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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국의 대중음악을 규정하는 시대의 보스.

대통령도 FBI국장도 연준위원장도 아이비리그

종신교수도 실리콘밸리 창업자도 아니지만 모든

미국인이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극강의 존재.



한국으로 치면 송창식, 김현식, 김광석 정도로

치환할 수 있기에 국내 울타리에서 이분을 제대로

해석하고 접근해 즐기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비록 한국에서 지명도는 높지 않지만 음악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분인지라 용감하게 포스팅하련다.

미국 대중음악의 보스, 브루스 스프링스틴

Bruce Springsteen이시다. (1949~)











('Born in the U.S.A.' from eponymous album, 1984)



('Born to Run' from eponymous album, 1975)



('Hungry Heart' from the River, 1980)

*젊을 때만 해도 좀 잔망스런 스테이지 매너를 즐기셨다.



 (Born to Run)




송창식, 김현식, 김광석.. 이분들이 왜 훌륭한지

배경 지식 전혀 없는 외국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해.. 그냥 들어봐, 정도

멘트 말고는 별 말 안 나오지 않나.



보스라는 별명의 이분이 미국인에게 가지는 위상은 대략

이런 위치이다. 어느 순간 가슴 속에 절절하게 찾아든

존재감으로 말로 수식하지 않고 그냥 느끼는 존재..?



50년대 후반 이후 출생한 대부분 미국인들이 그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 보면 대략 옳다. 아 물론, 내륙 중서부 러스트

벨트 백인들로 한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딴지 거는

사람도 계시겠지만. 그의 성향 자체가 인종을 초월한

진보이기에 사실 딱히 그러하지도 않다고 본다만.



 (Darkness on the Edge of Town)



('Badlands' from Darkness on the Edge of Town, 1978)



('Dancing in the Dark' from Born in the U.S.A., 1984)



('Glory Days' from Born in the U.S.A., 1984)



(accordion)


(calliope)




보스가 설파하는 가사의 철학, 즉 저지 쇼어 지방의

토착 문화와 현지 서민 삶의 생생한 단편... 여기에다

그들의 삶에서 파생한 저지 쇼어 사운드란 서브장르...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여기서부터 잡아야 한다.



Jersey Shore.. 뉴저지 주의 대서양 연안 해안가 지구

가리키고 놀이공원 등 관광 명소와 특히 유서깊은 라이브

음악 클럽이 위치한 곳인지라 이곳을 거쳐간 뮤지션들이

부지기수이며 그들을 통해 Jersey Shore Sound

서브장르가 꽤 오래 전부터 생성 발전하였다.



 (glockenspiel)




블루스소울 같은 대중음악 뿐 아니라 이탈리아계 이민자

집단의 근현대 속악에서 영향을 받아 발전한 서브장르 가리켜

저지 쇼어 사운드라 하는데, 쇼어지구 위락시설에서 아코디언,

글로켄슈필칼리오페 같은 악기로 연주되던 춤곡 형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E스트리트 밴드 스코어의 중심축이 키보디스트

명의 역할로 자리잡은 배경이 바로 이런 지역 음악 특성 때문.



*글로켄슈필을 라이브에서 연주할 땐 실로폰처럼 말렛을 들고

타악기 형태로 하지 않고 위와 같이 첼레스타 케이스에 넣어서

건반악기 형태를 채택했다. 그런 이유로 키보디스트들이 연주를

도맡아 한 것. 위 Badlands 라이브 비디오 중간에도 Hammond

오르간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The River)



('Brilliant Disguise' from Tunnel of Love, 1987)



('Streets of Philadelphia' from Philadelphia OST, 1993)



('Nebraska' from eponymous album, 1982)




 (Nebraska)




사실상 대개의 미국인들이 보스의 음악에 마음을 쏟는 요인은

음악의 형식보다 진심을 가득 담은 가사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가사의 중심 내용으로서 쇼어지구에서 성장한 언더독 세대의

소외감이나 좌절감 또는 낭만적 정서를 대단히 서정적으로

표현하는데 탁월한 점이야말로 보스의 엄청난 매력이다.



스프링스틴 가사의 특징으로 일정한 서사성을 갖춘 완결된

스토리텔링 구조를 빼놓을 수 없다. 어떤 노래를 듣든지간에

그 안에 주인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완성된 이야기가 있어

소외된 평범한 미국 서민들에 공감할 구조를 제공하는 것.



 (Born in the U.S.A.)




Born to Run웬디, Thunder Road메리, Nebraska

살인마 찰스, Tenth Avenue Freeze-Out배드 스쿠터,

Badlands의 재수 옴붙은 남자, Rosalita로잘리타, The Ties

That Bind의 가련한 여인, Independence Day의 아버지와

아들, 4th of July Asbury Park샌디 등 미국 음악사상

유명한 캐릭터가 죄다 그의 음악에 나온 인물들이다.



이 중엔 보스 본인이 창조한 캐릭터도 있고 다른 이야기에서

끌어온 주인공도 있다. 공통점은 미국의 현대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소수자들이란 점. 평범한 음악 팬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소구점이 창작자의 이런 배려에 있는 셈이다.



 (Tunnel of Love)



('Tenth Avenue Freeze-Out' from Born to Run, 1975)



('Independence Day' from the River, 1980)



('The Ties That Bind' from the River, 1980)



(Human Touch)




항상 어깨에 Fender Telecaster를 들쳐매고 통기타

가득 찬 음악을 평생에 걸쳐 불러온 점은 전술한 한국의

가객들과 묘한 공통점이 있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몰라서

그렇지, 세 가객들 기타 솜씨는 가히 명불허전이다. 특히

한창 때 송창식 선생의 라이브 실력은 까무러칠 수준.)



스프링스틴의 음악은 어쿠스틱 기타 또는 피아노백킹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다. full편성 밴드가 연주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하며 듣지만 왠지 머리 속으로 밴드를 지우고

기타 스트러밍을 치환하여 연상케 하는 작용을 한다고 할까.



(Fender Telecaster)




아마도 그의 철학이 구상하는 하트랜드 락이란 장르의 기본

밑그림이 어쿠스틱 악기의 심플한 백킹을 바탕으로 초기 락앤롤,

블루스컨트리, 포크, 소울의 정신을 구현하는데 있었던 듯.



밥 시거,  페티, 존 멜런캠프, 존 포거티, 멜리사 에쓰리지

등 같은 장르를 다져온 선후배들이 그러했듯이.. 하트랜드

말엔 내륙이나 중심지 말고도 미국인의 진심에 다가선다는

뉘앙스도 있을 터이니. - 모두 한국에서 지명도가 떨어지는

가수들이란 공통점도 공유하는군.



('My Hometown' from Born in the U.S.A., 1984)




또한 밴드 음악을 접근하는 그의 독특한 어프로치와 관련도

다. 스튜디오 레코딩에서 메기타는 항상 보스 자신이

친다.. - 이거 깨닫지 못한 사람이 은근 많지만. 기본적인

리프어프로치는 본인이 작곡을 통해 창조하는 것이다.

리더로서의 기본 소임이랄까.



하지만 기타리스트로서의 에고를 지나치게 고집하지 않고

나머지 상당 부분 어프로치를 세션 밴드 멤버들에게 넉넉히

일임한다는 점이 다른 일반적 리더들과의 차이점인 것 같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50~90% 이상 지분을 차지하며 그의

음악을 채워온 오랜 동반자는 그 유명한 E스트리트 밴드.



('The River' from eponymous album, 1980)




계에서 가장 유명한 백킹 밴드의 구심점은 음악사에 길이

빛나는 몇몇 연주자들. 키보디스트 로이 비턴 대니 페데리치,

드러머 맥스 와인버그, 색소포니스트 클레런스 클레먼스 등이다.

베이시스트 게리 탤렌트 기타리스트 닐스 로프그렌까지도.



나중에 연기를 겸업하신 기타리스트프로듀서 스티븐 밴 잰트

(소프라노스에 나오신 그분)에, 이스라엘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수키 라하브, 초기엔 키보디스트 데이빗 생셔스 계셨지. 물론

보스의 아내가 되신 보컬리스트 패티 스캘퍼도 잊으면 안 된다.

어떻게 이런 보석같은 멤버들을 다 끌어모을 수 있었을까.



('Cover Me' from Born in the U.S.A., 1984)



('Atlantic City' from Nebraska, 1982)




(Bittan & Federici)




세션 멤버들 중 버팀목 역할을 하는 사람은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한 49년생 로이 비턴. 비턴페데리치 두 분프레이징

사운드를 채우는 형식론이야말로 보스 음악의 핵심적 어프로치

기법이다. 본래 70년대 초반까지 저명한 데이빗 생셔스 그

역할을 수행하다 대체 멤버로 뿌리를 내린 연주자가 비턴이다.



디지털 드림 도어 키보디스트 랭킹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로이

비턴그렉 올맨, 맥스 미들턴, 니키 홉킨스, 척 리벨, 빌리 파웰,

이언 맥레건 등 동시대 컨트리-블루스 연주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뿐 아니라 루츠 음악에 뿌리를 둔 어프로치를 몇 세대에 걸쳐

꾸준히 발전시켜온 동종업계의 명인으로 높게 평가받는다.



(Yamaha Concert Grand)



특유의 맑고 깔끔한 톤 때문에 라이브에서 로이 비턴Yamaha

Concert Grand를 즐겨 사용하는 것은 이젠 널리 알려진 뒷얘기.

글로켄슈필이란 악기로 독특한 뉴저지 사운드를 메이킹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


(Digital Dream Door's ranking on 100 Rock Keyboardists)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keyboard.html


(Top 10 Roy Bittan & Bruce Springsteen tracks)

http://ultimateclassicrock.com/roy-bittan-bruce-springsteen-songs/



('She's the One' from Born to Run, 1975)



 (Weinberg)




라이브마다 무대 정중앙에 보스의 등뒤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쏘며 한치의 오차없는 비트를 공급하는 51년생 맥스 와인버그

역시 밴드의 심장처럼 중한 멤버이다. 99년 락앤롤 명예의 전당

헌액 연설에서도 보스가 가장 신임하는 동료로 극찬하였다.



롤링 스톤 매거진의 드러머 랭킹에서 55위, 디지털 드림 도어

락드러머 랭킹에서 46위를 차지할 정도로 와인버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도 넘쳐난다. Born in the U.S.A. 트랙 인트로

청자의 심장에 바로 내리꽂는 스네어 파운딩 비트는 최고의

상징적 업적으로 음악사에 영원히 빛나리라 의심치 않는다.



코난 오브라이언투나잇쇼에서 열심히 추임새 음악 넣던

바로 그분 맞다. E스트리트 밴드 활동과 죽 겸업하셨다고.

덕분에 미국 젊은 층에게도 인지도가 높으시다네.


(Rolling Stone Magazine's 100 Greatest Drummers)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drummers-of-all-time-77933/max-weinberg-142591/


(Digital Dream Door's ranking on 100 Rock Drummers)



('Prove It All Night' from Darkness on the Edge of Town, 1978)



(Clemons)




영원한 '빅맨' 42년생 클레런스 클레먼스E스트리트 밴드

같은 연주자이다. 덩치도 남산 만한 다 큰 어른께 마스코트

..라 칭하기는 좀 그렇지만 주로 테너 색소폰으로 드라마틱한

선율을 뽑아 리드하는 그의 솔로 프레이징보스 음악의

시그니처 톤이 아니라 할 수 없다.



한국에서 인지도는 안습이지만 Born to Run색소폰

솔로 파트는 미국 등 전세계에서 수십 년간 초대박 인기로

대중의 기억에 오래 각인된 히트 선율이다. 한국으로 치면

Careless Whisper 급인 건데 외국에선 제리 래퍼티

Baker Street와 함께 색소폰 하면 떠오르는 명곡이라고.

그 유명한 파트 연주를 하신 분이 바로 클레먼스인 것.



안타깝게도 11년에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지라 이제 더

이상 클레먼스의 시원한 연주를 들을 수 없다. RIP..


(Top 10 Clarence Clemons & Bruce Springsteen tracks)



('Baker Street' by Gerry Rafferty,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Fo6aKnRnBxM


('Careless Whisper' by George Michael, 1984)

https://www.youtube.com/watch?v=xQ9KuQQDEow



('Jungleland' from Born to Run, 1975)



('The Promised Land' from Darkness on the Edge of Town, 1978)



('I'm on Fire' from Born in the U.S.A., 1984)



('I'm Goin' Down' from Born in the U.S.A., 1984)




 (Greetings from Asbury Park, N.J.)


 (The Wild, the Innocent & the E Street Shuffle)




그가 처음부터 보스는 아니었고 73년 1~2집까지는 무한한

포텐셜만 인정될 뿐 상업적 성공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래도

몇몇 트랙은 평론가들로 하여금 파릇파릇한 신인의 음악성이

만만히 볼 수준이 아님을 강조하기엔 충분했다.


('Blinded by the Light' from Greetings,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j9Kl3HvJ7os


('4th of July, Asbury Park - Sandy' from the Wild the Innocent,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PttLzg-z7Qk


('Rosalita - Come Out Tonight' from the Wild the Innocent,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nOE_fJGWjVA




드디어 75년 Born to Run 앨범이 북미 전역을 강타하여

그를 메인스트림의 주인공으로 격상시킨다. 발매 1년 전

보스턴의 음악 평론가 존 랜도가 새파란 신인의 공연을 보고

'락앤롤의 미래를 보았으며 그 이름은 스프링스틴이다'며

기고한 일은 이젠 너무 유명한 이야기. 심지어 랜도는 이후

하던 일 때려치고 극찬한 그 신인의 프로듀서로 전업했다지.



타이틀 트랙을 포함해 Tenth Avenue Freeze-Out,

She's the One, Thunder Road, Jungleland

히트 트랙이 줄지어 터져나왔다. 멀티 플래티넘을 찍은

앨범이 빌보드 차트 3위까지 올랐고 3집의 거의 모든

트랙이 아직까지도 각광받는 단골 셋리스트 대상이다.



('Tunnel of Love' from eponymous album, 1987)




앨범의 성공으로 투어에 매진하고 있던 차 법률 소송 문제에

휘말려 3년간 스튜디오 작업을 못한다. 78년 가서야 Darkness

on the Edge of Town 앨범을 발매. 트리플 플래티넘 기록을

이어가며 평단과 팬덤의 열광적 지지를 얻었고 Badlands,

Prove It All Night, The Promised Land히트시킨다.



최초로 그를 그래미 후보로 올린 80년 더블 앨범 The River.

존 랜도스티븐 밴 잰트가 공동 프로듀스하여 처음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을 밟은 성공작이다. 그의 시그니처

이 된 메가히트곡 Hungry Heart를 비롯, 앨범의 진중한

정서를 대표하는 The River, Independence Day 등이

팬덤의 고른 성원을 얻는데 성공한다.



82년 발표한 Nebraska포크 구성이 전반을 지배하며

스프링스틴 혼자서 4트랙 홈레코딩으로 작업한 작품으로

전작에서 이어진 무겁고 어두운 정서가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두드러지는 문제작이다. Nebraska와 Atlantic City

등 주요곡이 대체로 범죄자들 이야기를 담고 있어 작사의

철학과 세계관이 한층 깊어지고 있음을 반증한다.



('Human Touch' from eponymous album, 1992)




84년 Born in the U.S.A.에 이르러 그전부터 관심 두던

베트남전 참전 용사들의 사회 부적응 문제를 본격적으로

터뜨렸으며 본작은 아시다시피 보스 앨범 중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남는다. 판매고만 1천 5백만이 넘어 다이아몬드

인증을 받고 85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 후보로 오르며

발매한 7개 싱글 모두 차트 탑텐에 올린 초대박 성공작.



Born in the U.S.A., Dancing in the Dark, Glory

Days, Cover Me, My Hometown, I'm on Fire, I'm

Goin' Down 등 그냥 수록된 전 트랙이 미국 대중음악사

명곡으로 남았다고 이해하면 쉽다. 한국으로 치면 유재하

앨범 정도에 해당할까.. 한 마디로 버릴 곡이 없는 명반.

꼭 들어보시라. 두 번 들으시라.



아 글고.. Born in the U.S.A.는 '나도 미국 놈이라고~

(근데 대접이 왜 이 모양이야)' 하는 시니컬푸념조의

가사이니까 선거 캠페인 송으로 절대 쓰지 말라고들..

특히 공화당. 보스가 깜놀하신다.



86년에 나온 Live 1975-85제플린으로 치면 Song

Remains~급의 최전성기 라이브 앨범으로서 자그마치

13x 플래티넘을 찍은 또 하나의 초대박 작품. 이 앨범과

95년 Greatest Hits보스가 가장 전성기일 때 최고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어 스튜디오 앨범이 아님에도 팬덤이

은 최고의 아카이브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Live 1975-85)



(Greatest Hits)




87년 8집 Tunnel of Love는 상대적으로 E스트리트 밴드

색깔을 많이 뺀 지극히 개인적인 작품으로 타이틀 트랙

Brilliant Disguise 등 히트곡을 냈고 실패한 첫 결혼 등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앨범이다. 본작으로 88년에

그래미 상도 탄다. (첫 그래미는 85년에 수상.)



이밖에 90년대엔 Human Touch를 히트시킨 동명의 9집

앨범이나 94년 탐 행크스 주연 영화 필라델피아의 주제가로

오스카 상을 수상한 Streets of Philadelphia 등 작품으로

여전한 인기를 이어간다. 96년엔 숀 펜 주연 영화의 사형수

스토리로 Dean Man Walkin'을 히트시키기도.



95년 앨범 The Ghost of Tom Joad는 오랜만에 포크

을 불러와 건재함을 알린 앨범이며, 02년 The Rising

10년간 떨어져 있다 99년에 E스트리트 밴드와 재결합하여

18년만에 맞은 앨범 성공작이기도 하다.



('Dead Man Walkin'' from eponymous OST, 1996)

*96년 68회 아카데미 어워드 시상식에서 직접 부른 버젼이다.



('Secret Garden' from Greatest Hits, 1995)




한편 70년대 후반에 소송으로 앨범 작업을 못할 때쯤

보스는 다른 가수와 협업하는 유명 히트곡 작곡가로도

활동했다. 그 중 펑크의 대모 패티 스미스 선사한 곡이

가장 유명하고 맨프레드 맨s 얼쓰 밴드포인터 시스터즈

등과의 협업도 선풍적 인기를 끌어온 바 있다.



Blinded by the Light는 사실 스프링스틴데뷔 앨범

실린 트랙인데. 본인은 히트 못 시키고 실력파 키보디스트

맨프레드 맨에게 주어 빛을 보았다. 쩝.


('Blinded by the Light' by Manfred Mann's Earth Band,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lcWVL4B-4pI


('Fire' by the Pointer Sisters,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cCOBp1Lrlf4


('Because the Night' by Patti Smith,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6OjW1TDANxk



*락앤롤 명예의 전당 25주년 기념 공연에서 U2 및 패티 스미스와 공연했다.




*Dancing in the Dark, studio version



*Badlands, studio version



*Hungry Heart, studio version



*Born to Run, studio version



*Born in the U.S.A., studio version






반복하지만 한국에서는 지지리도 인기가 없는 분이다.

가사와 정서가 중요한 가수이니 한국인이 공감할 만한

요소가 거의 없어 인기가 있는 것이 이상할 터. 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름은 유명한 분인데 왜 그토록 대단한지

이해를 새롭게 하는 계기만 만들었다면, 뭐 만족한다.

그래도 이 분의 세계 음반 시장 실적이 자그마치 1억

4천만 장에 달한다는 사실은 기억해달라..



본 블로거가 가장 좋아하는 트랙을 하나만 꼽으려니 참

망설여지는데 역시 Born to Run 앨범에서 가장 혁신적인

작편곡 구성으로 뒤통수 맞는 듯한 기분을 느꼈던 이 곡이

가장 좋을 것 같다. 롤링 스톤 매거진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중 86위로 집계한 Thunder Road.



(Rolling Stone Magazine's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500-greatest-songs-of-all-time-151127/bruce-springsteen-thunder-road-44121/



잘 들어보면 유행가의 전형적 양식인 verse-chorus

구조를 한창 벗어난 변칙 구성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딱히 후렴구라 할 만한 악절이 없음에도 텐션을 고조시켜

코다로 넘어가는 작편곡 기법이라니..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름값이 고스톱 쳐서 딴 거 아님을 여실히 느낄 수 있을 터.



여담이지만 "네가 안 예진 몰라도 난 괜찮아"란 가사에 젊은

시절 줄리아 로버츠가 엄청난 감동과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가사 내용이 뭐냐고? 갓 학교 마친 뉴저지 젊은 남녀의 흔한

"시골 너무 깝깝해. 오빠 믿지? 서울 가자." 스토리이다.

멋진 곡을 강추로 띄우며 포스팅을 마친다.



('Thunder Road' from Born to Run, 1975)

*Thunder Road, studio version



*미니멀라이징한 75년 런던 라이브 버젼. 피아노에 Roy Bittan. CP-70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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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무려 롤링 스톤즈제프 벡과 동기로 음악을

시작했는데 여전히 팔팔한 현역으로 정력적인

성과를 현재 진행형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분.



허스키 비음 섞여 할퀴듯이 귀청을 는 = raspy

특유의 보이스 텍스처로 유명하여,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한 번 듣고 누군지 못 알아채는

사람은 절대 없는 독창적 캐릭터의 소유자.



이렇게 대단함에도 수십 년간 한국에서의 인지도가

고작 히트곡 한둘에 그쳐 많은 관계자를 까무러치

만드는 분... 이번 포스팅의 주인공은 45년생 영국의

락 싱어 로드 스튜어트 Rod Stewart올시다.











그의 영국 내 차트 성적은 놀랍다. 앨범 차트 정상 기록을

연속으로 여섯 앨범에 걸쳐 거두었62개 싱글 히트

31곡은 탑텐에, 6곡은 탑을 찍었다. 미국 핫100 차트에선

16개 탑텐 싱글을 기록해 그 중 4곡이 정상에 오른 것.



롤링 스톤 선정 대를 초월하는 100명의 위대한 가수들

59위, 영국 Q 매거진의 07년 랭킹에선 33위에 올랐고,

94년 미국 락앤롤 명예의 전당 헌액, 06년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에다 70년대 소속 밴드 페이시즈 이름으로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12년 다시 한 번 헌액되었으며, 16년에는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서임받기까지 했다.



(롤링 스톤 매거진)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rod-stewart-3-45919/


(Q 매거진)

http://www.rocklistmusic.co.uk/qlistspage3.htm





스코틀랜드 혈통 부계와 잉글랜드 혈통 모계 사이에서

태어나 런던 중류층 신문 매점집 늦둥이 막내로 큰 그는

3부 리그 입단 테스트도 받을 만큼 한때는 가수가 될지

축구선수가 될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네.



아버지와 가족들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EPL 아스날 FC

서포터였고 지금도 공연마다 멋진 킥으로 관객에게 공을 뻥뻥

차날리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성인이 된 후엔 셀틱 FC

스코틀랜드 A매치 대표팀으로 갈아탔다고.



리틀 리처드, 빌 헤일리, 에디 코크란을 들으며 락앤롤

눈을 떴고 청소년기에 우디 거스리밥 딜런 및 브리티쉬

포크 음악을 들으며 깊게 영향을 받았기에 이런 흔적이

70년대 초중반 히트 튠에 짙게 배어있다.



('Reason to Believe' from Every Picture Tells a Story, 1971)

*히트 싱글의 B사이드로 영미 양국 싱글 차트 탑에 올랐다.



('You Wear It Well' from Never a Dull Moment, 1972)

*영국 싱글 차트 탑, 미국 핫100 차트 탑20까지 올랐다.




청소년기인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은 영국 전역에

비트닉이나 모드 같은 서브컬처가 젊은 세대를 지배하던

때였다. 스튜어트도 여기에 적극 동참했고 껄렁껄렁 좌파

시위대 쫓아다니다가 여자애 임신시킨 흑역사도 있었다.ㅜ



또 이때부터 포크 그룹을 전전하며 하모니카와 노래를

겸하는 버스킹에 열을 올렸고 많은 뮤지션들과 교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대에서 오티스 레딩이 노래하는 모습에

뻑가버려 샘 쿡 등 당대의 소울R&B 장르에 매료되고

후일 블루스 바탕의 음악성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Twistin' the Night Away' from Never a Dull Moment, 1972)


*샘 쿡의 오리지널과 비교

https://www.youtube.com/watch?v=zTArYTvpLZA



('Angel' from Never a Dull Moment, 1972)

*지미 헨드릭스 유작을 커버하여 핫100 탑40까지 올랐다.


**지미 헨드릭스의 오리지널과 비교

https://www.youtube.com/watch?v=EaRFxrDAR-A




20대 초반에 이후 평생 친구로 남은 롱 존 볼드리 같은 블루스

뮤지션과 교류하며 처음으로 돈을 버는 뮤지션의 길을 걷는다.

볼드리 등과 엮여 스팀패킷이란 밴드를 거쳤고 후에 플리트우트

을 결성한 믹 플리트우드피터 그린과는 샷건 익스프레스

밴드로 짧게 만났으나 성공적이진 못했다. 그래도 64년 최초의

솔로 싱글 레코딩을 출시하는 성과는 있었다. 흥행은 별로였다.



67년초에 야드버즈에서 쫓겨나 독자적 밴드를 모색하고 있던

한 살 위 제프 벡을 만나며 커리어의 전환점을 맞는다. 전설로

남은 제프 벡 그룹보컬리스트로 발탁된 것. 당시 베이스 치던

로니 우드, 키보드니키 홉킨스와, 드럼믹 월러 함께.

얼핏 봐도 후덜덜한 멤버들이다.



JBG 경험은 그에게 크게 세 가지를 남겼다. 첫째 제프 벡

경쟁 아닌 경쟁 같은 플레이를 펼치며 향상된 보컬 프레이징,

둘째 평단의 긍정적 평가와 미국 시장에서 향상된 인지도,

셋째 로니 우드라는 평생의 친구이자 동료가 그것이다.

(롤링 스톤즈의 그 분 맞다.)



이들의 미국 시장 앨범 성적은 그럭저럭 중박은 되었지만 정작 

리더인 과 뭔가 궁합이 안 맞는 느낌이 들어 탈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경험이란 자산을 얻은 채라 희망이 보였다.



('I've Been Drinking' by the Jeff Beck Group, 1968)

*JBG 활동시 싱글로 발매한 곡. R&B 영향이 짙다.



('You Shook Me' by the Jeff Beck Group, 1968)

*윌리 딕슨의 고전을 커버한 것


**레드 제플린의 커버 버젼과 비교하면 재미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S1Tz6dzcjU



('All Shook Up' by the Jeff Beck Group, 1969)


*원곡은 유명한 엘비스 프레슬리의 히트곡

https://www.youtube.com/watch?v=3rQEbQJx5Bo




68년, JBG 활동을 지켜보던 관계자에게 픽업되어 솔로

앨범 계약을 처음으로 맺었는데 여차저차하여 녹음 진행이

더뎌지는 사이 페이시즈의 새 라인업에 친구 로니 우드

가담한다 하자 이에 동참한다. 보컬스튜어트, 우드

기타, 키보드이언 맥레건, 드럼케니 존스까지..

