 Chicago at

Carnegie Hall, 72년 Chicago V, 73년 Chicago VI,

74년 Chicago VII, 75년 Chicago VIII을 차례로 발표해

락과 퓨전이 발흥한 시대를 배경으로 골드 내지 플래티넘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4집은 스튜디오 판이 아닌 라이브

앨범인데 당시 대중 음악가로선 드물게 카네기홀 무대에

섰을 때 그 실황 녹음을 담았다고.



(Chicago V)



(Chicago VI)




Beginnings, Make Me Smile,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Colour My World,

Saturday in the Park, Feelin' Stronger Every Day,

Just You 'n' Me, (I've Been) Searchin' So Long,

Call on Me, Old Days 등은 8집까지 시카고를 대표하는

트랙들로서 70년대 중반 싱글 차트에서 성공을 가져온.

(이 곡들 대부분 빌보드 핫100에서 탑텐에 들었다.)



물론 젊디 젊은 성대를 자랑하던 세테라를 빛나게 해줄 이

시기 최고의 히트 트랙이 25 or 6 to 4은 자명하겠으나..

Beginnings()와 Make Me Smile(카쓰)을 들어보면

알테지만 1970년대 내내 세테라만이 밴드의 리드보컬을

전담한 체제는 아니었다. , 카쓰, 세테라... 노래를 할

만한 처지의 = 입으로 뭔가 불지 않거나 북을 두드리

않는, 리듬 섹션의 세 멤버가, 번갈아 가며 노래라는 - 재즈

밴드 입장에서 아주 귀찮아 마지 않은 - 업무를 뜨거운 감자

돌리듯이 나눠서 맡은 거다. 개념 자체가 다른 셈이다.



('25 or 6 to 4' from Chicago, 1970)

(지미 헨드릭스가 극찬했다는 테리 카쓰 플레이의 정수가 이 곡에..)


('Beginnings' from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1969)



('Make Me Smile' from Chicago, 1970)



*'25 or 6 to 4' live version




그리고 신기하게도 세 사람의 보컬은 각기 서로 다른 매력을

갖고 있어 이 밴드의 음악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맛이

있다. 그것도 세 사람이 서로 균등한 비율로... 아니, 사실은

7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의 음악에서 세테라의 비중이 그닥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은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 시기 작곡과

밴드 리딩의 중심은 리듬 섹션로버트 램, 그리고 혼 섹션

제임스 팬코우 두 사람에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앞에서 소개한 열두 곡 중 한둘 빼고는 모두 이 둘이서

사이좋게 절반씩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면 감이 오실 듯.



Does Anybody Really~의 4분이 넘는 긴 버젼을 들으면

의 재즈 기반 키보드 실력과 노래를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이 박력있는 피아노 리프를 보여준 Saturday in

the Park 역시 세테라와 함께 불러 초창기 매력을 엿볼 수

있는 70년대 초반 무대에서 Hammond B-3

Wurlitzer 또는 Hohner 장비를 올려놓는 심플한 세팅을

보여주었고 Steinway Concert Grand는 조금 나중에

도입한다. Fender Rhodes가 나온 후엔 이를 애용했고

간간이 MoogARPMellotron 장비를 썼으나 과도한

아날로그 합성음에 의존하는 플레이어는 결코 아니었다.


http://www.chicagohome.de/cgi-bin/sbb/sbb.cgi?&a=print&forum=13&beitrag=2



(70년 탱글우드 무대의 램)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from CTA, 1969)



('Saturday in the Park' from Chicago V, 1972)




Just You 'n' Me나 Searchin' So Long트롬본을 불며

혼 섹션의 구성을 책임진 제임스 팬코우가 작곡한 대표적

트랙들인데 시카고 스타일 재즈 - 실제로 이런 서브장르가

존재함 - 에서 악절에 대한 기본적 어프로치가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알아볼 만한 뚜렷한 개성을 자랑한다. 팬코우

초기 시카고의 또 다른 창의적 축임을 보여주는 곡들인 셈.



팬코우의 초기 창작 성향을 대표하는 송사이클(스위트;

모음곡)로서 7개 소곡으로 구성한 13분 길이의 Ballet for

a Girl in Buchannon2집에서 발표되었는데 Colour

My World는 이 곡의 제5번 파트이자 아름다운 다섯 코드로

구성된 발라드이다. 테리 카쓰의 진중한 보컬과 월터

패러자이더의 플루트 솔로가 매우 유명하다.



('Ballet for a Girl in Buchannon' by Chicago)

https://www.youtube.com/watch?v=XV2MYMaBxMM

... at Carnegie Hall, 1971



Feelin' Stronger~는 특이하게 팬코우세테라가 공동으로

작곡한 초기 히트곡. 세테라의 젊은 시절 연인 관계의 경험을

팬코우가 가볍게 읊조리던 잼 음률에 실었다고. 밑에 영상을

보면 이 곡의 녹음 스케치를 관찰할 수 있다. 아직 본격적으로

창작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않던 세테라의 시동이 슬슬

걸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터이다. 또한 왠만한 튠은

세테라의 보이스에 실어 표현하면 어느 정도 믿고 갈 수

있음을 슬슬 멤버들이 깨닫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Colour My World' from Chicago, 1970)



('Just You 'n' Me' from Chicago VI, 1973)



('(I've Been) Searchin' So Long' from Chicago VII, 1974)



('Feelin' Stronger Every Day' from Chicago VI, 1973)




이렇게 75년까지 시카고는 7장의 스튜디오 앨범, 1장의

라이브 앨범을 내며 성공한 메인스트림 밴드로 자리잡게

되었고 열 곡이 넘는 싱글 히트곡도 보유한다. 이 주요한

히트 트랙들은 1975년 11월에 발표한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에 거의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시간과 비용을 줄이면서도 초기 시카고 명곡들을

즐기려는 팬들이 이 한 장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앨범 차트에서도 1위 찍으셨고..



Chicago IX 수록 트랙:

25 or 6 to 4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Colour My World

Just You 'n' Me

Saturday in the Park

Feelin' Stronger Every Day

Make Me Smile

Wishing You Were Here

Call on Me

(I've Been) Searchin' So Long

Beginnings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



('Wishing You Were Here' from Chicago VII, 1974)

(이 곡은 초기에 흔치 않은 세테라 단독 작곡 트랙..)




76년 6월에 발매한 Chicago X은 디스코그래피 전체에서

큰 전기를 마련한 앨범이다. 세테라가 단독 작곡한 어쿠스틱

발라드 If You Leave Me Now가 메가히트를 기록하면서

영미 양국에서 최초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고 77년 19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팝보컬 퍼포먼스 부문 상을 결성

최초로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유일한 그래미 수상

기록이기도 하다.)



앨범 막판에 가서야 겨우 수록한 곡의 대성공으로 싱글은 발매

직후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였고 이후 전체적인 창작 성향이

발라드로 기울게 되는 엄청난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앨범은

차트 3위까지 올라 골드플래티넘을 기록하였고 시카고

그때까지 발매한 앨범 중 가장 먼저 플래티넘을 넘어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앨범에 대한 평가도 높아서 그래미 본상인

올해의 앨범 후보 지명되는 영예도 얻는다. 팬의 투표로

결정되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선 최우수 팝락 밴드

부문을 수상하는 성공을 누리게 된다.



물론 이 하나의 명곡은 멀리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이들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지되는 계기를 만든다. 지금도

흘러간 팝송으로 많이들 들어보셨을 것..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수는 결국 히트곡으로 말하는 법.



(Chicago X)



('If You Leave Me Now' from Chicago X, 1976)



(독일 방송 출연. 보컬은 라이브, 반주는 MR..)




세테라파워 발라드의 성공 공식은 다음 앨범에서도

계속 이어져 77년의 Chicago XI은 이들이 70년대에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 탑텐(4위)을 기록한 Baby, What

a Big Surprise를 배출한다.



전부터 비치 보이스의 음악적 영향을 줄기차게 받은

세테라가 이 곡에선 아예 칼 윌슨을 모셔와 백킹 보컬

기용하기도. 패러자이더플루트를, 러크네인이 피치가

높은 피콜로 트럼펫을 연주한 점이 특색이 있다.



Chicago XI세테라가 중심이 되는 발라드에의 의존을

떨쳐내려 몸부림치는 듯한 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

그 노력이 과연 성공적이었는가 하는 점은 미지수일 듯.

또한 후술하게 될 비극적 사건 때문에 테리 카쓰가 참여한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되고 만다.



(Chicago XI)



('Baby What a Big Surprise' from Chicago XI, 1977)




78년은 이들에게 시련으로 기억될 터. 지난 다섯 장의 정규

앨범을 작업한 프로듀서 제임스 구에르치오가 밴드의 재정적

성공을 독차지한다고 판단하여 결별하였다. 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1월 말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기타와 보컬을 겸하던

밴드의 기둥 테리 카쓰총기 오발 사고로 숨지고 만 것.

두 사건은 70년대 말이 되어 격변하고 있는 음악 시장의

변화와 더불어 멤버들 모두를 미치도록 몰아세웠다.



78년에 발표한 신보 Hot Streets카쓰가 주도한 재즈락

기조에서 많이 후퇴하여 디스코에 경도된 앨범이었다.

숫자로 매기던 타이틀을 처음으로 배격한 점이나 최초로

멤버들 사진을 커버에 실은 점부터가 사람들에게 뭔지 모를

이질감을 준 것 같다. 지금까지 앨범 중 처음으로 차트에서

탑텐을 기록하지 못해 실질적으로 실패작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실패는 79년의 Chicago 13에서 더 심해져 카쓰 대신

오디션으로 영입한 기타리스트 도니 데커스는 본작을 끝으로

탈퇴해 버린다. 80년 Chicago XIV탑40 진입마저 실패할

정도였고 레코드사에선 Chicago XV을 신보가 아닌 대표곡

모음집으로 강행하는 수모까지 안긴다.



(Hot Streets)



(Chicago 13)



(Chicago XIV)



(Greatest Hits, Volume II) (Chicago XV)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몇 해에 걸쳐 별 볼 일 없는

성과에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고 예전의 빅밴드 튠이 결코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세상은 이미

디스코도 한물 가고 뉴웨이브포스트 펑크가 고전적인

정서를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프로듀서를 영입한다.

바로 데이빗 포스터, 80년대를 씹어먹은 네임드 뮤지션.



포스터는 고전적 재즈보다 팝 발라드의 문법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작곡가 겸 프로듀서. 브라스 뒤로 밀어내고

신디사이저를 앞세웠으며 심지어 기존 멤버가 아닌 세션

고용하여 - 스티브 루카서라든가 데이빗 페이치라든가 -

80년대 첨단의 파워 발라드를 직조해냈다. 이 작업에

세테라가 가진 창작 아이디어가 핵심적 에너지를 기여하게

되고 포스터세테라, 바야흐로 두 위대한 거장이 최고의

시너지로 한 시대의 역사를 새로 쓰는 순간이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음악사 최고의 명곡이 1982년 5월에

발매되었고 이를 수록한 새 앨범 Chicago 16이 다음 달에

선을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밴드 시카고 하면 떠올리는

대표곡이면서 80년대 어덜트 컨템포러리의 대명사 격인

싱글 차트 탑의 히트 트랙, Hard to Say I'm Sorry였다.



그 해 9월 11일에 Hard to Say I'm Sorry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선다. 16과 이 곡의 성공으로 이들은 그래미

 퍼포먼스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고 발매된 해에 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하였다. 빌보드 앨범 차트 200에서는

9위까지 오르는 성공이었다.



 (Chicago 16)



('Hard to Say I'm Sorry' from Chicago 16, 1982)

(앨범 버젼 원곡. Get Away와의 접속곡 형태.)



(뮤직 비디오. Get Away가 잘린 싱글 버젼.)



(가장 상태가 양호한 82년 도르트문트 라이브)




A면에 마지막 트랙이었던 Hard to Say I'm Sorry

대구를 이루는 B면의 마지막 트랙 Love Me Tomorrow

역시 두번째로 싱글 커트되어 성공을 거둔다. 세테라

스스로 발굴하기 시작한 80년대식 발라드의 표현력이

애정과 인간 관계 같은 정서를 깊게 어루만지며 타고난

발성과 어우러져 일정한 궤도에 올라가고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트랙이다.



왠만한 한국의 음악 팬이나 이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Chicago 16부터 앨범을 즐기게

되었을 텐데, 전술한 두 곡을 제외하고 나머지에서는

이전 시카고의 전매특허인 브라스 사운드가 생경하게

배어 나오니 이에 익숙하지 않은 팬이라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16을 기점으로 이전 시카고

음악을 하나 하나 정복해 가다 보면 단순하게 팝락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음악에 숨겨진 깊은

내력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다.



16 발매 전 80~90년대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보컬 겸 키보디스트 빌 챔플린도 새롭게 영입된다. 이

분도 커리어가 화려한 편인데 80년대 초에 대히트한 명

발라드 After the Love Has Gone 포스터 등과 공동

작곡하여 무려 그래미 상을 수상한 분이시다. 시카고

가담하게 된 건 포스터  세라핀과의 친분으로 인해..



('Love Me Tomorrow' from Chicago 16, 1982)



(아웃트로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어찌 변주되는지 주목하면 흥미롭다.)




 (Chicago 17)




큰 전기를 마련한 16이 냉정하게 앨범에서 초대박은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반해 84년 5월에 발매한

Chicago 17은 가히 시카고 디스코그래피의 베스트

앨범이라 할 만하다. 비록 16이 기록한 싱글 1위 곡은

나오지 않지만 빌보드 핫100 싱글 3위까지 오른 곡을

둘, 탑20까지 오른 곡을 또 둘이나 배출하고 무엇보다

앨범 판매로 6x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

(원래 미국 시장 성공의 척도는 싱글보다 앨범이다.)



판매 뿐 아니라 역대 앨범 중 음악적 평가가 가장 좋다는

점이 여러 모로 내실을 거둔 성과임을 입증한다. 16에서

성공한 두 싱글과 나머지 전통적 브라스 트랙들 사이에

괴리감이 잔존하여 일반 음악 팬을 당혹케 했던 점에

비교한다면, 17은 비록 브라스락이나 재즈의 색을 싹

지우더라도 80년대 소프트락의 문법 하나에 집중해

시대를 대변할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할 만하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그래미 본상 올해의 레코드최우수

팝 퍼포먼스 부문 후보에 지명되는 결과까지 온다.



85년 팝계 최고의 이벤트였던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에도 곡을 하나 기증했고 앨범 전체가 그래미

올해의 앨범 후보에 지명되며 함께 이름을 올리는 깜짝

영광을 누리기도. 86년의 13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선 77년에 이어 두번째로 최우수 팝락 밴드

부문 수상의 영예를 가져갔다. 밴드로서 시카고

활동 기간 중 최고의 해를 맞고 있었고 그 중심에

피터 세테라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Stay the Night' from Chicago 17, 1984)

(싱글 핫100 16위까지 올랐고 스턴트로 가득 찬 뮤직 비디오는 꽤 화제였다.)



('Along Comes a Woman' from Chicago 17, 1984)

(싱글 핫100 14위까지 올랐으며 흑백 고전 영화를 패러디한 뮤직 비디오.)



17에서 가장 탁월한 트랙은 Hard Habit to Break로서

그래미 본상 후보 지명도 이 곡의 빼어남 때문이었다. 81년

메가히트곡으로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Physical을 공동

작곡한 스티브 키프너송라이팅을 주도하고 데이빗 포스터

프로듀싱한 트랙으로서, 피터 세테라빌 챔플린이 듀오로

합을 맞춘 모든 곡 중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면서도 시카고

지닌 재즈락의 매력도 아울러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시대의 또 다른 히트곡 스티비 원더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빌리 오션Caribbean Queen에 밀려서 끝내

핫100 차트 3위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워낙 명곡이 넘쳐난

시절이었으니 뭐. 세테라포스터가 다시 합작한 또 다른 명곡

You're the Inspiration 역시 잭 와그너All I Need와 무려

마돈나Like a Virgin에 밀려 싱글 3위가 최고 기록이었다니.