JBG만큼 훌륭한 멤버 구성이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솔로페이시즈 활동을 병행하는

구조였는데 솔로 2집까지는 밴드에서 성적이 상대적으로

더 나은 편이었다. 페이시즈는 수 년 후 브리티쉬 펑크락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밴드로서 롤링 스톤즈처럼

블루스에 기반을 둔 탄탄한 사운드가 일품이었다.



점차 스튜어트의 진가가 대중들에게 발견되자 페이시즈

활동의 비중이 줄어가게 되고 75년경 우드롤링 스톤즈

기타로 옮겨가게 되자 결국 해체 수순을 밟는다. (맥레건

스톤즈세션으로 갈아타서 한창 유명세를 떨쳤다.)



페이시즈에서 그의 활약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해산 무렵인 74년 런던 공연 실황을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rK_wPCQCVRY

*여기 등장하는 동양인 베이시스트는 일본 분 Testu Yamauchi.



('Stay with Me' by Faces, 1971)

*미국 핫100 탑20, 영국 차트 탑텐까지 올랐다.




오늘날의 로드 스튜어트를 만들어내는 데 디딤돌을 괸

역작은 71년 3집 Every Picture Tells a Story 앨범.

비로소 그의 인지도가 세계적으로 퍼지는 계기가 된다.

동명의 타이틀 트랙도 괜찮았지만 영미 양국에서 싱글

에 오른 대박 히트곡 Maggie May의 역할이 컸다.



흘러간 팝송으로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인데

한국에도 처음 이 노래로 알려졌다. 연상녀와의 뜨거운 관계

끝에 남는 것 하나도 없더라는, 다분히 자전적인 연애담이

내용이고, 메기 메이란 제목 자체는 대항해 시대 영국 민속

음악에 전승되던, 선원들 등쳐먹는 창녀 이름에서 따왔다고.



오늘날까지도 스튜어트시그니처 송이며 롤링 스톤 선정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곡 중 당당히 131위를 차지했다.



(Every Picture Tells a Story)



('Every Picture Tells a Story' from eponymous album, 1971)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by the Rolling Stone Magazine)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500-greatest-songs-of-all-time-151127/rod-stewart-maggie-may-70210/



('Maggie May' from Every Picture Tells a Story, 1971)

*Faces 멤버들 여기 다 나온다. Ronnie Wood에 Ian McLagan까지.



(14년 비냐델마르 페스티벌 중. 무서우리만치 정정하시군.)

*만돌린을 연주하는 세션 멤버는 J'Anna Jacoby.




75년 6집 Atlantic Crossing 앨범도 괜찮은 성적과 평가를

받았고 무엇보다 오늘날까지 셋리스트에 빠짐없이 올라오는

그의 히트 트랙 두 곡이 나온다. 바로 I Don't Want to Talk

About ItSailing.



두 곡 다 커버곡이다. 이쯤 되면 눈치 챘겠지만 그냥저냥 묻힐

만한 어중간한 곡을 발굴해 자신만의 프로듀싱을 입혀 새로

재해석하고 히트 튠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그의 주특기이다.



특히 세일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에서 로드 스튜어트 하면

떠오르는 거의 유일한ㅠ 대표곡이기도. 이 곡이 한국에서만

인기있다고 오해하는 사람을 가끔 봤는데 그렇지 않다. 영국

싱글 차트 탑에 올랐고 유럽과 중남미에서도 인기가 높다.



(Atlantic Crossing)



('I Don't Want to Talk About It' from Atlantic Crossing, 1975)

*옆에 여가수는 글래스고 출신 후배로서 이 곡을 커버한 적 있는 Amy Belle.


**젊었을 적 라이브는 아래에.

https://www.youtube.com/watch?v=esUHMBHJsn8



('Sailing' from Atlantic Crossing, 1975)




76년 7집 A Night on the Town은 그때까지 가장 큰 성공을

가져다준 앨범이다. 미국 앨범 차트 2위까지 올랐고 싱글 차트

을 찍은 Tonight's the Night (Gonna Be Alright)

배출했으며 첫 플래티넘 기록 앨범이 된 것.



76년 연말 집계 정상에도 오른 Tonight's the Night70년대식

낭만의 정수를 표현한 섹드립 송가인지라 미성년자는 가사에 주의..

The First Cut Is the Deepest는 포크 싱어 캣 스티븐스

곡을 커버해 인기를 끌었고 The Killing of Georgie는 실제

있었던 게이 배우의 비극적 죽음에 대한 가사이다.



(A Night on the Town)



('Tonight's the Night' from A Night on the Town, 1976)

*이 노랜 비디오도 19금. 미성년자 주의.



('The First Cut Is the Deepest' from A Night on the Town,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c5NRH_DxWJE


(The Killing of Georgie from A Night on the Town, 1976)

https://www.youtube.com/watch?v=95zxtaKQBBc




77년 8집 Foot Loose & Fancy Free 앨범은 계속 자기

복제가 늘어가는 점 때문에 평가는 박했지만 히트 트랙을 많이

배출했다. 드럼카마인 어피스를 필두로 기타에 게리

그레인저짐 크리건, 베이스 필 첸 등 새로이 로드 스튜어트

그룹을 조직하여 하드락에서 funk, 발라드, 프로그레시브

다양한 사운드를 실험해내기도 했다.



강렬한 비트를 구성한 Hot Legs, 축구 팬심을 살짝 드러낸

You're in My Heart, 슈프림즈 곡을 커버한 바닐라 퍼지

대한 커버 You Keep Me Hanging On, 올타임 셋리스트

팬덤에서 인기가 높은 I Was Only Joking 등이 히트했다.



(Foot Loose & Fancy Free)



('I Was Only Joking' from Foot Loose & Fancy Free, 1977)

*90년대 언플러그드 버젼



('Hot Legs' from Foot Loose & Fancy Free, 1977)

*미성년자 주의


(또 하나의 전설 티나 터너와 81년에. 비틀즈의 Get Back 및 Hot Legs.)

https://www.youtube.com/watch?v=jQGGlMRBKHs



('You're in My Heart' from Foot Loose & Fancy Free,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Q6Ns2MCy9qE


('You Keep Me Hanging On' from Foot Loose & Fancy Free,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jK4iKWpgfyo




78년 9집 Blondes Have More Fun이 거둔 성과는

또 한 번 놀라웠다. 스튜어트 70년대 디스코그래피 중

최고의 히트 싱글이자 여전히 시그니처 튠Da Ya

Think I'm Sexy가 수록된 앨범이 바로 이것.



앨범은 미국 차트 탑을 포함해 7개국서 1~2위에 올랐고

트리플 플래티넘 기록에다 위 싱글만 별도로 플래티넘을

기록하며 영미 양국과 캐나다, 호주 등지차트 탑을 기록..



(Blondes Have More Fun)




세계구급 히트곡이 된 Da Ya Think I'm Sexy카마인

어피스의 제안으로 만들어낸 본격 디스코 튠. RSG 멤버

각각의 창작 능력이 일정한 궤도에 올랐고 이를 조율하는

스튜어트프로듀싱 감각이 물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기존 블루스락을 외면하고 디스코 열풍에 편승한 죄 아닌

죄로 앨범에 대한 평가는 박했다. 더우기 Da Ya Think~

버스리프에서 표절 시비에도 휘말려 법정 합의까지 가는

수모도 겪었다고. 결국 판매 수익을 유니세프 기금으로

헌납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Da Ya Think I'm Sexy' from Blondes Have More Fun, 1978)

*Carmine Appice, Minimoog, CP-70 등 시대의 명물이 모두 등장..

** 여기 등장하는 동양인 베이시스트는 중국계 자메이카인 Phil Chen.



('Blondes' from eponymous album,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HCjPDonlvjA

*필첸 형님 방방 뛰어다니시던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십니까.


('Ain't Love a Bitch' from Blondes Have More Fun,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v-gs_8aPxuY

*전형적인 스튜어트식 발라드 문법의 곡



(Minimoog Model D)



(Yamaha CP-70)




80년대가 되어 모든 가수가 그러하듯 뉴웨이브의 파도를

피하지 않았다. 80년 10집 Foolish Behaviour, 81년 11집

Tonight I'm Yours의 두 앨범 모두 디스코에서 신스팝으로

넘어가는 시대적 흐름을 보여주었으나 평가나 흥행면에선

약간 뒤로 물러선 모양새였다.



10집에서 Passion은 여전한 싱글 차트 강세를 이어나가서

빌보드 핫100 5위를 비롯하여 각국 랭킹의 상단에 올랐고

11집 Young Turks신디사이저 리프를 앞세워 핫100

5위 등 비슷한 정도의 흥행을 기록했다. RSG의 주요 멤버

키보디스트 케빈 세비거가 이 무렵에 합류하기도.



('Passion' from Foolish Behaviour, 1980)



(Tonight I'm Yours)



('Young Turks' from Tonight I'm Yours, 1981)

*연출은 러셀 멀케이 감독. 젊은 Kevin Savigar도 등장.



('Tonight I'm Yours' from eponymous album,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TEy6vnHbgpo




83년 12집 Body Wishes, 84년 13집 Camouflage,

86년 14집 Every Beat of My Heart에 이르기까지 수

년의 기간은 꾸준하게 싱글 히트는 기록했어도 사실상

예전만큼의 앨범 완성도와 흥행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12집에서 Baby Jane영국 싱글 차트 탑을,

13집에서 Infatuation미국 핫100 탑텐을, 14집

Love Touch핫100 탑텐을 각각 기록하며 선전했다.



이 시기의 수확이라면 현재까지도 꾸준하게 셋리스트

오르는 13집Some Guys Have All the Luck

얻어낸 것이 아닌가 싶다.



('Some Guys Have All the Luck' from Camouflage, 1984)



('Baby Jane' from Body Wishes,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dxl2r6GuL2w


('Infatuation' from Camouflage, 1984)

https://www.youtube.com/watch?v=GGKtqbmHSos

*오랜만에 조우한 Jeff Beck이 기타 세션을 해줬다.


('Love Touch' from Every Beat of My Heart, 1986)

https://www.youtube.com/watch?v=SCAJqv0nrbA




88년 15집 Out of Order 역시 공동 프로듀싱을 맡은

파워 스테이션의 색이 너무 짙다며 평은 좋지 않았다.

이 시기 스튜어트는 싱글 히트곡으로서 Forever

Young, My Heart Can't Tell You No, This Old

Heart of Mine, Downtown Train 등을 낸다.



('Forever Young' from Out of Order, 1988)



('Downtown Train' from Storyteller I, 1989)




90년대의 스튜어트는 91년 16집 Vagabond Heart 중

Rhythm of My Heart, 93년 라이브 앨범 Unplugged

... and Seated에서 밴 모리슨의 곡을 커버한 Have I

Told You Lately같은 해에 스팅브라이언 애덤스

함께 한 All for Love가 히트의 인연을 이어갔다.



Forever Young, Downtown Train, Rhythm of My Heart..

흥행 면에선 점점 어중간해지는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그럴수록 더 원숙한 감성이 잘 스며들어 팬덤의 마음을 보듬고

이런 곡들이 지금까지도 오랜 사랑을 받는 점 또한 사실이다.



('Rhythm of My Heart' from Vagabond Heart, 1991)



(Unplugged... and Seated)



('Have I Told You Lately' from Unplugged... and Seated, 1993)



('All for Love' by Rod Stewart, Sting and Bryan Adams,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n-AB7RJpOjY




94년 브라질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열린 송년 공연에 자그마치

350만 명의 관객을 운집시켜 기네스북에도 오른다. 02년엔

전세계 누적 판매고 1억 돌파를 인증받기도. 이룰 것은 다

이룬 듯 황제처럼 안락해질 만도 한 그이지만..



2천년대에 스튜어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Great

American Songbook이라 하여 20세기 전반기 대중음악

고전 스탠다드 노래를 재해석하여 몇 개의 시리즈 앨범

걸쳐 집대성하는 대장정에 돌입한 것. 그것도 환갑을 앞두고.



02, 03, 04, 05, 10년에 다섯 장의 스탠다드 송북 앨범

발표하고 06년엔 락 클래식 앨범, 09년엔 소울 스탠다드

앨범을 잇달아 발매한다. 시대를 풍미한 노장 음악가가 그간

바탕이 되온 음악 세계를 총결산하는 대작업을 수행한 것.

평단과 대중은 기립박수를 보낼 수밖에.



('The Way You Look Tonight' from It Had to Be You, 2002)




말년의 행보와 지금까지 기술한 내용을 읽으면 알겠지만
로드 스튜어트란 뮤지션을 구성하는 장르적 인자는 초기
락앤롤모타운 사운드에 기초한 소울R&B, 블루스
블루스락, 여기에 영국과 미국의 모던 포크 컨트리
블루스 등을 섞은 영역이라 하겠다.


비틀즈보단 거칠고 투박한 스톤즈에 더 가까운 성향이고 실제
롤링 스톤즈 진영으로 넘어가는 뮤지션들과의 교류가 전반적
음악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자신이 비르투오소적인
연주 능력을 갖춘 것은 아니기에 기교를 갖춘 세션 멤버들을
유기적으로 엮어 맛깔나는 음악으로 조율해내는 프로듀싱
능력에서 탁월한 강점을 보여왔다.


어찌 보면 창작 능력 자체도 평범한 정도에 불과한지 몰라서
자신의 단점을 보완해 공동 작곡에 참여하고 투어에 뛰어들
양질의 뮤지션들을 얼기설기 꾸려나가는 것이 커리어 전반에
걸쳐 핵심이었을 터이고 강한 인간적 친화력을 바탕으로
이런 점을 성공적으로 영위해온 셈이다.


극강의 테크닉을 가진 보컬리스트는 아닐지 몰라도 체력을
바탕으로 크게 기복이 없이 허스키고음역을 소화하고 꽤나
매력적인 스테이지 매너를 갖추었다는 면에서 한 시대를 능히
주름잡을 만한 싱어로서의 캐릭터를 구축하기엔 충분했다.


*Da Ya Think I'm Sexy

(14년 비냐델마르 페스티벌 중에서)



*Sailing

(04년 로열 알버트 홀 공연. One Night Only!란 라이브 앨범으로도 나왔다.)



*Young Turks

(81년 라이브. 키보드엔 Kevin Savigar.)



*Passion

(89년 아르헨티나 라이브. 색소폰에 Jimmy Roberts.)



*Forever Young

(89년 칠레 라이브)






본 블로거가 가장 높게 평가하는 로드 스튜어트의 시대는

카마인 어피스 같은 거장 세션들과 함께 한 70년대 후반 및

80년대 초반의 수 년 간이다. 당시 평론의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디스코와 funk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특히 드럼

베이스 등 리듬 섹션 멤버들과 이뤄낸 극강의 조화로운 튠은

그가 왜 존경받을 밴드메이트인지 입증한 것이었다고 본다.



한번도 차트에 오른 적 없고 팬덤에서의 인기도 이젠 좀

시들해졌으나 77년 Foot Loose & Fancy Free 앨범에

수록된 You're Insane은 숨겨진 진주처럼 번쩍 빛나는

최고의 트랙이라고 생각한다. 블루스에서 시작해 funk

넘어가던 RSG 튠이 조합해낸 최상의 정점이 아니었을까

싶어 강력하게 추천하며 이번 포스팅을 끝낸다.



('You're Insane' from Foot Loose & Fancy Free,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zVwfk1NlZc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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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이 노래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참 신기하기도

하고 대단하다고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데뷔 이후

일체의 바이브레이션 없는 직선적 고음을 한결같이

유지해오신, 영원한 펑크punk 스타 스팅.



슈퍼 트리오 폴리스베이시스트이며 Every Breath

You Take 단 한 곡으로도 영원히 기억되는 미노년의

거물 락커 스팅 Sting이 이번 포스팅의 주인공이시다.









('Every Breath You Take' from Synchronicity, 1983)



('Fields of Gold' from Ten Summoner's Tales, 1993)




스팅은 왜 이름이 스팅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한때는

좀 있었는데, 꿀벌 티셔츠를 즐겨 입으시던 이 분의 20대

시절 별명이었단다. sting에는 벌침이란 뜻도 있거든.

물론 본명 아니고 1951년에 고든 매튜 토머스 섬너

긴 이름으로 태어나셨다. 잉글랜드.



그의 솔로 아티스트로서 전성기가 한국 음악 시장에서

해외 음악이 활발하게 수입되고 정보가 유입한 홍수기와

대략 일치하기 때문에 솔로 경력은 그래도 비교적 알려져

있는 것 같다. 굳이 설명할 필요 있을까 싶을 만큼.

그래도 약간 언급은 하겠지만서도.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시기는 그의 밴드 시절이

아닌가 싶네. 폴리스 The Police. 슈퍼 락스타 스팅

시작점을 제공한, 역사상 최강의 락 트리오 중 하나인

그들. 이름이 폴리스인 이유는 멤버 한 분 아버지가

정보 기관에 근무하셨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https://www.etonline.com/music/166153_7_things_you_never_knew_about_sting_the_police





(The Police)




 (Outlandos d'Amour)




베이스보컬스팅, 기타앤디 서머스, 드럼스튜어트

코플랜드.. 이렇게 세 사람으로 1978년에 데뷔 앨범을 내고

다섯 장까지 정규 앨범을 낸 뒤 84년쯤 활동을 정리한 3인조

구성의 영국 밴드가 폴리스이다.



80년대 포스트 펑크뉴웨이브에 기반을 두고 재즈레게,

스카아프리칸 등 다양한 장르를 복합한 음악을 단 셋만의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편성으로 엮어낸, 락 음악사상

가장 탄탄한 음악성을 지닌 슈퍼 트리오라고 불렸다. 소위

일컫는 80년대 제2차 브리티쉬 인베이전의 일원이기도.



78, 79, 80, 81, 83년에 각각 발표한 정규 앨범이 죄다 영국

차트 탑텐에 올랐고 이 중 3-4-5집은 미국에서도 탑텐

기록했다. 다섯 장 중 넉 장은 롤링 스톤 지가 발표한 시대를

초월한 500대 명반에 당당히 선정될 정도. 앨범의 전 세계

판매고가 8천만 장에 달하고 여섯 차례 그래미 어워드

수상했으며 브릿 어워드도 두 번 받았다. 2003년에 이미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Summers)



(Copeland)



 (Regatta de Blanc)



(Zenyatta Mondatta)




4집까지 음악성도 탄탄하여 성공했지만 83년 Synchronicity

앨범과 싱글 Every Breath You Take의 초대박 메가히트는

너무나 유명한 전설이다. 앨범과 싱글 쌍끌이로 미국 시장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찍었다.



스팅이 아내와 불화가 있던 시절 스토가 된 심정으로 어디

얼마나 잘 사나 지켜보자고 쓴 가사인데 끈적한 사랑 노래로

오해하는 사람 참 많다. -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 현상.

가사를 쓴 그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결혼식서 부르지 말자.



다 필요없고 폴리스스팅을 대표하는 시그니처송 아니겠냐.

생략하고 갈 수 없으니 먼저 듣고 시작하자. 원곡도 훌륭하고

아래에 2008년 재결합 투어 중 도쿄돔 라이브 버젼도 좋다.



 (Every Breath You Take, single)



*2008 Reunion Tour 중 Every Breath You Take.




서머스가 창조한 저 기타 리프는 모르는 이 없이 역사상

가장 유명한 프레이즈. 82년 로버트 프립과 듀오 앨범

I Advance Masked를 낼 때 벨라 바르톡을 연구했는데

거기서 착안했다지.



얼핏 듣기로는 쉬운데 막상 치려면 손가락 찢어진다고

악명높은 악마의 리프라지... 무려 캘리포니아 주립대

음대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한 분이니 핑거 난이도

쯤이야 이미 아득히 초월한 수준 아니겠남.



https://www.youtube.com/watch?v=dOJjxL82X2Q&t=275s

(왜 어려운 리프인지.. 4분 35초 경부터)




주변에 폴리스의 라이브를 들려줄 때 나오는 반응 중

열에 여덟 아홉은 그렇다. 스팅만 알고 들어갔는데 나올

서머스코플랜드의 팬이 되어 버린다고. 하나의

온전한 밴드를 얘기할 때 두 분은 스타인 스팅보다

더 중요할지 모르는 것이 사실일 거다.



(앤디 서머스 1987년 인터뷰. 기타 사운드의 디자인에 대해..)

https://www.youtube.com/watch?v=RS87DCFfzxU


(스튜어트 코플랜드 드러밍에 대한 설명. 어느 드럼 강사..)

https://www.youtube.com/watch?v=Mwojr-12xK4




42년생으로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블루스사이키델릭

연주자로 각광받은 앤디 서머스. 실력파 밴드 소프트 머신에서

투어 연주자로 뛰었고 저명한 애니멀스에서 정규 멤버인 적도

있었으니, 적어도 실력에 있어 누가 딴지 걸 만한 짭밥은 아닌

폴리스에 참여한 분이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데뷔 무렵 세 분 중에선 멀찍이 앞서던 멤버인 셈다.



때려부수는 파괴 주법이 아닌 스티브 해킷, 스티브 하우,

알렉스 라이프슨, 로버트 프립처럼 이펙트 중시하는

분석적 어프로치로 프레이징을 펼친다 하여 흔히 두뇌파

분류되는 기타리스트동시대 U2디 에지와도 유사한 면이

있고, 중심 접근 자체가 포스트 펑크의 트레이드 마크일 듯.



폴리스의 라이브나 앨범 트랙을 골고루 들으면 금방 알 수

있지만 사운드 메이킹에서 서머스어프로치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작곡 크레딧을 대부분 스팅이 가져간다는

단순한 이유로 따질 수 없는, 분명한 자기 생태계를 구축하는

밴드메이트인 것이다. 폴리스 이전 서머스의 플레이를 느끼기

원하는 사람에겐 애니멀스 시절 4분이 넘는 솔로잉을 펼친

트랙 Coloured Rain을 보통 추천하곤 한다.



('Colored Rain' by Eric Burdon and The Animals, 1968)

- 애니멀스 시절 앤디 서머스. 솔로 파트는 2' 20" ~ 6' 40" 정도에..



(폴리스가 과연 punk 밴드였는지 의심이 든다면 아래 영상을...)

https://www.youtube.com/watch?v=rPNQyyLglSQ



(Fender Telecaster)



('So Lonely' from Outlandos d'Amour, 1978)

*2분 25초쯤 이후 솔로잉도 꽤 괜찮은 편이다.



('De Do Do Do De Da Da Da' from Zenyatta Mondatta, 1980)

*이 곡에선 기타 이펙트로 리버브와 에코를 적절히 섞었다.



('Demolition Man' from Ghost in the Machine, 1981)

*앨범 버젼에서 기타 솔로잉을 만끽할 수 있다. 버젼이 여러가지라..



('Demolition Man' by Manfred Mann's Earth Band, 1982)

- 데몰리션 맨 맨프레드 맨s 얼쓰 밴드가 커버했는데 꽤 잘 뽑혔다.




폴리스의 히트곡 가운데 서머스 이펙트의 진가를 보여줄

트랙으로는 1집 Outlandos d'Amour에서 So Lonely,

2집 Regatta de Blanc에서 Message in a Bottle, 3집

Zenyatta Mondatta에서 De Do Do Do De Da Da Da,

4집 Ghost in the Machine에서 Demolition Man 등을

추천할 만하다.



특히 Message in a Bottle1집에서 Roxanne이 크게

히트했음에도 실질적으로 폴리스 음악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받는 명곡이다. 롤링 스톤 지가 시대를 초월한 기타

(가 중심이 되는) 노래 100곡을 선정할 때 65를 차지할

정도로 스트랫 선상의 리프또렷하고 청량하다.



(Rolling Stone Magazine's 100 Greatest Guitar Songs of All Time)

https://www.stereogum.com/10114/rolling_stones_100_greatest_guitar_songs_of_all_ti/franchises/list/



('Message in a Bottle' from Reggatta de Blanc, 1979)

*최고의 리프. 가사는 병 속에 편지를 넣어 띄워보낸 사람 이야기..


('Roxanne' from Outlandos d'Amour, 1978)

*록산은 파리의 매춘부를 가리킨다. 신호등과 상관없다능.




52년생 스튜어트 코플랜드는 개별 악기 능력에 있어선

세 멤버 중 평가가 가장 높다. 16년 롤링 스톤 지 선정

시대를 초월한 드러머 100명 중 무려 10위, 05년 모던

드러머 및 13년 클래식 드러머 명예의 전당 헌액 등등..



특히 트래디셔널 그립으로 스틱하이해트, 을 다루는

테크닉은 동시대 최강이며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줬다.

사운드의 여백을 책임감있게 메꿀 정도의 능력치는 존 본햄,

닐 피어트칼 팔머동급이라는 것이 중평이라 하겠다.



정작 본인은 미치 미첼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하고

진저 베이커도 자주 언급했다. - 세 분 모두 락 트리오

멤버들.. 왜인지, 버디 리치 스타일 재즈 긱은 싫어한다고.



(Rolling Stone '100 Greatest Drummers of All Time', 2016)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drummers-of-all-time-77933/stewart-copeland-33775/


(Modern Drummer Reader Pole, 2005)

https://www.moderndrummer.com/modern-drummers-readers-poll-archive/#_


(Classic Drummer Hall of Fame, 2017)

https://www.classicdrummerhalloffame.com/stewart-copeland



(traditional grip of a left hand)




어린 시절 한동안 가족이 중동에서 지낸 탓인지 레게 

스카를 포괄한 다채로운 전통 리듬에 익숙하여 폴리스

음악에 크게 기여한다. 때때로 클래식 퍼커셔니스트마냥

광범위한 진폭의 다이내믹스 능한 것도 이 때문일 듯.

꽉 찬 그루브의 재즈적 필인 또한 지나칠 수 없는 요소.



이들에게 하나의 루틴 패턴인데, 스팅이 베이스로 중심을

잡으며 가사를 읊는 뼈대 위에 서머스가 다양한 이펙트

변용하여 사운드를 채워주고 코플랜드가 그 위로 리듬

운용하는 자유분방함... 3집까지 레게펑크punk

고수하던 폴리스의 음악은 대략 이런 양상이었다.



('Don't Stand So Close to Me' from Zenyatta Mondatta, 1980)

*80년 앨범 원곡 버젼. 스팅은 실제로 교사였던 적이 있다고.



*86년 재녹음 버젼. 이 앨범 하나면 왠만한 히트곡 다 들을 수 있다.




1집 Roxanne을 쓸 때 스팅은 당초 보사노바 리듬을

구상했지만 코플랜드의 조언에 의해 탱고로 바꿨다고.

서머스 여러 모로 이들에게 중요한 2집 Message in a

Bottle 코플랜드 플레이가 역대 최고였다고 극찬했다.



3집Don't Stand So Close to Me는 여학생이 선생님에

품은 감정을 다룬 영국 차트 1위 곡인데 기타 신디사이저

등장한다. 해산 후 86년에 히트곡 모음집인 Every Breath

You Take: The Singles를 발매할 땐 '86 버젼으로 재녹음

중이었는데 마침 코플랜드가 부상 중이라 워크스테이션 명기

Fairlight CMI드럼 프로그래밍을 직접 했다고.



*아랜 86년 The Singles의 95년 재발매판 커버.

 (EBYT: The Classics)



*아랜 97년 또다른 모음집. 이들은 베스트 앨범이 잘 팔리는 편.

(The Very Best of Sting & the Police)




('The Bed's Too Big Without You' from Reggatta de Blanc, 1979)

*80년 독일 라이브. 코플랜드의 스네어 드러밍에 주목.




2집 The Bed's Too Big Without You세 멤버가

고루 우수한 가운데 특히 평단이 코플랜드의 물수제비 뜨는

듯한 스네어 드러밍을 콕 집어 칭찬한 바 있다. 3집의 숨은

진주 Driven to Tears싱코페이션 가득한 레게 리듬을

무리없이 소화해낸 코플랜드와 함께 서머스의 여덟 마디

솔로잉이 격찬을 이끌어내기도.



3집 중 엄청난 길이의 제목을 가진 When the World Is

Running Down, You Make the Best of What's Still

Around.. 이 트랙에서 보여준 funky-groove 베이스

드럼의 조화 역시 대단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5집Murder by Numbers

코플랜드의 재즈식 테크닉을 진짜 매력있게 들려준다고도..



('Murder by Numbers' from Synchronicity,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1Wp-SZSBkjk




('Driven to Tears' & 'When the World Is Running Down, You Make

the Best of What's Still Around' from Zenyatta Mondatta, 1980)

- Zenyatta Mondatta의 두 트랙을 이어붙임..




 (Ghost in the Machine)




4집 Ghost in the Machine이나 5집 Synchronicity

쯤 가면 스팅뉴웨이브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전까지 사운드를 채워주던 서머스

여러 모로 부딪히게 된다. 밴드 스코신디가 설치기

시작할 때 기타리스트의 운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는 법.



4집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이나

Spirits in the Material World 같은 히트곡을 만들 때

스팅서머스의 갈등이 점입가경이었다고. 신디 톤

점령해 들어오면서 펜더 소리 듣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음은 그냥 대충만 들어봐도 뭐..



아래에 4집 내고 공연 중.. Moog Taurus pedals 쓴다고

엄청나게 스팅 까는 댓글은 덤이다.


*Sting playing Moog Taurus pedals, 1982.

https://www.youtube.com/watch?v=nYFjTPAQ6G0



 (Moog Taurus)



('Every Little Thing She Does Is Magic'

from Ghost in the Machine, 1981)



('Spirits in the Material World' from Ghost in the Machine, 1981)




 (Synchronicity)




가뜩이나 멤버들 간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차에 제작사

압력으로 녹음에 들어간 Synchronicity. 서로 모이지도

않고 따로 자기 파트를 녹음했다는 후문. 그런 앨범이

역대 최고의 성과를 거둔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다니.



스팅의 가사는 결코 쉽지 않다. 교대 나와 교사로 일한 적

있는 엘리트인지라 어려운 표현 투성이에다 가끔 스노비즘

쩌는 반쯤 허세 같은 작품도 심심찮게 나온다. 본작 가사가

그러한데 아서 쾨슬러란 문필가가 72년에 낸 유사 심리학

계열 저서에 등장한 synchronicity, 흔히 공시성이라고

일컫는 현학적 개념을 풀어낸 가사로 범벅을 했다.



그게 뭐냐고? 전혀 상관이 없는 두 개 이상의 사건이

우연히 겹쳐 발생한 데에서 초감각적 의의를 찾는 약간

초능력 비스무그리한 거라고... Synchronicity II

가사를 조용히 음미해 보시면 알 수도 있을 듯.



(Synchronicity II 가사 속 중의적 해석을 설명한 곳)

https://genius.com/3199809



('Synchronicity I' from Synchronicity, 1983)



('Synchronicity II' from Synchronicity, 1983)



*포스트 아포칼립스 사이버 펑크 문화의 절정을 보여주는 뮤직 비디오.



*질주하는 텔리는 서머스의 상징이다. 애틀랜타에서 83년 마지막 투어.




판매고만도 9백만 장을 넘기고 영국미국 양쪽 앨범

차트 정상에 오르며 84년 그래미 어워드본상 3개

부문을 포함 다섯 부문 후보에 올라 세 부문 - 올해의

노래 포함 - 수상을 기록하는 등. 83~84년의 폴리스

성과와 기록의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그럼 뭐하나, 밴드는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는데. 대부분

곡을 쓰고 팀의 중심이던 스팅솔로 프로젝트로 가기

위해 잔뜩 바람이 들어 있던 상황이었으니. (심지어 이

시기 그는 꽤 연기도 잘 하는 영화배우였다.)



84년 3월 투어를 끝내자마자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각

멤버들은 찢어져 솔로 활동에 들어간다. 2007년에 잠시

재결합하여 투어를 갖기 전까지는 장장 23년간 휴지기가

지속했고 08년 이후 재결합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고.



*2008 Reunion Tour 중 Message in a Bottle.



*2008 Reunion Tour 중 Synchronicity II.



*03년 락앤롤 명예의 전당 헌액 공연 중 Roxanne.




짧고 굵게 음악계를 평정한 폴리스의 음악에 아직도 갈증이

남는다면 아래의 히트 트랙들을 더 참고하시길.



('Fall Out', non-album single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4Av29Jp8Ryk


('Can't Stand Losing You' from Outlandos d'Amour, 1978)

https://www.youtube.com/watch?v=nH0vjLwMyc4


('Walking on the Moon' from Reggatta de Blanc, 1979)

https://www.youtube.com/watch?v=zPwMdZOlPo8


('Behind My Camel' from Zenyatta Mondatta, 1980)

https://www.youtube.com/watch?v=XaP2h7ZP5D0


('Invisible Sun' from Ghost in the Machine,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1VuDjJ9KIxM


('King of Pain' from Synchronicity,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yuOPRfq-q6U


('Wrapped Around Your Finger' from Synchronicity, 1983)

https://www.youtube.com/watch?v=svWINSRhQU0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물론 그 사이 가장 잘 나간 스타는 스팅이다. 기존 팬덤 중

솔로 활동이 망하기 바랬을 사람도 있었겠으나 이 양반이

어디 그리 썩힐 달란트이던감. 85년에 발표한 첫 솔로 앨범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는 전반적으로 재즈

짙은 영향을 뽐낸 멀티 플래티넘의 수작이라 할 만하다.



브랜포드 마살리스를 위시하여 대릴 존스, 케니 커클랜드,

오마르 하킴재즈 씬세션들을 대거 투입하여 안정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핫100 차트 3위까지 오른 데뷔 싱글

If You Love Somebody Set Them Free는 발군의

추천 트랙이며 스팅 솔로 커리어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한다.



('If You Love Somebody Set Them Free'

from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 1985)

*전술한 세션들이 다 함께 출연하시는 뮤직 비디오.




84년 겨울엔 당시 영국 음악계를 쥐락펴락 하던 최고의

가수들이 다 모여 밥 겔도프 주도로 밴드 에이드라는

프로젝트 하에 Do They Know It's Christmas 싱글을

녹음하고 있었다. 스팅이 빠질 수 있겠나. 비중은 적지만.



('Do They Know It's Christmas' by Band Aid, 1984)

*1분 14초 경에 등장하심.



85년은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전성기이기도 해서 스팅

마크 노플러가 이들 최고의 히트곡 Money for Nothing

공동 작곡하고 스팅백킹 보컬로 찬조 출연한다. 이런

그림은 라이브 에이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I want

my MTV~'의 라인은 시대가 낳은 락 앤썸인 셈.





*참고로.. 역사를 새로 쓴 Money for Nothing의 뮤직 비디오.

https://www.youtube.com/watch?v=wTP2RUD_cL0

('Money for Nothing' by Dire Straits, 1985)



(...Nothing Like the Sun)




87년에 낸 ...Nothing Like the Sun 앨범은 진득한

어덜트 컨템포러리로 가득 찬 또 다른 멀티 플래티넘 수작.

앤디 서머스를 비롯, 에릭 클랩튼, 마크 노플러 등 동료

기타리스트가 대거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다.



모친상 겹친 때문일까, 한층 깊어진 우울한 정서에

평단이 찬사를 보냈다. 반군에 희생당한 민간인에 바친

싱글 Fragile에서 깊은 쓸쓸함을 확인할 수 있다. 많이

알려진 Englishman in New York성 소수자로서

외롭게 투쟁하던 선배 인사에게 바친 곡이다. Be Still

My Beating Heart는 모친께 바친 곡.



('Fragile' from ...Nothing Like the Sun, 1987)

*클래식 기타 연주가 빼어난 16년 노벨평화상 기념 공연.



('Be Still My Beating Heart' from ...Nothing Like the Sun, 1987)

https://www.youtube.com/watch?v=Ng4P6FWVdcE




(The Soul Cages)




88년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음악극 병사의 이야기

낭독 파트의 녹음에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이언 맥켈런

켄트 나가노가 지휘하는 런던 신포니에타와 함께 참여했다.



91년 앨범 The Soul Cages 땐 부친을 여의었음에도

역설적으로 밝게 그린 All This Time이 좋은 평가를

얻어낸다. 동명의 타이틀 트랙으론 그래미 상을 받았고.



('All This Time' from The Soul Cages, 1991)

https://www.youtube.com/watch?v=4LdUme7QZLY

*뮤직 비디오에서 장례식에 대한 암시를 읽을 수 있다.



(Ten Summoner's Tales)




93년 앨범 Ten Summoner's Tales는 큰 성공을

안겨준다. 그래미 올해의 앨범머큐리 음악상 후보로

오르게 되었고 If I Ever Lose My Faith in You

36회 그래미 최우수 남성 팝 가수 상을 수상한다.



발매 1년여 만에 트리플 플래티넘을 기록하고 If I Ever~

뿐 아니라 Fields of Gold, Shape of My Heart

히트곡이 줄줄이 터져나왔다. 리썰 웨폰 3탄 OST에도

수록된 It's Probably Me 에릭 클랩튼이 기타를 쳤다.



('If I Ever Lose My Faith in You' from Ten Summoner's Tales, 1993)

*보컬 기량으로서는 이 때가 절정기였다.



('Shape of My Heart' from Ten Summoner's Tales, 1993)

*세션 기타리스트는 공동 작곡자이기도 한 Dominic Miller.



('It's Probably Me' from Ten Summoner's Tales,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SUYI7kIR0S4

*album version. 여러 버젼이 존재함.




93년엔 영화 주제가 작업이 많았다. 실베스터 스탤론

웨슬리 스나입스의 영화 데몰리션 맨을 위해 과거

트랙을 재녹음하여 OST에 수록했고, 찰리 쉰키퍼

서덜랜드삼총사를 위해 All for Love브라이언

애덤스로드 스튜어트와 녹음했는데, 그에게 이 곡은

솔로로서 아직까지 유일한 싱글 핫100  트랙이다.



('Demolition Man' from eponymous soundtrack, 1993)

https://www.youtube.com/watch?v=G3QWnqpHrEI



('All for Love' by Bryan Adams, Rod Stewart & Sting, 1993)




95년엔 니콜라스 케이지엘리자베스 슈의 영화 라스

베가스를 떠나며 OST 앨범에 참여하여 세 곡의 재즈

스탠다드를 녹음한다.



('Angel Eyes' from Leaving Las Vegas OST, 1995)

https://www.youtube.com/watch?v=eaWd0pNHDes

*한국에선 이 곡이 소폭 히트함.




97년에 그의 최고 작품 Every Breath You Take

미국의 흑인 랩퍼 퍼프 대디와 싱어 페이스 에반스

의해 커버되어 무려 핫100 차트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비극적으로 사망한 동료 노터리어스 BIG

기리는 뜻에서 비롯되었으니 물론 개사하여 I'll Be

Missing You란 제목으로 발표한 것.



('I'll Be Missing You' by Puff Daddy & Faith Evans, 1997)

https://www.youtube.com/watch?v=NKMtZm2YuBE




최근까지도 차트에서 두각을 보이는 앨범을 꾸준히 내고

있지만 창작자로서 좋은 평가는 99년 Brand New Day

앨범 이후론 멈춘 듯하기도. 본작에서 알제리 민속 음악인

라이 양식을 빌려 알제리 가수 체브 마미와 함께 한 싱글

Desert Rose로 2000년 그래미 상을 받는다.



02년엔 영국 작곡가에게 주는 이보 노벨로 음악상 수상자로

선정된다. 03년에 니콜 키드먼주드 로르네 젤위거의 영화

콜드 마운틴 OSTYou Will Be My Ain True Love

앨리슨 크라우스와 녹음하고 이듬해 아카데미 주제가상

후보로 올라 시상식 무대에서 공연한다.



('You Will Be My Ain True Love' by Sting & Alison Krauss, 2003)

*연주하고 있는 건 드론 베이스란 전통 악기.




07~08년엔 전술했듯이 폴리스의 멤버와 재결합하여

전 세계 투어를 돌았다. 09년엔 락앤롤 명예의 전당

25주년 기념 공연에 출연했고, 17년엔 스웨덴 왕립

음악 협회가 주관하는 폴라 음악상 수상자로 추대된다.



아직도 현재 진행형의 아티스트이기 때문에 앞으로 더

어떤 업적이나 성과가 나올지 사실 예측하기는 힘들다.

평생에 걸쳐 정열적으로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기 위해

애쓴 예술가로서의 공은 세상 모든 사람이 인정하리라.



(92년 파바로티와 친구들 공연 중)




스팅의 보컬 스타일은 흥미롭고 또 경이롭다. 왠만해서

비브라토를 거의 넣지 않고 넓은 음역을 소화하는 점,

그러면서도 동시에 음정이 정확하다는 점, 중저음역과

고음역의 각 음역대를 요하는 트랙 양쪽에서 표현력이

출중하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재즈에 기반을 둔 - 재즈 밴드의 베이시스트로서

뮤지션 경력을 시작 - 독창적 리듬 감각을 지적인 가사

속 단어의 운율에 묘하게 결합시키는 스팅만의 기법은

동시대 어떤 뮤지션도 따라 할 수 없는 능력일 것이다.



폴리스 시절 젊었을 땐 신랄하게 기득권을 비판하고

조롱하는데 능한 목소리인데 반해 부모님이 돌아가신

30대 후반 이후엔 진중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무게감을

키워나간 점 또한 놀라운 면이다. 이런 능력이 지성미

넘치는 창의적 작사 조화를 이룬 상태... - 이것이 바로

인텔리전트한 송라이터 스팅의 참모습일 것이다.



(Fender Precision Bass)






본 블로거가 생각하는 스팅의 최고 작품은 여럿이다. 밴드

시절엔 Synchronicity II의 음악적 완성도가 가장 높았고,

솔로 커리어에선 아직 자신만만함의 갑옷을 벗지 않은 시절

첫 앨범에서 If You Love Somebody~가 들려 눈부신

광채와 실력의 정점이 최고였다고 믿는다.



*If You Love Somebody~ 라이브의 변화 비교:


(1980년대 팔팔하던 시절)

https://www.youtube.com/watch?v=6XUaDJm0ac8


(환갑 기념 공연. 이 때가 무려 60세. 옆에 브랜포드 마살리스.)

https://www.youtube.com/watch?v=jI8XLZUladY




완성도를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솔로 때 발표해

한국인들에게도 사랑받아온 Englishman in New York.

2011년 칠레 비냐델마르 페스티벌에서 풀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완주한 버젼이 괜찮아 추천하며 마치련다.


(album version / official music video)

https://www.youtube.com/watch?v=d27gTrPPAyk



본래 브랜포드 마살리스소프라노 색소폰으로 솔로를

넣었는데 이 버젼에선 음역이 같은 클라리넷이 등장한다.

백킹 보컬의 여성은 호주 출신 재즈 보컬리스트 조 로리.

소외받는 이에게 스팅이 바치는 헌사가 여운을 드리운다.


"누가 뭐라 하든 네 자신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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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음악은 할 얘기 많으니까...

몇 분의 보컬리스트들 이야기를 개시한 김에 음악

카테고리를 부활시키려 하고, 이제 이 분을 얘기하겠다.



한국과 일본 등지 락 씬에 80년대 이후로 큰 영향을

미쳤고 음악의 성향이 메탈이 아님에도 이상하게

메탈 키드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킨 분.



노래를 잘 하는 흉성의 표본이 뭐냐 하는 질문에

묵묵히 이 분의 레코딩이 답으로 제시되던 때도 한때는

있었다. 저니프론트맨으로 영원토록 기억될 그 이름,

스티브 페리 Steve Perry이다.









저니 Journey, 아메리칸 하드락의 상징.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운드를 구사해온 인기 밴드이며 Open Arms

Don't Stop Believin' 등 시그니처 송 연속 7장에 달하는

멀티 플래티넘 앨범의 성과를 자랑하는 기념비적 아티스트들.



빌보드 탑40 싱글이 무려 18곡인 데다 미국 내 판매고만 5천만

장에 달하고 세계적으로는 8천만 장 가까이 팔아치운 괴수급

스테디셀러이기도. 2005년 유력 일간지 USA투데이가 집계

역대 가장 사랑받는 미국 락밴드 5걸 중 하나로서, 2017년

락앤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이들... 이 모든 것이 저니

거둔 성과이고 그 중심엔 이 분, 스티브 페리가 있었다.





('Open Arms' from Escape, 1981)

(두 곡이 대표곡인 것은 미국이나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Don't Stop Believin'' from Escape, 1981)



80~90년대 이후 한국에도 등장하기 시작한

스쿨 밴드의 내노라 하는 보컬들은 모두 이 분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Open Arms하이 노트

찍을 수 있나 없나가 오디션의 기준이던 때도 있었으니.



Don't Stop Believin'이 그 기준곡을 대신하기도 했다.

Don't Stop~키보디스트들의 리프 레퍼토리 확장에도

크게 기여한 바 있다. 요즘 젊은이들은 드라마 글리나 영화

락 오브 에이지의 커버로만 접한 듯. 원곡은 이 분들이다.

1981년 명반 Escape에서 싱글 커트된 저니의 대표 트랙.

03년 영화 몬스터에서도 절절한 감정으로 삽입된 적 있다.



 (Escape)



(12년 락 오브 에이지. 메리 J 블라이지만 참 아깝네.. 왜 거기서 나와.)

저니의 멤버는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주요한

포지션의 주요 멤버는 큰 변화 없이 음악의 색깔을

일관성 있게 유지해왔다고 할 수 있다. 보컬의 페리,

기타의 닐 숀, 키보드의 조나단 케인, 베이스의

로스 밸로리 등이 그들이다. 49년생 

밴드를 완전히 탈퇴한 것은 90년대 말경..



 (Schon)


 (Cain)


 (Valory)



(최전성기던 81년경 라이브)


('Separate Ways(Worlds Apart)' from Frontiers, 1983)

(아, 위 뮤비의 핸드싱크는 유명하니 즐감하시길. 뜬금없는 주피터8까지.)



(Roland Jupiter-8)


(조나단 케인의 신디 파트에 관해)

https://www.youtube.com/watch?v=HjNdXJP8QDo




저니의 초창기는 산타나 세션 멤버들의 사랑방 같은

분위기였다. 산타나의 히트 트랙에서 노래를 불렀고

Hammond B-3 오르간 연주력으로도 일찍이 정평이

나 있던 그렉 롤리보컬키보드를 겸했었는데

이때 음악이 지금과 상당히 달랐고 반응도 대략

그저 그런 수준이었음을 보면 차이가 확연하다.



('To Play Some Music' from Journey, 1975)

https://www.youtube.com/watch?v=iA1kGECadwQ

*프로그레시브 색이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롤리 저니의 정규 6집과 1981년경까지 함께 했으니

상당한 기간 저니의 음악적 기초 완성에 기여했음은

자명하다. 아래 트랙을 들으면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페리+롤리 듀오 체제의 1~2기 시절 그들을 볼 수 있다.



롤리가 자의에 의해 밴드를 떠나며 베이비스 The Babys

에서 신디사이저를 다루던 조나단 케인을 추천했고 케인

신디가 롤리의 해먼드 대체하며 매우 산뜻하고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과 케인의 조합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밴드는 날개를 활짝 펼 수 있었던 것.



(나중에 왜 베이비스와 저니 출신들이 모여 프로젝트

따로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Rolie)


 (Hammond B-3)



('Feeling That Way' from Infinity, 1978)



('Wheel in the Sky' from Infinity, 1978)



('Lights' from Infinity, 1978)




드럼은 꽤 변화가 있었는데 초반엔 에인슬리 던바

사운드의 기조를 갖추는데 기여했고 흔히 상업적으로

히트한 80~90년대와 현재엔 스티브 스미스가 활동했다.

90년대와 10년대 중반까진 빼어보컬 실력까지 갖춘

딘 카스트로노보가 출중한 파워 드럼을 뽐냈었다.



던바, 스미스, 카스트로노보의 드러밍에서 공통점을

꼽아볼 수 있듯이 복잡하지 않고 육중하게 선이 굵은

파워 드러머들이 저니의 사운드에서 전통적인 한 축을

맡아 왔다고 하겠다. 저니 사운드에서 뭔가 재즈스럽고

복잡한 리듬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근데

정작 스미스 버클리에서 전공이 재즈였다능..)



 (Dunbar)


 (Infinity)



 (Smith)


 (Evolution)




특히 금세기 초반 보컬리스트 체제가 본격적으로

갖추어지기 직전 간간히 리드 보을 겸하기도 했던

카스트로노보의 팀내 기여도는 꽤나 출중한 편이었다.

로저 테일러 및 돈 헨리 이후로... 그는 드러머 중 가장

탁월한 보컬 실력을 갖춘 뮤지션으로 기억되리라.

물론 파워 드러밍 역시 탁월하다.



사실 카스트로노보의 이런 음악적 기여도는 2천년대 초

저니의 음악적 여정에서 한 번도 겪지 못한 새로운 요소라서

저니의 보이스를 대변하는 페리가 떠난 후 보컬과 드럼을

동시에 갖춘 이 포지션 메이커를 놓고 어떻게 밴드 구성을

새롭게 가져갈지, 을 중심으로 상당히 고민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한때는, 정말 한때는...



 (Castronovo)


('Mother Father' from Escape, 1981)

(카스트로노보. 보컬과 드러밍 양쪽 모두 후덜덜한..)



('Still They Ride' from Escape, 1981)

(Escape 앨범의 트랙 중에서)




73년에 결성한 저니 75년에 데뷔 앨범을 냈으나 사실

3집까지는 음악 방향도 갈팡질팡에 별 볼 일이 없었다.

뭔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77년에 페리가 새로

들어오면서부터. 78년의 Infinity 앨범에서 Wheel in

the Sky, Lights 등 트랙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고

앨범은 20위 근처까지 상승한다.



78년에 라이벌 제퍼슨 스타쉽가담한 일로 드러머

던바가 짤리고 스미스가 들어온다. 79년 Evolution

앨범에서 싱글 차트 첫 탑20 진입곡 Lovin' Touchin'

Squeezin'을 만들어낸다. 80년 Departure 앨범은

차트 8위까지 오르는 쾌거에다 Any Way You Want

It이 히트하기까지. 그런데 계속된 투어에 지친 롤리

탈퇴하고 케인이 자리를 대체하게 된다.



메인 스트림에서 만개하기 직전 페리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대표적 트랙은 역시 Departure 앨범에서 크게

히트한 Any Way You Want It일 것이다. 보컬과 작곡

양면에서 출중한 기량을 확인할 수 있다. 쥬크 박스

뮤지컬에서도 리메이크된 바 있어 익숙하리라. 그의

능력은 일찌감치 남달라서 LightsLovin' Touchin'

Squeezin' 역시 그가 만든 트랙들.



 (Departure)



('Any Way You Want It' from Departure, 1980)



(전성기 1981년 Escape Tour 시절)


https://www.youtube.com/watch?v=b9EukP0QsXU

(꽤나 당혹스러웠던 영화 락 오브 에이지 버젼)



('Lovin' Touchin' Squeezin'' from Evolution, 1979)




1981년 Escape, 1983년 Frontiers 앨범에 이르는

시기가 저니 디스코그래피의 최전성기이다. 이땐 시쳇말로

미국 국민 밴드 내지 세계구급 스타가 되어 버린다. 월드

투어로 따지면 80~85년 무렵 정도 된다. 월드라 해도

한국은 절대 온 적 없다... 한국엔 17년에야 겨우 오셨다.

물론 스티브 페리 없이. 궁시렁..



Escape 앨범에서는 지금도 귀에 선연한 매우 많은 히트

트랙을 쏟아냈다. Open Arms, Don't Stop Believin',

Who's Crying Now, Still They Ride, Stone in Love,

Keep on Runnin', Mother Father... 도대체가 버릴

곡이 없다는 표현은 이런 데다 쓰는 말일 것. 솔직히 말할까.

현재의 저니조차도 사실 이 때 히트 우려먹으면서 먹고

살고 있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 없을 걸.



이분들 히트곡이 이거 밖에 없냐 뭐라 할까 싶어 반복적인

언급을 자제하지만 Open Arms는 당시 세계적으로 대박

친 히트곡이었다. 싱글 핫100 차트에서 6주나 2위에만

머물다가 하락했는데 정상 등극이 가능할 수도 있었기에

안타깝기도. J 게일스 밴드 Centerfold  조운 제트 앤

블랙 하츠 I Love Rock 'n' Roll이 가로막고 있었다고.

그럴 만두 하다 싶네..



('Centerfold' by the J. Geils Band,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BqDjMZKf-wg


('I Love Rock 'n' Roll' by Joan Jett and the Blackhearts, 1981)

https://www.youtube.com/watch?v=f2W2HexpXg4




많은 평론가들이 80년대 하드락을 대표하는 앨범으로 첫

손에 꼽았고 별 네 개 또는 네 개 반을 선사한다. 공격적인

어프로치를 드러내기에 헤비 메탈로 분류하는 매체도 많다.

드디어 이들을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서게 했고 현재까지

9x 플래티넘의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핫100 탑텐 싱글 셋

포함하여 정말 많은 수록곡차트셋리스트를 휩쓸었다.



('Who's Crying Now' from Escape, 1981)



('Stone in Love' from Escape, 1981)



('Lay It Down' from Escape, 1981)

(가장 높은 초고음 샤우팅이 아마 이 트랙에서 나올 걸)




 (Frontiers)




전작이 워낙 초대박인지라 상대적으로 약했다 뿐이지 1983년

Frontiers 앨범 역시 대박이었다. 6x 플래티넘을 기록한 앨범이

차트 2위까지 올랐고 싱글에서 탑텐 하나, 탑20 언저리에 세 곡이

나왔다. 영국 앨범 차트에선 역대 최고 성적인 6위까지 오르기도.



오늘날까지 이들 음악을 규정하는 좋은 곡들이 뽑혀 나왔다.

Separate Ways (Worlds Apart), Send Her My Love,

After the Fall, 또한 Faithfully까지... Separate Ways

싱글 8위까지 올랐다. 버릴 트랙이 없는 전작의 완성도가 주욱

여기까지 이어져 찬사를 받았었다. 속된 말로 돈을 갈퀴로 쓸어

담던 호시절.. 단 너무 상업적이라고 욕도 먹었고. 전작이 헤비

메탈이라면 본작은 왠 어덜트 컨템포러리였다. 저런.



Ask the LonelyOnly the Young 등 두 곡은 앨범 발매

직전에 빠져서 영화 OST로 팔려 나갔다. 특히 후자는 좋은 곡

많기로 소문난 비전 퀘스트에 삽입되어 싱글 탑텐에도 오른다.