가히 대중 음악이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80년대 아니었겠나.



싱글 16위까지 오른 Stay the Night이나 14위까지 기록한

Along Comes a Woman을 들으면 그렇다. 세테라 목소리를

쏙 빼놓고 반주만 틀었을 때 이걸 시카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네. 당시에는

브라스 빼고 신디 넣으라고 레코드사 차원에서 압력이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니 80년대 사운드를 완벽하게 창조해냈다고 위무라도

하는 편이 나을지도. 어쨌든 흥행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지만 뭔가 위기감이 스멀스멀 닥쳐오는 느낌 아닌 느낌이

분명히 감지되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계속 가도 괜찮은 걸까.



위에 뮤직 비디오가 참 쌈마이다우면서 돈도 많이 들인 티가

팍팍 나는데 당시엔 저런 것이 유행이었다. 바야흐로 MTV

시대가 절정을 찍던 80년대 중반이었던 거다. 그나저나

저 발연기를 어쩔...



('You're the Inspiration' from Chicago 17, 1984)



('Hard Habit to Break' from Chicago 17, 1984)

(세테라 재적 시절 거의 마지막 라이브로 추정)



(정말 흔치 않은 전성기 세테라의 이 곡 라이브 아카이브)






락 밴드의 시대였던 70년대를 통과한 80년대의 음악

산업에선 보컬리스트의 솔로 독립과 밴드 와해의 수순이

마치 모든 뮤지션의 통과의례처럼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이는 시카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가요계에는 10년 정도 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사실

이들은 70년대엔 프론트맨을 따로 두지 않았고 심지어

보컬의 책임도 세 사람이 나눠 맡는 구조였는데도 말이지.

변화한 산업의 환경이 밴드에게 얼굴을 요구하였고

세테라는 이에 적절하게 응할 수 있는 멤버였던 거다.



오늘날까지도 골수 팬들 사이에선 논쟁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프론트맨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냔

옹호론, 카쓰가 죽은 후 이 정신 못 차리고 제 역할을

못할 때 세테라가 자리를 차고 들어갔다는 설, 레코드사

쪽에서 혼 섹션은 아예 취급도 안 하려고 하니 이 기회를

세테라가 낚아채 이기적 이득을 챙긴 거였다는 비난론 등,

양상은 참 다양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분명한 건 세테라를 시대적 흐름의 희생양 쯤으로 봐주는

감상적 생각은 남아 있는 자료로 볼 때 아닌 건 아니라는

것. 이 시기 그는 확실히 자신의 성공 가도를 향 확실한

기회를 찾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이고,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의 에고를 적당히 내세우며 약간은 허세끼가 다분한

셀럽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던 걸로 추정한다.

이런 자세는 뮤지션 개인의 영예로선 물론 박수받을 일일

것이고 골수 시카고 팬들 입장에서야 환장할 노릇일 것.



결국 그는 85년 여름에 밴드를 떠날 것을 천명한다. 딴에는

당시 옆동네 제네시스필 콜린스의 관계처럼 밴드와 솔로

양쪽을 병행하겠다고 조율을 시도한 모양이지만 다른 멤버

입장에선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다. 아래에 TV쇼

아카이브로 남아 있는 영상이 독립 의사를 밝힌 최초 시기

쯤에 찍힌 거라고 하는데, 40대 초반 인생의 전성기를 달리던

뮤지션으로서 매우 당당한 자세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한 번 보시기를. 영상의 댓글은

그에 대한 욕이 많은데 판단은 각자의 몫인 듯.



(Peter Cetera and David Foster interviewed, circa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Mj9BK7ih8Q0




꽤 어수선하게 지나간 시대처럼 보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성공의 길을 착실하게 다지던 시절이었다. 80년대 후반은

피터 세테라란 뮤지션에게 최고의 전성기를 선사한 시기.

독립하고 이듬해에 영화 가라데 키드 2탄의 주제가로

발표한 Glory of Love가 빌보드 싱글 차트 탑을 찍고,

연이어 (당시만 해도 완전 무명이던) 에이미 그랜트

듀엣을 이룬 The Next Time I Fall마저 연달아 핫100

1위를 달성해버린 것. 아카데미골든글러브 어워드의

주제가상 후보에도 오르고 그래미에서도 후보에 오른다.



쉬워 보이는지 몰라도 싸이의 사례에서 모든 한국인이

간접 경험했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성과는 쉽게

폄하할 일이 아니다. 비록 평가는 그냥저냥 그랬더라도

86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 Solitude/Solitaire가 거둔

상업적 성과 - 앨범 차트 23위 및 플래티넘증 - 는

완벽하게 한 시대를 규정하고 있었다. 파워 발라드

주종을 이루던 당시 백인 락 씬의 대세적 흐름일 터.



(당시 오스카 무대에서. 6분 47초부터. 음정이 살짝 불안정.)

https://www.youtube.com/watch?v=bx8062XOUGk



참고로 Glory~ 가라데 키드에 삽입될 노래가 원래

아니었다고. 85년에 나온 록키 4탄 OST로 본래 기획한

트랙이었단다. 가사 분위기가 많이 비슷하긴 하다. 위

TV쇼 인터뷰 중간에도 록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Solitude/Solitaire)



 (Glory of Love, single)



(The Next Time I Fall, single)



('Glory of Love' from The Karate Kid Part II, 1986)



('The Next Time I Fall' from Solitude/Solitaire, 1986)




솔로 아티스트로서 그의 성공은 8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88년에 발매한 앨범 One More Story는 차트 58위까지

오르고 싱글 4위까지 올라가는 One Good Woman

배출한다. 대략 이 시기까진 그래도 시대의 흐름을 잘 좇아

히트할 튠을 만들어내는 감각을 유지한 셈.



90년대까지 이어지면 다른 아티스트와의 싱글 협업, 흔히

일컫는 피처링 작업으로 유명세를 이어간다. 89년엔 또

다른 빅스타 셰어와 듀엣을 이룬 After All, 91년에는

데이빗 포스터와 다시 공동 작곡으로 걸프전 군인들을

향한 위문 가요 Voices That Care에서 여전히 건재한

그의 하이 테너 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창 솔로 콘서트에 매진하던 97년엔 베이비페이스

키우던 신예 R&B 그룹 애즈옛이 리메이크한 Hard to

Say I'm Sorry커버 버젼에서 마지막 찌르는 고음

파트에 재등장하여 꽤 화제가 되기도. 핫100 8위까지

오르는 저력을 과시했다. You're the Inspiration 역시

이들과 재녹음하기도.



현재로선 92년에 앨범 World Falling Down에서

커트한 싱글 Restless Heart가 마지막 핫100

차트 탑40 기록이다.



('One Good Woman' from One More Story, 1988)



('Voices That Care', 1991)

(91년 스타 연예인들 총출동. 세테라는 번째 등장.)



('Hard to Say I'm Sorry' by Az Yet, 1996)



('You're the Inspiration' by Peter Cetera ft. Az Yet, 1997)




세테라가 맞은 솔로 전성기 동안 시카고의 행보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직후 86년에 발표한 Chicago

18에선 유사하게 베이스와 보컬을 겸할 줄 아는 제이슨

셰프를 영입해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했고, 88년의

Chicago 19에선 빌 챔플린의 보컬이 돋보인 싱글

1위 곡을 배출했지만, 음악적 완성도는 글쎄...



문제는 사운드였다. 피터 가브리엘이 나간 후의 제네시스,

로저 워터스가 나간 후의 핑크 플로이드처럼 시카고

피터 세테라와 묘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차...

포스터세테라가 주도한 정서를 비판했으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의 새 앨범에선 외부 작곡가만 교체했을 뿐

80년대 사운드에서 단 한 걸음 진보하지 못한 수준에

머물렀으며 하다 못해 70년대식 재즈 본령으로 복귀한

것도 아니었다. 언론의 평이 싸늘할 만하지.



('If She Would Have Been Faithful' from Chicago 18, 1986)



('Look Away' from Chicago 19, 1988)

*Chicago 19에서 싱글 차트 탑을 찍은 곡. 다이앤 워렌 작곡.



('You're Not Alone' from Chicago 19, 1988)




결국 90년대를 넘어서며 탈퇴한 멤버와 원 밴드 양측 모두

상업적 성공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졌고 이제는 옛날 히트

트랙에 의존하며 투어를 순회하는 한물간 가수로 취급받는

실정이다. 애초에 멤버들 모두 40대를 넘긴 나이에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어 상업적 동력을 되살리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터이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블루스로 다시 회귀한 에릭 클랩튼이나

클래식 작품을 발표한 폴 매카트니 같은 분이 있음을 볼 때

늦은 나이가 핑계는 될 수 없음일 것이다. 애초에 시카고가

데뷔 모토를 '나팔 부는 락앤롤 밴드'로 표방하고 시작했으니

늘그막의 음악적 귀결은 정통 딕시랜드 사운드를 재창조한

창의적 커버 또는 창작곡 정도로 맺었어야 마땅할 얘기이다.

아니, 그렇게 주장한다.



(Scheff)




시카고가 미국 시장에서 보수 성향의 백인계 미국인들에게

주는 영향력과 비교할 때, 도대체 이런 대단한 밴드가 트리플

A급 세계구 아티스트로 올라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곤 했는데, 아마도 이런 결정적 한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터이다. (냉정하게 말해 이들의 시장 파급력은 북미

및 일부 지역에 국한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도 판매고

합하면 1억 장에 달한다.)



제임스 팬코우로버트 램을 중심으로 리 러크네인

월터 패러자이더가 더해진 터줏대감 멤버들이, 과연 말이

통하는 방향으로 밴드를 이끌어왔는가 하는 점도 한번쯤

곱씹어볼 대목이다. 사람 숫자가 많을 뿐더러 멤버 교체가

너무 빈번하게 발생한데다, 창립 멤버인 피터 세테라

대니 세라핀에, 교체로 들어오지만 밴드 역사의 중요한 한

대목을 오래도록 지탱해온 빌 챔플린제이슨 셰프까지,

결국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은 과연 무엇일까.



(Champlin)




우리가 중심이니 우리 생각대로 따르지 않으면 결국 떠날

수밖에 없을 거다 하는 식으로, 기둥 멤버들의 묘한 꼰대

의식 같은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

역사에서의 기여도를 따질 때 세테라, 세라핀, 셰프 등 세

사람은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낼 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버디 리치가 극찬해 마지 않았다는 대니 세라핀

심지어 해고라는 형식으로 떠나 보내다니.



창작자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노력하지

못한 한계, 여기에 함께 한 공동의 세월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 묘한 아집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고 만 관계의

응어리.. 미국 음악사 수십 년간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면서

어느 일정한 선 이상은 뚫지 못했던 유리벽의 원인인즉슨

멤버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아울러 저 세상에서 테리 카쓰가 이런 멤버들의 행보를

보고 참 무던히도 안타까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Seraphine)



(Kath)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노년에 접어든 세테라 옹의 음악

활동도 대략 이런 정도에서 마무리가 될 것 같다. 시카고

및 그 자신의 관계에 관해 수많은 사람들의 억측이나 공분,

오해와 회한을 뒤로 하고... 적어도 두 시대, 약 30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미국의 대중 음악 시장에서 일정한 창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타고난 섬세한 보이스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 공로는 결코 폄하할 수 없으리라.



일부 시카고 광팬들이 세테라를 욕하는 결정적 원인은

명예의전당 헌액식에 참석도 안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한 가지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연예인들이

욕먹는 마약, 폭력, 섹스 류의 이렇다 할 스캔들을

일으킨 적은 없는 세테라이기에 이거 하나 갖고 몇

년치 욕을 울궈먹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어쨌든 조만간

팬들의 오랜 오해도 풀어주는 포용을 보여 주시기를.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news/chicagos-robert-lamm-talks-peter-cetera-absence-at-rock-hall-225418/


http://ultimateclassicrock.com/peter-cetera-chicago-rock-hall-2016/






사실 본 블로거가 가장 좋아하는 시카고의 트랙은 피터

세테라가 떠난 직후 발표하여 싱글 3위까지 오른 Will You

Still Love Me이다. Chicago 18에서 가장 빼어난 곡이고

데이빗 포스터가 조율한 팝 발라드 시대의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운 역작일 터이다. 제이슨 셰프의 장점이 가장

두드러지기도 했고. 당시엔 세테라가 떠난 자리를 꿰찬

그를 두고 어디서 어린 놈이 나타나 노래를 이렇게 잘

하나 생각하기도. 다 옛날 일이지만.



피터 세테라가 피처링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던 시절인

89년엔 영화 Chances Are의 주제가로 After All셰어

함께 불렀는데 이것 역시 강력하게 추천하는 명곡이다. 바다

건너 미국에선 결혼식 축가 올타임 리퀘스트 송이라고. 꽤

빼어난 클래식 코메디인 영화 역시 추천할 만한 수작이다.

특히 빛나는 보석 같던 로다주의 젊은 시절을 기억한다면.

두 아름다운 노래를 추천 때리며 포스팅을 끝내련다.



('Will You Still Love Me' from Chicago 18, 1986)



('After All' by Cher & Peter Cetera, 1989)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rock vocalis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팅 Sting  (0) 2019.03.15
스티브 페리 Steve Perry  (1) 2019.02.10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  (0) 2019.01.05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0) 2018.12.22
프레디 머큐리 0 - 보랩  (0) 2018.11.28
and




모든 락 보컬은 이 분이 등장하기 전과 등장한 후로 나뉜다.

그리고 모든 락 음악은 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뉘기도 하고.

오늘날 락 음악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주고 10년 여의 활동 기간을 뒤로 한 채 활활 불태우고

홀연히 떠나간 비행선 같은 전설의 뮤지션들...



락 보컬의 원형을 제시한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

(1948~).. 그리고 여기에 레드 제플린에 대한 이야기이다.









객관적 평가의 이야기를 해볼까. 프레디 머큐리를 18위에

올려놓은 롤링 스톤 지의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가수들

100명 랭킹에서 플랜트는 15위를 차지했다. 영국 방송사

플래닛 락의 2009년 조사에서 그는 락 음악계 가장 위대한

보이스로 선정되었고, 미국 방송사 NPR의 2010년

조사에선 50명의 위대한 목소리 중 하나로 뽑혔다.



헤비메탈 전문 매거진 히트 퍼레이더가 2006년에 발표한

100명의 위대한 남성 메탈 보컬리스트 랭킹에서 그는 당당히

1위이다. 재미있는 건 그에게 영향을 받은 동료와 후배들이 이

랭킹의 하단에 줄줄이 위치한다는 점. 2위의 롭 핼포드, 3위의

스티븐 타일러, 6위의 프레디 머큐리, 13위의 게디 리 등등.



여러분들이 인식하고 있을 법한 명가수나 보컬리스트들이

자신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 번 쯤은 언급한 전설이 바로

이 분인 것. 그 프레디 머큐리마저도. (데뷔와 히트 연도로

치면 5년 정도 앞서니 선배 맞다.) 멀리 갈 거 없이 이 분

그냥 별명이 락앤롤의 신이란다. 뭐 더 설명이 필요한지.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robert-plant-5-225584/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은 락 음악과 하드락 역사에

분수령이자 분기점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60년대말 락앤롤

장르가 블루스사이키델릭에서 변화하는 시점이 늦춰졌을

것이고 70년대에 헤비메탈이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프로그레시브 장르에도 여파가 미쳤을 거다.

포크에도 어느 정도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거다. 한

마디로 비틀즈와 작별한 음악계의 다음 정착지였던 셈이다.