대신 두 곡은 컴필레이션으로선 이례적으로 88년 차트 10위에

오른 Greatest Hits에 들어간다. Chain Reaction 역시

라디오 방송 신청이 높아 고른 지지를 얻었다.



 (Greatest Hits)



('After the Fall' from Frontiers, 1983)



('Send Her My Love' from Frontiers, 1983)



('Chain Reaction' from Frontiers, 1983)



('Only the Young' from Vision Quest OST, 1985)



('Ask the Lonely' from Two of a Kind OST, 1983)




83~87년 시기는 월드 투어에 성공한 밴드로서 저니의 커리어

상 최정점이자 동시에 리스크도 떠안고 지낸 시기였다. 뭐 아주

특별한 위험은 아니고 어느 밴드에나 있을 법한 문제, 즉 멤버들

솔로 활동 관련한 것이지. 특히 프론트맨의 문제가 심한 거고.



음악적 창의성과 테크닉과 상업성을 갖춘 보컬리스트이니

솔로 제의가 안 들어오면 이상한 일. Frontiers 발매 이듬해

페리의 첫 솔로 앨범인 Street Talk가 발매되고 그냥저냥

정도가 아닌 더블 플래티넘 급의 대박을 쳐버린다. 싱글의

기록도 빼어났다.



Oh Sherrie 싱글이 핫100 차트에서 무려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꽤 히트했으니 듣고 기억하는 분도 있을 듯.

이 곡은 여러 모로 저니의 컬러와 판박이 성격이 강하고

밴드 멤버들도 이를 인정하여 함께 협연도 했다 한다.

뮤직 비디오 앞부분에 스티브의 어색한 연기 파트도

나오니 스킵을 원하는 분들은 2분경부터 보면 된다.



(Street Talk)



('Oh Sherrie' from Street Talk, 1984)




이 시기 저니는 정말 잘 나갔다. 닐 숀 로니 제임스 디오

불러모은 Hear N' Aid 프로젝트에 초청되셨고 스티브 페리

그 유명한 USA for Africa에서 당당히 2부의 한 소절을

불러 제끼셨다. 평소 친한 케니 로긴스 다음으로...

We Are the World 뒷부분은 다른 아티스트

중심이니 2분 30초 경 앞부분만 보면 된다.



(Stars 중 닐 숀 파트만)



(We Are the World 중 스티브 페리 파트만)



 (Raised on Radio)




85~86년경 다시 스튜디오 앨범을 위해 뭉쳤을 때는 정말

어수선한 상황이었다. 밸로리 스미스가 음악적 견해 차로

무려 잘리기까지 했고. 전문 세션맨 랜디 잭슨이 대체 멤버로

투입되었고 드러머는 공석에 투어 세션으로 떼운 시절. 잭슨

하면 아메리칸 아이돌 평가위원으로 유명한 그 분 맞다.



혼돈의 86년, Raised on Radio 앨범이 발매된다. 더블

플래티넘탑20 싱글 4곡의 달성엔 성공하나 전작에 의존

결과임은 자명했다. (Be Good to Yourself, I'll Be Alright

Without You, Girl Can't Help It, Suzanne이 그 네 곡.)

결국 87년 저니는 한 차례 활동 중단의 수순을 밟게 된다.



(Jackson)



('Girl Can't Help It' from Raised on Radio, 1986)



('Be Good to Yourself' from Raised on Radio, 1986)

(이래 뵈도 핫100 9위까지 오른 곡)



80년대 후반이 되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된 페리 , 케인.

페리는 솔로 아티스트로서,  케인은 당시 유행하던

슈퍼 그룹을 결성하여 살 길을 모색하는 식으로 변화한다.

배드 잉글리쉬가 이때 결성된 반은 프로젝트 성격인 밴드로서

페리 케인 베이비스 출신 존 웨이트 리키 필립스,

여기에 딘 카스트로노보가 가담한다.



배드 잉글리쉬는 얼핏 들어도 참 저니스러운 사운드를 구사했다.

팬덤에서까지 저니 창작성의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있을 정도..

몇몇 트랙은 중박 정도의 싱글 히트를 기록했다. 명작곡가

다이앤 워렌이 쓴 When I See You Smile 싱글 차트

1위까지 올랐을 만큼.



('When I See You Smile' by Bad English, 1989)




 (Trial by Fire)




87년 중단 후 8년간 서로 떨어져 솔로 활동에만 매진하다
95년에 잠깐 다시 뭉쳐 Trial by Fire 앨범을 낸다. 빌보드
12위까지 오르는 싱글도 내지만 페리가 운동 중 부상을
당하여 수술 일정이 잡힌 관계로 투어가 불가능했다. 이때
페리는 나머지 멤버들로부터 무언의 압력 같은 것을 느껴
불편했다 하고 영원히 저니를 떠날 것을 공표한다. 결국
20세기 마지막 플래티넘을 기록한 앨범을 남기고 말이다.


*이 시기 페리의 심리 상태에 대해선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전혀 다른 해석과 분석은 아래 링크를 참조.



다시 저니라는 정체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함을  케인
중심으로 깨닫게 되지만 비어 있는 보컬리스트의 자리가 문제.
페리의 존재감은 재적해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커진 것 같았다.

딴에는 여러 가지 방도를 시도했다. 전술한 카스트로노보

겸직 사례도 있고.. 특히 98~06년 동안 함께 한 보컬리스트

스티브 오임팩트 나름대로 컸다고 본다.



전에 즐겨 보던 제리의 한창 때 라이브 동영상이 있었는데

새 인물이 자리잡은 이후 내린 모양이다. 없어졌네. 아래는

그런 대로 오디오만으로 확인하실 수 있는 링크.. 제리

탈퇴 사유는 곡이 가진 극강 난이도가 보컬리스트 당사자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 복합적인 것으로 추정된다.



(Augeri)





(04년경 오제리와 카스트로노보가 모두 출연. Keep on Runnin'..)

https://www.youtube.com/watch?v=3wZgP-qhj_E




저니 셋리스트가 가진 부담이란 것이 그 정도인 거다..

특히 밴드의 상징과도 같은 Separate Ways 같은 트랙의

난이도는 정말.. 왜 키를 낮추지 않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인터넷의 댓글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케인의 독단적 밴드 운영을 성토하는 일부 팬도 있지..)



제리가 건강상 이유로 하차한 후 약 1년여 동안 제프

스캇 소토도 재적했다. 잉베이 말름스틴과 활동으로 꽤

유명하고 검증된 보컬리스트였으나 기존 멤버와의 성향

차이가 심해서 거의 쫓겨나고 만다.



 (Soto)



(제프 스캇 소토와.. I'll Be Alright Without You)

https://www.youtube.com/watch?v=zwFvx49OU2o




이렇게 그냥저냥 침몰할 뻔하다가 2007년 무렵 밴드는

기사회생한다. 잘 알려진 대로 필리핀에서 날아온 무명의

커버밴드 출신 보컬리스트를 영입한다는 동화 같은

스토리와 함께. 오오, 아넬 피네다가 등장한 것이다.



피네다의 등장은 괜찮은 마케팅 요소였다. 적절하게 감동적인

스토리와 오랜 무대 경험에서 오는 안정적 실력이 버무려진

결과였지. 하지만 67년 양띠인 이 형님도 너무 늦은 나이에

발탁된 거 아니냐, 진성 팬덤은 아직도 우려가 크다. 가뜩이나

난이도 높은 밴드의 트랙들을 풀타임으로 소화하기엔 정말...

외계인 고문, 아니 피네다 고문 아니냐고.



그리고 10년대 들어 그런 궁시렁 소리가 늘어나면 날수록

결국 종착점은, 스티브 페리가 얼마나 위대한 보컬리스트였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제리 피네다나 심지어 카스트로노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결국 그와의 비교를 피할 도리가 없으니.



 (Pineda)



(피네다와 재녹음한 오픈암스)

https://www.youtube.com/watch?v=I5_qNpALAOU



('After All These Years' from Revelation, 2008)

(피네다 영입 후 2008년의 첫 정규 앨범 중에서)




아레나 락 또는 AOR, album-oriented rock을 대변하는

아메리칸 하드락의 대표 주자가 저니였다. 대형 스타디움을

중심으로 대규모 페스티벌식 콘서트에 최적화한 밴드들이

70년대 중후반부터 영미권 시장에서 우후죽순 성장한 것..

그 중심에 저니가 있었다.



대형 PA에서 빵빵하게 터져 나오는 스타디움에서 청중을

사로잡는다는 뭐 그런 컨셉의 장르 아닌 장르인 건데...

청중의 떼창과 호응이 가능해야 하고 그러려면 귀에 쏙

박히는 후크성 강한 멜로디 라인을 가져야 했고 이런

음악은 필연적으로 라디오 친화적인 매니아 성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고... 뭐, 대략 이런 특성을 지닌다.



파워 발라드락 앤썸 등, 떼창이 가능한 육중한

음률을 뽑아내는 뮤지션의 기술이 중요한 때였다.

기타나 키보드의 리프를 매끈하게 만들어낼 줄 아는

것이 밴드 멤버로서의 큰 미덕으로 통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락 밴드의 투어 공연이란 것이 산업적인 규모로

커지기 시작해 오늘날 라이브 네이션 같은 기업형 모델로

발전한다. 롤링 스톤즈, 핑크 플로이드, , 킹크스시카고,

플리트우드 맥스틱스, 토토다이어 스트레이츠제네시스,

러쉬, U2, 보스턴, 밴 헤일런 등이 여기로 분류되었고

저니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헤드라이너 중 하나.



이런 밴드들에게 페리의 흉성이나 케인의 리프

처럼 선굵은 남성적 파워 사운드 요소는 장수의 생명줄

같은 것이었다. 페리는 대략 1980년 경부터 시작한

새로운 아레나 하드락 최강 밴드가 일군 사운드 성과의

핵심이었다.



('Faithfully' from Frontiers, 1983)




한국에선 Open Arms가 발매 당대부터 즉각적인 반응을

얻었고 약간의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Faithfully를 발견해내

현재의 인기에 다다른 걸로, 그렇게 기억한다. (그 약간의

시간이 얼마였냐에 대해선 사람의 기억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걸로 정리하자. 공식 기록이 없으니...)



여담으로, 81년 텍사스 휴스턴 라이브는 진리인 듯하다.

반복해서 시청하니 휴스턴에 있는 듯 착각이... 영 시간이

없는 분들은 검색어 잘 찾아서 이 라이브 한 번만 보면

스티브 페리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참고로 MTV가 제작한 것.






주지하다시피 이들 사운드의 핵심은 의 기타 및 케인
키보드가 가진 육중한 톤과 귀를 사로잡는 리프이다.
유명한 Gibson엔도시로서 56년형 Les Paul과 ES-335
들고 연주하는 모습이 대중에 각인되어 있다. 케인의 기어 중
가장 유명한 건 Roland Jupiter-8이겠지만 Separate Ways
작곡 당시엔 Oberheim OB-X를 썼을 거란 추정이 대세이다.


(Gibson Les Paul)



(Roland Jupiter-8)

https://www.youtube.com/watch?v=Xw4AV_BeE24

*Chain Reaction. 2분 5초경. 단체 발연기는 덤..




영원한 저니프론트맨 스티브 페리. 금세기엔 대외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지는 않아서 건강에 이상이 있지 않은지 염려도

된다. 그래도 17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선 밴드 멤버들과

조우했고, 무엇보다 까마득한 후배로서 자신의 후임을 맡고

있으면서도 페리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는 아넬 피네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격려해 선배로서 큰 귀감이 되었다 한다.


https://news.abs-cbn.com/entertainment/04/08/17/look-arnel-pineda-meets-journeys-steve-perry-for-first-time






페리가 90년대에 잠시 저니와 재결합하여 Trial by Fire

앨범을 낸 그 순간이 있었다. 마지막 불꽃이라고 할까. 여기서

싱글 커트된 When You Love a Woman이야말로, 페리

마지막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는 절정의 트랙이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강력하게 추천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친다.



('When You Love a Woman' from Trial by Fire,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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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0) 2018.12.22
and




요즘 음악을 듣는 세대에겐 생경하게 들릴 만한

올드한 뮤지션인지라 이번 포스팅의 보컬리스트는

조금 더 진지하게 접근해 보려 한다. 잘 모르는 대상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길잡이를 해줘야 할 터이니.



재즈는 락과 또 다른 세계이고 어쩌면 훨씬 더 넓고

깊을지 모른다. 이질적인 듯한 두 세계가 음악적으로

크로스오버를 이룩한 적이, 길고 긴 역사에서 왜 없었겠나.

두 세계가 만나 일으킨 화학 반응으로 오늘날 퓨전이라고

부르는 서브장르가 생겨난 시기는 대략 70년대 쯤이다.



재즈락 또는 재즈 퓨전으로 불릴 만한 장르에서 오랫동안

대명사처럼 음악을 이어온 밴드, 시카고에서 젊은 시절의

커리어를 일구었고 이후 솔로 아티스트로서 80~90년대에

화려한 전적을 거둔 분, 피터 세테라 Peter Cetera

이야기를 해보련다.









1944년 시카고 남부 사우스 사이드 지역에서 폴란드 및

헝가리 혈통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땐 엄한 집안 분위기

때문에 아코디언을 연주하다가 나중에 베이스로 바꿨다고.

블루스재즈, 소울이 활발하게 발전한 시카고의 분위기를

좇아 학창 시절부터 댄스 음악을 연주하는 일종의 재즈 콤보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영역을 넓혀 나갔다.



67년의 어느 날 시내에 빅씽이란 밴드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혼 섹션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이들에게 매료되어 때마침

공석이던 베이시스트 포지션으로 밴드에 영입된다. 이 빅씽

바로 우리가 아는 밴드 시카고 Chicago의 전신으로서 기타

테리 카쓰, 키보드로버트 램, 트롬본제임스 팬코우,

트럼펫리 러크네인, 색소폰월터 패러자이더, 드럼

대니 세라핀이 이미 몇 달 전 6인조로 의기투합하여 클럽에서

연주 활동을 벌여오던 것. 세테라 영입 전엔 이 오르간 페달로

베이스 파트를 메꾸었는데 사운드가 부족한지라 현지에서

활동 중인 적당한 베이시스트를 찾고 있었다고.



 (Chicago)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클럽을 돌며 연주하다가 이들은 LA로 날아가 레코드사와

계약하고 성공적인 데뷔 앨범이자 데뷔작으로 흔치 않은

더블 앨범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를 발매한다.

69년 4월의 일. 바야흐로 재즈 퓨전의 큰 물결을 주도할

운명을 타고 난 트럼페터 마일스 데이비스가 재즈 씬에서

명반 Bitches Brew를 내기 1년 전의 일이었다.



('Bitches Brew' by Miles Davis, 1970)

https://www.youtube.com/watch?v=MWCjeZdJj7g



물론 오늘날 비슷한 장르로 묶이면서도 두 앨범의 스타일과

완성도는 사뭇 달랐다. 지금 우리가 아는 퓨전 장르의 예술적

초석을 다진 건 천재 데이비스의 작업이었고, 시카고가 하는

음악은 60년대 락앤롤의 문법에 재즈가 본격적인 예술 음악이

되어버린 40년대 비밥 전에 백인 중심으로 성행한, 시카고

빅밴드 재즈의 상업적 음률을 교묘하게 섞은 상품같은 거였다.



(초창기 앨범 슬리브의 사진. 왼쪽서 세번째 상단이 세테라.)




어찌 보면 대도시 빈민 백인이 접근하기에 가장 용이한 형태를

간직한 춤추고 따라부르기 쉬우며 정치적으로 결코 진지하지

않은 재즈의 흉내에 불과할지도 몰라, 정통 재즈 팬들은 사실

이들의 작업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안 써도 될지 모를

이 말을 굳이 하는 이유는 과대도 과소도 아닌 딱 그만큼만

객관적으로 시카고의 음악을 평가하자는 취지이다.



재즈를 표방하면서도 시카고는 철저하게 백인적 오락거리를

추구한 음악가들이고 재즈의 토대가 되는 미국 내 소수 인종의

정치적 여론 형성에 제대로 적극적 의견을 낸 적은 없다. 흑인

특유의 끈끈한 정서가 21세기 대중 음악의 첨단 필수 요소가 된

작금에 와서 이들의 세계는 이미 철 지난 음악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것이 사실.



그러니 재즈의 정통성을 즐기는 팬이라면 당장 이 포스팅을 닫

마일스 데이비스웨더 리포트리턴 투 포에버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로 달려가시길 추천한다. 거듭 명확히 하지만 백인이

보여줄 수 있는 역대 가장 진보적인 재즈 액트는 아마도

프랭크 자파나 발명의 어머니들일 것이다.



('Right Off' by Miles Davis, 1971)

https://www.youtube.com/watch?v=sYnzsShbbFM


('Birdland' by Weather Report, 1977)

https://www.youtube.com/watch?v=Ae0nwSv6cTU


('Spain' by Return to Forever,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a_OEJ0wqt2g


('Birds of Fire' by Mahavishnu orchestra, 1973)

https://www.youtube.com/watch?v=gv_bkS5VVaA


('Waka/Jawaka' by Frank Zappa,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BRBR_SPPXKQ



아 물론, 이들에게도 진지한 작품성을 보여준 수작이 있다.

('A Hit by Varese' by Chicago, 1972)

https://www.youtube.com/watch?v=GszAAmVEKa4




(1970년대의 라이브 모습)




동시대에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 같은 블루스 기반

밴드에 비해 음악을 구성하는 방법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다.

가장 뚜렷한 점은 음률을 이어가는 선법, 즉 모드스케일

달랐고 여기에 기반한 프레이징의 어법이 달랐다. 특정한

악구를 리프로 발전시켜 이를 반복적으로 전개하고 여기에

가사를 싣는, 블루스락 밴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법이

아니란 말씀.



거기에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등 각 파트의 비중을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동등하게 두는 일반적 락의 밴드 운영

방식과 달리, 이들은 파트를 크게 리듬 섹션(드럼, 베이스,

기타, 키보드)과 혼 섹션(트럼펫, 색소폰 등 모든 브라스

윈드 악기)의 둘로 나누어 접근하는 기존 재즈 앙상블 식의

어레인지 철학을 갖고 있다는 점 또한 동시대 다른 밴드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40년대 재즈의 주류였던 17인조 빅밴드 편성 형태)



(1980년대의 프로필 포토. 좌측 중간에 세테라.)




아직 시카고로 개명하지 않고 CTA로 부르던 초창기 음악

중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Questions 67 and 68을 들어

볼 때 그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인트로 파트에 혼 섹션

주도하는 프레이즈는 후크에서 반복하지 않고 가사를 싣는

파트와 전혀 상관없이 전개하는 경우가 많은 것.



블루스에 기반한 락이 태동할 때 단순하면서도 직선적이고

반복적인 리프 패턴을 후크에서 강조하여 장르적 특성을

선명하게 구체화했던 것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가 갈지도.

특히 이 곡은 향후 퓨전의 거대 시장으로 발전하는 일본에서

인기가 많아 아예 일본어 버젼을 따로 발매하기도 했다고..



('Questions 67 and 68' from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1969)

(72년경 일본 공연 실황. 보컬은 세테라와 카쓰.)


(위 트랙의 일본어 버젼 싱글)




초창기에는 첫 앨범 제목을 그대로 밴드 이름으로 쓰다가

너무 길고 시카고 당국으로부터 상호권 소송 부담도 있어

간단하게 시카고로 개칭한다. 이들은 앨범 제목도 특징이

있는데 밴드 이름에다가 로마자 숫자로 표기하는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것. 단, 두번째 앨범은 개칭 후 첫 앨범이라

심플하게 Chicago라고 칭했고 팬덤에선 Chicago II

통칭하기도 한다능... 이들의 매번 앨범 커버도 밴드 이름

로고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패턴인지라 다 모아 놓으면

훌륭한 컬렉션이 되기도 한다.



원래 명칭을 시카고 전철 및 버스 등 공공 교통을 총괄하는

공기업, 시카고 교통 공단에서 따온 것은 물론이고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창립 멤버들은 대개 시카고 토박이들이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정서와는 다른 시카고의 애향적

토착인 문화가 꽤 유명한 편이다. 아마도 창립 멤버들의

유난한 시카고 사랑도 이런 정서에 기반했을 터이다.



또한 시카고는 이스트 코스트의 북부와 남부를 잇는 교통

요충지로서 남부에서 이주한 30~40년대 재즈 뮤지션들이

뉴욕 가려다가 시카고에 정착했다는 가설이 있을 정도로

딕시랜드 재즈어번 블루스 소울 및 가스펠 서브장르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창립 멤버들 모두 유년 시절부터 이런

고향 풍토에서 자연스럽게 클래시컬한 재즈를 듣고 자라며

음악적 지향성을 다잡았을 것이라고 능히 추측할 만하다.



(Chicago) (Chicago II)




이들은 데뷔 앨범부터 - 적어도 북미 시장 내에선 - 성공을

구가한, 실력과 운을 겸비한 뮤지션들이었다. (하긴 본래

시카고의 팬덤이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일본 정도 빼면

거의 시체이긴 하다.) 대곡이 많은 재즈의 특성상 초기 앨범

석 장이 전부 더블이었고 전술한 음악적 개성과 특이성을

기반으로 거의 매년 한 장 꼴로 앨범을 발매했으며 싱글에서

거둔 성적도 탑텐을 11개나 기록하는 등, 70년대 중반까지

상업적으로나 평단으로부터나 꽤 준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70년 Chicago, 71년 Chicago III, 71년 Chicago at

Carnegie Hall, 72년 Chicago V, 73년 Chicago VI,

74년 Chicago VII, 75년 Chicago VIII을 차례로 발표해

락과 퓨전이 발흥한 시대를 배경으로 골드 내지 플래티넘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4집은 스튜디오 판이 아닌 라이브

앨범인데 당시 대중 음악가로선 드물게 카네기홀 무대에

섰을 때 그 실황 녹음을 담았다고.



(Chicago V)



(Chicago VI)




Beginnings, Make Me Smile,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Colour My World,

Saturday in the Park, Feelin' Stronger Every Day,

Just You 'n' Me, (I've Been) Searchin' So Long,

Call on Me, Old Days 등은 8집까지 시카고를 대표하는

트랙들로서 70년대 중반 싱글 차트에서 성공을 가져온.

(이 곡들 대부분 빌보드 핫100에서 탑텐에 들었다.)



물론 젊디 젊은 성대를 자랑하던 세테라를 빛나게 해줄 이

시기 최고의 히트 트랙이 25 or 6 to 4은 자명하겠으나..

Beginnings()와 Make Me Smile(카쓰)을 들어보면

알테지만 1970년대 내내 세테라만이 밴드의 리드보컬을

전담한 체제는 아니었다. , 카쓰, 세테라... 노래를 할

만한 처지의 = 입으로 뭔가 불지 않거나 북을 두드리

않는, 리듬 섹션의 세 멤버가, 번갈아 가며 노래라는 - 재즈

밴드 입장에서 아주 귀찮아 마지 않은 - 업무를 뜨거운 감자

돌리듯이 나눠서 맡은 거다. 개념 자체가 다른 셈이다.



('25 or 6 to 4' from Chicago, 1970)

(지미 헨드릭스가 극찬했다는 테리 카쓰 플레이의 정수가 이 곡에..)


('Beginnings' from The Chicago Transit Authority, 1969)



('Make Me Smile' from Chicago, 1970)



*'25 or 6 to 4' live version




그리고 신기하게도 세 사람의 보컬은 각기 서로 다른 매력을

갖고 있어 이 밴드의 음악에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맛이

있다. 그것도 세 사람이 서로 균등한 비율로... 아니, 사실은

70년대 중반까지 시카고의 음악에서 세테라의 비중이 그닥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은 알고 넘어가야 한다. 이 시기 작곡과

밴드 리딩의 중심은 리듬 섹션로버트 램, 그리고 혼 섹션

제임스 팬코우 두 사람에게 중심이 실려 있었다. 멀리 갈 것

없이 앞에서 소개한 열두 곡 중 한둘 빼고는 모두 이 둘이서

사이좋게 절반씩 작곡했다는 사실을 알면 감이 오실 듯.



Does Anybody Really~의 4분이 넘는 긴 버젼을 들으면

의 재즈 기반 키보드 실력과 노래를 유감없이 감상할 수

있다. 이 박력있는 피아노 리프를 보여준 Saturday in

the Park 역시 세테라와 함께 불러 초창기 매력을 엿볼 수

있는 70년대 초반 무대에서 Hammond B-3

Wurlitzer 또는 Hohner 장비를 올려놓는 심플한 세팅을

보여주었고 Steinway Concert Grand는 조금 나중에

도입한다. Fender Rhodes가 나온 후엔 이를 애용했고

간간이 MoogARPMellotron 장비를 썼으나 과도한

아날로그 합성음에 의존하는 플레이어는 결코 아니었다.


http://www.chicagohome.de/cgi-bin/sbb/sbb.cgi?&a=print&forum=13&beitrag=2



(70년 탱글우드 무대의 램)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from CTA, 1969)



('Saturday in the Park' from Chicago V, 1972)




Just You 'n' Me나 Searchin' So Long트롬본을 불며

혼 섹션의 구성을 책임진 제임스 팬코우가 작곡한 대표적

트랙들인데 시카고 스타일 재즈 - 실제로 이런 서브장르가

존재함 - 에서 악절에 대한 기본적 어프로치가 어떤 태도를

지녔는지 알아볼 만한 뚜렷한 개성을 자랑한다. 팬코우

초기 시카고의 또 다른 창의적 축임을 보여주는 곡들인 셈.



팬코우의 초기 창작 성향을 대표하는 송사이클(스위트;

모음곡)로서 7개 소곡으로 구성한 13분 길이의 Ballet for

a Girl in Buchannon2집에서 발표되었는데 Colour

My World는 이 곡의 제5번 파트이자 아름다운 다섯 코드로

구성된 발라드이다. 테리 카쓰의 진중한 보컬과 월터

패러자이더의 플루트 솔로가 매우 유명하다.



('Ballet for a Girl in Buchannon' by Chicago)

https://www.youtube.com/watch?v=XV2MYMaBxMM

... at Carnegie Hall, 1971



Feelin' Stronger~는 특이하게 팬코우세테라가 공동으로

작곡한 초기 히트곡. 세테라의 젊은 시절 연인 관계의 경험을

팬코우가 가볍게 읊조리던 잼 음률에 실었다고. 밑에 영상을

보면 이 곡의 녹음 스케치를 관찰할 수 있다. 아직 본격적으로

창작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지 않던 세테라의 시동이 슬슬

걸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터이다. 또한 왠만한 튠은

세테라의 보이스에 실어 표현하면 어느 정도 믿고 갈 수

있음을 슬슬 멤버들이 깨닫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Colour My World' from Chicago, 1970)



('Just You 'n' Me' from Chicago VI, 1973)



('(I've Been) Searchin' So Long' from Chicago VII, 1974)



('Feelin' Stronger Every Day' from Chicago VI, 1973)




이렇게 75년까지 시카고는 7장의 스튜디오 앨범, 1장의

라이브 앨범을 내며 성공한 메인스트림 밴드로 자리잡게

되었고 열 곡이 넘는 싱글 히트곡도 보유한다. 이 주요한

히트 트랙들은 1975년 11월에 발표한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에 거의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시간과 비용을 줄이면서도 초기 시카고 명곡들을

즐기려는 팬들이 이 한 장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앨범 차트에서도 1위 찍으셨고..