리더이자 구심점은 흔히 바보들의 3대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지미 페이지. 그 셋을 배출했다는 야드버즈가 사실상 와해된

야드버즈를 결성하려고 멤버를 끌어모으던 중 가장

먼저 리쿠르트한 인물이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였다.

'이렇게 뛰어난데 왜 아직 묻혀 있었지' 라고 생각했단다.



밴드 오브 조이란 데서 노래하던 플랜트야드버즈 후신

성격의 프로젝트를 수락하고 동료인 존 본햄을 드러머로

추천한다. 제프 벡과의 레코딩 협업을 통해 페이지가 원래

알고 지내던 존 폴 존스를 영입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진용은 이렇게 완성된다. 1968년 8월쯤. 처음

잼을 맞추며 서로 불꽃이 튀었고 성공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신인이면서도 이미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이들은

68년 9월초 당장 덴마크 클럽에 섰고 그 달 말엔 9일간

후다닥 첫 앨범을 녹음해 버린다. 즉 69년 1월 발매로

알려진 역사적 데뷔 앨범은 사실 전년도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 젊고 뜨기 전이지만 이미 음악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들. 만나자 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화학 반응을 일으킨 것 아니겠는가.



 (Led Zeppelin)



 (Led Zeppelin)




역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 앨범으로 꼽히는 Led Zeppelin.

이렇게 나온 결실이다. 밴드 이름을 정하는 데는 더 후

키스 문이 팁을 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 페이지 친구. 앨범

커버에는 1937년에 미국 뉴저지에서 폭발한 독일식 LZ

129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사고 사진을 실었다. 그리고

비행선이 폭발했듯이, 앨범은 대박으로 폭발해버린다.



I의 전반적 장르는 블루스락 또는 헤비블루로 요약된다.

발표 후 세상을 놀래킨 대곡 Dazed and Confused

보여준 끈적한 중량감이 입증한다. (69년 기준) 일찍이

블루스가 이토록 무거운 공격성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플랜트의 야성적 팔세토와 페이지의 창조적 솔로잉, 이

한 세트가 음악사의 브랜드가 될 것임은 앨범 하나로도

충분히 알 만한 일이었다. 페이지가 현악기 활로 기타에

보윙을 시도하는데 즐거운 해프닝 같은 것이었



Good Times Bad Times Communication

Breakdown 같은 곡에서 페이지의 프로듀싱 능력과

밴드의 상업적 표현성이 심상치 않음을 드러내기도.

히트할 튠을 조율하는 감각에 있어 당시 일정한 절정에

근접하고 있는 네 사람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Babe I'm Gonna Leave You는 이후 앨범에서

계속 등장할 서정적 작품군의 프렐류드 같기도.





('Dazed and Confused' from Led Zeppelin, 1969)



('Communication Breakdown' from Led Zeppelin, 1969)


('Good Times Bad Times' from Led Zeppelin, 1969)



 (Led Zeppelin II)




음악을 듣다 보면 그런 게 있다. 이 앨범, 도대체 버릴 노래가

있긴 한 건가. 그때 우린 명반이란 말을 떠올린다. 모든 트랙이

필청이란 말씀. 투어와 스튜디오를 왕복하며 1년쯤 준비해

10월에 낸 Led Zeppelin II가 딱 그런 경우였다. 아니, 솔직히

I은 블루스 안 내키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렇다 치자. 이제부터

나오는 그들의 앨범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음악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 것. 비틀즈스톤즈 이후 이런 일이 있었던가.



아 물론, 저작권 개념이 흐릿한 페이지의 표절 시비가 있긴

하다. 허나 하나의 완성된 트랙을 만들어 앨범 전체의 일관된

톤을 프로듀싱하는 능력에 있어, 레드 제플린을 폄하할 수

있겠는가 싶다. 평론가와 언론이 종종 이들의 최고 작품으로

꼽으며 가장 유명한 기타 리프를 가진 Whole Lotta Love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마련. 2012년에 롤링 스톤 지가

들 최고의 명곡 40곡을 엄선한 때도 이 곡이 '당연히' 1위..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the-40-greatest-led-zeppelin-songs-of-all-time-154694/whole-lotta-love-1969-170042/



본작에선 역대급의 세션으로서 리듬 파트를 탄탄하게 받쳐

라이브를 살아있는 활어로 만드는 존스본햄의 진가가 특히

두드러진다. 톨킨반지의 제왕 노래한 Ramble On

리드밍 커플 조화가 매력적으로 두드러지는 트랙이며

특히 팬덤에서 인기가 높다.



섹드립 가사로 알려진 The Lemon Song에서 존스의 베이스

라인과 진저 베이커에 영향받은 Moby Dick의 본조 드러밍은

절정감을 선사할 게다. (본조본햄의 별명) Heartbreaker

흔히 헤비메탈 장르의 효시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품이고

플랜트의 불륜을 소재로 한 What Is and What Should

Never Be 역시 필청의 트랙이다.



물론 이미 수많은 음악이 나와 다양한 장르가 발전한 지금의

기준으로 본작이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하지만 한때는

락 음악과 헤비메탈이 음악의 대세였던 적도 있고 수많은 후배

음악가들의 작곡에 기준점을 제시한 앨범이란 점을 명심하시라.

앨범 차트 1위 및 플래티넘 기록 등 상업적인 성공도 전작보다

더 대단했고 여러 모로 레드 제플린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II는 복기할 만한 중요도를 가지는 걸작 앨범임에 틀림없다.



('Whole Lotta Love' from Led Zeppelin II, 1969)



('Ramble On' from Led Zeppelin II, 1969)



('Heartbreaker' from Led Zeppelin II, 1969)




 (Led Zeppelin III)




강렬한 Immigrant Song을 내세워 1년 후 70년 10월에

낸 Led Zeppelin III는 그들 음악의 또 다른 뿌리브리티쉬

포크의 색채가 강해 락 키즈를 적잖이 당황케 했다. 최근에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쓰여 슈퍼히어로와의 엄청난

싱크로를 자랑한 이 곡플랜트 보이스의 야수적 매력을

초극강으로 끌어올려 밴드메이트들에게 인기가 높......지만

샤우팅 난이도 땜에 아마추어들에겐 언감생심이기도.ㅋㅠ



전체적 평가가 초월적 완성도를 지닌 다른 앨범에 비해 약간

박한 편이지만 차트 1위 같은 상업적 성공은 여전했다. 헤비

블루스의 미학이란 면에서 Since I've Been Loving You

엄청난 트랙이 실려 아시아 등지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블루스

고전을 모던한 어쿠스틱 감성으로 뒤살린 Gallows Pole,

무그 이펙트에 연결한 기타 인트로가 인상적인 Celebration

Day도 팬덤의 성원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Immigrant Song' from Led Zeppelin III, 1970)



('Since I've Been Loving You' from Led Zeppelin III, 1970)

(흡사 레이 만자렉을 연상시키는 존스의 세션..)




 (Led Zeppelin IV) (untitled)




도대체 버릴 노래가 있긴 하나 싶은 앨범. 이런 작업을 해낼

기회는 절대 자주 오지 않는 법. 락 음악의 시대 70년대에

뮤지션 커리어의 전성기를 보낸 레드 제플린은 그런 기회가

몇 번씩이나 찾아온, 달란트와 행운이 넘치는 밴드였는데...



Led Zeppelin IV - 사실 제목이 없는 untitled라 칭해야

옳긴 한데 - 는 그런 앨범이면서 동시에 음악사상 가장

성공한 앨범이기도 하다. 때는 III가 나온 후 약 1년 지난

71년 11월쯤. Stairway to Heaven이 수록된 앨범이다. 뭘

모르는 사람은 이 곡 하나만의 인기로 잘 나갔다고 착각하기도.



I - 사이키델릭, II - 하드락, III - 포크, 그리고 전체 세계관에

공통 기반이 되는 블루스로서, 자신들 음악의 바탕을 규명한

거라면 IV는 세 가지 뿌리를 통합한 완전체라고나 할까.