Chicago IX 수록 트랙:

25 or 6 to 4

Does Anybody Really Know What Time It Is

Colour My World

Just You 'n' Me

Saturday in the Park

Feelin' Stronger Every Day

Make Me Smile

Wishing You Were Here

Call on Me

(I've Been) Searchin' So Long

Beginnings



(Chicago IX: Chicago's Greatest Hits)



('Wishing You Were Here' from Chicago VII, 1974)

(이 곡은 초기에 흔치 않은 세테라 단독 작곡 트랙..)




76년 6월에 발매한 Chicago X은 디스코그래피 전체에서

큰 전기를 마련한 앨범이다. 세테라가 단독 작곡한 어쿠스틱

발라드 If You Leave Me Now가 메가히트를 기록하면서

영미 양국에서 최초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고 77년 19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팝보컬 퍼포먼스 부문 상을 결성

최초로 수상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유일한 그래미 수상

기록이기도 하다.)



앨범 막판에 가서야 겨우 수록한 곡의 대성공으로 싱글은 발매

직후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였고 이후 전체적인 창작 성향이

발라드로 기울게 되는 엄청난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앨범은

차트 3위까지 올라 골드플래티넘을 기록하였고 시카고

그때까지 발매한 앨범 중 가장 먼저 플래티넘을 넘어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앨범에 대한 평가도 높아서 그래미 본상인

올해의 앨범 후보 지명되는 영예도 얻는다. 팬의 투표로

결정되는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선 최우수 팝락 밴드

부문을 수상하는 성공을 누리게 된다.



물론 이 하나의 명곡은 멀리 바다 건너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어 이들의 존재가 처음으로 인지되는 계기를 만든다. 지금도

흘러간 팝송으로 많이들 들어보셨을 것.. 이러니 저러니 해도

가수는 결국 히트곡으로 말하는 법.



(Chicago X)



('If You Leave Me Now' from Chicago X, 1976)



(독일 방송 출연. 보컬은 라이브, 반주는 MR..)




세테라파워 발라드의 성공 공식은 다음 앨범에서도

계속 이어져 77년의 Chicago XI은 이들이 70년대에

마지막으로 싱글 차트 탑텐(4위)을 기록한 Baby, What

a Big Surprise를 배출한다.



전부터 비치 보이스의 음악적 영향을 줄기차게 받은

세테라가 이 곡에선 아예 칼 윌슨을 모셔와 백킹 보컬

기용하기도. 패러자이더플루트를, 러크네인이 피치가

높은 피콜로 트럼펫을 연주한 점이 특색이 있다.



Chicago XI세테라가 중심이 되는 발라드에의 의존을

떨쳐내려 몸부림치는 듯한 구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단

그 노력이 과연 성공적이었는가 하는 점은 미지수일 듯.

또한 후술하게 될 비극적 사건 때문에 테리 카쓰가 참여한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되고 만다.



(Chicago XI)



('Baby What a Big Surprise' from Chicago XI, 1977)




78년은 이들에게 시련으로 기억될 터. 지난 다섯 장의 정규

앨범을 작업한 프로듀서 제임스 구에르치오가 밴드의 재정적

성공을 독차지한다고 판단하여 결별하였다. 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1월 말에 기다리고 있었으니 기타와 보컬을 겸하던

밴드의 기둥 테리 카쓰총기 오발 사고로 숨지고 만 것.

두 사건은 70년대 말이 되어 격변하고 있는 음악 시장의

변화와 더불어 멤버들 모두를 미치도록 몰아세웠다.



78년에 발표한 신보 Hot Streets카쓰가 주도한 재즈락

기조에서 많이 후퇴하여 디스코에 경도된 앨범이었다.

숫자로 매기던 타이틀을 처음으로 배격한 점이나 최초로

멤버들 사진을 커버에 실은 점부터가 사람들에게 뭔지 모를

이질감을 준 것 같다. 지금까지 앨범 중 처음으로 차트에서

탑텐을 기록하지 못해 실질적으로 실패작이 아닌가 싶다.



이런 실패는 79년의 Chicago 13에서 더 심해져 카쓰 대신

오디션으로 영입한 기타리스트 도니 데커스는 본작을 끝으로

탈퇴해 버린다. 80년 Chicago XIV탑40 진입마저 실패할

정도였고 레코드사에선 Chicago XV을 신보가 아닌 대표곡

모음집으로 강행하는 수모까지 안긴다.



(Hot Streets)



(Chicago 13)



(Chicago XIV)



(Greatest Hits, Volume II) (Chicago XV)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 몇 해에 걸쳐 별 볼 일 없는

성과에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고 예전의 빅밴드 튠이 결코

먹히지 않는 시대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세상은 이미

디스코도 한물 가고 뉴웨이브포스트 펑크가 고전적인

정서를 밀어내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프로듀서를 영입한다.

바로 데이빗 포스터, 80년대를 씹어먹은 네임드 뮤지션.



포스터는 고전적 재즈보다 팝 발라드의 문법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작곡가 겸 프로듀서. 브라스 뒤로 밀어내고

신디사이저를 앞세웠으며 심지어 기존 멤버가 아닌 세션

고용하여 - 스티브 루카서라든가 데이빗 페이치라든가 -

80년대 첨단의 파워 발라드를 직조해냈다. 이 작업에

세테라가 가진 창작 아이디어가 핵심적 에너지를 기여하게

되고 포스터세테라, 바야흐로 두 위대한 거장이 최고의

시너지로 한 시대의 역사를 새로 쓰는 순간이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음악사 최고의 명곡이 1982년 5월에

발매되었고 이를 수록한 새 앨범 Chicago 16이 다음 달에

선을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이 밴드 시카고 하면 떠올리는

대표곡이면서 80년대 어덜트 컨템포러리의 대명사 격인

싱글 차트 탑의 히트 트랙, Hard to Say I'm Sorry였다.



그 해 9월 11일에 Hard to Say I'm Sorry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선다. 16과 이 곡의 성공으로 이들은 그래미

 퍼포먼스 부문 후보로 지명되었고 발매된 해에 앨범은

플래티넘을 기록하였다. 빌보드 앨범 차트 200에서는

9위까지 오르는 성공이었다.



 (Chicago 16)



('Hard to Say I'm Sorry' from Chicago 16, 1982)

(앨범 버젼 원곡. Get Away와의 접속곡 형태.)



(뮤직 비디오. Get Away가 잘린 싱글 버젼.)



(가장 상태가 양호한 82년 도르트문트 라이브)




A면에 마지막 트랙이었던 Hard to Say I'm Sorry

대구를 이루는 B면의 마지막 트랙 Love Me Tomorrow

역시 두번째로 싱글 커트되어 성공을 거둔다. 세테라

스스로 발굴하기 시작한 80년대식 발라드의 표현력이

애정과 인간 관계 같은 정서를 깊게 어루만지며 타고난

발성과 어우러져 일정한 궤도에 올라가고 있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트랙이다.



왠만한 한국의 음악 팬이나 이들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Chicago 16부터 앨범을 즐기게

되었을 텐데, 전술한 두 곡을 제외하고 나머지에서는

이전 시카고의 전매특허인 브라스 사운드가 생경하게

배어 나오니 이에 익숙하지 않은 팬이라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16을 기점으로 이전 시카고

음악을 하나 하나 정복해 가다 보면 단순하게 팝락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음악에 숨겨진 깊은

내력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다.



16 발매 전 80~90년대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보컬 겸 키보디스트 빌 챔플린도 새롭게 영입된다. 이

분도 커리어가 화려한 편인데 80년대 초에 대히트한 명

발라드 After the Love Has Gone 포스터 등과 공동

작곡하여 무려 그래미 상을 수상한 분이시다. 시카고

가담하게 된 건 포스터  세라핀과의 친분으로 인해..



('Love Me Tomorrow' from Chicago 16, 1982)



(아웃트로의 오케스트레이션이 어찌 변주되는지 주목하면 흥미롭다.)




 (Chicago 17)




큰 전기를 마련한 16이 냉정하게 앨범에서 초대박은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는데 반해 84년 5월에 발매한

Chicago 17은 가히 시카고 디스코그래피의 베스트

앨범이라 할 만하다. 비록 16이 기록한 싱글 1위 곡은

나오지 않지만 빌보드 핫100 싱글 3위까지 오른 곡을

둘, 탑20까지 오른 곡을 또 둘이나 배출하고 무엇보다

앨범 판매로 6x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

(원래 미국 시장 성공의 척도는 싱글보다 앨범이다.)



판매 뿐 아니라 역대 앨범 중 음악적 평가가 가장 좋다는

점이 여러 모로 내실을 거둔 성과임을 입증한다. 16에서

성공한 두 싱글과 나머지 전통적 브라스 트랙들 사이에

괴리감이 잔존하여 일반 음악 팬을 당혹케 했던 점에

비교한다면, 17은 비록 브라스락이나 재즈의 색을 싹

지우더라도 80년대 소프트락의 문법 하나에 집중해

시대를 대변할 사운드를 창조해냈다 할 만하다.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그래미 본상 올해의 레코드최우수

팝 퍼포먼스 부문 후보에 지명되는 결과까지 온다.



85년 팝계 최고의 이벤트였던 We Are the World

프로젝트에도 곡을 하나 기증했고 앨범 전체가 그래미

올해의 앨범 후보에 지명되며 함께 이름을 올리는 깜짝

영광을 누리기도. 86년의 13회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선 77년에 이어 두번째로 최우수 팝락 밴드

부문 수상의 영예를 가져갔다. 밴드로서 시카고

활동 기간 중 최고의 해를 맞고 있었고 그 중심에

피터 세테라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Stay the Night' from Chicago 17, 1984)

(싱글 핫100 16위까지 올랐고 스턴트로 가득 찬 뮤직 비디오는 꽤 화제였다.)



('Along Comes a Woman' from Chicago 17, 1984)

(싱글 핫100 14위까지 올랐으며 흑백 고전 영화를 패러디한 뮤직 비디오.)



17에서 가장 탁월한 트랙은 Hard Habit to Break로서

그래미 본상 후보 지명도 이 곡의 빼어남 때문이었다. 81년

메가히트곡으로 올리비아 뉴튼 존이 부른 Physical을 공동

작곡한 스티브 키프너송라이팅을 주도하고 데이빗 포스터

프로듀싱한 트랙으로서, 피터 세테라빌 챔플린이 듀오로

합을 맞춘 모든 곡 중 완성도가 가장 뛰어나면서도 시카고

지닌 재즈락의 매력도 아울러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동시대의 또 다른 히트곡 스티비 원더I Just Called to Say

I Love You빌리 오션Caribbean Queen에 밀려서 끝내

핫100 차트 3위 문턱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워낙 명곡이 넘쳐난

시절이었으니 뭐. 세테라포스터가 다시 합작한 또 다른 명곡

You're the Inspiration 역시 잭 와그너All I Need와 무려

마돈나Like a Virgin에 밀려 싱글 3위가 최고 기록이었다니.

가히 대중 음악이 문화 전반을 지배하던 80년대 아니었겠나.



싱글 16위까지 오른 Stay the Night이나 14위까지 기록한

Along Comes a Woman을 들으면 그렇다. 세테라 목소리를

쏙 빼놓고 반주만 틀었을 때 이걸 시카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네. 당시에는

브라스 빼고 신디 넣으라고 레코드사 차원에서 압력이 들어오는

상황이었으니 80년대 사운드를 완벽하게 창조해냈다고 위무라도

하는 편이 나을지도. 어쨌든 흥행은 확실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고.

하지만 뭔가 위기감이 스멀스멀 닥쳐오는 느낌 아닌 느낌이

분명히 감지되고 있었다. 우리 이렇게 계속 가도 괜찮은 걸까.



위에 뮤직 비디오가 참 쌈마이다우면서 돈도 많이 들인 티가

팍팍 나는데 당시엔 저런 것이 유행이었다. 바야흐로 MTV

시대가 절정을 찍던 80년대 중반이었던 거다. 그나저나

저 발연기를 어쩔...



('You're the Inspiration' from Chicago 17, 1984)



('Hard Habit to Break' from Chicago 17, 1984)

(세테라 재적 시절 거의 마지막 라이브로 추정)



(정말 흔치 않은 전성기 세테라의 이 곡 라이브 아카이브)






락 밴드의 시대였던 70년대를 통과한 80년대의 음악

산업에선 보컬리스트의 솔로 독립과 밴드 와해의 수순이

마치 모든 뮤지션의 통과의례처럼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었고 이는 시카고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국의

가요계에는 10년 정도 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사실

이들은 70년대엔 프론트맨을 따로 두지 않았고 심지어

보컬의 책임도 세 사람이 나눠 맡는 구조였는데도 말이지.

변화한 산업의 환경이 밴드에게 얼굴을 요구하였고

세테라는 이에 적절하게 응할 수 있는 멤버였던 거다.



오늘날까지도 골수 팬들 사이에선 논쟁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프론트맨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냔

옹호론, 카쓰가 죽은 후 이 정신 못 차리고 제 역할을

못할 때 세테라가 자리를 차고 들어갔다는 설, 레코드사

쪽에서 혼 섹션은 아예 취급도 안 하려고 하니 이 기회를

세테라가 낚아채 이기적 이득을 챙긴 거였다는 비난론 등,

양상은 참 다양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분명한 건 세테라를 시대적 흐름의 희생양 쯤으로 봐주는

감상적 생각은 남아 있는 자료로 볼 때 아닌 건 아니라는

것. 이 시기 그는 확실히 자신의 성공 가도를 향 확실한

기회를 찾고 있었음이 분명해 보이고,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의 에고를 적당히 내세우며 약간은 허세끼가 다분한

셀럽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해나가고 있던 걸로 추정한다.

이런 자세는 뮤지션 개인의 영예로선 물론 박수받을 일일

것이고 골수 시카고 팬들 입장에서야 환장할 노릇일 것.



결국 그는 85년 여름에 밴드를 떠날 것을 천명한다. 딴에는

당시 옆동네 제네시스필 콜린스의 관계처럼 밴드와 솔로

양쪽을 병행하겠다고 조율을 시도한 모양이지만 다른 멤버

입장에선 아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거다. 아래에 TV쇼

아카이브로 남아 있는 영상이 독립 의사를 밝힌 최초 시기

쯤에 찍힌 거라고 하는데, 40대 초반 인생의 전성기를 달리던

뮤지션으로서 매우 당당한 자세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한 번 보시기를. 영상의 댓글은

그에 대한 욕이 많은데 판단은 각자의 몫인 듯.



(Peter Cetera and David Foster interviewed, circa 1985)

https://www.youtube.com/watch?v=Mj9BK7ih8Q0




꽤 어수선하게 지나간 시대처럼 보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성공의 길을 착실하게 다지던 시절이었다. 80년대 후반은

피터 세테라란 뮤지션에게 최고의 전성기를 선사한 시기.

독립하고 이듬해에 영화 가라데 키드 2탄의 주제가로

발표한 Glory of Love가 빌보드 싱글 차트 탑을 찍고,

연이어 (당시만 해도 완전 무명이던) 에이미 그랜트

듀엣을 이룬 The Next Time I Fall마저 연달아 핫100

1위를 달성해버린 것. 아카데미골든글러브 어워드의

주제가상 후보에도 오르고 그래미에서도 후보에 오른다.



쉬워 보이는지 몰라도 싸이의 사례에서 모든 한국인이

간접 경험했지만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런 성과는 쉽게

폄하할 일이 아니다. 비록 평가는 그냥저냥 그랬더라도

86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 Solitude/Solitaire가 거둔

상업적 성과 - 앨범 차트 23위 및 플래티넘증 - 는

완벽하게 한 시대를 규정하고 있었다. 파워 발라드

주종을 이루던 당시 백인 락 씬의 대세적 흐름일 터.



(당시 오스카 무대에서. 6분 47초부터. 음정이 살짝 불안정.)

https://www.youtube.com/watch?v=bx8062XOUGk



참고로 Glory~ 가라데 키드에 삽입될 노래가 원래

아니었다고. 85년에 나온 록키 4탄 OST로 본래 기획한

트랙이었단다. 가사 분위기가 많이 비슷하긴 하다. 위

TV쇼 인터뷰 중간에도 록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Solitude/Solitaire)



 (Glory of Love, single)



(The Next Time I Fall, single)



('Glory of Love' from The Karate Kid Part II, 1986)



('The Next Time I Fall' from Solitude/Solitaire, 1986)




솔로 아티스트로서 그의 성공은 80년대 말까지 계속된다.

88년에 발매한 앨범 One More Story는 차트 58위까지

오르고 싱글 4위까지 올라가는 One Good Woman

배출한다. 대략 이 시기까진 그래도 시대의 흐름을 잘 좇아

히트할 튠을 만들어내는 감각을 유지한 셈.



90년대까지 이어지면 다른 아티스트와의 싱글 협업, 흔히

일컫는 피처링 작업으로 유명세를 이어간다. 89년엔 또

다른 빅스타 셰어와 듀엣을 이룬 After All, 91년에는

데이빗 포스터와 다시 공동 작곡으로 걸프전 군인들을

향한 위문 가요 Voices That Care에서 여전히 건재한

그의 하이 테너 톤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한창 솔로 콘서트에 매진하던 97년엔 베이비페이스

키우던 신예 R&B 그룹 애즈옛이 리메이크한 Hard to

Say I'm Sorry커버 버젼에서 마지막 찌르는 고음

파트에 재등장하여 꽤 화제가 되기도. 핫100 8위까지

오르는 저력을 과시했다. You're the Inspiration 역시

이들과 재녹음하기도.



현재로선 92년에 앨범 World Falling Down에서

커트한 싱글 Restless Heart가 마지막 핫100

차트 탑40 기록이다.



('One Good Woman' from One More Story, 1988)



('Voices That Care', 1991)

(91년 스타 연예인들 총출동. 세테라는 번째 등장.)



('Hard to Say I'm Sorry' by Az Yet, 1996)



('You're the Inspiration' by Peter Cetera ft. Az Yet, 1997)




세테라가 맞은 솔로 전성기 동안 시카고의 행보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가 떠난 직후 86년에 발표한 Chicago

18에선 유사하게 베이스와 보컬을 겸할 줄 아는 제이슨

셰프를 영입해 싱글 차트 3위를 기록했고, 88년의

Chicago 19에선 빌 챔플린의 보컬이 돋보인 싱글

1위 곡을 배출했지만, 음악적 완성도는 글쎄...



문제는 사운드였다. 피터 가브리엘이 나간 후의 제네시스,

로저 워터스가 나간 후의 핑크 플로이드처럼 시카고

피터 세테라와 묘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던 차...

포스터세테라가 주도한 정서를 비판했으면서도

정작 그들 자신의 새 앨범에선 외부 작곡가만 교체했을 뿐

80년대 사운드에서 단 한 걸음 진보하지 못한 수준에

머물렀으며 하다 못해 70년대식 재즈 본령으로 복귀한

것도 아니었다. 언론의 평이 싸늘할 만하지.



('If She Would Have Been Faithful' from Chicago 18, 1986)



('Look Away' from Chicago 19, 1988)

*Chicago 19에서 싱글 차트 탑을 찍은 곡. 다이앤 워렌 작곡.



('You're Not Alone' from Chicago 19, 1988)




결국 90년대를 넘어서며 탈퇴한 멤버와 원 밴드 양측 모두

상업적 성공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졌고 이제는 옛날 히트

트랙에 의존하며 투어를 순회하는 한물간 가수로 취급받는

실정이다. 애초에 멤버들 모두 40대를 넘긴 나이에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어 상업적 동력을 되살리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터이다.



하지만 늦은 나이에 블루스로 다시 회귀한 에릭 클랩튼이나

클래식 작품을 발표한 폴 매카트니 같은 분이 있음을 볼 때

늦은 나이가 핑계는 될 수 없음일 것이다. 애초에 시카고가

데뷔 모토를 '나팔 부는 락앤롤 밴드'로 표방하고 시작했으니

늘그막의 음악적 귀결은 정통 딕시랜드 사운드를 재창조한

창의적 커버 또는 창작곡 정도로 맺었어야 마땅할 얘기이다.

아니, 그렇게 주장한다.



(Scheff)




시카고가 미국 시장에서 보수 성향의 백인계 미국인들에게

주는 영향력과 비교할 때, 도대체 이런 대단한 밴드가 트리플

A급 세계구 아티스트로 올라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곤 했는데, 아마도 이런 결정적 한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터이다. (냉정하게 말해 이들의 시장 파급력은 북미

및 일부 지역에 국한하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래도 판매고

합하면 1억 장에 달한다.)



제임스 팬코우로버트 램을 중심으로 리 러크네인

월터 패러자이더가 더해진 터줏대감 멤버들이, 과연 말이

통하는 방향으로 밴드를 이끌어왔는가 하는 점도 한번쯤

곱씹어볼 대목이다. 사람 숫자가 많을 뿐더러 멤버 교체가

너무 빈번하게 발생한데다, 창립 멤버인 피터 세테라

대니 세라핀에, 교체로 들어오지만 밴드 역사의 중요한 한

대목을 오래도록 지탱해온 빌 챔플린제이슨 셰프까지,

결국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은 과연 무엇일까.



(Champlin)




우리가 중심이니 우리 생각대로 따르지 않으면 결국 떠날

수밖에 없을 거다 하는 식으로, 기둥 멤버들의 묘한 꼰대

의식 같은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

역사에서의 기여도를 따질 때 세테라, 세라핀, 셰프 등 세

사람은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낼 만한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 버디 리치가 극찬해 마지 않았다는 대니 세라핀

심지어 해고라는 형식으로 떠나 보내다니.



창작자로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 노력하지

못한 한계, 여기에 함께 한 공동의 세월을 서로 인정하지

않고 묘한 아집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놓치고 만 관계의

응어리.. 미국 음악사 수십 년간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면서

어느 일정한 선 이상은 뚫지 못했던 유리벽의 원인인즉슨

멤버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아울러 저 세상에서 테리 카쓰가 이런 멤버들의 행보를

보고 참 무던히도 안타까워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고.



(Seraphine)



(Kath)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노년에 접어든 세테라 옹의 음악

활동도 대략 이런 정도에서 마무리가 될 것 같다. 시카고

및 그 자신의 관계에 관해 수많은 사람들의 억측이나 공분,

오해와 회한을 뒤로 하고... 적어도 두 시대, 약 30여 년에

걸친 세월 동안 미국의 대중 음악 시장에서 일정한 창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타고난 섬세한 보이스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 공로는 결코 폄하할 수 없으리라.



일부 시카고 광팬들이 세테라를 욕하는 결정적 원인은

명예의전당 헌액식에 참석도 안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한 가지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연예인들이

욕먹는 마약, 폭력, 섹스 류의 이렇다 할 스캔들을

일으킨 적은 없는 세테라이기에 이거 하나 갖고 몇

년치 욕을 울궈먹는 건 좀 과하지 않나.. 어쨌든 조만간

팬들의 오랜 오해도 풀어주는 포용을 보여 주시기를.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news/chicagos-robert-lamm-talks-peter-cetera-absence-at-rock-hall-225418/


http://ultimateclassicrock.com/peter-cetera-chicago-rock-hall-2016/






사실 본 블로거가 가장 좋아하는 시카고의 트랙은 피터

세테라가 떠난 직후 발표하여 싱글 3위까지 오른 Will You

Still Love Me이다. Chicago 18에서 가장 빼어난 곡이고

데이빗 포스터가 조율한 팝 발라드 시대의 마지막 불꽃을

활활 태운 역작일 터이다. 제이슨 셰프의 장점이 가장

두드러지기도 했고. 당시엔 세테라가 떠난 자리를 꿰찬

그를 두고 어디서 어린 놈이 나타나 노래를 이렇게 잘

하나 생각하기도. 다 옛날 일이지만.



피터 세테라가 피처링으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던 시절인

89년엔 영화 Chances Are의 주제가로 After All셰어

함께 불렀는데 이것 역시 강력하게 추천하는 명곡이다. 바다

건너 미국에선 결혼식 축가 올타임 리퀘스트 송이라고. 꽤

빼어난 클래식 코메디인 영화 역시 추천할 만한 수작이다.

특히 빛나는 보석 같던 로다주의 젊은 시절을 기억한다면.

두 아름다운 노래를 추천 때리며 포스팅을 끝내련다.



('Will You Still Love Me' from Chicago 18, 1986)



('After All' by Cher & Peter Cetera,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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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락 보컬은 이 분이 등장하기 전과 등장한 후로 나뉜다.

그리고 모든 락 음악은 이들 이전과 이후로 나뉘기도 하고.

오늘날 락 음악에 종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술 세계에

영향을 주고 10년 여의 활동 기간을 뒤로 한 채 활활 불태우고

홀연히 떠나간 비행선 같은 전설의 뮤지션들...



락 보컬의 원형을 제시한 로버트 플랜트 Robert Plant

(1948~).. 그리고 여기에 레드 제플린에 대한 이야기이다.









객관적 평가의 이야기를 해볼까. 프레디 머큐리를 18위에

올려놓은 롤링 스톤 지의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가수들

100명 랭킹에서 플랜트는 15위를 차지했다. 영국 방송사

플래닛 락의 2009년 조사에서 그는 락 음악계 가장 위대한

보이스로 선정되었고, 미국 방송사 NPR의 2010년

조사에선 50명의 위대한 목소리 중 하나로 뽑혔다.



헤비메탈 전문 매거진 히트 퍼레이더가 2006년에 발표한

100명의 위대한 남성 메탈 보컬리스트 랭킹에서 그는 당당히

1위이다. 재미있는 건 그에게 영향을 받은 동료와 후배들이 이

랭킹의 하단에 줄줄이 위치한다는 점. 2위의 롭 핼포드, 3위의

스티븐 타일러, 6위의 프레디 머큐리, 13위의 게디 리 등등.



여러분들이 인식하고 있을 법한 명가수나 보컬리스트들이

자신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한 번 쯤은 언급한 전설이 바로

이 분인 것. 그 프레디 머큐리마저도. (데뷔와 히트 연도로

치면 5년 정도 앞서니 선배 맞다.) 멀리 갈 거 없이 이 분

그냥 별명이 락앤롤의 신이란다. 뭐 더 설명이 필요한지.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robert-plant-5-225584/






레드 제플린 Led Zeppelin은 락 음악과 하드락 역사에

분수령이자 분기점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60년대말 락앤롤

장르가 블루스사이키델릭에서 변화하는 시점이 늦춰졌을

것이고 70년대에 헤비메탈이 분화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심지어 프로그레시브 장르에도 여파가 미쳤을 거다.

포크에도 어느 정도는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거다. 한

마디로 비틀즈와 작별한 음악계의 다음 정착지였던 셈이다.



리더이자 구심점은 흔히 바보들의 3대 기타리스트로 꼽히는

지미 페이지. 그 셋을 배출했다는 야드버즈가 사실상 와해된

야드버즈를 결성하려고 멤버를 끌어모으던 중 가장

먼저 리쿠르트한 인물이 보컬리스트 로버트 플랜트였다.

'이렇게 뛰어난데 왜 아직 묻혀 있었지' 라고 생각했단다.



밴드 오브 조이란 데서 노래하던 플랜트야드버즈 후신

성격의 프로젝트를 수락하고 동료인 존 본햄을 드러머로

추천한다. 제프 벡과의 레코딩 협업을 통해 페이지가 원래

알고 지내던 존 폴 존스를 영입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설의 진용은 이렇게 완성된다. 1968년 8월쯤. 처음

잼을 맞추며 서로 불꽃이 튀었고 성공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섰다고...



신인이면서도 이미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이들은

68년 9월초 당장 덴마크 클럽에 섰고 그 달 말엔 9일간

후다닥 첫 앨범을 녹음해 버린다. 즉 69년 1월 발매로

알려진 역사적 데뷔 앨범은 사실 전년도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 젊고 뜨기 전이지만 이미 음악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들. 만나자 마자

서로를 알아보고 화학 반응을 일으킨 것 아니겠는가.



 (Led Zeppelin)



 (Led Zeppelin)




역사상 가장 위대한 데뷔 앨범으로 꼽히는 Led Zeppelin.

이렇게 나온 결실이다. 밴드 이름을 정하는 데는 더 후

키스 문이 팁을 줬다는 소문도 있었다. - 페이지 친구. 앨범

커버에는 1937년에 미국 뉴저지에서 폭발한 독일식 LZ

129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사고 사진을 실었다. 그리고

비행선이 폭발했듯이, 앨범은 대박으로 폭발해버린다.



I의 전반적 장르는 블루스락 또는 헤비블루로 요약된다.

발표 후 세상을 놀래킨 대곡 Dazed and Confused

보여준 끈적한 중량감이 입증한다. (69년 기준) 일찍이

블루스가 이토록 무거운 공격성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가.

플랜트의 야성적 팔세토와 페이지의 창조적 솔로잉, 이

한 세트가 음악사의 브랜드가 될 것임은 앨범 하나로도

충분히 알 만한 일이었다. 페이지가 현악기 활로 기타에

보윙을 시도하는데 즐거운 해프닝 같은 것이었



Good Times Bad Times Communication

Breakdown 같은 곡에서 페이지의 프로듀싱 능력과

밴드의 상업적 표현성이 심상치 않음을 드러내기도.

히트할 튠을 조율하는 감각에 있어 당시 일정한 절정에

근접하고 있는 네 사람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었다.

Babe I'm Gonna Leave You는 이후 앨범에서

계속 등장할 서정적 작품군의 프렐류드 같기도.





('Dazed and Confused' from Led Zeppelin, 1969)



('Communication Breakdown' from Led Zeppelin, 1969)


('Good Times Bad Times' from Led Zeppelin, 1969)



 (Led Zeppelin II)




음악을 듣다 보면 그런 게 있다. 이 앨범, 도대체 버릴 노래가

있긴 한 건가. 그때 우린 명반이란 말을 떠올린다. 모든 트랙이

필청이란 말씀. 투어와 스튜디오를 왕복하며 1년쯤 준비해

10월에 낸 Led Zeppelin II가 딱 그런 경우였다. 아니, 솔직히

I은 블루스 안 내키는 사람도 있을 테니 그렇다 치자. 이제부터

나오는 그들의 앨범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음악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 것. 비틀즈스톤즈 이후 이런 일이 있었던가.



아 물론, 저작권 개념이 흐릿한 페이지의 표절 시비가 있긴

하다. 허나 하나의 완성된 트랙을 만들어 앨범 전체의 일관된

톤을 프로듀싱하는 능력에 있어, 레드 제플린을 폄하할 수

있겠는가 싶다. 평론가와 언론이 종종 이들의 최고 작품으로

꼽으며 가장 유명한 기타 리프를 가진 Whole Lotta Love

들으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마련. 2012년에 롤링 스톤 지가

들 최고의 명곡 40곡을 엄선한 때도 이 곡이 '당연히' 1위..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the-40-greatest-led-zeppelin-songs-of-all-time-154694/whole-lotta-love-1969-170042/



본작에선 역대급의 세션으로서 리듬 파트를 탄탄하게 받쳐

라이브를 살아있는 활어로 만드는 존스본햄의 진가가 특히

두드러진다. 톨킨반지의 제왕 노래한 Ramble On

리드밍 커플 조화가 매력적으로 두드러지는 트랙이며

특히 팬덤에서 인기가 높다.



섹드립 가사로 알려진 The Lemon Song에서 존스의 베이스

라인과 진저 베이커에 영향받은 Moby Dick의 본조 드러밍은

절정감을 선사할 게다. (본조본햄의 별명) Heartbreaker

흔히 헤비메탈 장르의 효시를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작품이고

플랜트의 불륜을 소재로 한 What Is and What Should

Never Be 역시 필청의 트랙이다.



물론 이미 수많은 음악이 나와 다양한 장르가 발전한 지금의

기준으로 본작이 대단하게 들리지 않을 수도. 하지만 한때는

락 음악과 헤비메탈이 음악의 대세였던 적도 있고 수많은 후배

음악가들의 작곡에 기준점을 제시한 앨범이란 점을 명심하시라.

앨범 차트 1위 및 플래티넘 기록 등 상업적인 성공도 전작보다

더 대단했고 여러 모로 레드 제플린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II는 복기할 만한 중요도를 가지는 걸작 앨범임에 틀림없다.



('Whole Lotta Love' from Led Zeppelin II, 1969)



('Ramble On' from Led Zeppelin II, 1969)



('Heartbreaker' from Led Zeppelin II, 1969)




 (Led Zeppelin III)




강렬한 Immigrant Song을 내세워 1년 후 70년 10월에

낸 Led Zeppelin III는 그들 음악의 또 다른 뿌리브리티쉬

포크의 색채가 강해 락 키즈를 적잖이 당황케 했다. 최근에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쓰여 슈퍼히어로와의 엄청난

싱크로를 자랑한 이 곡플랜트 보이스의 야수적 매력을

초극강으로 끌어올려 밴드메이트들에게 인기가 높......지만

샤우팅 난이도 땜에 아마추어들에겐 언감생심이기도.ㅋㅠ



전체적 평가가 초월적 완성도를 지닌 다른 앨범에 비해 약간

박한 편이지만 차트 1위 같은 상업적 성공은 여전했다. 헤비

블루스의 미학이란 면에서 Since I've Been Loving You

엄청난 트랙이 실려 아시아 등지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블루스

고전을 모던한 어쿠스틱 감성으로 뒤살린 Gallows Pole,

무그 이펙트에 연결한 기타 인트로가 인상적인 Celebration

Day도 팬덤의 성원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Immigrant Song' from Led Zeppelin III, 1970)



('Since I've Been Loving You' from Led Zeppelin III, 1970)

(흡사 레이 만자렉을 연상시키는 존스의 세션..)




 (Led Zeppelin IV) (untitled)




도대체 버릴 노래가 있긴 하나 싶은 앨범. 이런 작업을 해낼

기회는 절대 자주 오지 않는 법. 락 음악의 시대 70년대에

뮤지션 커리어의 전성기를 보낸 레드 제플린은 그런 기회가

몇 번씩이나 찾아온, 달란트와 행운이 넘치는 밴드였는데...



Led Zeppelin IV - 사실 제목이 없는 untitled라 칭해야

옳긴 한데 - 는 그런 앨범이면서 동시에 음악사상 가장

성공한 앨범이기도 하다. 때는 III가 나온 후 약 1년 지난

71년 11월쯤. Stairway to Heaven이 수록된 앨범이다. 뭘

모르는 사람은 이 곡 하나만의 인기로 잘 나갔다고 착각하기도.



I - 사이키델릭, II - 하드락, III - 포크, 그리고 전체 세계관에

공통 기반이 되는 블루스로서, 자신들 음악의 바탕을 규명한

거라면 IV는 세 가지 뿌리를 통합한 완전체라고나 할까.

프로그레시브에 가까운 스테어웨이 투헤븐만 들어봐도 여러

장르의 색깔이 드러나지 않는가. A마이너 키의 어쿠스틱

아르페지오가 오버더빙된 Mellotron M400과 어우러진

인트로.. 디스토션 걸린 기타와 본조의 드러밍 템포를

올리고 플랜트의 팔세토가 텐션의 정점을 찍는 구도.. 풍자에

신비주의가 배합된 가사까지.. 당대 락 음악의 정수인 것이다.



Gibson의 상징과도 같은 페이지는 다양한 톤을 동시에

구사하기 위해 라이브에선 더블넥 기타를 자주 사용했다.

보통 12현과 6현 넥이 결합한 EDS-1275를 썼다. 존스

샘플러는 주로 Mellotron이었다가 Yamaha GX-1 나오니

유행을 따라 엘렉톤을 차용하기도.



(Gibson EDS-1275)



(Mellotron M400)



('Stairway to Heaven' from Led Zeppelin IV, 1971)



(가장 유명한 73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 버젼)




근데 본작의 명곡이 이게 다가 아니란 것. 영원한 락 앤썸

Rock and Roll은 뭐 워낙 유명하니 그렇다 치자고. 진짜

놀라운 건 Black Dog 아니던가. 페이지의 리프가 아무리

날뛰고 놀아도 꿋꿋하게 rock-steady한 본햄의 드러밍이란.

이 곡의 하이노트는 난이도가 너무 높아 플랜트 본인도 녹음

때 말고 라이브에서 왠만해선 시도 안 한다며.



평단이 입이 마르도록 칭송하When the Levee Breaks.

(1927년 미시시피강 대홍수둑이 무너진 일이 배경이란다.)

컨트리와 블루스가 적정 배합하여 오묘한 이 분위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지. 포크 미학의 함수 같은 Going to California

까지.. 가만 보면 숨어 있는 포크풍 트랙의 아름다움도 도무지

만만치가 않다.



IV.. 전 세계에서 3700만 장이 팔렸고 역대 미국 음악 시장

최고의 성공작 중 하나이다. 락 밴드의 디스코그래피에서 4집

쯤 와서 정점을 찍는다는 징크스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카더라.



('Black Dog' from Led Zeppelin IV, 1971)



('When the Levee Breaks' from Led Zeppelin IV, 1971)



('Rock and Roll' from Led Zeppelin IV, 1971)




 (Houses of the Holy)




IV에서 세계적 대폭발을 일으킨 레드 제플린 그들 커리어

최절정의 정점을 찍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제 하강할 일만

남았겠지만 실력있는 음악가의 저력은 하락 곡선의 낙폭을

얼마나 완만하게 조율해낼 수 있는가 여부에 달린 것. 73년

3월에 발표한 새 앨범은 신기하게 넘버링하던 패턴을 깨고

Houses of the Holy, 성스러운 행위의 장소란 제목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네 명의 전설이 적어도 음악적 완성도에선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음을 입증하는데 충분했다.



어찌 보면 전작의 몇 곡처럼 강렬한 임팩트가 부족해 보일진

모르나 그만큼 전작이 엄청났다는 것일 뿐. 곱씹어 감상한다면

한 곡 한 곡 충만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완성작임을 알 수

있을 터이다. 산뜻하고 강한 오프닝 트랙을 배치하는 전통을

좇는 The Song Remains the Same이나 어쿠스틱에

적당히 하드함을 섞은 Over the Hills and Far Away 등,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트랙들이 지금까지 표현하지 않은

빈틈을 찾아들어와 팬덤을 만나고 있었다.



처음으로 레게를 끌어온 D'yer Mak'er(자메이카를 영국식

영어로 음차한 말)나 EMS VCS3Moog Taurus 다루는

존스의 영향력이 돋보인 No Quarter를 들으면, 팬덤 스스로

능동적으로 곡의 매력을 찾아 탐험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하는

듯하다. 아마도 멤버들이 생각한 본작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The Ocean 아닐까 하는데, 치기어린 8분의 15박자 (15/8)

메인 리프가 안기는 청량감이 후대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팬덤의

열광적 지지를 지금까지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존 폴 존스의 장비에 관한 해설)

http://www.mixdownmag.com.au/gear-rundown-john-paul-jones



(EMS VCS3)



(Moog Taurus)




상업적 성공은 더 이상 관심거리도 아닌 거물이 되어버린지

오래. 본작도 판매 성과는 여전히 고공 행진이었고 발매 직후

단행한 북미 투어도 성공적이어서 그 기록을 훗날 라이브

앨범으로 남길 정도였다. 74년엔 스완송이란 자체 레이블을

설립한다. 본작 트랙에 대한 평가가 평단은 오버더힐스~,

팬덤은 오션 쪽으로 갈리는 듯하나 사실 두 곡 다 고른 지지

받는다. 완성도 충만한 트랙들로 전곡을 꽉꽉 채운, 오랜만에

감상한 거장의 수작이랄까... 한 마디로 본작을 정의한다면.



('The Song Remains the Same'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Over the Hills and Far Away'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The Ocean'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Physical Graffiti)




2년쯤 시간이 흐른 75년 2월 Physical Graffiti란 또다른

명반이 나온다. 무려 더블 앨범으로서 스완송 레이블 설립

직후 의욕으로 충만했던 듯하다. 준수한 완성도를 가진 곡을

두 배로 선물한 것. 일반 대중에게 명곡 Kashmir를 수록한

앨범으로 유명한 바로 그 작품. 흔히 그들식프로그레시브

불리는 대곡이고 아랍풍 음률을 차용한 폴리리듬의 리프가

대단히 유명하며 존스본햄의 탄탄한 백업이 다른 어떤

곡에서보다 더 두드러져 음악사에 길이 남을 걸작 트랙이다.



(백인의 락에 관심 두지 않는 자존심 강한 흑인 랩퍼들마저

샘플링하여 사용한 이야기.. 이젠 다들 아실 거다.)

*캐쉬미어의 폴리리듬에 대해선 아래 링크 동영상의

4분 50초경부터 보면 알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Om2oZRQIk



점입가경은 본작의 대작이 하나가 아니란 것. 11분짜리 대곡

블루스 In My Time of Dying이나 9분에 약간 못 미치는

프로그레시브 In the Light에 이르면, 초창기 느린 대곡을

실험하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이들의 초심을 읽을 수 있다.

The Rover, Houses of the Holy, The Wanton Song

등에선 페이지가 얼마나 빼어난 리프를 만드는 장인이었는지

깨닫고 다시 장탄식하게 될 거다. 기타 트랙 14개를 중첩한

오버더빙으로 촘촘하게 리프를 엮어낸 Ten Years Gone,

본조의 베이스 파운딩이 작렬하는 Sick Again.. 쉴 틈이 없네.



개인적으로 존 폴 존스가 가장 이상향의 뮤지션인데 그가 연신

Hohner Clavinet을 그루브하게 때려대는 미칠 듯한 매력의

트랙이 Trampled Under Foot이다. 72년에 크게 히트한

스티비 원더Superstition에서 영향받았다 하며 안 그래도

모타운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존스부커 T. 존스

빌리 프레스턴 같네. 이들이 선보인 흔치 않은 funk 곡이다.

75년 5월엔 본작의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런던의 얼스코트

아레나에서 전석매진 공연을 5일간 벌여 인기를 입증하였다.



(Hohner Clavinet D6)



('Kashmir' from Physical Graffiti, 1975)



('The Wanton Song' from Physical Graffiti, 1975)

(앞부분에 다른 곡의 리프가 섞여 있다.)



('Trampled Under Foot' from Physical Graffiti, 1975)




 (Presence)




76년 3월에 발매한 Presence 앨범은 그들의 하락세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증거 같기도 하다. 존스-본햄 듀오의

리드미컬한 백킹이 10분 이상 이어지는 인상적 오프닝

Archilles Last Stand가 매력적이며, 오버더빙으로

겹겹이 쌓아올린 페이지의 차랑차랑한 리프가 여전히

독창적이지만, 약간의 자기 복제가 느껴져 예전 만큼의

파괴력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세션 셋에 비해 플랜트의 역량이 뭔가 허전하다고

느꼈다면 정확히 들은 거다. 이때 교통사고로 약 1년간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했고 앨범 녹음도 앉아서 진행했던

것. 이 덕에 전작처럼 진하게 블루지하게 는 진지함도,

5집의 Song Remains~처럼 날카롭게 찌르는 스킬

2프로쯤 부족해 보인다.



Song Remains~ 끝나기 직전에 선보인 찌르는 샤우팅

플랜트가 전성기에 선보인 초고음 중 거의 마지막이라고

보는 것이 보통 통설인 듯하다. 사고를 당했다고는 하나

아직 젊은 나이인데 몸 상태에 무리가 있다기보단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플랜트의 음악 성향이 중저음을 개발하는

쪽으로 변화해가고 있음을 읽을 수 있겠다.



밴드의 공연 투어는 여전히 잘 나가고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내외부의 음악 환경이 변화하고 있었다. 그래도 Nobody's

Fault But Mine 같은 트랙은 여전히 강하고 광채가 난다.

77년 4월의 미시간주 폰티악 실버돔 공연은 7만 6천이 넘는

유료 관객을 기록하여 기네스북에 올랐다. 지속된 성공 속에

악재가 끼기 시작했는데 본햄과 공연 스탭들이 폭행건으로

체포되기도 했고 77년 7월엔 플랜트의 다섯 살 된 아들이

질환으로 유명을 달리 하여 충격을 주기도 했다.



('Achilles Last Stand' from Presence, 1976)



('Nobody's Fault but Mine' from Presence, 1976)




 (The Song Remains the Same)




정규 앨범이 아님에도 76년 10월 현역 시기에 낸 유일한

라이브란 의의 때문에 The Song Remains the Same

레드 제플린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청의 음반이다. 녹음은

73년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담은 것이기 때문에

정말 전성기의 따끈따끈한 활동상을 거의 유일하게 저장한

앨범이다. 동명의 콘서트 영화도 있으니 플랜트의 전성기가

궁금한 분들은 반드시 참조할 만하다.



사실 라이브 발매 당시인 70년대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특히

3년쯤 전에 발매된 딥 퍼플의 라이브 Made in Japan이 워낙

출중한 완성도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여러 모로 비교질을

당한 셈. 두 밴드의 합주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었던 것이, 각자

개인 연습을 충실히 해서 서로 완벽하게 합을 맞추는 전략으로

임한 딥 퍼플에 비해 - 존 로드리치 블랙모어가 클래식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전통적인 어법으로 음악에 접근한 것 -,

개개인의 자유도를 중시하며 페이지의 리딩에 충실하게 따른

레드 제플린은 라이브에서 미스 노트가 잦다거나 레코딩과

너무 동떨어진 애드립으로 노는 경우가 꽤나 발견된 것이다.



이 라이브에서 백미는 역시 Dazed and Confused듯.

6분 30초 곡을 무려 27분 길이로 만들어 놓았다. 동명의

영화 사운드트랙이란 형식인지라 약간 생뚱맞은 연기 씬도

들어가 있어 나름 재미를 느낄 수도. 한창 전성기 젊고 고운

멤버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가치도 있다. (또한 보고 싶은

본조의 생전 모습 역시...) 스테어웨이 투헤븐의 가장 유명한

라이브 버젼이 수록되어 있단 이유로도 들어볼 만하겠다.

마지막 사이키델릭이라는 Whole Lotta Love도 스튜디오

버젼과 상당히 다른 이펙트가 있어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왜 들어갔는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콘서트 영화의 초반 스토리 씬)





(앞부분Heartbreaker. 4분께부턴 Whole Lotta Love.)



(이건 동명의 트랙을 노년의 라이브에서 연주한 비디오)

(노년에 키를 낮춰 부르는지라 찌르는 샤우팅은 자제하신다는..)




 (In Through the Out Door)




78년 11월경 이들이 아바의 작업으로 유명한 스톡홀름의

폴라 스튜디오에 다시 모여 다음 앨범을 녹음하였고 이는

이듬해 8월에 발매된다. 레드 제플린 최후반 정규 앨범

In Through the Out Door. 디스코, 펑크, 뉴웨이브

등 대외 환경의 변화에 맞춰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려

노력했으나 역대 앨범 중 결과가 가장 좋지 못했다. 대체로

페이지보다 존스가 전면적으로 부각되어 작업을 진행했고

신디사이저 사용이 확대되며 블루스 일변도를 줄였지만

이채로울 뿐 생경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멤버들 개개인이 겪은 인생의 부침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특히 플랜트는 교통사고 당시 자신보다 아내가 더 큰 부상을

입었고 이후 어린 아들의 죽음을 겪으며 심리적으로 상당히

큰 변화를 겪은 것 같다. 그래도 그루브 넘치는 Fool in the

Rain아버지 플랜트로서의 따뜻한 목소리를 담은 발라드

All My Love는 체 디스코그래피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걸작이다. (이 곡은 특히 절대 흔치 않은 존스신스 솔로

파트가 압권이다.) 존스의 신디사이저가 시종일관 압도하는

Carouselambra 역시 취향과 기호에 따라...



('Fool in the Rain' from In Through the Out Door, 1979)



('All My Love' from In Through the Out Door, 1979)




 (Coda)




한편 존 본햄에겐 알콜이라는 오래 된 나쁜 친구가 있었다.

80년 9월 24일 공연 리허설 전 아침식사로 햄롤과 보드카를

들이킨 그는 오후 내내 술을 달고 있었고 그날 밤 페이지의

집에서 잠들었다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사인은 구토에

의한 질식사. 알콜 의존증이 의심되는 정황이었다.



70년대의 또 다른 전설 드러머들인 코지 파웰이나 카마인

어피스가 대체 멤버로 리쿠르트된다는 소문이 난무했으나,

80년 12월 4일 결국 나머지 셋은 밴드의 해체를 발표한다.

이로서 네 명의 전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다.



Coda는 해체 후 몇몇 라이브와 미발표 트랙을 긁어모아

82년 11월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이다. 락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준 전설적 드러머 본조를 기억하며 넣은

Bonzo's Montreux의 76년 라이브 아카이브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모곡이라고 하겠다.



('Bonzo's Montreux' from Coda, 1980)




본햄과 밴드가 사라졌지만 나머지 셋, 특히 플랜트페이지

중심의 재결성 소식은 이후 수십 년간 팬덤에 희망 고문을

선사한 오래 된 떡밥이었다. 존스는 존스대로 두 사람에게

약간은 소외된 관계를 서운해 하기도 그리워 하기도 했고.

해체 후 그들이 다시 뭉친 건 85, 88, 94, 95, 07년으로

대략 다섯 차례 정도. 85년엔 라이브 에이드로 해체 후 처음

셋이 뭉쳤는데 컨디션 안 좋고 튜닝 안 맞는 기술적 사유로

인해 이래저래 욕먹은 결합이었다. 88년 회합도 마찬가지.



(대체로 상했던 라이브. 드럼 중 한 분은 무려 필 콜린스..)




94년엔 당시 유행하던 언플러그드 열풍을 좇아 페이지

플랜트 둘만 뭉쳐 No Quarter: Jimmy Page and Robert

Plant Unledded를 발표하는데 반응이나 평가도 좋았다...

존스가 소외되었단 점만 빼고. Gallows Pole은 중년이 된

플랜트가 더 원숙한 색채를 보여줬다고 인기도 있었으니

관심있으면 들어보시길. (Page and Plant는 98년에 아예

신곡으로 채워 신보를 냈으나 반응이 예전 같진 않았다고...)



('Gallows Pole' from No Quarter, 1994)




철저하게 소외되신 존스. 95년 로큰롤 명예의전당 헌액식

두 사람을 옆에 두고 '그래도 전화번호 안 까먹었다니 고맙네'

드립을 쳤그대로 전파를 타면서 소위 JPJ왕따설을 확정.ㅜ

사실 존스는 70년대에도 두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구도에

빈정 상해서 두어 차례 가출, 아니 탈퇴했다 돌아갔을 정도.

모두를 포용하지 못하고 소외되는 부분이 생기는 현상

결국 페이지리딩이나 플랜트의 엘리트주의가 애초부터

치명적 한계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방증일 것.



(존스의 씁쓸한 멘트는 6분 20초 경부터..)



(연주한 곡은 IV의 When the Levee Breaks.. 드럼엔 제이슨 본햄!)




97년엔 레드 제플린 디스코그래피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라이브 BBC Sessions가 발매된다. 69년과 71년, 한창

시절에 거침없이 불러제낀 내용의 아카이브인지라 해체

후 발매 앨범 중 첫손에 꼽을 만한 컬렉터블일 터. 이때만

해도 초창기 블루스 잼에도 주력할 때라 특히 30년대 델타

블루스의 기초를 세운 거장 로버트 존슨의 곡을 재해석한

Travelling Riverside Blues는 팬덤에서 꼽는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트랙임을 아셔야 한다. 이 밖에도 귀담아

들어볼 만한 고전이 많아 블루스에 탐닉하는 팬층은 훨씬

더 높게 평가하는 숨은 진주 앨범이라 하겠다.



('Travelling Riverside Blues' from BBC Sessions, 1997)




03년엔 72년의 LA실황을 담은 또 하나의 전성기 라이브 앨범

How the West Was Won이 발매되어 팬덤의 지갑을 털...

아니 지지를 받았고, 07년엔 24개 대표곡을 모은 컴필레이션

Mothership이 발매되어 최근 나온 앨범 중 가장 각광을 받은

컬렉션이 되었다. 마더쉽엔 본 포스팅이 추천하는 왠만한 걸작

트랙들이 거의 실려 있으니 입문용으로 꼭 하나의 앨범을

골라야 한다면 이 앨범부터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다. LA실황

앨범은 페이지 스스로 추천사를 썼듯이 그들 활동 최절정기를

온전히 담은 사운드보드 레코딩이란 의미가 있을 것이다.



(How the West Was Won)



 (Mothership)




팬덤에서 경천동지할 일이 07년 12월에 일어나는데 노년에

접어든 세 멤버의 공연이 성사된 것이다. 런던 O2 아레나

공연으로 팬덤 사이에서 통칭되는 이벤트를 통해 어쩌면

그들이 죽기 전 마지막일지 모를 회합으로 노병들의 화려한

말년을 장식할 기념비적 아카이브가 남겨진 것이다. 95년

명예의전당 헌액 공연처럼 이번에도 제이슨 본햄이 스틱을

잡고 아버지의 혼을 담아 열정적으로 합을 맞추었다. (아들

제이슨도 이젠 알아주는 백전노장 드러머이다.) 본 라이브는

12년에 Celebration Day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Celebration Day)



(명기와 명연주자. Korg Oasys를 연주하시는 존스 옹..)


(할로우바디 Les Paul의 둔중한 톤이인상적이다.)




솔로 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역시 프론트맨이었던

플랜트. 해체 전부터 공격적인 튠보다 락앤롤 이전 원형적인

음악 형태에 관심을 보이던 그는 80년대 초반 솔로 음반에선

그가 청소년기에 동경하던 초기 락앤롤 가수들의 편곡에 꽤

가까운 중저음 팝락으로 각광을 받았다. Honeydrippers

프로젝트성 밴드에서 그는 지미 페이지제프 벡이란 양대

거성을 세션으로 초청하기도. 50년대 필 필립스의 히트곡

Sea of Love를 농담처럼 녹음하기도 했는데.. 왠걸 이 곡이

덜컥 싱글 차트 대박을 쳐버린다. 84~85년경.



사실 플랜트는 진지하게 녹음할 생각은 없었고 - 그 자신도

50년대 R&B를 좋아했지만 - 프로젝트를 주도한 애틀랜틱

레코드 사장 아흐메트 에르테군이 좋아하는 노래라고 약간은

선심성으로 녹음해줬는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ㅎ 참고로

에르테군은 여러 뮤지션과 두루 친분이 있어서 07년 재결합

공연이 사실은 이 분 추모 이벤트 형식으로 뭉친 것이었다.