프로그레시브에 가까운 스테어웨이 투헤븐만 들어봐도 여러

장르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가. A마이너 키의 어쿠스틱

아르페지오가 오버더빙된 Mellotron M400과 어우러진

인트로.. 디스토션 걸린 기타와 본조의 드러밍 템포를

올리고 플랜트의 팔세토가 텐션의 정점을 찍는 구도.. 풍자에

신비주의가 배합된 가사까지.. 당대 락 음악의 정수인 것이다.



Gibson의 상징과도 같은 페이지는 다양한 톤을 동시에

구사하기 위해 라이브에선 더블넥 기타를 자주 사용했다.

보통 12현과 6현 넥이 결합한 EDS-1275를 썼다. 존스

샘플러는 주로 Mellotron이었다가 Yamaha GX-1 나오니

유행을 따라 엘렉톤을 차용하기도.



(Gibson EDS-1275)



(Mellotron M400)



('Stairway to Heaven' from Led Zeppelin IV, 1971)



(가장 유명한 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버젼)




근데 본작의 명곡이 이게 다가 아니란 것. 영원한 락 앤썸

Rock and Roll은 뭐 워낙 유명하니 그렇다 치자고. 진짜

놀라운 건 Black Dog 아니던가. 페이지의 리프가 아무리

날뛰고 놀아도 꿋꿋하게 rock-steady한 본햄의 드러밍이란.

이 곡의 하이노트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플랜트 본인도 녹음

때 말고 라이브에서 왠만해선 시도 안 한다며.



평단이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When the Levee Breaks.

(1927년 미시시피강 대홍수둑이 무너진 일이 배경이란다.)

컨트리와 블루스가 적정 배합하여 오묘한 이 분위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지. 포크 미학의 함수 같은 Going to California

까지.. 가만 보면 숨어 있는 포크풍 트랙의 아름다움도 도무지

만만치가 않다.



IV.. 전 세계에서 3700만 장이 팔렸고 역대 미국 음악 시장

최고의 성공작 중 하나이다. 락 밴드의 디스코그래피에서 4집

쯤 와서 정점을 찍는다는 징크스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카더라.



('Black Dog' from Led Zeppelin IV, 1971)



('When the Levee Breaks' from Led Zeppelin IV, 1971)



('Rock and Roll' from Led Zeppelin IV, 1971)




 (Houses of the Holy)




IV에서 세계적 대폭발을 일으킨 레드 제플린 그들 커리어

최절정의 정점을 찍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하강할 일만

남았겠지만 실력있는 음악가의 저력은 하락 곡선의 낙폭을

얼마나 완만하게 조율해낼 수 있는가 여부에 달린 것. 73년

3월에 발표한 새 앨범은 신기하게 넘버링하던 패턴을 깨고

Houses of the Holy, 성스러운 행위의 장소란 제목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네 명의 전설이 적어도 음악적 완성도에선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음을 입증하는데 충분했다.



어찌 보면 전작의 몇 곡처럼 강렬한 임팩트가 부족해 보일진

모르나 그만큼 전작이 엄청났다는 것일 뿐. 곱씹어 감상한다면

한 곡 한 곡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완성작임을 알 수

있을 터이다. 산뜻하고 강한 오프닝 트랙을 배치하는 전통을

좇는 The Song Remains the Same이나 어쿠스틱에

적당히 하드함을 섞은 Over the Hills and Far Away 등,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트랙들이 지금까지 표현하지 않은

빈틈을 찾아들어와 팬덤을 만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레게를 끌어온 D'yer Mak'er(자메이카를 영국식

영어로 음차한 말)나 EMS VCS3Moog Taurus 다루는

존스의 영향력이 돋보인 No Quarter를 들으면, 팬덤 스스로

능동적으로 곡의 매력을 찾아 탐험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하는

듯하다. 아마도 멤버들이 생각한 본작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The Ocean 아닐까 하는데, 치기어린 8분의 15박자 (15/8)

메인 리프가 안기는 청량감이 후대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팬덤의

열광적 지지를 지금까지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존 폴 존스의 장비에 관한 해설)

http://www.mixdownmag.com.au/gear-rundown-john-paul-jones



(EMS VCS3)



(Moog Taurus)




상업적 성공은 더 이상 관심거리도 아닌 거물이 되어버린지

오래. 본작도 판매 성과는 여전히 고공 행진이었고 발매 직후

단행한 북미 투어도 성공적이어서 그 기록을 훗날 라이브

앨범으로 남길 정도였다. 74년엔 스완송이란 자체 레이블을

설립한다. 본작 트랙에 대한 평가가 평단은 오버더힐스~,

팬덤은 오션 쪽으로 갈리는 듯하나 사실 두 곡 다 고른 지지

받는다. 완성도 충만한 트랙들로 전곡을 꽉꽉 채운, 오랜만에

감상한 거장의 수작이랄까... 한 마디로 본작을 정의한다면.



('The Song Remains the Same'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Over the Hills and Far Away'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The Ocean'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Physical Graffiti)




2년쯤 시간이 흐른 75년 2월 Physical Graffiti란 또다른

명반이 나온다. 무려 더블 앨범으로서 스완송 레이블 설립

직후 의욕으로 충만했던 듯하다. 준수한 완성도를 가진 곡을

두 배로 선물한 것. 일반 대중에게 명곡 Kashmir를 수록한

앨범으로 유명한 바로 그 작품. 흔히 그들식프로그레시브

불리는 대곡이고 아랍풍 음률을 차용한 폴리리듬의 리프가

대단히 유명하며 존스본햄의 탄탄한 백업이 다른 어떤

곡에서보다 더 두드러져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걸작 트랙이다.



(백인의 락에 관심 두지 않는 자존심 강한 흑인 랩퍼들마저

샘플링하여 사용한 이야기.. 이젠 다들 아실 거다.)

*캐쉬미어의 폴리리듬에 대해선 아래 링크 동영상의

4분 50초경부터 보면 알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Om2oZRQIk



점입가경은 본작의 대작이 하나가 아니란 것. 11분짜리 대곡

블루스 In My Time of Dying이나 9분에 약간 못 미치는

프로그레시브 In the Light에 이르면, 초창기 느린 대곡을

실험하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의 초심을 읽을 수 있다.

The Rover, Houses of the Holy, The Wanton Song

등에선 페이지가 얼마나 빼어난 리프를 만드는 장인이었는지

깨닫고 다시 장탄식하게 될 거다. 기타 트랙 14개를 중첩한

오버더빙으로 촘촘하게 리프를 엮어낸 Ten Years Gone,

본조의 베이스 파운딩이 작렬하는 Sick Again.. 쉴 틈이 없네.



개인적으로 존 폴 존스가 가장 이상향의 뮤지션인데 그가 연신

Hohner Clavinet을 그루브하게 때려대는 미칠 듯한 매력의

트랙이 Trampled Under Foot이다. 72년에 크게 히트한

스티비 원더Superstition에서 영향받았다 하며 안 그래도

모타운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존스부커 T. 존스

빌리 프레스턴 같네. 이들이 선보인 흔치 않은 funk 곡이다.

75년 5월엔 본작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런던의 얼스코트

아레나에서 전석매진 공연을 5일간 벌여 인기를 입증하였다.



(Hohner Clavinet D6)



('Kashmir' from Physical Graffiti, 1975)



('The Wanton Song' from Physical Graffiti, 1975)

(앞부분에 다른 곡의 리프가 섞여 있다.)



('Trampled Under Foot' from Physical Graffiti, 1975)




 (Presence)




76년 3월에 발매한 Presence 앨범은 그들의 하락세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 같기도 하다. 존스-본햄 듀오의

리드미컬한 백킹이 10분 이상 이어지는 인상적 오프닝

Archilles Last Stand가 매력적이며, 오버더빙으로

겹겹이 쌓아올린 페이지의 차랑차랑한 리프가 여전히

독창적이지만, 약간의 자기 복제가 느껴져 예전 만큼의

파괴력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세션 셋에 비해 플랜트의 역량이 뭔가 허전하다고

느꼈다면 정확히 들은 거다. 이때 교통사고로 약 1년간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했고 앨범 녹음도 앉아서 진행했던

것. 이 덕에 전작처럼 진하게 블루지하게 는 진지함도,

5집의 Song Remains~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스킬

2프로쯤 부족해 보인다.