노년의 플랜트는 컨트리 블루스 계열의 루츠 장르로 돌아왔다.

한때 블루그래스 계열 음악을 하는 앨리슨 크라우스와 듀오로

공연을 자주 하셨다고.



('Sea of Love' by the Honeydrippers, 1984)




밴드 뮤지션으로서의 로버트 플랜트는 리더와 멤버들의

백킹에 완벽하게 조응하여 팔세토 테크닉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능력을 갖춘 보컬리스트이면서 마지막 히피로서

사이키델릭과 판타지를 결합하여 섹드립을 예술로 승화한

가사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안 작사가였다.



개별 멤버들이 자신이 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책임지는 같은 밴드의 송라이팅 구조와 비교하여,

레드 제플린지미 페이지의 음악적 리딩을 철저하게

존중하는 구조였으므로 플랜트 같은 멤버들의 창작적

기여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프로듀싱 만렙의 기타리스트 페이지가 싸고 돌며

플랜트 중심으로 밴드를 운영한 것을 보면 단순히 몇 개의

노트를 창작했는가 수준을 초월하여 플랜트가 가진 유쾌한

상상력의 세계가 리더와 멤버들 전체에 상생하는 시너지를

제공했다고 능히 상상할 수 있겠다. 대체로 레논-맥카트니,

재거-리차드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음악사상 완벽한 듀오

궁합을 자랑한 페이지-플랜트 조합이라고 하겠으나...



랜트페이지 사이도 사실 그리 원만하지는 못했다.

플랜트는 본래 유쾌하고 유머에 능하면서 낯가리지 않는

개방적 성격이고 약간 잘난 척하는 맛도 있는 인간성의

소유자라고 전한다. 잘난 맛에 살기는 페이지 자신도

만만치 않다고. (실제로 음악사에서 잘난 분들이시고.)



해체 전에야 서로 죽이 잘 맞았는데 중년과 노년 시절을

거치며 뭐가 그렇게 안 맞는지, 재결성을 막는 원인이라

말이 많았다. 전술하였듯이 이렇게 두 사람 중심으로만

흘러가는 밴드 구조가 다른 두 사람을 약간은 소외하는

방향으로 흐른 것 같아, 이런 점 역시 팬덤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지미 페이지는 표절 등

저작권 시비에서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고

여기에 로버트 플랜트 자신과 레드 제플린 전체꺼정

밀접하게 얽혀 있음이 사실이다. 비록 발빠른 대응으로

극단적 법정 소송은 대부분 회피하였다지만 창작의

정신이란 것이 소송 막았다고 다 끝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70년대라는 음악사의 변환기를 거치면서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음악 연출의 이상향을 종합적으로

전개하여 제시한 밴드 음악의 교과서인 동시에, 3억 장에

달하는 전 세계 판매고를 세운 음악 산업계 베스트 스테디

셀러로서, 레드 제플린의 가치를 결코 폄하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안에서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낸 로버트 플랜트는 영원히

위대한 보컬리스트로 남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바이다.




(Korg Oasys)



(Bonham)






개인적으로 본 블로거가 최애하는 그들의 작품은 바로

5집에 등장한 애절한 발라드 The Rain Song이다. 이

양반들이 레몬송에서 섹드립 날리던 그자들 맞나 싶을

정도로 일순간 돌변하여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오후의

햇살처럼 아련한 아른거림으로 노래하는 걸 듣고 있자면,

또 존경하는 뮤지션 존 폴 존스께서 그토록 아름다운

멜로트론 음률을 빚어내는 것을 듣자면, 표절 때문에

열받은 마음을 눈 녹이듯이 스르르 녹여내는 것만 같다.



끝으로 레드 제플린 디스코그래피 전체 중 슬픈 아름다움을

노래한 비장미로서의 절정을 갈구한 명곡, 레인송을 강력

추천하며 길었던 포스팅을 마친다. 본조의 육중한 베이스

파운딩 오늘도 성가마냥 천국에 울려 퍼져 저승길 가는

망자들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 두드리고 있으리라.



('The Rain Song' from Houses of the Holy, 1973)

- studio album version


- lyrics




*키를 한껏 높인 79년 라이브. 존스 옹의 악기는 Yamaha G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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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 ..

1946년에 태어나 91년, 겨우 마흔 다섯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 하신 이 분은 20세기 음악사에

어마어마한 족적을 남긴 대중 예술가이다.






 (Montreux, Switzerland)




디지털 드림 도어 닷컴이라는 대중 문화 랭킹 전문

사이트가 있는데, 남성 락 보컬리스트 부문 랭킹에서

머큐리는 항상 1위였다. 본 블로거 기억으로 이 랭킹이

십여 년에 이른 것 같은데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었다.



같은 사이트의 락 보컬 퍼포먼스 부문에서도

보헤미안 랩소디가 현재 1위이다. 락 에픽, 곧 서사적 락

음악곡 부문에서도 이 노랜 1위. 락 앤썸이라고, 공연에서

떼창 유도할 수 있는 상징적 트랙에선 위윌락유가 1위.

락 밴드 최고의 프론트맨 랭킹에서 그는 현재 5위이다.






생소한 사이트가 마음에 안 드신다면 좀 더 미국 친화적인

롤링 스톤 매거진이 있다. 약 10년 주기로 업뎃하는 이곳의

랭킹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가수들 100명 중 그가

18위를 차지한 바 있다. 최근 2008년 집계 결과였다.

18위가 별 건 아니네, 하시는 분들은 그 위쪽 순위에

어떤 분들이 있는지는 보고 얘기했으면 한다.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freddie-mercury-5-225069/



대략만 읊어도 이 정도. 이 분이 왜 위대한 락 보컬리스트로

불리우는지, 누구나 다 깨닫고 있지만 말로 일일히 설명하기도

참 쉽지 않다. 이처럼 전설적인 아티스트에 대한 포스팅이

망설여지는 이유일 것이다. 겨우 이 정도 필력으로 제대로

표현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그는 오늘날 탄자니아 영토에 속한 아프리카의 잔지바르에서

파르시는 페르시아계 조로아스터 교도 가정에서 태어났고

이후 여기서 쫓겨나 유년 시절을 인도에서 성장하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와서야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흔하디 흔한 기독교계 앵글로 색슨이 주류인 영미권 음악계

전체를 볼 때 참 특이한 배경이 아닐 수 없고, 그가 보여준

독창적 캐릭터와도 깊은 연관이 있겠다 싶다.



브라이언 메이로저 테일러가 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스마일에서 먼저 합을 맞추고 있었을 때 그는 약간 로디

비슷하게 곁을 맴돌다가 두 사람에게 합류한다. 1970년.

밴드 이름을 퀸 Queen으로 바꾸었고 이는 누가 봐도

머큐리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queen에는 속어로

퀴어의 의미가 숨어 있으니..)



밴드 이름과 같은 동명의 데뷔 앨범은 73년에 가서야 늦게

낼 수 있었고, 녹음 두어 해 전 전기공학 전공으로 넷 중 가장

어린 존 디콘이 합류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아는 네 명의

전설적 진용이 다 갖춰진 것이 이 무렵인 셈. 1973년 경.

이듬해 이들은 Queen II 앨범을 발매했다.



 (Queen)




이렇듯 1집과 2집에서 Keep Yourself Alive, Liar,

Seven Seas of Rhye 등 오늘날까지 알려졌고 밴드

역시 콘서트에서 즐겨 연주한 트랙들이 생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성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신디를

쓰지 않고 보컬이 피아노를 겸하는 피아노 락앤롤 정도로

박한 평가를 받았음이 사실이다.



Sheer Heart Attack 앨범에서 Killer Queen이란 대박

싱글이 나오고 나서야 밴드는 세계구급으로 올라선다. 이

곡은 머큐리가 작곡했다. 본 앨범에 이르러서야 클래식과

락앤롤에 바탕을 둔 밴드 음악성의 아이덴티티가 이제

막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74년..



아울러 Brighton Rock, Now I'm Here, In the Lap of

the Gods, Stone Cold Crazy 등 유명한 트랙들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 브라이튼 락에서 선보이는 딜레이 테크닉은

그대로 메이의 전매특허가 되었고, 스톤 콜드 크레이지

쓰래쉬한 파괴성은 이후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Sheer Heart Attack)



 (A Night at the Opera)




스튜디오와의 불화로 밴드 멤버들은 여전히 곤궁했고 돈

한 푼 손에 쥐는 일 없었다. 절치부심하여 75년 넉 달 동안

녹음실에 틀어박혔고 창작적 전성기의 시발점이 된 명반

A Night at the Opera를 같은 해에 발매한다. 그렇.

Bohemian Rhapsody가 실린 그 앨범이다.



보랩으로 불린 트랙은 머큐리 온전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낸 작품이다. Love of My Life, You're My Best

Friend, God Save the Queen, '39, I'm in Love with

My Car 등 명곡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평가는 보랩

곡에 주목할 수밖에 없음을 멤버 모두가 인정했다고 한다.



('Bohemian Rhapsody'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Love of My Life' from A Night at the Opera, 1975)




 (A Day at the Races)




이듬해 1976년엔 A Day at the Races 앨범이 나와

Somebody to Love를 필두로 Tie Your Mother Down,

Good Old-Fashioned Lover Boy 등 트랙을 쏟아냈다.

전성기가 이어진 것이고 본작은 여러 모로 전작의 동

반복 같은 위치였지만 팬덤은 신경쓰지 않았다.

(4집5집의 트랙 구성은 놀랍도록 유사하다고..)



반면 언론과 평단은 여전히 냉담하고 냉소적이었다.

은, 대체로 평론가의 칭찬을 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 ..



('Somebody to Love' from A Day at the Races, 1976)




 (News of the World)




77년 News of the World 역시 창작적 상승가의 연장선에

있던 명반일 거다. 드디어 메이We Will Rock You

선보였고 We Are the Champions는 이 곡의 제2부인

것 마냥 항상 어서 라디오 전파를 타곤 했다. Sheer

Heart Attack, Spread Your Wings 등 정통 락

트랙들도 매력이 있다.



위윌락유의 가사는 의외로 음악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훌리건 패싸움 스토리에 더 가깝다. '락유~'는 문자 그대로

'부셔버릴거야' 정도의 뉘앙스란 뜻. 원곡이 재해석의 여지가

커서 라이브에서 다양한 버젼을 골라볼 수 있는 재미를 주는

곡이기도 하다. 79년 발매된 Live Killers 속 패스트 버젼이

가장 인기가 있는 편인 것 같아 아래에 붙인다.



 (Live Killers)



('We Will Rock You' from News of the World, 1977)



('We Will Rock You' from Live Killers, 1979)




 (Jazz)




78년 7집 Jazz에 와서 연거푸 세 장의 앨범으로 달려온 음악적

지향성이 약간 지친 것 아닌가 싶은 느낌을 주게 된다. 여러 모로

전체 디스코그래피에서 약간 동떨어진 실험성이 돋보인 역작.

머큐리민족 정체성을 떠올리는 듯한 Mustapha부터 상당히

이채롭고 Fat Bottomed Girls에선 로커빌리의 영향을 읽을

수 있으며 Bicycle Race말랑말랑하고 벌레스크스러운

것이 누가 봐도 머큐리가 쓴 곡임을 알 수 있겠다.



무엇보다 본작엔 Don't Stop Me Now가 있다. 제임스 브라운

인가 싶은 정도의 섹드립도 등장하고 엄청나게 흥겨운 이 트랙은

진성 팬덤이 위윌락유보다도 더 앤썸처럼 친애해온 곡이기도...



단, 머큐리가 이슬람교 신자일 거란 오해는 금물이다. 조로아스터

교는 이슬람과 관련 없다. 그냥 이런저런 상업적 요소를 끌어들여

재미있는 노래 하나 만든 거라고 보면 된다. 어차피 서사

사회성은 딱 고만고만하게 적당한 정도만 구사하는 수준이다.



('Mustapha' from Jazz, 1978)



('Don't Stop Me Now' from Jazz, 1978)




 (The Game)




Jazz에서 약간 주춤하나 싶었던 그들은 The Game 앨범으로

다시 한 번 활짝 만개한다. 평단과의 불편한 관계를 전술했는데

하나 더, 이상하게 은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적이 별로 없다.

당대의 세계적인 팬덤은 미국을 제외한 나머지 전 세계라고 보면

대략 옳다. 특히 유럽, 남미, 일본은 그들의 밥줄이라고나 할까.



80년의 이 앨범 와서 결국 그들은 빌보드 앨범 및 싱글 차트 양쪽서

처음으로 1위를 찍는다. 엘비스 프레슬리 캐릭터 모방으로 유명한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은 그들의 유일한 1위 싱글이다.

Another One Bites the Dust는 무려 마이클 잭슨이 일찌감치

히트를 예감한 곡이다. 꽉찬 funky 비트에 그냥 지나칠 리 없었겠지.



Another One~ 가사 역시 동네 양아치들 패싸움 이야기이다.

'(싸우다) 또 하나 뒈졌군' 정도의 뉘앙스라고. 사회 비판적 가사가

비교적 많지 않은 그들에겐 이런 가사 스토리가 의외로 많다.

또한 방식으로 디스코를 받아들인 증거이기도 하다.



Play the GameSave Me 역시 들어볼 만한 트랙들이다.

키보디스트 아닌 사람들은 별 관심 없겠지만 의 디스코그래피

중 처음으로 신디사이저가 등장한 앨범이기도 하다. Oberheim

OB-X란 명기이다.


https://queenvinyls.com/articles/from-harspichord-to-synthesizer-and-beyond-an-introduction-to-queen-organology/



(Oberheim OB-X)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from the Game, 1980)



('Another One Bites the Dust' from the Game, 1980)




(Hot Space)




81년엔 Flash Gordon이란 영화의 사운드트랙 앨범을 만든다.

여기서의 플래쉬는 DC의 그 히어로는 아니다. 한국에 개봉한

적이 없는 SF물이다.



이듬해 Hot Space 앨범을 내는데 비평과 흥행 양쪽에서 다

안 좋아 이후 2~3년간 멤버들이 붕뜬 상태로 솔로 활동에나

매진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데이빗 보위와 함께 한

Under Pressure는 여전히 훌륭한 작품으로 남아 있다.

사회성 짙은 가사로 영국병 걸린 경제 상황을 위무한

걸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정작 총리는 대처..ㅠ)



('Under Pressure' from Hot Space, 1982)




 (The Works)




영화에서 나타났듯이 밴드의 침체기는 결국 라이브 에이드

가서야 부활의 동력을 얻게 된다. 그 전 82년 5월에서 84년 2월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메이테일러디콘 솔로 작업을 열심히들

하셨다. 정작 머큐리는 다음 앨범이 나오고 난 후에 자신의 앨범을

냈다. 즉, 영화의 스토리는 사실과 다르다는 말.



라이브 에이드 전인 84년에 비교적 성과가 좋았던 The Works

앨범을 낸다. 신디사이저를 광폭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입증한

본작에서 Radio Ga Ga, It's a Hard Life, Hammer to Fall

그리고 I Want to Break Free 등 성공작이 쏟아져 나왔다.



멤버들을 전부 여장(!)시켜 찍은 ~Break Free의 뮤비는 매우

유명했고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밴드의 곡 중 흔치 않게

신디사이저 솔로가 등장하여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프레드

맨델이란 세션이 연주했다고 한다. Linn LM-1이란 드럼머신

사용도 괜찮았다.



레디오가가보코더로는 77년에 출시됐던 EMS 2000

쓰였단다. (희한하게도 은, 아날로그 신디 전성기인 70년대엔

단 한 번도 무그를 쓴 적이 없다. 모든 이펙트는 기타

몰아주려 했다나 뭐래나.)



(Linn LM-1)



(EMS Vocoder 2000)



('Radio Ga Ga' from the Works, 1984)



('I Want to Break Free' from the Works, 1984)

*다소 민망한 일본 라이브




(Mr. Bad Guy)




라이브 에이드에서 완전히 부활한 . 하지만 머큐리 자신은

이미 80년대 초반에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한다. 멤버들에게 공식적으로 천명한 것은 사망이 거의

임박한 훨씬 뒤였으나 이미 눈치들은 다 채고 있었다고.



85년엔 이미 예정되어 있던 첫 솔로 앨범 Mr. Bad Guy

발매한다. 그의 솔로 앨범은 두 장 뿐이고 두번째 앨범이 한창

오페라에 탐닉한 말년의 특이성을 보여준다고 본다면, 진정

대중적인 음악 앨범은 이것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신디사이저와 뉴웨이브 요소를 팍팍 쓴 미래 지향적 레트로

사운드의 본작은 마지막 전성기를 달리던 머큐리를 느껴볼

만한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라 할 수 있다.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Living on My Own

양질의 곡들을 수록하였다. 메이드 인 헤븐은 추후 밴드가

재녹음하여 수록한 그 곡의 원곡이다.



('I Was Born to Love You' from Mr. Bad Guy, 1985)




 (A Kind of Magic)




86년에 그들은 앨범 A Kind of Magic으로 돌아온다.
웸블리 이후 첫 공식작이자 발매 기념 월드 투어를 단행한
마지막 앨범이다. 또한 러셀 멀케이 감독의 SF액션 영화
하이랜더의 비공식 OST이기도 하다. (하이랜더 시리즈는
1편까진 괜찮게 봐줄 만하다.)


A Kind of Magic, One Vision, Friends Will Be Friends,
Who Wants to Live Forever, One Year of Love  히트
싱글을 배출했다. 특히 영화의 스토리 내용을 담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제 머큐리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Who Wants~를 들으면 괜시리 숙연해지게 마련이다.


('A Kind of Magic' from eponymous album, 1986)



('Who Wants to Live Forever' from A Kind of Magic, 1986)




대략 이 무렵부터 이제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머큐리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멤버들과의 녹음이나 평소 받아오던
오페라 및 발레 레슨 등 일상적인 예술 작업에는 죽는 순간까지
열정적으로 임했다. 메이도 부부간 사생활에 문제가 생겨 여러
모로 밴드가 앨범 작업에 매진하기는 힘든 때였다고..


86년에는 영국의 프로듀서 데이브 클락의 뮤지컬 컨셉트 앨범
Time에 참여하여 동명의 트랙을 싱글로 발매하여 호평받았다.
87년엔 55년 발표된 플래터스의 R&B곡 The Great Pretender
리메이크 발표하여 원곡보다 훌륭한 해석이란 칭찬도 받게 된다.
(전에 한 번 썼듯이 이 두 곡은 그의 인생작이라고 생각한다.)


88년에 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대비하여 스페인 최고의
소프라노 몽세라 카바예와 일종의 팝페라 앨범인 Barcelona
발표한다. 이때 함께 작업하던 사람들이 성악과 오페라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에 놀랐다는 풍문도 남아 있다.


그러던 와중 89년이 되어 The Miracle 앨범을 출시한다.
우여곡절 끝에 출시된 본작의 완성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The Miracle, I Want It All, The Invisible Man, Breakthru
등 얼핏 들어도 생각나는 좋은 트랙들이 성공을 거두었다. 아래에
아원잇올의 뮤비, 잠깐만 봐도 그의 모습이 초췌해보여 착잡하다..


 (The Miracle)



('The Great Pretender', 1987)

*독일 방송에 출연하여 립싱크하시는...



('I Want It All' from the Miracle, 1989)




 (Innuendo)




거의 말년이 되어간 그의 삶은 조용하게 음악 작업하는 나날들로
채워진 듯하다. 마지막 연인이 된 짐 허튼과 함께. 91년에 드디어
그의 생전 마지막 앨범 Innuendo가 죽기 아홉 달 전에 발표된다.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태우고 사라져가는 촛불처럼 머큐리
멤버들의 작업물은 놀라웠다.


타이틀 트랙 Innuendo는 80년대 내내 선보인 머큐리의 연극적
퍼포먼스를 음악으로 표현한 듯 드라마틱한 구성이 돋보였으며
예스의 기타리스트 스티브 하우가 특별히 초빙되어 어쿠스틱 기타
협연을 펼쳐 보였다. I'm Going Slightly Mad, Headlong,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 등 한 곡 한 곡이 예술가의
인생을 통째로 정리하는 듯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절정감은 The Show Must Go On에서 느낄 수 있었다. 프레디
머큐리 말고 이런 주제를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보컬리스트가
과연 또 있겠는가, 탄식하는 팬 투성이였다. (단, 작곡은 메이가..)
하지만, 롤링 스톤 지는 이번에도 더럽게 까댔다.


('Innuendo' from eponymous album, 1991)



('The Show Must Go On' from Innuendo, 1991)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사른지 아홉 달 후에 그는 숨을 거둔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그를 보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이듬해

92년 4월 20일에 대대적 규모의 헌정 공연 The Freddie Mercury

Tribute Concert가 개최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 음악 소비자가 팬덤화하는 과정에서 처음

접했을 법한 외국의 공연 문화였을 거다. 당시 영미권 음악계를

지배했던 주류 아티스트들이 쪽팔림도 무릅쓰고 머큐리의 음악을

따라 부르며 비교질 당하는 영예를 기꺼이 마다 하지 않았다. 한

음악가가 또 다른 음악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인 셈.



엘튼 존, 로버트 플랜트, 데이빗 보위, 로저 달트리, 토니 아이오미,

애니 레녹스, 폴 영건즈 앤 로지스, 데프 레파드, 메탈리카, 익스트림

등이 여기에 동참한 당시 탑클래스의 헤드라이너들. 지금 봐도 이런

사람들 어떻게 다시 모을까 싶다.



모두 쪽팔림을 감당하며 어려운 원곡을 쩔쩔 매고 소화하는 성의를

보여주었는데, 단 한 사람만은 왠지 '어쩌면 원곡만큼 매력적일지도'

하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대 최고의 블루 아이드 소울 보컬리스트

조지 마이클이었고 그가 의 세 멤버 및 합창단과 함께 한

Somebody to Love는 그해 최고의 인기곡이 되었다.



이 공연 두 달 전에는 음악을 소재로 한 코미디 영화 웨인스월드

개봉해 Bohemian Rhapsody를 삽입했고 영화 속 헤드뱅잉

인기 덕분에 원곡을 역주행시켜 빌보드 핫100 2위에 재진입시킨

엄청난 흥행몰이를 가져오기도 했다.





('Somebody to Love' by Queen ft. George Michael, 1992)




 (Made in Heaven)




머큐리의 목소리를 담은 마지막 정규 앨범 Made in Heaven

95년에 발매된다. 그의 솔로 앨범에 실렸던 Made in Heaven,

I Was Born to Love You 등에 멤버들이 어레인지를 추가해

포함시켰고 Too Much Love Will Kill You, Heaven for

Everyone 같은 새로운 트랙과 생전 마지막 육성 녹음을

조합하여 만들어낸 헌정 앨범의 연장선이었다.



메이가 다른 작곡가들과 만든 Too Much Love~는 밴드의

앨범에 수록된 것과 메이의 솔로 앨범에 실린 것, 두 가지

버젼이 존재한다. 테일러는 그렇다 치고 메이도 참 노래 잘

하는구나, 하는 점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킨 곡이었다.



('Too Much Love Will Kill You' from Made in Heaven, 1995)



('Too Much Love Will Kill You' by Brian May, 1995)




97년에 존 디콘은 영원히 음악계에서 은퇴한다. 본래부터

내성적이고 머큐리의 카리스마적 퍼포먼스를 존경했던

밴드의 막내였기에 남은 두 사람도 존중한 결정이었다.

04년부터 09년까지 나머지 두 사람은 의 이름으로 역시

전설적 보컬리스트인 폴 로저스와 투어를 돌기도 했다.



70년대 전설적 블루스락 밴드 프리배드 컴퍼니의 탁월한

보컬리스트였던 폴 로저스. 뭔가 새로운 창작 활동이 생기나

기대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저 예전 곡들을 불러주는 것에

그쳤고 반응도 아주 뜨거웠다고 보기는 애매했다고 본다.



다만 생전에 머큐리가 보여주고 가지 못하고 떠난 몇몇

트랙의 라이브를 구경할 수 있었다는 보람은 있었다고.

아래 아원잇올처럼. 이들 세 사람은 이 포맷으로 08년에

앨범도 한 장 냈지만 반응은 뜨뜨미지근한 수준에 그쳤다.






폴 로저스와의 작업을 통해 젊은 피 수혈이 필요하다고

느낀 모양이다. 메이테일러 두 사람은 신임 보컬리스트

수소문 작업을 벌였고 11년부터 아메리칸 아이돌 스타로

널리 알려진 애덤 램버트를 리투르트하여 투어 멤버로

기용하고 있다. (이 친구는 영화에도 카메오 등장했지.)



워낙 나이 차도 있고 램버트의 젊디 젊은 기량에서 오는

안정감이나 탄탄한 보컬 실력 덕도 있어, 대체로 기존

팬덤은 이렇게나마 들을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기도

하고 안도하기도 하는 듯하다......만, 누구도 프레디

대체할 수 없다는 여론도 만만치는 않다.



(왜 꼭 대체 보컬을 계속 구해야 하냐고? 그냥 그만 두면

안 되냐고? 이 분들의 직업이 계속 연주하고 투어를 도는

밴드 뮤지션인데 그렇게 반응을 보이면 좀 섭섭할지도...

어찌 되었든 지구상 어딘가에서 의 음악이 계속 현재

진행형으로 연주되고 있다면 만족스러운 일 아닐까.)



(하지만 비교가 되는 건 사실...)




프레디 머큐리의 너무 이른 죽음은 30년 가까이 지난

일임에도 당시 참 충격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민

2세대로서 사회 소수 계층의 설움을 동병상련했던 그의

존재감이나 이에 영향받아 형성된 예술적 자아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건 세월이 한참 흐른 후였던 것 같다.



은, 참 미국 시장 주류와 인연이 없었다. 언론으로부터의

야박한 평가도 이와 연관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 음악 시장의

메인스트림은 이른바 그래스루츠라고 하는 블루스 계열

코드에 있다. 이들 음악은 상대적으로 블루스의 영향이

약하다. 재즈나 컨트리, 포크와도 멀다.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겠나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루츠가 채우지 않는 빈 자리를 머큐리디콘 멤버들이 클래식,

펑크funk, 뉴웨이브 등으로 메꾸어 드라마틱한 표현성을 중시한

작품을 만들어갔다. 미국에선 절대로 먹히지 못한 창작 문법이다.

대신 미국을 제외한 세상은 항상 프레디를 연호했다. 전 세계

판매고 2억 장이 어디 그냥 나올 기록이겠는가.



 (The Great Pretender, single)




포스팅의 주인공인 머큐리가 피아니스트이고 일렉트릭 피아노

싫어한 반면 신디사이저는 꽤 다룬 성향인지라 상세히 들고 파진

못했는데, 사실 사운드의 핵심적 매력은 메이가 연주한 특별한

일렉트릭 기타 레드 스페셜에 있다. Danelectro Shorthorn

비슷하게 생긴 기타는 참 특별한 것이, 메이가 음악을 시작할

무렵 무려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악기이기 때문이다.



http://www.queenconcerts.com/instruments/piano.html



독특한 보드와 픽업 디자인을 거친 탓인지 다른 기타리스트

누구보다 그의 톤은 특별하고 이채로워 음색 만으로도 그가

연주한 것임을 구분할 수 있다. 또한 탈 블루스 성향이면서도

클래식하고 글램스러운 의 사운드에 여지없이 어울리는

톤이기도 하다. 세간의 박한 평가의 이면에 뭔가 이질적인

기타 톤까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일까.



(Steinway Concert Grand)



(Red Special)






첫 히트작 킬러퀸이나 바이시클 레이스처럼 머큐리가 작곡한

트랙들을 보면 수십 년 전 벌레스크 쇼뮤직 홀 사운드를 듣는

홍키통크 피아노가 중심이 된 살롱 음악이 연상된다. 아마도

그가 겪은 유년 시절의 추억과 연관이 있을 터이다. 살롱의 낡은

피아노에 맞추어 화려한 가운을 흐느적거리며 끈적한 노래를

부르는 여가수의 모습. 그가 평생 꿈꾼 음악적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굿올패션 러버보이 같은 트랙이야말로 전성기
프레디 머큐리의 섬세한 음악성을 대변할 만한 곡인 듯싶다.
개인적으로 최애하는 곡이기도 하고. 아껴 두었다가 링크를
걸며, 끝으로 그의 열정적 예술혼에 헌사를 바친다. 아름다운
음악을 남겨 많은 사람의 영혼을 구제한 공으로, 저 세상에선
멋쟁이 차림에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행복하게 노래하고 계시.


('Good Old-Fashioned Lover Boy' from A Day at the Race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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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록 불사라 포스팅은 정말 망설여 왔는데

보랩 영화를 봐버렸다. 보지 말걸. 안 할 수 없네.

여기선 영화 얘기만 하고 본격 보컬 스토리는

나중에 할 때가 오겠지..



매우 큰 히트를 치고 있음은 자명하지만

해외 평이 정확해 보이네. 딱 반쪽짜리 작품이다.

아울러 국내 영화 평론가들의 음악적 소양에

다시 한번 절망하기도 하며...



오랜 팬임을 자처하며 평가질 해대는 꼰대

어디 본 블로거 혼자이겠냐마는... 그래도 할 말은

혀야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드러날 터인데.





반쪽 짜리가 정말 딱 적당한 말이네.

전기 영화로서의 함량, 음악 영화로서의 완성도,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해석.. 뭐 여러 가지 관점

다 따져도 반쪽만 익히다 만 것임에 틀림 없겠으나..



특히 다른 곳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한 가지는 꼭

짚고 싶을 따름이오니.. 라미 말렉의 연기를 100%

극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점이다.






100% 싱크로율을 자랑한다고 평가받는 역대 연기를

꼽아볼 수 있다. 링컨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대처의

메릴 스트립이 최근 대표적 사례이겠고 음악가를

다룬 예로는 톰 헐스가 여전히 독보적일 것이다.

세월이 30년 넘게 흘렀음에도...



이쯤 되면 싱크로율이란 개념에 대해 현대의 대중이

어떻게 접근하는지 깊게 고찰해볼 만하다. 단순히

똑같이 재연한다면 그것이 100% 싱크로일까?








현대인들이 링컨의 생전 모습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과연 우리가 목격한 명연기가 싱크로가

맞기는 한 건지 되짚어볼 수 있다. 결국 단순한 재연이란

개념이 얼마나 허상에 가까운 것인지 알 수 있지 않나.



재연이라면 대상의 외양을 피상적으로 구현해내는 데

집착한다는 말이리라. 명연기라고 기억하는 링컨이나

대처는 외양 이전에 인물의 심리와 철학을 분석하여

표현하는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었음을 이해하시라.



적어도 현재까지 외신으로 접한 수준의 보도로 보면

라미 말렉의 곁은 무브먼트 코치가 지켜온 듯하다.

공연 중 보여준 프레디의 스테이지 모션이 너무

독창적이기에 나온 결정인 것 같긴 하다.






그런데 결국 거기까지만 보여주고 용두사미처럼

끝나 버린 것 아닌가 싶다. 몸짓을 복사하는 것까지만.

프레디란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 약간 패션모델 비슷하

몸의 선을 중시하는 무브먼트, 그것이 다는 아니지 않은가.



프레디의 정체성과 카리스마, 그리고 그것과 복잡하게

한몸처럼 엮여 있는 컴플렉스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페르시아 민족 계열 이민자 출신의 영국 아웃사이더란 것이

하나, 또 하나는 다들 알다시피 바이 양성애자란 것이다.






그에게 어린 시절의 컴플렉스를 선사한 이국적 두상과

용모는 사실 그의 민족 정체성인 파르시 종족의 특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전통을 중시하는

가부장적 페르시아 아버지 세대와의 갈등이 청소년기

억압적 가치관 형성에 기여했을 터이고.



여기에다가 유년기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 자각해온,

뭔가 다른 성적 정체성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킨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완벽한 재현으로 해석되는

(아버지를 죽였다고 어머니께 고백하는 첫 소절..)

보랩의 가사와 프레디의 철학은 이렇게 형성된 것.



바이 영국 이민자라는 아이덴티티가 곧 프레디인 셈.

단순 무브먼트에 치중한 듯한 디렉션이 뭔가 의아하고

쉽게 와닿지 않는다고 느끼는 요점이 이것이다.





무브먼트 자체도 그렇다. 프레디의 독창적 몸짓을

응원단 치어리딩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탄탄한 발레 기본기에서 나온 거란 점...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라미의 저 액션이 그냥 투박한 치어리딩에서 온 것인가

발레의 기본기에서 나온 것인가, 되게 고민고민하면서

본 장면이 사실 많았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꽤 의아-궁금했음이 솔직한 심정..






흔히 프레디의 배나온 중년 콧수염 아저씨 시절로

기억되는 80년대 초중반 몸매도 발레 레슨에서 나온

산물임을 상기한다면, 그의 무브먼트에 대해 깊이를

갖고 접근한 것인지 한번쯤 회의적인 시각을 들이댈

수밖에 없을 터이다.



(80년대의 프레디는 발레와 오페라 레슨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많은 사람이 모르지만.

그만큼 감각을 갈고 닦기 위해 노력했다.)



아래는 역대 가장 기이한 코스튬 사이로 비집고 나온

프레디의 육덕진 몸매를 적나라하게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 뮤직 비디오.. 1984년 The Works 앨범에서..






프레디는 사실 원래부터 육체의 곡선을 드러내는데

실로 열성적인 집착을 보여준 아티스트인 것이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탐미적 기호랄까.



또 하나의 기벽을 폭발시킨 뮤직 비디오

(무려 멤버 전원의 성별을 역전시킨..)

I Want to Break Free.. 같은 앨범..






라미와 프레디의 체형이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살짝 통통한 80년대 몸매로 세밀하게

다잡고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크다.



80년대는 프레디의 인생에서 참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앞둔 마지막 10년이었고 처음으로

에이즈 감염 사실을 확인하였기에 더더욱 섹스와

연애와 생에 집착한 복잡한 시절이었으니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라미의 목소리이다.

물론 말할 때 목소리. (극중 노래 목소리의 99%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레디 본인의 아카이브와

마크 마텔을 적정 배합한 것이다.)



쉰 듯한 반가성을 많이 섞은 톤으로 해석의 기준을

잡았는데 이걸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해석이 뭐지? 성적으로 뭔가 모호한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캐릭터란 느낌을 주고 싶었나?



(상당히 남아 있는 프레디의 평소 대화 녹화분을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말할 때 목소리도

노래와 비슷하게 명료하고 또렷한 질감이었고

영화처럼 거칠고 투박한 팀버는 아니었다고.)







그런데 실제 프레디가 생의 절반을 넘기고도 아직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사람이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는 확고부동한 주관을 가진

살짝 고집불통에 가까웠다. 패션이나 무용계의

까다로운 예술가 스테레오타입에 더 가까웠지..



물론 그의 삶은 섹스와 파티로 가득 차 있었다.

프레디의 실제 삶을 제대로 묘사한다면 여지없이

X등급을 받을 거라고 멤버들이 전했을 정도이니.

(단, 마약과의 연관성은 크지 않은 것 같고

그의 중독성은 술과 담배 쪽이었다고... 특히

담배는ㅠ.. 그의 대부분 삑사리가 흡연 때문..)



즉, 고민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당당한 바이 섹슈얼의 사생활을 산 사람이었다.

라미의 목소리와 해석에, 불안한 미래를 꿈꾼

20대 시절 연기를 빼고 절반 밖에 동의가 안

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http://ultimateclassicrock.com/bohemian-rhapsody-movie-hetwashing/




이쯤 되면 라미의 LGBT 해석 전체에 살짝 의문을

품게 된다. 생의 전반에 걸쳐 자신의 게이 라이프에

고민하는 예술가의 스테레오타입이라면 프레디보다

차이코프스키의 삶에 더 가까운 듯한데... 이러면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된 것 아닌감...



더구나 게이 브라이언 싱어가 이런 디렉션을 줬다고..?

이 부분에서 더더욱 의뭉스럽네. 싱어가 중간에 하차한

이유가 대략 어디서 발화했는지도 감이 오고.






브라이언 메이로저 테일러 같은 분은 연예계에서

거물이기에 동료 전기 영화의 묘사에 이러쿵저러쿵

참견했을 것 같고 아마도 싱어 같은 사람도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 여러 번 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왜.. 예전부터 메이와 테일러는 프레디의 인생을

실제에 가깝도록 19금으로 묘사하는데 반대하지

않았던가.. 이런 의견을 갖고 있는 원로들이 이런

저런 의견으로 도움이랍시고 던지는 상황이라면,

방향 잡기가 참 혼란스러웠을 터...






그렇지.. 프레디는 엄청 '척' 하고 산 사람이다.

바이가 아닌 척, 이민 2세대가 아닌 척, 즉 진퉁

영국인인 척.. 사실 모두 알면서 쉬쉬한 거지만.

 노래, 그래서 나름 프레디의 인생곡이다.



아래는 프레디 솔로 프로젝트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타임.. 의외로 많이들 모르셔서.






네네... 길게 썼는데 두세 줄 요약..

라미 연기 이해 안 되고 영화는 반쪽 완성도.

연예인도 나이 들면 꼰대가 되야 하나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들어줘 감사해요.



역사상 전무후무한 보컬리스트라서

보컬 이야기하려면 큰 각오가 필요하다.

나중에 하자. 원 참, 황망스럽기는.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html


https://digitaldreamdoor.com/pages/best_vocalists-fe-rr.html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lists/100-greatest-singers-of-all-time-147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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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먹는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이 사람을 지금 짚어내지 않으면 머리 속에서
사라질 것 같아 두려운 뮤지션을 기어코 소개해야겠다.


보컬의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은,
거의 100%에 가까운 연주型 프로그레시브 락밴드
킹 크림슨...


킹 크림슨에서 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함께 하고 있는 보컬리스트 겸 기타리스트...
에이드리안 벨류 Adrian Belew 이다.



발음이 어려운 그의 라스트 네임은
'Belew = 벨류'라고 쓰고 '벌루'와 '벌류'의
중간 정도 음가로 읽으면 된다.
'벌'도 사실은 '블'에 가깝다.


프로그레시브 락밴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이 카테고리를 통해
다루고 싶은 것이 본 블로거의 맘이긴 하지만...
쉽지는 않다. - 왜냐하면 의외로 이 장르의 세계에서
프로페셔널하고 또 데디케이티드한..
이른바 전업 보컬리스트가 적기 때문이다.


이미 다룬 바 있는 존 앤더슨 정도가
정말 흔치 않은 전업 보컬리스트 정도이고
여성으로서는 애니 헤이슬럼 정도가 꼽힌다.
연주를 중심으로 하는 장르의 특성 때문이리라.
아, 피터 가브리엘도 있겠다.


존 앤더슨..


애니 헤이슬럼..


피터 가브리엘..



이 장르의 음악은 그나마 보컬이 필요할 경우에는
그래서 연주자가 악기를 치면서 노래를 한다.
그러나 -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
악기를 연주하면서 동시에 노래한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노동이다.


에이드리안 벨류는 물론 보컬리스트 이전에
대단히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기타리스트이다.
그는 프랭크 자파, 데이빗 보위, 토킹 헤즈 등과 작업했다.
(대충 성향이 파악되지 않는가...)


벨류가 킹 크림슨과 함께 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였다.
이 시기는 밴드의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80년대 4기 시절의 젊은 벨류...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당시 킹 크림슨은 이미 로버트 프립
창작과 프로듀싱 전반에서 전권을 굳힌 단계였고
꾸준히 발표한 앨범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었으나
지나치게 크게 히트한 데뷔 앨범의 영향력을 벗지는 못하여
창작 과정에서 다소간의 난항에 봉착한 시점이었다.


또한 시대가 바뀌어 디스코나 펑크의 새로운 리듬
사람들의 귀 뿐만 아니라 시선을 사로잡던 시기였고
뉴웨이브나 뉴에이지의 새로운 창작적 트렌드는
전통적인 프로그레시브 뮤지션들에게 더 이상
'진보성(progressiveness)'이라는 영예를 허락하지 않았다.


킹 크림슨을 논하면서 로버트 프립을 빼놓을 수는 없는데
기실 프립의 플레이는 학구적이고 실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는 카리스마는 0.2% 부족하여
데이빗 길모어스티브 하우 스타일은 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파트와 온전하게 혼연일체할 때에 빛이 발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어떤 게스트가 그와 함께 협연하는가
하는 문제가 밴드 운영의 첫머리에 늘 대두되곤 했다.


중년기의 로버트 프립...


연주모드 벨류...



그나마 이렇게 프립이 있는 듯 없는 듯한
카리스마로 밴드를 주도하며 라이브를 이끈 것도
70년대 후반까지만 통했던 것 같고
78~79년부터 불어닥친 새로운 음악의 흐름
킹 크림슨을 더 이상 그들답지 못하게 막았다.


그 시기는 디스코와 펑크에서 촉발된
클럽형 댄스음악이 주류로 급부상
하던 때였고
현대 대중음악의 뿌리가 되는 흑인음악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상업적인 껍데기가 백인들에 의해
메이저 음악으로 둔갑
하던 시기였다.


흑인음악의 원류를 찾아 진솔하게 음악을 탐구하는
재즈 및 블루스 씬의 열정도 한풀 꺾이던 시기였고
클래식 음악에서 원류를 탐사해 보려던 프로그레시브
아티스트들의 노력도 약발이 떨어져 가던 시기였던 셈이다.


키스 에머슨이나 릭 웨이크만반젤리스 등 선구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탐구한 신디사이징 사운드의 진실도
80년대에는 단순화한 비트에 뉴웨이브 사운드의 광풍에
모래폭풍 닥친 듯이 묻혀버려야 했던 형국이다.
오죽하면 예스90125 같은 앨범을 냈겠는가...


고뇌하는 스타일의 프립...ㅋ


79년 무렵 벨류...



이런 시대상황... 다소 암울했던 것인데
로버트 프립은 나름 수퍼멤버의 기용을 통해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 했다.


80년대에는 유달리 수퍼밴드가 많았다.
앞에서 얘기한 이런저런 시장환경으로 인해
아티스트들이 멤버 간의 합종연횡을 통해
상업적 난관을 타개해 보려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80년대 버젼의 킹 크림슨 라인업은
그들 버젼의 수퍼밴드였던 셈이다.


이렇게 해서 프립의 곁은 전설의 드러머 빌 브루포드가 지켰고
무시무시한 실력을 가진 베이시스트 토니 레빈이 등장했으며
그리고 기타와 보컬을 겸하는 에이드리안 벨류가 합류했다.
이른바 킹 크림슨 4기... 환상의 라인업이란 이런 것인가...


레전드.. 빌 브루포드


공포의 엄지.. 토니 레빈



프립이 처음부터 킹 크림슨의 이름으로
이 새 출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주요 목적은 브루포드를 꼬셔내는(ㅎ) 것이었고
디시플린이란 전혀 다른 프로젝트 밴드로 출범했다.
나중에 Discipline은 앨범과 트랙의 제목이 되기도 했다.


사실 킹 크림슨은, 곧 로버트 프립
한 번도 세컨드 기타를 밴드에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퍼커셔니스트에 대한 욕심이 항상 컸던 것 같다.)
이는 당시의 달라진 환경에서 전혀 새로운 관점을 빌어
혁신적인 사운드를 구축해 보고자 했던
그의 욕망의 발현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 새로운 사운드는 라이브에서 생소한 패턴으로
기존의 락음악을 해석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는데
브루포드레빈이 일렉트로닉한 베이스/리듬을
책임지면서 뉴웨이브를 방불케 하는 기본을 깔아주고
프립벨류전혀 트윈스럽지 않고 서로 완전히 이질적인
보이싱을 담아 패시지를 전개해 나간... 그런 패턴이었다.


일렉트릭을 많이 쓴 브루포드의 세팅...


또 하나의 화려한 세팅... ㅎㄷㄷ



이런 패턴의 셋업에서 네 개의 각 파트는
적정한 에코와 이펙트에 의해 맛깔나게 확성되어
키보드를 쓰지 않았음에도 모든 소리가 뉴웨이브스럽게
신디사이징되는 매우 80년대적인 효과를 낳았다고 본다.


실제로 Three of a Perfect Pair 앨범에서 가장 히트한
Sleepless 같은 트랙은 유리드믹스휴먼 리그를 생각나게 하는
매우 뉴웨이브스러운 몽환적 사운드로 가득차 있어 매력적이다.
특히 이 트랙에서 브루포드레빈이 만들어 내는
폴리리드믹한 베이스 비트는 대단히 환상적이다.


이런 사운드의 창조를 통해 킹 크림슨
그들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낸 셈이었으며
두 대의 기타가 뿜어내는 이질적 앙상블은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이후 90년대 중반의 5기 라인업 때에는
두 대의 기타 + 두 대의 퍼커션 + 베이스와 채프먼 스틱이라는
파격적인 편성으로 이 패턴을 확대 재생산해 나갔다.


유리드믹스.. 90년대쯤일 거다..


휴먼 리그.. 80년대 전성기..



벨류다소 설익지만 관능적인 보이스 컬러
새롭게 창조한 모던한 판타지를 해석하는 데에
제격인 목소리와 가사를 제공하였다.
실제 라이브의 소리를 들어보면 어딘지
데이빗 보위의 냄새도 짙게 난다.
레빈과 들려주는 하모니도 썩 훌륭하다.


벨류의 보컬이 멋지게 등장하는 트랙으로는
Sleepless, Frame by Frame, Elephant Talk(랩?ㅋ),
Three of a Perfect Pair, Discipline 등이 있다.
이 중 Sleepless의 관능미와 Frame by Frame의 서정성이
Three of a Perfect Pair같은 경우 3박자의 이국적 프레이즈가
프립의 손끝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히트 트랙이다.
발라드처럼 달콤한 Matte Kudasai(일본말)도 괜찮다.


요즘의 벨류 모습..



이 모든 작품에서 프립은 키노트 플레이어로서
중심 프레이징의 시작과 끝을 스스로 책임져 왔다.
킹 크림슨의 모든 것은 그에게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꼭 그것이 정답이 아닌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 라이브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앉아서(!)
연주에 전념하는 로버트 프립의 빈 자리를 채워줄,
에이드리안 벨류와 같은 연주자의 자리는 크다고 하겠다.
전체적인 내용이 주로 프립과 연주 패턴에 치중하긴 했지만
본 포스트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킹 크림슨의 화려한
시절을 함께 채워준 주변 연주자의 중요성이라고 하겠다.


데뷔 무렵의 프립..



요리하는 자가 있으면 설겆이하는 자가 있게 마련이고
받쳐주는 병사가 없으면 장군은 홀로 싸울 수 없다...는 것,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싶었다.


기회가 오면 70년대의 킹 크림슨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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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러쉬가 갑자기 왜 락으로 둔갑하냐고
볼멘소리 하는 분들도 있겠으나...
그냥 쉽게 쉽게 가자.. 어차피 본 블로거 맘이다.ㅎ


예상했겠지만..
이 포스팅은 순전히 (The) Power of Love
한 트랙만을 딥따 들이파는 시간으로 마련하였다.
본 블로거의 젊은 시절을 지배한 싱글 중 하나인지라...ㅎㅎ
(그리고 이 노래는 엄연히 가스펠이고 락이지 않은가?)


사랑의 힘이라고 번역되는 이 위대한 싱글은
한 젊은이의 창조적 가창력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다.
제니퍼 러쉬 Jennifer Rush 되시겠다.



위키피디아에서 Power of Love를 찾아보면
괄호 열고 Jennifer Rush song이라는 친절한 부제가 달려 있다.
Power of Love라는 노래가 꽤 여러 종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제니퍼 러쉬는 이 노래의 창작에도 상당히 관여했기 때문에
이렇게 대표 저작자로서 취급을 받아도 타당하다고 본다.


제니퍼 러쉬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ㅋ
작곡할 때 어디서 개입을 했을지 상상해 보면 답이 나오는 듯하다.
대략만 세어봐도 대여섯 군데는 나오는데, 후렴구만 보더라도...


1) 유명한 'Cause I am your lady~ 하는 상승 프레이즈..
2) 이어 And you are my man~의 끝부분 처리하는 기교..
3) Whenever you reach for me~에서 가장 높은 음 reach..
4) We're heading for something~에서 가장 높은 음 head..
5) Somewhere I've never been~의 강조하는 somewhere I..
  (이건 끝부분 fading out할 때 직전에만 등장..)


2)는 자신이 잘 하는 R&B 스타일을 추구하다 보니 넣었을 테고
3), 4), 5)는 모두 자신의 최고음을 질러줘야 하는 부분이니
당연히 보컬리스트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을 리 없다.
1)은 악기로 치면 그냥 밋밋한 부분이고 노래로 가사와 어울려야만
완벽하게 맛이 사는 파트일 터이다..


이렇게 신비로운 자태도 있군...



제니퍼 러쉬는 60년 쥐띠 生이다.
이 노래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는 (85년 6월)
갓 스물 다섯이 된 꽃처녀였던 셈이다.
창조적인 해석능력이 극에 달해 있을 때
나온 작품일 것이니... 그래서 秀作인 것이다.


그의 본명은 하이디 스턴.. 음악가 가문의 딸이다.
아버지는 오페라 가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오빠들도 뮤지션이다.
폭발적인 가창력과 풍부한 성량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받은 셈이다.
뉴욕에서 나고 자랐지만 독일에서도 성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딘지 기품이 있는 음색은 다분히 유럽적인 것이다.


한창 20대 시절의 러쉬... 고혹적이다.



80년대 중반에 발표된 이 싱글은 속된 말로 대박을 쳤다.
싱글로서 1위를 차지한 나라의 차트만 세어봐도,
영국을 필두로, 아일랜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바다 건너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에 이르고...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 스웨덴에서도 히트를 기록했다.


유일하게 별 재미를 못본 나라가... 미국이었다.
싱글 차트 TOP 40를 진입하지 못했으니... 안타깝다.
그러나 분명 미국 시장을 제외하고 1985년
제니퍼 러쉬가 주도한 시장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당시 황인용의 영팝스에서도 많이 틀어 주었었다..


아메리칸, 유러피안? 이국적인 외모..



한창 때 가냘픈 러쉬...



제니퍼 러쉬가 이루지 못한 미국 차트 진입의 꿈은
2년 후 로라 브래니건이 해냈다. 1987년..
Gloria로 엄청 히트했지만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려야 했던
브래니건이 아닌가? 어찌 보면 불행한 가수였다.


글로리아의 후광을 벗어 던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건만
이후 대중적인 이미지를 전환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마이클 볼튼과 연합하여 How am I Supposed to Live without You
같은 노래도 발표하지 않았던가... R.I.P. 로라 브래니건..


브래니건이 부른 사랑의 힘은 참으로 절절하다.
허스키라면 절대 뒤지지 않는 이 알토 아가씨...
가끔 삑사리도 냈지만 전체적으로 러쉬가 발견하지 못한
거칠고 질곡많은 애절함의 정서를 표현해 내는 데 성공했다.


로라 브래니건.. 애잔해 보인다.



현대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 노래의 버젼은
셀린느 디온의 1993년 싱글일 터이다.
이 노래를 그나마 알기라도 하는 지금 세대는
디온의 노래인 줄 알고 있겠지...


디온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유럽적인 스타일을 가진
디바이다. 그래서 절정의 가창력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뽐내듯이 이 작품을 해석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본 블로거 개인적으로는
너무 완벽한 디온의 버젼이 싫을 때도 있음이 사실이다.
제니퍼 러쉬가 90을 완성한 후에 10을 더한 셀린느 디온이라..
약간 얌체스러운 듯하여 좀 그렇다. 사견이다 물론..


물론 상업적인 성공은 이 버젼이 가장 크게 기록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그토록 염원하던 1위를 달성했다.
유럽 시장에서는... 의외로 아주 폭발적이지는 못했다.
확실히 유럽인들의 취향에는 러쉬가 더 제격이다.


이 시절 디온이 가장 예쁜 것 같다.



남성 보컬리스트들도 이 노래를 많이 불렀다.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건 에어 서플라이의 싱글일 것이다.


남자들이 부를 때 한 가지 낯뜨거운 점은
'I am your lady' 하는 가사를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다.
러셀 히치콕은 재치있게 이렇게 바꿨다.
'Cause you are my lady... And I am your man...


신선하지 않은가?
이후로 이 가사는 남자가 부르는 Power of Love
표준 버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한창 때 두 러셀... 뽀글 파마..



에어 서플라이는 (= 러셀 히치콕은)
파워 발라드의 황제라고 왠만큼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Power of Love는
별 재미를 못 보았다. 밋밋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오페라 가수인지 팝페라 테너인지 요새 정말 헷갈리는
안드레아 보첼리는 러셀 히치콕 이후 남성 버젼을
가장 완성도 있게 소화한 보컬리스트인 것 같다.
영어가 좀 어색하지만 그래도 매끄럽게 불렀다.


그는 점잖다... 뭐, 성악가니까..



거듭 주장하지만 이 노래는 엄연히
락 발라드의 계열에 속하는 창법을 자랑한다.
'I am your lady' 하는 낯뜨거운 가사를 꿀꺽 삼킬 수만 있다면
왠만한 하드락 보컬리스트들이 한 번쯤 시도해 볼만하다.


20대 시절 라이브인 것 같다.



이 노래가 가진 이런 강점과 매력은
(오로지 이 한 곡을 위해 쏟아부어 낸 듯한)
스물 다섯 젊은 보컬리스트 제니퍼 러쉬
창조적인 해석능력이 없었다면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팝락을 추구하는 후배 가수들이
한 번쯤은 Power of Love를 시도해 보려고 무던히도
애쓰고 있다고, 본 블로거는 힘주어 주장한다.


곱게 늙어가시는 러쉬 누님의 최근 라이브..



고음 높이 올라가기 비교는 참 1차원적이지만
각 버젼의 코드가 상이하여 심심풀이로 비교해 봤다.
제니퍼 러쉬A Major, 셀린느 디온A flat Major,
로라 브래니건F Major, 러셀 히치콕안드레아 보첼리
E flat Major였군... 물론 모두 레코딩 上의 음높이이다.


제니퍼 러쉬의 음높이가 가장 높아 놀라왔다.
셀린느 디온이 제일 높을 줄 알았는데...
하이 테너인 보첼리가 참 꽤나 높이 올라가는군.
그냥 참고로... 재밌으라고... ㅎㅎ (퍽!)
믿기지 않으면 유투브로 비교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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