Song Remains~ 끝나기 직전에 선보인 찌르는 샤우팅

플랜트가 전성기에 선보인 초고음 중 거의 마지막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 통설인 듯하다. 사고를 당했다고는 하나

아직 젊은 나이인데 몸 상태에 무리가 있다기보단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플랜트의 음악 성향이 중저음을 개발하는

쪽으로 변화해가고 있음을 읽을 수 있겠다.



밴드의 공연 투어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내외부의 음악 환경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Nobody's

Fault But Mine 같은 트랙은 여전히 강하고 광채가 난다.

77년 4월의 미시간주 폰티악 실버돔 공연은 7만 6천이 넘는

유료 관객을 기록하여 기네스북에 올랐다. 지속된 성공 속에

악재가 끼기 시작했는데 본햄과 공연 스탭들이 폭행건으로

체포되기도 했고 77년 7월엔 플랜트의 다섯 살 된 아들이

질환으로 유명을 달리 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Achilles Last Stand' from Presence, 1976)



('Nobody's Fault but Mine' from Presence, 1976)




 (The Song Remains the Same)




정규 앨범이 아님에도 76년 10월 현역 시기에 낸 유일한

라이브란 의의 때문에 The Song Remains the Same

레드 제플린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청의 음반이다. 녹음은

73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정말 전성기의 따끈따끈한 활동상을 거의 유일하게 저장한

앨범이다. 동명의 콘서트 영화도 있으니 플랜트의 전성기가

궁금한 분들은 반드시 참조할 만하다.



사실 라이브 발매 당시인 70년대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특히

3년쯤 전에 발매된 딥 퍼플의 라이브 Made in Japan이 워낙

출중한 완성도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여러 모로 비교질을

당한 셈. 두 밴드의 합주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었던 것이, 각자

개인 연습을 충실히 해서 서로 완벽하게 합을 맞추는 전략으로

임한 딥 퍼플에 비해 - 존 로드리치 블랙모어가 클래식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전통적인 어법으로 음악에 접근한 것 -,

개개인의 자유도를 중시하며 페이지의 리딩에 충실하게 따른

레드 제플린은 라이브에서 미스 노트가 잦다거나 레코딩과

너무 동떨어진 애드립으로 노는 경우가 꽤나 발견된 것이다.



이 라이브에서 백미는 역시 Dazed and Confused듯.

6분 30초 곡을 무려 27분 길이로 만들어 놓았다. 동명의

영화 사운드트랙이란 형식인지라 약간 생뚱맞은 연기 씬도

들어가 있어 나름 재미를 느낄 수도. 한창 전성기 젊고 고운

멤버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가치도 있다. (또한 보고 싶은

본조의 생전 모습 역시...) 스테어웨이 투헤븐의 가장 유명한

라이브 버젼이 수록되어 있단 이유로도 들어볼 만하겠다.

마지막 사이키델릭이라는 Whole Lotta Love도 스튜디오

버젼과 상당히 다른 이펙트가 있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왜 들어갔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콘서트 영화의 초반 스토리 씬)





(앞부분Heartbreaker. 4분께부턴 Whole Lotta Love.)



(이건 동명의 트랙을 노년의 라이브에서 연주한 비디오)

(노년에 키를 낮춰 부르는지라 찌르는 샤우팅은 자제하신다는..)




 (In Through the Out Door)




78년 11월경 이들이 아바의 작업으로 유명한 스톡홀름의

폴라 스튜디오에 다시 모여 다음 앨범을 녹음하였고 이는

이듬해 8월에 발매된다. 레드 제플린 최후반 정규 앨범

In Through the Out Door. 디스코, 펑크, 뉴웨이브

등 대외 환경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으나 역대 앨범 중 결과가 가장 좋지 못했다. 대체로

페이지보다 존스가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작업을 진행했고

신디사이저 사용이 확대되며 블루스 일변도를 줄였지만

이채로울 뿐 생경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멤버들 개개인이 겪은 인생의 부침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특히 플랜트는 교통사고 당시 자신보다 아내가 더 큰 부상을

입었고 이후 어린 아들의 죽음을 겪으며 심리적으로 상당히

큰 변화를 겪은 것 같다. 그래도 그루브 넘치는 Fool in the

Rain아버지 플랜트로서의 따뜻한 목소리를 담은 발라드

All My Love는 체 디스코그래피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걸작이다. (이 곡은 특히 절대 흔치 않은 존스신스 솔로

파트가 압권이다.) 존스의 신디사이저가 시종일관 압도하는

Carouselambra 역시 취향과 기호에 따라...



('Fool in the Rain' from In Through the Out Door, 1979)



('All My Love' from In Through the Out Door, 1979)




 (Coda)




한편 존 본햄에겐 알콜이라는 오래 된 나쁜 친구가 있었다.

80년 9월 24일 공연 리허설 전 아침식사로 햄롤과 보드카를

들이킨 그는 오후 내내 술을 달고 있었고 그날 밤 페이지의

집에서 잠들었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사인은 구토에

의한 질식사. 알콜 의존증이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70년대의 또 다른 전설 드러머들인 코지 파웰이나 카마인

어피스가 대체 멤버로 리쿠르트된다는 소문이 난무했으나,

80년 12월 4일 결국 나머지 셋은 밴드의 해체를 발표한다.

이로서 네 명의 전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Coda는 해체 후 몇몇 라이브와 미발표 트랙을 긁어모아

82년 11월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이다. 락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전설적 드러머 본조를 기억하며 넣은

Bonzo's Montreux의 76년 라이브 아카이브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모곡이라고 하겠다.



('Bonzo's Montreux' from Coda, 1980)




본햄과 밴드가 사라졌지만 나머지 셋, 특히 플랜트페이지

중심의 재결성 소식은 이후 수십 년간 팬덤에 희망 고문을

선사한 오래 된 떡밥이었다. 존스는 존스대로 두 사람에게

약간은 소외된 관계를 서운해 하기도 그리워 하기도 했고.

해체 후 그들이 다시 뭉친 건 85, 88, 94, 95, 07년으로

대략 다섯 차례 정도. 85년엔 라이브 에이드로 해체 후 처음

셋이 뭉쳤는데 컨디션 안 좋고 튜닝 안 맞는 기술적 사유로

인해 이래저래 욕먹은 결합이었다. 88년 회합도 마찬가지.



(대체로 상했던 라이브. 드럼 중 한 분은 무려 필 콜린스..)




94년엔 당시 유행하던 언플러그드 열풍을 좇아 페이지

플랜트 둘만 뭉쳐 No Quarter: Jimmy Page and Robert

Plant Unledded를 발표하는데 반응이나 평가도 좋았다...

존스가 소외되었단 점만 빼고. Gallows Pole은 중년이 된

플랜트가 더 원숙한 색채를 보여줬다고 인기도 있었으니

관심있으면 들어보시길. (Page and Plant는 98년에 아예

신곡으로 채워 신보를 냈으나 반응이 예전 같진 않았다고...)



('Gallows Pole' from No Quarter, 1994)




철저하게 소외되신 존스. 95년 로큰롤 명예의전당 헌액식

두 사람을 옆에 두고 '그래도 전화번호 안 까먹었다니 고맙네'

드립을 쳤그대로 전파를 타면서 소위 JPJ왕따설을 확정.ㅜ

사실 존스는 70년대에도 두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구도에

빈정 상해서 두어 차례 가출, 아니 탈퇴했다 돌아갔을 정도.

모두를 포용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부분이 생기는 현상

결국 페이지리딩이나 플랜트의 엘리트주의가 애초부터

치명적 한계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방증일 것.



(존스의 씁쓸한 멘트는 6분 20초 경부터..)



(연주한 곡은 IV의 When the Levee Breaks.. 드럼엔 제이슨 본햄!)




97년엔 레드 제플린 디스코그래피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라이브 BBC Sessions가 발매된다. 69년과 71년, 한창

시절에 거침없이 불러제낀 내용의 아카이브인지라 해체

후 발매 앨범 중 첫손에 꼽을 만한 컬렉터블일 터. 이때만

해도 초창기 블루스 잼에도 주력할 때라 특히 30년대 델타

블루스의 기초를 세운 거장 로버트 존슨의 곡을 재해석한

Travelling Riverside Blues는 팬덤에서 꼽는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트랙임을 아셔야 한다. 이 밖에도 귀담아

들어볼 만한 고전이 많아 블루스에 탐닉하는 팬층은 훨씬

더 높게 평가하는 숨은 진주 앨범이라 하겠다.



('Travelling Riverside Blues' from BBC Sessions, 1997)




03년엔 72년의 LA실황을 담은 또 하나의 전성기 라이브 앨범

How the West Was Won이 발매되어 팬덤의 지갑을 털...

아니 지지를 받았고, 07년엔 24개 대표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Mothership이 발매되어 최근 나온 앨범 중 가장 각광을 받은

컬렉션이 되었다. 마더쉽엔 본 포스팅이 추천하는 왠만한 걸작

트랙들이 거의 실려 있으니 입문용으로 꼭 하나의 앨범을

골라야 한다면 이 앨범부터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다. LA실황

앨범은 페이지 스스로 추천사를 썼듯이 그들 활동 최절정기를

온전히 담은 사운드보드 레코딩이란 의미가 있을 것이다.



(How the West Was Won)



 (Mothership)




팬덤에서 경천동지할 일이 07년 12월에 일어나는데 노년에

접어든 세 멤버의 공연이 성사된 것이다. 런던 O2 아레나

공연으로 팬덤 사이에서 통칭되는 이벤트를 통해 어쩌면

그들이 죽기 전 마지막일지 모를 회합으로 노병들의 화려한

말년을 장식할 기념비적 아카이브가 남겨진 것이다. 95년

명예의전당 헌액 공연처럼 이번에도 제이슨 본햄이 스틱을

잡고 아버지의 혼을 담아 열정적으로 합을 맞추었다. (아들

제이슨도 이젠 알아주는 백전노장 드러머이다.) 본 라이브는

12년에 Celebration Day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Celebration Day)



(명기와 명연주자. Korg Oasys를 연주하시는 존스 옹..)


(할로우바디 Les Paul의 둔중한 톤이인상적이다.)




솔로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역시 프론트맨이었던

플랜트. 해체 전부터 공격적인 튠보다 락앤롤 이전 원형적인

음악 형태에 관심을 보이던 그는 80년대 초반 솔로 음반에선

그가 청소년기에 동경하던 초기 락앤롤 가수들의 편곡에 꽤

가까운 중저음 팝락으로 각광을 받았다. Honeydrippers

프로젝트성 밴드에서 그는 지미 페이지제프 벡이란 양대

거성을 세션으로 초청하기도. 50년대 필 필립스의 히트곡

Sea of Love를 농담처럼 녹음하기도 했는데.. 왠걸 이 곡이

덜컥 싱글 차트 대박을 쳐버린다. 84~85년경.



사실 플랜트는 진지하게 녹음할 생각은 없었고 - 그 자신도

50년대 R&B를 좋아했지만 - 프로젝트를 주도한 애틀랜틱

레코드 사장 아흐메트 에르테군이 좋아하는 노래라고 약간은

선심성으로 녹음해줬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ㅎ 참고로

에르테군은 여러 뮤지션과 두루 친분이 있어서 07년 재결합

공연이 사실은 이 분 추모 이벤트 형식으로 뭉친 것이었다.



노년의 플랜트는 컨트리 블루스 계열의 루츠 장르로 돌아왔다.

한때 블루그래스 계열 음악을 하는 앨리슨 크라우스와 듀오로

공연을 자주 하셨다고.



('Sea of Love' by the Honeydrippers, 1984)




밴드 뮤지션으로서의 로버트 플랜트는 리더와 멤버들의

백킹에 완벽하게 조응하여 팔세토 테크닉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능력을 갖춘 보컬리스트이면서 마지막 히피로서

사이키델릭과 판타지를 결합하여 섹드립을 예술로 승화한

가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안 작사가였다.



개별 멤버들이 자신이 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는 같은 밴드의 송라이팅 구조와 비교하여,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의 음악적 리딩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구조였으므로 플랜트 같은 멤버들의 창작적

기여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프로듀싱 만렙의 기타리스트 페이지가 싸고 돌며

플랜트 중심으로 밴드를 운영한 것을 보면 단순히 몇 개의

노트를 창작했는가 수준을 초월하여 플랜트가 가진 유쾌한

상상력의 세계가 리더와 멤버들 전체에 상생하는 시너지를

제공했다고 능히 상상할 수 있겠다. 대체로 레논-맥카트니,

재거-리차드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음악사상 완벽한 듀오

궁합을 자랑한 페이지-플랜트 조합이라고 하겠으나...



랜트페이지 사이도 사실 그리 원만하지는 못했다.

플랜트는 본래 유쾌하고 유머에 능하면서 낯가리지 않는

개방적 성격이고 약간 잘난 척하는 맛도 있는 인간성의

소유자라고 전한다. 잘난 맛에 살기는 페이지 자신도

만만치 않다고. (실제로 음악사에서 잘난 분들이시고.)



해체 전에야 서로 죽이 잘 맞았는데 중년과 노년 시절을

거치며 뭐가 그렇게 안 맞는지, 재결성을 막는 원인이라

말이 많았다. 전술하였듯이 이렇게 두 사람 중심으로만

흘러가는 밴드 구조가 다른 두 사람을 약간은 소외하는

방향으로 흐른 것 같아, 이런 점 역시 팬덤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지미 페이지는 표절 등

저작권 시비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고

여기에 로버트 플랜트 자신과 레드 제플린 전체꺼정

밀접하게 얽혀 있음이 사실이다. 비록 발빠른 대응으로

극단적 법정 소송은 대부분 회피하였다지만 창작의

정신이란 것이 소송 막았다고 다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70년대라는 음악사의 변환기를 거치면서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음악 연출의 이상향을 종합적으로

전개하여 제시한 밴드 음악의 교과서인 동시에, 3억 장에

달하는 전 세계 판매고를 세운 음악 산업계 베스트 스테디

셀러로서, 레드 제플린의 가치를 결코 폄하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안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낸 로버트 플랜트는 영원히

위대한 보컬리스트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바이다.




(Korg Oasys)



(Bonham)






개인적으로 본 블로거가 최애하는 그들의 작품은 바로

5집에 등장한 애절한 발라드 The Rain Song이다. 이

양반들이 레몬송에서 섹드립 날리던 그자들 맞나 싶을

정도로 일순간 돌변하여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오후의

햇살처럼 아련한 아른거림으로 노래하는 걸 듣고 있자면,

또 존경하는 뮤지션 존 폴 존스께서 그토록 아름다운

멜로트론 음률을 빚어내는 것을 듣자면, 표절 때문에

열받은 마음을 눈 녹이듯이 스르르 녹여내는 것만 같다.



끝으로 레드 제플린 디스코그래피 전체 중 슬픈 아름다움을

노래한 비장미로서의 절정을 갈구한 명곡, 레인송을 강력

추천하며 길었던 포스팅을 마친다. 본조의 육중한 베이스

파운딩 오늘도 성가마냥 천국에 울려 퍼져 저승길 가는

망자들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 두드리고 있으리라.



('The Rain Song'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 studio album version


- lyrics




*키를 한껏 높인 79년 라이브. 존스 옹의 악기는 Yamaha GX-1.






"공감을 눌러 주시면 큰 힘을 얻습니다"


'rock vocalis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티브 페리 Steve Perry  (1) 2019.02.10
피터 세테라 Peter Cetera  (1) 2019.01.30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0) 2018.12.22
프레디 머큐리 0 - 보랩  (0) 2018.11.28
에이드리안 벨류 Adrian Belew  (0) 2010.04.22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